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시에 담은 풍속화
① 조선의 풍경을 담은 시들
1. 산수화(山水畵)의 특징
1) 사람을 잘 그리지 않고, 그린다 해도 신선의 풍모를 지니게 그림.
2) 우리 회화사에서 조선의 산수에 조선 옷과 갓을 쓴 조선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8세기 무렵부터임.
3) 정선(鄭敾)이 조선의 산수를 화폭에 담아내고 또 그 안에 조선에 사는 사람을 그림.
2. 진시(眞詩) 운동이 펼쳐지다
1) 정선(鄭敾)이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형제가 진경(眞景)과 진정(眞情)을 드러낸 진시(眞詩)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계승한 것임.
2) 16세기 후반부터 당시를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고 그 중 뛰어난 작품은 당나라 시인의 시집에 넣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 호평을 받음.
3) 17세기 무렵에는 명 복고풍이 일면서 질박한 고대의 시를 배우고자 함.
4) 당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당시(唐詩)와 비슷해지기를 추구했기에 개성을 잃었고, 명나라 복고풍(復古風)을 배우려는 사람은 고대시의 자연스럽고 질박한 맛을 배우지 못해 허울만 남음.
5) 그래서 김창협(金昌協) 형제는 자연스러움과 질박함이라는 고대 시의 정신을 배우되 시인이 보고 느낀 진경(眞景)과 진정(眞情)을 시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임.
3. 이규상(李圭象: 1727~1799)
1) 자(字)는 상지(像之), 호(號)는 유유재(悠悠齋)ㆍ일몽(一夢)
2) 쉰 살에 부인을 잃고 곤궁하게 오직 시와 문에 마음을 붙이면서 살았음.
3)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이 문학이고 또 평생 공을 들인 것이 시라 했음. 자신의 시집 『일몽고(一夢稿)』의 앞에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이 문학이고 또 평생 공을 들인 것이 시라 함. 평생 시만큼 좋아하는 것이 없었기에 시를 보면 배 큰 사내가 음식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샘으로 달려가는 형상이라 함. 그것이 불가에서 이른 삼생(三生)의 결습(結習)이다.”라고 씀.
4)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으로 조선 후기 문학사를 증언하며 주목을 받았지만, 이규상은 스스로를 ‘시인’으로 여김. 홍세태(洪世泰)와 이병연(李秉淵)이 자타가 공인하는 시인이었고, 이규상 역시 시인이었다.
5) 시의 성과는 조선적인 당풍(이종묵 교수가 만든 말)이었음.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는 듯한 흥감이 있음.
4. 이규상(李圭象)의 「전가행(田家行)」
鷄冠迥立鳳仙橫 | 맨드라미 우뚝 서고 봉선화는 늘어져 |
瓠蔓縈莖紫翠笳 | 덩굴진 박 줄기 자줏빛 가지와 엉켜 |
一陣朱蜻來又去 | 한 무리의 고추잠자리 오고 또 가네. |
雲高日燥見秋生 | 구름은 높고 해 말라 가을이 생겨남을 보이네. |
1) 이 그림은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보통의 산수화와는 조금 다르다. 먼 배경에 산을 그리고 한쪽에 개울을 그려 넣을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러한 산과 물이 없어도 무방하다.
2) 맨드라미, 봉선화, 고추잠자리도 붉고, 가지는 자줏빛, 박 줄기는 파란색이어서 색감이 산뜻함.
3) 경(景)을 위주로 하고 정(情)은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시골살이의 흥이 절로 일음.
沙融溪暖荻芽微 | 눈 녹고 시내 따스하니 억새 싹이 작게 폈고 |
靑靄初收白鷺飛 | 푸른 이내 처음 사라지니 백로 날아간다. |
田婦亦知春色愛 | 농촌 아낙 또한 봄색의 아까움을 아노니 |
鵑花一朶揷釵歸 | 진달래 한 가지 비녀처럼 꽂고 돌아오누나. |
1) 이 시도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색채의 대비가 잘 보임.
2) 이 그림에서 가장 선명한 색깔은 시골 아낙이 비녀 곁에 꽂은 진홍빛 진달래꽃이고, 흥에 겨워 콧노래를 부르는 아낙의 모습이 청춘하다.
3) 조선 시대 문인들은 파리하게 굳은 얼굴의 노동자를 그리는 걸개그림과 같은 시를 짓기도 했고,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현실주의적인 시각으로 그려 낸 것이 그리 드물지 않으나, 이규상은 아픈 현실을 그림으로 그리지는 않았음.
