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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草溪有隱君子鄭上舍者 我先人稼亭公同年進士也 有子曰習仁 字顯叔 穡之識其面久矣 而未嘗接殷勤之歡 不知其爲上舍子 顯叔亦不以爲言 顯叔有志氣 有才華 使酒敢言 同列憚之 乙未春 益山李侍中,竹溪安政堂典貢擧 顯叔對策高中 掌敎成均 用其勞入參官 不詭隨 不苟合 搢紳皆願內交 而顯叔視之蔑如也 被選出知榮州 將視事 吏以故事請詣消災圖焚香 顯叔曰 人臣不蹈非彝 災也從何而生 若其無妄 君子順受之而已矣 疾病之未作也 吾調燮焉而已矣 旣作也 吾藥餌焉而已矣 將死也 臟腑必有先受者 而不可救矣 消災圖於我何哉 敕吏撤去 或曰 以之爲褥坐臥之 傳者之過也 州有塔 顯叔訊其名 吏以無信告 顯叔曰 信乎 吏曰 敢無稽 顯叔詢諸士大夫老 而家居者皆曰然 顯叔曰 異哉 惡木不息也 盜泉不飮也 夫何故惡其名也 烏有巍然其形 爲一邑所瞻視 而以無信表之者乎 去粟 人無以自生也 去兵 人無以自衛也 然且去..
快軒金文正公以文章道德 相忠烈忠宣忠肅 決國疑如蓍龜 贊邦敎爲柱石 而家政益嚴 諸子登科 伯氏早亡 仲氏鈍軒 叔氏松堂 皆位宰相世其家 壻安氏朴氏 安氏政堂文學 朴氏密直代言 皆以文科顯 爲士者則安氏之孫三子登科 朴氏子亦三子登科 而曰少陽字仲剛者 朴氏子也 於次爲三 雖中成均試 屢擧不第 予悲之 故傳其事 仲剛性高潔 不喜章句之學 平居不讀書 不習擧業 然視已得者 蔑如也 故科興 必入場屋 携紙筆燈燭 不挾尺書 談笑成章 不問巧拙 投之而出 卒無成 嘗自念大丈夫鬱鬱荒陬 無乃井底蛙乎 去而西游京師 縱覩山川人物宮闕城邑 其博達之觀 疏蕩之氣已非前日 而愜所望矣 西夏幹克莊治書公一見愛之 館之于其家 厚遇之 時敎以詩書 仲剛亦不留意 久而能北音 出與塗人語 途人不知仲剛之爲東人也 頗自喜 有志仕宦 無先之者 會姻親有爲山南廉訪司知事者 仲剛從之遊 山南補其司奏差 嘗持捷書 一至京師 是..
大學生吳仝 長身微傴 善書能文 庚辰進士也 一日 途遇座主金政堂 政堂面叱曰 爾不讀書而馳走如此 何歟 仝以手叩懷中書冊 默然而去 時年十五六歲也 稍長 補成均生 能以禮自檢 人人皆自以爲莫能及 前輩老儒延譽稍廣 不幸短命死矣 悲夫 仝讀書三角山僧舍 人有薦亡齋呈疏於香卓 會僧中無識字者 衆髡汗出 莫知所爲 仝曰 是不難 吾爲汝讀之 乃被僧衣 髻其髮於頂 蒙之以其冠 群立於衆髡 佯爲施主曰 吾病頭風不可出 然飽施主飯而不與法席 吾罪大矣 衣冠之異於衆 其罪小 請施主無怪 旣梵唄 施主捧香爐長跪不敢動 仝起於群中 若將去其冠者 施主遽曰 請比丘無去冠 仝佯應曰 諾 會旣罷 施主去矣 群髡大噱 聲震山谷 至今傳爲山中故事 今天台判事懶菴元公愛與縫掖游 仝亦在其中 未久病歿 縫掖之結契者出錢以賻之 有曰李穎者 仝之外兄弟也 亦能書 安常軒先生以女妻之 且敎之 擢第拜正言 遷禮部員外郞 其後隱..
宋氏出家名性聰 然不居僧房 居旻天東傘橋南 近水樓二間 貯書邀客 日嘯詠其中 得錢卽沽酒市殽膳不少吝 又能畫山水人物 亦不甚俗 性坦率 事或牴牾 必變色 言脫于口 駟不及 其爲詩章 不拘聲律 耳得卽吐出 或驚人 或滿座大笑 不以爲喜怒 乃曰 偶耳得好句 非吾有意於好也 偶爾得拙語 非吾有意於拙也 吾之心適然而然耳 居家生產亦類此 終身不謀利 口不談市價 手不知執算板 蓋於古人 亦未見其匹也 喜讀孟子書 至不孝無後爲大 若有所感 乃去其敎而冠其顚 嘗一赴場屋 文字不蹈繩墨 雖有奇趣 不可羈束 然不類他作 是以 有司不取 宋氏亦自知也 故不怨有司 其後予游燕數年而歸則宋氏亡矣 嗚呼悲哉 予年十四 未學詩 時時從宋氏游 宋氏敎予吟詠 每曰可 是歲松亭金先生試士成均 宋氏勸予擧 先君在燕都 大夫人又少予 聞吾欲赴試 曰 汝必妄也 汝之學必不合赴試 汝必妄也 不然則人必誑汝爾 不給紙札 宋氏自市..
夫人姓竹 名憑 渭濱人篔之女也 系出於蒼筤氏 其先識音律 黃帝采擢而典樂焉 虞之簫亦其後也 蒼筤自昆侖之陰徙震方 伏羲時 與韋氏主文籍 大有功 子孫皆守業爲史官 秦之虐也 用李斯計 焚書坑儒 蒼筤之後寢微 至漢蔡倫家客楮生者頗學文 載筆時與竹氏游 然其人輕薄 且好浸潤之譖 疾竹氏剛直 陰蠹而毀之 遂奪其任 周有竿亦竹氏後 與太公望釣渭濱 太公作鉤 竿曰 吾聞大釣無鉤 釣之大小在曲直 直者可以釣國 曲者不過得魚也 太公從之 後果爲文王師 封於齊 擧竿賢 以渭濱爲食邑 此竹氏渭濱之所起也 今子孫尙多 若箖箊䇹筳是已 徙楊州者稱篠簜 入胡中者稱蓬 竹氏大槪有文武幹 世爲籩簋笙竽禮樂之用 以至射漁之微 載在典籍 班班可見 唯䇞性至鈍 心塞不學而終 至篔 隱而不仕 有一弟曰簹 與兄齊名 虛中直己 善王子猷 子猷曰 一日不可無此君 因號此君 夫子猷 端人也 取友必端 則其人可知 娶益母女 生一女 ..
節婦曺氏 遂寧縣人也 至元庚午五月廿六日 忠敬王自江華復都松京 時將軍洪文系等 誅權臣誤國者 用復政于王 六月初一日 權臣家兵神衛等軍 擁承化侯將圖不軌 乃驅臣僚軍士未及渡江者 航海而南 軸轤相接 曺生六歲 隨其父隊尉子丕在行中 賊至半塗 僞置官僚 自宰執至于將校 以誘其脅從 以丕有智謀膂力 超授別將 丕以計得脫還京 後賊敗 至婦女小兒死鋒鏑溺海水殆盡 餘爲天兵所虜去 惟丕同舟人 老幼皆全活 丕卽還 又隷官軍 攻賊至耽羅 辛未冬 死之 曺十三 適隊尉韓甫 生一女 其舅壽寧宮錄事光秀 東征日本 辛巳夏 死軍中 辛卯夏 甫又死哈舟兵 曺旣寡從姊 及其女子適人 乃從女 女生一男一女而又早死 則從孫女 居至今 曺未三十 夫父舅連歿戰陣間 寡居五十年 日夜勤女工 衣食女若孫 使不失所 而賓婚喪祭之用是給 年已七十七 猶康強無恙 性又聰慧 說在賊中時及近世治亂衣冠族姓事 歷歷無遺失 余所居卽曺氏舊..
한문소설 목차 가전소설(假傳小說) 湯婆傳(고용후)麴醇傳孔方傳丁侍者傳麴先生傳楮生傳淸江使者玄夫傳麴先生傳竹夫人傳淸江使者玄夫傳 삼국사기&삼국유사 調信傳金現感虎延烏郞細烏女志鬼說話南白月二聖 努肹不得 怛怛朴朴 溫達都彌薛氏女 천군소설(天君小說) 花史花王誡義勝記愁城誌南靈傳 몽유록(夢遊錄) 安憑夢遊錄(신광한)元生夢遊錄何生奇遇傳雲英傳 / 壽城宮夢遊錄 금오신화(金鰲新話) 萬福寺摴蒲記南炎浮洲志龍宮赴宴錄李生窺牆傳醉遊浮碧亭記 연암소설(燕巖小說) 放璚閣外傳 自序穢德先生傳許生傳閔翁傳兩班傳虎叱廣文子傳馬駔傳金神仙傳烈女咸陽朴氏傳虞裳傳 이옥 沈生傳柳光億傳 권필 周生傳偉敬天傳 기타 崔陟傳(조위한)紅桃(유몽인 / 逸士遺事)星主高氏家傳崔生遇眞記(신광한)崔致遠傳首揷石枏英英傳芝峰傳宋班窮途遇舊僕劍女道學先生金英哲傳(홍세태)鍾玉傳(목태림)烏有蘭傳提督裸程出..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최북 칠칠의 이야기최칠칠전(崔七七傳) 남공철(南公轍) 최칠칠에 대한 기본 정보崔北七七者, 世不知其族系貫縣. 破名爲字, 行于時. 工畵眇一目, 嘗帶靉靆半, 臨帖摹本. 술을 좋아한 최북의 일화들嗜酒喜出遊. 入九龍淵, 樂之甚, 飮劇醉, 或哭或笑. 已又叫號曰: “天下名人崔北, 當死於天下名山.” 遂翻身躍至淵, 旁有救者, 得不墮. 舁至山下盤石, 氣喘喘臥, 忽起劃然長嘯, 響動林木間, 棲鶻皆磔磔飛去. 七七飮酒, 常一日五六升. 市中諸沽兒携壺至, 七七輒傾其家書卷紙幣, 盡與取之. 貲益窘, 遂客遊西京ㆍ萊府賣畵, 二府人持綾綃, 踵門者相續. 최북의 예술관人有求爲山水, 畵山不畵水. 人怪詰之, 七七擲筆起曰: “唉, 紙以外皆水也.” 畵得意而得錢少, 則七七輒怒罵, 裂其幅不留; 或不得意而過輸其直, 則呵呵笑, 拳其..
