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난국
밖에서는 서양 열강의 군함과 상선들이 돌아다니고 안에서는 백성들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 조선은 점점 총체적인 난국으로 빠져든다. 어찌 보면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한 탓만도 아니다. 환곡의 폐단을 없앨 방법을 모색하고, 뇌물을 받는 지방관에게 가중처벌법을 적용하고, 방납(防納)【방납이란 조선 초부터 성행한 것으로서, 중앙 관청의 서리들이 지방에서 올라 오는 공물을 가지고 농간을 부려 이익을 사취하는 행위다. 그 절차를 보면,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을 갖가지 구실을 달아 퇴짜를 놓은 다음 공물 납부를 대행해주겠다면서 그 과정에서 떡고물을 받아 먹는 식이다. 물론 불법이지만 정부에서는 서리들에게 따로 급료를 주지 않았으므로 알고서도 묵인해주었으니 관례나 다름없었다(말하자면 ‘공인된 불법’인 셈인데, 이것도 조선사회에 고질적인 체제 모순의 하나다). 광해군(光海君) 때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된 이후 이런 폐단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에 들어 중앙권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을 금지하는 등 조정에서는 나름대로 개혁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물론 사정은 수십 년 전과 또 달라져서 이제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개혁이 아니라 생존이 달린 개혁이다). 하지만 조선의 병은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수백 년째 내려온 체제 모순이 집적된 결과였으니 슈퍼맨이 나타난다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1862년 2월 드디어 가장 우려했던 사태가 터졌다. 사회적 피라미드의 맨 아래층에 있는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50년 전 홍경래(洪景來)의 꿈이 부활한 걸까? 하지만 사태는 그때보다. 더 심각하다. 그때는 조선시대 내내 지역 차별을 당하던 서북인들이 봉기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회의 중추에 해당하는 남도인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봉기를 구상하고 준비한 거사 주체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조차도 없이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문제는 고질화된 지방관의 학정에 있었다. 경상도 우병사(右兵使)인 백낙신(白樂莘)이 미리 국고를 삥땅쳐먹고 진주 농민들에게 호별로 부담금을 할당해서 메우려 한 게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이다(이런 방식을 도결이라 부르는데, 앞에 나온 방납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서리들이 주로 쓰는 편법이었으나 이제 정식 지방관까지 가세할 만큼 사회가 부패해 있었다). 이에 격분한 유계춘(柳繼春, ?~1862)이라는 농민은 동네 장정들을 모아 거사를 급조하는데, 이것이 진주민란(晉州民亂)이라 알려진 사건이다. 조선 역사상 변방의 장수나 사대부(士大夫), 혹은 산적 두목이 반란을 일으킨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기층 민중이 학정에 못 이겨 들고 일어난 경우는 처음이다.
불과 며칠 만의 모의로 거사한 것치고는 상당히 면밀하고 조직적인 봉기였다. 시위대는 우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근의 장터로 달려가서 장을 취소하고 규모를 불렸다. 초군(樵軍, 나무꾼 부대)이라는 이름으로 자칭한 것에 어울리게 그들은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르고 농기구를 무기로 움켜쥐었으니, 오늘날 역사 기록화에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농민군의 모습이다. 게다가 그들은 봉기에 불참하는 농민들에게서는 벌금을 받고 반대하는 농민들에게는 보복을 가하는 등 급조된 시위대답지 않은 노련미를 과시했다. 이렇게 해서 수가 크게 늘어난 농민군은 곧바로 진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최종 목표가 그것일 수밖에 없다는 게 애초부터의 한계였다.
백낙신에게서 도결을 철폐한다는 결정을 받아내고, 탐학을 일삼던 그의 부하들과 하급 관리들을 처단하고, 관청과 결탁해서 농민들을 착취하던 부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는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뒤 농민군은 그것에 만족하고 자진 해산했다. 중앙정부에서 사태 수습에 나선 것은 그 다음이다. 안핵사(按覈使, 안핵이란 사태를 진정시키고 실상을 조사한다는 뜻이다)로 파견된 박규수(朴珪壽, 1807~76)는 겨우 나흘 동안에 벌어진 사태를 이후 석 달이나 걸려 수습했는데, 농민들은 유계춘 등 주도자 10명이 참수된 것을 포함해서 약 100명이 처벌받은 데 비해 관리들 중 처벌된 자는 스무명도 채 못 되었으니, 농민군은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고 하겠다【박규수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실학 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인물이었으므로 우리가 보기에는 실망스런 판결이지만, 당시의 체제로서는 불가피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조정에 올린 보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번 진주의 난민들이 소동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전 우병사 백낙신이 탐욕을 부려 침학(侵虐)한 까닭으로 연유한 것이었습니다. …… 난민들의 무도한 행동은 통분스럽습니다만, 진실로 그 이유를 따져보면 실은 스스로 빚은 일입니다.” 원래 안핵사란 난을 수습하기 위해 임명한 임시직책이었던 탓에 책임지기를 꺼려 누구도 맡고 싶어하지 않았으니, 박규수로서는 최대한 성의를 다한 셈이다】.
