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시(韓國詩)의 발견(發見)
임춘(林椿)과 이인로(李仁老)의 동파시(東坡詩)에 대한 관심은 동파시(東坡詩)를 배우고 익히던 초기 단계의 일이거니와, 이 뒤의 후진(後進)들에게 있어서도 풍골(風骨)과 의경(意境), 사어(辭語)와 용사(用事)의 기교(技巧)에 이르기까지 동파시(東坡詩)의 예술적인 경계를 포괄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당시 시인(詩人)ㆍ묵객(墨客)들의 동파시(東坡詩)에 대한 일반적 관심은 동파(東坡)를 한갖 시수업(詩受業)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최자(崔滋)가 명쾌하게 진술하고 있다.
근세에 동파(東坡)를 숭상하는 것은 그 기운이 호매(豪邁)하고 뜻이 깊고 말이 풍부하고 고사(故事)의 원용(援用)이 광박한 것을 사랑해서 거의 그 체(體)를 본받아 얻으려 함이다. 지금의 후진들이 『동파집(東坡集)』을 읽는 것은 그것을 본받아서 그 풍골(風骨)을 체득(體得)하려고 해서가 아니고 다만 그것을 증거로 하여 고사(故事)를 원용하는 도구로 하자는 것이다.
近世尙東坡, 盖愛其氣韻豪邁, 意深言富, 用事恢博, 庶幾效得其體也. 今之後進, 讀東坡集, 非欲倣效以得其風骨, 但欲證據以爲用事之具.
동파시(東坡詩)를 배우고 본받아 다만 그들의 시작(詩作)에 용사(用事)의 자료(資料)로 써먹으려 한 당시의 문단기습(文壇氣習)을 여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규보(李奎報)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파(東坡)를 근세(近世)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켜 올리면서도 끝내 그는 동파(東坡)를 본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설사 동파(東坡)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한 일치일 것이라는 투다.
그래서 그는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와 달라 이미 옛 성현(聖賢)의 말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옛 시인의 체(體)를 본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만약 부득이 하거나 창졸간에 시를 읊조릴 때에는 고갈되어 써 먹을 만한 것이 없으면 반드시 새로운 말을 특별히 만들기 때문에 말이 흔히 생소(生疎)하고 난삽(難澁)하여 웃음거리가 됩니다. 옛 시인들은 뜻은 창조하였지만 말은 만들지 않았는데 나는 말과 뜻을 아울러 만들고도 부끄러워함이 없어 이 때문에 세상의 시인들 가운데는 눈을 부릅뜨고 배척하는 자가 많습니다.
僕則異於是, 旣不熟於古聖賢之說, 又恥效古詩人之體, 如有不得已及倉卒臨賦詠之際, 顧乾涸無可以費用, 則必特造新語, 故語多生澁可笑. 古之詩人, 造意不造語, 僕則兼造語意無愧矣. 由是, 世之詩人, 橫目而排之者衆矣.
그는 생소(生疎)하고 난삽(難澁)하더라도 자유시를 쓴다고 외치고 있다.
이에 앞서 그는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보다 이론적으로 심화하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시(詩)는 의경(意境)이 주가 되므로 의경(意境)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경(意境)은 또한 기(氣)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氣)의 우열에 따라 의경(意境)의 심천(深淺)이 결정될 따름이다. 그러나 기(氣)는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어서 후천적으로 배워서는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氣)가 열(劣)한 사람은 글을 다듬는 것으로 능사(能事)를 삼고 의경(意境)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꾸미고 다듬어 그 구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답게 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심후(深厚)한 의경(意境)이 없으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다시 씹게 되면 맛이 없어지고 만다.
夫詩以意爲主, 設意尤難, 綴辭次之. 意亦以氣爲主, 由氣之優劣, 乃有深淺耳. 然氣本乎天, 不可學得, 故氣之劣者, 以雕文爲工, 未嘗以意爲先也. 蓋雕鏤其文, 丹靑其句, 信麗矣, 然中無含蓄深厚之意, 則初若可翫, 至再嚼則味已窮矣.
