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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시를 읽다 - 21. 눈물과 통곡이 없는 만사 본문

책/한시(漢詩)

우리 한시를 읽다 - 21. 눈물과 통곡이 없는 만사

건방진방랑자 2022. 10. 2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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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눈물과 통곡이 없는 만사

 

 

진실을 담은 만사

 

 

1.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슬프지만 지금은 죽음의 풍경이 바뀌었고, 문학사에서는 만사(挽詞)나 제문(祭文)이 사라짐.

1) 만사는 통곡을 하기 위해 지은 게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여 저 세상으로 잘 가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지음.

2) 만사엔 과장이 있어선 안 되며 죽은 자의 생애를 얼마나 압축적으로 표현했는가가 중요함.

 

 

2. 노수신(盧守愼)만김대간(挽金大諫)

珍島通南海 丹陽近始安 진주는 남해와 통하고 단양은 시안에 가깝다.
風霜廿載外 雨露兩朝間 풍상으로 20년을 시달렸으나 은혜를 두 왕조에서 누렸구나.
白首驚時晩 靑雲保歲寒 흰머리 느즈막한 때가 놀라운데 청운에도 세한의 지조 지켰네.
平生壯夫淚 一灑在桐山 평생 함께 한 장부의 눈물, 한 번 교동의 산에 뿌리노라.

 

1) 김난상은 노수신과 함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오랜 유배 생활을 함. 1547년 노수신은 진도에 유배되었고 김난상은 남해에 유배되어 19년의 세월을 보냄. 그 후 1565년 노수신은 시안(始安, 괴산)으로, 김난상은 단양으로 옮겨짐.

2) 1연에선 이러한 풍상을 적음.

3) 2연에서 20년 풍상의 세월을 보낸 것을 적었다. 노수신과 김난상은 모두 중종 때 벼슬을 시작하여 명종 때 고초를 겪다가 선조 때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나란히 벼슬함.

4) 그러나 박점(朴漸)이란 사람이 정언(正言)의 벼슬에 오르자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며 탄핵하려 했다가 역 탄핵을 당했고 64세의 나이로 떠남.

5) 그래서 백발이 되어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청운의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절개를 지켰음을 높게 평가함.

6) 노수신은 묘비에 새길 김난상의 행적과 자신과의 교분을 이렇게 40자에 담았다. 허균(許筠)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감정이 극도로 슬프고 시어가 극도로 간절하여, 이를 읊조리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눈물이 흐르게 한다.”고 함.

7) 만사(輓詞)는 짧은 시이기에 죽은 이의 행적을 정확하면서도 압축적으로 제시해야 함. 노수신은 만사에 뛰어난 시인이었음.

 

 

3. 홍섬의 모친 만사

一德從三上台峻 한결 같은 덕으로 삼종이 영의정에 올랐고,
百年除六老星尊 100년에서 6년을 뺀 나이로 장수하셔 노인성이 높다랗다네.

 

1) 홍섬의 모친은 영의정을 지낸 송철의 딸로, 남편 홍언필과 아들 홍섬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2) 삼종지도(三從之道)로 영의정에 오른 친정 부친과 남편, 아들을 잘 받들었음을 말하고, 여기에 대를 맞추어 94세로 장수했으니 장수를 상징하는 별 노인성(老人星)이 높다랗다고 함.

 

 

 

죽은 이의 생애가 아닌 지향점을 담아낸 만사

 

 

1. 성혼(成渾)만사암박상공순(挽思庵朴相公淳)

世外雲山深復深 세상 바깥의 구름 낀 산은 깊고도 또 깊어,
溪邊草屋已難尋 시냇가 초가집 이미 찾기 어렵네.
拜鵑窩上三更月 배견와 위의 한 밤 중 달은
應照先生一片心 응당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는 것이려니.

 

1) 이이가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포천 북쪽 창옥병(蒼玉屛)에 배견와(拜鵑窩)라 이름한 초당을 짓고 은거했는데, 배견와(拜鵑窩)는 두견새에게 절을 하는 움집이라는 뜻이다.

2) 성혼(成渾)은 여기서 영의정까지 오른 박순(朴淳)의 이력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선 사암의 만사는 이 정도로 그쳐야만 한다. 만약 재상의 사업에 착안하였다면 알맞지 않다.”고 했고 무한한 감상의 뜻을 말 밖에 드러내지 않았으니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러한 시를 어찌 지을 수 있으랴?”라고 평함.

3) 성혼(成渾)이 박순(朴淳)의 뜻을 잘 알았기에 외형적인 재상으로서의 삶에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은자로서의 삶을 강조한 것을 높게 평가함. 또 절친한 벗의 죽음을 두고 드러내어 통곡하지 않았지만, 벗에 대한 그리움이 이면에 가득하기에 허균이 이 작품을 극찬함.

