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길을 나서는 시인
① 김시습의 산수벽이 가득한 시
1. 어떤 것에 몰두하는 것을 벽(癖)이라 하며 조선 시인 중엔 산수의 벽이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1) 산과 물에 벽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산과 물을 찾아 나선다.
2) 조선 전기의 김시습(金時習)이, 후기엔 김창흡(金昌翕)이 대표적임. 김시습(金時習)은 ‘산수에 벽이 있어 시로 늙었다[癖於山水老於詩]’라고 한 대로 평생을 산수에서 노닐면서 지를 지음.
兒捕蜻蜓翁補籬 | 아이 잠자리 잡고, 노인 울타리 보수하고 |
小谿春水浴鷺鶿 | 작은 시내 봄물엔 가마우지 멱 감네. |
春山斷處歸程遠 | 봄산 끊어진 곳에 귀로 멀기만 하니, |
橫擔烏藤一箇枝 | 등나무 한 가지 어깨에 비껴 매네. |
1) 세상이 싫어 산속에 들어갔지만 가만히 오래 살지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나곤 했다.
2) 가야 할 길이 산모퉁이를 돌아 이어지니 보통의 시인이라면 신세타령을 했겠지만, 운명처럼 길을 나선 김시습은 검은 등나무 가지 하나 꺾어 어깨에 둘러매고 허리를 쭉 편다.
3. 김시습(金時習)의 「무제(無題) / 증준상인(贈峻上人)」
終日芒鞋信脚行 | 종일토록 짚신 신고 발 가는 대로 다녀 |
一山行盡一山靑 | 한 산이 건너 다하면 다시 한 산 푸르네. |
心非有想奚形役 | 마음이 생각할 게 없으니, 어찌 형체의 부림을 당하랴. |
道本無名豈假成 | 도란 본디 무명이니 어찌 빌려서 이루겠는가?(도를 얻은 척 할 수 없다) |
宿露未晞山鳥語 | 묵은 이슬이 마르지 않았는데도 산새는 우짖고 |
春風不盡野花明 | 봄바람 계속 부니 들꽃은 환하다. |
短笻歸去千峯靜 | 짧은 지팡이 짚고 돌아오노니, 온갖 봉우리들 고요하고 |
翠壁亂烟生晩晴 | 푸른 절벽의 어지러운 안개, 저녁 햇살 속에 비치네. |
1) 공문(空門)의 스승이요, 벗이었던 준상인에게 준 시임.
2) 운명적으로 길을 나서는 김시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 「죽장암(竹長菴)」이란 시에서 아래처럼 말했으니, 이르는 곳이 모두 그의 집이었음.
參禮名山遍 逍遙卽我家 | 참례하러 명산 두루 다니니 소요하는 곳이 곧 나의 집일세.『梅月堂詩集』 |
4)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 김시습의 시는 형식적인 파탈이 많음. 이 시는 근체시의 압운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같은 운은 아니지만 비슷한 음이 나면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시를 썼던 것임.
② 김창흡의 산수벽이 가득한 시
1. 김창흡(金昌翕)의 산수벽(山水癖)
1) 조선 후기 가장 영향력이 높은 시인으로 한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음.
2) 그의 형제들은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아 청운(靑雲)보다 백운(白雲)의 길을 택함.
3) 정약용(丁若鏞)이 쓴 『산행일기(汕行日記)』에서 김창흡(金昌翕)의 초상화를 보고 ‘온화하면서도 단정하고 엄숙하며 복건에 검은 띠를 두르고 있어 산림처사의 기상이 있다’고 평함.
4) 젊은 시절에 천마산과 성거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천태산부(天台山賦)」라는 글을 읽다가 갑자기 산수의 흥이 일어 금강산으로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짐.
5) 모친의 강권으로 21살에 진사가 되었지만 그때 외엔 평생 떠돌며 산수를 즐김.
6) 철원의 삼부연(三釜淵) 폭포 곁에 집을 짓고 살자 아버지는 못마땅하게 여겨 서울로 불러들였고 어쩔 수 없이 집에 왔지만 틈만 나며 산에 들어갔음.
7) 그런 자신의 행태를 아버지가 질책하자 “소자는 천석고황의 질병이 있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심하여, 무엇인가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는 것 같기에 곧바로 떠나가곤 하였습니다.”라고 말했음.
