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오릉의 증자
3b-10. 제나라의 장수였으며 친구로서 맹자에게 배움을 청하곤 했 던 광장(匡章)【제위왕의 장수로서 진(秦)나라 대군을 대패시킨 적도 있고 제선왕(齊宣王) 때도 오도(五都)의 병을 이끌고 연(燕)나라를 쳤다. 그의 행적은 『전국책(戰國策)』 「제책」과 「연책」, 그리고 『여씨춘추(呂氏春秋)』 「불굴(不屈)」 「애류(愛類)」편에 보인다. 그 나이가 맹자와 비슷하며 친구사이였을 것이다. 맹자의 제자일 수는 없다】이 말했다: “우리 제나라의 현인 진중자(陳仲子)【『순자(荀子)』 「불구」,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우(外儲設右)」에는 ‘전중(田仲)’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순자(荀子)』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는 십이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진중(陳仲)’으로 되어있다. ‘오릉증자(於陵仲子)’라고도 부른다. 순자는 그를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을 추구하며 초연한 듯하기만 하는 위선자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청렴한 이름을 도적질하였으니 진짜 재물을 도적질하는 놈보다 더 비열하다고 하였다. 하여튼 맹자 당대에 꽤 유명했던 인물이었다】야말로 진정코 청렴한 선비라 아니 할 수 있겠소? 그는 제나라의 명가 출신의 사람이면서도 자진하여 편벽한 오릉(於陵)【산동성 장산현(長山縣) 남쪽. 임치에서 약 200리 떨어져 있다】에 살면서, 어떤 때는 빈궁하여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하오. 3일을 못 먹으니 귀에는 아무 것도 아니 들리고,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소. 그런데도 본가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집 근처 우물가에 오얏열매가 있었는데, 이미 풍뎅이가 그 열매를 반 이상 갉아먹었지만, 힘이 없어 땅바닥에 배를 질질 끌며 기어가서 그것을 애써 취하여 먹었다 하오. 세 번을 깨물어 먹으니 겨우 귀가 들리기 시작하고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하는구려. 얼마나 애처롭소. 참으로 청렴한 선비의 극치를 보여주는구료!” 3b-10. 匡章曰: “陳仲子豈不誠廉士哉? 居於陵, 三日不食, 耳無聞, 目無見也. 井上有李, 螬食實者過半矣, 匍匐往將食之, 三咽, 然後耳有聞, 目有見.”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친구여! 나도 제나라사람들이 존경하는 선비들 중에서 반드시 진중자(陳仲子)를 엄지손가락으로 꼽겠소이다. 그러나 어찌 증자를 청렴한 선비라 일컬을 수 있겠소이까? 진중자가 표방하는 그런 류의 절조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렁이가 된 후에나 가능할 일이라 생각되오. 대저 지렁이는 땅 표층에서는 마른 흙을 씹어 삼키며 저 아래에서는 황천(黃泉)의 맑은 물을 마신다 오. 지렁이는 그 이상을 생존을 위해 요구할 것이 없소. 진중자가 물욕을 거부한 것은 지렁이 수준으로 인간을 끌어내리는 짓이요. 그러나 인간이 인간다웁게 살기 위해서는 적당한 주거환경이나 알맞은 식품이 필요한 법이라오. 孟子曰: “於齊國之士, 吾必以仲子爲巨擘焉. 雖然, 仲子惡能廉? 充仲子之操, 則蚓而後可者也. 夫蚓, 上食槁壤, 下飮黃泉. 진중자가 오릉에서 산 집은 백이(伯夷)와 같은 결백한 인간이 지었답디까? 도척(盜跖)과 같은 도둑놈이 지었답디까? 그가 먹은 곡식은 백이가 씨를 뿌렸답디까? 도척이 씨를 뿌렸답디까? 우리가 사는 집과 먹는 곡식은 어떤 인간이 짓고 경작했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니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도덕성이 그런 문제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오, 진중자식으로 도덕관념을 확대해나가면 우리는 살 수도 먹을 수도 없게 되오.” 仲子所居之室, 伯夷之所築與? 抑亦盜跖之所築與? 所食之粟, 伯夷之所樹與? 抑亦盜跖之所樹與? 是未可知也.” 광장이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진중자에겐 별 상관없는 일 이요. 진중자는 자기 스스로 짚신을 짜고 그 부인은 손수 길쌈하고 베틀 짜는 일을 하여 그 물품을 필수품과 교환하여 살아간다. 그러 니까 자신의 노동의 수확으로만 주거와 먹을거리를 스스로 마련한다오.” 曰: “是何傷哉? 彼身織屨, 妻辟纑, 以易之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진중자는 제나라의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집안의 사람이요. 그의 형, 진대(陳戴)는 개(蓋) 땅에서(진대의 채읍采邑) 일만 종의 봉록을 받고 있소. 그러나 증자는 형의 봉록이 불의의 봉록이라고 여기어 그의 보살핌을 거부했고, 형의 고대광실이 불의의 집이라고 여기어 거기에서 붙어살지 않았소. 형을 피하고 엄마와도 떨어져서 오릉에서 구차스럽게 살고 있는 터이었소. 曰: “仲子, 齊之世家也. 兄戴, 蓋祿萬鍾. 以兄之祿爲不義之祿而不食也, 以兄之室爲不義之室而不居也, 辟兄離母, 處於於陵. 그런데 어느 날 증자는 그의 형 집에 돌아왔소. 그런데 어떤 사람이 형에게 산 거위를 바쳐왔소. 증자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소: ’이 놈의 꾸악꾸악 우는 거위를 가지고 도대체 뭘 한단 말인가?‘ 他日歸, 則有饋其兄生鵝者, 己頻顣曰: ‘惡用是鶃鶃者爲哉?’ 어느날 그 어머니는 자식의 건강을 걱정하여 이 거위를 삶아 증자 에게 먹게 하였소. 그때 형이 밖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 그 놈의 꾸악꾸악 거리던 거위로구나!’ 했질 않았겠소. 그러자 그 삶은 거위를 맛있게 먹고 있던 증자가 냅다 밖으로 나가 다 토해버리는 것이었소. 엄마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은 먹지 않고 지 처가 해주는 것은 먹으며, 형의 집에서는 살지 않는 자가 오릉의 집이라고 거기서는 군말 없이 사는 것, 이것이 과연 진중자가 표방하는 이상을 충족시키는 행위란 말이요? 진중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렁이가 되어야만 비로소 그의 절조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외다.” 他日, 其母殺是鵝也, 與之食之. 其兄自外至, 曰: ‘是鶃鶃之肉也.’出而哇之. 以母則不食, 以妻則食之; 以兄之室則弗居, 以於陵則居之. 是尙爲能充其類也乎? 若仲子者, 蚓而後充其操者也.” |
