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내전의 국제화(동학농민운동)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내전의 국제화(동학농민운동)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8:48
728x90
반응형

 내전의 국제화

 

 

애초부터 안 되는 싸움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조선 역사상 변방의 반란, 민란, 사대부(士大夫)의 반란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갑신정변(甲申政變)처럼 물리적 기반이 취약한 쿠데타 세력은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사정은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두 메이저가 간섭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내부 쿠데타가 어려운 조건이었다. 따라서 김옥균(金玉均)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면 두 나라 중 하나는 반드시 잡아야 했으나, 불행히도 그는 일본에 의존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개혁과 개화를 이루고자 했고 일본 측도 그가 일본을 활용 대상으로만 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당시의 조선은 내부 개혁을 꾀하는 일체의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태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조선에서 개혁과 개화의 싹은 완전히 뿌리뽑혔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徐載弼)은 잽싸게 일본으로 도피했으나(홍영식은 끝까지 남아 고종 부부를 청군에게 넘겨주는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민비(閔妃) 정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참에 아예 국내의 개화파를 철저히 색출해서 모조리 처단해 버렸다. 게다가 청나라와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어 앞으로 이런 사태가 다시 일어나 양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될 경우 사전에 통보한다는 자기들끼리의 약속을 정했다. 개혁의 시도가 오히려 안팎으로 화를 부른 셈이다.

 

이제 조선의 미래는 없다. 안은 온통 썩어 회생 불능이고 밖에서는 썩은 고깃덩이라도 먹겠다고 달려드는 하이에나들뿐이다. 남은 절차는 두 하이에나가 조선을 놓고 최후의 승부를 가리는 것뿐이다. 둘 중 조선을 먹는 측이 장차 동아시아 전체를 제패하게 되리라.

 

그러나 당연히 뒤따랐어야 할 결승전은 10년 가량 뒤로 늦춰진다(실제로 1885년 초부터 조선에서는 두 나라가 곧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 이유는 양측이 제 코가 석 자인 데다 각자 결전에 대비한 트레이닝 기간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청나라는 민비(閔妃) 정권을 꽉 잡고 있었으니까 먼저 일본 측에 시비를 걸 법도 하지만 그럴 사정이 못 되었다. 중국에 진출한 서양 열강이 각종 특혜와 이권으로 단물을 빨아먹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당장은 그 문제가 더 시급했고, 게다가 아직은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체력에 문제가 있었다. 한편 일본은 군국주의로 가는 길의 마지막 고비에서 맞닥뜨린 걸림돌을 뽑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국내의 자유주의 세력이 들고 일어나 일본의 제국주의화에 제동을 걸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메이지 정부는 일단 자유주의자들에게 근대적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여기서도 유신정권의 잔꾀가 유감 없이 발휘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정부가 약속대로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표한 것에 만족했으나 이 헌법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천황 전제를 합법화하는 내용이었다대일본제국은 천황이 통치한다’ (1),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받지 않는다’ (3) 등의 조항에서 보듯이 새 헌법은 민주주의는커녕 오히려 천황 독재의 확립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내각, 제국의회, 재판소가 신설되었으나 모든 기관은 사실상 천황(유신정부)의 통치를 돕는 일종의 분업적 기관에 불과했다. 그럼 일본의 자유주의 세력은 왜 더 이상의 것을 얻어내지 못했을까? 일본에는 서유럽 국가들과 같은 시민사회의 역사가 없기에 자유주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당시 일본이 모델로 삼았던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도 마찬가지였다. 독일도 시민사회의 힘이 약했기에 정부가 의회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농락할 수 있었는데, 이 점은 결국 20세기 들어 독일이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착취의 테크닉 조병갑은 농민들을 동원해 만석보를 만들고 이 저수지를 이용해 농민들에게서 물세를 챙기는 고도의 테크닉을 선보였다. 사진은 지금의 만석보인데,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을 기념하기 위해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 부심하고 있는 동안 조선은 상대적으로 안정기를 가질 수 있었다. 만약 이 시기에 김옥균(金玉均)의 개혁ㆍ개화 정권이 있었더라면, 아니 최소한 정상적인 행정이나마 꾸릴 수 있는 정권이었더라면, 혹시 조선은 다가올 암울한 미래에 대비한 체력을 어느 정도 비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리도, 정강도, 일관성도 없는 민비(閔妃) 정권은 그 소중한 시기를 기회로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1885년에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터졌는데도 주체적으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각국 공사관에 도움을 호소하면서 갈팡질팡할 뿐이다(그래서 거문도에는 1887년까지 무려 2년 동안이나 영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은 그 사건에서 국제관계를 다양화시켜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랄까? 이후 조선 정부는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원칙한 개방은 무질서의 확대를 낳을 뿐이다. 조선 정부로서는 국제관계 이전에 나라 안을 먼저 걱정해야 했다.

