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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심경호,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 - 2. 김시습,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심경호,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 - 2. 김시습,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건방진방랑자 2022. 10. 24.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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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시습의 어릴 적은

 

 

김시습은 자()가 열경(悅卿)이고, 호는 청한자(淸寒子)와 매월당(梅月堂), 동봉산인(東峯山人) 등을 사용하였다. 근본은 명주(溟州) 즉 강릉의 오래된 가문이라고 한다. 그 집안은 일찍부터 많은 명공과 문장 석학을 배출하여 왔다. 증조 김구주(金久柱)는 고려 때 안주목사를 지냈다. 조부는 겸간(謙侃), 혹은 윤간(尹侃)이라고 하며, 오위부장(五衛部將)을 지냈다. 부친 일성(日省)은 음직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봉해졌으나 병약하여 취임하지는 않았다. 김시습의 가까운 시기의 직계는 무반(武班)의 직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그 집안이 무계였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충순위는 14457월에 유음자손(有蔭子孫)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된 병종(兵種)으로, 가자(加資)되는 기간이 매우 짧았다. 조선초에는 경제력 있는 사자(士子)들이 무과를 통하여 발신하려 한 예가 많았으므로, 무반 직을 받았다고 하여 가계가 무계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김시습이 무계 집안에서 태어나 장성하면서 좌절을 맛보았다고 보는 설이 있는데, 수긍하기 어렵다. 모친은 선사 장씨(仙槎張氏)이다. 김시습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고조부 한신(漢臣)의 아우 한경(漢卿)의 현손 덕량(德良)이 계자(系子)로 들어와 가계가 오늘에 이어진다.

 

김시습은 1435년 반궁(성균관) 북쪽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는 외조부의 훈도를 입었다. 천품이 뛰어나, 족조(族祖)인 최치운(崔致雲)시습이라 명명하고 설()을 지어 장래를 기대하였다. 세 살 때부터 한문을 지을 수 있었으며, 다섯 살 때는 크게 문리에 통하여 오세(五歲)’라고 불렸다. ‘오세오세(悟歲)’와 발음이 같으니, 다섯 살이 곧 문리를 깨달은 해라는 의미이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439, 그는 수찬 벼슬로 있던 이계전(李季甸, 1404~1459)의 문하에서 대학(大學)중용(中庸)을 공부하였다. 이계전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이자,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자이다. 김시습은 이계전의 큰아들 이우(李堣)와 함께 수학하였는데, 이우는 한산 이씨의 재자(才子)로서 세조성종조에 활약한 이파(李坡)ㆍ이봉(李封)의 형이었다.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조수(趙須)는 그에게 열경(悅卿)이라는 자를 붙여주고 자설(字說)을 지어 주었다. 조수의 본관은 평양, 자는 향보(享父), 호는 송월(松月) 또는 만취(晩翠), 당시 집현전 학사들에게 한유(韓愈)의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1401년의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으나, 1409년에 민무구(閔無咎) 형제가 제거되고 그의 서형(希敏)과 아버지()가 사사될 때 연좌되어 30년간 금고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438년에 최만리(崔萬理)ㆍ김빈(金鑌)ㆍ이영서(李永瑞)와 함께 왕명에 따라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을 새로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자는 본래 성인식인 관례(冠禮) 때에 지어 받는 것이지만 김시습은 조숙하여 일찌감치 자를 받은 듯하다. 바로 이 다섯 살 때 김시습은 세종의 장려를 받았다. 7,8세에는 경전에 통달하였고 아홉 살에는 시문을 즉석에서 지었다.

 

그 뒤 김시습은 당시의 석학 김반(金泮)에게서 논어맹자시경서경춘추등을 수업받았다. 김반은 권근의 문인이며, 세종조의 집현전원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김구(金鉤김말(金末)과 함께 경학 삼김(經學三金)’으로 일컬어졌다.

 

또 김시습은 1447년 무렵, 윤상(尹祥, 1373~1455)의 밑에서 주역예기를 공부하였다. 윤상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까지 지낸 인물이다. 당시 윤상은 이미 75세의 고령이었다.

 

그런데 김시습은 열다섯 살에 모친을 잃고 말았다. 그는 낙향하여 외조모의 보양을 받다가, 탈상한 뒤 18세 되던 1452년에 서울에 올라왔다. 김시습은 이때 조계사(曹溪寺)에 머물면서, 준상인(峻上人)에게서 불교를 배웠다. 준상인은 곧 고승 함허당(涵虛堂) 기화선사(己和禪師, 1376~1433)의 제자인 홍준(弘峻)이다.

 

김시습은 아마도 1452년 경에,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을 지낸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듯하다.

 

 

 

 

 

 

인용

목차 / 지도

1. 금오신화?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7)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8) 에필로그

3. 판본의 문제

1) 조선시대 초기 목판본 금오신화가 발견되었다

2) 금오신화는 언제, 몇 편이 지어졌는가

3) 금오신화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4. 금오신화의 텍스트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5.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6. 금오신화가 창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7. 금오신화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8. 금오신화는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9. 김시습의 저술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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