소리꾼 송실솔과 공자 표의 음악친구 이야기가자송실솔전(歌者宋蟋蟀傳) 김려(金鑢) 송실솔의 어릴 적 고군분투宋蟋蟀, 漢城歌者也. 善歌, 尤善蟋蟀曲, 以是名蟋蟀. 蟋蟀自少學爲歌, 旣得其聲, 往急瀑洪春砯薄之所, 日唱歌, 歲餘惟有歌聲, 不聞瀑流聲. 又往于北岳顚, 倚縹緲惝惚而歌, 始璺析不可壹, 歲餘飄風不能散其聲. 실솔의 통달한 노래실력自是蟋蟀歌于房, 聲在梁; 歌于軒, 聲在門; 歌于航, 聲在檣; 歌于溪山, 聲在雲間. 桓如鼓鉦, 皦如珠瓔, 嫋如烟輕, 逗如雲橫, 璅如時鶯, 振如龍鳴. 宜於琴, 宜於笙, 宜於簫, 宜於箏, 極其妙而盡之. 乃斂衣整冠, 歌于衆人之席, 聽者, 皆側耳向空, 不知歌者之爲誰也. 실솔과 마음이 잘 맞던 공자 표時西平君公子標, 富而俠, 性好音樂. 聞蟋蟀而悅之, 日與游. 每蟋蟀歌, 公子必援琴自和之, 公子琴..
죽는 순간까지 무인다운 패기를 보여준 유응부육신전(六臣傳) 권응인(權應仁) 兪應孚武人也, 善射好勇, 超越人家墻屋. 英廟文廟, 皆愛重之, 位至一品. 丙子之變, 與成勝爲別雲劍, 欲擧事而中沮, 及事發, 拿去闕庭. 上問: “汝欲何爲?” 應孚曰: “當宴日, 吾欲以一尺劍, 廢足下復故主, 不幸爲奸人所發耳. 應孚復何求. 足下第速殺我.” 上怒曰: “汝托名上王, 而欲圖社稷耳.” 令武士剝膚以問, 不服, 顧謂三問等曰: “人謂書生不足圖事, 果然. 曩於請宴日, 吾欲試劍, 汝等固止之曰: ‘非萬全計也.’ 以致今日之禍, 汝等人而無謀, 何異畜生.” 白上曰: “如欲問情外事, 問彼䝂儒.” 卽閉口不答. 上愈怒, 命取灼鐵, 置臍下脾上, 油火竝煎, 顏色自若, 徐待鐵冷, 投之地曰: “更灼熱來.” 終不服而死. 『歷代要覽』 해석兪應孚武人也, 善射好勇..
짝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을 불태워버리다지귀설화(志鬼說話) 성임(成任) 志鬼新羅活里馹人. 慕善德王之端嚴美麗, 憂愁涕泣, 形容憔悴. 王聞之, 召見曰: “朕明日行靈廟寺行香, 汝於其寺待朕.”志鬼翌日歸靈廟寺塔下, 待駕行, 忽然睡酣. 王到寺, 行香, 見志鬼方睡著. 王脫臂環, 置諸胸, 卽還宮. 然後乃覺, 御環在胸, 恨不得待御, 悶絶良久. 心火出燒其身, 志鬼則變爲火鬼.. 於是王命術士, 作呪詞曰: “志鬼心中火, 燒身變火神. 流移滄海外, 不見不相親.” 時俗, 帖此詞於門壁, 以鎭火災. 『太平通載』 해석志鬼新羅活里馹人. 지귀는 신라 활리역 사람이다. 慕善德王之端嚴美麗, 憂愁涕泣, 선덕여왕의 단정하고 엄격하며 미려함을 사모하여 근심스레 눈물 흘리니 形容憔悴. 안색이 초췌했다. 王聞之, 召見曰: “朕明日行靈廟寺行香, 왕이 듣고 불..
도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의연했던 재판 과정 김택영(金澤榮) 重根, 素未見伊藤, 惟嘗於報紙所載之小像, 竊識之. 乃披軍隊而入, 擧槍射之, 三丸中胸腹, 伊藤遂死. 又射伊藤從者三人, 亦皆仆. 於是, 重根, 大呼大韓萬歲, 軍隊就而縛之. 重根大笑曰: “我豈逃者哉?” 『韶濩堂集』 박은식(朴殷植) 重根, 奮起曰: “老賊來此也, 天假機會也.” 直走哈爾賓驛, 立露軍之背後, 相距直十步, 擧銃一發, 中李藤胸. 各軍, 來集, 奪重根銃, 付憲兵.重根, 倒其銃而予之, 以拉丁語, 三呼大韓獨立萬歲. 被縛, 重根, 拍掌大笑曰: “我豈逃者哉. 我欲逃, 我不入死地.” 於是, 全球震動, 人皆吐舌曰: “韓國有人.” 『韓國獨立運動之血史』 박은식(朴殷植) 及其最終公判後, 謂二弟定根ㆍ恭根曰: “我死後, 埋我骨於哈爾濱公園之傍, 待我國權回..
한문소설약사(漢文小說略史) 여말선초(羅末麗初) 1. 현전하는 작품 최치원(崔致遠), 조신전(調信傳), 호원(虎願: 金現感虎) / 온달(溫達), 설씨녀(薛氏女)는 소설이었으나 역사로 정착된 걸로 봄 2. 한문소설이 성립될 수 있었던 요인 역사전환기 상ㆍ하층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뒤섞이기 쉬움으로 소설 발생의 좋은 조건이 됨. 문학 수준 발전 당사까지 축적된 문학의 역량은 인간의 삶과 그 삶의 조건을 소설로 형상화하는데 기초 제공. 문인들의 갈등 실존에 탐구를 문학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움 → 허구에 입각한 새로운 장르의 출현 고독감이나 문제 제기를 애정 갈등에 결부시켜 우회적으로 표출함. 고려(高麗) 1. 한문소설 창작이 안 된 이유 가전(假傳)은 산문의 한 종류로 보기에, 이 시기를 공백기로 봄 사회가 안정되..
줄거리 1화: 안빙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정원에서 시간을 쪼개다 안빙은 글솜씨가 뛰어났지만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한 후 남산에 별장을 짓고 한가로이 지냄 ⇒ 3월 어는 날 한참을 걷다 홰나무에 기대 ‘세상에 전해진 괴상한 나라들의 이야기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혼잣말을 하며 잠에 빠져듦 ⇒ 문든 안빙의 코 끝에 나비가 날아오며 길을 안내해주는 것 같음 ⇒ 나비를 따라 마을입구에 도착하니 푸른옷을 입은 아이가 나오며 반갑게 맞이해줌 ⇒ 처음 보는 아이가 자신을 아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며 아이를 따라가니 푸른 기와집이 보임 2화: 여왕을 뵌 안빙 인사를 드리다 시녀는 친한 사람을 반기듯 인사를 건네왔고 여러 이야기들을 해줌 ⇒ 그러자 다른 시녀도 나오며 자신에 대한 소개를 해줌 ⇒ 안빙은 여러 개의 문..
줄거리 1화: 겨울나라 陶 1부 매화의 가계 매화의 조상 중에 모함을 받아 피신한 이후 합려성에 정착함 ⇒ 후대 고공사라는 사람이 복숭아 桃와 결혼해 세 아들을 낳았고 열왕은 그 중에 첫째 아들임 ⇒ 도씨는 신선이 사는 연못에 가서 붉은 열매를 먹는 꿈을 꾸고서 매화를 낳음 ⇒ 매화의 향기가 멀리까지 퍼지고 곧은 성격에 용모까지 빼어남. 도나라 건국과 선정 등륙(눈)이 추위를 몰고 와 백성들이 목숨을 잃음 ⇒ 대나무 오균과 소나무 진봉이 매화를 왕으로 받들어 陶라는 나라를 만듦 ⇒ 흰색을 숭상했고 달력을 만들었으며 계수나무 계씨를 왕비로 받아들임 2화: 겨울나라 陶 2부 등륙을 토벌하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째 되던 해 대나무 오균을 재상으로 임명함 ⇒ 4년째 되던 해에 소나무 진봉과 잣나무 백직이 등륙..
줄거리 1화: 원자허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로 벼슬과는 인연이 없었음 ⇒ 역사책을 읽다가 나라의 운명이 다하는 부분이 나오면 흐느껴 울음 ⇒ 어느 날 책을 읽다 깜빡 잠이 드니 몸이 가벼워져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듦 ⇒ 강가의 언덕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시를 읊음 ⇒ 시를 읊고 서성이니 한 사내가 나오며 임금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줌. 2화: 정자에 도착하니 임금과 다섯 신하가 있었고 임금이 “그대의 곧은 절개를 사모해왔다”고 하여 원자허는 맘을 놓음 ⇒ 임금과 신하들은 얘기를 나누는데 한 사내가 쿠데타를 일으킨 순임금과 우임금, 탕왕 때문에 정의가 사라졌다고 하니 임금은 그걸 핑계삼는 이들이 문제라고 말함 3화: 그 후엔 술을 마시고 쌓인 억울함을 풀어보자고 하여 신하들이 돌아가며 말함 ①..
떠돌이 삭낭자 이야기索囊子傳 완산에 살던 거지 송씨의 특이사항 完山乞者. 問其名曰不知, 問其姓曰亦不知, 或以洪號之. 能多食而不飽, 或不食而不飢, 風雪裸體而不寒, 人與之衣則不取. 乞米而食, 有餘則亦與之餓者. 未嘗與人居, 亦未嘗與人言. 宿於館舍下, 府中耆老人, 皆不知乞者始來之年代, 而容貌不改. 삭낭자로 불린 송씨 或號曰‘索囊子’, 蓋結索爲囊, 行則荷之, 無它物, 亦無異事. 往往遊都下, 人莫知去來. 弊衣木履, 行乞於市. 삭낭자의 마지막 모습 今相國元公嘗爲完山尹, 心異之, 招延之甚厚, 亦不辭. 與之食則食之, 與之言則不言, 一朝不知所去. 其後南方大飢, 今不至者幾十年云. 斯人者蓋遊方之外, 而不與事物相攖, 樂忘世而泯其跡, 鶉居而鷇食, 土駘狂接輿之倫耶. 癸卯正月, 眉叟書. -『記言』 해석 완산에 살던 거지 송씨의 특이..
전주의 기이한 인물 삭낭자삭낭자전(索囊子傳) 김려(金鑢) 색낭자로 불리게 된 이유索囊子姓洪, 甄城之丐者也. 結索爲囊, 行則荷之, 夜必寢其中, 自名曰: ‘索囊子’, 人亦呼之以索囊子也. 색낭자의 색다른 외모와 행동거지索囊子身長七尺, 美鬚髯, 貌如氷玉. 問其年, 曰: ‘二十’ 翌年問之, 亦如是. 後十年問之, 無不如是, 然索囊子容彩不衰也. 常衣弊布單, 曳一大木屐, 往來都下乞米, 多得則分諸丐者. 平生不喜與人言, 未嘗宿人舘舍. 索囊子甚大食量, 炊八斗米喫不飽, 飮酒數甕亦不亂, 然常不食月餘矣, 亦未嘗飢也. 색낭자의 걸출한 바둑실력索囊子碁品甚妙當世, 然不肯與人賭勝. 京中士大夫召之使圍, 與第一手對着, 只嬴一子; 與最下者對着, 亦只嬴一子. 故當是時, 棊局嬴一子者, 名爲‘索囊子碁法.’ 삭낭자의 마지막 행적索囊子性最能寒. 大冬..