朝出平田薄暮還 | 아침에 밭에 나가 저물녘에 돌아와 |
夕炊纔了月升山 | 저녁밥 지을 불 때니 그제야 달이 산에 떴구나. |
鳴舂更備明晨飯 | 방앗소리 울려 다시 내일 새벽밥을 준비하노니, |
休息惟於片夢間 | 조각 꿈속에 휴식이 있구나. |
1) 따뜻하다. 호롱불이 새어 나오는 한적한 시골의 모습이 훈훈하게 다가온다.
2) 이규상은 훈훈하고 건강한 백성들을 낭만적으로 그려냄.
5. 이규상(李圭象)의 「촌요(村謠)」
茅簷四面竹籬遮 | 초가집에 대나무 울타리 사면으로 둘러치니 |
射出燈光一道斜 | 한 줄기 등불이 새어 나온다. |
少婦罷舂先倦睡 | 아낙 절구질 마치고 먼저 잠들었고, |
老姑閒坐運繅車 | 늙은 시어머니 한가로이 앉아 물레 돌린다. |
豆飯泔漿暖似春 | 콩밥과 미음 장국 따뜻하기가 봄 같고, |
菁根軟白作菹新 | 무뿌리 연하고 새하얘 겉절이 만들었네. |
田家晩食甘如蜜 | 시골의 늦은 식사, 달기가 꿀 같으니, |
不識人間有八珍 | 알지 못하겠네, 인간 세상의 여덟 가지 진미가 있다는 걸. |
藁莖織處葛皮連 | 짚신 짜는 곳에 칡껍질 널부러져 있으니, |
一對鞋成直一錢 | 짚신 한 켤레면 한 푼의 가치라네. |
累累擔肩翁出市 | 켜켜이 어깨에 매고 노인네 저자에 나가니, |
換來精粲與乾鯿 | 정미된 쌀과 건어물 바꿔서 돌아오리. |
食簞納鼎竈微煙 | 도시락의 밥 솥에 넣으니 부뚜막에 잔잔히 연기 일고 |
燈下村娘枕手眠 | 등불 밑 시골 새색시 손 베개하며 잠들었네. |
夫壻鷄鳴趁遠市 | 남편은 닭 울 때 먼 시장으로 나갔으니, |
歸時說在月高懸 | 돌아와선 “달이 높다랗게 떠있던데.”라고 말하겠지. |
1) 아낙은 집에서 남편을 기다린다. 아직 돌아오려면 시간이 한참 있어야 하나, 아낙은 불을 지펴 데우기 시작하다가 꾸벅꾸벅 존다.
2) 아내의 “행여 밤길에 다치지나 않았나요?”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고, 남편의 한마디로 짐작할 수 있게 되어 있음.
3) 이규상은 농촌의 풍광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양하면서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냄.
② 김홍도의 풍속화 같던 이규상의 시
1. 이규상(李圭象) 시의 특징
1) 이규상이 시로 그린 그림은 정선의 그림이라기보다 김홍도의 속화(俗畫)를 닮음.
2) 강세황(姜世晃)의 『단원기(檀園記)』에선 “화가들은 각각 하나의 재능을 떨쳤지 다른 기예를 겸하지 않는다. 단원 김홍도는 우리나라 근세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하여 못 그리는 게 없었다. 인물과 산수, 불화와 꽃이나 과일그림, 새와 벌레와, 물고기와 게와 같은 것에 이르면 모두 오묘한 등급에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니 옛 사람에 비교하더라도 거의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더욱이 우리 조선의 인물과 풍속을 잘 묘사했으니, 예를 들면 선비가 공부하는 모습, 상인들의 시장에 가는 모습, 나그네와 규방 아녀자의 모습, 농부와 길쌈하는 여인의 모습, 몇 겹의 방이나 여러 문이 모습, 황량한 산과 흐르는 물의 모습이 사물을 곡진하게 그려내 형용함이 어긋나질 않았으니 이것은 예전에 일찍이 없던 것이었다[古今畫家, 各擅一能, 未能兼工. 金君士能生於東方近時, 自幼治繪事, 無所不能. 至於人物山水, 仙佛花果, 禽蟲魚蟹, 皆入妙品. 比之於古人, 殆無可與爲抗者. 尤長於神仙花鳥, 已足鳴一世而傳後代. 尤善於摸寫我東人物風俗, 至若儒士之攻業, 商賈之趍市, 行旅閨闈, 農夫蠶女, 重房複戶, 荒山野水, 曲盡物態, 形容不爽, 此則古未嘗有也].”라며 단원을 평가했음.
