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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노희락의 심리학 - 프롤로그 본문

책/철학(哲學)

애노희락의 심리학 - 프롤로그

건방진방랑자 2021. 12. 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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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다르다틀리다가 아니다

 

 

1. 갈등의 원인

 

 

인간 사이의 갈등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하지만 다른 것 자체가 갈등의 원인은 아니다. /, 부모/자식, 스승/제자와 같이 확연히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 별 갈등 없이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경우도 많이 있다. 다름이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은 다르다는 상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 가지다. 우선, 다른 것을 무리하게 같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다르게 놓아둔 채로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한 가지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려고 하는 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 그 다름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다른 것을 같다고 생각하여 오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이 각각 다르다. 내가 보기에 쉬운 것을 상대가 안 해주면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거나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해와 갈등의 원인이 된다. 상대는 안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못 해주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은 주로 두 번째 문제에 초점을 맞춰서 씌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선천적인 체질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즉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 말하는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인의 체질 차이에서 빚어지는 문제들을 주로 다룬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첫 번째의 주제, 즉 다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는 별 의미가 없어진다. 체질에 따른 다름의 근본적인 원인들과 결과들을 밝혀내어도, 이 다름을 다루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갈등의 해결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체질에 따른 인간의 이해라는 것은 인간을 유형화해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다름의 처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간의 유형화란 아주 위험한 방식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이 책의 주요 주제인 체질의 문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다름의 문제를 먼저 짚어보는 편이 옳은 접근일 듯하다.

 

 

 

 

2. ‘다르다틀리다

 

 

다름은 동등하다

 

인간을 유형으로 분류한다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유형을 접하면 이를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으로 구분하려 들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 이런 폐해가 가장 크게 드러난 것은 유럽의 제국주의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의 일이다. 많은 수의 인류학자들이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이 백인보다 열등한 종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썼다. 유럽에서 평등을 찾아간 사람들이 세웠다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역사를 약간만 거슬러 올라가도, 흑인 아이와 백인아이의 지적 능력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을 수두룩하게 만나게 된다. 이런 사이비 학자들의 연구가 인류에 공헌한 것은 단 한 가지다. 그들의 왜곡된 주장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통계 처리란 조그만 실수로도 엄청난 왜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남녀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마초주의자와 전투적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는 남녀 문제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마초주의자는 남자만의 기준을 인간의 기준으로 삼으려 한다. 전투적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특성을 인간의 특성으로 착각한다. 사람들은 다른것을 다른것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둘 중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한쪽이 더 좋은 것이고 다른 쪽은 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이 책에서 열심히 사상체질에 관해 이야기 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자신의 체질에 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체질의 특성은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의 목적은 하나도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도, 자신의 수양 정도를 높일 수도 없다. 자신의 치우침을 아는 것이 체질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이다. 그 치우침이 잘못된 것이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저 출발점을 그곳에 잡았을 뿐임을 느끼는 것이 체질에 대한 이해의 그 다음 걸음이 된다. 그리고 그런 이해는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이다를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알았어라고 말하는 네 가지 방식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도저히 논점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한 사람은 저게 어떻게 파란색이냐? 빨간색이지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저게 어떻게 레몬 맛이냐? 포도 맛이지라고 주장하면서 싸우는 격이다. 겉보기에는 공통된 단어를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단어를 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알았어라는 말을 어떤 경우에 쓸까? 어떤 사람은 네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생각해보겠다라는 뜻으로 쓴다. , “일단 당신 주장을 접수는 해두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상대의 주장에 동의할 경우에만 알았어라는 표현을 쓰지 동의하지 않는 한 절대 알았어라고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상대의 주장이 아니라 상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이해했다는 뜻으로 쓴다. , “네 기분 어떤지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하자라는 말막음용으로 알았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가 말하는 의도가 파악되었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눈치 챘다라는 뜻으로 알았어라고 하는 경우다.