배 위에서 똬리를 튼 뱀을 쫓아낸 홍섬의 재치 領相公, 夏日, 午睡, 有蛇上公腹上. 公心欲逐之, 而恐蛇驚傷人, 木石然不敢動. 子退之, 方六歲, 適父所, 見之. 卽往草澤中, 取三四蛙, 投之, 蛇舍人從蛙而去, 公乃得起身. 退之, 自幼, 機智如此. 及長, 是爲名相. -『國朝人物考』 해석 領相公, 夏日, 午睡, 영의정 洪彦弼(1476~1549)이 여름에 낮잠을 자는데 有蛇上公腹上. 뱀이 언필의 배 위에 올라가 있었다. 公心欲逐之, 而恐蛇驚傷人, 언필이 내심 그걸 쫓고자 했지만 뱀이 놀라 사람을 다치게 할까 걱정되어 木石然不敢動. 목석처럼 감히 움직이질 않았다. 子退之, 方六歲, 아들인 퇴지 洪暹(1504~1585)은 6살이었는데 適父所, 見之.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갔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卽往草澤中, 取三四蛙..
김종수와 뱀, 그리고 곰방대 金鍾秀, 淸風人, 字定夫, 號眞率, 又夢村. 英祖戊子, 進士文科; 正祖己酉, 大拜, 致仕耆社. 諡文忠, 配正祖廟. 嘗以事竄南方, 寓吏房家. 晝寢於廳, 有大蛇盤於腹上. 旁人, 驚惶莫知所爲, 吏房之子年十三, 爲通引, 爲午飯而出, 見其像. 遂捕大蛙數十, 擲之於前, 蛇爲捕蛙而下腹. 鍾秀大奇之, 與其兒俱歸京. 嘗爲平安監司, 將還朝, 列邑守令, 餞大同江上, 大張妓樂. 鍾秀以烟竹, 扣舷, 誦『赤壁賦』, 烟竹, 誤落於江中. 遂笑曰: “吾在浿營二年, 猶此烟管, 乃其營物, 今江神, 不許而使之投水也.” 其淸白, 如此. -『大東奇聞』
너의 말도 옳다汝言是也 黃喜, 長水人, 字, 懼夫, 初名, 壽老, 號, 厖村. 禑朝己巳, 文科 我朝名相, 諡, 翼成, 配世宗廟. 留心國務, 不關家事. 一日, 家婢相鬪喧移時. 一婢來訴曰: “某與小婢, 相抗所犯, 如是如是, 極爲奸惡.” 曰: “汝言是也.” 又一婢來告亦如是, 公曰: “汝言是也.” 姪某在傍, 慍而進曰: “甚矣. 叔氏之朦朧也. 某也如彼, 某也如此, 此乃是而彼爲非也.” 公曰: “汝言是也.” 讀書不輟, 終無分卞. -『松窩雜記』 해석 黃喜, 長水人, 字, 懼夫, 初名, 壽老, 號, 厖村. 황희는 장수 사람으로 字는 구부이고 初名은 수로이며, 호는 방촌이다. 禑朝己巳, 文科 我朝名相, 고려 기왕 기사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조선조에 이름난 재상이 되었다. 諡, 翼成, 配世宗廟. 시호는 익성이고 세종묘에 배향..
중종도 인정한 대장금 傳曰: “百工技藝, 皆不可闕, 而勸課節目, 非不詳盡矣. 但各司官員, 不致力勸課, 故卒無成效. 其中醫術, 尤爲大事, 而不各別勸課焉, 今之粗解其術者, 皆成宗朝所敎養者也. 今則其勸課事, 何以爲之, 其問于醫司以啓. 且醫女料食, 有全遞兒、 有半遞兒. 今者, 全遞兒有窠闕, 而不啓其應受之者, 必以自下啓之爲難也. 但醫女大長今, 醫術稍優於其類. 故方出入大內, 而看病焉. 此全遞兒, 其授長今.” 『中宗實錄』 해석傳曰: “百工技藝, 皆不可闕, 중종께서 전교하셨다. “온갖 장인의 기예는 다 빠뜨려선 안 되고 而勸課節目, 非不詳盡矣. 권과【勸課: 일을 맡거나 권장하는 것.】의 작은 조항들이 상세하지 않음이 없다. 但各司官員, 不致力勸課, 다만 각사【各司: 조선시대, 한양에 있던 관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맹사성의 ‘공-당’ 문답공당문답(公堂問答) 自溫陽歸路, 遇雨入于龍仁旅舘. 有一人, 騎從, 甚盛, 先處旅舘樓上, 公, 入處一隅. 登樓者, 是嶺南富豪, 欲爲錄事取才上來也. 見公招之, 共登談論博戱, 且約以公字堂字, 爲問答之韻. 公問曰: “何以上京公?” 其人曰: “錄事取才上去堂.” 公笑曰: “我爲公差除公?” 其人曰: “嚇不堂” 後日, 政府之坐, 其人, 以取才入謁. 公曰: “何如公?” 其人, 退伏而對曰: “死去之堂” 一座驚怪. 公以其實言, 告諸宰, 大笑. 公, 以爲陪錄事, 錄事賴公之薦, 屢典州郡, 以吏能稱. 後世謂之公堂問答. 『慵齎叢話』「燃藜室記述」 해석自溫陽歸路, 遇雨入于龍仁旅舘. 온양으로부터 조정에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용인의 여관에 들어갔다. 有一人, 騎從, 甚盛, 어떤 사람의 말탄 수행원들이 매우 성대..
관리들이 맹사성을 보고 달아난 사연인침연(印沈淵) 覲省溫陽, 徃來時, 不入官衙, 常簡僕從, 時或騎牛而行. 陽城ㆍ振威兩倅, 聞公下來, 候于長湖院. 見騎牛過去之人, 使人呵禁, 思誠曰: “汝以溫陽孟古佛, 言之.” 其人, 歸告, 兩倅驚惶走出, 不覺印墜岸下深淵. 後人, 名曰: “印沈淵.” 『國朝名臣錄』 해석覲省溫陽, 徃來時, 不入官衙, 맹사성은 온양에 부모님을 뵈러【覲省: 관리가 3년에 1차례 정도 휴가를 받아 부모를 찾아뵙거나, 노환이나 병환 등의 이유로 부모를 보살피는 것】 오고 갈 때에 관아에 들어가지 않고 常簡僕從, 時或騎牛而行. 항상 간단히 하인만을 데리고 때로는 소를 타고 갔었다. 陽城ㆍ振威兩倅, 聞公下來, 候于長湖院. 양성과 진성의 두 관리가 공이 내려온다는 걸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렸다. 見騎牛過去之..
맹사성의 효심과 검소함 孟思誠, 新昌人, 字誠之, 號東浦. 誠孝出天, 十歲, 能盡子職. 母喪, 水醬, 不入口者七日, 及葬, 廬墓啜粥三年. 植栢墓前, 有豕觸而枯, 思誠, 痛哭, 翌日, 豕爲虎所噉, 人以爲孝感所致, 事聞旌閭. 思誠, 家甚狹少, 兵曹判書以禀事進徃, 適値驟雨, 處處漏下, 衣冠盡濕. 兵判, 還家歎曰: “公家如是, 我何以外行廊爲哉?” 遂掇方搆之廊. 「人物考」 해석孟思誠, 新昌人, 字誠之, 號東浦. 맹사성은 신창 사람으로 字는 성지(誠之)이고 號는 동포(東浦)다. 誠孝出天, 十歲, 能盡子職. 진심스런 효심은 천성적으로 타고나 10살에 자식의 직분을 다할 수 있었다. 母喪, 水醬, 不入口者七日,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미음조차 입에 넣지 않은 지 7일이 되었고 及葬, 廬墓啜粥三年. 장례 지낼 적엔 여막에서..
강직한 성품과 자유분방한 시풍을 지닌 김구용김구용(金九容) 한치윤(韓致奫) 金九容, 初名齊閔, 字敬之, 安東人. 中進士, 拜三司左尹, 與李崇仁ㆍ權近, 上書都堂, 阻迎北元使, 竄竹州. 召爲左司議大夫, 終成均大司成. 尋流大理衛. 『海東繹史』 해석金九容, 初名齊閔, 字敬之, 安東人. 김구용은 초명이 제민이고 字는 경지로 안동 사람이다. 中進士, 拜三司左尹, 與李崇仁ㆍ權近, 上書都堂, 진사에 합격했고 삼사좌윤에 제수되어 이숭인, 권근과 함께 도당에 상소문을 올려 阻迎北元使, 竄竹州. 북쪽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것을 저지하여 죽주에 유배되었다. 召爲左司議大夫, 終成均大司成. 이후에 불러 좌사의대부가 되었다가 마침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尋流大理衛. 『海東繹史』이윽고 명나라 대리위(雲南)로 유배되었다. 인용문..
진휼(賑恤) 이긍익(李肯翊) 有丐者, 言飢於忠寧大君(世宗潛邸時爵號). 忠寧以聞, 太宗曰: “中外飢民, 已令有司賑濟, 毋致飢餓. 何不謹奉行如是耶? 忠寧, 見予矜恤飢寒, 有所見聞, 輒必來告. 然垂死之民, 見王子然後, 獲食非可繼之道也.” 命治主者罪. 『燃藜室記述』 해석 有丐者, 言飢於忠寧大君(世宗潛邸時爵號). 굶주린 사람이 있어 굶주림을 충녕대군(세종이 등극하지 않은 시절의 작호임)에게 말했다. 忠寧以聞, 太宗曰: 충녕이 아뢰니, 태종이 말했다. “中外飢民, 已令有司賑濟, “수도와 지방의 굶주린 백성은 이미 유사로 하여금 진휼케 하였으니 毋致飢餓, 굶주림에 이르지 말도록 했는데, 何不謹奉行如是耶? 어찌하여 삼가 받들어 행하지 않고 이와 같은 것인가? 忠寧, 見予矜恤飢寒, 충녕은 굶주림과 추위를 긍휼히 여기고 ..
귀하디 귀한 옥을 받지 않으려는 이유자한사보(子罕辭寶) 宋人或得玉, 獻諸子罕, 子罕弗受. 獻玉者曰: “以示玉人, 玉人以爲寶也, 故敢獻之.” 子罕曰: “我以不貪爲寶, 爾以玉爲寶. 若以與我, 皆喪寶也, 不若人有其寶.” 稽首而告曰: “小人懷璧, 不可以越鄉, 納此以請死也.” 子罕寘諸其里, 使玉人爲之攻之, 富而後使復其所. 『春秋左氏傳』 「襄公 15年條」 해석宋人或得玉, 獻諸子罕, 子罕弗受. 송나라 사람이 어쩌다 옥을 얻게 되어 자한에게 바쳤는데, 자한은 받질 않았다. 獻玉者曰: “以示玉人, 옥을 바치려는 사람이 말씀드렸다. “옥의 장인에게 보여주었더니 玉人以爲寶也, 故敢獻之.” 옥의 장인이 보배라 했기 때문에 감히 바치려는 것입니다.” 子罕曰: “我以不貪爲寶, 爾以玉爲寶. 자한이 말했다. “나는 탐욕부리지 않음을..
