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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1부 깨어나는 역사, 제1장 신화에서 역사로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1부 깨어나는 역사, 제1장 신화에서 역사로

건방진방랑자 2021. 6. 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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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신화에서 역사로

 

 

분명한 시작

 

 

역사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조(始祖)를 둔 민족만큼 부러운 게 또 있으랴? 시조가 있으면 민족의 기원과 역사의 시작이 분명하다. 다만 그렇게 분명한 시작은 역사가들에게 의지할 만한 출발점을 주지만, 그와 더불어 커다란 숙제도 안겨준다. 출발점 자체를 해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는 미궁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기원의 역사중에서

 

 

우리 역사는 처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단군(檀君)이라는 민족의 시조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를 봐도 우리 역사만큼 시조가 분명한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단군은 시조보다 국조(國祖)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시조에 해당하는 존재는 흔히 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시조들은 거의 모두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가 결혼해서 오시리스를 낳았고 오시리스가 누이인 이시스와 결혼해서 민족의 시조에 해당하는 호루스를 낳았다고 믿었다(그래서 이집트의 역대 파라오들은 모두 호루스의 환생으로 자처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 가이아가 크로노스를 낳았고, 그가 레아와 결혼해서 올림포스의 최고신 제우스를 낳았다고 생각했다이집트와 그리스의 신들은 민족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를 만든 창조자이므로 처음부터 근친혼을 통해 자식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신화의 게브와 누트는 쌍둥이이며, 그들의 부모인 슈(공기의 신)와 테프누트(습기의 여신)도 쌍둥이 남매다. 다만 슈와 테프누트는 태양신 라()가 혼자 힘으로 낳았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가이아만 카오스 속에서 홀로 태어났을 뿐 우라노스는 그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크로노스와 레아도 오누이 사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선 동물을 등장시킬지언정 그런 근친혼이 없다. 아마도 이는 유학 이념의 영향일 것이다. 유학에서는 현대까지도 동성동본을 금지할 정도로 친족 개념이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알려진 시기(기원전 2333년으로 추정)보다 훨씬 후대에 생겨났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보기로 하자. 호루스와 제우스는 인간이 아닌 신이지만 이집트 세계와 그리스 세계를 창조했으므로 사실상 두 민족의 시조라고 봐도 될 것이다(민족의 시조란 원래 일반 백성인 법이 없고 신이거나 최소한 지배자의 신분이다).

 

 

이렇듯 신이 다스리는 세계가 먼저 출현하고 그 다음에 인간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시대, 즉 역사 시대가 개막되는 게 민족신화나 건국신화의 기본 코스다. 그런 점에서 단군왕검이라는 인간이 주인공인 우리의 단군신화는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

 

물론 단군도 신과 관련된 인물이기는 하다. 그의 아버지 환웅은 천제(天帝)인 환인의 서자였다. 하늘에서도 서자는 차별을 받았을까? 그는 일찍부터 하늘 세상보다 인간 세상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 관심에 대한 보상으로 아버지에게서 바람과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고 태백산태백산은 오늘날 한반도 북부 또는 랴오둥(遼東)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라는 땅으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세운다.

 

아무리 비천한 인간 세상이라지만 신의 아들로서 신의 도시를 세웠는데 홀아비의 몸으로 다스릴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환웅은 아내를 구한다. 그러나 범상한 여인이 그의 아내가 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의 아내는 희한하게도 사람이 아닌 동물 출신이다. 마침 사람이 되려 하는 곰과 호랑이가 있어 환웅은 그들에게 쑥과 마늘을 주고 인내력을 테스트한다. 결국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지루함을 견딘 곰이 승리해 여성이 되었고, 환웅은 사람의 몸으로 변신하여 그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비록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반인반신(半人半神)이지만 단군은 온전한 인간이므로 이집트나 그리스 신들의 경우와는 엄연히 다르다. 비교하자면 그 신들보다는 로마의 건국자인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가깝다. 쌍둥이의 어머니는 인간 세상의 공주였지만 아버지는 전쟁의 신 마르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의 쌍둥이는 마르스의 자식답게 로마를 건설하자마자 곧바로 인근 부족과의 싸움박질에 몰두한 반면, 단군은 고조선(고조선의 는 후대의 이씨 조선과 구분하기 위한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조선이었다)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평화롭게 다스리는 데 주력한다.

 

차이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단군이 농경문명에 적합한 건국 시조였다는 점이다. 로마가 세워질 무렵(기원전 753년으로 전해진다) 로마 인근에는 여러 부족들이 나름대로 도시를 세우고 활기차게 문명을 건설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단군은 로마의 쌍둥이에 비해 훨씬 안정된 권력을 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경쟁자도 없었을뿐더러 단군은 자신의 백성들, 즉 원래부터 그곳에 살던 사람(한반도 원주민)들에게 전혀 새로운 농경문명을 전했기 때문이다.

 

단군이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농경문명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다는 점, 이 두 가지 사실은 단군신화를 출발점으로 삼는 한반도 문명의 대략적인 성격을 결정한다. 단군은 인간의 신분이므로 한 민족의 조상이 되기에 아주 적합하다. 또 농사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땅이 가장 중요하다. 농사 기술을 전해준 조상과 농사를 지을 땅, 이것은 곧 한반도 문명이 장차 조상 숭배와 농경을 토대로 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오늘날에도 그런 문명의 자취는 뚜렷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아들 중심주의와 효 사상이 그 흔적이다. 전자는 고질적인 사회적 병폐로, 후자는 전통적 미덕으로 간주되지만 사실 두 가지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 농업 사회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농사 기술과 농토를 물려받는다. 다른 말로 바꾸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 생산수단 전체를 아버지에게서 전해 받는 셈이다. 그러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딸보다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며,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어느 덕목보다 중시하는 게 자연스럽다(이런 현실적 이해관계를 이념적으로 고급스럽게 포장한 게 바로 유학이다). 문제는 농경문명을 탈피한 현대 도시 사회에서도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시대적ㆍ공간적 불일치를 빚는다는 데 있다.

