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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시평 서설 - 2. 17세기 국학의 대표자 홍만종 본문

문집/소화시평

소화시평 서설 - 2. 17세기 국학의 대표자 홍만종

건방진방랑자 2021. 10. 2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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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7세기 국학의 대표자 홍만종

 

소화시평의 저자 홍만종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기를 살다간 학자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본관은 풍산(豊山), ()는 우해(于海), 호는 현묵자(玄默子)ㆍ장주(長洲)ㆍ몽헌(夢軒)이다.

 

그는 대대로 고관과 문인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허당(靜虛堂) 홍주세(洪柱世, 1612~1661)로 문과에 급제한 뒤 영천군수 등의 벼슬을 지냈다. 우암 송시열 등 서인이 추진하는 북벌론(北伐論)에 반대하고 정치적 주관을 지켰다. 조부는 월봉(月峯) 홍보(洪靌, 1585~1643)로 인조 원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이인거(李仁居)의 난에 공을 세워 풍녕부원군(豊寧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벼슬은 좌참찬(坐參)에 이르렀다. 증조부 습지(習池) 홍난상(洪鸞祥, 1553~1615)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증조부로부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인으로 명성을 누렸다.

 

홍만종은 33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비롯한 낮은 벼슬을 잠깐 지냈다. 하지만 과거시험이나 벼슬과는 큰 인연이 없어 팔십 평생을 학문과 저술활동으로 보냈다. 한양의 마포 강가에 거주하였는데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정자 풍월정(風月亭)이 그의 소유였다. 이 누정에 이한당(二閑堂)이란 서재를 갖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두 시화에서 두 개의 한()자를 취하여 시화에 대한 열정과 한가롭게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병마에 시달린 건강상의 불리한 조건하에서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지 못한 채 소외된 지식인으로 생애를 마쳤다. 교우관계는 그리 넓지 못한 듯하다. 당파는 소론(少論)에 기울었다. 성균관대 존경각 소장 남인(南人)의 당파보 남보(南譜)에 그의 직계 가족을 남인으로 넣고서 소론으로 돌아갔다[反少]”라고 밝혔다. 관직에서는 뜻을 펼치지 못했으나 다방면에 박학한 지식은 생존 시부터 널리 인정을 받았다. 이른 나이부터 참신한 주제로 독특한 내용을 담은 저술을 써서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확고한 지위와 명성을 얻었다. 그 시대 누구보다 개성이 넘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학자였고, 다방면에 걸친 저술로 그만의 학문세계를 구성하였다. 저술의 목록을 주제와 시기에 따라 분류하여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필기(筆記) 6종을 꼽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3종은 현재까지 전해온다.

 

(1) 해동이적(海東異蹟): 1666, 24, 도교 계통 신선의 전기

(2) 속고금소총(續古今笑叢): 미상, 부전(不傳), 외설스런 야담집

(3) 명엽지해(蓂葉志諧) : 미상, 현전, 야담집

(4) 순오지(旬五志) : 1678, 36, 필기

(5) 몽헌필담(夢軒筆譚) : 미상, 부전, 필기

(6) 부상지림(扶桑志林) : 미상, 부전, 필기

 

한국의 도교 관련 인물을 조사하여 그 생애를 서술한 해동이적은 이 분야의 가장 오래고 중요한 저술로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다. 도교에 심취한 홍만종의 지적 편력을 보여주는데, 이후 황윤석이 증보하여 해동이적보(海東異蹟補)를 저술하였다. 속고금소총명엽지해는 야담집으로 전자는 음담패설집이고 후자는 음담이 섞인 본격적인 야담집이다. 다음으로 순오지를 비롯한 3종의 필기(筆記)는 역사, 야담, 문인 일화, 풍속, 시화, 언어와 같은 다양한 소재를 서술하고 있다. 필기에도 시화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문학 방면의 저술 7종을 꼽을 수 있다.

