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양사룡전」의 저자와 서사 구성
서귀 이기발의 생애
저자 이기발(李起浡, 1602~1662)【김형술, 「‘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 『국문학연구』제39집, 국문학회, 2019, 184~186쪽.】은 자(字)가 패연(沛然), 호(號)가 서귀(西歸)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목은 이색의 11세 손으로 그의 집안은 증조부 이치(李稺)가 선친 이수량(李守良)을 전주에 장사한 이래로 전주사람으로 살았다. 아버지는 이극성(李克誠)이고 어머니는 전주가 본관인 최준극(崔峻極)의 따님인데, 모친은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내 신천익(愼天翊), 양만용(梁曼容)의 모친과 더불어 호남의 세 현모 중 한 분으로 일컬어졌다. 이극성과 최씨부인은 슬하에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이기발은 3남 가운데 둘째로서 전주 황방산(黃方山) 활동리(闊洞里)에서 태어났다. 형은 이흥발(李興浡)이고, 아우는 이생발(李生渤)이다.
26세에 아우 이생발과 함께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형 이흥발도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과부의 삼형제가 모두 문과에 합격한 일로 인하여 인조의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李起浡, 『西歸遺稿』 권9, 「西歸先生家狀[柳震錫]」. “上顧問左右曰: ‘是寡母之子, 兄弟三人力學, 其二弟聯登去年科者耶?’ 仍嗟歎美之.”】. 문과에 합격한 이후 이기발은 한림원 주서, 시강원 설서와 필선, 사헌부 지평, 사간언 정언 등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촉망받는 인재로 활약하였다. 강렬한 대명의리론자였던 그는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형 이흥발, 한림 양만용(梁曼容), 순창군수 최온(崔蘊), 찰방 유즙(柳楫)과 함께 의병을 모의하고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썼다. 1637년 1월 20일에는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지만 남한산성을 불과 50리 남겨둔 지점에서 청과의 강화(講和)가 성립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주로 돌아와 황산(黃山) 아래 자리를 잡고 ‘서귀(西歸)’라 편액한 뒤 은거에 들어갔다. 형 이흥발은 임실 운암협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갔다.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조정은 이듬해 봄부터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을 제수하며 이기발을 불렀으나 이기발은 1662년 4월 1일,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출사를 거부한 채 서귀당에서 제자 교육에 매진했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 포의로 살았던 이기발의 삶은 당대 절의로 기려졌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가 쓴 묘표에 의하면 이기발이 세상을 떠나자 우암 송시열은 “이기발 형제는 삼학사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그의 절의를 기렸다【宋穉圭, 『剛齋集』 권10, 「西歸李公墓表」. “吾先子尤菴文正公聞西歸李公之沒, 語人曰: ‘此人兄弟不下於三學士.’”】.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되는 1668년에는 전주의 유생들이 앞장서 서귀사(西山祠)에 배향하였고, 1671년에는 관찰사 오시수(吳始壽)가 계청하여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상서원정(尙瑞院正)에 추증되었다【李起浡, 『西歸遺稿』 권10, 「年譜」. “國朝顯宗大王十二年, 贈通政大夫ㆍ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ㆍ春秋館修撰官ㆍ藝文館直提學ㆍ尙瑞院正. 道伯吳始壽以先生孝友, 啓請褒贈.”】. 또한 이기발이 세상을 떠난 지 100갑자가 되는 1744(영조 20)년에는 도신(道臣) 조영국(趙榮國)의 계청에 의해 ‘충절신(忠節臣)’으로 정려되었다【李起浡, 『西歸遺稿』 권10, 「年譜」. “國朝英宗大王二十年, 春, 以忠節臣命㫌閭. 道臣趙榮國啓請㫌贈.”】.
문집 『서귀유고(西歸遺稿)』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인 6대손 이승연(李承淵)이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편차하고 교정한 뒤, 1872년에 영초(穎樵) 김병학(金炳學, 1821~1879), 1873년에 경대(經臺) 김상현(金尙鉉, 1811-1890),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6)에게 서문을 받아 10권 5책으로 편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교정을 거치고 1870년에 서문을 받아두었던 형 이흥발(李興浡)의 『운암일고(雲巖逸藁)』 1책을 부집(附集)하여 10권 6책으로 1876년에 활자로 간행하였다.
「양사룡전」의 서사구성
「양사룡전」은 『서귀유고』 권7에 수록되어 있다. 권7에는 두 편의 전 이 실려 있는데 첫 번째가 본고의 대상인 「양사룡전」이고, 나머지 한 편은 「송경운전(宋慶雲傳)」이다. 두 편 모두 일반적인 효자전이나 예인전이 포착하지 못한 참된 인간상에 대한 서귀의 깊은 사유가 녹아있는 작품들이다【김형술은 「‘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국문학연구』제39집, 2019)에서 서귀 이기발의 의리정신을 통해 「양사룡전」의 입전의식을 밝힌 바 있다. 「송경운전」은 젊은 시절 당대 최고의 비파 명인으로 명성을 누리다 정묘호란 때 내려와 전주사람으로 살다간 송경운의 삶을 그린 것이다. 「송경운전」에 대한 이해는 김하의 「이기발(李起浡)의 『송경운전』(宋慶雲傳)과 17세기 전주 재현-역사 지리를 접목한 한문수업의 모색」(『국어문학』 제72집, 2019)이 좋은 참조가 된다.】. 논의를 위해 「양사룡전」의 구성과 줄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도입】
① 하늘의 사람에 대한 일관되지 않은 보응(報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본사1】
② 을유년(1645)에 전주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큰 시내도 말라붙은 지 오래되었는데 오직 면암천 일대에만 일어나는 기이한 강우 현상 덕에 전주 사람들이 유리걸식을 면함.
