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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맹자한글역주, 등문공장구 하 - 9. 일치일란(一亂一治)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등문공장구 하 - 9. 일치일란(一亂一治)

건방진방랑자 2022. 12. 17.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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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일치일란(一亂一治)

 

 

3b-9. 맹자가 제나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맹자의 제자인 공도자(公都子)맹자의 제자로서 매우 중후한 고제(高弟) 중의 한 사람이다. 공도(公都)가 복성인데 이름은 모른다. ‘공도자라는 이름은 공손추5, 등문공5, 이루30, 고자615, 진심431번씩, 고자53번 모두 9번 나오고 있다. ‘()’가 붙은 것을 보면 그 또한 문도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 같다. 공도자 관련 파편은 그의 문인들에 의하여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가 맹자께 아뢰었다: “바깥 사람들이(당시 제나라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 모두 선생님께서 너무 지나치게 논쟁을 좋아하신다고 수군거립니다. 감히 묻겠습니다만 왜들 그렇게 생각할까요?”
公都子曰: “外人皆稱夫子好辯, 敢問何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모르는 소리! 내가 어찌 논쟁을 좋아한단 말인가? 나는 단지 부득이(不得已)해서 논변하고 있을 뿐이다. 하늘 아래 인류가 출현한 지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한 시기는 혼란스럽고 한 시기는 질서가 잡히고 하는 일치일란(一治一亂)의 역사가 반복되어왔다. 즉 인류의 역사는 일치일란의 순환이었다.
孟子曰: “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
 
요임금의 치세시기에는 수로가 막혀 하천이 역류하여 나라 전체가 범람하여 뱀과 용이 같이 살았고 백성들은 편안한 삶의 거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정착생활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저지대의 사람들은 나무 위에 원두막을 엮어 살았고, 고지대의 사람들은 동굴을 나란히 파서 삶을 영위하였다.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에 이르기를, ‘강수(降水), 나 순()에게 경고를 주는구나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강수(洚水)는 곧 홍수(洪水)를 일컫는 것이다이상의 상황이 제1(第一亂)이다.
當堯之時, 水逆行, 氾濫於中國. 蛇龍居之, 民無所定. 下者爲巢, 上者爲營窟. : ‘洚水警余.’ 洚水者, 洪水也.
 
순은 신하 우()로 하여금 이런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우는 땅 을 파서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도록 만들었고, 뱀과 용을 몰아 내어 늪지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리고 강물은 준설된 제방 사이로만 흐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양자강ㆍ회하(淮河)ㆍ황하ㆍ한수(漢水)이다. 이로서 위험한 범람이 멀리 사라져 땅이 드러나고, 사람을 해치는 새와 짐승이 사라졌다. 드디어 사람들은 평지에서 취락공간을 얻어 정착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이상이 제1(第一治)이다.
使禹治之, 禹掘地而注之海, 驅蛇龍而放之菹. 水由地中行, , , , , 是也. 險阻旣遠, 鳥獸之害人者消, 然後人得平土而居之.
 
요임금ㆍ순임금이 죽고나서는 성인의 도가 쇠락하고 폭군(暴君)이 번갈아 일어났다. 그들은 민가를 헐어 금붕어ㆍ잉어를 사육하는 연못으로 만들어버리니 백성들은 편안히 생활할 수 있는 곳이 없어지고, 농전(農田)을 파괴하여 그들의 화원과 수렴하는 목장으로 만들어버리니 백성들은 의식의 근거가 없어지고 말았다. 사설(邪說)과 폭행(暴行)이 다시 일어나고, 화원과 목장, 연못, 늪지가 다시 많아져 문명을 해치는 금수가 다시 몰려들게 되었다.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의 시대에 이르게 되면 천하는 또다시 대란의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이상이 제2(第二亂)이다.
堯舜旣沒, 聖人之道衰. 暴君代作, 壞宮室以爲汙池, 民無所安息; 棄田以爲園囿, 使民不得衣食. 邪說暴行又作, 園囿, 汙池, 沛澤多而禽獸至. 及紂之身, 天下又大亂.
 