알았다고 말을 하는 네 가지 경우
당신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생각해보겠다고 하는 경우 동의할 경우에만 알았어라고 하는 경우
네 기분은 알았으니 그만 하자고 하는 경우 의도 파악이 완료되었다고 선언하는 경우

 

 

이런 부분들이 서로 오해를 낳는 이유가 된다. “‘알았다라고 해놓고 왜 또 딴소리냐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저 사람은 말을 바꾸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버린다. 때로는, ‘저 사람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았다고 말하는 경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모두 그 사람과 내가 표현 방식이 틀리다는 걸 모르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 표현의 차이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표현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 방식 하나하나가 마음의 근본 동작 원리의 반영이다. 그가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개인 대 개인의 오해나 말다툼의 원인이 된다. 더 나아가 공인의 행동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게 되고, 정치적 호오(好惡) 역시 갈라진다. , 이런 경향성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서도 생겨난다. 따라서 종교, 제도, 문화 등도 역시 경향성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알았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위의 네 가지 방법 중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익숙한 방법과 그렇지 않은 방법이 있을 뿐이다. 다만 상황에 따라 어느 용도로 쓰는 것이 적절한지가 달라지는 경우는 있다. 학술 토론장이라면 알았다를 동의의 뜻으로 쓰는 편이 확실할 것이고, 부부 사이라면 알았다감정의 이해로 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종교, 제도, 문화가 일방적으로 우월한 것은 없다. 지역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더 적절한 것이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이 정도에서 본격적으로 다르다에 대한 이해로 들어가보자. 우리는 흔히 다르다틀리다를 혼동한다. ‘다른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것이 아니다. 틀린 것은 서로 맞지 않는 것,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가 그릇되어서 틀리거나, 아니면 둘 다 옳고 그른 차원의 문제가 아닌데도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정사각형의 타일은 같은 모양이며 서로 맞는다. 그러나 원형의 타일이나 정오각형의 타일은 서로 같은 것이지만 딱 들어맞게 바닥을 덮을 수 없다. 반면 우리의 성벽을 보면 서로 모양이 제각각인 돌들로 쌓았지만 아주 견고하게 맞아 들어간다. 같다/다르다맞다/틀리다는 다른 문제이다. 서로 다른 것끼리 맞을 수 있을 때, 사회적 조직이나 공학적 구조나 더 안전해진다. 같은 모양의 벽돌로 쌓은 구조물은 특정 방향의 힘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옛 성벽은 어느 방향의 힘에도 균등한 정도의 저항력을 지닌다. 다른 것끼리 맞는 세상이 좋은 세상인 것이다.

 

더 나아가 맞다/틀리다같다/다르다옳다/그르다좋다/나쁘다로까지 확대 해석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 ‘맞다/틀리다’ ‘같다/다르다라는 네 쌍의 표현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으며, 엄격히 구분해야 할 표현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것이 있으면 바로 우열을 따지고자 한다. 또 그 우열을 쉽게 선악과 연결해버린다. 더 나아가 서로 틀리면 한쪽이 그르다는 단정을 지어버린다. 세상의 모든 갈등의 원인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때로는 그런 잘못을 피하려고 다른 것을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3. 살림의 문화, 죽임의 문화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다른가

 

이런 이야기를 예도 없이 원론만으로 이어나가면 너무 어려워진다. 독자들도 읽기가 힘들겠지만, 쓰는 사람도 뭐라고 써야 정확히 전달될 지 막막하다. 아직 체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체질이 다른 사람을 예로 들 수는 없고, 여기서는 남녀 문제를 예로 들도록 하자. 주제는 다른 것 사이의 평등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이다.

 

필자는 남녀차별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단지 젠더(Gender)일 뿐, 섹스(Sex)차이는 없다라는 식의 과격한 남녀동등 역시 배격한다. 분명히 남녀는 생리적으로 다르며, 그 생리적 차이로 인한 심리적 차이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차이 때문에 남자는 이런 일만을, 여자는 이런 일만을 해야 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같은 일을 해도 남자에게 더 쉬운 방식, 여자에게 더 쉬운 방식은 분명히 존재한다.

 

살림이라는 말의 반대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뭐라 대답할까? 보통 살림을 영어로 ‘housekeeping’이라고 번역한다. 그것은 살림의 외부 형태만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라면 반대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말 살림살림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철학이 들어가서 만들어진 말이다. 살림의 반대말은 죽임이다. , 우리말 살림에는 살게 만드는 것, 활기 있게 만드는 것,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들이 들어 있다. , ‘housekeeping’ 만을 말할 때는 [살림]으로, 살리는 것이라는 의미가 같이 포함될 때는 {살림}으로 표현하면서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전업주부들이 자신들을 비하해서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여자라고 말하지만, [살림]을 제대로 하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시장과 시공무원이 해야 할 일은 시의 [살림]이다. 대통령과 장관이 해야 할 일은 나라의 [살림]이다. 그 기본이 [살림]{살림}답게 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살림}감각[살림]에서 길러지는가를 좀 멀리,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부터 찾아보자. 인간은 원래 자연계에서 그렇게 우세종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없고, 두터운 피부도 없다. 발도 그리 빠르지 않고, 번식력이 유난히 강한 것도 아니고, 잘 숨는 재주가 있거나 독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나마 유리하다는 것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머리를 좀 쓸 줄 안다는 정도였다.