 

 

곰족과 호랑이족? 고구려 중대에 그려진 각저총 벽화의 씨름 장면이다. 희미하지만 오른쪽의 나무 아래에 단군신화의 두 주인공인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게 보인다. 그것으로 미루어 단군신화는 고구려시대까지도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화의 곰과 호랑이가 당시 두 부족의 상징이었다면, 이 씨름의 승자는 아마 곰족의 대표선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한 가지 더 있다. 무릇 인류 문명이란 세계 어디서나 수렵채집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발생했다. 따라서 모든 문명은 당연히 농경을 기본으로 한다(문명의 탄생 자체가 정착 생활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니까). 그렇다면 단군이 한반도 토박이들에게 농경문명을 전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일 수 없다. 정작 특이한 일은, 단군은 그냥 농경 문명이 아니라 첨단의 선진 농경문명을 전해주었다는 점이다. 그게 뭘까?

 

그건 바로 미작(米作) 농경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기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도 초보적인 농경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쌀은 한반도에서 가장 늦게 경작되기 시작한 작물에 속한다. 태고적 한반도인들은 조, 기장, 보리, 콩 등을 먼저 경작했고 그런 작물들을 바탕으로 원시적 농경문명을 일구었다. 그러나 단군은 한반도인들에게 미작 농경을 권하고 퍼뜨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군이 새삼스럽게 토박이들에게서 지배자로 인정 받기 어려웠을 것이며, 감히 천제의 후손임을 자처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환웅의 특기도 바로 쌀 농사와 관련된 중요한 요소들(바람과 비와 구름)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쌀은 기본적으로 아열대성 작물이다. 동남아시아의 경우 아주 일찍부터 쌀을 재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기후 조건이 맞았기 때문이다. 또한 황하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의 중원 지역 역시 한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고 강우량 또한 1년 내내 일정하기 때문에 미작에 적합한 조건이다. 그에 비해 한반도는 기온도 낮을뿐더러 강우도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내리기 때문에 저수 시설이 없으면 논 농사에 필요한 많은 물을 대기가 어렵다. 게다가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은 지역이다. 반도 남부는 좀 덜하지만 여기도 논 농사를 지을 만한 대규모의 농토는 부족한 데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곳은 더 춥고 더 평야가 부족한 반도 북부의 평양이다(이 평양은 지금의 평양과 다른 곳으로 추정되지만 랴오둥에서 한반도 북부 사이의 어느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요컨대 미작 경영은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이후 역사 시대 내내 우리 민족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처음부터 여건에 맞지 않는 미작 농경을 주업으로 삼은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군신화가 미작 농경을 암시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신화의 내용에서는 비슷한 점이 없지만 문명의 성격에서는 단군신화와 대단히 흡사한 게 바로 중국의 건국신화다. 중국의 경우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에 이미 초보적인 농경술이 발달했다. 삼황(三皇)의 시대에 중국에서는 농사가 발명되었으며, 오제(五帝)의 시대에는 농법이 완성되었고, 바로 뒤에 하()나라를 건국하는 우()는 황허의 치수(治水)에 성공함으로써 중국의 왕조 시대, 즉 본격적인 역사시대를 열었다. 즉 중국의 건국신화는 중국이 미작 중심의 농경문명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단군신화는 그런 중국의 건국신화를 본떠서 후대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단군신화의 그 분명한 시작은 어느 시점에선가 창조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아니 그보다 단군은 혹시 중국에서 한반도로 와서 미작 농경문명을 전래한 인물은 아닐까동남아시아처럼 기후 조건 자체가 유리한 경우가 아니라면, 쌀 농사에서는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를 알게 해주는 역법이 중요하다. 중국에서는 오제(五帝)의 첫 왕인 황제(黃帝)의 시대에 역법이 만들어졌다고 전하는데, 그 덕분에 중국은 동남아시아 문명보다 훨씬 선진적인 문명을 만들 수 있었고 일찍부터 왕조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달력을 쉽게 구입해서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천체의 운행을 알지 못하면 달력을 만들 수 없었다. 달력이 없다면 왕의 생일 같은 행사도, 군대가 모이고 이동하는 날짜도 확정할 수 없을 테니 국가 체제가 성립할 수 없다. 아마 단군은 중국의 역법을 가져와서 한반도인들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다. 달력이 있어야만 고조선이라는 국가 체제가 생겨날 수 있었을 테니까?

 

 

 

 

누락된 시대

 

 

단군신화를 시작으로 잡는다면 그 후 한반도 역사에는 상당히 긴 누락 기간이 생기게 된다. 서력기원으로 셈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시기는 기원전 2333년으로 알려져 있다(후대에 문헌상으로 추정한 연대인데, 오늘날 우리 역사를 반만 년 역사라고 부르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이 시기는 중국의 오제(五帝) 가운데 요() 임금 시대에 해당한다. 물론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기원전 2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은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어쨌든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일단 그 연대로 가정하고 역사를 추적해보자. 고조선이 세워진 이후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는 사뭇 달라진다. 중국의 경우 요와 순 임금으로 신화적인 오제 시대가 끝나고 우 임금이 하나라를 열어 왕조 시대를 시작하며, 계속해서 은()나라와 주()나라로 이어지게 된다(은나라부터는 유적으로써 실존했음이 입증된 왕조 시대다). 그러나 단군이 한반도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시기는 무려 1000년 이상이 지난 뒤 중국에서 주나라가 탄생할 무렵이다.

