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지상(鄭知常)과 요체시(拗體詩)
정지상(鄭知常, ?~1135 인종13, 호 南湖)은 반역(叛逆)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김부식(金富軾)에 의하여 참살(斬殺)을 당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을 뿐, 그 밖에 구체적인 혐의(嫌疑) 내용(內容)은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서도 동정적(同情的)이다. 따로 입전(立傳)을 하지는 않았지만, 「반역(叛逆)ㆍ묘청전(妙淸傳)」에서 그 약전(略傳)을 싣고 있으며 특히 그의 시(詩)에 대해서는 비평(批評)까지도 놓치지 않고 있다.
지상(知常)의 초명(初名)은 지원(之元)이며 젊어서부터 시(詩)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갑과(甲科)에 제1인으로 뽑히어 벼슬은 기거주(起居注)에까지 이르렀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김부식(金富軾)이 본디 지상(知常)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문장의 시샘 때문에 불평이 쌓이어 마침내 묘청(妙淸)과 내통했다고 칭탁(稱托)하여 지상(知常)을 죽였다고 한다. 지상(知常)의 시(詩)는 만당체(晚唐體)를 배워 특히 절구(絶句)에 공교하였으며 사어(詞語)가 청화(淸華)하고 운격(韻格)이 호일(豪逸)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知常初名之元, 少聰悟, 有能詩聲. 擢魁科, 歷官至起居注, 人言, 富軾素與知常齊名於文字間, 積不平, 至是托於內應殺之. 知常爲詩, 得晚唐體, 尤工絶句, 詞語淸華, 韻格豪逸, 自成一家法. -『高麗史」ㆍ「列傳」 40, 叛逆 1, 妙淸條.
이것이 약전(略傳)의 전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지상(鄭知常)은 문자(文字)의 시샘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시인일 뿐이다. 정지상(鄭知常)과 가장 가까운 시대의 시화서(詩話書)인 『파한집(破閑集)』에서, ‘형양보궐(滎陽補闕)’ㆍ‘성정기망기명(姓鄭者忘其名)’ 등으로 이름 밝히기를 꺼리어 성(姓)만으로 정지상(鄭知常)의 시(詩)를 소개하고 있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정지상(鄭知常)의 시(詩)는 후세의 호사가(好事家)들에 의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 그것만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러나 그의 시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평을 보인 것은 최자(崔滋)가 그의 『보한집(補閑集)』 권상 22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어운(語韻)이 청화(淸華)하고 구격(句格)이 호일(豪逸)하여 그 시(詩)를 읽노라면 흐트러진 가슴과 어두운 눈을 쇄연(洒然)히 깨어나게 한다. 다만 웅심(雄深)한 거작(巨作)이 모자랄 뿐이다.
語韻淸華, 句格豪逸, 讀之使煩禁昏眼, 洒然醒悟, 但雄深巨作乏耳.
이것은 선성(先聲)에 속한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지상(知常)의 시(詩)를 논한 것도 여기서 따온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정지상(鄭知常)의 詩風은 만당(晚唐)을 배워서 절구(絶句)에 뛰어나며【현존하는 시편(詩篇)만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운(語韻)이 청화(淸華)하고 구격(句格)이 호일(豪逸)하다는 것으로 묶을 수 있다.
성현(成俔)이 『용재총화(傭齋叢話)』 권1에서 정지상(鄭知常)의 시(詩)를 가리켜 ‘빛나기는 하지만 드날리지 못한다[能曄而不揚]’고 한 것도 이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후대의 비평에서 그의 시를 가리켜 ‘유려(流麗)’, ‘완려(婉麗)’한 것으로만 일컫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최자(崔滋)의 그것과 동궤(同軌)의 것이며 그의 시작에 ‘웅심(雄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도 이를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지상(鄭知常)의 시세계를 가장 감동적으로 지적한 것은 조선후기의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그는 그의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3에서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과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 시(詩)를 비교하여 한마디로 ‘위장부전요조낭(偉丈夫前窈窕娘)’이라 했다. 아리따운 요조숙녀(窈窕淑女)와 훤칠한 위장부(偉丈夫)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지상(鄭知常)의 시작(詩作) 가운데서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는 것은 모두 13편에 지나지 않지만 편편(篇篇)이 모두 널리 알려진 절창(絶唱)이다. 그 가운데서도 「서도(西都)」(七絶), 「취후(醉後)」(七絶), 「대동강(大同江)」(七絶), 「단월역(團月驛)」(七絶), 「장원정(長遠亭)」(七律), 「제등고사(題登高寺)」(七律), 「개성사팔척방(開聖寺八尺房)」(七律), 「변산소래사(邊山蘇來寺)」(七律) 등이 특히 명편(名篇)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칠언(七言)이다.
「대동강(大同江)」은 다음과 같다.
