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103. 맹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03. 맹

건방진방랑자 2020. 4. 18. 05:28
728x90
반응형

103.

 

 

맹가(孟嘉)

() 나라 때 사람으로 재주와 풍류가 뛰어났는데, 일찍이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으로 있을 때, 99일에 환온이 용산(龍山)에 잔치를 열어 막료들이 다 모여 즐겁게 노닐 적에 바람이 불어 맹가의 모자가 날아갔는데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므로, 환온이 손성(孫盛)을 시켜 글을 지어서 그를 조롱하게 하였던 바, 맹가가 즉시 훌륭한 문장으로 답변을 하여 멋진 풍류를 발휘했었다. 진서(晉書)卷九十八

 

맹가(孟嘉)

()나라 강하(江夏) 사람으로 자는 만년(萬年)인데, 젊었을 때 재명(才名)이 있어 태위(太尉) 유량(庾亮)이 강주(江州)를 다스릴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나중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이 되어 남다른 풍류와 문장으로 그의 사랑을 받았다. 진서(晉書)卷九十八 맹가전(孟嘉傳)

 

맹가린(孟家隣)

맹자(孟子)의 교육을 위하여 그 어머니가 좋은 이웃을 찾아 세 번 집을 옮긴 것[三遷之敎]을 이른다.

 

맹가표검(盟柯摽劒)

예전 춘추 때에 제()나라와 노()나라가 서로 이웃하여 여러 번 전쟁을 했는데 항상 노나라가 졌다. 그 때 노나라 장수 조말(曺沫)이란 사람도 세 번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그 원한을 풀 기회를 기다리다가 제나라의 임금과 노나라의 임금이 강화하기 위하여 가()라는 땅에서 회합할 때에 조말이 노나라 임금을 모시고, 그 강화 장소에 가서 제나라 임금을 만나 직접 칼을 들이대고 몇 번 전쟁에 빼앗아간 땅을 도로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맹견명(孟堅銘)

맹견은 후한 때의 문장가인 반고(班固)의 자인데, 일찍이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나가서 선우(單于)를 크게 격파하고 마침내 연연산(燕然山)에 올랐을 때 반고가 그를 따라갔다가 연연산명(燕然山銘)을 지어 공()을 새겼던 데서 온 말이다.

 

맹견사(孟堅辭)

맹견은 후한 때의 사관(史官)이었던 반고(班固)의 자()이다. 후한의 수도 동경에 대한 동도부를 지어 풍물의 변천을 읊었다. 후한서(後漢書)』 「반고열전(班固列傳)

 

맹견위지본심념(孟堅爲志本心拈)

맹견은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의 자이다.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에는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하였으며, 한서(漢書)에는 기자가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왔다.”하였는데 기자는 은 나라의 종친이었으므로 의리상 무왕의 봉함을 받지 않았을 것이니, 반고가 기자의 마음을 참으로 알았다는 뜻이다.

 

맹공작(孟公綽)

()나라의 대부이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맹광(孟光)

후한(後漢) 양홍(梁鴻)의 아내로 자는 덕요(德曜)인데, 패릉산(霸陵山)에서 부부가 함께 밭을 갈고 길쌈하며 살다가 나중에는 남편을 따라 오현(吳縣)에 가서 살았다. 남편을 지극히 존경하여 밥을 지어 남편에게 올릴 때마다 밥상을 자기 이마의 높이까지 들어올리면서 들어갔다 하여 후세에 현숙한 아내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후한서(後漢書)卷八十三 양홍전(梁鴻傳)

 

맹광양홍(孟光梁鴻)

양홍은 후한(後漢) 때의 은사이고, 맹광(孟光)은 바로 그의 아내 이름이다. 양홍은 본디 가난한 선비였는데, 맹광이 부유한 가정에서 시집을 와서 처음에 비단옷을 입고 화장을 하곤 하므로, 양홍이 말하기를 나는 거친 베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깊은 산 속에 은거하려고 했었는데, 지금 그대는 비단옷을 입고 분단장을 하니,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하자, 맹광이 대번에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옷을 입고서 양홍의 앞에 나타나니, 양홍이 말하기를 진정한 양홍의 아내이다.”하고는, 함께 패릉산중(霸陵山中)으로 들어가 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八十三