옛 이야기 구연자 전기수(傳奇叟) 조수삼(趙秀三) 叟居東門外. 口誦諺課稗說, 如「淑香」ㆍ「蘇大成」ㆍ「沈淸」ㆍ「薛仁貴」等, 傳奇也. 月初一日坐第一橋下, 二日坐第二橋下, 三日坐梨峴, 四日坐校洞口, 五日坐大寺洞口, 六日坐鍾樓前. 溯上旣自七日, 沿而下, 下而上. 上而又下, 終其月也, 改月亦如之. 而以善讀, 故傍觀匝圍. 夫至最喫緊可聽之句節, 忽默而無聲. 人欲聽其下回, 爭以錢投之. 曰此乃邀錢法. 『秋齋紀異』 해석 叟居東門外. 수는 동문 밖에 살았다. 口誦諺課稗說, 如「淑香」ㆍ「蘇大成」ㆍ「沈淸」ㆍ「薛仁貴」等, 傳奇也. 언과패설(민담)을 구송하는데 「숙향전」ㆍ「소대성전」ㆍ「심청전」ㆍ「설인귀전」 등 전기이다. 月初一日坐第一橋下, 매월 초 첫째 날은 첫째 다리 밑에 앉고, 二日坐第二橋下, 三日坐梨峴, 둘째 날은 둘째 다리..
반찬 중 가장 귀한 음식찬품지중 하물위상(饌品之中 何物爲上) 上試問於諸王子曰: “饌品之中, 何物爲上?” 光海對曰: “鹽也.” 上問其故. 對曰: “調和百味, 非鹽則不成矣.” 『燃藜室記述』 해석上試問於諸王子曰: 선조께서 시험 삼아 여러 왕자들에게 물었다. “饌品之中, 何物爲上?” “반찬의 재료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가?” 光海對曰: “鹽也.” 上問其故. 광해군이 “소금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선조께서 그 까닭을 물었다. 對曰: “調和百味, 非鹽則不成矣.” 『燃藜室記述』광해군이 “온갖 맛을 조화롭게 하는데, 소금이 아니면 맛이 완성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인용지학사120쪽학습지도안
비싼 고기를 가난한 살림에도 모조리 산 이유홍상국서봉지대부인(洪相國瑞鳳之大夫人) 洪相國瑞鳳之大夫人, 家甚貧, 疏食菜羹, 每多空乏. 一日遣婢, 買肉而來, 見肉色似有毒. 問婢曰: “所賣之肉, 有許塊耶?” 乃賣首飾得錢, 使婢盡買其肉, 而埋于墻下, 恐他人之買食生病也. 相國曰: “母氏此心, 可通神明, 子孫必昌.” 『海東續小學』 해석洪相國瑞鳳之大夫人, 家甚貧, 상국 홍서봉의 대부인의 집은 몹시 가난하여 疏食菜羹, 每多空乏. 거친 밥과 나물국조차도 자주 떨어질 때가 많았다. 一日遣婢, 買肉而來, 見肉色似有毒. 하루는 여종을 시켜 고기를 사서 오도록 했는데, 고기색을 보니 상한 것 같았다. 問婢曰: “所賣之肉, 有許塊耶?” 여종에게 “팔던 고기가 몇 덩어리쯤 되더냐?”라고 묻고는, 乃賣首飾得錢, 使婢盡買其肉, 곧 머리..
탐라기생 만덕이 얻은 진신대부의 이별하며 준 시권에 씀제탐라기만덕소득진신대부증별시권(題耽羅妓萬德所得搢紳大夫贈別詩卷) 정약용(丁若鏞) 만덕에 대한 기본정보乙卯耽羅饑, 萬德捐振之. 詢其願, 金剛山也, 有聖旨令如願.丙辰秋, 耽羅妓萬德, 驛至京, 越明年春, 萬德回自金剛, 將還其鄕. 左丞相蔡公爲立小傳, 敍述頗詳, 余不贅. 만덕의 세 가지 기이함과 네 가지 희귀함余論萬德, 有三奇四稀. 妓籍守寡一奇也; 高貲樂施二奇也; 海居樂山, 三奇也. 女而重瞳子, 婢而被驛召, 妓而令僧肩輿, 絶島而受內殿寵錫, 四稀也. 嗟以一眇小女子, 負此三奇四稀, 又一大奇也. 『與猶堂全書』 第一集詩文集第十四卷○文集 해석 만덕에 대한 기본정보 乙卯耽羅饑, 萬德捐振之. 을묘년(1795)에 제주에 기근이 닥쳤고, 만덕은 의연금을 내어 구휼했다. 詢其願,..
제주도민의 기근을 구휼한 김만덕 이야기 만덕전(萬德傳) 채제공(蔡濟恭) 만덕의 파란만장한 어릴 적 이야기 萬德者, 姓金. 耽羅良家女也, 幼失母無所歸依, 托妓女爲生. 稍長, 官府籍萬德名妓案, 萬德雖屈首妓於役. 其自待不以妓也. 年二十餘, 以其情泣訴於官, 官矜之除妓案, 復歸之良. 萬德雖家居乎庸奴, 耽羅丈夫不迎夫. 其才長於殖貨, 能時物之貴賤, 以廢以居. 至數十年, 頗以積著名. 탐라 대기근과 만덕의 활약 聖上十九年乙卯, 耽羅大饑, 民相枕死. 上命船粟往哺, 鯨海八百里, 風檣來往如梭, 猶有未及時者. 於是萬德捐千金貿米, 陸地諸郡縣棹夫以時至, 萬德取十之一, 以活親族, 其餘盡輸之官. 浮黃者聞之, 集官庭如雲. 官劑其緩急, 分與之有差. 男若女出而頌萬德之恩, 咸以爲活我者萬德. 만덕의 이야기, 정조를 감동시키다 賑訖, 牧臣上其事..
집을 팔아 번 불로소득을 돌려준 노극청과 그걸 시주한 현덕수의 이야기노극청전(盧克淸傳) 이규보(李奎報) 予修『明宗實錄』, 立此傳, 有可激貪競, 故附之.盧克淸者, 不知何許人也. 官止散官, 直長同正. 家貧, 將賣宅未售. 而方因事之外郡, 其婦與郞中玄德秀受白銀十二斤賣之. 及克淸還京師, 見其直多剩. 遂持三斤詣德秀曰: “予實賈此宅, 只給九斤耳. 居數年, 無所加修, 而剩得三斤, 非理也, 請還之.”德秀亦義士也. 拒而不納曰: “爾何獨守公理而予不爾也.” 遂不受. 克淸曰: “予平生義不爲非, 豈可賤賈貴賣, 黷于化乎? 設閣下不從, 請盡納其直, 復受吾家也.” 德秀不得已受之, 因謂曰: “予豈不逮克淸者耶” 遂納其銀於佛寺. 聞者莫不嘆息曰: “末俗奔競之時, 亦有如此人者乎” 予恨記事者, 不詳其家世及餘所行而已. 『東國李相國集』 ▲ 고려..
물고기 장수 가수재 이야기가수재전(賈秀才傳) 김려(金鑢) 가수재의 특징과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내역賈秀才者, 不知何許人. 常來往赤城縣淸源寺中, 賣乾魚爲業. 長八尺餘, 辮髮貌甚黑. 人或問其姓, 曰: “我姓天名地, 字玄黃.” 問者絶倒. 強之, 曰: “我賈也, 姓賈也.” 故一寺中皆呼云. 每晨起, 擔乾魚赴遠近. 虛日得銅錢五十, 沽酒飮, 平生未嘗啖飯也. 진흙에 발이 빠졌지만 태연하게 유생 곁에서 잠을 자다寺在縣南僻凈, 縣中諸生, 僦山房讀書. 一日天大雪新霽, 賈足淋漓陷泥濘中. 直上坐諸生間, 諸生怒叱之. 賈睨曰: “爾威過秦始皇, 我賈不及呂不韋, 怕也怕也.” 遂倒卧齁. 諸生益怒, 使僧牽出之, 堅不可扛. 翌日, 聞佛殿上, 有人讀李白「遠別離」詩, 音甚瀏亮. 諸生往視之, 乃賈也. 諸生始恠之, 問“賈能詩乎?” 曰: “能...
당시풍 정리 초당(初唐, 618~712): 건국 ~ 예종(睿宗) 태극(太極) 원년(元年)특징: 당시(唐詩)의 맹아기 성당(盛唐, 713~765) : 현종(顯宗) 개원(開元) ~ 천보(天寶) 말년특징: 시의 격률(格率)이 정형을 이루고 당시를 최고로 올림변새파(邊塞派)최호(崔顥), 왕창령(王昌齡)변방(邊方)의 경치와 전쟁 참상을 비장, 호방하게 묘사. 전원파(田園派)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자연속에서 정신적 해탈 추구.자연파(自然派)이백(李白)대담한 과장, 교묘한 비유, 화려한 수사. 굴원의 뒤를 이어 낭만주의적 전통 발양,열렬한 정감과 강렬한 개성으로 자아 표현의 주관적 색채 강함. 사회파 (社會派)두보(杜甫)인정애민(仁政愛民)의 유가 사상과 전통적 충군 사상, 현실과 사물의 본질을 예술적으로 반영,..
한국한시약사(韓國漢詩略史) 1. 송풍(宋風) 주도의 시기 고려 중엽 ~ 15C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한 송시(宋詩)가 주도함. 15C 소식(蘇軾)을 벗어나 다양한 송시(宋詩) 추구 ※ 안평대군의 『팔가선시(八家詩選)』 당(唐) 송(宋) 이백ㆍ두보ㆍ위응물ㆍ유종원 구양수ㆍ왕안석ㆍ소식ㆍ황정견 15C 후반 강서시파(江西詩派)인 황경견ㆍ진사도(시법 연마 중시)에 관심 가짐 16C 박은ㆍ이행ㆍ박상ㆍ정사룡ㆍ노수신ㆍ황정욱이 강서시 수학 →박은ㆍ이행ㆍ정사룡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 ※ 관각삼걸(館閣三傑): 호소지(湖蘇芝)의 해동강서시풍(험벽한 용사, 까다로운 성률 제한, 기계적인 수사) ※ 수식과 기료를 중시하는 강서시풍을 사림이 비판함: 온유돈후(溫柔敦厚), 외물한적(外物閑寂)의 내면 수양 중시 2. 당풍(唐風) ..