 

그럼 그동안 단군은 뭘 했을까? 신화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뒤 단군은 도읍을 평양에서 아사달로 옮기고 수백 년 동안 나라를 더 다스린 다음 중국 주나라의 무왕(武王, 기원전 1169~1116)이 즉위하던 해(기원전 1122)에 무왕이 파견한 기자(箕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사달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아사달에서 190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전한다. 이건 물론 사실이 아닌 신화다. 하지만 신화에서도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고, 또 달리 비빌 언덕이 없는 우리로서는 신화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원전 24세기에 등장한 단군이 기원전 12세기까지 1000년 이상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신화는 어떤 역사를 담고 있을까?

 

우선 단군이 그토록 오랜 기간 왕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2천 세에 가깝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든 해석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사실 세계적으로 보면 그런 장수만세 설화는 드물지 않다. 점토판으로 전해지는 수메르의 왕들도 200~300년씩 재위한 기록을 많이 남겼을뿐더러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는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에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800~900년씩 장수를 누린 인물들이 연달아 등장한다그에 비해 비슷한 시기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거의 정상적인 재위 기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집트 문명이 고대 세계 최고(最古)의 선진 문명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비록 단군처럼 무려 1908년이나 산 인물은 신화 가운데서도 거의 최고 기록에 해당하지만 어쨌든 그런 내용의 신화는 흔하다는 이야기다.

 

 

그 내용 자체는 물론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건질 게 없을 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수메르의 왕들과 아담의 자손들은 실제로 장수한 게 아니라 아마도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짙다. 예컨대 아담이 930년을 살았고, 그의 아들 셋이 912, 또 셋의 아들 에노스가 905년을 살았다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실제로 그 개인들이 그렇게 장수했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과 셋과 에노스가 각각 930, 912, 905년에 달하는 각 시대의 건국자라는 뜻일 것이다. 아직 왕조의 개념도 없었고 문자의 발달도 미약했던 때였으니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면 굳이 지배자의 이름을 바꿀 필요는 없었을 것이며, 더욱이 후대의 평범한 지배자들은 자연스럽게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선배이자 영웅의 이름을 계속 간직하려 했을 것이다(이집트의 파라오들이 호루스의 환생임을 자처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후대의 서양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다잘 알려진 사례는 로마 시대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의 경우다. 그는 원래 이름이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였으나 양아버지가 죽자 재빨리 그 이름을 자기 이름 속에 끼워넣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중에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받아 다시 한번 개명하게 된다. 아버지의 이름을 잘 써먹은 경우다. 그밖에 고대 아시아의 사르곤, 키루스, 알렉산드로스, 또는 중세 서유럽의 왕명으로 자주 등장하는 샤를(카를, 찰스, 카롤루스)이나 앙리(하인리히, 헨리, 엔리케) 등의 이름들도 모두 위대한 조상의 이름을 후손이 대대로 써먹은 사례다.

 

그렇다면 단군도 한 명의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일종의 왕가 이름이었거나, 혹은 동양적인 정서를 더 고려한다면 직함의 명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단군은 지배집단의 이름이거나 지배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에 전승되면서 마치 특정한 사람의 이름인 것처럼 바뀌었을 테고, 더 후대에는 건국 시조로 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후 기자에게 왕위를 넘길 때까지의 천여 년 동안 단군이 어떤 일을 했고 고조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즉 이 시기는 한반도 역사에서 누락된 공백기다. 이렇듯 나라를 세운 시기에 관한 기록이 약간이나마 남아 있는 데 비해 그 후의 기나긴 시기에 관한 기록이 일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군신화가 후대에 창조되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하지만 그래도 중국의 연대와 맞추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만큼 단군신화의 기본 골조는 무척 오래 전부터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단군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고려 시대의 문헌이지만, 단군신화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언제 생겨난 것으로 봐야 할까?

 

 

고대의 왕명록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기록된 고대의 왕명록이다. 연대로 치면 우리의 단군에 앞선 시대의 왕들인데, 이들 역시 단군에 못지 않게 수백 년씩 장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실제로 그랬다는 뜻이 아니라 아마 이들을 대표자(혹은 건국자)로 하는 왕조들이 수백 년 동안 존속했다는 뜻일 터이다.

 

 

지금까지 말한 단군신화의 성격을 정리해 보면 그 시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한반도의 토박이들을 다스렸다.

단군은 그 토박이들에게 미작 중심의 농경 문명을 전달했다.

단군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지배집단과 관련된 명칭이다.

단군은 중국에서 주나라가 성립할 때까지 한반도 역사를 이끌었다.

 

에서 우리는 단군 이전에도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은 이집트나 그리스의 신들과 달리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라 기존의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서 온 인물이다. 여기서 하늘이란 곧 한반도가 아닌 다른 곳을 뜻한다고 보면 단군은 한반도의 외부에서 온 지배자라고 할 수 있다. 단군의 어머니가 한반도 원주민이 아닌 웅녀라는 사실도 그 점을 강조해준다.

 

이 추론에 의 내용을 더하면 단군은 오래 전부터 미작 농경이 발달해 있던 중국에서 온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중국의 중원은 황허라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였으므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 전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말하자면 진짜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미작 농경을 하지 않았으며, 문명의 단계도 아주 낮았을 것이다. 게다가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천제 환인의 서자라는 사실은 단군의 뿌리가 중국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은 단군이 한반도인들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 오랫동안 자기 고향에 해당하는 중국과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향을 등진 기간이 실제로 천여 년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상당한 기간 동안 지배집단이 (단군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불릴 만큼 지배집단의 성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단군 집단은 애초부터 중국에서 삶의 기반을 완전히 잃고 동쪽으로 대규모로 이주해온 무리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는 주나라가 세워진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단군 지배집단이 고조선의 지배자라는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에 해당하며, 한반도가 다시 중국 역사와 접촉하게 되는 과정을 말해준다.

