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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달李達: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중기 문인.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1. 이첨의 후손이고 박순의 문하에서 수학. 삼당시인의 한 사람. 2. 모친이 홍기의 관기여서 서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냄. 3.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자신이 이달의 제자라 함. 4.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선 “최경창의 시는 사납고 굳세며 백광훈의 시는 고담하다. 모두 당풍의 노선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또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달은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崔詩悍勁, 白詩枯淡, 俱不失李唐跬逕, 誠亦千年希調也. 李益之較大. 故苞崔孕白而自..
최경창崔慶昌: 1539(중종 34)~1583(선조 16) 본관은 해주(海州). 중기 시인.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 1. 일찍이 박순(朴淳)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뒤에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도 수학함. 2.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ㆍ종성부사의 관직을 역임함. 3. 백광훈과 이달과 함께 ‘최백이(崔ㆍ白ㆍ李)’ ‘삼당(三唐) 시인’이란 칭호로 불림. 4.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선 “최경창의 시는 사납고 굳세며 백광훈의 시는 고담하다. 모두 당풍의 노선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또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달은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崔詩悍勁, 白詩枯淡, 俱不失李唐跬逕, 誠亦千年希調也. 李益之較大. 故苞崔孕白而自成..
백광훈白光勳: 1537(중종 32)~1582(선조 15) 중기 시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본관은 해미(海美). 1. 최경창과 함께 박순(朴淳)에게 시를 배워, 16세기 후반 당시풍이 호남에 크게 떨치게 함. 2. 글씨에도 능하여 그 아들 백진남(白振南)과 함께 명성이 높음. 3. 이달(李達)과 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최백이(崔ㆍ白ㆍ李)’ ‘삼당(三唐) 시인’이란 칭호로 불림. 4.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선 “최경창의 시는 사납고 굳세며 백광훈의 시는 고담하다. 모두 당풍의 노선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또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달은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崔詩悍勁, 白詩枯淡, 俱不失李唐跬逕, 誠亦千年希調也..
정철鄭澈: 1536(중종 31)~1593(선조 26) 중기 문인ㆍ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임. 1536년 서울 장의동에서 영일 정씨 정유침(鄭惟沈)의 4남3녀 중 막내로 출생. 세자의 양제로 있던 맏누이의 귀여움을 받으며 궁중에서 놀며 자라남. 1545년 10세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가문이 다 피해를 입음. 아버지를 따라 남북의 유배지를 전전함. 1551년 16세 전라도 창평의 성산(星山) 자락에 정착함. 이곳에서 10년 동안을 생활하며 김인후, 기대승, 임억령 등에게 배움. 1561년 26세 진사시(進士試) 일등을 함. 1562년 27세 문과(文科) 장원함. 성균관 전적(典籍) 등을 역임함. 1563년 28세 가사 「성산별곡」을 지은..
이이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중기 성리학자. 덕수(德水,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 덕수리),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시호는 문성(文成) 1. 어려서 모친에게 학문을 배움. 8살에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에 올라 지은 시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음. 2. 9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림. 3. 이이는 사회체제와 신분질서를 다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되돌리되 점진적인 제도 개혁으로 질서의 안정을 도모하려 함. 4. 이이의 사상은 17세기 서인 노론(老論)계에 계승됨. 5. 『율곡집(栗谷集)』,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동호문답(東湖問答)』 풍악증소암노승 병서楓嶽贈小菴老僧 幷序정언묘선서精言妙..
성혼成渾: 1535(중종 30)~1598(선조 31)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1. 성수침(成守琛)의 아들로 가학을 계승하고 이황(李滉)을 사숙함. 2. 1551년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 응하지 않았고 20살 아래의 이이(李珥)와 벗이 되었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을 토론한 것으로 유명함. 시에서 일가를 이룸. 3.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西人)의 영수가 되어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기도 함. 4.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천에 머물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도우며 활약함. 5.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는 유성룡(柳成龍)ㆍ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고 걸해소(乞骸疏)를 올려 파주에..