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庸)ㆍ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ㆍ사암(俟菴)ㆍ자하도인(紫霞道人)ㆍ철마산인(鐵馬山人). 여유당(與猶堂)임. 1762년 경기도 양주군 마현리에서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윤두서(尹斗緖)의 손녀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남. 1770년 9세 어머니인 해남윤씨 사망. 1776년 15세 2월 풍산(豐山) 홍화보(洪和輔)의 따님과 결혼함. 부친이 호조좌랑으로 서울에 부임하자,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 등에게 수학함. 1777년 16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학문의 좌표를 정함. 1783년 22세 2월 감시(監試) 경의과(經義科)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4월에 회시(會試) 생원(生員)에 합격하여 성균..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 34)~1609(광해군 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죽피옹(竹皮翁)ㆍ시촌거사(枾村居士)ㆍ종남수옹(終南睡翁), 시호는 문충(文忠)임. 1. 한산 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이자, 이색(李穡)의 7대손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고위 관료. 2.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친지들이 연루되자 보령으로 이주함. 3. 1567년 이조좌랑으로 임명한 기록에는 “이산해는 이색의 후예로, 여섯 살에 능히 대문자(大文字)를 짓고 여러 차례 향시에 장원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천선(天仙)처럼 바라보았으니, 참으로 기사(奇士)이다”라고 적혀 있어 그가 글씨에 있어 자질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음. 4. 1578년엔 대사간으로 서인(西人) 윤두수(尹斗..
안락함을 박차고 떠나간 거위순일이체경 릉공이거(旬日而體輕, 凌空而去) 이익(李瀷) 人有畜野鵝者. 多與煙火之食, 鵝便體重, 不能飛. 後忽不食, 人以爲病. 益與之食而不食. 旬日而體輕, 凌空而去. 翁聞之曰: “智哉! 善自保也.” 『星湖全書』 해석人有畜野鵝者. 사람 중에 야생거위를 기르는 사람이 있었다. 多與煙火之食, 자주 불에 익힌 음식을 주자 鵝便體重, 不能飛. 거위는 곧 체중이 불더니 날지 못하게 됐다. 後忽不食, 人以爲病. 그 후 갑자기 먹질 않으니 사람들은 병 걸렸다고 생각하여 益與之食而不食. 더욱 먹일 주었지만 먹질 않았다. 旬日而體輕, 凌空而去. 열흘 만에 몸이 가벼워지더니, 창공을 날아올라 가버렸다. 翁聞之曰: “智哉! 善自保也.” 『星湖全書』노인이 그 얘기를 듣고 말했다. “지혜롭구나! 잘 스스..
이지李贄(1527~1602) 원래 이름은 재지(載贄), 호는 탁오(卓吾). 1. 복건성 천주 출신으로 조상 중 이슬람 문화와 긴밀하게 교류한 이도 있지만 본인은 전통문화 안에서 성장함. 2. 훗날 주자학과 양명학은 물론 老莊과 선종 등을 두루 섭렵하며 중국 근대 남방문화의 결정체를 이룸. 3. 26세에 급제하여 하급관료 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에 퇴직하였고 40세 전후로 심학(心學)에 몰두했으며 62세엔 정식으로 출가하여 절에 기거함. 4. 유가의 정통사관에 도전하는 책들을 서술하며 유가의 말기적 폐단을 공격하다가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76세에 자살함. 동심설童心說제공자상어지불원題孔子像於芝佛院웃음과 역설비슷한 것은 인용 안내도
진사도陳師道: 1053~1101 자는 무기(無己), 또는 이상(履常). 1. 증공(曾鞏)에게서 문장을 배웠고, 황정견의 시를 으뜸으로 삼았다. 2. 소식 문하의 글 잘하는 여섯 사람으로 불리는 소문육군자(蘇門六君子) 중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3. 『후산집』 30권이 있다. 왕평보문집후서王平甫文集後序진소유자서秦少游字敍 인용 안내도
소식蘇軾(1036~1101) 자(字)는 첨(瞻)이며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1. 애칭(愛稱)은 파공(坡公)·파선(坡仙)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해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2.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3.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4.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다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시문뿐만 아니라, 詞와 글씨의 그림, 음악에도 정통하여, 중국 최고의 예술가, 대문호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제구양공문祭歐陽公文범증론范增論전적벽부前赤壁賦후적벽부後赤壁賦능허대기凌虛臺記이군산방기李君山房記초연대기超然臺記 목가산기木假山記(소순)..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임. 1. 북송(北宋)의 시인ㆍ사학자ㆍ정치가 2. 송대 문학에 고문을 재도입함. 3. 유교원리를 통해 당시 정계를 비판하며 유능한 인재를 적극적으로 추천함. 상범사간서上范司諫書붕당론朋黨論추성부秋聲賦명선부鳴蟬賦증창승부憎蒼蠅賦매성유시집서梅聖兪詩集序설간숙공문집서薛簡肅公文集序풍낙정기豐樂亭記상주주금당기相州晝錦堂記취옹정기醉翁亭記종수론縱囚論 인용 안내도
유종원柳宗元: 773~819 이명은 유하동(柳河東)이고 자는 자후(子厚)이다. 1. 일찍이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혁신단체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후에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내 유유주(柳柳州)라고도 한다. 2.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하여 거의 1,000년 동안 귀족 출신의 문인들에게 애용된 변려문(騈儷文)에서 작가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한유와 함께 당송8대가에 속하여 ‘한(韓)·유(柳)’라고 병칭된다. 3. 「포사자설(捕蛇者說)」·「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영주철로보지(永州鐵爐步誌)」·「삼계(三戒)」·「부판전(蝜蝂傳)」,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연주군부유혈기連州郡復乳穴記비설羆說포사자설捕蛇者說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
백거이白居易(772~846) 자(字)는 락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ㆍ향산거사(香山居士) 1. 당나라 때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남. 2. 민중을 위한 문학과 정치를 지향한 최고의 민중파 시인. 3. 현존하는 작품이 약 2.800여수로, 당나라 시인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 남김. 양죽기養竹記여원구서與元九書백화정百花亭청석靑石 인용 안내도
한유韓愈: 768~824 자는 퇴지(退之). 스스로 군망창려(郡望昌黎)라 부름. 한문공(韓文公) 1. 어려서 고아였으며, 처음 과거에 응시할 때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로 낙방함. 2. 네 번째 시험으로 25세 급제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냄. 3.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일에 간하여 1년 동안 조주(潮州)에 자사로 밀려났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여선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는 등 승승장구함. ㄱ ㄴ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廳壁記남해신묘비南海神廟碑ㄷ답진상서答陳商書대장적여이절동서代張籍與李浙東書ㅁ모영전毛穎傳 ㅂ백이송伯夷頌 ㅅ사설師說상장복야서上張僕射書상재상제이서上宰相第二書상재상제삼서上宰相第三書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송궁문送窮文송육흡주참참시서送陸歙州僭參詩序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
두보杜甫: 712~770 자는 자미(子美). 호북성(湖北省) 양양(襄陽) 사람이나 장안 근처의 두릉(杜陵)에 살았으므로 두릉포의(杜陵布衣) 또는 소릉야노(少陵野老)라고 불림. 1.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사천(四川)의 성도(成都)로 피난 가 절도사인 엄무(嚴武) 밑에서 막료로 근무하면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중앙 정부의 관직을 명예로 받았기 때문에 후세에는 두공부(杜工部)라고도 부른다. 2. 이백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아 이백은 시선(詩仙), 두보는 시성(詩聖)이라 칭해지고 있다. 3.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우국충정이 넘치고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친 사회시를 많이 남겨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고도 한다. 특히 율시를 잘 지어 율성(律聖) 또는 두율(杜律)이라고 ..
이백李白: 701~761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취선옹(醉仙翁) 1. 당(唐)나라 시선(詩仙)으로 불림.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더불어 시의 양대 산맥(山脈)을 이룸. 2. 그의 시는 서정성이 뛰어나 논리성(論理性), 체계성(體系性)보다는 감각(感覺), 직관(直觀)에서 독보적(獨步的)임. 술, 달을 소재(素材)로 많이 썼으며, 낭만적(浪漫的)이고 귀족적(貴族的)인 시풍을 지녔음. 하지장(賀知章)은 이백(李白)을 적선(謫仙)이라고도 하였다. 3.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 30권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월하독작月下獨酌남헌송南軒松자야오가子夜吳歌원별이遠別離산중문답山中問答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행로난行路難전성남戰城南야사夜思야하정로정夜下征虜亭춘야낙성문적春夜洛城聞笛 춘야..
맹호연孟浩然: 689~740 당(唐) 대의 시인. 이름은 호(浩)이며, 자는 호연(浩然), 호(號)는 녹문처사(鹿門處士) 1. 녹문산에 숨어 살며 시 짓는 것을 즐김. 2. 양양(襄陽) 사람으로 절개와 의리를 존중하였고, 이 때문에 맹양양(孟襄陽)으로 불림. 숙업사산방대정대부지宿業師山房待丁大不至하일남정회신대夏日南亭懷辛大세모귀남산歲暮歸南山춘효春曉림동정臨洞庭 인용 안내도
황현黃玹: 1855(철종 6)~191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1. 전라도 광양에서 태어나 뒤에 구례로 이사했으며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함. 2. 31세에 생원이 되었지만 시국을 개탄하고 시골로 돌아와 시대상황을 증언하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저술함 3. 강위ㆍ이건창ㆍ김택영과 함께 한말(韓末) 사대가로 불림. 4. 『매천집(梅泉集)』, 『매천시집(梅泉詩集)』, 『매천야록(梅泉野錄)』 절명시絶命詩신묘춘 압강도중辛卯春 鴨江途中종어요種菸謠이충무공귀선가李忠武公龜船歌발학포 지당산진發鶴浦 至糖山津촌거모춘村居暮春연와설然窩說 한시사 인용 안내도
김택영金澤榮: 1850(철종 1)~1927)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護堂主人). 1. 이건창과 함께 근세 강화 고문학파의 중심인물. 2. 『창강고(滄江稿)』, 『한사계(韓史棨)』 등이 있고, 편서로는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가 있다. 문의병장안보국수사聞義兵將安報國讎事문황매천순신작聞黃梅泉殉信作답장생서答張生書유학경위서儒學經緯序중편연암집서重編燕巖集序장계자시록서張季子詩錄序람폭정기攬瀑亭記방산서요기方山書寮記사양서실기泗陽書室記천왕수하양설天王狩河陽說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전처사행장錢處士行狀수윤당기漱潤堂記김홍연전金弘淵傳잡언雜言여한십가문초서麗韓十家文鈔序남원양공묘갈명南原梁公墓碣銘왕모김숙부인묘지명王母金淑夫人墓誌銘주처황안인묘지명周妻黃安人墓誌銘양진산처사묘갈명梁眞山處士墓..
이건창李建昌: 1852(철종 3)~189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봉조(鳳朝ㆍ鳳澡), 호는 영재(寧齋)ㆍ명미당(明美堂) 1. 가학인 양명학을 계승. 병인양요 때 외국군의 침략에 비분해서 자결했던 이시원(李是遠)의 손자로 강화도에서 태어남. 2. 15세에 문과에 급제함, 충청도 지방의 어사로 나가 부패한 관료들을 숙청함. 3. 제국주의 침략과 거기에 대응한 정부의 태도에 통탄해하며 강화도로 은퇴함. 4. 김택영(金澤榮)과 황현(黃玹)과 문학적 교유를 밀접히 가짐. 5. 『명미당집(明美堂集)』, 『독역수기(讀易隨記)』,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다. 전가추석田家秋夕한구편 병술韓狗篇 丙戌아산과이충무공묘牙山過李忠武公墓협촌기사峽村記事숙광성진宿廣城津연평행延平行즉사卽事홍류동희제紅流洞戲題유수묘지명兪叟墓誌銘송박..
