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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 서설 본문

책/한시(漢詩)

한국한시사 - 서설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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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설(序說)

 

 

1. 한시(漢詩) 연구(硏究)의 과제(課題)

 

 

한시를 연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시에서의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인간들의 삶을 있게 해주는 원천으로 소중한 것이 되고 있으며, 한시에서 인간들은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해법(解法)조차도 이 자연을 통하여 구하려 한다. 그러나 한시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들과 자연이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때, 물아(物我)가 한데 어우러져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조화미(調和美)의 극치(極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시(漢詩)를 모르면서도 한시(漢詩)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더욱이 우리 학계의 현실은 지금까지도 연구에 제공될 자료의 기초 조사조차도 기도(企圖)된 일이 거의 없는 원초(原初) 그대로이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부분적으로 개별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연구 성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사실상 문학외적(文學外的)인 연구 목적에 바쳐져 왔을 뿐, 한시(漢詩)를 제모습 그대로 파악하여 접근한 본격적인 연구 작업은 나타나지 않았다. 때문에 개별 작품에 대한 연구 기반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불모(不毛)를 무릅쓰고 역사적인 연구부터 먼저 엄두를 내는 기도(企圖)는 엄청난 욕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안일하게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시(漢詩)를 제 모습 그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서 비롯해야 할 것이다.

 

첫째, 우리나라 한시(漢詩)를 역사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시(漢詩)의 원산지인 육조(六朝)ㆍ당()ㆍ송() 등 중국시(中國詩)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하며

둘째, 자료의 선택과 작품의 평가는 모름지기 한시(漢詩)를 생산한 당시의 시인(詩人), 비평가(批評家)들이 직접 편찬에 참여한 선발책자(選拔冊子)와 비평서(批評書)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수행을 통하여 우리나라 한시문학(漢詩文學)의 진상(眞相)을 파악하고, 나아가 이러한 문학사의 현실이 제시한 방향에 따라 한시(漢詩) 연구의 당면 과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중국시의 전통을 그대로 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문언(文言)으로 중국시를 체험한 우리나라 시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시세계의 한계는 처음부터 예료(豫料)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근체시(近體詩)를 예술적으로 완성하였다는 두보(杜甫)의 시를 통하여,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이 그 음악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 수 있었으며, 대목(大木)의 솜씨로 깎고 다듬은 장식(粧飾)의 묘()를 어떻게 체득(體得)할 수 있었을 것인지, 한시(漢詩) 연구의 과제는 이러한 의심에서부터 비롯하여야 할 것이다.

 

문학은 그 독특한 언어구조로 인하여 매우 교묘한 전달 능력을 가질 수도 있고, 또 독자에게 다른 종류의 글에서 얻어 낼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인식을 안겨주는 힘의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적(詩的) 표현의 공구(工具)로서의 언어 즉 중국어에 소원(疏遠)한 우리나라 시인들이 제작한 한시(漢詩)는 필연적으로 개념의 시(), 정신의 시()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때문에 우리나라 한시(漢詩)에 있어서의 수사학적(修辭學的) 요구는 사실상 공소(空疎)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한시(漢詩)의 한계를 가늠하는 특징적인 사실로 지적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시(漢詩)의 전통이 이미 전시대(前時代)의 것이 되어 버린 오늘에 있어, 복고적인 비평적 접근으로 양자(兩者)의 편차를 검증하기에는 우리들의 능력은 분명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시(漢詩) 연구에서 문제 삼아야 할 중요한 과제는, 우리나라 시인ㆍ비평가들이 중국의 문학 이론을 수용할 때 보여준 자각적(自覺的)인 의지를 읽어내어 개념의 시()가 함축하고 있는 깊은 의취(意趣)를 탐색하고 발굴하는 것만이 한시(漢詩) 문학의 창조적 전승에 이바지하는 길이 될 것이다.

 

 

 

 

 2. 자료의 선택 문제

 

 

한문학사는 문장(文章)의 역사다. 구어(口語)로 된 소설의 역사가 아니라 문언(文言)으로 된 시문(詩文)의 역사이며, 사실상 그 주종(主宗)이 되어 온 것은 시(). 그러나 우리 문학사의 현실은 이러한 사실(史實)이 사실(事實)로 통용되지 않았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필이나 소설과 같은 이른바 문학(文學)에 대한 연구는 시대의 풍상(風尙)으로 각광을 받아왔고 사실상 조윤제(趙潤濟)한국문학사(韓國文學史)가 이러한 편향(偏向)을 조성하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정작 한시(漢詩)에 대한 관심은 작품의 소재 파악이나 기초 자료의 조사 단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시(漢詩) 전통이 이미 전시대(前時代)의 것이 되어 버린 현재의 상황에서, 4만여 종을 헤아리는 시문집(詩文集)을 수집, 망라하여 우리 문학사의 서술에 직접 제공될 수 있는 한시(漢詩) 자료를 선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설사 그러한 작업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성취를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만큼 안일(安逸)을 누릴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시(漢詩)를 생산한 당시의 시인(詩人)ㆍ비평가(批評家)들이 직접 편찬에 참여한 역대의 중요 사찬(私撰) 시선집(詩選集)을 조사, 검토하여 이것들이 우리 문학사의 기술에 기여할 수 있는 자료사적(資料史的) 의미부터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이것들이 성립된 과정을 살피고, 둘째로 그 선발(選拔)의 기준이 된 편자(編者)의 선관(選觀)을 추적하여 이들 시선집(詩選集)이 지니는 시대사적(時代史的) 의의를 확인하는 차례를 밟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시문(詩文)의 선발책자(選拔冊子)를 편찬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고려말 김태현(金台鉉)동국문감(東國文鑑)이 그 최초의 것이 아닌가 한다. 참고로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김태현(金台鉉)항상 손수 동인시문을 집어 들었는데 동국문감이라 불리워진다[嘗手執東人詩文, 號東國文鑑].”란 기록으로 보아 동국문감(東國文鑑)은 시문선집(詩文選集)임에 틀림없으며, 동문선서(東文選序)김태현이 지은 문감이 일실되어 소략해졌으며 최해가 저술한 동인문이 흩어져 일실된 것이 오히려 많다[金台鉉作文鑑, 失之疎略, 崔瀣著東人文, 散逸尙多].”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발책자(選拔冊子)로는 동국문감(東國文鑑)이 최초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실전(失傳)되어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최해(崔瀣)동인지문(東人之文)이 편찬되었지만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것으로는 동인지문(東人之文)ㆍ사육(四六)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을 볼 수 있을 뿐이므로 그 전질(全帙)의 모습은 알 수가 없으며, 또한 이것들은 모두 시문(詩文)을 함께 선발(選拔)한 문선집(文選集)이다.

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의 잔권(殘卷)인 권7~9가 최근 발견되어 계간서지학보(季刊書誌學報)16(1995)에 신승운(辛承云)의 해제와 함께 원문이 소개되었다.

 

시선집(詩選集)으로서는 조운흘(趙云仡)최해(崔瀣)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현재까지 유전(流傳)하고 있는 것으로는 최초의 것이 되고 있다. 최해(崔瀣) 비점(批點)ㆍ조운흘(趙云仡) 정선(精選)으로 된 필사본(筆寫本),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것으로는 최고(最古)의 것이다.

 

이밖에도 충숙왕(忠肅王) 6()337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십초록(十鈔錄)【『夾注名賢十鈔詩』】 3권이 있으나 이는 대부분 당시(唐詩)로 채워져 있으며, 우리나라 것으로는 최치원(崔致遠)ㆍ박인범(朴仁範)최승우(崔承祐)ㆍ최광유(崔匡裕) 등 수인(數人)의 나대시편(羅代詩篇)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 선시(選詩)의 범위가 모두 충렬왕(忠烈王代)를 하한(下限)으로 하고 있으며 내용 또한 소략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본격적인 선발책자(選拔冊子)의 출현을 가능케 한 초기의 시도로서 우리나라 한시문학사(漢詩文學史)에 한 시기를 구획케 하는 데 중요하게 기여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본격적인 사찬(私撰) 시선집(詩選集) 가운데서 그 시대사적 의미를 함께 읽을 수 있는 조선초기의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조선중기의 국조시산(國朝詩刪), 조선후기의 기아(箕雅), 그리고 중인(中人)이라는 특수 신분층의 시편(詩篇)으로 채워진 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및 한시(漢詩) 시대가 사실상 끝난 시기에 이를 결산한 대동시선(大東詩選)등을 대상으로 하여 이것들이 지니는 시학사적(詩學史的) 의미를 추구하는 데서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다.

 

 

 

 

 1)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

 

청구풍아(靑丘風雅)의 기본적인 성격은 조선초기 김종직(金宗直)에 의하여 편찬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형식적인 의미에서 보면, 조선초기에 이르러 전시대(前時代)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대관찬사업(大官撰事業)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김종직(金宗直)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 시선집(詩選集)이라는 것이며,

둘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당시의 소단(騷壇)이 이때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청구풍아(靑丘風雅)에 이르러 그 극복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구풍아(靑丘風雅)는 신라말에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126()의 각체시(各體詩) 503수를 정선(精選)하여 7() 1()으로 간행한 시선집(詩選集)이다. 현존하는 청구풍아(靑丘風雅)로는 국립도서관소장 갑진자본(甲辰字本)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필사본이 유전(流傳)하고 있으나 갑진자본(甲辰字本)은 창고(蒼古)하여 인묵(印墨)이 선명치 않은데다가 훼손된 부분이 많으며 여타(餘他)의 필사본高大本 들도 완전하게 보존된 것을 얻어 보기 어렵다. 청구풍아(靑丘風雅)의 간행 시기는 갑신자본(甲辰字本)에 있는 편자의 서문(成化 9, 성종 4)과 최숙정(崔淑精)의 발문(跋文, 성종 6)에 따라 일단 성종 초로 추정할 수 있으나 김종직(金宗直)의 연보에 따르면 1488(성종 19)동문수(東文粹)와 함께 간행된 것으로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문선집(詩文選集)의 편찬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말하기 어렵지만, 동문선(東文選)서문의 언급으로 보아 고려중ㆍ말엽에 김태현(金台鉉)이 편집(編輯)동국문감(東國文鑑)이 그 선구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시()만 따로 초선(抄選)한 시선집(詩選集)의 편찬 작업도 고려말기에서 비롯하고 있다. 청구풍아(靑丘風雅)도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룩된 초기 성과 가운데 하나다. 서문(序文)의 다음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시는 김태현(金台鉉)최해(崔瀣)조운흘(趙云仡) 세 분이 각각 선집(選集)을 남기고 있다 (중략) 이에 짐짓 이 세 분이 편찬한 것에 따라 그 뛰어난 것을 선발하고 또 충선왕(忠宣王) 이후 지금까지 고람(考覽)할 만한 유고(遺稿) 중에서 고시(古詩)ㆍ율시(律詩) 도합 300여수를 뽑았다. 경인년(庚寅年)에 사국(史局)의 자리를 이어받아 최숙정(崔淑精)과 더불어 관()을 검색하던 중 오래된 상자 속에서 변계량(卞季良) 등 여러 분이 수집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책을 얻어 또 100여편을 수록하였다. (후략)

東人之詩, 金快軒崔猊山石磵三老各有選集 (中略) 於是, 姑就三老所撰, 而拔其尤者, 又採忠宣以下, 至于今日, 遺藁可攻者, 合古律詩三百餘篇. 庚寅歲, 承乏史局, 與國華檢館中, 舊篋得春亭諸公裒集未成之書, 又錄百餘篇. (後略)

 

 

여기서 쾌헌(快軒)은 김태현(金台鉉)이며, 예산(猊山)최해(崔瀣, 1287~1340), 석간(石磵)조운흘(趙云仡, 1332~1404)이다. 예산(猊山)과 석간(石磵)의 선집(選集)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으나, 아마 이는 윗 예산(猊山)의 편저(編著)로 알려진 동인지문(東人之文)(詩文選集)과 석간(石磵)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세 분이 편찬한 것에 따라[三老, 各有所撰].’라 하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최해(崔瀣)의 편서(編書)와 조운흘(趙云仡)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사이에도 어떠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최해(崔瀣)동인지문서(東人之文序)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충렬왕(忠烈王) 때까지의 명가(名家) 중에서 시() 약간을 뽑아 오칠(五七)이라 하고 문() 약간을 천백(千百)이라 하고 변려문(騈儷文) 약간을 사육(四六)이라 하고 이를 합쳐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 하였다고 한다.