 

둥지 밖은 항상 먹느냐 먹히느냐의 전쟁터이다. 그 상황에서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으면서 먹이를 구하려면 사소한 감정적인 동요가 집중력을 해치는 것을 막아야 하며, 동료들과의 협조를 중시해야 하고, 개인적 특성은 집단을 위해 무시되어야 한다. 모든 대화는 정보 교환이나 문제 해결에 집중된다. 그렇게 인간은 살아남았다. 그것이 {죽임}의 문화이다. 죽지 않고 적을 죽이는 것, 그것을 위해 개인적 특성의 발현을 죽이는 것, 정확성과 효율성이 모든 의사소통의 기본이 되는 것, 그것이 둥지 밖 문화의 기본이다.

 

둥지 안에 오면 상황이 바뀐다. 둥지 밖에서는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둥지 안에서는 있는 것을 아끼고 재활용하는 것이 기본이 된다. 특히 장마나 강추위가 계속되어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생존은 [살림]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살림]에는 {살림}감각이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또 둥지 안은 상대적으로 적의 공격에서 안전하므로 몸과 마음의 치료가 이뤄진다. 즉 몸의 치료와 더불어 외부에서의 공동 투쟁 중에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발생한 심리적 갈등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이 모든 것이 {살림}이다. 개인의 정서를 살리고, 기를 살리고, 물건의 쓸모를 살리고,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생명을 살린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우세종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에, 생존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쪽이 있으면 그쪽으로 열심히 진화했고, 남녀의 분화 역시 그 결과이다. 즉 임신, 출산, 육아 때문에 둥지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 여성에게는 {살림}에 필요한 기능이 강화되었고, 둥지 밖에서 식량 조달을 위해 보내는 시간이 많은 남성에게서는 {죽임}의 문화에 어울리는 기능들이 강화된 것이다.

 

오랜 진화를 거치면서 결국은 두뇌 구조 자체도 남녀 간에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뇌의 우반구과 좌반구의 기능 발달 차이, 뇌량의 크기 등에서 남녀는 유의미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뇌의 구조나 호르몬 분비의 차이 등의 생리적 차이가 기능, 심리 등에서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남녀의 차이 자체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 정도로 하자. 이런 주제들을 다룬 좋은 책들이 많으니 더 궁금한 사람들은 그 책에 맡기고, {살림}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권하는 책의 목록이다. 우선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남녀간의 생리적, 심리적인 차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의학적 내용들과 실증적인 연구 사례들을 토대로 한 책이다. 꽤 오랫동안 연구되었지만, 전투적 여성해방론자들의 압력으로 발표될 수 없었던 여러 결과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론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그런 차이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사례들도 풍부하다. 생생한 사례 위주의 더 실전적인 책으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읽어볼 만하다. 부부 문제에 대한 오랜 상담 경험에서 나온 아주 실전적인 책으로 현재 부부 문제로 곤경을 치르고 있는 분들께는 이 책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살림}의 문화라는 개념은 김지하 님의 책에서 얻은 것이 많다. 아예 책 제목이 살림이라고 되어 있어 이 부분을 주로 다룬 수필집이 있다. 또 개인적으로 {살림}의 문화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었던 장택희씨(원불교에서 도형이라는 법명으로 환경운동을 하는 분이다)라는 분이 쓴 살림의 논리라는 책이 내게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녹색평론사에 서 나온 책인데 {살림}의 문화를 기본으로 한 환경운동에 관한 이야기라서 {살림}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살림의 문화, 죽임의 문화

 

{죽임}의 문화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열세종(劣勢種)이 살아남기 위한 문화이다. 생존의 위협이 줄어드는 정도에 따라 {살림}의 문화의 비중이 커진다. 후천개벽이니 뭐니 하면서 음양의 교체가 일어나고, 여성적인 가치관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말이 있다.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인간은 이미 지구의 최우세종(最優勢種)이 되었다. 이제 우세종에 어울리는 문화” “우세종이 마땅히 가져야 할 문화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 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이다.

