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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4. 당파의 광망(최경창)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4. 당파의 광망(최경창)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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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朴淳)의 뒤를 이어 우리 시단에 당시(唐詩)의 풍기(風氣)를 널리 보급하는데 큰 공을 보인 작가는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 세 사람이다.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통칭한 첫 기록은 임상원(林相元)손곡집서(蓀谷集序)이다. ‘선조 연간에 이르러 상당집(三唐集)이라 불리는 것이 있었는데,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ㆍ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ㆍ손곡(蓀谷) 이달(李達)을 이른다. 이 세 사람은 힘써 당을 모의하여 간혹 아주 비슷한 것이 있다[當穆陵朝, 有稱三唐集者, 崔孤竹慶昌白玉峯光勳李蓀谷達也. 是三子者, 刻意摹唐, 間有他相肖者]’라 한 것이다.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합칭(合稱)하여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파악하는 흐름은 허균(許筠)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융경(隆慶, 1567~1572),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ㆍ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손곡(蓀谷) 이달(李達) 등이 비로소 개원(開元) 연간(713~741, 盛唐 시기)의 시를 배우고 정화를 이루기에 힘써 옛사람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으나 뼈대가 완전하지 않고 수식이 너무 지나쳐 허혼(許渾)과 이교(李嶠)의 사이에 두더라도 곧 촌뜨기의 꼴임을 깨닫게 되니 어찌 이백(李白)과 왕유(王維)의 위치를 앗을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이로부터 학자들이 당풍(唐風)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세 사람의 공을 또한 덮어 둘 수는 없다[隆慶萬曆間, 崔嘉運白彰卿李益之輩, 始政開元之學, 黽勉精華, 欲逮古人. 然骨格不完, 綺靡太甚, 置諸許李間, 便覺傖夫面目, 乃欲使之奪李白摩話位耶? 雖然, 由是學者知有唐風, 則三人之功, 亦不可掩矣].’고 한 것이 허균(許筠)의 말이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年長)이면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는 최경창(崔慶昌)이다.

 

 

최경창(崔慶昌, 1539 중종34~1583 선조16, 嘉運, 孤竹)은 최충(崔沖)18세 손으로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좌장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지내다 대관(臺官)의 탄핵으로 직급이 깎인 채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종성(鏡城) 객관에서 죽었다.

 

그는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이후백(李後白)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다. 그는 당시(唐詩)를 배울 것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시 또한 당풍(唐風)을 잘 구현해 낸 것으로 이름이 높다. 홍만종(洪萬宗)소화시평(小華詩評)권상 10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최경창(崔慶昌)의 시를 극찬했다.

 

 

나는 일찍이 선배들에게서 우리나라의 시 가운데 오직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만이 시종 당시(唐詩)를 배워 송시(宋詩)의 격조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높은 것은 무덕(武德, 618~626, 初唐 시기)ㆍ개원(開元, 713~741, 盛唐 시기)의 수준에 들고, 낮은 것도 장경(長慶, 821 ~824, 中唐시기)의 시어(詩語)를 말하지 않았다. ‘봄 물은 옛 성을 두르고, 들불은 높은 산을 오르네[春流繞古郭, 野火上高山].’와 같은 것은 중당(中唐)의 시와 비슷하고, ‘사람과 연기는 강에서 떨어짐이 적고, 바람과 눈은 관문에 가까움이 많네[人烟隔河少, 風雪近關多]’와 같은 것은 성당(盛唐)의 시와 비슷하고, ‘산에는 태고의 눈이요, 늙은 나무에는 태평스런 아지랑이라[山餘太古雪, 樹老太平烟]’와 같은 것은 초당(初唐)의 시와 비슷하다. 오늘의 세상에 다시 이와 같은 격조와 음향이 나타날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겠다.

余嘗聞諸先輩, ‘我東之詩, 唯崔孤竹終始學唐, 不落宋格,’ 信哉! 其高者出入武德·開元, 下亦不道長慶以下語, 春流繞古郭, 野火上高山.’ 則中唐似之, ‘人烟隔河少, 風雪近關多.’ 則似盛唐, ‘山餘太古雪, 樹老太平烟.’ 則似初唐. 不知今世復有此等調響耶.