황정욱黃廷彧: 1532(중종 27)~1607(선조 40) 중기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시호는 문정(文貞)임. 1. 젊은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아 대제학이 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손녀가 선조의 아들 순화군과 혼인하여 외척의 지위까지 누림. 2. 임진왜란 때 순화군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신했다가 국경인(鞠景仁)이 왜적과 내통하는 바람에 토굴에 감금되었고 항복 강요를 받았기에 거짓 항복글을 쓰고 한글로는 사정을 밝히는 글을 썼지만 한글은 사라져 길주로 유배됨. 3. 해배된 후엔 노량진 근처에 살며 좌절과 울분의 시기를 보냄. 4. 『지천집(芝川集)』 송인부수안군送人赴遂安郡솔점 기향중제수효率占 寄鄕中諸秀孝차이성동헌운次利城東軒韻증오음 / 차기윤자앙贈梧陰 / 次寄尹..
노수신盧守愼: 1515(중종 10)~1590(선조 23) 중기 학자ㆍ문신.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ㆍ이재(伊齋)ㆍ암실(暗室)ㆍ여봉노인(茹峯老人)임. 1. 이연경(李延慶)의 사위로 그에게 수학. 과거에 급제한 이래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살이를 했다. 2. 선조 즉위한 후 유배에서 풀려나와 대제학을 지내고 영의정까지 이름. 3. 주자학과 양명학에도 일가를 이루었지만, 시에 매우 뛰어나 정사룡, 황정욱과 함께 16세기 관각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평가됨. 4. 정조(正祖)의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소재 노수신은 귀양살이 한지 19년에 많이 『노자』와 『장자』의 책을 읽어 많이 갑작스럽게 깨우친 곳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음운의 원대함과..
정유길鄭惟吉: 1515(중종 10)~1588(선조 2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상덕재(尙德齋) 1. 저서로 『임당유고(林塘遺稿)』 사제극성賜祭棘城제석개시첩題石介詩帖소화시평 인용 안내도
조식曺植: 1501(연산군 7)~1572(선조 5) 중기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1. 성혼(成渾)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성리대전(性理大全)』을 25세 때 읽고 감명을 받아 성리학에 전념하게 됨. 2. 26세 때 부친상을 당한 후 고향으로 귀향했고 30세 때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함. 3. 45세 때 모친상을 당한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씀. 4. 1555년에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직함. 5. 이황과 함께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함. 6. 『남명집(南冥集)』, 『남명학기류편(南冥學記類編)』 등이 있다. 천왕봉天王峯욕천浴川무제(우세산람진)無題(雨洗山嵐盡)무제(노야린공로)..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 중기 성리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ㆍ도수(陶叟)ㆍ퇴도(退陶)ㆍ청량산인(淸凉山人). 1. 숙부 이우에게 수학하고 특별한 사승관계 없음. 2. 주자의 서간문(書簡文)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을 평생을 바쳐 편찬했으며 정주학(程朱學)을 수용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켰고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정립함. 3. 퇴계의 학문과 사상은 이후에 영남이나 근기(近畿)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됨. 4. 『퇴계집(退溪集)』(內集ㆍ別集ㆍ續集), 『자성록(自省錄)』, 『사서석의(四書釋義)』, 『삼경석의(三經釋義)』,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 『주자서절요의(朱子書節要記疑)』,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
정사룡鄭士龍: 1491(성종 22)~1570(선조 3)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1. 명문가의 후손으로, 조부 정난종은 판서를, 숙부 정광필은 영의정을 지냄. 2. 이행, 소세양과 함께 중종대와 명종대 관각을 이끎. 3. 역대 시인 중에서 율시를 가장 잘 지었던 사람으로 흥이 나는 대로 쓰지 않고 시상을 안배하고 공교롭게 하기 위해 거듭 고민하고 썼음. 소식과 황정견을 배웠기에 그의 시는 조직이 아름다움. 4.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선 “각각 명가로 떨쳤지만 치우친 지방의 기운과 습속의 얽매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유려한 데로 치닫지 않으면 간혹 조직하는 데서 잃었다. 호음 정사룡은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가파르고 기발하여 한 번 마르고 얽매인 기운을 씻어냈으니, ..
서경덕徐敬德: 1489(성종 20)~1546(명종 1)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ㆍ복재(復齋). 1.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함. 2.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림. 3. 『화담집(花潭集)』 술회 / 독서述懷 / 讀書대흥동大興洞제허백당 재해주題虛白堂 在海州산거山居 태허설太虛說 한시사 인용 안내도
김정金淨: 1486(성종 17)~1521(중종 16)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冲庵)ㆍ고봉(孤峰). 1. 1507년 장원으로 급제해 여러 벼들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됨. 2. 1514년에 중종 때 억울하게 폐위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폐위의 주모자 추최(追罪)를 상소했다가 보은에 유배됨. 3. 1516년 석방되어 여러 관직을 맡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극형에 처해졌으나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진도와 제주로 유배 갔고,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사됨. 4. 조선 초기 문단이 대부분 송시풍을 따랐지만 그는 당시풍에 흥취가 높은 작품을 제작했음. 5.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는 유명함. 증석도심贈釋道心영로방송詠路傍松영해송詠海松제총석정題叢石亭견회 경신삼월상순..