 

{죽임}의 문화는 다른 종에 대해서도, 같은 종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열세종일 때는 강한 개체 위주로 살아남을 필요가 있다. 가장 강한 개체 위주로 문화가 형성될수록, 약한 개체들이 도태될수록, 종 전체의 생존은 유리해진다. 반면 생존의 위협을 벗어나면 약한 개체를 보살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개체 수를 늘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또한 각각의 개체들이 자신 특유의 능력으로 집단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다. 살림의 문화는 약자 존중의 문화이고, 다양성의 문화이다.

 

사회 문제의 해결에서 이 두 가지 태도는 뚜렷이 다르게 나타난다. {죽임}의 문화는 나쁜 점을 줄이는 쪽에 중점을 둔다. 흔히 ‘negative approach(부정적인 접근)’라고 표현되는 태도이다. {살림}의 문화는 좋은 점을 늘리는 쪽에 중점을 둔다. ‘positive approach(긍정적인 접근)’를 취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체질과도 관련이 있으니, 조금만 언급을 하고 넘어가자. 양인(陽人)들은 단점의 축소에 더 중점을 둔다. 음인(陰人)들은 장점의 확대에 중점을 둔다. 사람들이 서로 속이는 것에 애()를 느끼는 것이 태양 기운의 바탕이고, 사람들이 서로 업신여김에 노()를 느끼는 것이 소양 기운의 바탕이라고 한다. 반면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는 것에 희()를 느끼는 것, 사람들이 서로 보호하는 것에 락()을 느끼는 것이 각각 태음 기운, 소음 기운의 바탕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사상인의 성정을 본격적으로 설명할 때 다시 하기로 하자.

 

이론적 설명이 길어졌으니, 예를 하나 들어보자. 2001년 말의 민주당의 개혁파동을 기억하는가? 대선을 1년 남기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당의 인기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 원인으로 당내의 구시대적 정치를 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들이 부패의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 민주당의 인기를 하락시킨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온 것이다. 개혁파들은 의혹 대상 정치인이 스스로 물러날 것을 주장했다. 이른바 인적청산론이다. 반면 일부에서는 제도를 정비하여 그런 식의 의혹을 받을 일이 아예 안 생기도록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세 번째로, 의혹받는 정치인을 무조건 감싸고도는 부류도 있었지만, 그쪽이야 자기도 구린 데가 있어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이니 그쪽은 언급 없이 넘어가도록 하자.

 

인적청산은 바로 {죽임}의 문화이다. 조직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면, 문제가 있는 개체를 도태시키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다. 맹수에게 추격당하면 걸음이 가장 느린 사람이 잡아 먹혀서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방법. 원시시대부터 쓰던 방법이다. 반면 제도정비는 상대적으로 {살림}의 문화에 가깝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개념이다. 물론 인적청산을 주장했던 측이 모두 태양인, 소양인이라는 뜻은 아니다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정치권에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죽임}의 문화가 작동된 것일 뿐이다. 반면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동지들과는 달리 제도정비를 주장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문제는 해결하되 상처 입는 사람은 최소화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죽임}의 문화의 문제점을 한참 이야기했지만, {죽임}의 문화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분위기를 좀 바꿔서 {죽임}의 문화의 장점을 검토해보자. 인류가 확연한 우세종이 된 것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보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식품 생산량이 인간의 총수요를 넘어선 것은 더 최근의 일이다. 즉 어느 정도는 효율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의 규모, 공동체의 규모가 점점 커져왔다. 이른바 표준화, 단일화의 요구가 점점 커져왔다는 말이다. 이런 요구들에 대해 {죽임}의 문화는 긍정적인 공헌을 했다. 무한정의 {살림}은 결국은 공멸(共滅)을 부를 수도 있다. 적절한 {죽임}은 아직도 여러 영역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문화의 전부를 차지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인간이 지구상의 최우세종이 되고, 인간의 총생산이 총수요를 넘어섰다. 이제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던 영역에 {살림}의 문화를 넓혀나가야 할 때이다.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대치하자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조화를 생각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죽임}의 문화가 {살림}의 문화 영역으로 치고 들어오고 있다. 광고로 수요를 창출해가면서, 아직도 나눔보다 만듦이 더 중요한 때라고 강조한다.

