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점철성금(點鐵成金)의 시학
① 문학을 새롭게 하기 위해 일상어를 쓰다
1. 이속위아(以俗爲雅), 비속어를 잘 사용하여 새로움을 얻는 방법
1) 황정견(黃庭堅)은 문학이 새로워질 수 있는 대안으로 ‘이속위아(以俗爲雅)’와 ‘이고위신(以古爲新)’을 대안으로 내세움.
2) “비속한 것을 이용하여 우아하게 하고 옛것을 사용하여 새롭게 하는 것은 손자와 오기의 병법처럼 백전백승이다.”라고 함.
3) 시를 짓는 사람들은 비속한 단어를 잘 쓰려 하지 않는데 비속한 단어를 잘 구사하면 새로움을 얻을 수 있었음.
4) 18세기 문인 성섭(成涉)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필원산어(筆苑散語)』에서는 “대게 시인들이 용사(用事)한 것이 비록 이어(俚語)라 하더라도 점화(點化)를 잘하면 점철성금(點綴成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5) 점철성금(點綴成金)은 ‘고철을 녹여서 금덩이를 만든다’는 뜻으로 道家의 말이지만, 진부한 소재를 사용하여 참신한 표현을 만들려 함.
2. 이고위신(以古爲新), 낡은 것을 잘 활용하여 새로움을 얻는 방법
1) 예전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는 말을 자주 썼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쓰지 않는데, 이런 낡은 클리셰도 젊은 문인의 시에서는 참신한 비유가 되기도 함.
2) 이색(李穡)은 속담을 시에 집어넣음으로 새로움을 만들어냈음.
雀晝傳言鼠夜傳 | 참새가 낮에 한 말을 쥐가 밤에 전하니, |
耳垣相屬古猶然 | 담에도 귀가 붙었다는 말이 예로부터 한 가지라, |
添不曾知減却知 | 더해지는 것은 몰라도 주는 것은 아는 법, |
由來人事畏分離 | 예로부터 인간사는 떨어져 나가는 것 겁낸다네. |
前若貧居後富居 | 처음에는 가난해도 나중에는 부자 된다 하였으니, |
人言此語定非虛 | 사람들의 이 말이 정말 빈 말이 아니구나. |
田字窓臨口字庭 | 전자 창 앞에 구자 뜰이 있는데, |
炊煙朝暮鎖虛廳 | 밥 짓는 연기 아침저녁 빈 마루를 감싸네. |
雀飛東海上 | 참새가 동이(동분銅盆의 고어임) 위로 날아간다. |
② 노수신의 지명과 관직명, 이름을 사용한 새로운 시
1. 우리말로 된 단어와 속담을 끌어들여 ‘이속위아(以俗爲雅)’를 실천하기도 함.
1) 이색(李穡)이 이 분야의 선구자로, 서거정은 『동인시화(東人詩話)』 하권 59번에서 ‘이색의 시가 힘이 있고 범상하지 않지만, 그의 시를 잘못 배우면 자칫 비리하고 조야한 데 떨어질 우려가 있다[牧隱長篇. 變化闔闢縱橫古今. 如江漢滔滔波瀾自濶. 奇怪畢呈. 然喜用俗語. 學詩者. 學牧隱不得. 其失也流於鄙野]’고 경계한 바 있음.
2) 실제 이색(李穡)의 시 중에 예술성이 높지 못한 작품이 상당수가 있음.
2. 조선시대 문인들은 속어를 사용하는 것을 꺼렸으며 지명조차 시어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1) 당나라 시와 비슷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조선 중기에는 우리 지명을 꺼리는 경향이 더욱 강해짐.
2) 삼당 시인 중 한 명인 최경창(崔慶昌)은 우리 지명이 중국에 미치지 못해 시를 지을 때 우리 지명을 시어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김.
3) 조위한(趙緯韓) 역시 우리 지명이 시에 들어가면 우아하지 못하다고 보았음.
4) 허균(許筠)은 조선의 지명과 같은 속어도 시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함. 『학산초담(鶴山樵談)』ㆍ『성수시화(惺叟詩話)』 54번에서 노수신(盧守愼)의 「신씨정 회무회보제(愼氏亭 懷無悔甫弟)」라는 시를 예로 들며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지 잘 다듬기만 하면 점철성금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함.