 

맹교(孟郊)

숭산(嵩山)에 은거하다가 나이 50에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하여 한유(韓愈)와 망년(忘年)의 교우 관계를 맺었던 당() 나라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이치(理致)가 깃들어 있어 한유로부터 가장 칭찬을 받았으나, 일반적으로 사고기삽(思苦奇澁)”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신당서(新唐書)176

 

맹교한(孟郊寒)

() 나라 호주(湖州) 무강(武康) 사람인데 자는 동야(東野)이다. 현존하는 맹교의 시는 4백여 수인데 악부 고시(樂府古詩)가 많다. 대체로 가난의 고난을 하소연하되 감정이 진지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맹덕(孟德)

위 태조(魏太祖) 조조(曹操)의 자이다.

 

맹동야(孟東野)

() 나라 때의 시인 맹교(孟郊)의 자가 동야(東野)인데, 맹교는 매우 곤궁했었다.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

 

맹명(孟明)

춘추시대(春秋時代) ()의 현신(賢臣) 백리해(百里奚)의 아들 백리시(百里視)의 자()이다.

 

맹명제하(孟明濟河)

춘추(春秋) 시대에 진()나라 장수 백리 맹명(孟明)이 처음에는 효함(殽函)에서 진()나라의 습격을 당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본국에 돌아가서 3년 만에 하수(河水)를 건너 진나라를 쳐서 보복하였다.

 

맹모(孟母)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다녔던 맹자(孟子)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맹모교자(孟母敎子)

맹모는 맹자(孟子)의 어머니를 말하는데, 삼천지교(三遷之敎)로 맹자를 교육하여 마침내 성인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맹모단기(孟母斷機)

맹자가 학업을 중도에 그만 두고 돌아왔을 때, 그 어머니가 짜고 있던 베를 칼로 끊고 네가 중간에 학문을 그만두는 것은 내가 베를 짜다가 베를 잘라 버리는 것과 같다고 훈계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맹모삼천(孟母三遷)

맹모 삼천지교(三遷之敎)의 준말이다. 맹자의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묘지, 시장, 서당의 세 곳에 걸쳐 이사를 했던 일. 부모가 자식의 장래를 염려하여 여러 모로 애씀을 말한다. 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여향을 생각하며, 맹자 어머니가 세 번이나 이사를 하면서 맹자의 교육에 힘썼다는 고사가 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맹자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가르침을 이른다. 생활환경이 교육에 있어 큰 구실을 한다. 또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의 노력을 말한다.

 

맹모지소택(孟母知所擇)

맹자(孟子) 어머니의 삼천지교(三遷之敎)에 비유한 말이다.

 

맹문산(孟門山)

지금의 하남성 휘현 서쪽의 십자령(十字嶺)을 말한다.

 

맹박(孟博)

후한(後漢) 범방(范滂)의 자()이다. 범방이 지방 장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말고삐를 잡으면서 맑게 정화시킬 뜻을 다짐했던 고사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범방전(范滂傳)

 

맹박사(孟博詞)

맹박은 후한 여남(汝南) 정강(征羌) 사람인 범방(范滂)의 자인데, 이응(李膺두밀(杜密)과 함께 당시 선류(善類) 중의 명사이다. 환제(桓帝) 때 황문북사옥(黃門北寺獄)에 연루되어 중상시(中常侍) 왕보(王甫)가 심문하기를 경은 자기들끼리 서로 천거하여 번갈아 이빨과 입술의 관계를 맺으며 마음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보이는 대로 배척하였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라고 하자, 하늘을 우러러 개탄하기를 옛적에 선을 따르는 자는 스스로 많은 복을 구했는데 오늘날 선을 따르는 자는 처형되는 재앙에 빠지는구나. 원컨대 나를 수양산(首陽山) 곁에 묻어 위로는 하늘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백이(伯夷숙제에 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라고 하니, 왕보는 그 의기에 감동하여 형틀을 풀어줬으며, 결국 무사히 풀려났다. 후한서(後漢書)卷六十七 범방전(范滂傳)

 

맹부(盟府)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공적을 기록하여 두는 곳이다. 사기(史記)진세가(晉世家)왕실을 위하여 힘쓴 일을 기록하여 맹부에 둔다라고 하였다.