於新羅崔孤雲, 以至忠烈王時凡名家者, 得詩若干首, 題曰: 五七; 文若干首, 題曰千百; 騈儷之文若干首, 題曰四六, 摠而題其目曰: 東人之文

 

 

이로써 보면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동인지문(東人之文)ㆍ사육(四六)은 이때 편찬한 동인지문(東人之文)가운데 하나인 사육(四六)인 것으로 보이며, 이 밖에 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의 잔권(殘卷)이 최근 발견되었고 동인지문(東人之文)ㆍ천백(千百)은 실전(失傳)된 것 같다. 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동문선(東文選)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운필(呂運弼)이 쓴 논문인 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의 면모와 동문선(東文選)과의 관련 양상【『한국한시연구3, 태학사, 1995을 참고 바란다.

 

현존하는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는 최해가 비점(批點)했고 조운흘이 정선했다[崔瀣 批點, 趙云仡 精選].’으로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선자(選者)를 먼저 적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서 편자인 조운흘(趙云仡)에 앞서 비점(批點)을 가한 최해(崔瀣)의 이름을 먼저 적고 있는 것은 이 책에 있어서 최해(崔瀣)의 비중이 조운흘(趙云仡)보다 더 큰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중요한 사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최해(崔瀣)와 조운흘(趙云仡)의 선후관계다. 최해(崔瀣)의 졸년(卒年)에 조운흘(趙云仡)은 겨우 아홉살 밖에 안되는 어린 나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석간(石磵)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예산(猊山)이 비점(批點)을 가한 것이 아니라 예산(猊山)이 초선(抄選)하여 비점(批點)을 한 어떤 시선집(詩選集)을 참고하여 다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을 편집하고, 예산(猊山)이 비점(批點)을 가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동인지문(東人之文)ㆍ오칠(五七)로 예상되는 예산(猊山)동인지문(東人之文)이 석간(石磵)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과 유관(有關)하리라는 추측을 가능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에서 보면, 청구풍아(靑丘風雅)는 김태현(金台鉉)최해(崔瀣)ㆍ조운흘(趙云仡) 등이 편찬한 시선집(詩選集)과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등의 미완성 구고(舊藁)가 기본이 된 선집(選集)의 선집(選集)’이라 할 것이다

 

청구풍아(靑丘風雅)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동문선(東文選)이 간행되었으며, 유몽와(柳夢窩)대동시림(大東詩林)이 이보다 뒤에 나온 듯하나 이것은 함께 논할 수준의 것이 되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은 방대한 관찬서(官撰書)로서, 또 시문(詩文)의 총집(總集)으로서 이것이 갖는 자료집(資料集)으로서의 의미는 막중하지만, 그러나 청구풍아(靑丘風雅)동문수(東文粹)(文選集)와 더불어 편자(編者)의 취향과 조감(藻鑑)에 따라 정선(精選)한 사찬서(私撰書)이고 또 이것은 시선집(詩選集)이라는 점에서 양자(兩者)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이와 같은 양서(兩書)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제가(諸家)의 기록에서도 사실로 확인된다.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삼문(成三問)이 살았을 때 우리 나라의 문()을 편집하여 동인문보(東人文寶)라 하였으나 다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김종직(金宗直)이 뒤따라 이를 편성하여 동문수(東文粹)라 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은 문()의 번화한 것을 미워하여 다만 온자(醞藉)한 문()만 취했다. 비록 규범에 마음을 썼으나 나른하고 힘이 없어 볼 만한 것이 못 된다. 그가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는 비록 시가 문()과 같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호방(豪放)한 듯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고집불통의 편견이냐?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것은 유취(類聚), ()한 것이 아니다.

成謹甫在時 編東人之文名曰東人文寶 未成而死 金季醞踵而成之 名曰東文粹 然季醞專惡文之繁華 只取醞藉之文 雖致意於規範 而萎薾無氣 不足觀也 其所撰靑丘風雅 雖詩不如文然 詩之稍涉豪放者 棄而不錄 是何膠柱之偏 至如達城所撰東文選 是乃類聚 非選也.

 

 

두 책의 성격과 김종직(金宗直)의 문학 세계까지도 함께 논하고 있다.

 

 

책명 동문선(東文選) 청구풍아(靑丘風雅)
편찬자 서거정 김종직
편찬 주체 관찬(官撰) 사찬(私撰)
특징 과거 시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함 호방한 것들은 수록하지 않아 모인 시들이 힘이 없음.

 

 

그리고 남용익(南龍翼)홍만종(洪萬宗)은 그 속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차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남용익(南龍翼)기아서(箕雅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문선(東文選)은 널리 취하였지만 정선(精選)하지 아니하였으며 속동문선(續東文選)은 수재(收載)한 것이 많지 않다. 청구풍아(靑丘風雅)는 정선(精選)하였지만 널리 취하지 않았으며 속청구풍아(續靑丘風雅)는 어디서 취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東文選博而不精, 續則所載無多. 靑丘風雅精而不博, 續則所取不明.

 

 

홍만종(洪萬宗)시화총림증정(詩話叢林證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거정(徐居正)동문선(東文選)은 한 유취(類聚)이니 또한 선법(選法)을 따른 것이 아니다. 소세양(蘇世讓)동문선(東文選)은 취사(取舍)가 불공평한 것으로 보아 자못 애증(愛憎)에 기인한 것 같다. 김종직(金宗直)청구풍아(靑丘風雅)는 다만 한 것만 취하여 기상이 뛰어난 것은 빠뜨렸다. 유근(柳根)속청구풍아(續靑丘風雅)는 버리고 취()한 것이 분명치 않아 그 요령을 얻지 못했다.

徐四佳東文選, 卽一類聚, 亦非選法. 蘇暘谷續東文選, 取舍不公, 頗因愛憎. 金佔畢靑邱風雅, 只取精簡, 遺其發越. 柳西坰續靑邱風雅, 與奪不明, 不得其要領.

 

 

두 속집(續集)의 성격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로 보면 속동문선(續東文選)속청구풍아(續靑丘風雅)는 각각 정편(正篇)에 이어 그 이후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 점에서 속편(續篇)의 의미가 있을 뿐 정편(正篇)의 성격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속동문선(續東文選)에는 정편(正篇)에서 볼 수 있는 전집적(全集的)인 성격은 이미 상실되고 있으며, 특히 청구풍아(靑丘風雅)와 같은 사찬(私撰) 선집(選集)의 경우, 다른 편자에 의하여 그것을 속보(續補)한다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유근(柳根)청구풍아(靑丘風雅)남용익(南龍翼)홍만종(洪萬宗)이 각각 지적한 바와 같이 어디서 취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所取不明]’, ‘그 요령을 얻지 못했다[未得要領]’한 것으로 사실상 청구풍아(靑丘風雅)를 속보(續補)할 만한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청구풍아(靑丘風雅)는 편자 미상인 여러 종의 필사본33, 71冊本 이 유전(流傳)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근(柳根)의 속편(續篇) 외에도 또 다른 이종(異種)이 있는 듯하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청구풍아(靑丘風雅)도 조선후기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이종(異種)의 인본(印本)이 있는 바, 청구풍아(靑丘風雅)라는 이름이 이미 보통명사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당시의 소단(騷壇)이 아직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은 당시의 풍상(風尙)에서 멀리 떨어져 엄중(嚴重)ㆍ방원(放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성현(成俔)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김종직(金宗直)청구풍아(靑丘風雅)를 가리켜 조금이라도 호방(豪放)한 듯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다[稍涉豪放者, 棄而不錄]’이라 한 것을 선관(選觀)의 편향성을 지적한 적평(適評)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는 곧 그의 시가 송시학(宋詩學)의 호방(豪放)한 기격(氣格)을 사실상 극복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후대인의 비평 가운데서도 차천로(車天輅)신흠(申欽)선사사(仙槎寺)

 

鶴飜羅代蓋 龍蹴佛天毬 ()은 신라시대의 일산에 번득이고 용()은 불천(佛天)의 공을 찬다.

 

()를 들어 그의 방달(放達)’ 또는 방원(放遠)’함을 칭도(稱道)한 것이라든가,

 

허균(許筠)신륵사(神勒寺)【「夜泊報恩寺下 贈住持牛師 寺舊名神勒或云甓寺 睿宗朝改創極宏麗賜今額」】

 

上方鐘動驪龍舞 상방(上方)의 종이 울리니 여룡(驪龍)이 춤을 추고
萬竅風生鐵鳳翔 일만 구멍에서 바람이 나오니 철봉(鐵鳳)이 난다.

 

홍량(洪亮)ㆍ엄중(嚴重)’하다고 하여 우주에 기둥을 받치는 구()라 하고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

 

桃花浪高幾尺許 도화(桃花) 뜬 물결이 몇자나 높았길래
狠石沒頂不知處 ()은 꼭지가 잠기어 있는 곳을 모르겠네.
兩兩鸕鶿失舊磯 쌍쌍이 나는 물새는 옛집을 잃고
啣魚却入菰蒲去 고기를 물고 도리어 수초 사이로 들어가네.

 

를 가장 높은 것이라 평하고 있는 것도 모두 그 엄중방원(嚴重放遠)’김종직(金宗直)의 시세계를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그의 시세계가 그 선시(選詩) 과정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여 이룩된 것이 청구풍아(靑丘風雅)이다. 때문에 그는 웅혼(雄渾)ㆍ방원(放遠)으로 일세(一世)에 시명(詩名)을 드날린 이규보(李奎報)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 같은 시인의 시작(詩作) 가운데서도 호방(豪放)한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온 작품들은 선발(選拔)하지 않았으며 또한 완려(婉麗)ㆍ신경(新警)한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완려(婉麗)’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온 이규보(李奎報)하일즉사(夏日卽事)청구풍아(靑丘風雅)에는 보이지 않는다.

 

輕衫小簟臥風櫺 댓잎자리 가벼운 적삼으로 바람난간에 누웠다가
夢斷啼鶯三兩聲 꾀꼬리 울음 두세 소리에 꿈길이 끊어졌네.
密葉翳花春後在 나무 잎에 꽃이 가리어 꽃은 봄 뒤에도 남아있고
薄雲漏日雨中明 엷은 구름에 해가 새어 나와 비 속에서도 밝구나.

 

이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산뜻한 기분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며, 그의 칠언절구(七言絶句)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어 왔기 때문에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한 역대 시선집(詩選集)에선 빼지 않고 수록하고 있지만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다만, 횡방(橫放)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이규보(李奎報)의 시편(詩篇) 중에서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선입(選入)되고 있는 것으로는 칠언고시(七言古詩)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를 들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 시도 그 횡방(橫放)한 기상(氣象)에 앞서 전편(全篇)에 넘치는 부려(富麗)한 여유가 그의 안광(眼光)을 흡족하게 하였는지 모른다.