 

 

2. 남용익(南龍翼)정동명만(鄭東溟挽)

工部之詩太史文 두보의 시에 사마천의 문장
一人兼二古無聞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겸했다는 걸 예전엔 듣지 못했지.
雷霆霹靂來驚耳 우레가 치고 벼락이 치듯 놀라울 뿐이다.“
谿谷先生昔所云 계곡 장유 선생이 옛적에 했던 말씀.

 

1) 17세기 의고풍(擬古風)의 시문으로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오른 정두경(鄭斗卿)이 죽었을 때 지은 만사임.

2) 장유(張維)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3) 정두경(鄭斗卿)두보(杜甫)의 시와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잘 활용하여, 강건한 맛이 부족한 16세기 한시의 약점을 극복함.

 

 

3. 유근의 만차첨정(挽車僉正)

老莊馬史偏多讀 노장과 사마천을 두루 많이 읽고,
李杜韓詩最熟精 이백ㆍ두보ㆍ한유의 시를 가장 정독했다네.

 

1) 차천로(車天輅)가 죽었을 때 유근도 남용익의 정동명만(鄭東溟挽)와 유사한 만사를 지음.

2) 이수광(李睟光)차천로(車天輅)노자(老子)장자(莊子), 사마천(司馬遷)의 문장, 그리고 이백(李白)두보(杜甫), 한유(韓愈)의 시를 정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차천로 문학의 핵심이 정독이 아니라 박학에 있었으므로, 유근이 차천로를 잘 안 것은 아니다라고 함.

 

 

4. 이수광(李睟光)차오산천로만(車五山天輅挽)

詞林活氣三春盡 문학 숲의 활기는 봄에 다하였고,
學海長波一夕乾 학문 바다의 긴 파도는 하루 저녁에 말라버렸네.

 

1) 이수광(李睟光)차천로(車天輅)의 죽음에 대해 당대 문단의 최고였기에 그의 죽음으로 문단의 활기가 사라졌다고 함.

2) 이수광(李睟光)의 만사는 차천로(車天輅)의 삶 전체를 아울렀고, 유근은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고자 함.

3) 둘 사이엔 우월을 논할 수는 없지만 짧은 시의 형식으로 드러내기에는 후자가 더 묘미가 있다 할 수 있음.

 

 

 

조선 후기의 머리로 쓴 만사

 

 

1. 만사(輓詞)의 시체 변화

1) 조선전기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만사는 율시(법이 있는 시)가 중심에 있었음.

2) 노수신(盧守愼)만김대간(挽金大諫)은 격식을 갖추어, 죽은 이의 생애와 자신과의 관계, 상대에 대한 칭송 등을 압축적으로 제시함.

3) 절구는 노래와 가깝기 때문에 격식을 갖춘 애도보다 목 놓아 통곡을 하거나, 은근한 정을 담아내기에 적합함.

4) 조선 후기에는 참신(斬新)함을 추종하는 문단의 분위기로 죽은 이에 대한 애도가 전혀 나타나지 않음. 역사가가 냉정하게 평가하듯 죽은 사람의 이생에서 남긴 의미를 집약적으로 제시함.

 

 

2. 홍세태(洪世泰)이숙장만(李叔章挽)

種穀不須嘉 嘉者多不實 곡식을 심는데 꼭 좋은 씨일 필욘 없다. 좋은 씨여도 많이 열매 맺질 못하니.
作人不須才 才者輒夭折 사람을 지어낼 때 꼭 재주 있는 사람일 필욘 없다. 재주 있는 사람은 번번이 요절하니.

 

1) 오언절구의 형태를 취했지만, 측성 글자로 압운을 하고 또 평측도 맞추지 않았으며, 같은 글자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근체시의 기본적인 규칙도 어김.

2) 요절한 벗의 죽음을 두고 홍세태(洪世泰)는 통곡하며 좋은 씨를 뿌려 보았자 결실을 맺지 못할 때가 많듯 사람도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도 대개 요절하는 것은 조물주의 장난이라 함.

3) 죽은 사람의 삶에 대한 내용은 없이 요절한 것에 애도의 뜻만을 담음.

 

 

3. 이안눌(李安訥)곡석주(哭石洲)

不恨吾生晩 只恨吾有耳 내가 늦게 태어난 것은 한스럽지 않으나, 다만 나에게 귀가 있다는 게 한스럽네.
萬山風雨時 聞着詩翁死 모든 산에 바람 불고 비올 때, 시옹이 죽었단 소식을 들었으니

 

1) 두 살 아래지만 가장 친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권필의 죽음조차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함.

