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의 개막
마이너 역사
신화로 시작해서 역사를 남긴 고조선과 함께 한반도 역사의 가장 초기 시대도 끝났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단군기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고조선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를 뭉뚱그려 고조선 시대라고 부르는 데, 어떤 면에서는 달리 이름을 지어 붙일 만한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조선이 우리 역사에 남긴 흔적은 상당히 뚜렷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은 언제 있었다 사라졌나 싶을 만큼 자취가 묘연하다. 더구나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은 고조선을 계승하지도 않았고 문명적 연속성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은 어떤 의미일까? 그저 단군이라는 상징적인 시조를 배출한 것뿐일까?
구름에 휩싸인 듯 불분명했던 고조선 시대와는 달리 바로 이어 전개되는 우리 역사는 고조선에 비하면 햇빛처럼 환하다. 이른바 삼국시대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건국 시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는 모두 고조선(위만조선)이 멸망하고 불과 수십 년 뒤에 생겨난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고조선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없었으며, 심지어 고조선의 존재와 역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왜 그랬을까??
앞서 보았듯이 고조선은 처음부터 중국에서 온 외래 문명이었으며, 두 차례 명패를 바꿔 달면서 계속 중국 문명과의 친화력을 높여갔다. 비록 중국 문명과 일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뿌리의 동질성은 내내 유지했으며, 적어도 중국 문명권의 변방으로 역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한나라가 팽창하면서 중국의 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것으로 고조선 문명은 중국 문명의 분명한 일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후 한반도 역사에서 고조선의 위상이 낮았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고조선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중국의 선진 문명을 수입하는 창구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고조선의 멸망은 곧 그 역할이 효용을 다했음을 의미한다. 즉 고조선은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는 곧 이 무렵에 동아시아 세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 문명권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구축된 동아시아의 기본 질서와 구도는 20세기 초반 청나라가 멸망하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2천 년 동안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메이저 문명권 내에서도 몇 개의 마이너 문명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한반도 문명이다【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중국에 대한 역대 한반도 왕조들의 사대주의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문명적 관점에서 중국 문명은 동아시아 세계의 가장 밝은 빛이다. 따라서 이 빛을 중심으로 사방의 작은 문명들이 명멸하는 것은 사실 지극히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천자와 중화세계를 북극성에 비유하고 사방의 제후들과 소문명권들을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二十八宿)에 비유한 사마천(司馬遷)의 유학적 세계관은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올바르게 반영한 사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역사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은 아니다. 고조선 정복을 끝으로 중국은 두 번 다시 한반도를 영토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영원한 변방으로만 묶어두게 된다.
또한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도 중국과의 그런 모호한 관계를 변함없이 유지하며, 중국 문명의 한 마이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앞으로 살펴볼 한반도 역사의 어느 국면에서나 그런 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 문명은 한반도의 것도, 중국의 것도 아닌 어정쩡한 성격의 문명이었다(고대 삼국이 고조선을 계승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런 점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 역사는 한반도의 정식 역사라기보다는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4군이 설치되는 것을 계기로 한반도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과 동시에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제부터는 나름대로 고유한 역사를 전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실상의 한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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