 

 

이러한 사정은 정몽주(鄭夢周)의 경우에 있어서도 같은 현상을 보여 준다. 칠언율시 가운데서도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중구일제익양수이용명원루(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 동래역 시한서장상질(蓬萊驛 示韓書狀尙質)과 같은 작품은 모두 질탕호방(跌宕豪放)’한 작품으로 후세의 칭송을 받은 것이지만,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한 편도 뽑아주지 않았다.

 

후세에까지 절창(絶唱)으로 불리어 온 것 중에서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선입(選入)된 것은 강남곡(江南曲)(七絶)여우(旅寓)(五律) 정도이지만 이 작품은 호쾌(豪快)와 풍류를 함께 읽을 수 있는 명작이기 때문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그의 시가 전혀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에서 나왔다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며, 오히려 심울(沈鬱)ㆍ엄중(嚴重)한 두시(杜詩)에 대한 관심이 그의 시세계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후대의 시선집(詩選集)에서 당()을 그 선발(選拔)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것도 시원적(始源的)으로는 김종직(金宗直)에게까지 소급되어야 한다는 제언(提言)이 결코 무용(無用)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를 여기서 찾음직하다.

 

 

 

 

 2)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格調論)

 

국조시산(國朝詩刪)의 기본 성격은 허균(許筠)이 초선(鈔選)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허균(許筠)은 자신이 선발(選拔)한 작품에 스스로 비()와 평()을 함께 붙이고 있어 이는 우리나라 비평사상(批評史上) 그 유례가 없는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시대사적으로는, 동문선(東文選)청구풍아(靑丘風雅)이후 목릉성세(穆陵盛世)에 이르는 150년간은 조선 시대의 소단(騷壇)이 전에 없이 다양한 전개를 보이면서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허균(許筠)의 높은 조감(藻鑑)으로 이것들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그 시대에 그 비평이 함께 어울려 이룩한 무비(無比)의 성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허균(許筠)당시(唐詩)를 표준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가 주로 취택(取擇)한 것은 성률(聲律)이 맑고 색택(色澤)이 현란한 것이고 보면,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시()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본격파(本格派) 비평가(批評家)에 의하여 이룩된 보기 드문 성과라 할 것이다. 문언(文言)으로 중국시를 배운 우리나라 시인ㆍ비평가들이 사어(辭語)나 성률(聲律)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에 소원(疏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나, 허균(許筠)은 이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통하여 이러한 취약점을 스스로 극복하여 우리나라 비평사상(批評史上) 가장 높은 시학(詩學)의 수준을 과시하고 있다.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조선조 정도전(鄭道傳)에서부터 권필(權韠)에 이르는 35()의 각체시(各體詩) 888수를 선집(選輯)하고 권말(卷末)에 허씨(許氏) 일가(一家)허문세고(許門世藁)를 부재(附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선집(詩選集)은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하다가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러 박태순(朴泰淳)에 의하여 다시 편집, 간행되었다. 서문(序文)에는 숙종(肅宗) 21()1695년의 간기(刊記)가 있으나 홍만종(洪萬宗)시화총림증정(詩話叢林證正)여후 박태순은 광주에 부윤으로 재직할 때 허균이 엮은 국조시산(國朝詩刪)을 간행했다[朴汝厚泰淳, 尹廣州也. 刊行許筠所纂國朝詩刪].’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가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재직한 숙종(肅宗) 23(1697)이 간행 연대가 될 것이다.

 

그의 서문에 따르면, 허균(許筠)이 이미 피주(被誅)되자 이 선집(選集)과 그의 저술들은 거의 인망(湮亡)되기에 이르렀고 혹 호사가(好事家) 가운데 수록하여 둔 자가 있어도 밖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아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은 폐할지언정 그 소집(所集)은 폐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또 많지 않은 우리나라 시선집(詩選集)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이 선집(選集)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널리 제본(諸本)을 구하고 증정(證定)을 가하여 수권(數卷)으로 선집(選集), 간행한다고 술회(述懷)하고 있다. 박태순(朴泰淳)은 이로 인하여 그 뒤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1699)에 전라도 유생(儒生)들로부터 규탄을 받아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좌천되기까지 하였다 한다.

 

이 책은 9() 4()의 목판복(木版本)이다. 이 밖에도 수종(數種)의 이본(異本)필사본 51, 印本 21이 유전(流傳)하고 있으나 이것들은 대개 집중(集中)의 고시(古詩)와 잡체시(雜體詩)를 수재(收載)하지 않았거나 권말(卷末)의 허문세고(許門世藁)가 빠져 있는 것들이다.

 

국조시산(國朝詩刪)이전의 시선집(詩選集)으로는 청구풍아(靑丘風雅)동문선(東文選)(詩文合集)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조선초기의 것들이며, 뒤에 다시 청구풍아(靑丘風雅)동문선(東文選)은 각각 속편(續編)이 나오기까지 하였으나 속청구풍아(續靑丘風雅)는 그 소거(所據)가 불명(不明)하며 속동문선(續東文選)은 정편(正篇)이 간행된 지 불과 40년 뒤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동문선(東文選)이후 우리나라 시업(詩業)이 크게 떨친 조선중기의 시선집(詩選集)으로서 국조시산(國朝詩刪)의 자료적 의미는 기록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집(選集)에는 금체(今體)는 물론이요 고조장편(古調長篇)과 잡체(雜體)에 이르기까지 가구(佳句) 절조(絶調)마다 편자의 비()와 평()을 붙이고 있어 이는 한갖 선시(選詩)의 작업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성수시화(惺叟詩話)가 조선중기까지의 한시약사(漢詩略史)라 한다면, 국조시산(國朝詩刪)은 그 구체적인 실제비평이므로 이것들이 우리나라 시사(詩史)연구에 기여한 공업(功業)은 막중(莫重) 이상으로 값진 것이다.

 

한편 이 책에는 작자 또는 시작(詩作)과 관련된 제영(題詠)이나 고실(故實), 역대의 시화(詩話)ㆍ만록(漫錄)에서 찾아 음각(陰刻)으로 보주(補注)를 붙이고 있다. 이는 아마 고본(稿本)을 재편집(再編輯)하는 과정에서 박태순(朴泰淳) 자신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문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때에 널리 제본(諸本)을 구()하여 거기에 정정(訂定)을 가()하고, 또 제가(諸家)의 시화(詩話)에서 따서 같은 종류의 것을 보충하고 베껴서 몇 권을 만들었다.

於是, 廣求諸本, 頗加證定, 又取諸家詩話, 以類補綴, 繕寫爲幾卷.

 

 

이 언급으로 보아 박태순(朴泰淳)이 한 일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보주(補注) 가운데는 양경우(梁慶遇)제호시화(霽湖詩話), 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峰類說), 차천로(車天輅)오산설림(五山說林)등도 보이는 바, 편자인 허균(許筠)이 동시대인의 저술까지 두루 섭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특히 양경우(梁慶遇)이수광(李睟光)유몽인(柳夢寅) 등은 허균(許筠)보다도 뒤에 죽었다. 그리고 전기(前記) 시화서(詩話書) 가운데서 간행 연대가 알려져 있는 지봉유설(芝峰類說)허균(許筠)이 죽기 4년 전에 간행되었으나, 성수시화(惺叟詩話)에 따르면 정미년(丁未年, 39)에 이미 국조시산(國朝詩刪)이 완성(完成)된 것으로 보인다. 허균(許筠)의 태인은거(泰仁隱居) 이후의 시기이기 때문에 그가 득세(得勢)한 바쁜 생활 속에 저술을 할 여유는 없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허균(許筠)홍길동전(洪吉童傳), 은인(隱人)의 전기인 장산인전(張山人傳),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장생전(蔣生傳)등 서사체 문장(敍事體 文章)을 통하여 그의 산문(散文) 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가 문학으로 영채(英彩)를 발한 것은 시와 비평이다. 박순(朴淳)에게 당()을 배운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이달(李達) 등이 등장함에 따라 조선중기 소단(騷壇)의 주류가 학당(學唐)으로 경도(傾倒)하게 되었거니와 이달(李達)로부터 당()을 배워 시인으로 성장하게 된 허균(許筠)은 맑고 고운 시로써 정평(定評)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시세계는 비평에 있어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국조시산(國朝詩刪)성수시화(惺叟詩話)학산초담(鶴山樵談)등의 저작을 통하여 격조 높은 당시(唐詩)의 성격과 학당(學唐)의 시사적(詩史的) 의미를 명쾌하게 개진함으로써 조선중기 시학(詩學)의 높은 경지를 모색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서 그 자료적 의미가 기록되어 마땅하다.

첫째, 당시(唐詩)에 근접하고 있는 조선 전기의 시작(詩作)에 대하여 일구일련(一句一聯)에 이르기까지 비평을 붙여 근당(近唐)의 사실을 증험(證驗)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唐詩)의 좋은 표준척(標準尺)으로 우리 시()의 성운(聲韻)을 점검하여 시에 있어서 형식적인 기교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허균(許筠)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이른바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우는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의 시편(詩篇)을 중심으로, 조선 초기 근당(近唐)으로 알려진 이주(李胄)신광한(申光漢)김정(金淨)나식(羅湜) 등의 각체시(各體詩)에 대하여 그의 다양한 표현을 빌어 비()와 평()을 가()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세상에서 해동(海東)강서시파(江西詩派)로 불러 온 이행(李荇)의 시()에 대해서도 당시풍(唐詩風)이 깃든 작품에 대해서는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초기 송시권(宋詩圈)에서 사실상 일탈(逸脫)한 바 있는 김종직(金宗直)의 작품에 대해서도 유독 당()에 핍근(逼近)하다고 할 정도로 허균(許筠)의 당()에 대한 관심은 절실하다.

 

그러나 허균(許筠)이 비평가로서의 높은 조감(藻鑑)을 과시한 것은 성률(聲律)에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뿐만 아니라 성수시화(惺叟詩話)학산초담(鶴山樵談)의 도처에서 시()의 음악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의 시작(詩作)을 수십편이나 뽑아 넣으면서 그 경위를 성수시화(惺叟詩話)6364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두 사람의 시()를 내가 국조시산(國朝詩刪)에 뽑아 넣은 것이 각각 수십편이나 되는데 음절(音節)은 정음(正音)에 들 만하지만 그 밖에는 뇌동(雷同)을 면치 못한다.

二家詩, 余選入於詩刪者, 各數十篇, 音節可入正音, 而其外不耐雷同也.

 

그가 이들의 시()를 선발(選拔)한 기준이 음절(音節)에 있었음을 사실대로 토로하고 있다. 계속하여 그는, 내 일찍이 고죽(孤竹)의 오언고시(五言古詩)와 율시(律詩), 망형(亡兄)의 가()ㆍ행(), 소재(蘇齋)의 오언율시(五言律詩), 지천(芝川)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손곡(蓀谷)ㆍ옥봉(玉峯) 및 죽은 누이의 칠언절구(七言絶句)를 한 책으로 만들어 보니 그 음절(音節)과 격률(格律)은 모두 옛 사람에 가까우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죄가 미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아아! 누가 그 원래의 소리로 돌이키겠는가?

余嘗聚孤竹五言古詩, 亡兄古歌行, 蘇相五言律, 芝川七言律, 蓀谷玉峯及亡姊七言絶句, 爲一帙看之, 其音節格律, 悉逼古人, 而所恨氣不及焉. 嗚呼, 孰返其元聲耶.