 

{죽임}의 문화라고 하면 바로 전쟁을 생각하지만, 사실 인류 문명에 있어 {죽임}의 문화가 가장 뚜렷이 드러난 것은 대규모의 일관 생산라인, 이른바 컨베이어벨트이다. 모던 타임스>에서 열심히 너트를 조이던 찰리 채플린의 모습, 그것이 죽임의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죽임}의 문화의 최대 폐해는 개인의 말살이다.

 

여성해방운동은 인권에 대한 자각이라는 바람직한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자본가들이 저임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장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농촌을 파괴하면서 최대한 노동력을 끌어냈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니까 여성을 끌어내려 했던 것이다. 기업들과, 기업의 후원을 받는 학자들은 무한정한 광고 공세로 [살림]은 천박한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강조해서 주부를 컨베이어벨트로 끌어내기 위한 공세를 펼쳤다. 그 과정이 여성해방의 참뜻을 왜곡시킨 것이며, 그나마 가정을 통해 명맥이 유지되던 {살림}의 문화를 파괴한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가사도구의 발명, 상대적으로 풍족해진 물자 등으로 [살림]이 용이해진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살림]을 하던 사람들이 [살림] 이외의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주부를 사회로 이끌어내려면 사회 문화 자체를 같이 바꾸어주었어야 한다. 즉 기업의 {살림}, 공동체{살림}, 국가{살림}에 여성들이 동참하게 해주어야 한다.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어주어 여성의 동참 여지를 넓히는 것이 여성해방이지, 기존의 {죽임}의 문화를 그대로 두고 여성을 남성화시키는 쪽의 해결책은 결코 여성해방운동이 아니다. 사회의 모든 관행, 제도, 문화를 남성 일변도의 문화로 놔둔 채, “, 여성에게도 문호가 열렸으니 도전하라고 외친다. 그건 사기다. G. I. 제인은 절대로 여성해방의 상징이 될 수 없다.

 

 

 

 

다른 사람, 다른 접근 방식

 

[살림]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라는 표현으로 남녀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다양한 경로의 존재를 강조하고자 함이다. 사회적인 문제, 정치경제적인 문제에서도 들 만한 예가 많지만, 그런 부분들은 음양이니 체질이니 하는 부분들이 어느 정도 이야기된 뒤에 하기로 하자. 너무 복잡한 문제를 다루려면 주제에서 벗어나는 여러 논란이 뒤따르게 된다. 비교적 논란이 적을 만한 것으로, 교육 문제 쪽에서 예를 들도록 하자.

 

여자가 남자보다 수학과 과학에 약하다고 한다. 여러 통계자료들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남자아이에게는 수학과 과학을 중시하는 교육을 하고 여자아이에게는 그런 교육을 하지 않아서 빚어진 결과라고 말한다. 특히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의 차이가 은연중에 아이의 심리에 영향을 미쳐서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남녀 아이를 같이 키워본 부부, 특히 여권운동에 눈을 떠서 남녀 차별의식을 없애려고 신경을 쓰면서 키워본 부부들도 상당수가 이렇게 말한다. “선천적인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같이 교육하려 해도 받아들이는 것이 틀려서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불가능해요라고. 사실은 이렇다. 차이는 있다. 서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열의 차이는 아니다. 문제는 현재의 수학과 과학 교육이 남자에게 유리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너무 일찍 기호를 배운다. 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 심지어는 3,4세의 아이가 공책 한쪽 가득히 적혀 있는 더하기 빼기를 연습한다. ‘2+3=?’이라는 문제를 보면 아이는 자신 있게 5라고 적는다. 그럼 그 아이는 ‘2+3=5’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일까? ‘3+5=8’임을 증명하라는 문제가 일본의 유명한 수학과 대학원 입학 시험에 나온 적이 있다. 기호의 사용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아이가 아는 것은 오리처럼 생긴 기호와 귀처럼 생긴 기호 사이에 십자가 모양이 있을 때, 그 뒤에 작대기를 하나 긋고 그 밑에 낚싯바늘을 그리면 엄마에게 야단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수학은 양()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시작된다. 양에 관한 감각이 충분히 길러졌을 때, 이의 효율적인 표현을 위해 기호가 도입된다. 양적인 문제 자체를 다루는 능력은 여성이 남성보다 강하다. 그러나 기호화 능력은 남성이 강하다. 기호화는 근본적으로 풍부한 소통을 희생시키더라도 효율적인 소통을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소통 능력은 감정의 소통이 기본이고, 풍부한 소통을 지향한다. 남자의 소통 능력은 떼를 지어 들소나 곰을 잡으러 나간 상태에서 길러진 것이다. 상황 정보에 대한 빠르고 정확한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기호에는 감정이 없고 전달하고자 하는 사실만이 있다. 남성적인 소통방식이다.

