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궁한 사람의 시가 좋은 이유②
이색이 헤매며 알게 된 것
고려 말 이색(李穡)은 「유감(有感)」이란 작품에서 또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非詩能窮人 窮者詩乃工 |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할 수 없고 궁한 이의 시가 좋은 법이라. |
我道異今世 苦意搜鴻濛 | 내 가는 길 지금 세상과 맞지 않으니 괴로이 광막한 벌판을 찾아 헤맨다. |
氷雪砭肌骨 歡然心自融 | 얼음 눈이 살과 뼈를 에이듯 해도 기꺼워 마음만은 평화로웠지. |
始信古人語 秀句在羈窮 | 옛 사람의 말을 이제야 믿겠네 빼어난 시구는 떠돌이 궁인(窮人)에게 있다던 그 말. |
1ㆍ2구는 앞서 본 소동파(蘇東坡)의 시구를 그대로 딴 것이다. 옛 사람이란 바로 구양수(歐陽修)를 가리킨다. 세상과 맞지 않는데서 비롯된 ‘궁(窮)’을 추스르고자 괴롭게 광막한 벌판을 헤맨다. 살과 뼈를 에이는 듯한 추위의 고통 속에서도 시를 쓰는 즐거움에 마음은 언제나 평화롭다.
궁해져야만 시가 좋아진다
이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의 논리는 조선 후기 여항문인들에 의해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가환(李家煥)은 여항문인들의 선시집인 『풍요속선서(風謠續選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에는 성정(性情)이 없는 사람이 없고, 시(詩)를 지을 수 없는 사람도 없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누구나 시를 지을 수 있다. 다만 성정(性情)이 얽매이게 되면 시(詩)는 망하고 만다. 성정(性情)을 질곡하는 것은 부귀(富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성정(性情)이 얽매이고 보면 비록 그 재주가 아무리 높고 언어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말단일 뿐이다. 어찌 다시 시가 있으리오. 이것이 고금(古今)에 시로 일컬어진 자가 궁하면서 낮은 지위에서 나온 것이 많은 까닭이다.
天下無無性情之人, 則無無詩之人. 故人皆可以爲詩. 惟性情梏而詩亡矣, 梏性情者莫甚於富貴. 性情梏則雖其才調之高, 言語之工, 末而已. 豈復有詩哉. 此所以古今稱詩, 多出於窮而在下者也.
홍세태(洪世泰)는 「설초집서(雪蕉集序)」에서 시라는 것은 소기(小技)에 불과하지만 명리(名利)를 벗어던져 마음에 누추함이 없어야만이 잘 할 수 있다고 보고, “예로부터 두루 살펴보니, 시에 능한 사람은 산림초택(山林草澤)의 아래에서 많이 나왔고, 부귀(富貴)하고 권세 있는 사람은 반드시 능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시는 진실로 작다 할 수 없고, 그 사람을 또한 알 수 있다[歷觀自古以來工詩之士, 多出於山林草澤之下, 而富貴勢利者未必有焉. 以此觀之, 詩固不可小, 而其人亦可以知之矣].”고 하여, 명리(名利)에 찌든 부귀(富貴)의 인사보다는 산림(山林)에 거처하면서 마음이 맑은 자신들의 시가 훨씬 더 좋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한말(韓末)의 김윤식(金允植)은 「경뢰연벽집서(瓊雷聯璧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예로부터 배척받아 쫓겨난, 때와 만나지 못한 인사가 대개 이름은 허물을 입는 바 되어도 문장은 더욱 이름을 낳음이 되었다. 만약 소씨(蘇氏) 형제로 하여금 일찍 허물을 버리고 이름남을 끊어 녹녹히 세상에 일컬음을 보지 못하게 했더라면 반드시 경뢰(瓊雷)에서 서로를 그리는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비록 늙어 흰 머리가 되도록 책상을 마주해 비소리를 듣는 것도 또한 좋겠지만, 이렇게 되면 뒷사람이 또한 좇아 소씨(蘇氏) 형제가 있음을 알 수가 없을 터이니, 두 가지에서 장차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噫自古斥逐不遇之士, 槪多爲名所累, 而文章尤爲名之囮也. 若使蘇氏兄弟, 早得去累絶囮, 碌碌不見稱於世, 必無瓊雷相望之苦. 雖至老白首而對床聽雨亦可也, 然則後之人, 亦無從而知有蘇氏兄弟矣, 二者將奚擇焉.
대저 부가옹(富家翁)으로 편안히 늙어 세상에 그 자취가 드러나지 않음과, 불우를 곱씹으며 뛰어난 시를 남겨 그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해짐, 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나으냐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의 주장은 구양수(歐陽修)가 처음 제기한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의 동조와 지지를 불러, 마침내 고전시학(古典詩學)에서 중요한 명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궁하지도 않으면서 궁한 체 하는 ‘거짓 궁(窮)’의 기이한 현상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명나라 때 사진(謝榛)은 『사명시화(四溟詩話)』에서 “요즘 두보(杜甫)의 시를 배우는 자는 부유하게 살면서도 궁한 근심을 말하고, 태평한 시절을 만나고도 전쟁을 말하며, 늙지 않았으면서도 늙었다 하고, 병이 없으면서도 병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흉내냄의 매우 심함이니 성정(性情)의 참됨이 아니다.”라고 하여 시인들의 유난스런 무드잡기를 꼬집고 있다.
인용
10. 탄탈로스의 갈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