이에 주공(周公)은 형 무왕(武王)을 도와 주왕(紂王)을 주살하고, 또 주왕의 동맹국이었던 엄()나라를 정벌한 지 3년만에 그 임금을 토벌하였다. 주왕의 총애하는 신하 비렴(飛廉)비렴(飛廉)’은 본시 ()’ ‘()’ ‘()’이라는 글자의 복성모적 성격과 관련 있는 말 이다. 우리말의 바람의 어원과도 관련이 있다. 여기서도 비렴을 바다와 관련시켰고, 진본기에도 이들의 모습이 새를 닮았으나 사람의 말을 하였다고 기록해놓고 있는 것 을 보면 비렴바람’ ‘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진본기에는 비렴이 오래(惡來)를 아들로 두었는데, 비렴은 달리기를 잘하였고 오래는 힘이 세었다. 부자 두 사람은 자기 들이 가진 재주와 힘으로 주왕을 섬겼는데, 무왕의 정벌시 아들 오래만 죽고 아버지 비 렴은 북방으로 출사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비렴은 곽태산(霍太山)[산서성 곽현(霍縣) 동남쪽]에 제단을 쌓아서 주왕께 보고하였는데 그때 석관 하나를 얻는다. 그 석관에 천제께서 비렴을 은나라의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렴에게 석관을 하사하여 우리 씨족을 번창하게 하노라라고 명()하였다. 이 비렴의 후예가 조씨(趙氏)가 되었고 이들이 진()나라를 세웠다. 따라서 맹자의 증언과 사기(史記)의 기록이 다르다을 해변으로 구축하여 살육하였다. 그리고 대적하는 나라들을 멸한 것이 50이나 되었다. 또한 호랑이ㆍ표범ㆍ코뿔소ㆍ코끼리를 멀리 쫓아내어 사람 사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하니, 천하사람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周公相武王, 誅紂, 伐奄, 三年討其君, 驅飛廉於海隅而戮之. 滅國者五十, 驅虎, , , 象而遠之, 天下大悅.
 
()주서 군아(君牙), 조기는 일편(逸篇)이라 하였고, 주석가들은 현존하는 것은 매색(梅賾)의 위작이라고 말하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에는 이를 일러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고 있다: ‘~ 크게 빛나는도다! 문왕의 원대한 계획이여! ~ 잘도 계승하였도다! 무왕의 맹렬한 무공이여! 이 두 분의 신적인 공덕은 우리 후대의 사람들을 깨우쳐주시고 도와주시니, 모든 것을 바름으로써 하사, 우리로 하여금 결함이 없도록 만드시는도다.’여기까지가 제2(第二治)이다
: ‘丕顯哉, 文王謨! 丕承哉, 武王烈! 佑啓我後人, 咸以正無缺.’
 
그러나 그 후 다시 세상이 쇠퇴하고 왕도가 쇠미(衰微)하게 되니, 사설과 폭행이 다시 구름처럼 일어났다.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아들된 자로서 그 아비를 시해하는 자 가 있게 되었다.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여기까지가 제3(第三亂)이다
世衰道微, 邪說暴行有作, 臣弑其君者有之, 子弑其父者有之.
 
공자(孔子)께서는 이러한 세태를 깊게 우려하시어 위대한 역사서인 춘추를 작()하시었다. 춘추와 같은 웅대한 역사서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본래 천자의 직분에 속하는 것이며 공자와 같은 소인(素人)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자는 깊은 우려 때문에 천자를 대신하여 춘추를 지으신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나의 생애의 진정한 뜻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오직 이 춘추로써 할 수밖에 없고, 나의 월권, 나의 삶을 정죄하는 것도 오직 이 춘추로써 할 수밖에 없을 것이로다!’여기까지가 제3(第三治)이다
孔子懼, 春秋. 春秋, 天子之事也. 是故孔子曰: ‘知我者其惟春秋乎! 罪我者其惟春秋乎!’
 