 

맹부(盟府)

서약한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좌전(左傳)희공(僖公) 26년에 공을 기록하여 맹부에 보관하는 것은 태사(太師)의 직책이다.”라 하였다.

 

맹부구(盟鳧鷗)

수향(水鄕)의 물새들이 영원히 함께 살겠다고 맹약을 할 정도로 은자의 칭호를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맹분(孟賁)

춘추 때 위나라의 장사 이름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의하면 그가 일단 노하여 고함을 치면 그 소리에 하늘이 움직였다고 했다. 시자(尸子)맹분은 물속에서는 교룡(蛟龍)도 피하지 않고, 산속을 다닐 때는 흉포한 호랑이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전국 때 진무왕의 호위 무사였던 맹열(孟說)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력이 있어 평소에 살아있는 소의 뿔을 뽑았다고 했다. 그는 오획(烏獲)과 함께 용력으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 진나라 왕으로 즉위한 진 무왕이 용사들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지의 용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로 들어가 높은 벼슬을 받았다. 무왕 4년 기원전 307년 무왕이 주나라에 들어가 맹열과 구정 들기 시합을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이에 그 죄를 추궁 받아 살해되고 그 종족은 멸족되었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맹사(盲史)

전국시대(戰國時代) 좌구명(左丘明)이 찬한 국어(國語)를 말한 것으로, 그가 실명(失明)한 뒤에 이 책을 찬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맹사마(孟司馬)

맹가(孟嘉)를 말한다. ()나라 사람이다. 참군 사마(參軍司馬)로서 99일에 용산(龍山)에 노닐면서 모자를 떨어뜨린 고사(故事)가 있다.

 

맹상고결(孟嘗高潔)

맹상은 고결하다. 왕발의 등왕각서(滕王閣序), ‘孟嘗高潔 空懷報國之心이라 하였다.

 

맹상군(孟嘗君)

제 선왕(齊宣王)의 서제(庶弟)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의 아들 전문(田文)의 봉호이다. 그는 문객(門客)을 좋아하여 식객(食客)3천 명에 이르렀다.

 

맹생(孟生)

()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을 가리킨다.

 

맹생타증(孟生墮甑)

후한 때의 맹민(孟敏)이 시루를 지고 가다가 떨어뜨렸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므로, 임종(林宗)이 이를 보고 묻자 시루는 이미 깨어졌는데 돌아보면 뭘 하나?”라고 하였다 한다.

 

맹세(盟誓)

제후들 간에 결맹을 선언하는 것을 가리킨다.

 

맹씨(猛氏)

곰과 유사한데 몸집이 작다.

 

맹씨정(孟氏庭)

오대 시대 촉()을 세운 맹씨의 조정을 말한다.

 

맹양(孟陽)

() 나라 때의 문장가 장재(張載)의 자이다. 장재는 박학하고 문장이 뛰어났는데, 자기 부친이 촉군태수(蜀郡太守)로 있을 적에 일찍이 촉군에 가서 부친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검각산(劍閣山)을 지나다가, 험고함을 믿고 난()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촉군 사람들을 두고 명문(銘文)을 지어 경계로 삼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그 명문은 워낙 훌륭하여 진 무제(晉武帝)의 명에 의해 검각산에 새겨졌다고 한다. 진서(晉書)卷五十五

 

맹양양(孟襄陽)

성당(盛唐) 시대 양양(襄陽) 출신 시인인 맹호연(孟浩然)을 말한다.

 

맹양주(孟凉州)

후한 때 양주 자사(凉州刺史)를 지낸 맹타(孟他)를 가리키는데, 맹타가 일찍이 포도주(蒲萄酒) 1()을 장양(張讓)에게 바치고 곧바로 양주 자사에 임명되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卷七十八

 

맹완단청(盲玩丹靑)

장님의 단청 구경. 보이지 않는 눈으로 단청을 구경해봤자 아무런 소득이나 분별이 있을 수 없듯이, 사물을 보아도 전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순오지

 

맹인모상(盲人摸象)

장님 코끼리 만지기. 사물의 일부만 보고 전체의 결론을 내리는 좁은 견해를 이른다.

