반정의 예방조치
정조의 즉위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를 죽인 노론은 정조가 세자로 책봉되자 그마저도 살해하려 했으며, 실제로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물론 그들은 그가 즉위한 다음에 있을 정치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때 정조를 구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은 홍국영(洪國榮, 1748~81)이라는 자였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중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입장에 따라 분열하는 것은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생리다. 장헌세자의 죽음을 두고도 노론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매파는 벽파(僻派)를 이루었고 그 사건을 안타까이 여기는 비둘기파는 시파(時派)로 분류되었는데, 시파에는 옛 소론과 남인의 세력까지 가세했다. 소수였기에 ‘치우친 파’, 즉 벽파라고 불리게 된 노론 강경파지만 아직 영조(英祖)의 치하에서는 엄연한 여당이다. 따라서 1775년 정조가 영조(英祖)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그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정조(正祖)의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하고 나선 인물은 홍인한(洪麟漢, 1722~76)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장헌세자의 장인(경의왕후의 친정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1713~78)의 동생이니까 정조에게는 외종조부가 되는 자였다(하긴, 홍봉한도 사위의 죽음에 나몰라라 하다가 영조가 아들을 추존하는 것을 보고 그 분위기를 이용해서 잽싸게 사위의 반대파를 탄핵하고 나섰으니, 장헌세자는 처가 복도 어지간히 없었던 셈이다). 그는 정조(正祖)가 즉위할 경우 권신으로서 누렸던 자신의 권력이 위축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자기 외손주가 왕으로 즉위하는 것조차 반대했을 만큼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의 권력욕은 병적이었다】. 그들이 채택한 전략은 전과 다름없다. 즉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갈 때와 똑같이 정조의 비행을 조작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죽인 똑같은 전략에 자신마저 당할 바보 아들은 없다. 더욱이 팔순에 접어든 영조는 자식에 이어 손주까지 죽일 마음이 없는 데다 달리 후사도 없었으니 벽파의 판단은 여러모로 어리석은 것이었다. 홍인한을 보스로 하는 홍상간(洪相簡, 1745~77), 정후겸(鄭厚謙, 1749~76) 등 모리배들의 책동이 노골화되자 정조(正祖)는 측근을 만들어 대처했는데, 그가 바로 홍국영이었다. 어차피 영조가 죽으면 정조의 치세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던 그는 그 이듬해인 1776년에 벽파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선제 공격에 나서서 그들을 탄핵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 해에 영조가 죽었으니 그의 선택은 탁월했던 셈이다.
전자제품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지만 홍국영의 선택은 그의 삶을 4년만 좌우했다. 정조가 즉위한 뒤 비서실장에다 경호실장까지 도맡아서 권세를 누리던 그는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후사를 만들려 하다가 실패하자(그의 누이는 곧 죽었다) 계속해서 정조(正祖)의 조카를 누이의 양자로 삼으려 했다가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고 만다. 누이를 죽인 범인이 정순왕후라고 판단한 그는 왕후를 독살하려 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실각했다. 홍국영의 집권은 장차 정조 사후에 등장하게 될 조선 사대부(士大夫) 정치의 최후이자 최악의 산물인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전조였으나, 그건 나중의 일이고 일단 홍국영을 제거함으로써 정조는 완벽한 친정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더욱이 홍국영이 대신해준 노론 강경파의 숙청은 그가 혁신 정치를 펼치기 위한 좋은 무대를 갖춰준 셈이 되었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죽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야당이 되었을 뿐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시대가 바뀌는데도 그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전가의 보도처럼 간직하고 사대부가 지배하던 그때 그 시절의 영화를 꿈꾸며 가만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서얼 출신을 중앙 관직에 끌어들이는 정조는 기본적인 법도조차 모르는 무식한 왕이었고, 청나라에서 선진 문물을 줄기차게 도입하는 북학파 실학자들은 금수나 다름 없는 자들이었으며(인물성이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소장파 노론은 일부 철없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700년 전 송나라의 주희(朱熹)처럼, 오랑캐 세상은 본질적으로 기(氣)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잠시 판치다가 결국에는 이(理)에 입각한 중화 세상으로 돌아오는 게 순리이자 천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1800년 전 나날이 치솟는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로마를 제국화하려는 카이사르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로마 원로원의 시선이 바로 그들의 눈초리가 아니었을까?