그런데 공자가 돌아가시고 난 후로도 성왕(聖王)은 출현하지 않았으니, 제후들이 방자(放恣)해져서 천자를 우습게 알고 참월을 일삼았다. 따라서 민간의 처사(處士)들도 마구 제멋대로 무책임한 이론(異論)을 일삼아, 양주(楊朱)양주는 성이 양()이고 명이 주()이다. ()는 자거(子居)이다. 장자(莊子)』 『회남자(淮南子)』 『열자(列子)에 그에 관한 고자료를 엿볼 수 있으나, 특히 열자(列子)양주(楊朱)편은 양주의 사상의 전모를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과거에는 열자(列子)그 자체를 후대의 위서(僞書)로 보아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러한 터무니없는 의고풍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열어구(列禦寇)는 도가계열의 정()나라 은자로서 실존인물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열자(列子)에 수록된 양주(楊朱)편도 맹자의 논의와 관련하여 꼭 참고해야 한다. 과거에는 맹자의 논의만을 진실한 당대기록으로 보고 열자(列子)를 배척하였으나, 현재 우리는 열자』 「양주편 또한 맹자와 동시대의 파편으로서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와 묵적(墨翟)묵적에 관해서는 3a-5에 기출 묵자(墨子)라는 서물도 맹자와 같이 읽어야 하는 소중한 문헌이다. 목적은 공자가 죽은 직후에 태어나 맹자가 태어나기 120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의 언론이 천하를 휘덮게 되었다. 천하의 모든 언론이 양주에게 줄을 서지 않으면, 반드시 목적에게 줄을 서야만 하는 판세가 되고 말았다.
聖王不作, 諸侯放恣, 處士橫議, 楊朱, 墨翟之言盈天下. 天下之言, 不歸楊, 則歸墨.
 
양씨는 나라는 살아있는 개체 실존만을 본위로 여긴다. 그래서 나를 위하지 않는 모든 논의를 배척한다. 그러니 이것은 무군(無君)의 무정부주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묵씨는 이와는 정반대로 나를 버리고 모든 사람을 무차별하게 사랑하라고 한다. 이것은 무부(無父)의 비가족주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부무군, 즉 지애비도 없고 지임금도 없으면, 가족도 없고 사회도 없는 것이니 문명이 붕괴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금수로 전락하고 만다.
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
 
노나라의 현인 공명의(公明儀)3a-1에 기출, 맹자와 동시대인. 3b-3, 4b-24에도 나온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푸주간에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 살찐 말이 있는 데 반하여 백성들의 얼굴에는 굶은 기색이 완연하며, 들판에는 아사자의 시체가 뒹굴고 있다. 이것은 짐승을 거느리고 나아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과 하 등의 차이가 없다.’이 표현은 맹자의 말로서 1a-4에 나왔다. 그러나 그때도 맹자는 공명의의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맹자는 공명의와의 대화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제4(第四亂)이다. 4란은 맹자의 당대를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면 제4(第四治)의 대업은 누구에게로 돌아갈까? 그 대답은 명백하다. 암암리 맹자는 제4치의 주체로서 자임하면서 호변할 수밖에 없는 부득이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公明儀曰: ‘庖有肥肉, 廐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
 
양ㆍ묵의 도를 종식시키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날 수가 없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곧 사설(邪說)이 순박한 백성을 호도하면서 사기를 치게 되고 인의라는 인간사회의 정당한 도덕성이 충색(充塞)되고 마는 것이다. 인의가 충색되면, 곧 짐승을 거느리고 나아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 정당화되고, 결국 사람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사회상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점이 몹시 두렵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나와 선성(先聖)의 도를 방어해야만 했고, 또 양주와 목적의 학설을 물리쳤어야 했으며, 이 세상의 막돼먹은 무책임한 언론들을 방축하여 사설(邪說)을 신봉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판을 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려고 애써왔다. 사실이 순진한 백성들의 마음에 깃들게 되면 그들이 하는 일에 해가 되고, 그들이 하는 일에 해가 되면 결국 우리 인간세의 정치, 그 전체가 망가지고 만다. 그러니 내가 힘쓰는 일이 얼마나 긴요한 일인가? 우리 시대에 성인이 다시 나타나신다 해도 나의 이 말에 찬동하실 것이다.
楊墨之道不息, 孔子之道不著, 是邪說誣民, 充塞仁義也. 仁義充塞, 則率獸食人, 人將相食. 吾爲此懼,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 作於其心, 害於其事; 作於其事, 害於其政. 聖人復起, 不易吾言矣.
 