박은朴誾: 1479(성종 10)~1504(연산군 10)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 1. 15세에 신용개(신숙주 손자)의 사위가 되었고 18살 때 병과 급제로 관리로 나감. 2. 23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어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비호를 받던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다가 ‘사사불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음. 3. 26세 때에 지제교로 복직되었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6월에 효수됨. 4.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우리 동방의 시학은 대대로 사람이 드물진 않았다. 그러나 읍취헌 박은의 천성과 눌재 박상의 침울함이 다 성대한 세상의 국풍, 대아, 소아의 남은 것으로 후세의 사단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에 비교할 게 아니다’라고 하시고, 두..
이행李荇: 1478(성종 9) ~ 1534(중종 29)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ㆍ창택어수(滄澤漁叟)ㆍ청학도인(靑鶴道人). 1.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독서당의 사가독서에 선발될 정도의 엘리트로 개혁을 주도한 신진사류임. 2. 갑자사화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 했으며, 부지한 후엔 거제도로 끌려 가 염소를 치는 노비가 됨. 3. 중종반정 후 복권되어 판서의 지위까지 올랐음. 4. 정조는 『홍재전서』에서 “『용재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론 택당 이식의 문장이 있다. 그러나 체격과 운치에 있어선 이행이 택당보다 낫다[『容齋集』, 予所最好, 繼此而有澤堂文章. 然體格韻致, 容勝於澤-].”라고 말했다. 5. 허균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우리나라의 시는 마땅히 용재 이행..
박상朴祥: 1474(성종 5)~1530(중종 25)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간(文簡) 1. 조카 박순(朴淳)과 함께 시명이 높았으며, 16세기 호남시단을 이끌었다. 2. 사림의 정치를 지지했기에 사장파(詞章派)가 득세한 중종 연간에 외직을 전전했기에 시엔 강개함이 배어 있음. 3. 성현(成俔)ㆍ신광한(申光漢)ㆍ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사가(四家)로 불림. 4. 정조의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는 “‘우리 동방의 시학은 대대로 사람이 드물진 않았다. 그러나 읍취헌 박은의 천성과 눌재 박상의 침울함이 다 성대한 세상의 국풍, 대아, 소아의 남은 것으로 후세의 사단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에 비교할 게 아니다’라고 하시고, 두 문..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1492(성종 23)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본관 의령. 1. 김종직(金宗直)과 김시습(金時習)의 문하에서 수학함. 2. 세조가 물가로 옮기게 한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함. 임사홍(任士洪)ㆍ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됨 3. 세상을 등지고 가난 속에서 농사 지으며 생활하다가 삶을 마침. 4. 사후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인데다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주장했다고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됨. 5. 『추강집(秋江集)』,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상사성남上巳城南서강한식西江寒食과간성릉過杆城陵영현암 몽자당靈顯庵 夢慈堂유압도遊鴨島제성거산원통암창벽題聖居山元通..
