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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심경호 -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②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심경호 -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②

건방진방랑자 2022. 10. 24.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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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오신화(金鰲新話)의 텍스트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완성된 직후에는 비교적 널리 읽혔던 것 같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를 비롯한 몇몇 문헌들을 통하여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희귀본이 되고 말았다. 조광형(趙光亨)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답한 서한에서,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자기 집에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아마 송시열도 금오신화를 읽고 싶어하였으나, 돌아다니는 판본이 희귀하였기 때문에 읽지 못하였던 것 같다.

 

국내에서 일찍 사라진 이 책은 오히려 일본에 전하였다. 즉 일본의 오오까(大塚) 집안에 220년 동안 보관되어 오던 것이 1653년 중춘에 곤산관도가처사(崑山館道可處士)에 의하여 목판 간행되었다. 이것이 일본 국회도서관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는 일본식 훈독을 위한 가에리()과 오꾸리가나(假名)가 붙어 있다. 겉표지의 제전(題箋)에는 도춘훈점(道春訓點)’이라고 쓰여 있다. 도춘은 1600년대 일본의 저명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의 법명(法名)이다. 그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고문으로서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창업에 기여한 바 있으며, 임진왜란 때 쿄토(京都)에 억류 중이던 조선의 유학자 강항(姜沆)과 교류하며 조선의 성리학을 수학하여 일본 주자학의 단초를 열었던 인물이다이노구치 아쯔시(猪口篤志)일본한문학사(심경호 외 역, 소명출판사, 2000)를 참고하시오. 훈점을 붙일 만큼 그가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열심히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일본에서는 1660(일본 萬治 3) 중하에 간기(刊記)를 개각한 판본이 나왔다. 이 판본은 곤산관도가처사 간행본을 저본으로 삼아, 도춘훈점까지 그대로 복각하였다. 일본 텐리(天理)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673(일본 寬永 13) 중춘에는 승경 2년의 출판소 이름을 지우고 복삼병좌위문판행(福森兵左衛門板行)’이라는 간기를 붙인 판본이 나왔다. 역시 텐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다가 일본 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1884(일본 明治 17)에 동경(東京) 매월당(月堂)에서 상ㆍ하권 2책으로 재간되었다. 이 재간본에는 책의 윗부분 광곽(匡廓) 안에 평어가 적혀 있고, 광곽 밖에 인명ㆍ지명ㆍ시일 등에 대한 주()가 붙어 있다. 그리고 당시의 일본 한학자들이 서ㆍ발ㆍ비평을 적었다. 발문 2편 가운데 1편은, 한말의 정계 및 종교계에서 활동했던 이수정(李樹挺)이란 인물이 썼다. 이 책에도 일본식 훈독 표기가 붙어 있다. 일본의 여러 도서관과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동경 매월당의 재간본은 1927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1957)에 의해 계명(啓明)19호에 영인 수록되었다. 이로써 국내에서 금오신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한편 1952년에 정병욱(鄭炳昱) 님은 필사본 전기소설집 속에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이 전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필사본은 신독재(愼獨齋)의 수고(手稿)인데, 신독재는 조선 중엽의 학자 김집(金集, 1574~1656)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의 필사시기는 1656년 이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 신독재가 곧 김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금오신화(金鰲新話)의 현대어 역주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가원(李家源) , 금오신화(金鰲新話), 현대사, 1953.

이가원 역, 금오신화(金鰲新話), 통문관, 1959.

조선고전문학선집, 김시습작품선집, 조선문학예술총동맹, 1963이 책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와 함께 시와 산문을 초록하여 번역하였다.

이재호(李載浩) , 금오신화(金鰲新話), 을유문화사, 1972년 초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 매월당집3책 수록 금오신화, 1978이 책의 번역과 주석은 이재호 님의 역주본 내용과 유사하다.

이재호 역, 금오신화(金鰲新話), 과학사, 1980,

편자 미상, 김시습, 해누리, 1994이 책은 북한 조선문학예출총동맹 출판사의 김시습작품선집에서 시를 빼고 금오신화와 산문 초록 부분을 표기만 바꾸어 간행한 것이다.