 

이런 해석을 통해 단군신화의 탄생 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단군 신화는 중국에서 밀려난 어느 부족이 동쪽으로 와서 현지의 원주민(한반도인)들에게 미작 농법을 전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지배집단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신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최소한 중국에서 주나라가 성립된 이후일 것이며, 그 지은이는 단군의 진짜 후손들일 것이다. 그들은 직계 조상인 단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까지의 역사 기록을 토대로 그런 신화를 만들었을 것이며, 주나라 계통의 새로운 지배집단에 대해서는 당연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전쟁 기록이 없는 걸 보면 그 양위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이나 마찰은 없었던 듯하다)단군의 후손들이 구술로만 조상 신화를 남긴 게 아니라면 그들은 아마 문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 한자가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이며,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기원전 2세기를 넘지는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문명이 존재하는데 문자가 없을 수는 없으니까 단군조선에서도 모종의 문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럼 그건 어떤 문자였을까? 일설에 따르면 우리의 옛 글자에 가림토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나중에 훈민정음의 토대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가림토든 뭐든 당시에 사용하던 문자는 한자를 변형시켜 만들었을 것이다. 중국의 한자도 최종적으로 정형화된 시기는 기원전 3세기 말 진 시황제의 시대였고 그 이전까지는 지방마다 쓰는 글자와 문법이 달랐다. 고조선 문자는 그런 한자의 변종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조선 문자가 우리 고유의 문자 한자냐를 논하는 것 역시 쓸데없는 일이다.

 

그럼 단군은 어떻게 되는 걸까?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일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단군이 그 전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던 우리의 진정한 조상들을 다스린 지배집단일 뿐이라고 보면 그는 우리 민족의 시조가 아니다. 그러나 그 아득한 옛날에 이주민과 원주민의 구별이 그리 뚜렷한 것일 수는 없다. 더욱이 원주민이라고 해도 동질적인 집단이었던 것은 아니며 단일민족의식 같은 건 더더욱이 없었다(단군의 지배를 정복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반도에 선진 문명을 전하고 최초의 나라를 세운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다. 결국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는 역사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이야기다. 오늘날에도 걸핏하면 종교와 역사학계에서 벌어지는 단군을 둘러싼 역사적인 논쟁따위에 이제 더 이상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중국에 주나라가 성립하는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단군의 시대는 갔고 이제 기자의 시대가 왔다. 무혈 쿠데타를 산뜻하게 성공시킨 기자는 어떤 인물일까?

 

 

두 점의 단군 영정 위쪽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 지정한 단군의 표준 영정이고, 아래쪽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만주에서 그려진 영정이다. 자세나 얼굴이 닮은 것으로 보아 왼쪽 영정이 오른쪽 것을 참고했음 직하다. 이런 영정은 우리 민족이 생물학적으로 단일한 혈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어딘지 그 의도가 불순해 보인다.

 

 

두 번째 지배집단

 

 

기자는 원래 중국 은나라의 신하였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역사상 유명한 폭군이다(원래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은 실제와 무관하게 폭군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새 왕조의 건국 세력이 전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난잡한 파티를 뜻하는 주지육림(酒池內林)이라는 말이 그에게서 나왔을까? 그런 자에게 충신의 말이 통할 리 없다. 기자는 주왕에게 충언을 했다가 그만 미움을 사서 옥에 갇힌다. 그러나 결국 무왕(武王)의 쿠데타로 은나라가 무너지자 기자도 석방되었다.

 

새로 주나라의 문을 연 무왕은 은나라의 정치범인 기자를 어떻게 대했을까? 당시 기자는 높은 경륜과 뛰어난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아마 무왕은 그를 자기 사람으로 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충신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 2500년 뒤 조선의 이방원정몽주(鄭夢周)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되자 그를 살해해 버렸지만 무왕은 그보다 통이 컸던 모양이다. 그는 뜨거운 감자가 된 기자를 먼 곳으로 떠나보냈는데, 그때 기자가 선택한 곳은 바로 한반도가 있는 동쪽 땅이었다(중국 측 사서에는 당시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책봉했다고 되어 있지만 중국이 한반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대륙 통일을 이룬 뒤부터이므로 아마 후대에 덧붙인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자가 이끄는 무리는 고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기자와 단군(檀君)은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아무래도 문명의 본토이자 단군 집단의 먼 고향인 중국에서 주나라 왕의 허락을 받고 기자가 왔다는 사실이 무시하지 못할 권위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정권 교체로 오랜 사직을 이어오던 단군조선은 무대 뒤로 퇴장하고 다시 새로운 고조선이 성립되었다. 이 고조선을 당시 사람들은 뭐라 불렀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편의상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 부른다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 그리고 나중에 나오는 위만조선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고 그냥 고조선이라고만 말하는 게 보통이다. 그 이유는 지배집단만 교체되었을 뿐 고조선의 기본 성격과 체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아마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이 중국계였으므로 민족적 자존심에 거슬린다고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 구분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진행하면서 고조선과 중국의 연계가 더욱 밀접해지는 추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기서는 과거의 용어들을 계속 사용하기로 한다. 물론 당시에는 정권 교체 시마다 별도로 국호를 정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 이름들은 순전히 오늘날의 편의상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 국내 역사학계에는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단군을 한반도의 토착 세력으로 여긴다면 기자가 외부로부터 와서 단군조선을 대체했다는 게 영 찜찜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단군의 경우에도 한반도 토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까마득한 고대에 토박이냐 아니냐를 엄밀하게 따질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내외의 경계가 뚜렷해야만 그런 구분이 가능할 텐데, 그 시대에는 중국에도 한반도에도 그런 민족적 경계나 강역 상의 구분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단군조선이든 기자조선이든 실제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영역으로 삼은 영토국가는 아니었으며, 어쩌면 혹시 고만고만한 여러 부족집단들 중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후대에까지 흔적을 남기게 된 부족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자조선을 왜곡하려는 시도는 기자조선을 부각하려는 시도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어쨌든 기록에 이름이 전하므로 기자조선에 관해 어느 정도의 추측은 하고 넘어가야겠다.