 

 

그의 시는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선 청경(淸勁)’으로, 성수시화(惺叟詩話)62에선 한경(悍勁)’으로, 호곡시화(壺谷詩話)1에선 청숙(淸淑)’이라는 평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많다. 그의 이러한 시풍(詩風) 때문에 그는 절구(絶句)에서 특장을 보였는지 모른다. 제고봉군산정(題高峰郡山亭)(五色), 영월루(暎月樓)(七絶), 천단(天壇)(七絶), 채련곡차정지상운(采蓮曲次鄭知常韻)(七絶), 대은암남지정고택(大隱巖南止亭故宅)(七絶), 기양주성사군의국(寄楊州成使君義國)(七絶), 기성진상인(寄性眞上人)(七絶), 제승축(題僧軸)(七絶), 인이달북귀기관찰민헌(因李達北歸寄觀察民獻)(五律), 조천(朝天)(七律) 등이 널리 알려져 있는 명편(名篇)들이다.

 

 

최경창(崔慶昌)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은암(大隱巖)을 보인다.

 

門前車馬散如烟 찾아오는 높은 손님 연기처럼 사라지고
相國繁華未百年 재상의 영화도 백 년을 못 가는 것을.
深巷寥寥過寒食 고요한 마을 거리엔 한식(寒食)이 지나가는데,
茱萸花發古墻邊 담장 가에 수유꽃만 활짝 피었네.

 

이 시의 원제는 대은암남지정고택(大隱巖南止亭故宅)으로 남곤(南袞)의 옛 집을 지나며 쓴 것이다. 남곤은 중종(中宗) 연간에 심정(沈貞)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조작하여 많은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숙청하고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그가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그의 집 앞에는 찾아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의 사후 관작(官爵)마저 삭탈당한 그의 집 앞에 이제는 우연히 지나게 된 이 시인 외에 찾아오는 손님은 없다.

 

허균(許筠)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이 시를 가리켜 풍자가 뼈에 사무친다[諷刺入髓]”고 하였으며 유몽인(柳夢寅)어우야담(於于野談)시화22에서 이 시가 이장곤(李長坤)의 옛 집을 지나면서 지은 것으로 당시(唐詩)의 맛을 낸 대표작이라고 하였다[近來學唐詩者 皆稱崔慶昌李達 姑取其善鳴者而錄之 崔慶昌過李長坤故宰相家 有詩曰 門前車馬散如烟 相國繁華未百年 村巷寥寥過寒食 茱萸花發古墻邊].

 

개자추(介子推)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시어(詩語) ‘한식(寒食)’을 선택함으로써 풍자의 솜씨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최경창(崔慶昌)기박관찰(寄朴觀察)은 다음과 같다.

 

草草河邊酒 悠悠別後期 조촐하게 강가에서 술 마시고 훗날 다시 만날 기약은 아득하네.
聊因北歸客 始寄去年詩 애오라지 북으로 가는 손님으로 인해, 지난해에 지은 시 비로소 붙여 보내네.
塞外早霜落 關中芳草衰 변방에는 일찍이 서리가 내리어 관중에는 고운 풀 시들어졌네.
相思月頻滿 秋鴈到來遲 서로들 생각한 지 몇달이 지났는데도, 가을 기러기 오는 것이 이렇게 더디네..

 

원제는 인이달북귀기관찰민헌(因李達北歸寄觀察民獻)이다. 전별 당시의 아쉬움을 아직 지니고 있는 작자가 마침 함경도로 가는 이달(李達)의 편에 함경도 관찰사로 있는 박민헌(朴民獻)에게 보낸 시이다.

 

대우(對偶)가 공교하여 허균(許筠)시구(詩句)를 조탁한 것이 이러이러하다[琢句如是如是]’고 평하였거니와 수련(首聯)과 미련(尾聯)의 상응도 잘 이루어지고 있다. 한잔 술을 나누고 다시 만나기로 기약했지만 달이 가고 또 가도 소식을 전하는 기러기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로 끝맺음을 한 솜씨가 그러한 것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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