김정희金正喜: 1786(정조 10)~1856(철종 7) 본관은 경주. 자는 추사(秋史)·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1.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냄 2.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됨. 3.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함. 4. 1834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
김매순金邁淳: 1776(영조 52)~1840(헌종 6) 후기 문신.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 1. 2. 『대산집(臺山集)』,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주자대전차목문표보(朱子大全箚目問標補)』, 『궐여산필(闕餘散筆)』,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차군헌기此君軒記답정승지약용서答丁承旨若鏞書삼한의열녀전서三韓義烈女傳序풍서기風棲記논한음백사이공사論漢陰白沙二公事응객應客송두신문送痘神文답사심答士心작치설鵲鴟說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홍석주洪奭周: 1774(영조 50)~1842(헌종 8)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 1. 1795년(정조 1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고, 그 해 춘당대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사옹원직장을 제수받음. 2. 안동김씨 세력의 주변적 신료로서 세도정국에 참여했고 순조가 죽은 후 풍양조씨와 세력을 다투어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일익을 담당했음. 3. 1836년(헌종 2) 남응중의 모반에 연루되어 김로(金路)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가 1839년 복직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름. 4. 고증학에서 의리를 뒤로 미루는 것은 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주자학의 원칙을 지켜야 함을 주장함. 5. 『연천집(淵泉集)』, 『예기집설지의(禮記集說志疑)』, 『학강산필(鶴岡散筆)』..
이양연李亮淵: 1771(영조 47)~1853(철종 4) 자 진숙(晋叔), 호 임연(臨淵) 1.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문학과 학문이 뛰어났음. 촌노부村老婦아막제兒莫啼야설野雪 문학통사미학산책 인용 안내도
김려金鑢: 1766(영조 42)~1822(순조 22) 본관은 연안(延安). 후기 학자.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藫庭). 1766년 김재칠(金載七)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1780년 15세 성균관에 들어감. 1792년 27세 성균관 진사시에 급제. 1797년 32세 11월에 강이천(姜彝天)의 비어옥사(蜚語獄事)에 연루되어 함경도 경원(慶源)에 유배되었지만 배소(配所)에 도착하기 전 왕명으로 다시 부령(富嶺)으로 이배(移配)됨. 12월에 부령에 도착. 『감담일기(坎萏日記)』 저술. 1799년 34세 부친 김재칠 사망. 「정안전(貞雁傳)」을 지음. 이 글로 인해 김종원(金鍾遠)의 옥사가 일어남. 1801년 36세 4월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다시 추국(推鞫)을 받고 진해로 유배됨. 이때 『사유..
이옥李鈺: 1760(영조 36)~1812(순조 12)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ㆍ매사(梅史)ㆍ매암(梅庵)ㆍ경금자(絅錦子)ㆍ화석자(花石子)ㆍ청화외사(靑華外史)ㆍ매화외사(梅花外史)ㆍ도화류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1. 무반의 벼슬을 주로 한 서족(庶族)이다. 2. 성균관 유생 때 지은 글이 순정하지 못한 소품체란 견책을 받고 평생 불우하게 지냄. 3. 조선 후기 문학의 새로움을 대변한 시와 문장으로 높이 평가됨. 4. 그의 글은 『담정총서』에 수록되어 있음. 소비창극래小婢窓隙來조습궁체서早習宮體書낭집목조안郞執木雕雁 심생전沈生傳 이언인 일난俚諺引 一難이언인 이난俚諺引 二難이언인 삼난俚諺引 三難 태학산문선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이서구李書九: 1754(영조 30)~1825(순조 2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1. 10대 때부터 연암에게 수학함. 2. 『과정록』에선 재주가 몹시 빼어난 데다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있어 연암이 매우 사랑했다고 했음. 3. 1774년(영조 50)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ㆍ이조판서ㆍ우의정 등을 지냄. 4. 『척재집(惕齋集)』16권 7책과 『강산초집(薑山初集)』4권 1책이 전함. 만자백운계 부지서강구 소와송음하작晩自白雲溪 復至西岡口 少臥松陰下作산행山行춘일우중소집春日雨中小集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 한시사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정조正租: 1752(영조 28)~1800(정조 24) 조선의 22대 왕으로 호(號)는 홍재(弘齋)다. 1. 1794년에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문풍(文風) 개혁론을 일으킴. 2. 학문적으로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하였음. 3. 예론(禮論)에 있어 ‘임금의 예는 선비와 평민과는 다르다[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해 왕권 우위의 사고를 지님. 4.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實學派)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北學派) 등 여러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풍을 진작시켜 나감. 5. 문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중인(中人), 중심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적으로 지원함. 패관잡기와 소품체에 대해열하일기에 대한 비판패관잡기에 대해 내린 하교동악ㆍ읍취헌ㆍ석주ㆍ눌재ㆍ삼연의 시 평가박은과 박상의 시 평가어제제증정읍취..
박제가朴齊家: 1750(영조 26)~1805(순조 5)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위항도인(葦杭道人). 1.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과 함께 서얼이지만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학자로 평가됨. 2. 1778년 사은사 체제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중국을 다녀와서 실학의 정수를 담은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함. 3. 문학적 재능이 있었지만 서얼 출신인 까닭에 등용되지 못함. 4. 정조 3년(1779) 규장각 검서관이 됨. 5. 저서로는 『북학의(北學議)』·『정유집(貞蕤集)』·『정유시고(貞蕤詩稿)』·『명농초고(明農草藁)』 선연동嬋娟洞수주객사愁洲客詞효좌서회曉坐書懷춘사春詞성시전도응城市全圖應하연암작율시賀燕岩作律詩월뢰잡절月瀨襍絶등백운대..
유득공柳得恭: 1748(영조 24)~1807(순조 7) 본관은 문화(文化). 후기 실학자.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 호는 냉재(泠齋)ㆍ냉암(泠庵)ㆍ고운당(古芸堂)ㆍ고운거사(古芸居士). 1.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수학함.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가(四家)’로 호칭됨. 2. 서족(庶族) 출신임에도 정조의 배려로 규장각 검서(檢書)의 직책을 맡음. 3. 『냉재집(泠齋集)』,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 『경도잡지(京都雜誌)』, 『앙엽기(盎葉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발해고서渤海考序 송경잡절松京雜絶서경잡절西京雜絶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운암파왜도가雲巖破倭圖歌관어觀魚제중성주인벽상題中城主人壁上세모음歲暮吟남강요南江謠한시사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이덕무李德懋: 1741(영조 17)~1793(정조 17) 후기 실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신천옹(信天翁). 1. 서얼 신분으로 크게 뜻을 펼칠 수 없었지만 학문과 시에 뛰어남. 2. 규장각 검서관으로 정조를 보필하여 많은 책의 편찬에 관여했고, 18세기 감각적인 시풍을 주도함. 3. 홍대용ㆍ박지원ㆍ박제가ㆍ유득공과 함께 북학의 학풍의 정립. 4. 저서로는 『관독일기(觀讀日記)』·『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영처시고(嬰處詩稿)』·『영처문고(嬰處文稿)』·『예기고(禮記考)』·『편찬잡고(編纂雜稿)』·『기년아람(紀年兒覽)』·『사소절(士小節)』·『청비록(淸脾錄)』·『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앙엽기(盎葉記)』·『입연..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실학자ㆍ문인.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호는 연암(燕巖)ㆍ열상외사(洌上外史). 1737년 서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 장인 이보천(李輔天)의 아우인 이양천(李亮天)에게서 『사기(史記)』를 시작으로 역사서적을 통해 문장 쓰는 법을 습득함. 1752년 16세 전주 이씨 보천(輔天)의 딸과 결혼. 1754년 18세 10대 후반에 우울증에 시달려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子傳)」을 지었다. 지음. 1757년 21세 「민옹전(閔翁傳)」 지음. 1759년 23세 모친 함평 이씨 별세. 1760년 24세 조부 박필균(朴弼均) 별세로 생활이 곤궁해짐. 1765년 29세 시 「총석..
이규상李圭象: 1727(영조 3)~1799(정조 23) 자(字)는 상지(像之), 호(號)는 유유재(悠悠齋)ㆍ일몽(一夢) 1. 쉰 살에 부인을 잃고 곤궁하게 오직 시와 문에 마음을 붙이면서 살았음. 2.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으로 조선 후기 문학사를 증언하며 주목을 받았지만, 이규상은 스스로를 ‘시인’으로 여김. 홍세태와 이병연이 자타가 공인하는 시인이었고, 이규상 역시 시인이었다. 3. 시의 성과는 조선적인 당풍(이종묵 교수가 만든 말)이었음.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는 듯한 흥감이 있음. 전가행田家行촌요村謠인주요仁州謠 우리 한시백악시단 인용 안내도
신광수申光洙: 1712(숙종38)~1775(영조 15)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ㆍ오악산인(五嶽山人). 1. 체제공, 이헌경 등과 함께 남인을 대표하는 문인임. 2. 충청도 한산에서 태어나 유명한 화가인 윤두서(尹斗緖)의 사위가 됨. 3. 과시(科詩)에 능했으며, 제주에 40여 일간 머물며 『탐라록(耽羅錄)』을 짓기도 함. 4. 38세에 진사급제, 53세에 음직으로 의금부도사가 되어 제주에 다녀왔으며 61세에 고령자에게 보이는 과거에 합격하여 승지 벼슬을 지냄. 5. 『석북집(石北集)』, 『석북과시집(石北科詩集)』 조천구사석응지朝天舊事石應知양피배자압신경羊皮褙子壓身輕협구소견峽口所見채신행採薪行동대東臺납월구일행臘月九日行숙미륵당宿彌勒堂잠녀가潛女歌제주걸자가濟州乞者歌송권국진가送權國珍..