 

기자를 떠나보내기 전에 무왕(武王)은 정치 9단인 기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경략을 한수 배운다. 서경(書經)에 전하는 홍범 9(洪範九疇)’가 바로 그것인데, 이 가르침은 기자 자신에게도 요점 정리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모양이다. 기자는 그것을 토대로 고조선에서 팔조법금(八條法禁)을 만들어 시행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여덟 가지 조항 중 세 조항밖에 없지만 남을 해치거나 도둑질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조항이니까 그로 미루어 전체 내용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팔조법금이라니까 이름은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상 그 내용은 지극히 평이하다. 아무리 수천 년 전의 옛날이라 해도 불과 여덟 개의 형법 조항으로 고조선 사회의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아마 당시 고조선은 상당히 단순한 사회였고 세력권도 그리 넓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굳이 비교하자면 팔조법금보다 600년 가량 앞선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은 무려 282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름으로만 기자조선으로 구분할 수 있을 뿐, 사회 체제는 선대의 단군조선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탓에 기자조선도 역시 단군조선의 경우처럼 처음 성립한 시기에 관한 기록만 있을 뿐 그 후 어떤 변화와 발전 과정을 거쳤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시기 구분상으로 신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단군조선과 달리 기자조선 시대부터 한반도는 청동기 문명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밖에 기자조선에 관한 상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기자 개인은 단군에 비해 훨씬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지만, 그 후의 고조선은 단군 시대처럼 여전히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반면 한반도에 기자조선이 성립하던 시기부터 중국의 역사는 구름 속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먼저 중국의 변화부터 보자.

 

 

책봉과 가르침의 교환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책봉하는 장면이다. 마루 한가운데 두 인물 중 오른쪽이 무왕이고 왼쪽이 기자다. 무왕은 기자를 책봉함으로써 정치적 서열을 정했지만, 그 대가로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 9라는 책략을 전했으니까 막상막하라고 할까? 그러나 개인들 간에는 그랬을지라도 후대에 중요해진 것은 역시 정치적 서열이다.

 

 

300여 년 동안 중원 일대를 지배하던 주나라는 점차 주변 세계가 문명의 빛으로 밝아짐에 따라 오히려 영항력이 줄어들게 된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은 기원전 771년 견융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호경(鎬京)에서 동쪽의 뤄양(洛陽)으로 옮기는 치욕을 당하고, 왕실만 겨우 보존하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이 사건을 주의 동천(東遷)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신호탄으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개막된다. 이때부터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약 550년 동안 중국은 통일적인 구심점이 사라지고 제후국들이 주름잡는 기나긴 분열시대를 보낸다. 제후들은 상징적으로는 주나라 왕실을 섬기고 있으나 사실상의 독립군주나 다름없다.

 

이 화려한 분열의 시대에 중국 문명은 (그 후 두 번 다시는 그런 시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양 사상의 뿌리도 그 무렵에 생겨났다. 그 사상들 가운데서도 으뜸은 바로 유학 이념의 탄생이다. 유학공자(孔子, 기원전 552~479)가 창시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훗날 수천 년 동안 동양 사회의 모든 부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거대한 학문 체계가 어느 한 순간에 어느 한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을 리는 없다. 유학 이념의 뿌리는 가까이 보면 주나라가 성립한 기원전 12세기로, 멀리 보면 중국 문명의 탄생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탄생한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핵심은 줄곧 충효 사상에 있다. 유학은 인간 세계가 수직적인 질서로 짜여 있다고 보고, 하위 질서는 상위 질서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유학이 체계화되는 것은 한()나라 때의 일이지만, 충효의 기본 이념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중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었다(그랬기에 분열기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각 제후들은 내내 명목 상으로나마 주나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보존했으며, 결국에는 대륙의 정치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중국은 전형적인 농경문명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고대 이집트와 같은 대추야자 농사, 고대 그리스와 같은 올리브나 포도 농사와는 달리 사람의 손이 많이 가고 생산기술이 중시되는 쌀 농사의 문명이다. 앞서 말했듯이 미작 농경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농토와 농사 기술이다. 따라서 조상을 신격화하고 종교화하는 사상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황허 문명이 발생한 기원전 3000년경부터 유학의 뿌리는 있었다고 봐야겠다.그 이념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발전하고 체계화된 것이 바로 예()의 사상이며, 이것을 모태로 해서 성립한 국가가 바로 주나라다. 공자(孔子)는 그 예의 개념에 인()개념을 더해 유학을 창시했지만, 유학 이념을 사실상 완성한 나라는 주나라였다. 공자가 늘 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삼았던 이유, 나아가 그 이후에도 수천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서 내내 존주(尊周) 사상이 유지되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유학의 란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 의식에서 나온 개념이었고, 여기에 공자(孔子)가 추가한 ()’이란 곧 정치의 원리였다(‘은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자 이념을 뜻한다). 따라서 유학은 처음부터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단군신화에서 유학의 색채가 엿보이는 것은 바로 그 점에서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는 것, 백성들에게 미작 농경술을 비롯한 선진 문명을 전달했다는 것,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일찍부터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다스렸다는 것 등의 내용은 원시적인 유학 이념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이유에서도 단군신화는 중국에서 주나라가 성립된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렇게 중국의 역사가 기틀을 잡아가는 시기에 한반도의 역사는 다시 기나긴 침묵 속에 빠져든다. 주나라와 기자조선이 성립한 기원전 12세기부터 전국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221년까지 약 천 년 동안 한반도에는 여전히 고조선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어떻게 존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사실 고조선이 존속했던 것도 확실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단군조선의 경우에는 하다 못해 단군이 2000세 가까이 살면서 다스렸다는 신화라도 전하지만, 기자조선은 얼마나 그 사회 체제가 유지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로서는 일단 다른 변화가 있기 전까지 고조선은 계속 기자조선의 체제로 존속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국 대륙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고 정치 지도가 확정되면서 드디어 고조선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친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중국 문명권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황하 문명이 탄생한 이래로 오랫동안 중원 일대에만 국한되었던 중국 문명은 주나라가 무너지고 제후국들이 판치는 세상으로 바뀌면서 화북과 화중을 아우르게 되며, 춘추 시대 말기에 초()ㆍ오()ㆍ월() 등의 제후국들이 흥기하면서 양쯔강 이남, 즉 강남까지 퍼져나간다. 이것으로 중국 대륙 전체가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변화는 남쪽보다 북쪽의 확대다. 중원의 북부에는 고비 사막이 버티고 있으므로 북상하는 중국 문명권은 자연히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랴오둥 방면으로 팽창한다. 전국 7웅 가운데 하나인 연()나라가 자리잡은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고조선이 다시금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가장 가까운 중국의 제후국인 이 연나라와 얽히면서부터다(나중에 보겠지만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연나라는 삼국시대까지 한반도 문명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메이저 문명과 마이너 문명 원래 중원에서 시작된 중국 문명(황허 문명)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면서 동심원적으로 팽창했다. 따라서 중원이 중심인 것은 변함없으나 남쪽으로는 멀리 강남까지 확대되었으며, 북쪽으로는 진시황제가 건설한 만리장성까지 넓어졌다. 덕분에 애매해진 것은 북동 방면의 랴오둥과 한반도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후 중국의 농경문명과 북방의 유목문명 사이에서 독특한 마이너의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