③ 기이한 강우 현상에 대한 전주 사람들의 전언
③-1 면암천 상류에 살던 효자는 죽어가는 노모 대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열흘 동안 기도하였고, 노모는 기도를 드린 지 이레 만에 기적적으로 소생하게 됨.
③-2 노모의 기적적인 소생이 하늘의 특별한 은혜라 생각한 효자는 하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묵정밭을 일궈 오이를 심었는데 하늘이 극심한 가뭄 중에도 효자의 밭에만 비를 내려주는 이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완산 서북 사람들이 전답에 물을 댈 수 있었음.
③-3 하늘의 도움으로 풍성하게 오이를 길러낸 효자는 무더위에 험한 고개를 넘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오이를 나누어 주었고 그로 인해 효자의 선행이 알려지게 됨.
【본사2】
④ 무심자가 직접 만나 확인한 양사룡의 오이 나눔 동기와 또 다른 효행
④-1 효자의 이름은 양사룡이고 나이는 45세였으며 직접 만나 대화해보니 행실과 말이 모두 애친(愛親)과 관계된 일이었음.
④-2 왜 오이를 나누어주게 되었는가에 대한 양사룡의 말: 양사룡은 하늘의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보은해야 하는데 자신의 미천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어 하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오이를 나누어 주게 되었다고 함.
④-3 노모를 위한 양친계 조직: 술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홀로 술을 마시는 게 안타까워 인근의 노모를 봉양하는 사람들과 양친계를 조직하고 술과 음식을 함께 즐기게 하여 노모를 기쁘게 함.
【본사3】
⑤ 삽화1: 부친 양흔동의 효행와 주인 섬김
⑤-1 양흔동은 아버지가 죽자 남긴 신발을 대바구니에 넣어두고 일 년에 한 냥씩 대바구니에 넣으면서 이것이 아버지께서 남긴 자취라며 언제고 한참을 울었음.
⑤-2 주인집 사람들이 모두 죽고 아이 하나만 남게 되자 흔동은 이 아이를 주인으로 극진하게 섬김. 임진왜란 때는 자신의 가족은 남겨둔 채 주인을 모시고 피신했고, 돌아와서는 어진 스승에게 공부하게 했으며, 결혼도 시켜주고 집과 살림도 장만하여 줌.
⑤-3 주인이 갑자기 죽어 그의 가족들이 의지할 데 없자 다시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몇 년을 봉양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헌신함.
⑤-4 수십 년 뒤 주인의 장례에서 있었던 일과 흔동의 죽음: 고령으로 장례식 참여가 어렵자 아들 사룡이 자신이 대신하겠다며 만류하는 데도 흔동은 주인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장례에 참여하여 널을 호송하고 곡함. 이 때문에 병이 생겨 죽음.
⑥ 무심자의 양사룡에 대한 경의: 무심자는 양사룡 부자의 행실을 듣고 예를 표한 뒤, 벼슬을 탐하여 염치와 시비를 몰라라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사람들이 탐욕하는 벼슬보다 마땅한 하늘의 이치와 떳떳한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 것이 훨씬 귀하다고 함.
⑦ 삽화2: 양사룡이 자식 잃은 무심자의 슬픔을 남만국 이야기로 위로함.
⑦-1 옛날 남만국의 어느 부부가 40세에 외아들을 얻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와 학식이 빼어나 누구나 한 번 사귀기를 원하는 인재였음.
⑦-2 그런 귀한 아들의 갑작스럽게 죽음.
⑦-3 슬픔에 빠진 부부는 죽은 사람을 명부로 보내는 일을 맡고 있다는 도사를 찾아가 아들이 명부로 떠나는 것을 막고자 함.
⑦-4 도사를 찾아가자 도사는 아들을 아직 명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내일 아들이 올 것이니 머물렀다 내일 보라고 함
⑦-5 도사가 자식을 찾아온 부부의 이야기를 전하자 그 아들이 부부의 전생을 이야기함: 부부는 전생에 어느 무고한 뱃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재물까지 훔쳤는데, 그 아들은 전생 뱃사람의 자식이었음. 부부의 악행에 분노한 하늘은 뱃사람의 자식을 후생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했고, 철저한 아픔을 주기 위해 귀한 늦둥이를 얻은 기쁨을 주었다가 갑자기 죽게 했던 것임.
⑦-6 부부는 자식의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자식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음.
⑦-7 그래서 세상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을 전생의 원수라고 한다면서 죽은 자식 때문에 슬퍼하면 모부인께서 상심하시니 상심을 거두라고 위로함.
【결사】
⑧ 양사룡의 행위에 대한 논평
⑧-1 양사룡으로 인해 하늘이 사람을 여전히 굽어살핌을 알 수 있었음.
⑧-2 사마천의 열전은 세교와 관련한 인물을 싣지 않은 단점이 있는데, 무심자가 양사룡을 만난 것은 양사룡의 행실이 후세에 전해지도록 한 운명적인 일임.
⑧-3 양사룡의 효행은 오로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오이를 나누어 준 선행은 그 넓은 헤아림이 숭상할 만함. 양사룡의 행실은 그의 부친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임.
⑨ 삽화3: 춘반의 효행
⑨-1 어머니의 소상 한 달 전 아내에게 어머니가 생전 이즈음에 드셨던 미음을 올리도록 함.
⑨-2 어머니 생전에 출타하게 되면 문에 기대어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 돌아올 적이면 멀리서부터 춤을 추면서 잘 돌아왔음을 보임.
인용
Ⅰ. 머리말
Ⅲ. 양사룡의 당위소당(當爲所當)과 이기발의 진아(盡我)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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