 

1893년 봄 충청도 보은에서 2만 명의 농민이 모여 척왜양(斥倭洋,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라)의 요구를 내걸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범상치 않은 규모요, 범상치 않은 시위인데, 더 범상치 않은 것은 시위대의 구성이다. 그들은 바로 동학교도들이었던 것이다. 전 해부터 교주인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동학(東學)을 탄압하지 말라고 정부에 요구했던 그들은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정치문제까지 들고 나오기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시위가 폭동화할 것에 대비해서 진압을 준비하는 한편 시위대를 회유하는 양면책을 구사하지만,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과연 그 해 내내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시위는 이듬해 1월 봉기로 터져나왔다.

 

30년 전의 민란에서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역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부패한 관리다. 전라도 고부의 군수인 조병갑(趙秉甲)은 저수지를 고치는 데 농민들을 동원했으면서도 농민들에게서 가혹한 물세를 받아먹는가 하면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수선을 떨면서 그 기금을 농민들에게서 뜯어냈다. 참다 못한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全奉準, 1855~95)은 농민과 동학교도로 이루어진 1천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고부 관청을 습격해서 아전들을 옥에 가두고 곳간을 열어 농민들의 혈세를 돌려주니,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시작이다(1894년이 갑오년이기에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지금도 그렇지만 전라도는 조선시대에도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지방관들의 탐학이 특히 심했던 이유도 그 때문인데, 여기에는 아마도 조선시대 내내 전라도 지역이 소외되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라도만이 그런 것은 아니고, 이른바 새외(塞外)라고 불렸던 서북 지역은 소외를 넘어 공식적인 차별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지역차별이 심화된 이유는 중기로 접어들어 사대부(士大夫) 체제가 되면서 영남 출신들이 조선의 중앙 관직을 독점했기 때문이다(초기까지는 주로 중부 지방 출신이 중앙 관직에 포진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는 거의 영남의 독무대였다).

 

 

농민군의 연판장 동학 농민군이 거사를 앞두고 전국의 접주들에게 알린 비밀 통신문이다. 오른쪽에 둥글게 이름을 연명한 게 사발 모양이라서 흔히 사발통문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도는 혹시 적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주모자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발의 아래쪽에 전봉준의 이름이 보인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사건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만큼 키운 것은 정부의 태도다.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 1854~?)는 안핵(按覈)하기는커녕 봉기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아붙였다. 동학(東學)은 실정법상 금지되어 있으니까 일단 처벌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그것은 타오르는 농민들의 기세에 기름을 끼얹은 결과가 되고 만다(물론 농민들 중에 동학교도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봉기의 근본 원인은 종교 때문이 아니었으니 농민들이 격분한 것도 당연하다). 이제 분노의 화살은 지방의 탐관오리만이 아니라 중앙정부에게도 겨누어졌고, 농민 시위대는 농민군으로 탈바꿈했다. 농민군 지도자인 전봉준, 김개남(金開南, 1853~95), 손화중(孫華仲, 1861~95)동학(東學)의 전통적 이념인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을 보호하자)은 물론 축멸양왜(逐滅洋倭, 서양과 일본을 몰아내자)라는 정치적 슬로건까지 거리낌 없이 내세운다. 게다가 농민군은 531일에 전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그 슬로건을 실현할 주체적 역량이 있음을 과시했다.

 

그제야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막상 정부가 할 일은 별로 없다. 그저 본국이나 다름없는 청나라에 SOS를 쳐서 지원과 해결을 부탁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일본은 청나라와 톈진조약을 맺어두었다. 그래서 사태는 제2라운드로 접어든다. 이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조선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청나라와 일본의 현안이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상황도 톈진조약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기 위한 교묘한 장치였다. 민비(閔妃) 정권이 내란 진압을 위해 외국군을 끌어들이자 톈진조약이 발동해 일본도 참여하게 된다. 청군이 전장 부근인 충청도 아산으로 간 데 비해 일본군이 인천으로 곧장 들어온 것은 일본의 진의를 말해준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

사흘간의 백일몽

내전의 국제화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어느 부부의 희비극

기묘한 제국

후보 단일화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