3. 노수신(盧守愼)의 「신씨정 회무회보제(愼氏亭 懷無悔甫弟)」
路盡平丘驛 江深判事亭 | 길은 평구역에서 끝나고 강은 판사정에서 깊어진다. |
登臨萬古豁 枕席五更淸 | 오르니 만고가 확 트여 잠자리는 한 밤 중에도 맑구나. |
露渚翻魚鳥 金波動月星 | 이슬 내린 강에서 물고기와 새가 노닐고 금빛 물결에 달과 별이 일렁이네. |
南鄕雙淚盡 北闕寸心明 | 남쪽 고향 생각에 두 눈물은 말랐지만 북쪽 궁궐의 일편단심은 분명쿠나. |
1) 이 작품은 다시 벼슬길에 나선 오십대의 작품임.
2) 광나루 동쪽에 평구역이 있었고 인근 한강에 판사정 혹은 신씨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고향의 아우를 그리워하면서 쓴 작품.
3) 육로로 평구역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배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쉬면서 판사정에 오름.
4) 판사정에서 바라보니 천고의 세월에 아랑곳하지 않고 풍광이 광활한데 그곳에서 한숨 자고 나니 더욱 시원하다.
5) 그곳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보니 더욱 고향이 그리워 눈물이 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거듭 사직의 상소를 올렸지만 조야에서 명망이 높은 노수신을 임금이 놓아주진 않음.
6) 1연 ~4연까지 모두 대를 했고 전체적인 시상의 전개가 자연스러움.
4. 우리의 지명을 시에 쓴 예들.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
寓庵初被酒 箭串晩乘風 | 우암에서 막 술에 취해, 살꽂이에서 늦게 바람을 쐬노라. |
細雨靈通寺 斜陽滿月臺 | 가랑비 영통사에 내리고, 비낀 해 만월대에 비치네. |
土虎春全暮 吳牛喘未穌 | 무인년 봄은 저무는데 오나라 소는 헐떡임 멈추질 않네. |
初辭右議政 便就判中樞 | 처음에 우의정을 사직하고 곧 판중추로 나아갔지. |
睿澤深如海 慈恩潤似酥 | 임금은 은혜 깊기가 바다 같고, 자애로운 은혜 윤택하기가 술과 같아, |
避賢仍樂聖 能住幾年盧 | 탁주를 피하고 청주를 즐기니, 몇 년이나 나를 머물게 할꼬? |
1) 노수신은 지명 사용에서 더 나가 관직명과 심지어 자신의 성까지도 사용함.
2) 육십대 중반의 노년인지라 노수신은 사직하고자 하나 선조는 윤허해주지 않음. 아홉 차례나 상소를 올린 끝에 면직되었지만 곧바로 다시 판중추부사에 임명됨.
3) ‘토호(土虎)’는 무인(戊寅)을 다르게 표기한 것. 시에서 이런 표기는 보이지 않으니, 노수신이 낯선 시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음.
4) ‘우의정’이나 ‘판중추’라는 벼슬이름을 사용하여 대를 함으로 시상을 자연스럽게 이음.
5) 미련(尾聯)에선 청주를 즐기겠다는 뜻에 더하여, 우의정과 같은 요직을 피해 판중추와 같은 명예만 있고 실권은 없는 청직(淸職)을 즐기겠다는 뜻임.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성을 사용하여 청직이지만 오래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을 밝힘.
5. 노수신(盧守愼)의 시엔 속어의 구사가 빈번한 예
1) 노수신(盧守愼)의 「회알의정영자 이안우가(會謁議政影子 移安于家)」
招要袒免服 序拜十三人 | 달면복 입을 친척 불러 모아서, 열세 명이 차례를 따라 절을 한다. |
柳暗靑坡晩 天晴白岳春 | 버들 짙게 늘어진 청파의 저녁, 날이 화창한 백악의 봄날 |
-달면복은 5대조의 상에 상복을 입지 않고 웃옷을 벗고 머리에 두건만 착용하는 것을 이르고, 그러한 자손들이 모두 열 세명이라 한 것이다.
-청파와 백악이라는 조선의 지명으로 정치하게 대를 하여, 저녁 무렵 청파동 버들 숲에 있던 영정에 제사를 지내고 이튿날 아침 백악의 집으로 모셨다는 뜻을 말한 것임.