유호인兪好仁: 1445(세종 27)~1494(성종 25) 본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ㆍ뇌계(㵢溪). 1.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2. 1462년(세조 8)에 생원이 되고, 1474년(성종 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함. 3. 1486년에 검토관(檢討官)을 거쳐 이듬해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함. 4. 1490년『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음. 5.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재직 중 병사함. 6. 장수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됨. 登鳥嶺 / 登鳥岾등조령 / 등조점제사근역정題沙斤驛亭우열삼국사偶閱三國史우열삼국사偶閱三國史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성현成俔:1439(세종21)~1504(연산군10)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ㆍ부휴자(浮休子)ㆍ허백당(虛白堂). 1. 벼슬살이에 큰 부침이 없었던 전형적인 관각 문인임. 2. 무오사화로 죽은 후에 부관참시되는 끔찍한 형벌을 받음. 3. 『허백당집(虛白堂集)』, 『용재총화(慵齋叢話)』, 『경륜대궤(經綸大軌)』 등과 공저로 『악학궤범(樂學軌範)』이 있다. 대우제청주동헌帶雨題淸州東軒벌목행伐木行전가사田家詞궁촌사窮村詞 연경궁고기 延慶宮古基 월산대군시집서月山大君詩集序문변文變부벽루기浮碧樓記풍소궤범서風騷軌範序흑우설黑牛說타농설惰農說촌중비어서村中鄙語序십잠十箴용재총화慵齋叢話 문학통사한시사 연구 인용 안내도
김시습金時習: 1435(세종 17)~1493(성종 24)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ㆍ동봉(東峯)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임. 1435년 서울의 성균관 북편 마을에서 태어남. 1439년 5세 세종이 승정원으로 불러 재주를 시험하고 갸륵히 여겼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오세(五歲)’라 부름. 1449년 15세 어머니를 여의고 강릉 외가에 내려가 무덤을 지킴. 1454년 20세 외숙모마저 사망하자 다시 상경함. 부친이 중병으로 눕자 계모를 맞이함. 훈련원(訓鍊院)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맞아 장가듦. 1455년 21세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가 독서하던 중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사건을 접함. 그 후 10년 동안 ..
김종직金宗直: 1431(세종 13)~1492(성종 23) 자는 계온(季昷)ㆍ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점필(佔畢): ‘책의 글자만 읽을 뿐 그 깊은 뜻은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로 쓰이지만 원랜 책을 의미한다. ‘점(佔)’을 ‘보다[視]’로 훈하기도 하나, ‘대쪽[笘]’으로 훈하는 것이 맞다. 다 죽간의 책들이다. ‘필(畢)’도 ‘죽간[簡]’을 의미한다. 이 ‘점필’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서 조선 사람의 종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밀양사람 김종직의 호로서 유명하다.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이 나왔고, 김굉필 문하에서 조광조가 나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김종직이 ‘점필’이라는 단어가 매우 부정적으로 쓰인 사례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는데 왜 하필 호를 ‘점필재’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김종..
성간成侃: 1427(세종 9)~1456(세조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 1. 성임(成任)의 아우이고 성현(成俔)의 형으로, 문벌을 자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재능을 보였다. 2. 유방선의 문인으로 27세에 급제한 뒤 집현전에 들어가 문명을 떨치다 30세에 요절함. 3. 『진일재집(眞逸齋集)』 어부漁父여옥당학사 유성남與玉堂學士 遊城南도중途中라홍囉嗊채련곡採蓮曲염양사艶陽詞노인행老人行아부행餓婦行궁사사시宮詞四時수양산首陽山용부전傭夫傳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강희맹姜希孟: 1424(세종 6) ~ 1483(성종 14)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ㆍ운송거사(雲松居士). 1. 강희안의 아우임. 2. 『사숙재집(私淑齋集)』,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차운김태수영전가次韻金太守詠田家병여 음성사절病餘 吟成四絶매梅차풍전역운次豐田驛韻송김선산지임送金善山之任명명풍우교冥冥風雨交 동인시화서東人詩話序훈자오설병서訓子五說幷序도자설盜子說승목설升木說촌담해이村談解頤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강희안姜希顔: 1418(태종 18)~1464(세조 10)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 1. 그의 시는 중국의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이 있고, 글씨는 중국 진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나라 조맹부(趙猛頫)에 비견되기도 함. 2.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다. 채자휴구화 작 청산백운도蔡子休求畵 作 靑山白雲圖제화산수題畵山水사우정영송四友亭詠松등양주루원登楊州樓院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1488(성종 19)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자원(子元)ㆍ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ㆍ정정정(亭亭亭). 1. 대학자 권근(權近)의 외손이라는 후광에다 자신의 탁월한 재능으로 평생 호화롭게 살았음. 2. 유배 한 번 가지 않았고, 임금이 곁에 두고자 하여 외직조차 맡지 않고 승승장구함. 3. 문학적으로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함. 4. 『사가집(四佳集)』, 『역대년표(歷代年表)』,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고, 공동 편찬서로는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인문(東文選)』, 『경..
성삼문成三問: 1418(태종 18)~1456(세조 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ㆍ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1. 143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함. 2.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ㆍ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함. 3.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성삼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림. 4.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됨. 5. 그해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며 선위를 강요하자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였고 1..