 

맹인안질(盲人眼疾)

있으나마나 아무 상관이 없다.

 

맹인할마(盲人瞎馬)

장님이 거리감각 없는 애꾸눈 말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위험한 행동을 이른다. () 환현(桓玄)이 은중감(殷仲堪)과 더불어 위태로운 말 내기[危語]를 할 때 자리에 있던 한 참군(參軍)이 말하되 장님이 눈 먼 말을 타고 밤중에 깊은 연못에 다다른 것.”이라 하였다.

 

맹자(孟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철학자. 이름은 가(). ()나라와 가까운 추() 땅에서 태어났다. 당시 제후들은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인 합종연횡(合縱連橫)을 환영했으나, 그는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며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성선설(性善說), 왕도정치(王道政治), 민의(民意)에 근본한 혁명론(革命論) 등을 주장하며 공자사상(孔子思想)의 전통을 계승했다.

 

맹자정문(盲者正門)

장님이 문을 바로 들어갔다. 우연히 요행수로 성공을 거두었음을 말한다.

 

맹저(孟諸)

수택(藪澤) 이름으로, () 나라 고적(高適)의 시에 나는 본디 맹저 들에서 고기 잡고 나무나 하여 일생이 절로 한가로운 사람이거니 차라리 초택 안에서 미친 노래나 할지언정 어찌 풍진 속에 관리 노릇을 할 수 있으랴[我本漁樵孟諸野 一生自是悠悠者 乍可狂歌草澤中 寧堪作吏風塵下].”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소식(蘇軾)의 시에는 그 누가 적막한 고상시를 불쌍히 여기랴 늙어 가매 미친 노래에 맹저가 생각나네[誰憐寂寞高常侍 老去狂歌憶孟諸].”라고 하였다. 소동파집(蘇東坡集)卷三十一

 

맹정(氓征)

백성에게서 거둬들이는 각종 세금과 부역 등을 말한다.

 

맹정(孟亭)

정자 이름이다. 왕유(王維)가 영주(郢州)를 지나다가 자사(刺史)의 정자에 맹호연(孟浩然)의 그림을 그려 놓고 호연정(浩然亭)이라 하였다. 뒤에 자사 정함(鄭諴)이 현인의 이름을 쓸 수 없다 하여 맹정으로 고쳤다.

 

맹정승(孟政丞)

맹정승은 조선 세종(世宗) 때의 명상(名相)맹사성(孟思誠)을 이른다. 맹사성은 특히 청렴하기로 유명하였고, 고향에 다닐 적에는 흔히 소를 타고 다녔다 한다.

 

맹제공채(孟齊孔蔡)

맹자(孟子)는 제() 나라에서 도()를 행하지 못하고 갔으며, 공자(孔子)는 진채(陳蔡)에서 군사들에게 포위를 당하여 7일 동안 굶은 일이 있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재액(在厄),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맹종동순(孟宗冬笋)

맹종은 삼국 때 오() 나라 사람으로 자는 공무(恭武)이다. 무척 효성스러웠는데 한번은 어머니가 병이 들어 대순을 먹고 싶어하는데, 마침 겨울이라서 구할 수 없었다. 맹종은 근심하며 대숲에 가보았더니 대순이 솟아났다 한다. 진서(晉書)吳志 맹종전(孟宗傳)

 

맹종효(孟宗孝)

맹종은 삼국 시대 때의 초() 나라 강하(江夏)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가 죽순을 몹시 먹고 싶어하였는데, 겨울철이라서 죽순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맹종이 대숲에 들어가서 탄식하자, 어느 사이 죽순이 자라나 이를 가져다가 어머니에게 드렸다 한다. 초국선현전(楚國先賢傳)

 

맹진(孟津)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 남쪽에 있는 나루로 주 무왕(周武王)이 주()를 칠 때, 이곳에서 크게 제후들을 모았었다.