 

 

라 하여 역시 선시(選詩)에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음절(音節)이나 격률(格律)과 같은 시()의 소리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가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개별 작품에 대한 실제비평을 행함에 있어서도 당()과 비당(非唐)은 엄격히 구별하고 있으며 특히 근당(近唐)의 시편(詩篇)에 대해서는 성운(聲韻)을 논하는 의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허균(許筠)의 성운(聲韻)에 대한 깊은 조예는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고려시대의 시작(詩作)을 논하는 곳에서도 이채(異彩)를 발하고 있다.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으로 정평(定評)되어 있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대해서도 각각 그 음악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색(李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부벽루(浮碧樓)에 대하여 성수시화(惺叟詩話)13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꾸미지도 않고 탐색하지도 않았지만 우연히 음조에 합치하여, 읊조린 것이 신묘하고 뛰어나다.

不雕飾, 不探索, 偶然而合於宮商, 詠之神逸.

 

 

스스로 격조(格調)에도 뛰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북관(北關)에서 지은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에 대해서도 성수시화(惺叟詩話)16에서 음절이 흥겨우니 성당의 풍격이 있다[音節跌宕, 有盛唐風格].’이라 하여 그 성당(盛唐)의 풍격(風格)을 특히 음절(音節)로써 조감(藻鑑)하고 있다. 그리고 강남녀(江南女)(七絶)에 있어서도 성수시화(惺叟詩話)16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풍류(風流)가 호굉(豪宕)하여 천고(千古)에 빛나며 시() 또한 악부(樂府)와 너무 닮았다.

風流豪宕, 輝映千古, 而詩亦酷似樂府.

 

 

이렇듯 악부(樂府)에 비견하고 있다.

 

이러한 허균(許筠)의 높은 안목 때문에 국조시산(國朝詩刪)은 후대의 시인(詩人)과 묵객(墨客)들에게 널리 읽혀진 바 되었으며 특히 시화(詩話)와 비평서(批評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그의 종남총지(終南叢志)에서, 이수광(李睟光)정사룡(鄭士龍)후대야좌(後臺夜坐)시를 폄하(貶下)하여 논한 것을 허균(許筠)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허균(許筠)이 편찬한 국조시산(國朝詩刪)가운데 이 시를 뽑아 넣고 하기를, “이 늙은이의 이 연()은 압권(壓卷)임에 틀림없다라 하였다. 허균(許筠)은 조감(藻鑑)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으니 마땅히 지봉(芝峰)의 이러한 폄론(貶論)이 있는 것을 깊이 이해하였을 것이다. 어찌 자세하게 궁구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했겠는가?

許筠所撰國朝時刪中, 選入此詩而評之曰: “此老此聯, 當壓此卷.” 許筠以藻鑑名世, 則宜有所深解, 芝峰之有此貶論者, 豈未嘗細究而然耶?

 

 

허균(許筠)의 감식안(鑑識眼)에 깊은 신뢰를 보이고 있으며,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시화총림증정(詩話叢林證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허균(許筠)국조시산(國朝詩刪)택당(澤堂)과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잘 뽑은 것이라 칭도하고 있다. 시산(詩刪)이 세상에 성행(盛行)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惟許筠國朝詩刪, 澤堂諸公皆稱善揀, 詩刪之盛於世, 盖以此也.

 

 

다른 선집(選集)들은 모두 그 약점을 가지고 있지마는 오직 국조시산(國朝詩刪)만은 택당(澤堂)민을 비롯한 제공(諸公)들이 모두 잘 뽑았다고 칭찬하였고 국조시산(國朝詩刪)이 널리 세상에서 읽힌 까닭도 이 때문이라 하였다.

 

권말(卷末)에 부재(附載)허문세고(許門世藁)는 양천허씨(陽川許氏) 일문(一門) 가운데서도 이헌(頤軒) 허침(許琛)을 비롯하여 그의 아버지 초당(草堂, )과 형() 하곡(荷谷, ) 형자(兄姊) 난설헌(蘭雪軒) 6인의 시()를 시체(詩體)에 따라 편차(編次), 수록한 것이다. 여기서 허균(許筠)은 직접 부형(父兄)의 시편(詩篇)을 자선(自選)하는 방식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가 가장 아끼던 시우(詩友) 권필(權韠)로 하여금 비선(批選)케 했다.

 

그러나 난설헌집(蘭雪軒集)의 시문(詩文)은 대부분이 허균(許筠)의 것이라고도 하며, 또는 허균(許筠)이 원()ㆍ명대(明代)의 가구(佳句) 가운데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을 골라 난설헌(蘭雪軒)의 작품이라 가칭(假稱)하여 난설헌집(蘭雪軒集)에 첨입(添入), 전세(傳世)케 하였다는 세인(世人)의 기평(譏評)도 있는 바이수광(李睟光)남용익(南龍翼)김창협(金昌協) , 이는 농필(弄筆)의 여기(餘技)를 좋아하던 허균(許筠)의 일면을 단적으로 드러내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3) 기아(箕雅)와 절충론

 

허균(許筠)국조시산(國朝詩刪)이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시선집(詩選集)이라면,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찬집(撰集)기아(箕雅)국조시산(國朝詩刪)이후 조선후기 진신간(搢紳間)에 널리 읽혀진 시선집(詩選集)이다. 임병양란(任丙兩亂)의 실의(失意) 이후 깊은 정적(靜寂) 속으로 빠져 들어간 소단(騷壇)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숙종(肅宗) 연간에 이 책이 간행된 것은 시대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숙종(肅宗)영조(英祖) 연간에 가열된 당론(黨論)으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다시 빛을 잃고 시업(詩業)이 침체하기 시작한 조선후기 사단(詞壇)의 현실에서 볼 때 기아(箕雅)의 출현은 조선후기 소단(騷壇)의 중간 보고 이상으로 시사적(詩史的)인 의미는 값진 것이다.

 

그리고 찬자(撰者)남용익(南龍翼)은 시()로써 세상에 이름을 울린 詩人은 아니었지만 그가 저작한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우리나라 비평사상(批評史上) 가장 다양한 시품(詩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아(箕雅)의 자료적 의미 역시 스스로 막중한 것이 된다.

 

그러나 기아(箕雅)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편집정신이다. 역대의 중요 시선집(詩選集)을 두루 섭렵하여, 넘치는 것은 깎고 모자라는 것은 보태어 상호보완하고 절충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기아(箕雅)는 형식상으로는 사찬(私撰) 시선집(詩選集)이지만, 간행 당시(當時) 남용익(南龍翼) 자신이 문형(文衡)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채시(採詩) 작업 자체를 문형(文衡)의 임무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기아(箕雅)는 단순히 개인에 의하여 이룩된 사찬(私撰) 선발책자(選拔冊子) 이상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

 

기아(箕雅)는 신라말의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에서부터 조선조 숙종대(肅宗代)김석주(金錫冑)ㆍ신정(申晸) 등에 이르기까지 497()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選輯)하여 숙종(肅宗) 14(1688)에 운각(芸閣)의 필서체자(筆書體字)로 인행(印行)14() 7()이다. 그리고 이 운각필서체자(芸閣筆書體字)기아(箕雅)를 인쇄(印刷)할 때 처음 사용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서문 및 호곡집(壺谷集)무자제석만기(戊子除夕謾記)운각주자시용인포(芸閣鑄字始用印布)’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활자(活字)기아(箕雅)를 인행(印行)할 때 처음 사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을 편성함에 있어 그 기본 자료가 된 것은 동문선(東文選)청구풍아(靑丘風雅)국조시산(國朝詩刪)등이다. 그러나 동문선(東文選)널리 취하였지만 정선(精選)하지 아니하였다[博而不精]’하고 續編은 소재(所載)가 무다(無多)하며, 청구풍아(靑丘風雅)정선(精選)하였지만 널리 취하지 않았다[精而不博]’하고 그 속편은 소취(所取)가 불명(不明)하며,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자못 상핵(詳核)한 것이기는 하나 조선초기에서부터 선조대(宣祖代)에 한한 것이므로 수미(首尾)가 완비되지 않은 흠이 있어, 삼선중(三選中)에서 번다(繁多)한 것은 깎고 소략(疏略)한 것은 보태었으며 국조시산(國朝詩刪)이후의 것은 명가(名家)의 시문집중(詩文集中)에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을 취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편자 자신이 직접 취재(取材)한 것은 인조대(仁祖代)에서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는 70여년간의 것이다. 편제(編制)당시품휘(唐詩品彙)의 예에 따라 우사(羽士)ㆍ납자(衲子)ㆍ규수(閨秀)ㆍ잡류(雜類)ㆍ무명씨(無名氏)의 작품은 각체시(各體詩)의 말미(末尾)에 부재(附載)하였으며 불성씨(不姓氏) 3()을 권미(卷尾)에 부록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모역(謀逆)의 혐의로 피주(被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만 쓰고 성은 붙이지 않는 것이다. 허균(許筠)도 물론 여기에 든다.

 

 

이 책의 전편(全篇)을 보면,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비해 고시(古詩)와 배율(排律)이 금체(今體)의 율시(律詩)보다 상대적으로 적으며 잡체시(雜體詩)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중국에 비하여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뒤떨어지고 있으며 절구(絶句)가 모자라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곧 시()에 있어서 그 소상(所尙)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단적(端的)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내질(內質)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남용익(南龍翼) 자신이 지은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도 이는 사실로 확인된다. 그는 역대의 시가(詩家)를 논함에 있어,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색()ㆍ성률(聲律)ㆍ기력(氣力)을 시품(詩品)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반면에,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격조(格調)ㆍ정경(情境)ㆍ체제(體制)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곧 고려중기부터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던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당(學唐)으로 경도(傾倒)하게 된 시사(詩史)의 의미를 사실대로 간취(看取)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보면 이 책에서 남용익(南龍翼)은 찬자(撰者)의 취향이나 편집(偏執)에 사로잡히기 쉬운 선시사(選詩者)이기보다는 시대의 풍상(風尙)과 시가(詩家)의 소장(所長)을 사실 그대로 인정한 편집자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시문집(詩文集)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제작되었으며, 조선중기 시학(詩學)의 높은 수준을 과시한 허균(許筠)이 또한 성수시화(惺叟詩話)국조시산(國朝詩刪)의 찬자(撰者)라는 사실에서 보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시선집(詩選集)을 편찬한 남용익(南龍翼)의 시학(詩學) 또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저작한 호곡만필(壺谷漫筆)3에 수록된 시화(詩話) 부분을 따로 뽑아 부르고 있는 호곡시화(壺谷詩話)는 우리나라 역대의 시가(詩家) 비평에 있어 가장 다양한 시품(詩品)을 제시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문집 15()은 대부분이 시()로써 채워져 있으며 특히 고시(古詩)와 배율(排律)에 있어서는 수십(數十), 수백(數百)을 일필(一筆)에 구사하는 장편(長篇)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아(箕雅)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배율(排律)이나 고체(古體)는 세전(世傳)하는 시선집(詩選集) 중에서 선발(選拔)하고 있을 뿐, 증선(增選)하는 노력은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기아(箕雅)의 찬집(撰輯) 의도가 처음부터 편집자로서의 임무수행에 주안(主眼)이 있었음을 확인케 한다.

