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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심경호,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 - 2. 김시습,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심경호,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 - 2. 김시습,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건방진방랑자 2022. 10. 24.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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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경주 남산의 산실에서 여섯 해가 지날 무렵, 어린 성종이 등극하였다. 김시습은 새 왕이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래서 벼슬을 살 생각으로 유교 경전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던 서거정(徐居正)은 달성군에 봉해져 예문 관대 제학을 하고 있었다. 김시습은 서거정에게 차나 부채를 예물로 보낸다든가, 시를 보내어 옛 정분을 다시 확인하였다. 하지만 서거정은 그를 기이한 승려로 보았을 뿐이다. 사실 현실은 결코 이상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세조의 찬탈을 도왔던 훈구파는 그들의 세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김시습은 서울 동쪽 수락산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그가 거처하던 곳에는 1669년에 이르러 박세당이 석림암을 두었다석림암(石林庵)은 반남 박씨의 재궁(齋宮) 사찰로 있다가, 1698년에 홍수로 사우(寺宇)가 유실되었고, 그 뒤 복원되었으나 또다시 1745년에 홍수로 유실되었다. 이 때문에 석림사가 그 아래 위치에 건립되었는데, 6·25 때 전소된 것을 1965년에 신축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는 안동준의 김시습 문학사상 연구(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1994)를 참조하시오. 박세당의 석림암기에 따르면, 그 위치는 채운봉(彩雲峰) 서남쪽 기슭, 소향로(小香爐)의 북쪽이라고 하며, 본래 매월당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수락산 시절에 불교와 도교의 도를 더욱 깊이 연찬하였다. 불교의 교리를 논한 십현담요해서(十玄談要解序)대화엄경계도서(大華嚴經界圖序)가 이 시기에 나왔다. 그러면서 그는 세속과 관계를 끊겠다고 다짐하여 도연명(陶淵明)의 삶을 흠모하였다. 세모에 성 동쪽 폭포 머리맡에 거처하였는데, 청송과 백석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는 도연명의 귀전원 시의 뜻을 흠모하여 그 시에 화운한다[歲晚 居城東瀑布之頂 靑松白石 甚愜余意 和靖節歸園田詩]라는 제목으로 다섯 수를 지었는데, 그 제1수는 다음과 같다.

 

晚居城東陲 水石勝廬山 세모에 도성의 동쪽 끝에 거처하니 수석이 여산보다 낫도다.
卜築依寒巖 窮居逾數年 찬 바위에 의지하여 터잡아 집짓고 궁하게 산 지 서너 해.
玄豹隱南山 神龍襲九淵 검은 표범은 남산에 숨고 신룡은 구룡연에 잠겼다.
修我玄牝門 鋤我絳宮田 내 현빈(玄牝)의 문을 닦고 내 강궁(絳宮, 마음)을 김매어
足以保殘生 豈戀浮沈間 남은 목숨 보전하리니 어찌 세상의 영욕에 연연하랴.
野鹿馴階除 山鳥鳴簷前 들 사슴은 섬돌에서 순하고 산 새는 처마 머리에 지저귀누나.
讀罷蕊珠經 古篆消香煙 예주경(도가서) 읽고나 향 연기는 전자(篆字)를 그리며 사라진다.
尋芳東澗涯 採藥南山巓 동쪽 시냇가로 방초를 찾고 남산 머리에서 약을 캐나니
一拋利名場 萬事多閑閑 명리 세상을 버리매 만사가 한가롭기만 하다.
笑傲北窓下 自喜陶陶然 북창 아래 거들먹대며 홀로 기뻐 희희거리노라.

 

남산의 표범은 안개비가 내릴 때는 털빛이 상할까봐 산을 나와 가축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열녀전(列女傳)도답자처전(陶答子妻傳)에 나온다. 표은(豹隱)이라는 숙어가 있게 된 이 고사를 끌어와, 김시습은 당대의 세상에서 벼슬을 사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현빈의 문를 닦겠다고 하였는데, 현빈의 문은 곧 진여(眞如)의 마음이다.

 

김시습은 탈속한 삶을 살았으되, 적정주의(寂靜主義)에 빠지지 않았다. 진여는 현실 공간을 벗어난 다른 곳에 일층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농사를 감독하면서 농민들의 삶에 공감하고, 배불리 먹는 무리들에 대한 증오로 치를 떨었다. 그는 하궤장인(荷簣丈人)과 달랐다. 세상일을 과감하게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김시습은 너무 일찍 신동으로 알려졌고, 성격도 거칠어서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웠다. 그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광기를 발하고 농담과 익살로 세속을 조롱하였으며, 사람들이 자기의 그런 몰골을 보고 손가락질하면 더 좋아하였다. 그의 광기는 세상일에 분개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고위 관리의 임명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기에 그 사람이 그 직책을 맡게 되었는가라고 하면서 여러 날씩 통곡하였다. 좋은 절기를 만나면 명수(明水)와 향불을 갖추어 현인들을 예배하든지, 혹은 높은 바위벽에 올라가 눈물을 흩뿌리고는 하였다. 어떤 때는 밭 갈고 김매는 농사꾼의 형상을 백여 개쯤 나무로 깎아 책상 곁에 벌여 놓고 종일토록 응시하다가는 문득 통곡하고 태워버렸다. 또 중들에게 화전을 갈도록 하고 나무통을 여러 개 만들어 그 속에 술을 담가두고는, 바가지로 권하여 마시게 하고 자기도 두어 달씩 마셔댔다.

 

현실 공간을 벗어난 다른 곳에 절대 가치의 세계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김시습은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세상의 결함을 목도하고 애처로움을 느꼈고, 그만큼 광기를 수시로 발하였다.

 

 

 

 

 

 

인용

목차 / 지도

1. 금오신화?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7)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8) 에필로그

3. 판본의 문제

1) 조선시대 초기 목판본 금오신화가 발견되었다

2) 금오신화는 언제, 몇 편이 지어졌는가

3) 금오신화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4. 금오신화의 텍스트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5.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6. 금오신화가 창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7. 금오신화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8. 금오신화는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9. 김시습의 저술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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