 

 

이번의 역주는 따렌 도서관 소장의 조선 목판본을 저본(底本)으로 삼고, 글자의 차이가 큰 곳에는 교감 내용을 밝히기로 한다. , 이체자의 경우에는 인쇄출판의 편의상, 컴퓨터에서 통용되는 글자체를 이용하였다.

 

 

 

 

5.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수록된 다섯 작품이 지닌 주요한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을 등장인물로 하였으며, 시대적 배경이 현실적이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고려말 왜적의 침략을 배경으로 하였고,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 두 작품은 외적의 침략으로 민족 구성원의 삶이 유린당한 사실을 아프게 그려 내었다.

 

한편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옛 도읍 평양을 무대로 삼아, 풍경 속에 민족사의 흐름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조선초에 유행한 지옥 신앙을 소재로 삼으면서,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하여, 올바른 이념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의 악()의 상태를 고발하였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은 비현실적인 환상의 공간을 그려보이되, 그 개성의 박연폭포에 연관된 용 전설을 소재로 삼았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인물들은 이체험을 하면서 일상의 희노애락을 더욱 확실하게 경험한다. 그들은 불완전한 보통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이생ㆍ양생ㆍ홍생은 물론,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의 박생ㆍ한생도 실은 범부일 따름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대체로 작자 자신을 본보기로 하고 있어서, 이야기 속에 자서전적 내용이 담겨 있다.

 

 

둘째, 귀신ㆍ염왕ㆍ용왕ㆍ염부주ㆍ용궁 같은 비현실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현실적인 것의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내었다. 비현실적 소재들로 허구화된 이야기 속에는 당시의 지식인 및 민중들이 지녔던 심리적 고통과 사상적 고뇌가 투영되어 있다.

 

이를테면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중심 내용인 귀신과의 결연담은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에 나오는 귀교(鬼交)의 이야기를 계승한 측면이 있다. 또한 그 주인공 양생(梁生)은 남원의 토성(土姓)이어서, 이 소설은 양씨 가문의 설화를 토대로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이가원(李家原)조선문학사(태학사, 1995)를 참조하시오.

 

그리고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에서 박생이 염마왕으로 취임하는 것은 이색적인 허구의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민간의 전승을 계승한 것이다. 수서(隋書)에 입전(立傳)되어 있는 한금호(韓擒號)란 인물은 죽어서 한염라(韓閻羅)가 되었다고 전하며, 송대의 공명정대한 인물들이었던 구준(寇準)ㆍ범중엄(范仲淹)ㆍ포증(包拯)도 모두 죽은 뒤에 염라왕이 되었다고 믿어왔다. 이렇게 속인이 염라왕이 된다고 믿는 전승은 우리 나라에도 있었을 법하다. 김시습은 그러한 민간 전승을 이용하여, 현실계의 부조리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 등장하는 조강신(神江神)ㆍ낙하신(洛河神)ㆍ벽란신(碧瀾神)은 동아시아의 수신(水神) 사상의 계보를 잇되, 조선 민중의 수신 사상을 직접 반영하고 있다. 그 신들이 매우 생동적이고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김시습이 당시 민중의 수신 사상을 참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셋째, 문어체 문장이나 시는 대상을 서정적으로 미화하고 등장인물의 심리, 사건 전개의 암시, 인물과 사건에 대한 작가의 심정적 평가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하였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예외이지만, 다른 네 작품은 모두 시(절구ㆍ율시ㆍ배율ㆍ고시ㆍ잡언장편고시)나 사()ㆍ초사체(楚辭體)ㆍ악장(樂章)을 이용하여 정경과 사건의 흐름을 묘사ㆍ서술ㆍ암시하였으며, 극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에서 여러 여인들의 심리를 각기 다른 시풍 속에 담아낸 것은 문학적 수사의 극치를 이루었다. 우리 문학에서 보면, 시의 삽입은 본래 설화가 문헌으로 정착될 때 이야기의 진행이나 등장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장치로 진작에 활용되었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에 수록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에서 아미타불의 화신인 여인은 남암(南庵)과 북암(北庵)에서 각각 칠언절구와 오언율시를 남김으로써 아미타불의 뜻을 제시하였다. 금오신화에 시가 삽입된 것은 이처럼 설화의 전기소설적 편성에서 축적된 문학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서는 곽개사ㆍ현선생의 자기소개 내용을 유머러스한 가전체의 방백으로 처리하여 가전체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연극적 효과를 낳았다.