▲ 마지막 실험자 아버지의 해원이라는 숙제와 사대부(士大夫) 체제에 대한 적대감은 왕정복고를 꾀하는 정조(正祖)에게 원동력인 동시에 걸림돌이었다. 처음에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성리학적 세계관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감한 개방과 개혁을 시도했다가 나중에는 복고로 돌아서서 오랜만의 왕정복고를 결국 실패로 만든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정조(正祖)도 뒤통수에 꽂히는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몰랐을 리 없다. 아마 그도 익히 알고 있었겠지만, 사대부(士大夫)들이 왕권에 도전할 때 가장 우려할 사태는 단 한 가지, 반정(反正)뿐이다. 왕이 허수아비일 때 사대부들은 자기들끼리 권력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는데, 그 경우 그들이 구사하는 수단은 언제나 말만의 역모다. 수많은 당쟁에서 보았듯이 한 편이 다른 편을 역모로 엮어 왕의 이름을 빌려 처벌하는 식이다. 그러나 왕이 왕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는 말만의 역모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도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된다. 그게 실패하면 반란이 되고 성공하면 반정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사대부들이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경우는 모두 세 차례가 있었다. 그 중 이인좌의 난은 실패한 반란으로 끝났고 나머지 두 차례는 각각 중종반정(中宗反正)과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사대부가 승리한 경우였다. 따라서 정조(正祖)가 대비할 것은 반정의 예방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1785년 정조는 국왕을 특별히 수호하는 친위대를 만들고 이것을 장용위(壯勇衛)라 불렀다. 규장각(奎章閣)과 마찬가지로 장용위도 일찍이 세조가 처음 설치한 군대였으니, 여기서도 정조가 세조(世祖)를 왕다운 왕으로 여기고 자신의 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세조(世祖)가 처음 설치할 때의 이름은 장용대(壯勇隊)였다. 이 장용대의 병사들은 무술에 능한 천인들로만 뽑았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오늘날 유사시에 적진 깊숙이 파견되는 특수 부대도 전과자들처럼 일반 군대에는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로 구성하듯이, 장용대 역시 국왕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경우 목숨을 걸고 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름도 신분도 없는 결사특공대인 셈인데,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世祖)였기에 반대파의 책동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그렇듯 강력한 친위대가 필요했을 터이다. 성종 때 이름이 장용위로 바뀌면서 양인들도 포함시키게 되는데, 곧이어 조선이 사대부 체제로 바뀌면서 이 군대는 존재의 의미를 잃고 유명무실해졌다】.
1793년 그는 장용위를 확대 개편해서 장용영(壯勇營)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데 그가 이 시점에서 갑자기 군대를 신설한 이유는 뭘까? 그것도 하필 친위대를, 비중화세계의 도전이 거세었던 16세기 이전이라면 몰라도, 또 비록 허망한 환상이나마 청나라에 대한 ‘북벌’을 획책하던 무렵이라면 몰라도 이제 조선에서는 군대의 필요성이 사실상 없어졌다. 동북아가 비중화세계로 바뀌면서 해안을 주름잡던 왜구도, 북방을 괴롭히던 여진족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중화세계가 중심이었을 때 왜구와 여진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 애썼으나 이제는 문명의 수준이 역전되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 설사 군대가 필요하다 해도 국방용이 아닌 친위대를 굳이 신설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정조(正祖)가 장용영을 설치한 의도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대부(士大夫)들의 반란, 좁게 말하면 노론 벽파의 준동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조선 역사상 세 번째의 반정을 예방하기 위한 조처다.
그러나 장용영의 기능은 그것만이 아니다.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내영은 설립 취지에 걸맞게 도성을 수비하는 군대니까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외영의 임무는 아주 색다르다. 이 군대는 엉뚱하게도 수원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왜 느닷없이 수원일까? 일단 장헌세자의 능이 수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정조(正祖)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현륭원(顯隆園, 지금의 융릉隆陵)의 방비를 외영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효자라고 해도 친위대의 절반을 할당하면서까지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게 한다는 게 과연 이치에 맞는 발상일까?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정조(正祖)가 수원에 보인 애착은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우선 그는 그 전까지 수원부(水原府)로 불리던 이곳을 부사(府使)가 관장하는 곳에서 유수(留守)가 관장하는 곳으로 승격시키고 화성(華城)으로 개칭했다(오늘날로 치면 광역시로 격상된 것이다). 게다가 정조는 성(지금은 이 성을 화성華城이라고 부른다)을 새로 축조하고 네 개의 대문을 만드는가 하면 여기에 각종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해서 완벽한 신도시로 탈바꿈시켰다. 1794년부터 2년이 넘게 걸린 이 대형 토목공사에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기술자가 동원되었고 100만 냥에 가까운 돈과 1500석의 양곡이 소요되었다. 10년치의 국방 예산을 앞당겨 쓰면서까지 그가 화성의 축조를 서두른 이유는 뭘까? 수원의 4대문에 서울의 4대문에도 없는 삼엄한 방어 시설까지 갖춘 이유는 뭘까?
일단 추측할 수 있는 해답은 혹시 정조(正祖)가 수원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도읍을 옮긴 경우는 한 차례도 없을뿐더러 천도의 계획조차 반란 세력이라면 몰라도 국왕이 구상한 적은 없었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정조가 종묘 사직을 버리고 수원 천도를 결행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수원에 정성을 들인 이유는 한 가지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바로 대피처의 기능이다. 반정을 걱정한 그는 만약 노론 벽파가 실력 행사에 나설 경우, 그리고 그들의 거사가 성공해서 한양을 빼앗겼을 경우 화성으로 대피할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친위대인 장용영(壯勇營)의 일부를 화성의 수비 병력에 할당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능을 지킨다는 것은 명분이었으리라.
▲ 또 하나의 도성 정조가 축성한 화성의 모습이다. 한양의 도성에도 없는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정조는 아마 자신의 개혁에 대한 반발로 내란이 벌어질 경우 대피처이자 임시 수도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장용영의 외영을 그곳에 주둔시킨 것도 마찬가지 목적이리라. 화성의 설계는 정약용이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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