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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한국사를 시작하면서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프롤로그 - 한국사를 시작하면서

건방진방랑자 2021. 6. 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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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한국사를 시작하면서

 

 

사람과 땅

 

우리의 교육 과정에는 국사(國史)라는 과목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뜻이겠지만, 원래 역사에는 국적이라는 게 없다.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이다. 따라서 국사‘national history’라는 것은 없고 그냥 ‘history’만 있다. 최초의 역사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역사라는 책을 쓸 때부터 역사란 지나간 이야기라는 뜻일 뿐 특정한 국경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사나 프랑스사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 경우 영국이나 프랑스는 나라 이름이라기보다는 땅이나 지역을 가리키는 뜻에 가깝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정식 국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국사라는 말이 익숙하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우리 역사가 보편적인 역사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단일 민족 실은 비교적 동질적인 민족이라 해야겠지만 이 수천 년 동안 한 곳에서 붙박이로 살아온 것은 사실 세계사적으로도 무척 드문 경우에 속한다. 우리와 달리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사라는 이름보다는 지역사에 속하는 역사를 지녀 왔다. 그런 점에서 우리 역사는 국사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우리 역사에서도 정작으로 더 중요한 것은 지역사의 관점이라면 어떨까? 국사가 사람의 역사를 가리킨다면 지역사는 땅의 역사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지역사란 하나의 민족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 그 땅에 살아온 여러 민족과 다양한 문명의 역사를 포함하는 의미다. 따라서 땅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를 포함한다.

 

우리는 흔히 반만 년 단일 민족의 역사라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지만, 실은 그런 따위는 자랑거리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알고 보면 사실도 아니다. 우선 단일 민족의 근거가 되는 단군(檀君)실존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단군이 와서 나라를 세우기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원주민들 이 초보적인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었으니, 유전적으로나 문명적으로나 지금 우리 민족이 모두 하나의 조상에서 비롯된 후손들인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한 사람들 중에는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있었다. 심지어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한민족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다(반도 북부에 살던 여진이 그런 경우다). 우리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보다 땅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외래인 출신인 단군이 한반도에 와서 선진 문명(아마도 미작 농경술)을 전한 것이라든가,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한반도의 역사시대가 개막된 것은 우리 역사가 처음부터 지역사의 일부로 출발했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중국 대륙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에 한반도에서 고대 삼국이 발달했고, 중국이 통일되면서 한반도에도 단일 왕조가 성립한 것은 우리 역사가 동북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인 중국의 역사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후 한반도 정권을 계승한 고려와 조선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겨레나 한 핏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의 역사에 사로잡히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른바 민족사라는 구호 아래 우리 역사를 단일민족의 역사로 포장하는 데 익숙해져 왔다. 그런 관점을 굳이 그르다고 못박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런 색깔의 역사서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 책에서는 비주류를 택하기로 한다. 그래서 이 책은 한민족의 역사라기보다 한반도의 역사.

 

 

 

 

역사와 시사

 

역사를 배우는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건 초등학생도 잘 안다. 하지만 역사에서 어떻게 오늘을 끌어낼 수 있는지는 역사학자도 잘 모른다. 그 이유는 역사를 통사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나비 한 마리가 뉴욕의 날씨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현대 과학의 이론만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는 특정한 사건의 배경에 그 전까지의 모든 사건들이 크든 작든 연관되어 있으므로, 역사는 반드시 흐름으로 인식해야만 정체를 파악할 수 있고 아울러 오늘의 문제와도 접목시킬 수 있다.

 

역사 속에서 특정한 개념이나 인물을 끄집어내서 오늘의 시사와 비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조용조(租庸調)라는 고대의 조세제도를 오늘날의 재정 정책과 비교한다거나, 과거제(科擧制)라는 관리 임용제도를 오늘날의 국가고시와 비교해서 장단점을 분석할 수도 있다. 또한 신라의 김춘추와 지금의 외교관을, 조선의 황희와 지금의 국무총리를 비교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흔히 말하는 역사 속의 교훈이 곧바로 읽히는 건 아니다. 역사 속의 개별적인 사건이나 인물은 스틸사진처럼 그 모습 그대로 가치를 지니는 게 아니라 모션픽처처럼 전체적인 스토리의 한 구성 부분이 되어야만 유의미하다. 영화를 주요 장면의 사진들로만 관람한다면 그건 영화 감상이 아니라 영화 포스터 감상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다른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에게서 찾는 방식도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고려의 무신들은 문신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정변을 일으켰고, 조선의 조광조(趙光祖)는 수구적 훈구파의 역공 때문에 개혁의 날개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보는 게 그런 예다. 물론 틀린 추론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라면 그 전에 먼저 고려 중기가 왜 문신들의 세상이 되었는지, 또 조광조의 꿈(사대부 세상)은 왜 그가 실패한 지 불과 수십 년 뒤에 실현되었는지에 관해 또 다시 설명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해진다면 결국 설명의 연쇄만 낳을 뿐이다. 이런 목적론과 순환론에서 벗어나려면 통사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개별 케이스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학위를 따내야 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면, 역사는 숲을 보고 나서 나무를 보는 순서로 접근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우리 역사의 숲을 개괄함으로써 나무를 알고 오늘을 진단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할 것이다. 역사상의 사건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 해도 그 자체로, 또는 인접한 다른 사건들과의 비교만으로는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설명해 낼 수 없다. 이를테면 고구려가 중국으로 뻗지 못하고 한반도로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후발 주자인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아이러니,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신라 정권의 연장에 그치고 만 역설, 조선이 초기의 왕국화 프로젝트에도 불구하고 중기 이후 사대부 국가로 변질되면서 퇴행으로 빠져든 질곡, 그 사대부 체제의 절정이 말기에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나타나고 끝내 나라를 남의 손에 내어주는 지경에까지 처하게 된 과정, 나아가 그 후유증이 오늘날 우리 정치 무대에까지 연장되고 있는 현상 등등은 모두 개별 사안을 별개로 살펴보는 것보다 통사적인 관점을 유지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현실과 사상