江南遊子不知還 | 강남에서 놀던 이 돌아올 줄 모르고 |
古寺秋風杖屨閒 | 옛 사찰의 가을바람에 행장은 한가해. |
笑別鷄龍餘興在 | 웃으며 계룡을 떠나니 흥은 남아 있었는데 |
馬前猶有俗離山 | 말 앞에는 오히려 속리산이 있구나. |
1) 1673년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시절의 작품이다.
2) 산을 좋아하는 그였으니 계룡산과 작별하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겠는가? 그러나 웃으면서 계룡산과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산 속리산을 찾는 즐거움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임.
3) 가까이로는 동호의 저자도와 영평의 백운산, 양근의 벽계에 상당 기간 머물러 살았고, 멀게는 설악산 백곡담에 머물면서 “한 번 누워 백년을 보낼 계책[一臥百年之計]”을 꿈꾸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인제의 심원사 남쪽에 영시암(永矢庵)을 짓고 영원히 은거하겠노라 했음.
尋常飯後出荊扉 | 늘 그러하듯 밥 먹고 사립문 나서니 |
輒有相隨粉蝶飛 | 그때마다 호랑나비 나를 따라 나선다. |
穿過麻田迤麥壟 | 삼밭 뚫고 지나니 굽이진 보리밭 언덕 |
草花芒刺易牽衣 | 풀과 꽃의 가시가 쉬이 옷을 당기네. |
1) 영시암에 머물러 산 것은 환갑이 가까운 1711년 무렵이었고 설악산과 금강산 유람을 즐기던 김창흡은 64세 때 다시 함경도로 여행을 나섦. 이때의 삼라만상을 392수의 엄청난 규모의 연작시로 담은 것이 위의 시임.
2) 연작시의 첫 번째 작품임. 산길을 걷노라면 범나비가 자신을 따라 흥을 돋운다. 삼밭이든 보리밭이든 발길 닿는 대로 가노라니, 여기저기 풀에 돋은 가시가 옷에 자꾸 걸린다. 들길을 걸을 때 겪는 일을 너무나도 심상하게 그려냄.
風鞭電屐略靑丘 | 바람 채찍에 우레 신발로 조선 곳곳 돌아다녀, |
北走南翔鵬路周 | 북쪽으로 달리고 남쪽으로 날아 붕새처럼 돌아다녔지. |
收得衰軀歸掩戶 | 쇠한 몸을 거두어 돌아와 문 걸어 닫으니. |
不知何物在心頭 | 알지 못하겠네, 어느 물건이 내 맘 속에 있는지. |
1)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의 봉황새 비유처럼 자신은 바람을 채찍 삼고 우레를 신발 삼아 조선 팔도를 두루 돌아다녔노라 자부함.
5. 김창흡(金昌翕)의 「야등연광정 차조정이운(夜登練光亭 次趙定而韻)」
雪岳幽棲客 關河又薄遊 | 설악 그윽한 곳에 깃들어 사는 나그네, 관하에서 또한 정처 없이 떠도네. |
隨身有淸月 卜夜在高樓 | 몸을 따르는 것은 맑은 달이요, 밤을 선택한 곳은 높은 누각 때문이다. |
劍舞魚龍靜 杯行星漢流 | 칼춤에 물고기 고요하고, 잔 돌자 은하수 흐른다. |
雞鳴相顧起 留興木蘭舟 | 닭울음에 서로 돌아보고 일어나 목란 배에 흥 머물러 뒀지. |
1) 제일강산으로 일컬어지는 대동강의 연관정에 올라서 벗 조정만(趙正萬)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작품. 역대 연관정에서 지은 작품 중 가장 빼어난 것 중 하나로 평가됨.
2) ‘박유(薄遊)’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여행을 즐기는 것’을 이른다. 아름다운 설악산에 거처를 정해놓았지만 그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조선 팔도를 두루 유람하다가 발길 닿는 대로 대동강에 이른 것.
3) 부귀영화 대신 맑은 달빛을 지니고 다니기에 굳이 밤을 택하여 높은 누각에 오름. 기생들의 검무를 즐기노라니 그 황홀함에 물고기조차 숨을 죽이고, 흥겨운 마음에 술잔을 돌리다 보니 새벽이 되어 은하수가 기운다.
4) 닭 울음소리를 듣고 다시 길을 나서지만 그 흥취는 배에 매어둔다고 함.