 

 

 

 

6.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배경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문학사적 전통이다.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서사문학의 원초 형태인 설화가 끊임없이 발생하여 전승되고 변모되었고, 신라말 고려초에는 전기소설의 요소를 갖춘 우리 소설이 발생하여, 그것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각 지역별로 설화를 정착시킨 풍토기(風土記)나 소설집이 실제로 발견되지는 않고 있으나, 이미 고려 중ㆍ후엽에는 많은 설화문학이 소설로 변모되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수이전(殊異傳)의 일문(逸文)이나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 실린 일부 설화들은 소설적인 요건들을 상당히 갖추고 있다. 금오신화와 같은 완성된 형태의 소설이 출현할 문학사적 기반이 진작에 마련되어 있었다.

 

한편 금오신화(金鰲新話)라는 소설집이 나오게 된 것은 사상사의 흐름에서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건설자들은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집권층의 생활기반을 확립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소외된 일부의 지식인들은 민중의 처지에 동조하면서 새 왕조의 이념적 모순과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시습이었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에서 작가는 우주의 이치로서 정도(正道)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고자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덕망이 있어야 하며, 천명(天命)이 떠나버리고 민심이 이반하면 임금도 자리를 지킬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은 또한 인간 개개인의 본래성이 당시의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그 자각에서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소설로 담아냈다.

 

한편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출현하게 된 외래적 요인으로는 명나라 구우(瞿佑, 1347~1427)전등신화(剪燈新話)가 유통된 사정을 고려할 수 있다【『전등신화는 조선 전기의 시문과 전기소설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연산군이 15064월 임술에 전등신화전등여화(剪燈餘話)의 간행을 명할 만큼, 전등신화등이 문장가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명의 구준(丘濬)오륜전비기(五倫全備記)를 윤색하고 한글로 번역한 낙서거사(洛西居士)1531년에 쓴 오륜전비기서(五倫全備記序)에서, “민간의 무식쟁이들이 언자(諺字)를 배워 노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베껴 밤낮 떠들고 있는데, ‘이석단(李石端) 취취(翠翠) 이야기같은 것은 음설망탄하여 도무지 취해 볼 만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석단과 취취의 이야기 가운데 취취는 전등신화취취전(翠翠傳)을 가리키는 듯하다. 전등신화는 이미 1494년에 조선본이 나왔으니, 민간에서 한문으로 전사되거나 한글로 번역되어 유통되었으며, 혹은 구전(口傳)을 통해 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낙서거사는 아마도 환혼담(還魂談) 등의 전기적(傳的) 요소를 두고 음설망탄하다고 하였던 듯하다. 심경호의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일지사, 1999)을 참조하시오. 김시습은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높이 평가하여, 매월당집4전등신화(剪燈新話)의 뒤에 적다[題剪燈新話後]라는 시를 남길 정도였다. 사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전등신화(剪燈新話)등목취유취경원기(騰穆醉遊聚景園記)에서 착상을 얻었고,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위당기우기(渭塘奇遇記)에서 착상을 얻었으며,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등목취유취경원기기(騰穆醉遊聚景園記)감호야범기(鑑湖夜泛記)에서,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영호생명몽록(令狐生冥夢錄)에서,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용당영회록(龍堂靈會錄)에서 일부 착상을 얻었다. 소급하여 말한다면, 금오신화(金鰲新話)의 환생담이나 귀신 설화는 중국의 지괴소설인 수신기(搜神記)이래의 문학적 전통을 이은 측면도 있다.