이용휴李用休: 1708(숙종 34)~1782(정조 6) 자는 경명(景命), 호는 혜환재(惠寰齋) 방산가訪山家전가田家송신사군지임연천送申使君之任漣川송김탁경조윤지임문주送金擢卿朝潤之任文州이우상만李虞裳挽송정사군지임연강送鄭使君之任淵康송홍광국 영공지임서하送洪光國 令公之任西河 증정재중贈鄭在中차거기此居記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익李瀷: 1681(숙종 7)~1763(영조 39)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1.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을 대성함. 2. 항상 세무실용(世務實用)의 학문에 주력함. 3. 당시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사색과 연구를 거듭함. 4.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에 영향을 끼침. 백언해발百諺解跋선희학善戱謔예양론豫讓論향악鄕樂육두六蠹전론錢論고금문장古今文章빈소선생전顰笑先生傳팔방풍八方風 해거방축海居防築 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이병연李秉淵: 1671(현종12)~1751(영조27)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일원(一源), 호는 사천(槎川) 1. 백악 아래 세거하면서 가까운 곳에 살던 김창흡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같은 동네에 살던 정선과도 친했음. 2. 금강산을 소재로 한 시가 뛰어나 이병연의 시와 정선의 그림을 나란히 보면 금강산 여행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할 정도임. 3. 문인 김익겸(金益兼)이 그의 시집을 가지고 중국에 갔을 때 강남의 문사들이 명나라 이후의 시와 비교할 수 없다고 극찬한 바도 있음. 4. 김창흡과 함께 조선 후기 새로운 시풍을 개척함. 5.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져 아이들까지도 ‘이삼척시(李三陟詩)’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는데 그가 음직으로 삼척부사를 지냈기에 붙여진 것이다. 6. 시창작을 풍부하게 하여 무려 1..
홍세태洪世泰: 1653(효종 4)~1725(영조 1)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ㆍ유하(柳下). 1. 무관집안으로 역과에 응시하여 통역하는 일을 맡은 이문학관(吏文學官)의 벼슬을 지냄. 2. 양반이 아니어서 신분의 제약이 있었지만, 시로 일세를 풍미했고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의 시를 보고자 했을 때 최석정(崔錫鼎)이 숙종에게 그의 시를 추천함. 3. 김창협(金昌協) 같은 사대부 문인에게 “그대는 입에서 나오면 곧 문장을 이루는 구나”라는 칭찬을 받음. 4. 『유하집(柳下集)』이 있고, 편서로는 『해동유주(海東遺珠)』가 있다. 설초시집서雪蕉詩集序해동유주서海東遺珠序대간待姦 이숙장만李叔章挽문안聞雁염곡칠가鹽谷七歌철거우행鐵車牛行지상만흥 계유池上漫興 癸酉만흥漫興눈죽嫩竹만월대가滿月臺歌문학..
김창흡金昌翕: 1653(효종 4)~1722(경종 2) 본관은 안동(安東). 후기 학자.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1.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의 아들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지만 한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음. 2. 형제들과는 달리 당쟁의 과정에서 희생 당한 부친의 영향으로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고 산림처사로 살며 시를 지음. 3. 정약용은 『산행일기(山行日記)』에서 김창흡의 초상화를 보고 온화하면서도 단정하고 엄숙하며 복건에 띠를 두르고 산림처사의 기상이 있다고 함. 4.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삼연 김창흡의 시는 예스러움에 가까워 이러한 격조가 아님이 없어 비록 중국의 명문장가와 섞어놓아도, 생각건대 혹 부끄러울 게 없다. 그러나 오히려 동악 이안눌과 읍취헌 ..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1708(숙종 3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1. 김상헌의 증손이며 김수항의 아들. 이단상의 사위. 송시열을 종학하여 학문을 강론함. 2.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함. 3.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함. 4. 저서로는 『농암집(農巖集)』·『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論語詳說)』·『오자수언(五子粹言)』·『이가시선(二家詩選)』 등이 있고, 편저로는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홍만종洪萬宗: 1637(인조 15)∼1688(숙종 14) 자는 우해(宇海), 호는 현묵자(玄默子)·몽헌(夢軒)·장주(長洲). 1. 문재(文才)가 있었기에 벼슬을 버리고 학문과 문장에 뜻을 두어 역사·지리·설화·가요·시 등의 저술. 2. 『해동이적(海東異蹟)』·『소화시평(小華詩評)』·『순오지(旬五志)』·『시평보유(詩評補遺)』·『동국역대총목』·『증보역대총목』·『시화총림(詩話叢林)』·『동국악보(東國樂譜)』·『명엽지해(蓂葉志諧)』·『동국지지략(東國地志略)』 순오지자서旬五志自序명엽지해蓂葉志諧소화시평小華詩評시화총림詩話叢林채련곡採蓮曲차동주관어대운次東州觀魚臺韻서회書懷(홍주세)견창송근입수중見蒼松根入水中(홍만식)월야문비파月夜聞琵琶(홍석기) 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김만중金萬重: 1637(인조 15)~1692(숙종 18)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1637년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인데, 부친 익겸(益兼)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해 죽은 뒤 2월 10일 강화(江華)에서 서울로 가던 중 나루의 배 안에서 태어남. 1639년 3세 모부인 윤씨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함. 1650년 14세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함. 1652년 16세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시로 다시 합격함. 연안 이씨와 결혼. 1656년 20세 별시(別試)의 초시(初試)에 부(賦)로 합격함. 1662년 26세 증광(增廣) 초시(初試)에 표(表)로 합격. 1665년 29세 정시(庭試)에 장원급제.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ㆍ예조좌랑(禮曹佐郞)에 차례로 ..
김석주金錫冑: 1634(인조 12)~1684(숙종 10) 후기 학자.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1. 김육의 손자. 2. 『식암집(息庵集)』, 『해동사부(海東辭賦)』 기문홍조백寄問洪朝伯 고문백선서古文百選序곽장군전郭將軍傳해동사부서海東辭賦序 문학통사 인용 안내도
송익필宋翼弼: 1534(중종 29)~1599(선조 32) 중기 성리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귀봉(龜峰). 시호는 문경(文敬)임. 1. 신사무옥(辛巳誣獄)을 일으킨 송사련(宋祀連)의 아들. 송한필의 형 2. 신분이 서얼이며 아버지의 죄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없어 이이(李珥)ㆍ성혼(成渾)과 교유함. 3. 무이시단(武夷詩壇)을 주도하여 당대 8문장의 한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림. 4. 1586년에 동인(東人)들의 미움이 그에게 향했고 동인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는 환천(還賤)시켜 줄 것을 제소했으며 그의 형제를 비롯한 일족 70여 인이 환천됨. 5. 이후에 김장생ㆍ정철(鄭澈)ㆍ이산해(李山海)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지냄. 6. 이름을 바꿔 황해도에 이거하며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 후기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시호는 문정(文正). 1. 김장생과 김집의 문인으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 2.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함. 3.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함. 4. 이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서술하여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함으로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됨. 5. 1658년 7월 효종의..
김득신金得臣: 1604(선조 37)~1684(숙종 1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 1.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임. 2. 아둔한 편으로 「백이전(伯夷傳)」을 1억 번이나 읽었고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란 이름으로 지음. 3. 시가 문집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시 재능이 뛰어났고 『종남총지(終南叢志)』와 같은 시화집을 엮을 정도로 안목도 갖춰졌음. 4. 『백곡집』 용호 / 용산龍湖/ 龍山소상야우瀟湘夜雨전가田家귀정문적龜亭聞笛시벽詩癖마상음馬上吟독수기讀數記증귀곡시서贈龜谷詩序와설猧說의설醫說한시사 연구한시사 인용 안내도
정두경鄭斗卿: 1597(선조 30)∼1673(현종 14)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1. 복고파로 문(文)은 서한(西漢), 시(詩)는 성당(盛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함. 2.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추증하였다. 3.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 26권이 있다. 송북평사 홍주국 겸기절도사춘장영공送北評事 洪柱國 兼寄節度使春長令公등마천령登磨千嶺단군사檀君祠기자사箕子祠휴용만이부윤등통군정携龍灣李府尹登統軍亭송풍악오산인겸기이통천국이送楓岳悟山人兼寄李通川國耳등능한음주登凌漢飮酒등능한산성登凌漢山城새상곡塞上曲백구白鷗숙봉은사宿奉恩寺 복고파를 배워라신니옹시서申泥翁詩序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장유張維: 1587(선조 20)∼1638(인조 16) 중기 학자.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默所). 1.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 2. 문장에 뛰어나 신흠ㆍᆞ이정구ㆍ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인 월상계택(月象谿澤) 4대가로 꼽힘. 3. 그는 양명학을 선학이라고 비의(非議)함을 변박하였으며, 천문·지리·의술·병서·그림·글씨에 능통했음. 4. 우암 송시열은 장유에 대해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평가함. 5.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 석주집서石洲集序시능궁인변詩能窮人辯회맹후반교석물사연양공신사전會盟後頒敎錫物賜宴兩功臣謝箋필설筆說현헌선생집서玄軒先生集序월사집서月沙集序백사선..
이식李植: 선조 17년(1584)~인조 25년(1647) 중기 학자.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ㆍ남궁외사(南宮外史)ㆍ택구거사(澤癯居士). 1.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 4대가 월상계택(월사ㆍ상촌ㆍ계곡ㆍ택당)의 한 사람으로 꼽힘. 2. 『선조실록』의 수정을 맡았다. 3. 정조는 『홍재전서』에 “『용재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론 택당 이식의 문장이 있다. 그러나 체격과 운치에 있어선 이행이 택당보다 낫다[『容齋集』, 予所最好, 繼此而有澤堂文章. 然體格韻致, 容勝於澤].”라고 썼다. 4. 『택당집(澤堂集)』이 있고 편서로는 『야사초본(野史初本)』, 『두시비해(杜詩批解)』,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권주부만사權主簿挽詞..
이안눌李安訥: 1571(선조 4)~1637(인조 15) 본관은 덕수(德水). 중기 문인.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이행(李荇)이 증조부, 이식(李植)의 종손(從孫). 1.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하며 과거를 보려 했으나 동료들의 모함으로 문학에 열중. 이때 권필, 윤근수, 이호민 등과 동악시단(東岳詩壇) 모임을 함. 1599년 급제하여 여러 지방에 부사로 근무함. 2. 주청부사로 명나라에서 정원군의 추존을 허락 받아 원종의 시호를 받아옴. 3. 일구일자(一句一字)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며, 두보(杜甫)를 만독(萬讀)했다고 함. 그가 옮겨 다닌 지방의 민중생활사와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음. 기세가 강하고 전고를 많이 사용한다고 함. 4.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동악 이안눌의 시는 갑..
권필權韠:1569(선조 2)~1612(광해군 4) 본관은 안동(安東). 중기 문인.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임. 1. 전형적인 문인 집안임. 9대조 권보(權溥)이고 6대 권근(權近)이며 부친은 권벽(權擘)임. 2. 이안눌과 함께 정철의 문하에서 수학함. 시재가 뛰어나 제술관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뜻을 거슬러, 과거에 합격했다가 취소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해, 처남 유희분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함. 3. 이 때문에 광해군의 분노를 사서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귀향 가던 도중 동대문 바깥에서 술을 마시다 객사함. 4.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석주 권필의 시는 비록 웅혼함은 모자라지만 하나의 맛은 매끈하고 아름다우며, 이따금 놀라게 하여 깨우쳐주는 곳이 있다. ..