 

맹집우(孟縶憂)

맹은 형()의 뜻으로 즉 춘추시대(春秋時代) 위공(衛公)의 형 을 말하는데, 칩이 당시 반역자들의 복병(伏兵)에 의해 살해되었다. 좌전(左傳)昭公 二十年

 

맹참모(孟參謀)

당나라의 시인 맹교(孟郊)를 가리킨다. 자는 동야(東野)이다. 늙어서 정여경(鄭餘慶)의 참모를 지냈다.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

 

맹창(孟昶)

오대(五代) 후촉(後蜀)의 왕이다.

 

맹창(孟昶)

() 나라 정치가. 벼슬이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맹청봉(孟靑棒)

낭야왕(琅邪王) ()을 쳐서 죽였던 장군이다.

 

맹추(孟陬)

주자집주(朱子集註)孟 始也 陬 隅也 正月爲陬 盖是月孟春昏時 斗柄指寅在東北隅 故以爲名也라 하였다.

 

맹충왕누손사막(蝱蟲枉累孫思邈)

손사막은 음양(陰陽), 추보(推步), 의약(醫藥) 등에 정통했던 당() 나라의 은자(隱者), 천금요방(千金要方) 등의 저술이 있다. 손사막에게 언젠가 신선이 내려와 말하기를 그대가 천금방(千金方)을 지어 사람을 구제한 공은 크다 하겠으나, 생물을 죽여 약으로 썼으니 그 해 또한 대단하다. 따라서 시해(尸解)할 적에 백일(白日)에 가볍게 들려지지 못할 것이다.”라 하였으므로, 그 뒤로는 사막이 벌레나 곤충 대신 초목(草木)으로 약을 썼다는 이야기가 선전습유(僊傳拾遺)에 전해 온다. 한편 두보(杜甫)의 제손사막진(題孫思邈眞)이라는 시에 不應尸解坐蝱蟲이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24

 

맹하(孟夏)

음력 5월을 말한다.

 

맹호연(孟浩然)

성당(盛唐) 시대의 시인(詩人)이다. 양양(襄陽) 사람이므로 맹양양(孟襄陽)이라고도 한다. 저서에는 맹호연집(孟浩然集)4권이 있다. 그는 젊어서부터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일찍이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다가, 40세가 넘어서야 장구령(張九齡)의 부름을 받고 형주 종사(荊州從事)가 되었으나, 그 후 등창이 나서 신음하다가 죽었다. 당서(唐書)卷二百三

 

맹호지유예(猛虎之猶豫)

머뭇거리고 있는 맹호는 하찮은 미물인 벌이나 전갈이 끼치는 해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비록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명마라 할지라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노마(駑馬)가 천천히 걷는 것보다 못할 것이다. 또한 맹분(孟賁)과 같은 천하장사도 일을 하는데 머뭇거린다면 필부가 일을 결행하는 것만 못할 것이며, 비록 순임금이나 우임금과 같은 지혜가 있는 자라 할지라도 입을 열지 않고 다물고만 있으면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손짓 발짓으로 말하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猛虎之猶豫, 不若蜂蠆之致螫; 騏驥之跼躅, 不如駑馬之安步; 孟賁之狐疑, 不如庸夫之必至也; 雖有舜禹之智, 吟而不言, 不如瘖聾之指麾也].

 

맹호행(猛虎行)

악부(樂府)의 이름이다. 아무리 험난한 지경에 처해도 굳은 절조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다.

 

맹희(孟喜)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儒學者)이다. 전왕손(田王孫)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웠는데, 뒤에 스승 전생(田生)이 죽을 때에 오로지 자기에게만 학문을 전수(傳授)했다.’고 말하여 유자(儒者)들로부터 많은 선망(羨望)을 받았다. 전한서(前漢書)卷八十八 유림전(儒林傳)

 

 

인용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어휘놀이터 > 어휘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휘사전 - 105. 면  (0) 2020.04.18
어휘사전 - 104. 멱  (0) 2020.04.18
어휘사전 - 102. 맥  (0) 2020.04.18
어휘사전 - 101. 매  (0) 2020.04.18
어휘사전 - 100. 망  (0) 2020.04.1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