 

(7) 소화시평(小華詩評) : 1675, 33

(8) 시평보유(詩評補遺): 1691, 49

(9) 시평치윤(詩評置閏): 미상, 부전(不傳)

(10) 시화총림(詩話叢林) : 1712, 70

(11) 팔가문정(八家文精) : 미상, 부전, 고문선집

(12) 청구영언(靑丘永言): 미상, 부전, 시조집

(13) 이원신보(梨園新譜): 미상, 부전, 시조집

 

먼저 소화시평시평보유, 시평치윤은 시평 3부작이다. 마지막 것은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으나 그가 우리 한시를 깊이있게 이해하고 널리 소개하는 일에 얼마나 열정을 가졌는가를 충분히 보여준다. 시화총림은 노년에 역대 시화를 종합하여 정리한 자료집이고, 팔가문정은 고문선집이다. 특별히 주목할 저술은 청구영언이원신보인데 당대에 널리 불리던 시조를 수집하여 엮은 시조집으로서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출현한 시조집 편찬의 물꼬를 텄다. 다음으로는 역사서와 족보의 편찬이다.

 

(14)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摠目) : 1705, 63

(15) 증보역대총목(增補歷代摠目): 1706, 64

(16) 풍산홍씨족보(豊山洪氏族譜): 1709, 67

 

동국역대총목증보역대총목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편년체로 요점을 열거하고 연표의 구실까지 겸한 저작이다.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항 위주로 서술하여 조선 후기에 널리 읽혔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그의 문집이다. 몽헌집(夢軒集)이 있다고 전해오지만 그 실체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근자에 영산대 김영호 교수가 부부고(覆瓿藁)를 입수하여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하였다. 이 사본은 몽헌집의 자필 초고본으로 추정되는데 그 안에 다수의 저술 서문이 실려 있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저술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소개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홍만종의 저술은 일반 유학자들의 저술에 견주어볼 때 특이한 면을 많이 드러낸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조선의 역사와 민간풍속, 문학과 도교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 특징을 볼 때 그는 자국학(自國學) 분야에 전문적으로 집중한 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저작 가운데 자국학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은 팔가문정증보역대총목2종밖에 없다.

 

이와 같은 학문 성향은 당시로서는 매우 색다르고 신선하며 의의가 깊다. 왜란호란이 휩쓸고 간 이후 조선의 지성인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학문의 순수성에 집착하였다. 국가 이데올로기를 이탈하는 사유를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도록 강력한 통제 시스템을 작동시킨 시기였다. 그런데 홍만종은 학계를 무겁게 짓누르는 규범적 사유에서 벗어나 도가적(道家的) 사유를 깊게 깔고, 박학(博學)을 근거로 조선적 현상에 연구를 집중하였다. 이는 당시 정세와 학문의 현황에서 볼 때 상당한 일탈의 행위였다. 그는 외적의 침략과 그 이후 전개된 외세에 대한 배타적 심리를 자국학 연구로 방향을 전환한 지성인이었다.

 

그의 박학은 조선의 문물제도, 문학, 민간문화 등에 방향을 두었고, 누구보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여 많은 문헌을 섭렵하고 그에 바탕을 두어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단군을 조선 역사의 기원으로 설정한 것은 그런 연구방향의 한 가지 징표이다. 저서 대부분이 자국 문화의 우수한 가치와 의의를 부각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상층의 문화뿐 아니라 시조집 청구영언이원신보를 편찬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민간문화, 한글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점에서 그의 학문태도는 개방적이었다. 요컨대 그는 17세기가 낳은 가장 선구적이고 본격적인 국학자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인용

상권 목차

하권 목차

1. 가치

2. 17세기 국학의 대표자 홍만종

3. 홍만종의 시화집들 특징

4. 성격

5. 비평가의 세 가지 자격

6. 품평용어

7. 사본의 문제점

8. 텍스트 비평과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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