2) 권필(權韠)의 삶을 시옹(詩翁)’이란 두 글자에 다 담음.

3) 평측과 압운의 규격을 맞추지 않은 고절구로, 자유로운 형식을 통해 통곡을 하듯 자연스럽게 시를 지음. 다만 통곡을 하더라도 소리가 밖으로 나오면 좋은 시가 아니기에 통곡을 하면서도 딴소리를 했다는 점에서 홍세태(洪世泰)의 만사(輓詞)와 같음.

 

 

4. 조선 후기 만시의 변화

1) 조선 후기에도 격식을 갖춘 율시로 죽은 이를 애도하는 것이 일반적임.

2) 짧은 절구를 연작으로 지어 죽은 이의 삶을 몇 개의 나뉜 사진을 보여주듯 제시하는 작품이 자주 나타남.

3) 이병연(李秉淵)은 아예 고절구 형식에 10수의 연작 마사를 지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음.

 

 

5. 이병연(李秉淵)장필문만(張弼文挽)

君得李一源 我得張弼文 그대 나를 얻었고, 나는 장필문 그댈 얻었지
相得而相失 于玆三紀云 서로 얻고 서로 잃어버린지, 이제 꼭 36년째.

 

我有張弼文 君有李一源 나에겐 그대가 있고, 그대에겐 내가 있었지.
相去千萬里 心焉吾友存 서로의 거리 천만리지만 마음엔 내 벗이 있었다오.

 

一源白嶽下 弼文驪水頭 나는 백악의 아래에 그대는 여강에 살아,
我病縶騾子 君來豈無舟 내가 병들어 노새를 매어뒀는데 그대 오려는데 어찌 배가 없겠는가?

 

詩成何所寄 顔面不復論 시를 지어도 어디에 부칠꼬? 얼굴보고 다시 의론치 못하네.
地下張弼文 地上李一源 지하에 있는 그대, 지상에 있는 나.

 

1) 첫째 수에서 서로 만난 지 36년 되었다는 것을 나타냄.

2) 둘째 수에서는 천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으로 늘 그리워하던 벗이었고, 또 사는 곳이 여주와 백악으로 서로 달랐지만 자주 오갔다는 사실을 적음.

3) 여기까지는 만사라 할 수 없고 네 번째 수에 이르러서야 만사임이 드러남. 그러나 장필문의 이력을 적진 않음.

4) 작품마다 장필문과 이일원이라는 고유명사를 반복적으로 나열하면서 죽은 벗에게 말을 건네듯이 자연스럽게 시를 이어나가, 눈물이나 통곡소리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음.

 

 

6. 이용휴(李用休)이우상만(李虞裳挽)

賀年廿七死 志業僅成半 이하는 27살에 죽어 뜻한 업이 겨우 반만 이루었네.
再爲李姓人 又續廿七算 다시 이씨 사람으로 태어나 또 27년을 이었네.

 

五色非常鳥 偶集屋之脊 오색의 비상한 새가 우연히 지붕마루에 모였는데
衆人爭來看 驚飛忽無迹 뭇사람이 다투며 보러 왔기에 놀라 날아가 문득 자취조차 사라졌다네.

 

1) 이병연(李秉淵)의 만사풍이 18세기엔 이용휴에게 전해짐.

2) 이우상은 뛰어난 시인이었고 역관으로 일본에 통신사로 따라갔는데 그때 지은 한시로 일본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박지원(朴趾源)우상전(虞裳傳)에서 이러한 사실을 기록했음.

3) 이용휴는 이우상의 시를 두고 벽을 어떻게 걷거나 건널 수 있겠는가? 이우상은 벽과 같다.”고 극찬을 했음.

4) 이하(李賀)는 당나라 시인으로 난삽한 시를 썼던 기인인데 그가 죽은 후 27세에 죽은 후 이우상으로 다시 태어나 27년을 살다 죽었다고 했음.

5) 두 번째 수에선 이우상의 시가 범상치 않고 오색찬란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가 했더니 알아주는 것조차 싫어해서 훌쩍 이승을 떠나 버렸다고 했다.

6) 승당(升堂)과 입실(入室)의 경지라는 말을 들어 이우상은 지붕마루에까지 올랐다고 평가함.

7) 이병연(李秉淵)은 시를 주고받을 사람이 없다 하여 눈물 자국을 보였지만, 이용휴는 이우상이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도 요절한 것을 신비하게 처리함.

8) 이후의 수에서도 참신하면서도 파격적인 표현이 극을 달함. 만사가 이쯤 되면 가슴은 없고 머리만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게 18세기 한시의 새로움임.

 

 

 

 

인용

목차

한시사 / 略史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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