옛날에 우임금이 홍수를 막아 천하가 태평해졌고(1), 주공이 이 적을 겸병하고 맹수를 구축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였고(2), 공 자가 춘추를 지으매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3), 노송 비궁(閟宮)3a-4에 기출에 이런 가사가 있다: ‘아무리 깨우쳐도 깨닫지 못하는 서쪽의 오랑캐 융과 북쪽의 오랑캐 적을 이제 쳐부수노라. 남쪽의 야만국 초나라와 그의 동맹국 나라를 이제 징벌하노라. 그 누가 우리의 앞길을 막을소냐!’ 지 애비도 모르고 주군을 무시하는 오랑캐들은 이미 주공께서 징벌하신 바이다.
昔者禹抑洪水而天下平, 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 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 ‘戎狄是膺, 荊舒是懲, 則莫我敢承.’ 無父無君, 是周公所膺也.
 
나 또한 인심을 바로잡기를 원하지 아니 할 수 없고, 사설(邪說)을 식멸하고, 피행(詖行)극단으로 치우친 사회적 행동을 막으며, 음사(淫辭)를 방축하고, 대우(大禹)ㆍ주공(周公)ㆍ공자, 3인의 성인의 대업을 계승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하여 바깥사람들이 한가롭게 나보고 논쟁을 좋아한다는 평을 할 수 있겠느뇨? 나는 진실로 진실로 부득이할 뿐이로다. 나뿐만이 아니라 진실로 훌륭한 언변으로써 양ㆍ묵을 막아낼 수 있는 자는 모두 성인의 길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我亦欲正人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 以承三聖者; 豈好辯哉? 予不得已也. 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

 

참으로 장쾌한 맹자의 논설을 우리는 들었다. 이장은 보통 공도자장(公都子章)’이라고 불리는데 맹자전 텍스트 중에서도 매우 인용빈도수가 높은 명프라그먼트이다. 우선 이 장에서 비로소 춘추가 공자의 ()’이라고 하는 설화가 정착하게 되었고, 이 맹자의 논설을 사마천이 계승하여 공자세가에 반영하였다. 여기 지아자기유춘추호(知我者其惟春秋乎), 죄아자기유춘추호(罪我者其惟春秋乎)!’세가후세지구자이춘추(後世知丘者以春秋), 이죄구자역이춘추(而罪丘者亦以春秋)’라는 말로 나온다.

 

내가 대만에 유학하였을 때 요아브 아리엘(Yoav Ariel)이라는 텔 아비브 대학의 철학과 출신의 유대인 학자가 중국철학을 공부하러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에 왔다. 나는 그와 단짝 친구가 되었는데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중국철학을 공부할 마음을 먹게 되었나?”

나는 중국인의 사유는 우리 유대민족의 잠언류의 지혜문학으로만 생각했는데 맹자영역본을 읽고 생각이 180° 바뀌었다. 맹자는 치열한 논쟁의 대가이며, 그의 논쟁방식이 뚜렷한 철학적 테제를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의 논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이 희랍인들의 대화보다도 더 치열하다는 느낌을 나에게 주었다. 그래서 옛 중국에 도 서양인들이 말하는 바 철학의 원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배우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요아브 아리엘과 더불어 나의 새파란 청춘의 열정을 맹 자의 호변에 못지않은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데 진력해야만 했다. 내 인생에 가장 거대한 철학적 도약으로, 그 추억이 내 의식의 여정에 깊게 새겨져 있다. 하여튼 맹자의 호변은 오늘날의 요아브 아리엘에게 뿐만 아니라, 이미 당대에 유명했던 모양이다. 이것을 맹자는 여부득이야(予不得已也)’라는 한마디로써 일축하고, 부득이라는 변명을 상술하기 위하여 장대한 역사적 논술을 펼친다. 그리고 그 논술을 다시 부득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그는 부득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가 생각하는 인류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사관을 제시한다. 그 사관은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인류의 역사를 진보한다고 보지 않는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진보(Progress)’라는 것은 오직 역사 밖에 역사의 목표를 설정하는 외재적 사관에서만 성립하는 픽션이다. 서구인들은 진보라는 말 한마디로 19세기ㆍ20세기의 인류사를 말아먹으려고 애써왔다. 참으로 거대한 제국주의적 사기(imperialistic fraud)’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보라는 이름 하에 모든 토속적 문화를 파괴하고 모든 토착적 종교질서를 기독교논리화 하는 음모를 가차없이 진행시켰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횡포의 정당화는 역사의 진보그 한마디로써 안전하게 무마되었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기요 허구요 찬탈이요 겁탈이요 악행이요 악업이다. 맹자는 인류의 역사를 우리 몸의 리듬처럼 생각한다. 우리 몸은 피곤하면 휴식을 취하게 마련이고, 휴식을 충분히 취하여 건강한 컨디션이 마련되면 또다시 피곤해질 길을 찾는다. 피곤과 휴식, 혼란과 안정의 끊임없는 반복 속에 우리는 죽어갈 뿐이다. 인류의 역사가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는 맹자의 생각은 요즈음 물리학적 우주론으로 말하자면 빅뱅이론(Big-Bang theory)’보다는 스테디 스테이트이론(Steady-State theory)’에 가까운 것이다. 유대교-기독교전통처럼 천당이니 종말이니 하는 따위의 목적이 없는 이상, 맹자의 사유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일치일란의 반복일 뿐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가? 무엇이 과연 우리가 존재하는 가치며 소이연인가?