5) 신정하(申靖夏)는 『잡기(雜記)』에서 1연은 범상하고 2연에는 선풍(仙風)이 있고 3연은 호탕하고 4연에는 귀기(鬼氣)가 있어 한 편의 작품 중에 네 가지 품격이 있다고 칭찬한 작품이다.
6. 김창흡(金昌翕)의 여행론
1) 여행은 김창흡(金昌翕)에게 병과 슬픔을 낫게 하는 약이었다.
2) 김창흡(金昌翕)은 두 달 동안 산천을 유람하고 돌아와 이징하(李徵夏)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벼랑과 산마루를 두루 다 찾아 구름과 달을 좇아다닐 때면 절로 마음에 맞아 슬픔과 고통이 몸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니, 산천은 나에게 정말 좋은 벗이요. 뛰어난 의사라 하겠소.”라 하였다.
③ 이서구의 시와 신운(神韻)
1. 산과 물이 좋아 길을 나선 이의 특징
1) 산과 물이 좋아 길을 나선 사람은 서두르지 않음.
2) 박제가(朴齊家)의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 무술(戊戌) 3에서 “무릇 유람은 즐김을 위주로 하는 법이어서 시일에 구애받지 않고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멈춰 즐겨야 한다. 그리고 나를 알아주는 벗을 데리고 마음에 꼭 맞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니, 떠들썩거리고 후끈 분위기가 달아오른 것 같음은 나의 뜻이 아니다. 대저 속된 자는 禪房에서 기생을 끼고서 물소리 옆에다가 풍악을 펴니, 그거야말로 꽃 아래서 향을 사르고, 차 마시며 과자를 놓은 격이라 하겠다.[凡遊以趣爲主, 行不計日, 遇佳卽止. 携知己友, 尋會心處, 若紛紜鬧熱, 非我志也. 夫俗子者, 挾妓禪房, 張樂水聲, 可謂花下焚香, 茶中置菓也].”라고 말했다.
3) 살풍경(殺風景): 당나라 시인 이상은이 ‘맑은 샘에 발을 씻는 일, 꽃 위에 속옷을 말리는 일, 산을 등지고 누각을 짓는 일, 거문고를 태워서 학을 삶는 일, 꽃을 마주하고 차를 마시는 일, 솔 숲 사이에서 길잡이가 벽제하는 일’을 살풍경의 예로 들었음.
4) 여행을 하는 이는 풍경을 죽이는 살풍경을 해선 안 되며 날짜의 제약도 없이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멈출 줄 알아야 함.
2. 이서구(李書九)의 「만자백운계 부지서강구 소와송음하작(晩自白雲溪 復至西岡口 少臥松陰下作)」
讀書松根上 卷中松子落 | 소나무 뿌리 위에서 독서하니, 책 속에 솔방울 떨어지네. |
支筇欲歸去 半嶺雲氣作 | 지팡이 짚고 길나서니 반쯤 봉우리에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네. |
1) 백운계는 오늘날 포천에서 화천으로 넘어가는 개울로, 이서구가 한때 은거한 곳임.
2) 길을 가다가 솔뿌리 위에 앉아 잠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졸음이 와서 시원한 솔 그늘에서 시인은 짧지만 단잠을 잔다.
3) 잠을 깨운 것은 책으로 떨어진 솔방울 소리다.
4) 1구와 2구가 동시 상황인 것처럼 나란히 제시되어 있지만, 그 사이 제법 시간이 흐른 것임.
5)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가, 순간 당황스럽다. 지팡이를 짚고 나서니, 어느새 저녁이 가까워 산마루에 구름이 뽀얗게 일어난다.
3. 신운(神韻)과 이서구(李書九)
1) 왕사정(王士禎)의 신운설(神韻說)을 잘 배운 사람으로 이서구를 들 수 있으며, ‘조선의 왕사정’으로까지 불림.
2) 신운(神韻)이란 염화시중(拈花示衆)에 비유되며, 선의 경지에 들어 있는 느낌을 주는 시를 ‘신운(神韻)이 있다’고 함.
3) 위의 작품은 속세의 티끌에서 완전히 벗어난 선취를 느낄 수 있기에 신운(神韻)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그 신운은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잠을 자는 동안의 한적함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확보된 것.
4) 한적에서 화려함을 벗겨내고 맑음만 남겨두었기에 신운(神韻)이 생긴 것이라 하겠음. 길을 나선 이의 한가함에서 마음에서 찾아진 신운(神韻)이라 할 수 있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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