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글쓰기와 병법 - 8. 모범답안을 맹종치 말고 글의 결을 파악하라 본문

책/한문(漢文)

글쓰기와 병법 - 8. 모범답안을 맹종치 말고 글의 결을 파악하라

건방진방랑자 2020. 4. 2. 11:34
728x90
반응형

8. 모범답안을 맹종치 말고 글의 결을 파악하라

 

 

나의 벗 이중존李仲存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軆를 모아 엮어 열 권으로 만들고, 이를 이름하여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하였다. 아아! 이것은 모두 승리를 얻은 군대요 백 번 싸워 이긴 나머지이다. 비록 그 체재와 격조가 같지 않고, 좋고 나쁨이 뒤 섞여 있지만 제각금 이길 승산이 있어, 쳐서 이기지 못할 굳센 성이 없고, 그 날카로운 칼끝과 예리한 날은 삼엄하기가 마치 무고武庫와 같아, 때를 따라 적을 제압하여 움직임이 군대의 기미에 맞으니, 이를 이어 글 하는 자가 이 방법을 따른다면, 정원定遠의 비식飛食[각주:1]과 연연산燕然山에 공을 적어 새기는 것[각주:2]이 그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방관房琯의 수레 싸움은 앞 사람을 본받았어도 패하고 말았고[각주:3], 우후虞詡가 부뚜막을 늘인 것은 옛 법을 반대로 하였지만 이겼으니[각주:4],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友人李仲存, 集東人古今科軆, 彙爲十卷, 名之曰騷壇赤幟. 嗚呼! 此皆得勝之兵, 而百戰之餘也. 雖其軆格不同, 精粗雜進, 而各有勝籌, 攻無堅城. 其銛鋒利刃, 森如武庫, 趨時制敵, 動合兵機. 繼此而爲文者, 率此道也, 定遠之飛食, 燕然之勒銘, 其在是歟, 其在是歟! 雖然房琯之車戰, 效跡於前人而敗, 虞詡之增竈, 反機於古法而勝, 則所以合變之權, 其又在時, 而不在法也.

소단적치란 책은 과거에 이미 급제한 모범답안만 모아 엮은 것이다. 말하자면 득승지병得勝之兵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기 실린 글을 모범으로 삼아 열심히 익힌다면 글쓰기의 요령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합변지권合變之權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황에 달린 문제이지, 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상황은 언제나 고정됨 없이 변화한다. 설사 같은 주제를 다룬 문제가 나왔다 하더라도 예전 답안지 그대로를 가지고는 급제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관은 옛날의 법을 그대로 따랐는데 싸움에서 졌고, 우후는 옛날의 법과 반대로 했는데 전쟁에서 이겼다. 한신은 병법과 반대로 배수진을 쳤지만 이겼고, 임진왜란 때 신립은 한신을 따라 배수진을 쳤건만 무참하게 패배하였다. 왜 그랬을까? 요령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범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과거를 옳게 배우려거든 과거를 맹종치 말라. 새 것을 쓰고 싶거든 옛 것에서 배워라.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지역이 다를진대, 그러한 차이가 빚어내는 미묘한 변화의 을 읽어, 가장 적절한 새 길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소단적치인에서 연암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과정록 4

기출문제 정리를 마치며

1. 모범답안을 모아 합격집을 만들다

2.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

3.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

4.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

5. 글이 좋지 않은 건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6. 글쓰기에 상황만 있을 뿐 정해진 법칙은 없다

7. 주제를 뚜렷하게 세우고 글을 쓰라

8. 모범답안을 맹종치 말고 글의 결을 파악하라

  1. 후한 사람 반초班超가 젊은 시절 관상을 보러 갔더니, “그대는 제비턱에 범의 목으로 날아서 고기를 먹을’(飛而食肉) 상이니, 만리후萬里侯에 봉해질 사람”이라고 말한데서 나온 말. 뒤에 그는 서역 50여 나라를 항복시켜 조공을 바치게 하는 공을 세우고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후한서』 권 47, 「반초열전」 참조. 여기서는 용맹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움을 두고 한 말. [본문으로]
  2. 후한 효화황제孝和皇帝 때 두헌竇憲과 경병耿秉이 흉노 북선우北單于를 크게 물리치고, 국경에서 3천리 떨어진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반고班固에게 명銘을 짓게 하여, 돌에 한나라의 위덕威德을 새겨 놓고 돌아온 고사에서 나온 말. 『후한서』 권 23 참조. [본문으로]
  3. 당나라 숙종 때 방관房琯이 적당賊黨 진도사陳濤斜의 토벌을 자청하여 가서, 춘추시대의 전법戰法대로 수레 이천 승으로 병영을 에워싸게 하고 기병과 보병을 그 사이에 있게 하였는데, 적이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4만의 군사를 모두 죽여 대패하였다. 춘추 적의 옛 전범에 따라 했으나, 변화할 줄 몰랐던 까닭에 진 것이다. [본문으로]
  4. 제나라 손빈孫臏이 위나라 방연龐涓을 칠 때, 부뚜막 숫자를 줄여 적을 방심케하여 이겼는데, 후한 때 우후虞詡는 강인羌人을 치면서 반대로 부뚜막 숫자를 날마다 배로 늘여서 크게 이겼다. 어떤 이가 왜 손빈은 부뚜막을 줄였는데 그대는 늘였는가? 하고 묻자, 그는 “오랑캐는 무리가 많고, 우리 군대는 적다. 천천히 행군하면 미치는 바가 되기 쉽고, 빨리 전진하면 저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바가 될 것이다. 오랑캐가 우리의 부뚜막 숫자가 날마다 늘어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우리 군대가 와서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무리가 많은데도 행군이 신속하므로 반드시 우리를 추격하기를 꺼릴 것이다. 손빈은 약함으로 보여주었지만 나는 이제 강함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형세가 같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후한서』 권 58, 「우후열전」 참조. [본문으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