 

교육방식을 잘 연구해보면, 수학을 양()의 문제 중심으로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 기본은 양을 다루는 것이지, 기호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감각이 길러졌을 때 비로소 기호를 도입하는 것이 원칙이다. “네가 느끼는 그 감각을 이런 기호로 표시한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방식은 아이가 채 느낌을 가지기도 전에 기호를 먼저 들이댄다. 기호화 능력이 강한 아이는 그런대로 받아들이지만, 기호화 능력이 약한 아이는 수학에 두려움을 느끼고 싫증을 내게 된다.

 

이런 잘못된 교육방식이 여자가 수학에 약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기호가 배제된 수학, 말로 설명하는 수학을 개발하고 기호의 도입을 늦춰주면, 여성 중에 남성보다 뛰어난 수학자가 나올 수 있다. 양적인 감각이 탁월한 여성이 남성이 시도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한 감각을 느끼고 이의 기호화를 시도할 때, 남성이 접근 못했던 수학의 새로운 영역이 열릴 것이다. 과학 역시 마찬가지다. 생활과 관련된 과학을 추구하고 단일 원리로 묶어가는 시기를 늦추어서, 여성에게 적합한 교육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 “수학은 이래야 한다, 과학은 이래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하다.

 

마찬가지로 정치는, 경제는 운운하는 대부분의 주장이 {죽임}의 문화, ()을 배제한 양() 일변도의 문화임을 인정해야 한다. 기존에 익숙한 방식만이 절대라는 관념을 깨야 한다. 기존의 관념과 다른 접근 방식을 대할 때, 두 가지 방식의 우열을 매기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각각의 다른 방식이 각각 달리 적용될 영역이 있는 것이다. 영역이 달리 있다는 표현이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영역은 서로 배제되는 참여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해결책으로 가는 통로가 다양하고, 같은 공간으로 모일 수 있는 입구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 다양한 통로들을 우열이라는 단일 잣대에 대고 줄 세우기하지 말라는 것이 사상심학(四象心學)을 대하기 전에 미리 준비되어야 할 마음 자세이다.

 

남녀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때가 되었는데, /양에 대해서 좀 아는 분들이 의아해할 부분이 있어서 조금 덧붙여야 될 것 같다. 보통은 양에 삶을, 음에 죽음을 배당한다. 계절로 보아도 봄과 여름이 양이고, 가을과 겨울이 음이다. 주역의 괘를 해석할 때도 양은 일이 풀려나가는 것을, 음은 일이 막히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반대로 배당했다. /여자 쪽에 {살림}의 문화를 배당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이 글에서는 의 문화, ‘죽음의 문화라고 하지 않고, ‘살림의 문화, ‘죽임의 문화라고 했다. 즉 자신의 을 강조하면 상대를 죽이게 되고, 다른 것을 살리려면 자신이 적당히 죽을 수 있어야 되는 법이다. 그래서 일변도의 문화가 결국 죽임의 문화가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위의 내용은 그러니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갈라서 서로 다른 교재로 가르쳐야 한다와는 좀 차이가 있다. 여자 중에도 기호화 능력이 뛰어난 아이는 남자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경우도 많다. 위의 내용은 평균적인 경우를 기준으로 한 이야기일 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장기적으로 교육방법을 다양화하고, 상담선생님이 아이에게 적합한 반을 배분하는 방식이 가장 좋다고 본다. 고학년에서는 아이가 직접 선택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은 학교 교육의 부족한 점을 부모가 보충하는 방식인데, 이건 시중의 사교육 교재가 학교 교육 못지않게 엉터리가 많고, 그렇다고 부모가 직접 교재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라, 부모가 상당한 식견이 있기 전에는 별 도움이 못 된다. 일단 다양한 교육방법이 제공될 때까지는 현재의 공교육 교재를 좀 더 균형 잡힌 쪽으로 바꾸는 편이 최선이 아닐는지.