 

 

중국과의 접촉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은 진나라의 시황제였지만 진은 불과 14년 만에 멸망하고, 유방(劉邦)의 한()나라가 항우의 초()나라를 물리치고 새로운 통일 제국을 열기 때문에 실질적인 중국 최초의 제국은 한나라. 그러나 통일을 이루었다지만 아직 신생 제국의 힘으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크게 확장된 넓은 대륙을 직접 통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 고조 유방은 기존의 제후 세력들에게 복종과 충성을 서약받고 봉토를 주어 다스리게 한다. 이 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중국식 봉건제(封建制)원형이 만들어진 셈이다(유방보다 더욱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시황제는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한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한 바 있다).

 

이 새로운 체제하에서 제후들은 황제인 천자(天子)에 의해 으로 임명되었다(진나라와 달리 변방이 현에서 국으로 격상되었으니 지배자도 당연히 왕이 된다). 실제로 각 왕들은 자기 영토 내에서 사실상의 자치권을 누렸으며, 중앙정부에 조세와 공물을 정기적으로 바치고 오랑캐 외적의 침략을 막으면 될 뿐 중앙정부로부터 별다른 간섭을 받지는 않았다. 중원 동북방에 자리잡은 연나라 역시 그런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연나라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랴오둥 반도, 이곳은 고조선의 영향권이다. 따라서 연나라는 어떤 식으로든 고조선과 만나지 않을 수 없는데, 예정되어 있던 그 접촉을 가속화시킨 것은 한나라 중앙정부의 정책 변화다.

 

신생 제국이 점차 안정을 찾으면서 자신감을 얻은 한나라 정부는 변방의 왕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원래 제국이란 중앙집권적 구심력과 봉건적 원심력 둘 다를 필요로 한다. 중앙정부는 물론 구심력을 선호하지만 워낙 넓은 영토를 중앙집권으로만 다스릴 수는 없으므로 타협책으로서 봉건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황제의 카리스마가 강해지면 중앙에서는 언제든 구심력이 더 크게 작용하게 마련이다. 반면 변방의 왕들은 반대로 원심력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한 황실의 압력이 거세어지자 연나라는 더 바깥의 고조선을 호시탐탐 노려본다.

 

그럼 연나라의 타깃이 되고 있는 고조선의 정세는 어땠을까? 기자조선이 성립한 이후 한반도 역사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그래도 1000년에 달하는 오랜 기간에 아무런 일도 없었을 리는 없다. 아마 그 시기에 고조선은 서서히 문명의 빛을 더해갔고 세력권도 조금씩 넓혀갔을 것이다. 특히 기원전 4세기에는 한반도 문명도 철기 시대로 접어들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제법 사회 체제도 발달하고 영토의 개념도 구체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고조선의 힘으로는 선진 문명권 중국의 강력한 제후국인 연나라를 당해내기란 어렵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문제가 터진다. 연나라 왕 노관이 한 황실의 배척에 못 이겨 북방의 흉노 제국으로 망명해 버린 것이다. 졸지에 왕이 사라지자 연나라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장수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노관을 모시고 있던 위만(衛滿)이라는 자는 흉노 대신 동쪽의 고조선을 택한다. 고조선의 입장에서는 또 다시 천 년 만에 맞게 된 대륙의 선진 세력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김부식(金富軾)진이 망하고 한이 일어나는 난리에 중국인들이 많이 해동으로 도망해 왔다는 옛 기록을 인용하고 있는데, 어떤 기록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무튼 당시에는 중국의 일반 백성들도 난리를 피해 한반도 쪽으로 대거 이주한 듯하다.

