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농단(龍斷)
2b-10. 맹자는 드디어 크게 결심했다. 그래서 경(卿)이라는 지위를 반납하고 추나라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이미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그 소식을 들은 제선왕은 슬픈 얼굴을 하고 굳이 몸소 맹자 있는 곳으로 찾아와 맹자를 만나 말하였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전일(前日)’을 당연히 맹자가 제나라에 오기 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2b-2의 ‘치(齒)’의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제선왕은 맹자보다 어리다. 여기서 전일이 맹자가 양나라에 있을 때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더 젊은 시절에 이미 맹자는 추로지역과 제나라에서 신화적 족적을 많이 남겼을 수도 있다】 선생을 뵈옵는 것이 꿈이었습니다만, 그 꿈이 이루어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같은 조정에서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저를 버리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신다 하니 너무도 슬픕니다. 이 뒤로도 또다시 뵙는 것이 가능하겠지요?” 2b-10. 孟子致爲臣而歸. 王就見孟子, 曰: “前日願見而不可得, 得侍, 同朝甚喜. 今又棄寡人而歸, 不識可以繼此而得見乎?” 대답하여 말씀하시었다: “불감청이(不敢請耳), 고소원(固所願)이외다”【沃案: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잘 쓰는 그 유명한 이 말의 유래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쉽게 전달되므로 굳이 번역하지 않았다. ‘불감청’이라는 말은 맹자 가슴속 결심이 이미 굳게 섰으므로 자기 입으로 떠나지 않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다음 ‘고소원’이라는 말은 내가 결국 떠나고 안 떠나고는 나보다는 제선왕 당신이 하기에 달린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결단은 일단 유보하면서도 그 어느 것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다는 미묘한 감정을 나타내는 명언이라 할 것이다. 이 전대미문의 명언은 맹자와 제선왕의 기나긴 우정 속에서 육성으로 서로 나눈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매우 슬픈 일이다】. 對曰: “不敢請耳, 固所願也.” 며칠 후 왕은 시자(時子)【제나라의 대신 중의 한 사람】에게 일러 말하였다: “나는 제나라의 수도 임치의 한가운데 맹자학교를 크게 만들겠노라! 그곳에서 맹자께서 제자를 마음대로 기르실 수 있도록 1년에 1만 종의 곡식을 드리겠노라【1종(鍾)은 4부(釜)로, 1부(釜)는 64승(升), 1승(升)은 약 194cc. 대체적으로 1종은 50리터에 해당. 쌀 1만 종이면 우리 느낌으로 환산하면 6,250가마 정도】. 그리고 제나라의 모든 대부와 국인(國人)【임치성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으로 하여금 맹자를 공경하고 본받도록 하겠노라. 그대는 나를 대신하여 이 기쁜 소식을 맹자에게 전해다오!” 他日, 王謂時子曰: “我欲中國而授孟子室, 養弟子以萬鍾, 使諸大夫國人皆有所矜式. 子盍爲我言之?” 시자(時子)는 맹자의 제자 진자(陳子)【2b-3에 나오는 진진(陳臻). 진진은 맹자그룹 내에서도 재정을 담당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를 통하여 맹자에게 제선왕의 결정을 전해드렸다. 진자는 시자의 말을 맹자에게 전해드렸다. 時子因陳子而以告孟子, 陳子以時子之言告孟子. 그 말을 전해들은 맹자께서는 묘한 느낌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 시었다: “으음~ 글쎄. 그 말을 나에게 전한 시자(時子) 정도라도 이미 그 말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알았겠지. 나의 궁극적 관심은 왕도의 실현에 있는 것이지, 내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야. 내가 부(富)를 원했다면, 10만 종을 버리고 겨우 1만 종을 받아, 이것이 내가 치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겠느냐 이 말이다【염약기(閻若璩)는 ‘10만 종’을 맹자가 7년간 제국에서 받은 봉록의 총액이라고 본다. 즉 경으로 여태까지 10만 종의 봉록을 받은 내가 지금 와서 1만 종짜리 학교교장이 되어본들 …… 의 뜻으로 푸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1만 종이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라고 보는데 하여튼 맹자의 스케일에서는 좀 적은 금액이라고 느끼는 모양이다. 