 

남용익(南龍翼)은 소년(少年) 등제(登第)하여 40년 동안 관로(官路)에 있으면서 문형(文衡)의 영관(榮官)에까지 올랐지만, 그러나 공여(公餘)에는 항상 시주(詩酒)를 즐겼을 뿐, 요로(要路)와의 절충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대제학(大提學)의 현직(現職)에 있으면서 기아(箕雅)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그의 체질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4)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

 

여기서 풍요(風謠)라고 한 것은 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위항시인(委巷詩人)의 시집(詩集)을 지칭하는 것이다. 시작(詩作)의 수준에 있어서는 사대부(士大夫)의 그것에 비길 것이 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중인(中人)ㆍ천예(賤隸)들의 피맺힌 소망이 응결(凝結)되어 있는 특수계층의 시집(詩集)이다. 때문에 그 편성의 과정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의 공동참여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으며, 사대부의 도움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위항시인(委巷詩人)이란 대체로 의역중인(醫譯中人)ㆍ서리(胥吏) 등과 같이 중간 계층의 신분에 속하는 시인(詩人)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대부의 기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평민(平民)보다는 우위에 있는 여정(閭井)의 시인(詩人)들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소대풍요(昭代風謠)에서처럼 일반 상인이나 천예(賤隸) 출신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위항인(委巷人)의 시집(詩集)을 간행하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현종(顯宗) 9(1668)에 중인 출신 6인의 시편(詩篇)을 모은 육가잡영(六家雜詠)이 나왔으며, 여기에 실린 시인(詩人)들은 최기남(崔奇男)을 비릇하여 남응침(南應琛)ㆍ정례남(鄭禮男)김효일(金孝一)최대립(崔大立)ㆍ정납수(鄭枏壽) 등 모두 일시(一時)의 명가(名家)들이다. 그 뒤 숙종(肅宗) 38(1712)에 창랑(滄浪) 홍세태(洪世泰)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격려와 협조로 10년동안 여정(閭井)에서 시편(詩篇)을 수집하여 해동유주(海東遺珠)1()을 간행한 것이 본격적인 위항시인의 시집(詩集)으로서는 최초의 것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는 바로 이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토대로 하여 증선(增選)ㆍ속보(續補)한 것이며, 이에 이르러 조선초기에서부터 숙종대(肅宗代)까지의 위항시인들의 시편(詩篇)을 정리하는 작업이 일단 마무리된 셈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역대의 중서천예(中庶賤隸) 중에서도 문학사에 이름을 전하고 있는 명가(名家)의 시작(詩作)이 많아 시사적(詩史的)인 무게에 있어서는 경홀(輕忽)히 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위항시인들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으며 이 뒤에도 주갑(周甲)마다 속집(續集)을 간행하는 의지를 보여 정조(正祖) 21년 정사(丁巳, 1797)풍요속선(風謠續選)(73)이 간행되었으며, 그 이주갑(二周甲)이 되는 철종(哲宗) 8년 정사(丁巳, 1857)에는 풍요삼선(風謠三選)이 나왔다.

 

 

소대풍요(昭代風謠)162()의 시편(詩篇)을 시체(詩體)에 따라 선집(選集)하여 영조(英祖) 13년 정사(丁巳, 1737)에 간행되었으며, 원집(原集) 9()과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합쳐 2()으로 편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뒷날 풍요삼선(風謠三選)을 편찬할 때(哲宗 8, 1857) 소대풍요(昭代風謠)가 산망(散亡)될 것을 우려하여 그 이듬해(戊午)에 운각자(芸閣字)로 다시 인출(印出)한 중인본(重印本)이 널리 유행(流行)하고 있다. 편자는 고시언(高時彦, 1671~1734)으로 알려져 왔으나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가 제시된 일은 없다. 오광운(吳光運, 1698~1745)의 서문과 발문에 따르면 채팽윤(蔡彭胤)이 부집(裒集)한 것을 이달봉(李達峰)이 산정(刪正)하고 오광운(吳光運) 자신이 보산(補刪)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120년 뒤에 간행된 풍요삼선(風謠三選)의 발문(跋文)에는 고시언(高時彦)을 편자로 단정(斷定)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고시언(高時彦)의 제사(題辭)소대풍요(昭代風謠)권수(卷首)에 있는 것으로 보아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편자로 알려진 이 두 사람은 모두 책이 간행되기 전에 죽었다. 이 사실은 고시언(高時彦)의 작품(作品)이 이미 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으며 오광운(吳光運)의 발문(跋文)그 일을 주관하던 사람이 또한 모은 후에 죽었다[主其役者又裒後死].’라는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이러한 일련(一聯)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이 책은 그 선집(選輯)에서부터 간행에 이르는 동안 오랜 기간이 소요되어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의 공동참여로 이루어지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집(正集) 9() 외에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추보(追補)하여 정집(正集)과 함께 간행한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단적인 증좌(證左)가 될 것이며 권수(卷首)에 제사(題辭)를 붙인 고시언(高時彦)의 작품(作品)이 별집(別集)에 수록되고 있는 현상은 이 책의 간행 경위를 사실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소대풍요(昭代風謠)를 선집(選輯)한 것은 채팽윤(蔡彭胤)이며 고시언(高時彦)이 간행에 참여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오광운(吳光運)의 협조로 마무리를 한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시인(詩人)들은 중서인(中庶人)을 비롯하여 상인(商人)ㆍ천예(賤隸) 출신(出身)까지도 망라되고 있지만, 그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의역중인(醫譯中人)과 서리(胥吏)이며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의역중인(醫譯中人)하대부와 같은 등급의 사람[下大夫一等之人]’으로 지칭(指稱)될 정도로 그 역할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이 서울의 중인층으로서 그들이 담당하는 업무의 성격상 도시적인 지식인으로 또는 문인(文人)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사대부의 지우(知遇)를 입어 이들과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國制)의 금고(禁錮)로 환로(宦路)의 진출이 제한되어 있던 이들은 양반 사대부의 유액(誘掖)과 추만(推輓)에 힘입지 않고서는 그들의 성취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의 간행에 있어서도 사대부의 협조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는 고시언(高時彦) 자신이 비장(悲壯)하게 칠언으로 읊고 있다.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與東文選相表裏 동문선(東文選)과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니
一代風雅彬可賞 일대(一代)의 풍아(風雅) 빛나서 볼 만하도다.
貴賤分岐是人爲 귀천(貴賤)을 나눈 것은 인간이 한 짓이지만
天假善鳴同一響 하늘이 준 좋은 노래는 같은 소리로다. (昭代風謠)卷首, 題辭

 

이 책의 성격은 동문선(東文選)과 더불어 표리가 되는 관계에 있음을 천명하고 있으며, 인위적인 신분에는 귀천(貴賤)의 차이가 있지만 하늘이 준 노래는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위항시인은 문학 양식에 있어서도 그들 나름의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사대부층의 시문(詩文)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시편(詩篇)의 대부분이 금체시(今體詩)로 채워져 있는 것도 시대의 풍상(風尙)을 그대로 추수(追隨)한 것이며 그들의 능력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율(排律)과 같은 장편(長篇)유희경(劉希慶)최기남(崔奇男)홍세태(洪世泰) 등 명가(名家)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며, 고체(古體)에 있어서도 전기(前記) 육가잡영(六家雜詠)의 여섯 사람 시()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 의식에 있어서도 현실 문제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대개 회고적(懷古的)인 감상(感傷)으로 흐르고 있어 스스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풍요속선(風謠續選)은 제명(題名) 그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속편(續篇)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 만에 송석원(松石園)천수경(千壽慶)장혼(張混)이 중심이 되어 소대풍요(昭代風謠)이후의 위항시인 가운데서 333()723수를 선집(選輯)하여 그 주갑(周甲)이 되는 정조(正祖) 21년 정사(丁巳, 1797)에 운각자(芸閣字)로 인행(印行)7() 3책본(冊本)이다. 그러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에서와 같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詩人)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대풍요(昭代風謠)기아(箕雅)의 예에 따라 시체별(詩體別) 편제(編第)를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풍요속선(風謠續選)은 고체(古體)ㆍ금체(今體)ㆍ오언(五言)ㆍ칠언(七言)을 가리지 아니하고 각인(各人)의 성씨 아래 작품들을 열록(列錄)하여 고람(考覽)에 편하도록 하였다. 범례(凡例)에서도 이같은 취지를 밝히고 있으나 대부분 금체시(今體詩)로 채워져 있는 이 책에서는 시체별(詩體別)로 편차를 하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수(卷首, 卷之一) 소재(所載) 32()의 시편(詩篇)소대풍요(昭代風謠)의 권말(卷末)에 수록(收錄)된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다시 일권(一卷)으로 합집(合輯)한 것으로서, 그 체단(體段)을 갖추고 미진한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재록(再錄)한 것이다.

 

이덕함(李德涵)의 발문에 따르면,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뒤에도 많은 시인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 그 주갑(周甲)이 된 지금에 있어서는 그들의 이름조차 일실(逸失)한 시인들이 태반이나 되었으므로 송석원(松石園)이 중심이 되어 다시 시()를 수집, 예원(藝苑)의 명감(明鑑)에 취정(就正)하여 기험(奇險)한 것은 버리고 평정(平正)한 것은 취하여 정선(精選)ㆍ집약(集約)하게 되었다 하고, 또 그 목적은 매몰된 것에 대한 발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세지사(當世之士)로 하여금 더욱 면려(勉勵)토록 하여 후일을 기다리는 데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위항시인들이 그들의 시집(詩集)을 간행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단순한 시집(詩集)의 간행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군자(君子)명자외물(名者外物)”이라 하여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불우한 처지에서 금세(今世)를 살아야만 하는 위항시인들에게 그것은 가장 소중하고 절실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지는 위항시집(委巷詩集)의 선구가 된 해동유주(海東遺珠)소대풍요(昭代風謠)의 간행에 추진력이 되었으며 마침내 18세기 말에서부터 본격적인 유파적(流派的) 활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사(詩社)의 결성에 활력소가 되었다. 풍요속선(風謠續選)의 간행에 구심체가 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일명(一名) 옥계시사(玉溪詩社)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원래 시사(詩社)의 결성은 사대부들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위항시인이 중심이 된 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에 이르러 시사적(詩社的)인 문학활동은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분위기와 성격은 존재집(存齋集)의 다음 글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 송석선생(松石先生)이 옥계(玉溪) 위에 살면서 문사(文史)로써 스스로 즐기니 뜻을 같이 하는 이웃 선비들이 날로 서로 송석간(松石間)에 왕래(往來)하였다. 모이면 반드시 시()가 있는지라 이 시들이 모여 책을 이루었다. 이것이 시사(詩史)를 만들게 된 까닭이다.

嗚呼! 松石先生居玉溪上 以文史自娛 鄕隣同志之士 日相與往來於長松老石之間 會必有詩 詩之成卷 此詩史之所以作也. -朴允默, 存齋集23, 玉溪詩史序

 

 

이 시사(詩社)의 중심인물은 대부분이 풍요삼선(風謠三選)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일부가 풍요속선(風謠續選)의 후반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이 책의 편자인 장혼(張混)은 일생을 규장각서리(奎章閣胥吏)ㆍ외각교서(外閣校書)의 이원(吏員)으로 있었지만, 사부서(四部書)를 박람(博覽)하고 시()에 뛰어나 그의 수교(讐校)를 거쳐 발간된 편서(編書)만도 여러 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김매순(金邁淳)이서구(李書九)홍석주(洪奭周) 등 당대(當代)의 명문대가(名門大家)들과도 사귀어 왕복서(往復書)로써 문학적인 교유(交遊)도 가졌다. 특히 그의 시는 부섬아순(富瞻雅順)하여 이서구(李書九)고체심득 한위여향(古體深得, 漢魏餘響).’이라고 하였으며구자균(具滋均), 근대적 문인(近代的 文人) 장혼(張混)에 대하여, 국문학논총(國文學論叢), p.35에서 인용 홍석주(洪奭周)는 그에게 답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의 문()은 시()가 가장 뛰어났으며 시()는 고체(古體)에 더욱 뛰어났소이다. 사언(四言)은 위진(魏晉)에서 그림자를 따오고 오언(五言)은 왕유(王維)와 위응물(韋應物)에서 다듬었으므로……또한 그대의 시()가 오늘날의 시()가 아님을 알겠도다.