 

 

그 무렵 고조선을 다스리고 있던 준왕(準王)은 위만에게 벼슬을 내주며 환대했으나 위만의 속셈은 후진국인 고조선의 관직에 있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노려 왕위를 찬탈할 속셈이었다. 과연 이후의 사정은 그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위만의 성공 사례에 자극받은 연나라의 하급 관리와 유민들이 잇달아 짐을 꾸린 것이다. 게다가 산둥을 터전으로 하는 제()나라나 멀리 중원 옆에 있는 조()나라의 백성들마저 동방 길을 택하면서 고조선으로 오는 유민의 수는 급증한다. 이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원래 준왕은 위만에게 서쪽 변방의 수비를 맡겼는데, 이는 곧 동쪽으로 오는 중국의 유민들을 차단해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되고 만다. 오히려 고향 사람들의 이주로 힘을 얻은 위만은 주인을 내몰고 고조선의 왕위에 오른다. 기원전 194년의 쿠데타, 이것이 우리 역사상 최초로 연대가 확실히 알려진 사건이다. 고양이를 호랑이로 키운 준왕은 뱃길로 남쪽으로 달아나 한반도 중부의 어느 곳(오늘날 경기도 광주, 충청남도 직산, 전라북도 익산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에서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오래 가진 못했다그가 어떤 나라를 세웠느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고조선에 남은 그의 자식들이 한()씨 성으로 불렸다는 점이다. 실제로 준왕은 망명지에서도 자신을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토착 성씨이자 가장 한국적인 성이라 할 한씨는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데, 그 기원이 바로 준왕이다(그렇다면 그가 정착한 곳은 오늘날 충청남도 직산이라는 설이 옳을 것이다).

 

 

이제 고조선은 한층 더 중국과 밀접해졌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시대에는 지배집단만 이주민이었으나 위만조선 때부터는 관리들과 백성들의 상당수가 중국 출신이다. 사실 우리 역사니까 고조선을 마치 독립적인 나라인 것처럼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아마 한나라의 동북쪽 변방에 위치한 일개 지방에 불과했을 것이다. 아울러 중국인과 한반도인 같은 구분도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제국에 반기를 든 유민들이기에 위만조선을 보는 한나라 중앙정부의 눈길은 고울 수가 없었다. 다만 한나라 조정으로서는 아직 동북 변방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처지가 못 된다. ? 바로 흉노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자(漢字)와 한족(漢族) 등 중국적인 것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전할 만큼 한나라는 중국 역사의 뿌리가 되는 제국이지만, 개국 초에는 중원 북방의 흉노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처지였다. 어느 한족 처녀가 마치 잔 다르크처럼 활약하면서 흉노의 선우(單于, 황제)를 물리치는 내용을 그린 디즈니 만화영화 뮬란은 당시의 역관계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개국한 지 50여 년이 지나 제국이 안정되는 한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 ~87)의 시대에 이르러 그 관계는 역전된다. 무제는 흉노와의 해묵은 빚을 청산하고 흉노를 멀리 서쪽으로 쫓아 버린다(이 흉노의 민족이동은 수백 년 뒤 유럽에서 로마제국을 무너뜨리는 세계사적 변혁을 부르는데, 이에 관해서는 종횡무진 동양사를 참조하라), 최대의 강적을 물리쳤으니 그 다음은 탄탄대로다. 무제는 이 참에 중국의 주변 세계를 모두 중화 질서 속에 편입시키려는 원대한 전략을 전개한다이런 무제의 구상은 이후 중국의 모든 한족 제국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수나라의 양제, 당나라의 태종,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 등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한 무제처럼 대륙 통일을 이룬 뒤 곧바로 북변 정리를 제1의 과제로 설정한다. 그때마다 한반도의 왕조들도 진통을 겪게 되는데, 앞으로 그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동북방의 고조선도 그 구도에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로 인해 천 년 이상이나 존속했던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과는 달리 위만조선은 문을 연 지 불과 한 세기도 못 되어 존망의 위기를 맞는다.

 

 

한 무제의 꿈 한 무제가 파견한 서역 원정대의 모습이다. 그는 개국 초부터 한나라를 괴롭혀 오던 흉노를 몰아내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그밖에도 고대로부터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길로 널리 알려져 있던 비단길을 원정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그 화려한 대외 정복의 와중에 랴오둥과 한반도에는 네 개의 군이 설치되었으나 이것은 한 무제의 주력 사업은 아니었다.

 

 

지배인가, 전파인가

 

 

어차피 한나라 초기의 권력 공백을 틈타 성립한 나라였기에, 위만조선은 처음부터 한시적 수명밖에 누리지 못할 운명이었다. 언제라도 제국이 안정된 기반 위에 오르면 동북 변방에 위치한 위만조선은 즉각 제국의 토벌 대상이 되리라. 과연 한 무제는 흉노를 멀리 내쫓은 다음 곧바로 동북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에게 고조선은 천자에 대한 충성을 팽개치고 반기를 든 나라일 뿐 아니라 랴오둥의 패자로 군림하면서 부근의 중계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얄미운 존재였으며, 자칫 흉노의 잔당과 결합한다면 간신히 꺼놓은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만들 수도 있는 골칫거리였다.

 

이윽고 한 무제는 칼을 뽑았다. 기원전 109년 그는 5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고조선 정벌을 명한다. 한 갈래는 만리장성이 끝나는 산해관을 통해, 다른 한 갈래는 산둥에서 뱃길을 통해 랴오둥을 공략하려는 구상이다. 한편 위만의 손자로 3대째 고조선을 다스려온 우거왕(右渠王)은 이미 전쟁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나라 조정에 입조하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부한 것은 결전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자세다. 더욱이 그는 고조선에 온 한나라 사신이 어느 장수와 다툼을 벌이다 그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사신을 보복 살해함으로써 제국과 일체의 타협도 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결국 이 사건은 선전포고가 된다.