廟表全心德 陵加百行源 | 인묘는 온전한 마음의 덕을 드러내고, 효릉(孝陵)은 온갖 행위의 근본을 더하였네. |
衣裳圖不見 社稷欲無言 | 의상(衣裳)은 그림에서 보이지 않으니, 사직은 말하고자 하지 않네. |
天靳逾年壽 人含萬古寃 | 하늘이 원망스럽게 한 해를 넘기지 못해, 사람들이 만고의 원한을 품었네. |
春坊舊僚屬 唯有右司存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옛날 관리로는 오직 우사만이 남아 있네. |
-1연엔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를 바탕으로 만든 구절임. ‘仁者는 天理之公 心德之全也’라는 『근사록(近思錄)』의 글을 통해 인종(仁宗)의 인(仁)을 말했고, 주자(朱子)는 ‘효위백행지수(孝爲百行之首)’라 했고 『예기』의 ‘효자백행지원야(孝者百行之源也)’를 이용하여 인종의 효릉(孝陵)에 호응하도록 함.
3) 아래의 시는 『논어(論語)』의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의 구절을 이용하여 지음.
有親仁里接 無友遠方來 | 인한 마을에 인접한 곳엔 친구가 있고 먼 지방에서 오는 친구는 없네. |
4) 두보가 시에서 쓴 ‘먼 곳에 가고 싶지만 막힐까 겁나네[致遠宜恐泥]’라는 구절은 『논어(論語)』의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也’라는 구절을 이용한 것임.
5) 이런 식으로 경전의 말을 시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 소식(蘇軾)과 주자(朱子)는 모두 반대했지만, 노수신(盧守愼)은 그런 말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함으로 ‘이고위신(以古爲新)’을 실천함.
③ 고유어를 사용하여 재미로 시를 지어야 했던 시기.
1. 고유어를 시에 사용하는 문제
1) 이색이나 노수신은 특이하게도 떳떳하게 우리말을 시어로 사용하여 새로움을 창조했음.
2) 대부분의 문인들은 그러질 못하고 속어로 시를 지을 땐 ‘장난삼아 이어(俚語)를 썼다’고 밝힘.
2. 이명한(李明漢)의 「중양전일일 희용이어구호(重陽前一日 戱用俚語口號)」: 속어를 장난처럼 사용한 시
引用重陽節 村醪典當來 | 중양절을 끌어와서 막걸리를 전당포에서 가져왔네. |
黃花太遲晩 分付眼前開 | 노란 국화 너무 늦게 피니, 분부하노라 “눈앞에서 피어라” |
1) 중양절이 하루 남았지만 이명한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중양절을 끌어들임. ‘인용(引用)’이란 시어를 사용해 ‘자기편이 되게 했다’는 내용을 담았고, ‘전당(典當)’이란 용어조차도 맘대로 썼음.
2) 중양절을 내 편으로 만들어 끌어오고 막걸리도 전당 잡혀 사 왔는데 국화가 피지 않았으니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임. ‘분부(分付)’와 ‘안전(眼前)’과 같은 구어가 사용됨.
3. 이진망의 「도취침금희작이어(盜取寢衾戲作俚語)」
深藏無賴鐍扃完 | 깊이 숨겼지만 자물쇠가 온전하리라 믿질 못하겠으니 |
一手探來十守難 | 한 사람이 훔치러 온다면 열 명이 지키더라도 어렵다는데 |
若使窮交求庇體 | 가령 가난한 벗에게 몸 덮을 것 요구한다면 |
也應先說自家寒 | 응당 먼저 자기 몸 춥다 말하겠지. |
1) 속담을 써서 묘미를 더함.
2) 벗이라도 도움을 청하면 먼저 춥다고 능청을 떠는 세태를 풍자하여 재미를 더함.
4. 이하곤(李夏坤)의 시: 「주분원이십여일 무료중효두자미기주가체 잡용이어 희성잡구(住分院二十餘日 無聊中效杜子美夔州歌體 雜用俚語 戱成絶句)」
宣川土色白如雪 | 선천의 흙 색깔은 희어 눈 같네. |
御器燔成此第一 | 임금의 그릇이 구워 만들어지는데 여기 것이 제일이야. |
監司奏罷蠲民役 | 감사가 주청(奏請)하길 마치면 백성들의 부역이 줄려나. |
進上年年多退物 | 진상품이 해마다 퇴짜 맞는 그릇이 많은데. |
御供器皿三十種 | 임금께 공납할 그릇 30종류인데, |
本院人情四百駄 | 본원의 뇌물은 400 바리로구나. |
精粗色樣不須論 | 정밀하고 거칠고 색이나 모양을 전혀 논하질 않고 |
直是無錢便罪過 | 다만 무전(無錢)이 곧 유죄(有罪)로구나. |
1) 광주의 분원에서 20여 일 머물면서 지은 작품으로 ‘이어’를 사용하여 장난으로 시를 지었다고 함.