그리고 ‘10만 종’ 운운한 것도, 맹자의 인생 어느 시점에서 전국의 모 제후로부터 10만 종의 지위에 대한 오파를 받은 적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연봉 10만 종의 지위도 거절한 내가 이제와서 1만 종에 만족하겠느냐’의 뜻이 될 것이다. 하여튼 의미맥락이 명료하지는 않다. 한 가지 명료한 포인트는 맹자는 자신의 출처진퇴가 부의 문제가 아니라 왕도의 실현여부에 있다는 것이 며, 왕도를 실현할 수 없을 때는 가차없이 은퇴하는 것이 도리이지, 공연히 장안 한복판에 학교나 짓고 앉아서 세상의 부를 독차지하는 듯한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음의 재미있는 논리가 전개된다】. 孟子曰: “然. 夫時子惡知其不可也? 如使予欲富, 辭十萬而受萬, 是爲欲富乎? 계손(季孫)이라는 친구【누구인지는 잘 모른다】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지: ‘자숙의(子叔疑)【신상 불명】라는 놈은 참 묘한 친구야! 처음에는 지가 경상(卿相)의 지위에 앉아 정권을 주물렀는데 결국 짤렸거든. 짤렸으면 깨끗하게 물러나야지. 이 놈은 치사하게 자기 아들을 또다시 경으로 앉혔단 말야. 인간이라면 누구인들 부귀를 바라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누만, 이 녀석이 하는 짓이란 홀로 부귀를 다 차지하기 위해 농단을 독점하고 있단 말야!’ 이 계속의 말이 내 상황에 적중하는 말 같애. 계손이 얘기하는 이 농단(龍斷)이라는 말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어! 옛날부터 시장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와서 자기에게 없는 것과 바꾸려고 하는 곳이거든. 그래서 이 교역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감독하는 관리도 있었던 게야. 그런데 어떤 천장부(賤丈夫)【맹자에게서 ‘대장부(大丈夫)’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개념, 탐욕의 비천한 사나이. ‘장부’는 보통 20세 이상에 적용되는 남자의 통칭】 새끼가 나타난 게야. 이 놈이 시장바닥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농단: 龍斷, 농(龍)은 농(壟), 언덕의 뜻. 단(斷) 역시 명사로서 깎아지른 높은 곳】에 올라가서 좌우로 거래현장을 한눈에 다 바라보면서 시장이익을 싹쓸이해버린 것이지. 시장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그 놈을 천하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결국 이 놈에게 과세를 하게 되었지. 상인에게 과세를 하게 되는 역사가 이 천장부놈 때문에 시작된 것이야.” 季孫曰: ‘異哉子叔疑! 使己爲政, 不用, 則亦已矣, 又使其子弟爲卿.’人亦孰不欲富貴? 而獨於富貴之中, 有私龍斷焉. 古之爲市也, 以其所有易其所無者, 有司者治之耳. 有賤丈夫焉, 必求龍斷而登之, 以左右望而罔市利. 人皆以爲賤, 故從而征之. 征商, 自此賤丈夫始矣.” |
‘농단(壟斷, 龍斷)’ ‘천장부(賤丈夫)’ ‘불감청이고소원(不敢請耳固所願)’ 등등의 말이 유래된 이 장은 너무도 풍요로운 감정과 함의를 지니고 있다. ‘농단’이라는 말에 깃든 맹자의 경제사적 통찰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날카로운 견해라 할 수 있다. 상업거래가 서민 중심으로 공평하게 이루어진다면 실로 과세가 필요없다. 과세의 궁극적 이유가 인민의 복지이기 때문에 스스로 이득의 분배가 잘 이루어지면 국가가 나서서 과세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국가가 과세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탐욕의 독점을 지향하는 천장부 놈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중의 이익을 가로채 독점하기 때문에【‘그물질 한다[岡市利]’라고 표현했다】 그 독점 부분에 대하여 국가권력이 중과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대기업은 중과세의 대상이다. 그들은 서민들을 ‘따발총으로 갈기듯이’ 다 죽여가면서까지 자신의 이익만을 독점적으로 극대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빨갱이’를 운운한다면 그들이야말로 빨갱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면 맹자는 ‘천장부의 농단’의 논리를 자신의 지식사회에까지 적용하고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왕도론을 빙자하 여 자신의 부귀를 확대하는 것도 농단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도 떠날 때가 되면 과감하게 깨끗하게 떠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왕도의 꿈이 스러져가는 것을 맹자는 이미 제나라의 실험 속에 서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의 추이는 다음과 같다.