광장의 질문과 맹자의 답변 사이에 정밀한 논리적 맥락이 성립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그 흐름은 규찰할 수가 있다. 진중자의 입장은 앞서 말한 허행(許行, 3a-4)의 입장과 상통한다 하겠다. 그리고 앞 장에서 양주를 이야기했지만, 맹자의 답변은 『열자(列子)』 「양주」편에서 피력되고 있는 양주의 상식주의와 오히려 통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 이 나의 견해를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양주」편을 자세히 읽어보고 나와 토론하는 것이 정당한 자세일 것이다. 양주는 무엇이든지 과도한 집념을 거부한다. 사람은 비판의 대상으로부터도 그 일정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맹자의 테제는 양주라는 안티테제로부터도 상당한 논리적 계발을 받았다. 양주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비슷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해탈은 반드시 삶의 환락과 연결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 한다. 그가 말하는 삶의 환락은 극도의 히도니즘(hedonism)이 아니다. 에 피큐리안적인 쾌락주의나 금욕주의가 아니다. 무엇이든지 과도하게 치우침이 없는 중용적인 향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가 양주를 그토록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은 양주의 ‘위아주의(爲我主義)’에는 사회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개인의 도덕이 반드시 동고동락의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보편성의 성격이 추상적인 보 편성이 아니라 가족주의의 구체적 도덕성으로부터 확대되어 나가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 진중자의 행위는 앞 장에서 말한 ‘피행(詖行)’의 대표적 예라고 말할 수 있다. 주거(住居)식물의 소절에 구애되어 어머니나 형에 대한 인륜의 자연스러운 감정에까지 획일적인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피행의 한 예일 뿐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은 훌륭한 삶의 원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정의 자연스러운 유로를 인위적으로 거부하거나, 일상적인 인간적 삶을 저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극도의 도가적 반문명의 자연주의를 유가는 거부한다. 지렁이에게도 훌륭한 점은 많다. 찰스 다윈의 마지막 연구테마도 지렁이였다. 그러나 인간은 지렁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은 도덕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예술적이어야 하며, 인간의 삶은 문명 속의 삶이라고 하는 대전제를 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행위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인정의 자연을 위배해서는 아니된다. 인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즉하여 중용을 취하는 것이 유교적 윤리학의 일반특색이라 할 것이다.
진중자에 관한 논의는 7a-34에서 같은 철학적 테마로서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상맹(上孟)에 해당되는 3편이 끝난다. 상맹의 특징은 대화체중심으로서 치열한 현장성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역사현장 속에서 생생하게 이루어진 대화를 르뽀형태로 기록한 것을 편집한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음의 「이루」편은 그러한 현장성이 거의 없다. 『논어(論語)』 스타일의 로기온자료의 모음집인데, 그러한 성격은 제일 마지막의 「진심」편과 가장 유사하다. 「진심」편도 로기온자료의 모음집이다. 그러나 「이루」은 「진심」편보다도 보다 다양한 주제와 장르가 광범위하게 편집되어 있다. 「진심」편이 은퇴 후의 맹자의 심경을 기술한 것으로 주제의 형이상학적 깊이가 내면적 상응성을 과시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이루」편은 다양한 주제가 모자이크 된 잡찬(雜纂)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깊게 읽으면 결코 통일성을 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맹자가 인간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을 총체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보통 주석가들이 「이루」편은 후대의 학인들에 의한 보입(補入)이 있으며 7편 중에서 가장 늦게 성립한 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살아있는 맹자의 언설에 기초하지 않은 후대의 날조나 찬입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간백자료의 등장으로 우리는 전국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루」편도 맹자 은퇴기에 성립한 것으로서 맹자와 제자들의 합작품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정치ㆍ윤리ㆍ교육ㆍ경전ㆍ인물평론ㆍ설화에 관한 맹자의 로기온자료, 그리고 맹자의 유제기에 성립한 자료들이 풍부하게 배열되어 있어(상편 28장, 하편 33장, 도합 61장), 맹자의 사상과 행동을 복원하는 데 더없이 소중한 문헌이다. 그리고 또 유교정신의 진수를 파악케 하는 문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 우리나라 경복궁(景福宮) 비현각(丕顯閣)
우리나라 경복궁 비현각 현판은 조선의 왕세자들이 사부를 모시고 공부[書筵]이 하던 궁에 달린 것이다. 그 출전은 본장에서 인용된 『서경』의 말이다. 우리나라 세자들이 모두 문왕의 덕성을 본받기를 바라는 심정이 서려있다. ‘비현(丕顯)’이라는 것은 ‘크게 현창한다’는 뜻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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