 

 

 

 

4. 출발점에 대한 이해

 

 

꿈과 현실조차 차별하지 말라

 

다른 것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라고 해도 당장에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생각을 늘 꾸준히 하고 있으면 점점 그쪽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어느 정도가 되면 다른 것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한의사가 한의학의 한 갈래인 사상의학을 토대로 쓰는 글인데 서양적인 이야기만 나오면 좀 운치가 없어 보인다. 이번에는 동양의 고전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편에 좋은 말이 나온다.

 

 

나는 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다. 나는 지금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장주인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지 모르겠다.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필자는 이 말에 세 번 감격했다. 처음은 고등학생 때였다. “, 세상을 저렇게 뒤집어 볼 수도 있구나라는 감격이었다. 물론 그때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장주라는 쪽이 사실이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세상이 뭔가 불만스럽다고 느낄 나이에, 뒤집어보기, 비틀어보기에 대한 통쾌함을 느꼈을 뿐이다.

 

두 번째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라고 해도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구나라는 것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상당한 충격이었다. 장자(莊子)의 주장은 어느 쪽이 옳은지를 증명할 방법이 없고, 어느 쪽의 해석을 택해도 모든 현상이 전부 다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편적 진리라는 토대가 무너지는 느낌이 확 밀려왔다. 그러나 그때도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장주라는 해석이 더 실용적이고 우수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다.

 

세 번째는 나이 서른이 좀 넘어서였다.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장주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나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 쪽의 해석을 취하느냐에 따라 처음의 행동은 달라진다. 그러나 내가 장주인가 나비인가가 내 행동, 내 선택에서 차이가 나지 않게 되는 경지가 있으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영역이 그곳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 순간 흔히 패러다임이라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가 선명해졌다. 그 당시가 처음 사상의학을 접하던 때였는데, 사상체질론이 단순한 인간 유형학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그때 처음 들었다. 그 순간이 필자에게는 다른 것에 우열을 매기는 악습을 벗어나게 해준 순간이었다. 물론 아직도 과거의 악습이 많이 남아 있다. 한참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버려야 할 악습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장주의 입장에서 출발하는가 나비의 입장에서 출발하는가를 명확히 알고, 각각의 입장에서 출발할 때는 각각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옳은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장주이든 나비이든 상관없는 경지에 갈 것이고, 그 경지에 가면 비로소 나비인가 장주인가라는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막상 이 글을 쓰는 필자로서도 설명하기 벅찬 부분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느낌 위주로 적은 것이다. 또 필자의 느낌이나 이해의 배경에는 인간에게 있어 꿈이란 무엇이고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등등의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가 깔려 있는지라,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상당 부분은 우리의 시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내가 본 것, 느낀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의 전체가 아니라 사실의 일부이다. 언뜻 보기에는 내가 본 것과 완전히 모순되어 동시에 성립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내용들과 내가 확실히 본 내용이 함께 사실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도저히 같은 사실의 다른 측면일 수는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내가 내 시각만을 고집하면서 관찰 시점을 전혀 옮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상심학을 이야기해 나갈 때도 마찬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표현하는 방식이 인간의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고집하는 한, 절대로 내가 못 가진 다른 기운에 대한 이해가 얻어질 수 없다. 또 반대로 내가 아주 특이한 변종이라는 생각도 도움이 안 된다. 사람은 어느 정도 경향성도 있고 또 개인에 따른 특성도 포함된,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특수하기도 하고, 유형에 따라 분류되기도 하고 전혀 분류 불가능한 개인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는, 뭐 그런 존재인 것이다.