그러나 한 번 치솟은 민란의 불길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해 9월에는 바다 건너 제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았다. 봉기의 계기도 진주의 경우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어서 이번에는 지방관의 탐학 때문이라기보다는 과중한 세금에 항의하고 나섰으니, 국가의 기틀 자체를 뒤흔드는 사건이다. 산간을 일구어 만든 화전에까지 제주 목사 임헌대(任憲大)가 과도한 세를 부과하자 농민 몇 명이 조세 수납을 담당한 서리의 집을 찾아가 때려 부수고 그동안 받아먹은 뇌물들을 불사른 게 제주민란(濟州民亂)의 신호탄이 된다. 순식간에 1천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폐단을 시정하겠다는 목사의 약속을 받아내고 일단 해산했으나 이제 문제는 단순히 조세에 있지 않다.
이 소식이 제주 인근으로 퍼져 나가면서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늘어난다. 이제 뇌물을 착복한 관리들과 부호들의 집을 때려부수는 것은 기본 코스고, 거기서 더 나아가 농민들은 목사에게 부패의 주범인 서리 다섯 명을 처단하라고까지 요구한다. 농민들의 서슬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목사가 관청을 버리고 도망치자 농민들은 목사 대신 행정을 맡아 처리하니, 10년 뒤 프랑스의 파리에서 생겨나는 코뮌이라는 시민 자치체의 원조격이다. 결국 이듬해 봄에 중앙에서 안핵사가 파견된 뒤에야 사태를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처형된 지방관의 수와 농민 지도부의 수가 스무 명 내외로 엇비슷해졌는데, 이것도 진주민란(晉州民亂)에 비해 진일보한 결과라고 해야 할까?
▲ 난세의 지도 남도에서 민란의 조짐이 커지고 있을 무렵인 1861년 김정호(金正浩)는 오랜 기간 발로 뛴 결실을 얻었다. 최초의 상세한 한반도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탄생한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오늘날의 지도와 대체로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애초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왕위에 올랐던 철종(哲宗)은 재위 중에도 자신의 뜻과는 달리 민란으로 얼룩진 시대를 보내고서 1863년에 죽었다. 그는 익종, 헌종(憲宗)과 달리 서른을 넘겨 살았지만 딸 하나만 두었을 뿐 후사를 남기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철종의 경우에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어 이제는 조정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이제는 공식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왕실의 또 다른 후손을 찾아낸 다음 ‘국왕 과외’를 교습시키고, 그동안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왕을 장가보내 외척을 붙여주고 친정을 하도록 독립시키는 게 그 공식이다.
각본은 있으니 캐스팅만 하면 된다. 대비의 역할은 익종의 과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90)다. 그녀는 오랫동안 시어머니 순원왕후의 그늘에 가려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왕실에서 가장 지체 높은 어른이 되어 있다. 따라서 다음으로 중요한 왕의 캐스팅에 관한 권한은 신정왕후가 지니고 있다(원래의 의미와는 다르지만 이런 게 바로 진짜 ‘캐스팅보트casting vote’가 아닐까?). 조만영(趙萬永)의 딸이므로 우리에게는 ‘조대비’로 잘 알려진 신정왕후는 당연히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에 의해 몰락한 자신의 가문을 부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왕의 캐스팅에 더욱 열심으로 노력한 결과 적임자를 찾아낸다.
순원왕후가 은언군의 후손에서 철종(哲宗)을 발굴해냈다면, 조대비는 은언군의 동생인 은신군(恩信君)을 맥으로 삼았다. 은신군의 손자인 이하응(李昰應, 1820~98)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흔 살이 넘었으니 왕실의 대를 잇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다. 그렇다면 다른 후보를 찾아 나서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그에게는 명복(名福)이라는 열한 살짜리 둘째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이하응의 맏아들은 열여덟 살이었으므로 왕이 되기에는 너무 ‘고령’이다), 조정에 아직 버티고 있는 안동 김씨 세력을 축출하려는 조대비와 아들을 왕위에 올릴 절호의 기회를 맞은 이하응, 이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결과 명복 소년은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으로 즉위하게 된다(정조 이후 조선의 여섯 왕은 모두 장헌세자의 직계 후손이었기에 나중에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했다)【이하응은 십대 시절에 부모를 모두 여읜 뒤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숱한 고초를 겪었으니 안동 김씨에 반대하는 심정은 결코 조대비에 뒤지지 않았다. 특히 안동 김씨가 권좌에 컴백한 철종(哲宗)의 치세에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며, 심지어 안동 김씨 가문들을 찾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다시피 한 탓에 온갖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서도 야심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조대비의 조카에게 접근해서 대비를 소개받았고, 마침내 아들을 왕위에 올린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왕족으로서 밑바닥 생활까지 해본 처지였기에, 장차 권력을 손에 쥐면 세상을 한번 자기 뜻대로 만들어보겠다는 야망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 기구한 왕후 순원왕후의 칠십 평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순조), 아들(익종), 손자(헌종)를 차례로 보낸 뒤 만년에는 왕통이 끊기자 강화도령(철종)에게 왕실 과외까지 시켜야 했다. 사진은 그녀가 쓴 한글 편지들인데, 19세기 한글의 어휘와 서체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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