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심으로 돌아가자, 처녀로 돌아가자
아아! 『시경』 3백편은 새나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 아닌 것이 없고, 뒷골목 남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진대 패邶 땅과 회檜 땅의 사이는 지역마다 풍속이 같지 않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의 위로는 백성의 풍속이 제각금이다. 그런 까닭에 시를 채집하는 자가 여러 나라의 노래로 그 성정을 살펴보고 그 노래의 습속을 징험하였던 것이다. 다시 어찌 무관의 시가 옛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겠는가? 만약 성인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일어나 여러 나라의 노래를 살피게 한다면, 『영처고』를 살펴보아 삼한의 새나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요, 강원도 사내와 제주도 아낙의 성정을 살펴볼 수 있을 터이니, 비록 이를 조선의 노래라고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嗚呼! 三百之篇, 無非鳥獸草木之名, 不過閭巷男女之語. 則邶檜之間, 地不同風, 江漢之上, 民各其俗, 故采詩者以爲列國之風, 攷其性情, 驗其謠俗也. 復何疑乎此詩之不古耶? 若使聖人者, 作於諸夏, 而觀風於列國也, 攷諸嬰處之稿, 而三韓之鳥獸草木, 多識其名矣; 貊男濟婦之性情, 可以觀矣, 雖謂朝鮮之風, 可也. |
오늘날 우리가 경전으로 받들어 마지않는 『시경』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당시 새 짐승의 이름, 풀 나무의 명칭을 적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 내용이란 것도 당시 일반 백성의 이런 저런 살아가는 애환을 노래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그것은 지역에 따라 달라지고 풍속에 따라 차이가 난다. 진솔한 감정의 유로流露였기에 이제 와 그 시를 보면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자리가 잡힐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무관이 지금 여기서 느끼는 삶의 애환을 거짓 없이 노래한 것이 비록 “촌사람의 데데함에 편안해하고, 시속의 잗단 것을 즐거워”한 듯 보인다 해도 그것은 굴원이 부득이 귀신을 자신의 시에 끌어들였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오늘날 『시경』에 뒷골목 남녀의 사랑 노래가 담겨 있고, 하잘 것 없는 새 짐승, 풀 나무의 이름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누가 탓한단 말인가? 왜 『시경』에서 하면 문제가 안 되고, 굴원이 하면 괜찮은데, 조선의 이덕무가 그렇게 하면 촌스럽고 데데하다고 비방하는가?
이제 만약 다시 채시관採詩官의 제도가 부활하여 여러 나라의 국풍國風을 채집하게 한다면, 그가 조선에 와서 취할 것은 오직 이 『영처고』 뿐일 것이다. 다른 것에는 지금 여기의 진솔한 목소리를 찾을 수 없는데 반해, 『영처고』에는 이곳의 새 짐승, 풀 나무의 이름과, 무뚝뚝한 강원도 사내와 억센 제주도 아낙의 살아있는 목소리가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영처고』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의 노래’가 아닐까?
이상 「영처고서」를 원문에 따라 읽어 보았다. 요컨대 이 글을 통해 연암이 하고 싶었던 말은 문학은 바로 ‘지금’ ‘여기’의 진실을 담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운장의 소상 앞에서 관념적으로 벌벌 떠는 어른들의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하늘을 보면 파랗기만 한데 왜 하늘을 검다고 가르치느냐고 대드는 어린아이의 진솔한 안목으로 볼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글에서 연암이 동심을 끌어 들인 것은 문집의 제목이 ‘영처고’인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처녀처럼’ 쓴 원고라고 자신의 문집 제목을 붙인 이덕무의 생각에서 글의 실마리를 연 것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 3권 『영처문고嬰處文稿』 1에는 「영처고자서嬰處稿自序」란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스스로 ‘영처嬰處’의 변을 이렇게 적었다.
즐거워 함의 지극한 것은 영아만한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 장난치는 것은 애연藹然한 천진天眞이다. 부끄러함의 지극한 것은 처녀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감춤은 순수한 진정眞情이다. 사람으로 문장을 좋아하여 즐거워 장난치고 부끄러워 감추기를 지극히 하는 것이 또한 나만한 이가 없다. 그런 까닭에 그 원고를 ‘영처嬰處’라 하였다. 娛之至者, 莫如乎嬰兒. 故其弄也藹然天也. 羞之至者, 莫如乎處女. 故其藏也, 純然眞也. 人之嗜文章, 至娛弄至羞藏者, 亦莫如乎余, 故其藁曰嬰與處. |
일체의 인위가 배제된 어린아이의 오락과도 같은 ‘천진天眞’함, 부끄러워 감추는 처녀의 순수한 ‘진정眞情’,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문학에서 추구하려한 핵심이라는 것이다. 결국 문학이 추구해야 할 것은 무슨 거창한 소명의식이나 교훈주의가 아니라 ‘천진天眞’과 ‘진정眞情’의 토로일 뿐임을 천명한 것이다.
▲ 전문
인용
2. 동심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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