足下之文, 最長於詩, 詩尤長于古體. 四言隱約魏晉, 五言灑削王韋亦知足下之詩, 非今世詩也. -洪奭周, 淵泉集書卷, 答張生混書

 

 

그 근원이 깊고 먼 데서 온 것임을 칭도(稱道)하고 있다. 금체(今體)가 행세(行世)하던 당시의 소단(騷壇)에서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능력을 과시한 그의 시업(詩業)은 사대부의 그것에 비하여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풍요삼선(風謠三選)은 속선(續選)의 속집(續集)이다. 직하사(稷下社)의 시동우(詩同友)유재건(劉在建)ㆍ최경흠(崔景欽) 등이 풍요속선(風謠續選)이후의 위항시인 305()의 시()를 선집(選集)하여 철종(哲宗) 8년 정사(丁巳, 1857)에 인행(印行)7() 3책본(冊本)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만에 풍요속선(風謠續選)이 간행되었고 다시 60년이 되는 해에 풍요삼선(風謠三選)이 나왔다.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준비기간(準備期間)까지 합치면 120년이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도 위항시인들은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 삼선(三選)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위항시인들의 시편(詩篇)이 대체로 수습되었으며 사실상 이것이 독자적인 위항시인의 시집(詩集)으로는 마지막 간행이 되었다. 내용에 있어서도 속선(續選)을 편집한 천수경(千壽慶)장혼(張混)을 비롯하여 김낙서(金洛瑞)ㆍ왕태(王太)박윤묵(朴允默) 등 송석원(松石園)의 중심 구성원들이 이채(異彩)를 띠고 있으며 조수삼(趙秀三)정지윤(鄭芝潤)과 같은 일시(一時)의 명류(名流)들이 끼어 있어 이 책의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편제(編制)는 속선(續選)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실명씨(失名氏) 4, 석자(釋子) 13, 여자(女子) 4인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 위항시집(委巷詩集)으로서는 이례적이다. 이 책의 발간 경위에 대해서는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최경흠전기(崔景欽傳記)에 상술(詳述)되어 있다.

 

 

또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이를 함께 하려 하고 마침내 시사(詩社)를 결성(結城)하였는데, 나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매양 꽃 피는 아침, 달 뜨는 저녁이면 한데 모여 시()를 읊조리곤 하였는데 계축년(癸丑年) 봄에 이르러 난정계사(蘭亭稧事)를 모방하여 직하사(稷下社)에 모이어 각각 시()를 짓고 마시고 즐길 때 치명(穉明)이 풍요(風謠)를 계속 편찬할 것을 발의(發議)하였으므로 모두들 찬성하였다. 곧 여러 곳에 두루 알려 작품(作品)을 수집하고 문장대가(文章大家)에게 나아가 질정(質正)을 받았다. 정사년(丁巳年) 겨울에 이르러 편집이 거의 완료되어 이름을 풍요삼선(風謠三選)이라 하고 마침내 성금(誠金)을 모아 300여질(餘帙)을 인행(印行)하였다. 서문(序文)은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대감에게 받았으며

又善於詩文, 欲與同志共之遂結社, 余亦參焉. 每於花朝月夕會而吟詠, 及癸丑春, 倣蘭亭稧事, 會于稷下社, 各賦詩飮而樂之, 穉明乃發風謠續編之議. 僉曰可 卽爲通諭于諸處 收輯諸作就正于文章大家 至丁巳冬編幾完 名曰風謠三選 遂鳩財刊印三百餘本 受序文于經山鄭相國- 劉在建, 里鄕見聞錄7, 崔景欽傳.

 

 

이 전기(傳記)는 삼선(三選)의 편자인 유재건(劉在建)이 직접 쓴 것이므로, 풍요삼선(風謠三選)의 간행이 직하사(稷下社)의 결의에 의하여 수행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직하사(稷下社) 성립경위와 분위기에 대해서도 함께 알게 해준다.

 

직하사(稷下社)의 중심인물로는 최경흠(崔景欽)유재건(劉在建)ㆍ조희룡(趙熙龍)ㆍ이경민(李慶民) 등을 들 수 있다. 그 활동은 송석원(松石園)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였지마는, 그 중심 구성원들이 저작한 호산외사(壺山外史)(趙熙龍), 희조질사(熙朝軼事)(李慶民),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劉在建) 등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전기(傳記) 자료로서 값진 것이 되고 있다.

 

삼선(三選) 이후 다시 60년이 되는 1917년에 기당(幾堂) 한만용(韓晩容)이 풍요사선(風謠四選)의 편찬 문제를 최남선(崔南善)에게 의논한 일이 있었으나,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제도적으로 계급이 타파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중지되었으며구자균(具滋均), 조선평민문학사(朝鮮平民文學史), p.111, 장지연(張志淵)ㆍ이기(李琦)ㆍ장홍(張鴻) 등과도 편집을 기획한 바 있으나 역시 당시 실정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장지연(張志淵) 등이 이 해에 편집한 대동시선(大東詩選)후반에 삼선(三選) 이후의 위항시(委巷詩)가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표면상으로는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의 계급 타파를 운위(云謂)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도 구한말의 격동과 일본의 한국 강점 등을 거치는 동안 중인층의 사회적 진출이 현저해져서 사실상 계층 이동이 실현된 상태였으므로 구차하게 그 신분을 적출(摘出)하면서까지 위항시집(委巷詩集)의 속집(續輯)을 기도하는 것은 시의(時宜)를 잃은 일이다.

 

 

 

 

 5)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

 

대동시선(大東詩選)은 한시(漢詩)의 선발책자(選拔冊子)로서는 총결산에 해당한다. 표제(標題)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조선(古朝鮮)에서부터 구한말(舊韓末)에 이르기까지 역대 2,000 여가(餘家)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選輯)하여 12()으로 출판한 것이다. 구한말의 학자요 언론인이기도 한 장지연(張志淵)이 편집하여 1918년 신문관(新文館)에서 신활자(新活字)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장지연(張志淵)의 연보와 장홍식(張鴻植)의 발문에 따르면, 이 책의 원편(原編)1917년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권수(卷首)의 범례(凡例)에서는, 서둘러 이를 편집, 간포(刊布)하기 때문에 유루(遺漏)된 것에 대해서는 보유(補遺)의 간행을 기다린다고 하였으나 이 책에 이미 보유(補遺)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편(原編)이 편집된 후 출판에 붙이는 사이에 증보의 작업이 있은 듯하다.

 

이 책의 범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동문선(東文選)청구풍아(靑丘風雅)기아(箕雅)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대동명시선(大東名詩選)등 역대의 시선집(詩選集)을 토대로 하여 증선(增選)ㆍ속보(續補)하였기 때문에 이를 대동시선(大東詩選)이라 한다고 하였거니와, 이 책은 편자 개인이 사사로이 시선집(詩選集)을 간행하는 단순한 선시(選詩) 작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지나간 전통시대의 문화유산을 정리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한시(漢詩)의 전통이 사실상 전시대(前時代)의 것이 되어버린 현실이기 때문에, 장지연(張志淵)과 같이 시업(詩業)을 전주(專主)로 하지 않는 사가(史家)에 의하여 이 책이 편집, 출판된 것도 주목할 일이다.

 

이 책의 체제(體制), 전당시(全唐詩)의 예에 따라 고근체(古近體), 오칠언(五七言)을 막론하고 각인(各人)의 성명(姓名) 아래 작품(作品)을 열록(列錄)하여 고람(考覽)에 편하도록 하고 있으며 특히 새 시대의 평등원칙에 따라 기아(箕雅)에서와 같이 불성씨(不姓氏), 잡류(雜流) 등을 권말(卷末)에 부록하는 방식을 취하지 아니하고 이들을 모두 시대순으로 원편(原編)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이 시선(詩選)에서는 우리나라 시() 가운데서 중국의 격률(格律)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우리의 시()가 있고 중국에는 중국의 시()가 있다 하여 공후인(箜篌引)이나 황조가(黃鳥歌)와 같은 고대가요를 권수(卷首)에 선입(選入)함으로써 이 책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왕(帝王)의 시()는 수록하지 않는다는 전래의 원칙을 깨뜨리고 유리왕(琉璃王)진덕여왕(眞德女王)을 특례(特例)로 인정, 수록하였으며, 시대의 구분에 있어서도 작품의 제작연대를 고려하여 고조선ㆍ고구려ㆍ신라ㆍ고려ㆍ조선의 순서로 차례를 마련하고 있다. 전당시(全唐詩)등 중국문헌에 실린 우리나라 상대(上代)의 시편(詩篇)들도 앞머리에 채록하여 초기의 한시(漢詩) 자료를 그만큼 보태주고 있다. 왕거인(王巨仁)ㆍ설요(薛瑤)김지장(金地藏)정법사(定法師) 등의 작품을 보여 준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기아(箕雅)이전의 전통적인 시선집(詩選集)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며, 이는 곧 편자의 해박(該博)한 역사지식과 투철한 민족의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1917년은 풍요삼선(風謠三選)이 간행된 지 60년이 되는 해이므로 이때 기당(幾堂) 한만용(韓晩容) 등이 풍요사선(風謠四選)의 간행을 의론해 왔으나 편자는 이에 응하지 않고 풍요삼선(風謠三選)이후의 위항시인을 이 대동시선(大東詩選)의 후반에 선입(選入), 처리함으로써, 풍요사선(風謠四選)의 편찬임무도 함께 수행한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도 그의 자각적인 시대 정신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이름도 처음에는 대동풍아(大東風雅)라 하였다가 풍아(風雅)’ 두 자가 거리끼어 시선(詩選)’으로 바꾸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또한 그 정신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대동시선(大東詩選)은 또 작자 미상의 필사본 동명이서(同名異書)가 있다. 그 편집 체제는 대체로 기아(箕雅)와 같으나 편찬 연대는 조선 영조(英祖代)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권수(卷首)맥수가(麥秀歌)황조가(黃鳥歌)를 수록하고 있는 것이 이례적이라 할 수 있으나, 기자(箕子)맥수가(麥秀歌)를 싣고 있는 의도는 장지연(張志淵)의 의식과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한시(漢詩)를 생산한 당시의 시인과 비평가들이 직접 선발(選拔)에 참여하여 이룩한 역대 중요 시선집(詩選集)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들이 지니는 문학사적인 의미를 검토해 보았다. 조선초기의 청구풍아(靑丘風雅)를 비롯하여 조선중기의 국조시산(國朝詩刪), 조선후기의 기아(箕雅)및 위항시인의 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그리고 우리나라 한시(漢詩)를 사실상 총결산한 대동시선(大東詩選)을 통하여 이것들이 가지는 시대사적 의미와, 우리 문학사의 기술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본 것이다.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송시학(宋詩學)이 극복되고 있어, 호방(豪放)ㆍ신경(新警)한 것은 뽑아주지 않았으며,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준척(準尺)으로 한 성수시화(惺叟詩話)는 모처럼 한시(漢詩)의 음악성에까지 관심을 보여 본격파(本格派) 비평가로서의 권능(權能)을 과시하였다. 기아(箕雅)는 각 시대의 소상(所尙)을 사실대로 인정했기 때문에 무난한 자료집으로서 진신간(搢紳間)에 널리 읽혀진 선발책자(選拔冊子)가 되었다. 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은 작품으로서의 수준은 높은 것이 못되지만, 조선후기 위항시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료적인 가치는 값진 것이다. 대동시선(大東詩選)은 우리나라 한시선집(漢詩選集)의 결산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이 책에서 읽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다.