허균許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중기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ㆍ학산(鶴山)ㆍ성소(惺所)ㆍ백월거사(白月居士). 성(筬)ㆍ봉(篈)ㆍ난설헌의 아우이다. 1569년 서울 건천동에서 허엽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김광철의 딸로서 허엽의 후처인 김씨이다. 1580년 12세 본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략을 읽음. 1585년 17세 도사를 지낸 김대섭의 둘째딸 김씨를 맞아 장가를 듦. 1588년 20세 둘째 형 허봉(許篈)이 금강산에서 죽음. 1591년 23세 누이인 난설헌이 죽음. 『난설헌집(蘭雪軒集)』을 편찬함. 1592년 24세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함. 어머니와 부인 김씨와 함께 단천으로 감. 부인은 피란길에 죽었고 장자도 뒤따라 죽음..
신흠申欽: 1566(명종 21)~1628(인조 6)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1. 처부인 이제신(李濟臣)에게 수학함. 2. 선조가 총애함. 임진왜란 때 외교문서를 잘 써서 인정받았으며, 선조의 딸과 자신의 아들이 결혼하여 승승장구함. 3. 광해군에 의해 축출됐고 인조 때 복귀했으나 곧 지병으로 사망함. 4. 『상촌집(象村集)』 민심편民心篇재용편財用篇거폐편去蔽篇현옹자찬 병서玄翁自贊 幷序광한루기廣寒樓記현옹설玄翁說신흠이 서화담을 평하다당시와 송시 고루 공부하라야언野言 병음病吟만우晩雨용만객영龍灣客詠송지봉부홍주送芝峯赴洪州갑인춘 차월사甲寅春 次月沙수기유술睡起有述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정구李廷龜: 1564(명종 19)~1635(인조 13) 중기 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ㆍ보만당(保晩堂)ㆍ응암(凝庵). 1. 윤근수의 문하에서 수학함. 2.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키자, 「무술변무주(戊戌辯誣奏)」를 지어 정응태를 파직시킴. 3. 장유(張維)ㆍ이식(李植)ㆍ신흠(申欽)과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불림. 4. 이정구는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을 중심으로 집권층의 순정문학(醇正文學)을 대변하며, 선린외교(善隣外交)의 문학에 있어 재능을 십분 발휘함. 5. 『월사집(月沙集)』, 『대학강어(大學講語)』 석주집서石洲集序습재집서習齋集序황화집서皇華集序애한정기愛閑亭記지..
중국한시 ㄱ 尋隱者不遇(가도)度桑乾(가도)早朝大明宮呈兩省僚友(가지) ㄴ 蜂(나은) ㄷ 飮酒(도연명)雜詩(도연명)詠貧士(도연명)歸園田居(도연명)移居(도연명) 淸明(두목)贈別(두목)月(두목)秋夕(두목)山行(두목)泊秦淮(두목)宿欒城驛卻寄常山張書記(두순학)秋宿山館(두순학)二月見梅(당경) ㅁ 碧紗窓下啓緘封(무명)對花吟(무명)悟道詩(무명)詩癖(매요신)晩秋寄賈島(무가상인)夜感自遣(맹교) ㅂ 怨歌行(반첩여) ㅅ 遠浦歸帆(심덕잠)田家詩(섭이중) ㅇ 酬柳郎中春日歸楊州南國見別之作(위응물)金陵懷古(유우석)金陵懷古(유우석)送元二使安西(왕유)書事(왕유)山居秋暝(왕유)辛夷塢(왕유)明妃曲(왕안석)泊船瓜洲(왕안석)石耳(범조우)雨夜呈長官(이군옥)渡漢江(이빈)憫農(이신)行宮(원진)賈生(이상은)無題(이상은)詠雁(위승경)江樓(위승경)題天華院..
이수광李晬光: 1563(명종 18)~1628(인조 6) 중기 실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1. 정종의 7세손. 2. 1597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서울에서 중극전(中極殿)과 건극전(建極殿) 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진위사(陳慰使)로서 명나라를 다녀옴. 3. 1605년 조정 관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 해 병으로 사직하고 환향함. 4. 1607년 겨울 홍주목사로 부임했고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유구(琉球) 사신과 섬라(暹羅: 타이)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함. 5. 1619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다가,..
유몽인柳夢寅: 1559(명종 14)~1623(인조 1) 중기 문신.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ㆍ간재(艮齋)ㆍ묵호자(默好子). 1.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 수학했지만 경박하다는 이유로 쫓겨났기에 성혼과 관계는 나빠짐. 2. 한성부좌윤ㆍ대사간 등을 지냈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에 은거함. 3. 1623년 인조반정 때 연루되진 않았지만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생활을 하였음. 4. 『어우집(於于集)』, 『어우야담(於于野談)』 보창주도사차만리서報滄洲道士車萬里書빗소리 같은 낙엽 지는 소리증표훈사승혜묵서贈表訓寺僧慧默序봉월사서奉月沙書무진정기無盡亭記어우야담於于野談 가평산중 / 청평사유별연숙 입금강산加平山中 / 淸平寺留別淵叔 入金剛山이천 / 양양도중伊川 / 襄陽途中열서질견두어..
차천로車天輅: 1556(명종 11)~1615(광해군 7)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 1.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 세인들이 시에 능하여 한호의 글씨, 최립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이라고 칭송하고 또 아버지 차식(車軾), 아우 차운로(車雲輅)와 함께 삼소라고 불렸다. 2. 저서로 『오산집(五山集)』·『오산설림(五山說林)』, 작품으로 「강촌별곡(江村別曲)」 위병조가낭청 희제기성벽상爲兵曹假郎廳 戱題騎省壁上간성영월루杆城詠月樓영고안詠孤雁송이제독送李提督봉황대鳳凰臺강야江夜우음偶吟 죽서루竹西樓(차운로)산행즉사山行卽事(차운로) 시능궁인변詩能窮人辯 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1.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오성과 한음’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임. 2.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람. 3.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됨. 4. 1617년 인목대비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 경운궁으로 곧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
허봉許篈: 1551(명종 6)~1588(선조 21) 중기 문인.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 1. 유희춘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허균의 형이다. 2. 『하곡집(荷谷集)』, 『하곡수어(荷谷粹語)』 등이 있고, 편서로는 『해동야언(海東野言)』, 『이산잡술(伊山雜述)』 등이 있다. 정포성루井浦城樓란하灤河문학통사한시사 인용 안내도
임제林悌: 1549(명종 4)~1587(선조 20) 본관은 나주(羅州). 중기 문신ㆍ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ㆍ풍강(楓江)ㆍ소치(嘯癡)ㆍ벽산(碧山)ㆍ겸재(謙齋)임. 1549년 11월 20일 나주 회진(會津)의 향제(鄕第)에서 후일 절도사와 훈련원 판관을 지낸 부친 임진(林晋)과 모부인 남원 윤씨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1562년 14세 경주김씨 만균의 딸과 결혼 1568년 20세 자유분방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처음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공부도 하였지만 이후 몇 차례 낙방함. 1570년 22세 이 해 가을 대곡선생 성운(成運)의 문하를 찾아감. 1571년 23세 모친상을 당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함. 1573년 25세 겨울에 성운(成運)이 은거하는 속리산으로 다시 ..
최립崔岦: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중기 학자ㆍ문신.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ㆍ동고(東皐). 1.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나 1555(명종 10)년에 17세로 진사가 됐고 1559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함. 2. 1594년(선조 27년) 8월에는 주청사의 부사로 세자책봉과 명나라 군대 출진을 요구하러 주청사 정사인 윤근수와 함께 부사가 되어 명나라로 감. 3. 『간이집(簡易集)』,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이 있다. 십월우 / 십월망후우十月雨 / 十月望後雨조천 / 차태운통록朝天 / 次台韻通錄차문수승권운次文殊僧卷韻십칠조十七朝영희권운靈熙卷韻 용천 복몽태장하수 龍川 伏蒙台章下酬차이문순정중월운次李文順井中月韻삼일포三日浦삼월삼일 등망경루 요양성三月三..
이달李達: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중기 문인.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1. 이첨의 후손이고 박순의 문하에서 수학. 삼당시인의 한 사람. 2. 모친이 홍기의 관기여서 서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냄. 3.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자신이 이달의 제자라 함. 4.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선 “최경창의 시는 사납고 굳세며 백광훈의 시는 고담하다. 모두 당풍의 노선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또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달은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崔詩悍勁, 白詩枯淡, 俱不失李唐跬逕, 誠亦千年希調也. 李益之較大. 故苞崔孕白而自..
최경창崔慶昌: 1539(중종 34)~1583(선조 16) 본관은 해주(海州). 중기 시인.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 1. 일찍이 박순(朴淳)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뒤에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도 수학함. 2.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ㆍ종성부사의 관직을 역임함. 3. 백광훈과 이달과 함께 ‘최백이(崔ㆍ白ㆍ李)’ ‘삼당(三唐) 시인’이란 칭호로 불림. 4.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선 “최경창의 시는 사납고 굳세며 백광훈의 시는 고담하다. 모두 당풍의 노선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또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달은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崔詩悍勁, 白詩枯淡, 俱不失李唐跬逕, 誠亦千年希調也. 李益之較大. 故苞崔孕白而自成..
백광훈白光勳: 1537(중종 32)~1582(선조 15) 중기 시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본관은 해미(海美). 1. 최경창과 함께 박순(朴淳)에게 시를 배워, 16세기 후반 당시풍이 호남에 크게 떨치게 함. 2. 글씨에도 능하여 그 아들 백진남(白振南)과 함께 명성이 높음. 3. 이달(李達)과 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최백이(崔ㆍ白ㆍ李)’ ‘삼당(三唐) 시인’이란 칭호로 불림. 4.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선 “최경창의 시는 사납고 굳세며 백광훈의 시는 고담하다. 모두 당풍의 노선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또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달은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崔詩悍勁, 白詩枯淡, 俱不失李唐跬逕, 誠亦千年希調也..
정철鄭澈: 1536(중종 31)~1593(선조 26) 중기 문인ㆍ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임. 1536년 서울 장의동에서 영일 정씨 정유침(鄭惟沈)의 4남3녀 중 막내로 출생. 세자의 양제로 있던 맏누이의 귀여움을 받으며 궁중에서 놀며 자라남. 1545년 10세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가문이 다 피해를 입음. 아버지를 따라 남북의 유배지를 전전함. 1551년 16세 전라도 창평의 성산(星山) 자락에 정착함. 이곳에서 10년 동안을 생활하며 김인후, 기대승, 임억령 등에게 배움. 1561년 26세 진사시(進士試) 일등을 함. 1562년 27세 문과(文科) 장원함. 성균관 전적(典籍) 등을 역임함. 1563년 28세 가사 「성산별곡」을 지은..
이이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중기 성리학자. 덕수(德水,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 덕수리),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시호는 문성(文成) 1. 어려서 모친에게 학문을 배움. 8살에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에 올라 지은 시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음. 2. 9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림. 3. 이이는 사회체제와 신분질서를 다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되돌리되 점진적인 제도 개혁으로 질서의 안정을 도모하려 함. 4. 이이의 사상은 17세기 서인 노론(老論)계에 계승됨. 5. 『율곡집(栗谷集)』,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동호문답(東湖問答)』 풍악증소암노승 병서楓嶽贈小菴老僧 幷序정언묘선서精言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