 

우거왕은 과연 항전의 의지만큼 승산에 대한 믿음도 있었을까? 그건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고조선은 예상 외로 오래 버텼다. 한나라는 수도인 왕검성을 1년 이상이나 공략한 끝에 비로소 고조선을 정복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사건은 변방 정리 작업에 불과한 작은 일이었지만, 한반도 역사에서는 엄청난 격변이었다. 이로써 단군조선 이래 2천 년 동안 존속해 오던 고조선이 마침내 최종적으로 멸망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땅이 한나라의 영토로 바뀌었으니 이제 제국의 행정 체제에 따라 재편되는 것은 당연하다. 알다시피 한나라의 기본 체제는 군국제(郡國制). 초기에는 중앙정부의 힘이 약한 사정을 감안해서 봉건제의 속성을 취할 수밖에 없었으나, 무제의 시대에 이르러 오히려 진 시황제를 능가하는 강력한 황제의 권력이 생겨났으니 이름은 변하지 않았어도 이때부터의 군국제는 사실상 군현제(郡縣制)나 다름없다. 전국을 중앙집권적으로 편제하려는 무제의 의도에 따라 제국의 중앙정부는 랴오둥과 한반도 북부 지역을 네 개의 군으로 편성하는데, 그게 바로 낙랑 (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4이다한 무제가 꼭 고조선만을 괴롭힐 목적으로 한4군을 설치한 것은 아니다. 무제의 시절에 한나라의 영토는 크게 팽창했는데, 주요 정복지마다 한4군과 같은 군을 두어 변방의 방어에 주력하게 했다. 예컨대 월남, 즉 오늘날의 베트남에는 9군을 두었으니 말하자면 베트남 역사에서는 한9군인 셈이다.

 

4군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넓게 보면 랴오둥에서 오늘날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임은 분명하지만, 각 군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한반도 남부에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일찍이 준왕도 거기서 새 왕조를 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남부는 아직 힘의 공백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낙랑군은 현재의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였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낙랑군을 기준으로 추측해 보면, 진번군은 기원전 82년에 낙랑군과 통합되는 것으로 미루어 낙랑의 북부, 즉 압록강 하류와 랴오둥 부근인 듯싶다. 그렇다면 임둔군과 현도군은 낙랑-진번의 동쪽, 그러니까 만주 남부와 오늘날 한반도의 동북부까지 아우르는 지역일 것이다. 기원전 82년에는 임둔군도 현도군에 통합되어 4군은 2군으로 축소되며, 곧이어 7년 뒤에는 현도군이 옛 고조선 세력의 저항을 받아 북쪽의 만주로 밀려나면서 사실상 낙랑군만이 남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한4군은 고대에 겪은 민족적 치욕 정도로 간주될 뿐 별로 중시되지 않고 있다. 물론 당시 고조선에도 그것을 치욕으로 여긴 백성들이 적지 않았을 법하다. 고조선이 중국 문명의 전통적 영향력을 받아오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중국 왕조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원전 2세기라면 어느 정도 원시적인 민족의식도 생겨났을 테니 한나라의 지배에 대한 저항감은 제법 팽배했을 것이다.

 

 

 

4군의 흔적 현재 평양시에 남아 있는 무덤 유적이다. 기단이 벽돌로 쌓여 있고 주변에도 벽돌담이 둘러진 축조 방식은 원래 중국식이다(한반도의 경우 삼국시대 중기까지 원형봉토식 무덤이 일반적이었다). 이 고분이 낙랑의 것임을 말해 주는 증거다. 4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에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지금의 평양을 포함하는 평안남도였을 게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군이 우리 역사의 태동기에 한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사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4의 지배 역시 양면적이다. 정복지를 지배했던 만큼 피정복민에 대한 상당한 정치적인 억압이 뒤따른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 지배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명이 한반도에 이식되는 과정이 더욱 가속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4세기 초반까지 존속한 낙랑군은 한반도에 왕조 시대가 개막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중국의 사상(유학)과 문자(한자)가 전래된 것은 바로 낙랑이라는 중국의 전초기지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낙랑군이 없었다면 과연 고구려가 한반도의 왕조 시대를 열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한군의 이민족 지배는 우리 고대사의 질곡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봐야 하며,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일부로서 편입되어야 마땅할 것이다(더욱이 군국제(郡國制)의 속성이 그렇듯이 한4군은 중앙정부로부터 거리상으로 먼 만큼 상당히 독립된 일종의 자치국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조선의 멸망으로 한반도 역사는 이제부터 중국의 역사와 뗄 수 없는 연관을 가지게 된다. 고조선의 변천 과정에서도 그런 흐름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거치면서 고조선은 조금씩 중국 문명권에 가까워졌다. 물론 지리적으로 가까워졌다는 게 아니라 중국 문명권과 한반도 문명권이 각각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접촉하기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메이저 문명과 마이너 문명이 만났으니 어느 쪽으로 통합이 이루어질 것인지는 뻔하다. 위만조선의 멸망을 문명사적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독자적 발전을 해오던 고조선의 소문명권이, 통일 제국을 이루고 본격적으로 문명의 전파에 나선 중국의 대문명권에 통합된 것에 해당한다. 결국 한나라의 고조선 정복은 침략과 지배라기보다는 문명의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러운 확산이었던 것이다이런 점에서 우리와 비슷한 고대사를 가진 나라가 영국이다. 고대에 브리타니아(영국)는 원래 켈트족이 살던 지역이었으나 당시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고조선이 한나라의 침공을 받으면서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듯이, 브리타니아도 로마가 해협을 건너 침략하면서부터 비로소 알려진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기원전 1세기 무렵으로 서로 비슷하다. 한 무제의 역할을 한 사람은 물론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무제와 달리 그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브리타니아를 공략했다). 고조선이 저항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한군이 설치되면서 중국의 선진 문명권에 편입되었듯이 브리타니아도 역시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결국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라틴 문명권에 들어간다. 그러나 한군을 애써 무시하려는 우리와는 달리 오늘날 영국인들은 로마의 지배에 항거한 민족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로마 문명의 세례를 받은 것도 역시 중요한 역사적 모멘트였다고 생각한다

 

 

낙랑봉니 봉니(封泥)란 말 그대로 진흙으로 봉한 것을 가리키는데, 고대에 대나무로 된 문서를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도장이 찍힌 봉니를 붙였다. 낙랑봉니는 낙랑군의 위치를 말해준다는 주장도 있고, 일각에서는 일제가 조작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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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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