그는 또 시(詩)로써 시(詩)를 논한 「논시(論詩)」(五古)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作詩尤所難 語意得雙美 | 시 짓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 없나니 말과 뜻이 함께 아름다워야 하네. |
含蓄意苟深 咀嚼味愈粹 | 함축되어 의(意)가 진실로 깊어야 씹을 수록 더욱 맛이 순수하네. |
(중략) | (중략) |
就中所可後 彫刻華艶耳 | 그 중에서도 후차적인 것은 문장(文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세 |
(하략) | (하략) |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와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기교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기호의활(氣豪意豁)한 시를 추구하는 자신의 시관(詩觀)을 선명하게 제시했다. 이는, 중국 문학의 비평사(批評史)에서 보면 오히려 통합론에 가까운 소동파(蘇東坡)의 시세계를 수용함에 있어 우리나라 시인들이 극복해야 할 한국시의 과제를 이미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형식미의 추구로써 도달 가능한 세계는 시원적(始源的)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를 계승하여 당시의 문병(文柄)을 잡은 최자(崔滋)도 『보한집(補閑集)』 권중(卷中)에서 이규보(李奎報)의 시(詩)를 비평하는 글로 자신의 시관(詩觀)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어릴 때부터 붓을 달리면 다 신의(新意)를 창출해내고 문사(文辭)를 토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달리는 기운이 더욱 씩씩하여 비록 성률(聲律)의 구속을 받는 가운데서 세밀하게 조탁(雕琢)하고 공묘(工妙)하게 얽어 나가더라도 호기(豪氣)가 넘치고 기묘(奇妙)하게 우뚝하며 그러나 공(公)을 천부적으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대구(對句)나 성률(聲律)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고조장편(古調長篇)을 하는 데 있어서 강운(强韻)과 험제(險題) 가운데서도 마음대로 분방하여 한꺼번에 100장을 써 내려가도 다 고인(古人)을 답습(踏襲)하지 아니하고 우뚝히 자연스럽게 만든다.
公自妙齡, 走筆皆創出新意, 吐辭漸多, 騁氣益壯, 雖入於聲律繩墨中, 細琢巧構猶豪肆奇峭, 然以公爲天才俊邁者, 非謂對律, 盖以古調長篇, 强韻險題中, 縱意奔放, 一掃百紙, 皆不賤襲古人, 卓然天成也.-崔滋, 『補閑集』 卷中
이 글에서 최자(崔滋)는 이규보(李奎報)로 하여금 철저한 개성주의자로 부각시키고 있으며 특히 이규보(李奎報)에게 있어서 기교적인 요소를 완강하게 후퇴시키고 있는 것은 최자(崔滋) 자신의 반기교적(反技巧的) 시관(詩觀)의 간접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시평(詩評)에 있어서 개연적(蓋然的)인 기준이 되고 있는 시의 격(格)에 대해서도 『보한집(補閑集)』 권하(卷下) 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개 시를 평하는 사람은 기골(氣骨)과 의격(意格)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사어(辭語)와 성률(聲律)을 본다. 같은 의격(意格) 가운데도 그 운어(韻語)에 있어서는 혹 우열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한 수의 시에 이것들이 다 잘된 것은 극히 적다. 그러므로 이를 평하는 평어(評語)에 있어서도 말이 뒤섞여 한결같지 않다. 시격(詩格)에 이르기를 “구(句)가 노련하고 글자가 속되지 않으며 이치가 깊으면서도 의경(意境)이 뒤섞이지 않고 재주가 자유자재하면서도 기(氣)가 성내지 않고, 말은 간결하면서도 일이 어둡지 않아야 바야흐로 풍소(風騷)에 들게 된다”고 한 이 말은 스승이 될 만하다.
夫評詩者, 先以氣骨意格, 次以辭語聲律, 一般意格中, 其韻語或有勝劣, 一聯而兼得者盡寡. 故所評之辭, 亦雜而不同. 詩格曰: “句老字不俗, 理深而意不雜, 才縱而氣不怒, 言簡而事不晦, 方入於風騷.” 此言可師.