신숙주申叔舟: 1417(태종17)~1475(성종6)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ㆍ희현당(希賢堂). 1.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았다고 함. 2. 세종 때 진사과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1등에 오르고, 이듬해 도승지가 됨. 3. 『홍재전서』에선 “보한재와 같은 경우는 말도 잘했고 행동도 잘했다고 할 만하다. 널리 섭렵한 재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문장을 지었고, 넓은 운용과 깊은 조처로 우리의 선왕들을 도와 다스림의 도구를 모두 다 펼쳤다. 이런 까닭으로 문장이 넓고도 잡되지 않았으며, 분별하되 속이지 않아 일대의 문장이 환하게 갖춰졌다. 그러니 평생토록 쩔쩔매며 쓸데없는..
변계량卞季良:1369(공민왕 18)~1430(세종 12)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1.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 2. 『춘정집(春亭集)』이 있다. 춘사春事유서幽棲등산제혜상인원登山題惠上人院근정전勤政殿제낙천정題樂天亭동년회우왕륜설연同年會于王輪設宴시위試闈감흥感興신흥유감晨興有感장부경도將赴京都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길재吉再: 1353(공민왕 2)~1419(세종 1)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1. 이색ㆍ정몽주ㆍ권근 등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이라 불림. 2. 우왕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강릉으로 옮긴 후 살해되자, 전에 모시던 왕을 위하여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등을 먹지 않고 3년상을 지냈다. 3. 새로운 왕조에 참여할 뜻이 없었던 그는 고향에 머물면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4. 『야은집(冶隱集)』 술지述志우음偶吟반궁우음泮宮偶吟여행촌이與杏村李후산가서後山家序 문학통사한국사 인용 안내도
권근權近: 1352(공민왕 1)~1409(태종 9) 자는 가원(可遠)ㆍ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1. 이색의 문하에서 배우며 과거에 급제했고 명나라 과거에 응시하려 했지만 나이가 어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정도전에게도 수학. 2. 고려 말을 대표하는 학자로 여러 벼슬을 맡았으며 1389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과격하게 국사를 논하다가 유배되어 지방을 전전하다가 1391년에 고향 양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을 쏟음. 3.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서 즐거움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白雪滿庭, 紅日照窓, 燠室溫堗, 圍屛擁爐, 手執一卷, 大臥其間, 美人纖手刺繡, 時復停針, 燒栗啖之, 此足樂也.”라고 말한 양촌의 말이 실려 있음. 4. 『양촌집(陽村集)』ㆍ『입학도설(入學圖說)』ㆍ『오경천..
이첨李詹: 1345(충목왕 1)~1405(태종 5)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 시호는 문안(文安)임. 1. 이색의 문인. 문과 급제 후 1375년 이인임과 지윤을 탄핵한 죄로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음. 2. 조선 건국 뒤에 기용되어 1400년 명(明)에 갔다 왔고 1403년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됨. 3. 『쌍매당집(雙梅堂集)』이 있다. 영급암詠汲黯자적自適야과함벽루 문탄금성유작夜過涵碧樓 聞彈琴聲有作매천명 병서梅川銘 幷序용심慵甚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숭인李崇仁:1347(충목왕 3)~1392(태조 1)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1. 고려의 유신의 절개가 높이 평가되나, 뛰어난 시인이었음. 2 우왕 즉위년에는 친명파에 찍혀 대구현으로 유배됨. 1388년 최영 일파의 참소로 통주로 유배되었다가 정도전 심복인 황거정에 의해 피살됨. 3.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선 즐거움에 대해 말하며 “깊숙한 산방이나 고요한 집에서 밝은 창가의 편안한 책상에 향불을 피우고 스님과 담소를 나누며 차를 끓여서 마시고 시를 짓는 것이 즐길 만한 것이오[山房靜室, 明窓靜几, 焚香對僧, 煮茶聯句, 此足樂也].”라고 말했다. 4. 『도은집(陶隱集)』 과회음감표모過淮陰感漂母오호도嗚呼島득어전송 실기편제得於傳誦 失其篇題호종성남扈從城南제승사題..