雨歇長堤草色多 | 비 개인 긴 뚝엔 풀빛 더 파란데 |
送君南浦動悲歌 | 남포(南浦)에서 임 보내니 슬픈 노래 울린다. |
大同江水何時盡 | 대동강 저 물은 언제나 다할 것인고? |
別淚年年添綠波 | 해마다 흘린 눈물로 푸른 물결 더 보태네. |
이 작품은 「대동강별곡(大同江別曲)」, 「송우인(送友人)」, 「송인(送人)」【오언율시(五言律詩)인 「送人」은 다른 작품이다】 등 딴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별의 노래로서 가장 많이 불리었으며 후인(後人)의 차운시(次韻詩)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이달(李達)ㆍ최경창(崔慶昌)ㆍ신위(申緯)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결구(結句)의 ‘첨록파(添綠波)’는 원시(原詩)의 ‘첨작파(添作波)’를 이제현(李齊賢)이 그렇게 고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도 『파한집(破閑集)』 권하에는 ‘송군천리동비가(送君千里動悲歌)’로 되어 있어 ‘천리(千里)’와 ‘남포(南浦)’의 선후관계는 확인하기 어렵다.
「대동강(大同江)」은 정지상(鄭知常)의 더벅머리 시절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거니와, 많은 전인(前人)들의 시작(詩作)이 이 한 편에 녹아들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면서도 만고(萬古)의 절창(絶唱)으로 높은 칭예(稱譽)를 받아 온 것은 분명히 그의 권능(權能)에 속한다.
당(唐) 왕유(王維)의 ‘송군남포루여사(送君南浦淚如絲)’나 노륜(盧綸)의 ‘등등산로하시진(登登山路何時盡)’, 박인범(朴仁範)의 ‘인수류수하시진(人隨流水何時盡)’, 두소릉(杜少陵)의 ‘별루요첨금수파(別淚遙添錦水波)’ 등 서로 다른 분위기에서 씌어진 이 같은 시작(詩作)들을 모방하였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훌륭한 이별의 노래로 재조성(再造成)한 그의 솜씨는 일품(逸品)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승구(承句)에서 결구(結句)로 연결하는 반전(反轉)의 수법은 이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대동강수(大同江水)가 다하는 날이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염원과도 같은 반문(反問) 때문에, 해마다 이별하는 눈물로 해서 도리어 푸른 강물만 더 보태고 있다는 끝맺음은 실의(失意)의 낙차를 크게 해준다.
한시에서 표현되는 인간의 애정은 남성 상호간의 우정으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시의 수준 높은 상징성 때문에 우인(友人)의 모습은 몽롱(朦朧)해지기 일쑤이며 정인(情人)과의 구별을 어렵게 할 때가 많다. 이 시에서의 우인(友人)도 물론 정회 깊은 연인이다.
「개성사팔척방(開聖寺八尺房)」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百步九折登巑岏 | 백보(百步)에 아홉 번 돌아 높은 산에 올랐더니 |
家在半空唯數閒 | 허공에 집 몇 간이 떠 있을 뿐이네. |
靈泉澄淸寒水落 | 맑디 맑은 샘물은 찬물로 떨어지고 |
古壁暗淡蒼苔斑 | 암종(暗從)한 낡은 벽에 푸른 이끼인양 얼룩졌네. |
石頭松老一片月 | 돌머리 소나무는 한 조각 달에 늙어 있고 |
天末雲低千點山 | 하늘 끝 구름은 천점산(千點山)에 나직하다. |
紅塵萬事不可到 | 세상만사 이곳에는 이를 수 없으니 |
幽人獨得長年閑 | 숨어 사는 사람만이 오래 오래 한가롭겠네. |
정지상(鄭知常)의 시작(詩作) 가운데는 사찰이나 누정(樓亭)을 소재로 한 것이 많거니와 그의 경물시(景物詩)를 대할 때마다 항상 한 폭의 스케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유려(流麗)하게 뽑아낸 사경(寫景)의 솜씨는 문자 그대로 일창삼탄(一唱三嘆)의 감동을 어쩔 수 없게 한다. 이러한 그의 취향은 노장(老莊)을 좋아하는 삶의 본바탕과도 무관하지는 않을성 싶다.
그의 명편(名篇)은 대부분 요체구(拗體句)로써 성공하고 있으며 이 작품도 그러한 기법을 시범한 것 중에 하나다. 서거정(徐居正)이 일찍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요체(拗體)란 평자(平字)를 놓을 자리에 측자(仄字)를 바꾸어 쓰는 것이며 그것이 노리는 것은 어기(語氣)를 기건(奇健) 발군(拔群)케 하는 데 있다. 요체(拗體)로써 가구(佳句)를 얻은 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아래부터 拗體의 例)
地應碧落不多遠 僧與白雲相對閑 「제등고사(題登高寺)」
石頭松老一片月 天末雲低千點山 「개성사팔척방(開聖寺八尺房)」
綠楊閉戶八九屋 明月捲簾兩三人 「장원정(長遠亭)」
浮雲流水客到寺 紅葉蒼苔僧閉門
秋風微京吹落日 山月漸白啼淸猿 「변산소래사(邊山蘇來寺)」
만당인(晩唐人)들이 이 체(體)를 즐겨 썼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지상(鄭知常)이 그 묘리(妙理)를 얻었을 뿐이다. 그 밖에 김구(金坵)도 이를 애용(愛用)했다 하나 실례(實例)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수광(李睟光)이 그의 『지봉유설(芝峯類說)』 문장부(文章部)에서 요체(拗體)를 예증(例證)한 것도 이 가운데서 뽑은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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