풍격비평(風格批評)에 있어서도 사어(辭語)나 성률(聲律)보다는 기골(氣骨)ㆍ의격(意格)을 앞세우고 있어 기교론적인 성률(聲律) 문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자신의 태도를 천명하고 있다.
다음은 성률(聲律)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보한집(補閑集)』 권상(卷上) 34에서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토로한 것이다.
학사(學士) 이지심(李知深)의 「제풍주성두루(題豊州城頭樓)」 시(詩)에 “하늘과 바다는 가이 없어서 아득할 손 바라보아도 끝가는 데가 없다. 사방천하(四方天下)에 천리(千里)를 보는 눈인데 유월(六月)에 구월(九月) 바람이 분다. 그림으로도 응당 묘하게 그리기 어려울 것이지만 글로써도 어찌 다듬어 내겠는가? 다만 날개가 돋아 몸이 허공에 있는가 의심스러울 뿐”이라 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시를 가리켜 말은 다듬지 않았는데도 기상(氣象)이 호방(豪放)하고 의경(意境)이 넓다고 하였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열 자 가운데서 가이 없다고 말하고는 또 끝이 없다고 말하였으며, 위에서는 바라보아도 끝이 없다고 말했다가 아래에서는 천리(千里)를 바라보는 눈을 말했으니 뜻이 겹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읽으면 뜻이 겹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성병(聲病)이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이 성병(聲病)을 회피하는 것을 금침격(金針格)으로 여겼는데 그 말이 사실이구나.
李學士知深題豊州城頭樓云: “天與海無際, 茫茫望不窮. 四方千里目, 六月九秋風. 圖畵應難妙, 篇章量得工. 只疑生羽翼, 身在大虛中.” 時人以此聯, 言不雕鑿, 而氣豪意豁. 雖然十字中, 言無際, 又言不窮, 或上言望不窮, 下言千里目, 似乎意疊. 而讀之不知有相疊之意者, 盖無聲病也. 古人以回忌聲病爲金針格, 信哉!
여기서 최자(崔滋)는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시로서 성취할 수 있는 기본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성률(聲律)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호기의활(氣豪意豁)한 내면세계의 사출(寫出)에 있음을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동파(東坡)도 ‘학지이성 무성병대우(學之易成 無聲病對偶)’라 하여 성병(聲病)을 공척(攻斥)한 일이 있거니와, 평측(平仄) 성조(聲調)에 지나치게 구애되어 폐해에까지 이르게 하는 성병(聲病) 문제에 대하여 최자(崔滋)가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자(崔滋)는 또 탁련(琢鍊)에 대해서도 『보한집(補閑集)』 권하(卷下) 12에서 자신의 견해를 명백히 하여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전개하고 있다.
시를 다듬음에 있어 두보(杜甫)처럼 한다면 묘하기는 묘하지만, 저 솜씨가 서툰 자는 다듬으려고 고생을 하면 할수록 졸렬(拙劣)하고 난삽(難澁)한 것이 더욱 심하여 헛되이 마음만 태울 뿐이다. 어찌 각각 그 재국(才局)에 따라서 그 천성(天性)을 뱉아 내어 다듬은 흔적이 없는 것과 같겠는가?
凡詩琢鍊, 如工部妙則妙矣, 彼手生者, 欲琢彌苦, 而拙澁愈甚, 虛雕肝腎而已. 豈若各隨才局, 吐出天然, 無礱錯之痕?
조탁(雕琢)으로 성공한 예를 두보(杜甫)와 같은 대수(大手)에서 구함으로써 사실상 연탁(鍊琢)의 무용론(無用論)을 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시인들을 향하여 기교론의 한계를 계도적(啓導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서, 한시(漢詩)에 대한 우리나라 시인의 자각이며 자기발견임에 틀림없다.
시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형식적인 기교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보인 것은 결코 경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김시습(金時習)이나 윤춘년(尹春年)처럼【민병수(閔丙秀), 「고전시론(古典詩論)의 한국적(韓國的) 전개(展開)에 대하여」, 『진단학보(震檀學報)』 48, p.123】, 금세(今世)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른바 고인(古人)들의 정종(正宗)과 정음(正音)을 어디서 배우고 들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정면 공격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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