정도전鄭道傳: 1342(충혜왕 3)~1398(태조 7)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1. 향리집안 출신 어머니는 노비의 피가 섞임. 원(元)의 사신이 명(明)을 칠 합동작전을 요청해오자 반대하다가 나주로 귀향감. 2. 4년 간 고향에서 머물렀으며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 밑에 학교를 열어 제자를 가르침. 3. 이성계와 관계 맺고 이성계의 추대로 성균관대사성이 된 후 조선 건국함. 4. 1397년에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고 이듬해인 1398년에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살해됨. 5.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서는 즐거움에 대해 “북방에 눈이 처음으로 내릴 때 담비 가죽을 입힌 준마를 타고 누런 사냥개와 팔뚝엔 사냥매를 앉혀 거친..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 복위6)~1392(공양왕 4)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1. 예문관은 문재가 뛰어난 사람들이 벼슬하던 곳으로 26살에 예문검열(藝文檢閱)로 벼슬을 시작함. 2. 1363년 무관직인 낭장이 되었고, 여진정벌을 하러 함경도 정주에 들렀을 때 중양절이었기에 시로 지었음. 3. 『포은집(圃隱集)』 춘春중구일제익양수이용명원루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홍무정사봉사일본작洪武丁巳奉使日本作등전주망경대登全州望景臺정부원征婦怨황도皇都봉래역蓬萊驛안변성루安邊城樓강남류江南柳강남곡江南曲 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임 1328년 5월 9일 영해의 외가에서 출생, 이듬해 한산으로 귀향. 1333년 6세 부친 가정(稼亭)이 원의 제과(制科)에 급제. 1341년 14세 강화도 교동 화개산에서 독서. 가을 성균관시에 합격. 1343년 16세 5월, 별장(別將)에 보임됨. 성균관의 구재도회(九齋都會)에 나감. 1344년 17세 7월, 「양진재기(養眞齋記)」 지음. 삼각산ㆍ감악산ㆍ청룡산 등지에서 독서. 동당(東堂)에 나가 과거에 응시. 1347년 20세 원의 벽옹(辟雍) 학영(學營)에 들어가 우문자정(宇文子貞)에게 주역을 배움. 1348년 21세 원의 학자감(學子監) 생원이 됨. 1350년 23세 가을, 원에서 귀향..
정포鄭誧: 1309(충선왕 1)~1345(충목왕 1) 자 중부(仲孚), 호 설곡(雪谷) 1.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촉망되던 젊은이로 원에 자주 다닐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음. 2. 그의 형제가 왕의 아우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으로 울주로 유배됨. 3. 그곳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중원에서 벼슬할 뜻을 두고 1344년에 원에 갔으나 불행히 병으로 37세에 죽음. 계미중구癸未重九황산가黃山歌양주객관별정인梁州客館別情人시아示兒보제사종普濟寺鐘 한국한시사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이곡李穀: 1298(충렬왕 24)~1351(충정왕 3)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1. 이색의 아버지로, 백이정ㆍ정몽주ㆍ우탁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불림. 2.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유학을 이념을 가지고 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지만 이상을 이루기는 어려웠음. 3. 『가정집(稼亭集)』 도중피우道中避雨유감 / 부기중시사예有感 / 復寄仲始司藝세우효기細雨曉起칠월사일득가서七月四日得家書영사詠史청명후출성남망서산설淸明後出城南望西山雪숙금성현宿金城縣기완산최장원寄完山崔壯元기행일수 증청주참군紀行一首 贈淸州參軍제촌사題村舍기정대언寄鄭代言첩박명 용태백운妾薄命 用太白韻심보설深父說원수한原水旱석의釋疑창치금강도산사기刱置金剛都山寺記차마설借馬說시사설市肆說조포충효론趙苞忠孝論배갱설杯羹說소포기小圃記 문학통사한국한시사 ..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ㆍ실재(實齋)ㆍ역옹(櫟翁) 1287년 검교정승 이진(李瑱)의 아들로 개성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ㆍ역옹(櫟翁) 1301년 15세 성균시에 장원, 이어 과거에 합격. 당시의 유력한 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부(權溥)의 사위가 됨. 1308년 22세 예문관(藝文館)ㆍ춘추관(春秋館)에 들어감. 1310년 24세 선부산랑(選部散郞)에 승진. 1312년 26세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갔다가 성균악정(成均樂正)ㆍ농저창사(豊儲倉事)를 지냄. 1313년 27세 내부부령(內府副令)ㆍ풍저감두곡(豐儲監斗斛)에 오름. 1314년 28세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수학하..