 

호랑나비 꿈의 이야기가 너무 상징적이라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들을 위해 시각의 상대성에 대한 좀 구체적인 예를 하나만 더 다루도록 하자. 사상심학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 준비 과정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체질을 아는 것은 출발점을 아는 것

 

코페르니쿠스적이라는 말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는 찬사가 들어 있는 표현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것은 정확히 말해서 지동설(地動說)’이라기보다 태양중심설(太陽中心說)’이다. 천문학의 시초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천구를 그리고, 별들을 그 천구 위에 배치하여 운동을 측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천문학이 발달되면서 점점 단일 천구에 별들을 배치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2중의 천구라는 발상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늘 처음이 어려운 법이고, 다음은 쉽다. 천구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난다. 코페르니쿠스 시절에는 수십 개의 천구80여 개였다고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를 설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놓고 다시 배치해보니 천구가 14개면 그때까지 관찰된 모든 별의 움직임을 담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중심설도 점차 깨져나간다. 태양계는 은하계의 변방에서 은하의 중심을 축으로 도는 하나의 부분에 불과하고, 우리의 은하 역시 전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들이 밝혀진다. 그럼 전 우주의 중심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날까? 지구중심설은 과연 폐기해야 할까? 아니다. 우주의 중심이라는 관점 자체가 꼭 필요한가의 문제가 있다. 중심이란, 모든 별의 움직임을 중심을 주변으로 도는 원운동이라는 모델로 해석하고자 할 때 필요할 뿐이다. 원운동을 굳이 고집하지 않으면 지구를 중심에 놓든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든 아무 모순될 것이 없다. 다만 별들의 움직임의 경로가 좀 복잡해질 뿐이다. 상대적인 것이다.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며, 별다른 중심이란 애당초 없는 것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놓으면 별들의 움직임은 확실히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 복잡한 경로를 계산하여 그릴 수 있으면, 내가 어디에서 어느 별을 찾을 수 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으며, 그 별들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바로 계산할 수 있다. 우주의 중심을 다른 곳에 설정해서 별들의 움직임을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곳들이 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우리가 그 중심에 섰을 때의 간단함이지, 지구에 섰을 때의 간단함이 아니다. 그 별과 지구와의 관계는 다시 계산해주어야 한다. 두 개, 세 개, 여러 개의 별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는 아주 복잡해진다.

 

동양의 천문학으로 운기학(運氣學)이라는 것이 있다. 우주의 움직임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의 기본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운기학은 기본적으로 지구를 중심에 놓고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한다. 각각의 별의 기운들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연구니까. 지구를 고정시키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결국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며 고정된 중심은 없다. 어디에 어떤 용도로 쓸 것이냐에 따라 중심을 설정할 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경제학 하나로 사회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까다롭다. 배우자와 사별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손실과 등가인가를 계산하려면 너무 많은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 사람들이 감수할 만한 경제적 비용은 얼마인가의 계산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 과정이 너무 복잡하니까 쉽게 세상을 이해하려면 심리학이나 정치학이라는 다른 영역이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니 너는 이것만 다뤄라하는 것은 차별이다. 차이의 인정이 아니라 차별이다. 경제학 개념 중심의 인식 체계가 탄탄한 사람이 정치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하면, 기존의 심리학이나 정치학이 도달한 영역을 넘어 새로운 경지를 열 가능성이 있다. 사람이나 학문이나 자신의 강점을 발달시켜서 자신의 약점의 영역에 도달하게 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런 노력들이야말로, 태양인이 태양인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있게 하며, 소양인이 소음적인 능력이 필요한 영역에서 소음인보다 훨씬 뛰어난 업적을 쌓을 수 있게 하고, 직관이 약한 태음인이 직관의 영역에서 세상을 뒤집을 수 있게 하고, 소음인 제갈량이 모옥(茅屋)에 앉아 세상을 나눌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인간 유형학의 기본은 출발점을 알고자 하는 것이며,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한 것이다. 유형의 설정에서 비로소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현할 방향이 정해진다. 의지의 발현 정도와 방향에 따라 어디에 도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위에서 사주명리학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지만, 모든 사람이 길흉화복의 예측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사주명리학 역시 그 가치는 지도에 출발점을 찍는 것이다. 단순한 운명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물며 남녀의 차이에 관한 공부라든가 사상체질에 대한 공부는 더욱이 그렇다.

 

인간 유형학이 출발점과 방향을 언급하는 데서 벗어나 결과에 대한 섣부른 예측으로 갈 때, 차이를 차별로 만들고, 다름을 틀림으로 만드는 타락한 학문이 되고 만다. 결과를 예측하지 않으면 여러 다른 출발점에 대해 우열을 매길 수 없다. 서로 다른 출발점의 평등한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의 영역에서 출발하여 다른 영역에 도달하고자 노력할 때, 다름이 맞음으로 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인용

목차

사상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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