 

 

 

 

 3. 작품의 평가 문제

 

 

1) 고려의 시화집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경우, 비평은 한문학의 전유물이며 그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이다. 오늘날의 문학은 소설이 판을 치는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문학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구어(口語)로 된 소설의 것이 아니라 문어(文語)로 된 문장(文章)의 역사다. 다시 말하면 시()나 문()의 역사이며 실질적으로는 시()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전문학 비평의 현실은, 문학일반에 관한 이론이나 본격적인 시론(詩論)과 같은 것은 흔하지 아니하며, 대부분이 소박한 실제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옛사람들이 즐겨 쓰던 방식 그대로 개연적(蓋然的)인 평어(評語) 수준에서 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전비평 자체의 전통적인 체질 때문에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도 대체로 사실 확인에서 그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비평의 노력은, 고전비평 자체의 역사적 체계화나 내적 질서의 파악에 기여하지 못한 취약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다른 방면에서 한문학의 개별작품 연구에 중요한 준척(準尺)으로서 구실할 수 있다. 더욱이 단순한 예술적 환상이나 시적 충동만으로는 한시(漢詩)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 사실상 어렵게 된 것이 현실이고 보면, 이것이 오늘의 한시연구에 가져다줄 수 있는 자료사적 의미는 분명히 막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문학을 생산한 당시의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실천한 비평의 현장을 검토하고 확인하기 위하여 먼저 역대 비평서의 실상을 파악하고 각종 시문집(詩文集)에 산재(散在)해 있는 비평관계 자료들을 탐색하여야 하며 이것들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도 함께 소구(溯究)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성실하게 수행되었을 때 고전비평 스스로의 연구는 물론 전시대(前時代)의 우리 시인(詩人)들이 추구하던 한시(漢詩)의 진실까지도 있었던 그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정제(整齊)된 모습을 갖추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국 시대 중엽의 일이며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시인들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말의 견당유학생(遣唐遊學生)들에서 볼 수 있다.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ㆍ최광유(崔匡裕)ㆍ박인범(朴仁範)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고려초에 들어 와서도 문학의 속상(俗尙)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과거제가 실시되면서부터 사장(詞章)에 더욱 열을 올리어 귀족적인 고려시대 문학의 성격이 형성된다. 박인량(朴寅亮)ㆍ김인존(金仁存)고조기(高兆基)정습명(鄭襲明)정지상(鄭知常) 등 창시자(倡始者)들이 보여준 문학세계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시화류(詩話類)의 문학양식이 송대(宋代)에 와서 크게 일어났거니와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이때까지는 중국의 한시(漢詩)를 배우고 익히는 초기 체험 단계다. ()에 대한 논설이나 기사(記事)ㆍ법칙 등을 기술하는 노력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시인들에 대한 고실(故實)을 기록하는 기도도 소단(騷壇)의 기반이 성숙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한 최초의 성과다. 그는 당시 소단(騷壇)의 거점이기도 한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맹주(盟主)답게 자작시(自作詩)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원 상호간에 수응(酬應)한 시화(詩話)ㆍ문담(文談)ㆍ기사(記事) 등 사단(詞壇)의 소요담(逍遙談)을 보고하고 있으며, 명유(名儒)ㆍ운석(韻釋)의 제영(題詠)이 인멸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여 제가(諸家)의 글 가운데서 명장(名章)ㆍ수구(秀句)를 채록하고 있다. 이밖에도 계림(鷄林)의 옛 풍속을 기술하고 평양(平壤)의 산하(山河)와 인물을 담론(談論)하며, 수도 개경(開京)의 궁정(宮廷)ㆍ사관(寺觀) 등 풍물을 기록하는 데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나라 비평사에서 중요하게 값하고 있는 것은 이인로(李仁老) 자신의 체험적인 시작법(詩作法)을 열성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점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하여 세심하게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문장(文章)은 천성(天性)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하면서도 후천적인 용공(用功)을 특히 강조하였다. 타고난 일재(逸材)가 있더라도 마음을 태우는 연탁(鍊琢)의 노력이 있어야만 천고(千古)에 그 이름을 드리울 수 있다고 한 것이 그의 지론이다. 환골탈태(換骨奪胎)로써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스스로 시인하고 신의(新意)를 창출(創出)하는 것이 시작(詩作)의 상승(上乘)임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동파(東坡)나 산곡(山谷)과 같이 조어(造語)가 공교(工巧)하여 부착(斧鑿)의 흔적이 없는 경지를 높이 칭예(稱譽)하였다. 신의(新意)는 작시(作詩)의 이상이요, 상식이기 때문에 그는 용사(用事)와 같은 시작(詩作)의 기술을 특히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기호(氣豪)ㆍ해박(該博)동파시(東坡詩)를 시() 수업(修業)의 표준으로 삼고 있던 당시의 속상(俗尙)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인로(李仁老)의 시학(詩學)이 작시(作詩)의 상식인 신의(新意)를 논하는 수준에서 멀리 뛰어 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송시(宋詩) 가운데서도 특히 동파시(東坡詩)해박(該博)’을 배워 수준 높은 시작(詩作)을 시범하려 한 이인로(李仁老)의 노력을 읽어내어야 한다. ‘기호(氣豪)’는 원래 천성(天性)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문제삼지 않았을 뿐이다.

 

 

이규보(李奎報)백운소설(白雲小說)은 수백 년 뒤 홍만종(洪萬宗)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것은 이규보(李奎報) 자신이 찬술(撰述)한 것인지 혹은 후대인에 의하여 편집된 것인지 확증을 잡아낼 수 없으나 이규보(李奎報)의 문집(文集)에 전하는 다른 글, 예를 들면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이나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등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규보(李奎報)의 것이라 하여 잘못될 것은 없다. 또는 이미 있었던 백운소설(白雲小說)이라는 잡록(雜錄)홍만종(洪萬宗)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할 때 시화만 따로 뽑아낸 것이라 해도 이규보(李奎報)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백운소설(白雲小說)의 요체(要諦)는 의기론(意氣論)이다. ()에 대해서 2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을 나타내어야 할 것인가를 문제 삼은 것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래서 그는 시()는 의(, 意境)가 주()가 되므로 의경(意境)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경(意境)은 또한 기()를 위주(爲主)로 하기 때문에 기()의 우열에 따라 의경(意境)의 심천(深淺)이 결정될 따름이다. 그러나 있는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어서 후천적으로 배워서 얻을 수는 없다.

夫詩以意爲主, 設意最難, 綴辭次之. 意亦以氣爲主, 由氣之優劣, 乃有深淺耳. 然氣本乎天, 不可學得.

 

 

()는 의경(意境)의 표현이며 그것은 외의 심천(深淺)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수식(修飾)과 같은 것은 후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이의위주(詩以意爲主)’는 원시주의적인 시언지(詩言志)’를 다시 천명한 것이며 의역이기위주(意亦以氣爲主)’는 조비(曹丕)의 문기론(文氣論) 이후 개성주의 쪽으로 기울어진 표현론의 경향을 심화하여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그의 기론(氣論)이다. ()의 청탁(淸濁)은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한 조비(曹丕)의 생각을 그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不可學得] 표현하고 있으며 조비(曹丕)가 막연한 개념으로 써 보았던 문기(文氣)’를 그는 재기(才氣) () 개인(個人)의 개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시()는 의()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함축성 있게 표현하는 것은 외의 권능(權能)에 속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백운소설(白雲小說)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체험적인 사실을 통하여 이를 간명(簡明)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는 젊어서부터 구속받기를 싫어하여 육경(六經)과 자사(子史) 같은 글도 섭렵만 하였을 뿐 그 근원을 궁구(窮究)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옛 성현(聖賢)의 말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한 옛 시인의 체()를 모방하기 부끄러워 창졸간에 시를 읊조릴 때라도 의사가 고갈하여 써먹을 말이 없으면 반드시 새로운 말을 만든다고 하였으며 때문에 말이 생소하고 난삽한 것이 많아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옛시인들은 뜻만 창조하고 말은 창조하지 않았지만, 자기는 뜻과 말을 함께 창조하고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자만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의 천재(天才)를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신어(新語)를 만들고 신의(新意)를 창출(創出)한다고 한 것이다. 겉으로는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모방하기가 싫어서 부득이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내면으로는 스스로 자기 시의 개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합리화를 기도한 것이다. 동파(東坡)를 근대(近代)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어 올리면서도 그는 끝내 동파(東坡)를 본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동파(東坡)를 모방하면 동파(東坡)와 비슷해지거나 동파(東坡)와 꼭 같아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파시(東坡詩)일 뿐 자신의 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그가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백거이(白居易) 등이 일시(一時)에 나와 천고(千古)에 높이 이름을 남기고 있지만 이백(李白)두보(杜甫)ㆍ왕발(王勃)을 모방하지 않았으며 구양수(歐陽修)ㆍ매성유(梅聖兪)소식(蘇軾)이 일세(一世)에 이름을 빛내었지만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백거이(白居易)를 본뜨지 않고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도 시()로써 일세(一世)에 이름을 떨치고 빛내려 한 그의 의지를 읽어 낼 수 있다. 동파시(東坡詩)로 대표되는 중국시를 수용함에 있어 풍골(風骨)과 의경(意境), 사어(辭語)와 용사(用事)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그 예술적인 경계를 포괄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므로, 문언(文言)으로 중국시를 배운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사어(辭語)나 성률(聲律)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이규보(李奎報)는 일찍이 간파한 것이다. 당시의 시인과 묵객(墨客)들의 동파시(東坡詩)에 대한 일반적 관심이, 동파(東坡)의 시세계를 우리 것으로 극복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동파(東坡)를 한갓 시수업(詩修業)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규보(李奎報)의 의기론(意氣論)은 일단 시대사의 의미를 부여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인로(李仁老)의 시학(詩學)이 점수돈오(漸修頓悟)의 점진적인 단련형 취향이라면 이규보(李奎報)의 그것은 천재(天才)로써 시()를 깨친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보한집(補閑集)은 그 제명(題名)에 있어서도 파한집(破閑集)을 보()한 것이거니와 시기적으로도 소단(騷壇)의 한 시대를 통관(通觀)할 수 있는 고려중ㆍ말엽의 산물이다. 그래서 최자(崔滋)는 위로는 정지상(鄭知常)으로부터 당세(當世)의 명가(名家)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시작(詩作)에 품평(品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대해서는 일월(日月)로도 그 칭예(稱譽)를 다하지 못할 것이라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이 세상에 행()하고 있었으므로 그 시작(詩作)의 전정(全鼎)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지만 그는 보한집(補閑集)권중(卷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규보(李奎報)를 철저한 개성주의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젊어서부터 붓을 달리면 다 신의(新意)를 창출해내고 문사(文辭)를 토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달리는 기운이 더욱 씩씩하여 비록 성률(聲律)의 구속을 받는 가운데서 세밀하게 조탁(雕琢)하고 공묘(工妙)하게 얽어 나가더라도 호기(豪氣)가 넘치고 기묘(奇妙)하게 우뚝하며…… 고조장편(古調長篇)을 하는 데 있어서 강운(强韻)과 험제(險題) 가운데서도 마음대로 분방하여 한꺼번에 100장을 써 내려가도 다 고인(古人)을 답습(踏襲)하지 아니하고 우뚝히 자연스럽게 만든다.

公自妙齡, 走筆皆創出新意, 吐辭漸多, 騁氣益壯, 雖入於聲律繩墨中,

細琢巧構猶豪肆奇峭, …… 盖以古調長篇, 强韻險題中, 縱意奔放, 一掃百紙, 皆不賤襲古人, 卓然天成也.-崔滋, 補閑集卷中

 

 

여기서 그는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기교적인 요소를 완강하게 후퇴시킴으로써 최자(崔滋) 자신의 반기교적인 시관(詩觀)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시문관(詩文觀)을 개진함에 있어서도 의()는 기()에 힘입는 것이고 기()는 천성(天性)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이는 개성주의적 표현론의 전형이며 이규보(李奎報)의 시관(詩觀)을 그대로 계승하고 전개한 것이다.