 

맹자는 우리 삶의 가치를 거부하지 않는다. 일치일란은 니힐리즘이 아 니다. 맹자는 단지 인간이 역사에 부여하는 환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일치일란은 생체의 리듬처럼 유기체적 역사흐름의 리듬일 뿐이다. 맹자가 좁은 의미에서의 동기나 목적을 강렬하게 거부하는 논리를 우리는 이미 등문공4에서 접하였다. 우리 삶의 가치는 맹자에게 매우 명료한 것이다. 그것은 일치일란의 역사흐름 속에 왕도를 구현하는 것이다. 왕도는 영원한 이상이며, 일치일란의 어느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정언명령이다. 그가 말하는 성선(性善)’왕도에로의 참여에 관한 본성적 근거일 뿐이다.

 

일치일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란()에서 치()로 넘어가는 역사의 길목이다. 그때는 왕도의 챈스가 맥시마이즈되며, 왕도를 구현하는 왕자와 그를 보좌하는 신하영웅이 등장한다. 그 세 번의 케이스를 우와 주공과 공자로 보았고, 마지막 네 번째 치()자 챈스를 자기의 호변(好辯)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정세변화로 본 것이다. 그 호언(豪言)의 의 진위를 떠나서 맹자의 논리는 당당하고 대장부(大丈夫)다고 논리적으로도 정당하다. 그런데 바로 세번째 케이스로서 공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작업이야말로 맹자에게는 가장 핵심적 사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야만 왕도강설자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공자의 실루엣과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맹자가 말하는 공자는 이미 춘추시대의 역사적 공자가 아니라, 맹자화된 공자, 다시 말해서 왕도강설자화된 공자, 전국시대화 한 공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핵심으로 제시하는 맹자의 복안이 바로 공자구춘추작(孔子懼春秋作)’이다.

 

공자가 과연 춘추라는 역사 경문을 지었을까? 누구든지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이루21에 보면 기문즉사(其文則史)’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춘추의 문장은 노나라의 사관이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맹자 자신이 천명하고 있는 모순된 견해이다. 공자는 춘추를 짓지 않았다. 공자에 앞서 이미 경문(經文)’은 존재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해 제자들에게 강술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이라는 의미도 지었다라고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냥 넓은 의미로 일으켰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공자의 춘추에 대한 견해는 다양한 전승으로 추로 지역, 제나라 지역, 위나라 지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고 하는 테제를 역사적 사실로서 확정지음으로써 맹자는 중국역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그 공자 가 춘추를 지은 대의를 다시 자기가 구현한다는 적통론을 선명하게 부각시켰고 그에 따라 양ㆍ묵의 이단사설을 배격하는 자신의 논쟁적 입지를 대국적으로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일난(一亂) 일치(一治)
洪水, 禽獸 堯舜
暴君 文王, 武王
亂臣, 賊子 孔子(春秋)
楊朱(無君), 墨翟(無父) 孟子(好辯, 闢異端)

 

 

 

 

인용

목차 / 맹자

전문 / 본문

중용 강의

논어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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