최해崔瀣: 1287(충렬왕 13)~1340(충혜왕 복위 1) 자는 언명(彦明), 호는 졸옹(拙翁)ㆍ예산농은(猊山農隱). 1. 원나라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귀국하였다. 2. 벼슬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다. 3.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높았으며,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4. 윗 사람의 신망을 사지 못하여 출세에 파란이 많았음. 5. 『동인지문(東人之文)』, 『졸고천백(拙藁千百)』 기유삼월치관후작己酉三月褫官後作(5言)기유삼월치관후작己酉三月褫官後作(7言)우하雨荷풍하風荷도현화인운到縣和人韻상원회호재 득루자上元會浩齋 得漏字현재설야縣齋雪夜송이임종직랑 귀구은送李林宗直郞 歸舊隱송봉사이중부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송승선지유금강산서送僧禪智遊金剛山序동인지문..
일연一然: 1206(희종 2)~1289(충렬왕 15) 경주(慶州)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함. 조신전調信傳신충信忠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南白月二聖 努肹不得 怛怛朴朴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김현감호金現感虎삼국유사문학통사한국사 인용 안내도
이규보李奎報: 1168(의종 22)~1241(고종 28) 초명은 인저(仁低),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ㆍ지헌(止軒). 1168년 12월 16일 부친 이윤수(李允綏)와 모친 김씨의 아들로 출생. 초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 황려현(黃驪縣) 사람. 1171년 4세 부친이 성주(成州) 원(員)으로 부임하였으므로 임소로 따라감. 1174년 7세 부친이 내시(內侍)로 발령되어 다시 개성으로 돌아옴. 1178년 11세 숙부인 직문하성(直門下省) 이부(李富)가 부른 ‘지(紙)’자 운(韻)을 받아, 여러 낭관(郎官)들 ‘지로장행모학사 배심상재국선생(紙路長行毛學士 盃心常在麴先生)’이라고 지음 1181년 14세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성명재(誠明齋)【최중(崔沖)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진화陳澕: ?~? 본관은 여양(驪陽 : 지금의 홍성). 호는 매호(梅湖). 여양군(驪陽君) 진총후(陳寵厚)의 증손이다. 1. 무신란(武臣亂) 이후 새롭게 부상한 무반(武班) 출신의 신진사대부임. 2. 벼슬을 맡은 것들이 임금의 조서를 짓는 한림(翰林)ㆍ지제고(知制誥), 임금에게 충간(忠諫)을 하는 사간(司諫)ㆍ정언(正言)이었기에 문장을 잘 짓고 강직한 성품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음. 3. 「한림별곡(翰林別曲)」 제1장에서 “이규보와 진화는 하나의 운으로 붓을 내달려 짓는다[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고 칭찬하고 있음. 4. 『매호유고(梅湖遺稿)』 춘만제산사春晩題山寺봉사입금奉使入金영곡사靈鵠寺춘일화김수재春日和金秀才야보野步도원가桃源歌류柳경도京都월계사만조月桂寺晚眺 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김극기金克己: ?~?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노봉(老峰). 1. 정중부의 난으로 산천에 은둔하다, 30대에 급제했으나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함. 2. 『삼한시귀감』엔 그가 지은 시가 이규보가 지은 시보다 더 많이 뽑힐 정도였음. 3. 그의 저서로는 『김거사집(金居士集)』이 있다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고원역高原驛어옹漁翁통달역通達驛이화李花전가사시田家四時파천현우서派川縣偶書취시가醉時歌서정書情추만월야秋滿月夜 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임춘林椿: ?~? 고려 중ㆍ후기의 학자.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1. 고려 건국공신의 자손. 부(父)인 광비(光庇)와 대부(大父)인 종비(宗庇) 모두 한림원의 학사직을 지냄. 2. 무신란으로 12년 간 유락생활(流落生活)을 하다가 절친인 이인로의 합격에 힘입어 과거준비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요절함. 3. 『서하집(西河集)』, 가전문학(假傳文學)의 선구인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을 씀. 차우인운次友人韻서외원벽書外院壁사인견방謝人見訪기담지걸묵寄湛之乞墨서회書懷모춘문앵暮春聞鶯병중유감病中有感영몽詠夢기종형寄從兄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상이학사서上李學士書여미수논동파문서與眉叟論東坡文書화안기畫鴈記여황보약수서與皇甫若水書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인로李仁老: 1152(의종 6)~1220(고종 7) 고려 무신정권 때의 문인.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와도헌(臥陶軒)【한문학사 책이나 인터넷엔 이인로의 호가 쌍명재(雙明齋)로 나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쌍명재는 동시대인인 최당(崔讜)의 호로, 최당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즐겼다. 이인로도 여기에 참여하여 시를 지어 『쌍명재집(雙明齋集)』이 만들어졌고, 최당은 또한 『썅명재기(雙明齋記)』를 지었기 때문에 와전된 것이다. 이런 내용은 아들 이세황(李世黃)이 쓴 「파한집발(破閑集跋)」에서 잘 나와 있다】. 1. 조실부모하여 절에서 자라 승려가 되었다가 1180년에 문과에 급제함. 2. 죽림고회의 한 사람. 선명한 회화성(繪畫性)으로 탈속의 경지 보여줌. 문(文)은 한유를, 시..