3) 이규상은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서 18세 연하인 김홍도의 그림을 두고 “시속의 모습을 잘 그려 세상에 속화체(俗畫體)라 일컬어졌다”고 했는데 김홍도가 그림으로 그린 것을 이규상은 시로 그려냈던 갓임.
2. 이규상의 「인주요(仁州謠)」
仁州風俗似窮鄕 | 인천의 풍속이 궁벽진 시골 같아 |
不識靑雲有玉堂 | 청운의 옥당이 있다는 걸 모르네. |
女戴草囊男氈笠 | 아내는 광주리 이고 남편은 전립 쓰고, |
日生忙出蛤魚場 | 해 뜨자 바삐 조개 어장에 나가보네. |
編箔排椽截海橫 | 발을 엮고 서까래 늘어놓아 가로지른 바다 끊으니, |
重重圈作內中城 | 겹겹이 이은 안쪽은 내성 같구나. |
潮來潮去須臾後 | 조수 들락날락하니, 잠시 후 |
螺蟹魚蝦戢戢盈 | 소라, 게, 물고기, 새우가 꽉꽉 들어찼구나. |
童蛤淺埋大蛤深 | 어린 조개 얕은 곳에, 큰 조개 깊은 곳에 묻혀 |
絡蹄巢穴杳難尋 | 낙지가 숨은 구멍 까매 찾기 어렵네. |
浦娘競把尖鉤鐵 | 갯벌의 아낙들 경쟁하듯 날카로운 갈고리 잡고서 |
細掘融泥似捻針 | 갯벌 세밀하게 파내는데 바느질 하는 것 같구나. |
1) 개항 이전의 인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귀한 자료.
2) 서해에서 쉽게 볼 수 있던 바닷가 마을의 모습을 아주 긴밀하게 그림.
③ 이규상 외 사람의 작품들
1. 18세기 한시의 특징
1) 조선의 풍광을 직접 보고 흥감을 적는 것이었음.
2) 김창흡(金昌翕)을 위시하여 18세기 한시단(漢詩壇)에서 우뚝한 존재들은 학통이나 당색을 불문하고 이런 흐름을 따름.
2. 유목양의 「목동(牧童)」
驅牛赤脚童 滿載秋山色 | 소 끄는 맨발의 아이, 한 가득 가을 산색을 실었구나. |
叱叱搔蓬頭 長歌歸月夕 | 이랴 이랴 봉두난발 긁적이며 달 뜬 저녁에 긴 노래 부르며 돌아오네. |
1) 무명의 인물이지만,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아름다운 이 시 한 편이 수록되어 후세에 전함.
2) 조선후기의 한시에 담긴 풍경에는 산과 물보다 먹고 살려고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백성이 중심에 있음.
3. 이미의 「촌가잡영(村家雜詠)」
溪橋中斷兩成洄 | 시냇가 다리 끊어진 곳 양쪽에서 소용돌이 일고, |
柳岸荊扉爲半開 | 버들 언덕의 사립문은 반쯤 열려 있네. |
包藿裏鹽何漢子 | 콩잎 속에 소금을 싼 저 사내는 누구인가? |
暮從都市賣瓜廻 | 저녁에 도읍의 저자에서 오이 팔아 돌아오겠구나. |
1) 문집을 남기지 못해 인명사전이나 문학사에 이름이 오르지 못했지만 남용익이 자신을 이어 대제학을 지낼 만하다고 칭찬했을 만큼 문학이 뛰어났고, 당시 명사들의 묘지를 여러 편 제작한 바 있음.
2) 개울과 버들 언덕이 배경으로 나오지만 중심에는 열심히 가꾼 참외를 따다가 장터에 가서 소금으로 바꾸어 이를 콩잎에 소중히 싸서 돌아오는 백성들의 모습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음.
婦坐搯兒頭 翁傴掃牛圈 | 며느리는 앉아 아이 머리 땋고 노인은 외양간 쓰네. |
庭堆田螺殼 廚遺野蒜本 | 뜰엔 밭에서 잡은 소라 껍질 쌓여 있고, 부엌엔 밭의 마늘 뿌리 남아 있구나. |
1) 가난한 살림이지만 근실한 농촌의 모습을 훈훈하게 그림.
2) 바로 이런 훈훈함이 조선 후기 풍속화를 그린 사람의 뜻이요, 이를 시로 쓴 사람의 뜻이라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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