1
직하학파(稷下學派)를 열어 제나라를 부흥시키고 마릉전투로 양혜왕(梁惠王)에게 치욕을 안겨준 제위왕(齊威王)을 이어 제선왕이 즉위하였다.
2
즉위 1년 차에 맹자를 초빙하여 직하학파를 더 양성할 포부를 지니고 있었고 이 때 흔종(釁鍾)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왕도정치에 대한 포부를 긴 시간 동안 얘기했다. (양혜왕 상 7)
3
제나라가 연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맹자는 처음에는 연나라의 내부사정이 하도 더티하여 도덕성을 결하고 있으므로 연나라 정벌을 찬동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공손추 하 8)
4
막상 연나라 정벌이 단순한 제나라의 탐욕으로 변질되자 맹자는 재빨리 연나라의 질서를 회복해주고 빨리 군대를 철수할 것을 종용한다.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였지만 제선왕(齊宣王)은 무리하게 연나라를 점령한 상태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끌었다. (양혜왕 하 10)
5
결국 국제여론이 악화되고 제후국들이 합심하여 연나라를 도왔으며 무엇보다도 연나라 인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게 되자 제선왕은 맹자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면서 맹자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진가(陳賈)가 맹자를 찾아뵌다. (양혜왕 하 11)
6
맹자는 자신의 과오를 근원적으로 뉘우치지 않고 변명하려는 제선왕의 태도를 비난한다. 일식ㆍ월식과도 같은 공개적인 반성을 요구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진 것은 사실이다. (공손추 하 9)
7
그러던 어느 날 맹자는 제선왕(齊宣王)과 다시 화해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정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공교롭게도 제선왕으로부터 사자가 와서 맹자 보고 좀 조정으로 나와줄 수 있겠냐고 전갈이 온다. 자신이 감기가 걸려 외출이 힘들다는 것이다. 맹자는 제선왕이 핑계를 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도 병에 걸려 못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날 맹자는 외출한다. 그런데 제선왕이 정중하게 의사를 보낸다. 이 사건으로 맹자는 집으로도 못 가고 대신 경자의 집에서 묵는다. (공손추 하 2)
8
사실 제선왕은 진실로 아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맹자는 제선왕이 자기를 더 이상 ‘소불소지신(所不召之臣)’으로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환갑도 넘었다. 인생을 다시 생각할 때가 되었다. 결국 큰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떠나자!
9
맹자가 제선왕을 버리고 제나라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제선왕이 맹자의 집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옛 정을 다짐한다. 이에 맹자는 그 유명한 “불감청이 고소원야(不敢請耳固所願也)”라는 말을 한다. (공손추 하 10)
10
제선왕은 제나라 수도 임치의 한 중앙 복판에 맹자학교를 세우고 전 국민이 맹자를 존숭케 하겠다는 야심찬 새로운 대안을 발표한다. (공손추 하 10)
11
맹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단(龍斷)’의 천장부(賤丈夫) 애기를 하고 더 이상 천장부 노릇하기 싫다고 하면서 제나라를 떠날 결심을 굳힌다. (공손추 하 10)
12
맹자는 제나라를 바로 떠나지 않고 주읍에 머물며 제선왕이 잘못을 고쳐 자신의 발걸음을 되돌리게 하길 바랐으나, 고치지 않자 3일째 되는 날에 완전히 제나라를 떠났다. (공손추 하 12)
13
이로써 7년간의 제나라에서 체류가 끝났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대단원의 슬픈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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