 

원래 역사는 두 가지 방향에서 서술되어야 한다. 하나는 현실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의 흐름이다. 현실의 역사와 지성의 역사는 각기 나름대로의 일관성(coherence)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에 대해 대응성(correspondence)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현실의 역사를 그냥 역사라 부르고 지성의 역사는 사상사(철학사가 대표적이다)라 부르지만, 실은 두 가지가 한데 뭉뚱그려져야 온전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지성이 나오고 지성은 또 현실을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만이 아니라 동양사 전체에서 지성이란 곧 유학으로 대표된다. 중국에서 주나라가 탄생한 기원전 12세기에 유학의 초보 이념인 예()가 생겨났고, 여기에 공자(孔子)가 인()개념을 보태 유학이 성립되었다. 예는 조상에 대한 제사에서 나온 개념이고, 인은 국가 경영의 원리, 즉 정치적 개념이다. 동양 사회가 일찍부터 제정일치적이고 정치적 오리엔테이션이 강한 역사를 전개해 온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처럼 일찌감치 지배 이데올로기가 확립되었기에 동양의 역사와 우리 역사에서는 유학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할 정도다.

 

지금은 유학이라고 하면 철학, 그것도 동양철학의 한 분과로 여기지만, 수천 년 동안 유학은 우리 사회의 정치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였으며, 학문적으로도 단지 철학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학문 일반을 가리켰다. 특히 유학은 중화 사상이라는 또 다른 옷을 입고 우리 역사의 안과 밖에 거의 전일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철학사가 아닌 만큼 이 책에서 별도로 유학을 깊이 논의한 부분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유학의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역사 전체를 관류하면서 중요한 고비마다 역사를 질곡시킨 자취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정신사적 측면이 포함된 탓에 이 책은 불가피하게 비판적 한국사의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 역사를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전반적으로 우리 역사에 빛보다 그늘이 많았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지배 이데올로기가 잘못 구성되고 채택된 데 있다. 중화적 질서를 근간으로 삼는 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역사는 내내 중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화세계가 번영하던 고대에는 상대적으로 선진 문명을 누릴 수 있었으나, 중화세계가 고여 썩어가고 비중화세계(극동에서는 중국 북방 민족과 일본을 가리키지만 세계적으로는 중국과 한반도를 제외한 전체를 가리킨다)가 도약하는 시대를 맞으면서 한반도는 중화세계의 모든 모순이 집약되는 하수 처리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중화의 본산인 중국마저 유학을 포기하는 상황에서도 한반도의 지배층은 중화의 끝자락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던 탓에 소중화(小中華)라는 정신병적 늪에 빠져들기도 했다.

 

물론 그 모든 문제를 유학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또한 유학이 이념으로 채택된 데는 나름의 역사적 필연성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유학 이념이 늘 질곡의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유학 이념에 물든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에서 온갖 모순이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조 교체나 체제 변화가 적었던 이유는, 유학이 (특히 조광조의 시대 이후) 전사회적인 조직 원리로 자리 잡으면서 피지배층에게 복종과 충성, 일종의 국가유기체적ㆍ국가지상주의적 맹신을 불어넣은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현실의 역사든 지성의 역사든, 역사를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을뿐더러 위험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 평가를 마냥 미루면 결국 후대에게 더 어려운 숙제를 남기게 될 뿐이다.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는 것을 역사 읽기의 목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위험하고 무모한비판적 한국사에서 얻을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역사를 반성적(reflective) 거울로 삼아 우리의 참모습을 보려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요긴한 참고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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