김부식金富軾: 1075(문종 29)~1151(의종 5) 본관 경주. 자(字)는 립지(立之), 호(號)는 뇌천(雷川). 그의 4형제의 이름은 소식(蘇軾)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함. 1.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엔 김부식을 ‘살이 찌고 체구가 크며, 검은 얼굴에 눈이 튀어나옴’이라 표현함. 2. 1122년 보문각대제, 1124년 예부시랑 등에 오름. 3. 당시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이 지나친 예우를 받는다고 비판하며 이자겸과 권력 다툼을 벌임. 4. 1126년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타자 1135년 묘청 일파가 난을 일으켰고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정치적ㆍ문학적 라이벌인 정지상을 제거하며 서경세력을 진압함. 5. 퇴직한 후 8명의 젊은 관료를 보내주어 『삼..
정지상鄭知常: ?~1135(인종 13) 서경 출신. 초명은 정지원(鄭之元). 호는 남호(南湖). 미상 서경(西京)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정지원(鄭之元)이었음.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어머니 노씨(盧氏)에 의하여 양육되었음. 미상 청년기에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고, 평양에 머물며 「대동강에서[送人]」와 같은 주옥 같은 시를 지었음. 1112년 3월에 진사과(進士科)에 을과(乙科) 장원으로 급제하였음. 이때 지은 시가 『백운소설』에 소개됨. 과거에 급제하기 10년 전부터 개경의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음. 1113년 3월에 왕을 알현하고 처음으로 벼슬을 받음. 1114년 4월에 담당자가 정지상이 장원급제한 자이므로 개경에서 벼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주청을 올렸고 왕이 재가함. 1127년 3월에 좌정언(左正..
최유청崔惟淸: 1095(선종 10)~1174(명종 4)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직재(直哉), 1. 그는 경사자집에 해박하였고, 불경에도 조예가 깊었다. 2. 『남도집(南都集)』, 『유문사실(柳文事實)』, 『최문숙공집(崔文淑公集)』,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 잡흥雜興행화杏花최유청전崔惟淸傳 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박인량朴寅亮: ?~1096(숙종 1)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천(代天). 고려 개국공신 수경(守卿)의 현손. 1. 문장이 아담하고 화려하단 평을 받으며 외교문서를 주로 담당함. 2. 1075년에는 요(遼) 황제에게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압록강을 지나와 경계 삼으려던 계획을 거두게 함. 3. 『고금록(古今錄)』, 『수이전(殊異傳)』 등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주중야음舟中夜吟송과사주귀산사宋過泗州龜山寺오자서묘伍子胥廟 수삽석납首揷石枏박인량전朴寅亮傳한국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최승우崔承祐: ?~? 1.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여 빈공과에 급제한 뒤 귀국. 신라 10현의 한 사람이기도 하고, 또한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ㆍ최언위(崔彦撝) 등과 함께 3최라고 불린다. 2. 그의 사육집(四六集) 5권을 저술하여 『호본집(餬本集)』이라고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최승우전崔承祐傳 문학통사한국한시사 인용 안내도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경주최씨의 시조. 자(字)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 857년 경주 사량부(沙粱部)에서 출생. 부친은 견일(肩逸). 자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 868년 12세 당 유학 874년 18세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1년 빈공과 급제. 876년 20세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됨.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음. 877년 21세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終南山에 들어가 학업 연마. 879년 23세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書記) 역할을 함. 그 후 4년 간 고병(高騈)을 대신하여 표(表), 장(狀), 서(書), 격문(檄文) 등을 지음 880년 24세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음. 이 격문으로 최치원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