2) 사용된 시어는 하나하나가 잘 쓰이지 않는 시어로, ‘감사’, ‘진상’, ‘퇴물’, ‘인정’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이 모두 당시에 쓰이던 일상어로 착취를 풍자한 것이 더욱 묘미가 있음.
④ 18세기 이후 조선풍이 담기다
1. 18세기 이후 이어 사용의 경향
1) 이때부터 이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해 조선의 풍물을 핍진하게 담아내려 함.
2) 이옥은 시를 쓰면서 족두리(簇頭里), 아가씨(阿哥氏), 가리마(加里麽), 사나이(似羅海) 등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여 시어로 활용했고, ‘무자식 상팔자[無子反喜事]’라는 속담으로 한 연을 구성하기도 함.
早習宮體書 異凝微有角 | 어려서 궁체를 익혀 ‘이응’에 살짝 뿔이 났죠. |
舅姑見書喜 諺文女提學 | 시부모님 글을 보고 기뻐하며 “한글 여제학이로다”라 하시네. |
1) 막 시집간 새댁이 시부모 앞에서 한글을 쓴다. 궁체를 배워 ‘o’ 위의 꼭지가 예쁘게 튀어 올라와 있다. 시부모는 한글 쓰는 여자 제학이 시집왔다 기뻐한다. 훈훈한 백성들의 삶을 운치 있게 그림.
2) 이응(異凝)이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뿐만 아니라, ‘궁체’ ‘언문’ ‘제학’ 등 시에서 쓰지 않는 단어들을 대거 수용했다.
3) 양반들이 보면 여전히 비속하다 여길 테지만, 이로 인해 조선의 풍경이 더욱 핍진하게 다가옴.
3. 조선풍의 대두
1) 조선 후기 조선풍이 유행하며 변방의 풍속을 노래한 죽지사(竹枝詞), 혹은 민간의 노래인 악부의 틀을 채용하되 자신의 시대, 자신의 땅을 두고 시를 짓게 됨.
2) 『영처고서(嬰處稿序)』와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서 박지원(朴趾源)과 정약용(丁若鏞)이 우리 시에 대한 선언을 함.
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 나는 조선 사람으로, 달게 조선의 시를 짓겠노라. |
3) 중국과 다른 조선의 민물과 풍속이라는 우아하지 못한 소재를 이용하여 참신한 표현을 만들어 낸 작품이 많이 창작함.
羊皮褙子壓身輕 | 양 가죽 속적삼을 여미니 몸은 가볍고, |
月下西廂細路明 | 달이 서쪽 행랑으로 지니 골목길 분명쿠나. |
暗入冊房知印退 | 통인(通引)이 가자 몰래 책상으로 들어가니 |
銀燈吹滅閉門聲 | 은촛대의 등불이 문 닫는 소리에 꺼지네. |
1) 신광수는 평양감사로 가는 체제공을 위해 평양의 풍속을 소재로 한 108수의 연작시를 지음.
2) 배자는 털을 대어 만든 조끼 모양의 옷으로, 배자를 꼭꼭 여며 입은 것은 추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몰래 밤길을 가는데 거추장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3)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는 통인이 퇴근한 것을 알고 몰래 책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이는 바람에 촛불이 꺼졌다고 했지만, 마음이 급한 책방 도령이 문을 닫자마자 불을 끈 것으로 보아야 더욱 풍치가 있음.
4) 배자ㆍ통인ㆍ책방과 같은 어울리지 않은 시어를 구사하여 18세기 조선의 풍속을 운치 있게 그려냄.
인용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한시를 읽다 - 21. 눈물과 통곡이 없는 만사 (0) | 2022.10.24 |
---|---|
우리 한시를 읽다 - 20. 길을 나서는 시인 (0) | 2022.10.24 |
우리 한시를 읽다 - 18. 짧은 노래에 담은 노래 (0) | 2022.10.24 |
우리 한시를 읽다 - 17. 당시와 비슷해지기 (0) | 2022.10.24 |
우리 한시를 읽다 - 16. 풍경에 담은 감정의 변화 (0) | 2022.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