 

그는 사어(辭語)나 성률(聲律)과 같은 기교론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言及)하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 그는 성병(聲病)을 배격(排擊)했다. ‘말은 다듬지 않았는데도 기상(氣象)이 호방(豪放)하고 의경(意境)이 넓은 시()는 성병(聲病)이 없기 때문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풍격비평(風格批評)에 있어서도 사어(辭語)나 성률(聲律)보다는 기골(氣骨)과 의격(意格)을 앞세우고 있다. ‘신기절묘(新奇絶妙)’, ‘일월함축(逸越含蓄)’, ‘험괴준매(險怪俊邁)’, ‘호장부귀(豪壯富貴)’, ‘웅심고아(雄深古雅)’ 등 기골의격(氣骨意格)의 표현인 이것들을 모두 상품(上品)으로 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로써 보면, 최자(崔滋)이규보(李奎報)가 그토록 요란하게 주장한 것은,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시()로서 성취할 수 있는 기본 방향을 제시해 준 것임에 틀림 없다. 성률(聲律)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의 추구보다는 기호의활(氣豪意豁)한 내면세계의 사출(寫出)을 현실 문제로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말에 이르러, 이제현(李齊賢)역옹패설(櫟翁稗說)에도 시평의 단편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삼천년래(三千年來)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앙받은 대수(大手)로서도 특정한 시인을 포폄(褒貶)하는 일은 함부로 하지 않았다. 시풍(詩風)을 같이하는 일군의 시인들을 한데 묶어 그 장처(長處)를 추숭(推崇)하는 겸양을 보이고 있다.

 

시작법(詩作法)의 상식인 용사(用事)신의(新意) 따위를 논의하는 것도 그에게 무의미한 것은 물론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점화(點化)의 묘를 논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곳이기도 하지만, 이는 만상(萬象)을 구비한 이제현(李齊賢)의 시세계가 그렇게 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가 바로 우리나라 한시(漢詩)의 전통이 정착의 단계에서 안정을 추구하던 시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정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 조선의 시화집

 

조선왕조의 성립으로 문학관념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며 형식적으로는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이 그 길을 달리하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단기습(文壇氣習)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排出)도 볼 수 없다. 개국초원(開國初元)이었으므로 문()은 대부분 조명(詔命)과 장주(章奏)였고 시()는 가영(歌詠)과 송도(頌禱)의 사()가 많았다.

 

그러나 국초(國初)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전대(前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시문(詩文) 선발책자(選拔冊子)가 이루어졌으며 그 편찬의 주역을 담당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편찬된다. 전대(前代)의 축적이 시평서(詩評書)의 출현을 가능케 하리만큼 성숙된 시기의 것이다.

 

동문선(東文選)의 성격이 유적(類的)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사찬(私撰)으로 이루어진 동인시화(東人詩話)도 나말에서 선초에 이르는 시인(詩人) 각론(各論)으로 채워져 있다. 이때에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기는 하였지만, 그가 행한 비평의 양상은 대체로 풍골(風骨)과 사어(辭語), 용사(用事)점화(點化)의 기술(技術)에 이르기까지 예술적인 경계를 두루 포괄하고 있다. 찬자(撰者)의 시각도 첨예하게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史實) 확인에도 중요하게 값할 수 있다. 이때에는 아직 도학(道學)의 보급이 일반화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서거정(徐居正) 자신이 효용적인 관도관(貫道觀)을 표방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흔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이 특기(特記)할 일이다.

 

조선왕조는 태조(太祖)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므로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으며 많은 문사(文士)들이 배출되었다. 성현(成俔)은 그 태평한 시대에 용재총화(傭齋叢話)를 썼다. 그의 쉽고도 아름다운 문장(文章)으로 진기(珍奇)한 풍물도(風物圖)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역대의 문장(文章)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의 필하(筆下)에 완전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삼엄(森嚴)했다. 사자(四字)로 된 평어(評語)를 사용하여 포()와 폄()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높은 조감(藻鑑)은 후대(後代)신흠(申欽)허균(許筠)과 더불어 조선시대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성현(成俔) 이후의 비평 양상도, ()의 본질이나 시작법(詩作法)의 기술과 같은 것은 감쇄되고 있으며 실제비평이 대부분이다. ‘시자음영성정(詩者吟詠性情)’이나 시발어성정(詩發於性情)’과 같은 것이 시문집(詩文集)의 서문에서 자주 애용되고 있었으나 이것은 재도적(載道的)인 시관(詩觀)이 제조한 상투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비평의 양상이 이와 같이 흐르게 된 사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경술(經術)이 곧 문장(文章)’으로 생각하는 효용론적인 문학관[經術文章一道觀]이 지배하던 시대에 있어서 시문(詩文)의 본질이나 기능 따위를 논하는 것은 스스로 도학(道學)과의 상호충돌을 가져올 뿐이며 둘째, 한시(漢詩)를 이미 우리 것으로 수용한 이후의 문학비평에서 개별작품이 비평의 대상으로 중요시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역시 문장가의 것이며 사장학(詞章學)의 부침(浮沈)과 기복(起伏)을 같이 한다. 서거정(徐居正)성현(成俔) 이후에도 조선중기에 이르러 이수광(李睟光)신흠(申欽)허균(許筠) 등이 나타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리면서 시학(詩學)도 시대의 산물임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조선후기에도 한 차례 호황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峰類說)은 백과사전식으로 된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이지만 그 문장부(文章部)에서 행한 실제비평의 노력은 단순한 기문일사(奇聞逸事)의 채록 수준에서 뛰어넘어 일자일운(一字一韻)의 형식적인 기교에 이르기까지 높은 안목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성운(聲韻)에 대한 그의 관심은 허균(許筠)성수시화(惺叟詩話)와 더불어 우리나라 비평사에서 가장 값진 것으로 꼽혀야 한다.

 

신흠(申欽)청창연담(晴窓軟談)도 기본 성격은 잡록(雜錄)이며 내용 또한 소략하다. 그러나 조선전기 사단(詞壇)의 흐름을 요약해 준 그의 명감(明鑑)은 오히려 상쾌조차 느끼게 한다.

 

허균(許筠)은 그의 위인(爲人)보다도 높은 조감(藻鑑) 때문에 후세까지도 그 이름을 온전하게 할 수 있었다. 성수시화(惺叟詩話)는 한시(漢詩) 약사(略史)도 함께 읽게 해주는 시평서(詩評書).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의 설부(說部)에 있는 다른 글과 더불어 조선중기 시학(詩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논시(論詩)의 표준으로 삼고 있지만 당시의 풍상(風尙)이 섬교(纖巧)만당(晩唐)에 치우치고 있었으므로 조식(藻飾)을 논한 부분도 수준급이다. 그의 학산초담(鶴山樵談)은 당시 소단(騷壇)의 풍속도(風俗圖)로서 중요하게 값하는 것이며, 시선집(詩選集) 국조시산(國朝詩刪)은 형식적으로는 선발(選拔) 책자(冊子)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비주란(批注欄)에서 기도(企圖)한 성운(聲韻)의 검색 작업은 역대의 시선집(詩選集)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허균(許筠)의 예술감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목릉성세(穆陵盛世)는 조선전기의 안정이 이룩한 당연한 결과이거니와, 임병양란(壬丙兩亂)을 치르고 난 소단(騷壇)의 황량은 이후 70여년 동안 적막 그대로다. 외세의 압박으로부터 화평을 되찾은 조선후기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러 문풍(文風)이 다시 일어나고 비평의 문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김득신(金得臣)종남총지(終南叢志)를 비롯하여 홍만종(洪萬宗)소화시평(小華詩評)시평보유(詩評補遺), 남용익(南龍翼)호곡시화(壺谷詩話), 김만중(金萬重)서포만필(西浦漫筆)김창협(金昌協)농암잡지(農巖雜識)등이 모두 이때의 것이다. 그러나 홍만종(洪萬宗)이 역대의 시화(詩話)를 집대성하여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집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의 대부분은 기왕의 중요 비평서(批評書)에서 시도한 작품론을 재확인하거나 저명한 시인들의 시작(詩作)에 얽힌 주변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고 있을 뿐 독자적인 비평을 행한 것은 극히 제한되고 있다. 당대의 소단(騷壇)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이 별로 없다. 홍만종(洪萬宗)이 직접 저술한 소화시평(小華詩評)이나 시평보유(詩評補遺)도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을 보지 못한 당시의 사단(詞壇)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다만 김창협(金昌協)이 그의 농암잡지(農巖雜識)에서 월상계택(月象谿澤) 사대가(四大家)의 문장(文章)을 논핵(論覈)하여 산문비평(散文批評)으로서는 가장 전실(典實)한 것이 되고 있으며, ()를 논하는 곳에서도 호방(豪放)ㆍ기험(奇險)한 것을 버리고 노건(老健)ㆍ청신(淸新)한 것만 취택(取擇)하고 있어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 양미(兩美)김창협(金昌協)의 면목을 여기서도 읽게 해준다.

 

 

그러나 태평성세를 구가하던 숙종대(肅宗代)의 번영은 정치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黨論)의 가열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은 빛을 잃고 소단(騷壇)은 다시 산림(山林) 속으로 자복(雌伏)하여 명맥만 유지해 왔다. 때문에 시문(詩文)에 대한 논설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한문학의 전통이 사실상 끝장날 무렵에 김택영(金澤榮)소호당집(韶護堂集)8이란 잡언(雜言)을 남겨준 것이 고전비평의 마지막 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본적으로는 잡록(雜錄)이며, 문학을 논한 부분에 있어서도 문론(文論)이 시론(詩論)보다 양적으로 우세하다. 뒤늦게 나온 조긍섭(曹兢燮)김택영(金澤榮)과 주고 받은 암서집(巖西集)에서 나온 여김창강(與金滄江)란 왕복서(往復書)도 도학자(道學者)의 문장론(文章論)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김택영(金澤榮)과 조긍섭(曹兢燮)이 주고 받은 왕복서(往復書)의 내용은 문인과 학자 사이에 상존(尙存)하는 문장론(文章論)의 거리를 재확인케 하는 자료로서도 일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박지원(朴趾源)의 문장(文章)을 그토록 높은 수준에까지 끌어 올린 것은 김택영(金澤榮)이지만, 학문으로 발신(發身)한 조긍섭(曹兢燮)의 체질은 박지원(朴趾源)의 문장(文章)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열하일기(熱河日記)와 같은 박지원(朴趾源)의 발랄한 문장(文章)이 조긍섭(曹兢燮)의 삼엄(森嚴)한 안광(眼光)에는 김성탄(金聖嘆)수호지(水湖志)와 같은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다만, 신운(神韻)을 좋아한 김택영(金澤榮)의 취향이나, ()의 공졸(工拙)을 성조(聲調)로써 판가름하려 한 김택영(金澤榮)의 시학(詩學)을 알게 해주는 것은 이 잡언(雜言)이 한 일임에 틀림없다.

 

김윤식(金允植)이 편지글 형식으로 보여준 운양속집(雲養續集)답인논청구문장원류(答人論靑丘文章源流)김택영(金澤榮)의 잡언(雜言)과 더불어 문장(文章)의 소유래(所由來)를 가르쳐 준 글로서는 값진 것이다. 그러나 김윤식(金允植)의 장처(長處)가 문장(文章)에 있었기 때문에 시()를 논한 문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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