 

하지만 금오신화(金鰲新話)전등신화(剪燈新話)의 모방작이 아니며, 수신기의 지괴담을 직접 이은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 소재는 이미 조선 민중의 상상력의 세계에서 취하여 온 것이 많다. 또한 우리 문학사에서 전기소설이 창작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기에 금오신화가 출현할 수 있었다벌써 나말 여초에, 아도원광서학연오세오탈해왕선덕왕죽통미녀노옹화구보개지귀등 설화적 요소가 강한 서사물에서부터, 온달설씨녀도미백운제전수삽석남김현감호조신최치원등 소설적 허구성이 강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의 전기 서사물이 발달하였다. 금오신화는 우리 문학의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7. 금오신화(金鰲新話)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문학적ㆍ철학적 가치에 대하여, 기왕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 주목하여 왔다【『금오신화에 관한 기왕의 연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임형택(林熒澤), 현실주의적 세계관과 금오신화, 국문학연구13, 서울대학교 국문학연구회, 1971. / 이재호(李載浩), 금오신화 고, 작자 김시습의 저항정신을 중심으로, 논문집14, 부산대학교, 1972. / 조동일(趙凍一), 초기 소설의 성립과 초기 소설의 유형적 특징, 한국소설의 이론, 지식산업사, 1977. / 정병욱(鄭丙昱), 금오신화 서설, 한국고전의 재인식, 홍성사, 1979. / 설중환(薛衆煥), 금오신화의 신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1983. / 김명호(金明昊), 김시습의 문학과 성리학 사상, 35, 일지사, 1984. / 박혜숙(朴惠淑), 금오신화의 사상적 성격,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1986. / 안동준(安東濬), 김시습 문학사상 연구,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1994. / 박희병(朴秉), 전기소설의 미학, 돌베개, 1997. / 최귀묵(崔貴默), 김시습 글쓰기 방법의 사상적 근거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1997. / 윤채근(尹采根),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월인, 1999. / 윤주필(尹柱弼), 한국의 방외인 문학, 집문당, 1999. / 이학주(李學周), 동아시아 전기소설의 예술적 특성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1999..

 

(1)

이재호 님은 금오신화를 김시습의 삶과 연결시켜, 단종의 손위(遜位) 사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에서 남원 여인의 환신이 삼대를 통해 양생을 받들겠다고 약속한 것은 작가가 세종에게서 받은 은총을 끝까지 보답하겠다는 염원을 보인 것이고,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의 최처녀가 도적의 칼날에 쓰러지면서까지 정조를 지킨 사실은 김시습 자신이 세조 정권에 지조를 팔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에는 기준(箕準)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사실과 약질인 선녀가 조상의 도움으로 천상으로 올라간다는 사건이 서술되어 있는데, 앞의 것은 세조의 정권탈취를 은연 중 가리키고, 후자의 선녀는 어린 단종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에서 박생이 염라왕의 다음 직책을 맡는 것은 찬탈자 세조를 저승에서나마 처단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서 작가는 세종의 은총을 입은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고 있으며, 한생은 작가 자신을, 용왕은 세종, 용녀는 문종과 단종을 그려낸 것이라고 하였다.

 

작중의 사건이나 인물을 작가의 일생과 무매개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문제점이 없지 않다. 다만 작품 곳곳에 작자 김시습의 삶이 배어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렇기에 이 설은 참고로 해야 할 측면이 있다.

 

 

(2)

정병욱 님은 봉건적 속박으로부터의 인간성 해방내지 자유 연애의 제창금오신화(金鰲新話)의 주제라고 보았다.

 

 

(3)

임형택 님은 금오신화의 기본사상을 기일원론적 현실주의로 규정하였다. 즉 이 소설은 기일원론적 사유에 기초하여 미신적ㆍ비합리적 생활의식을 비판하고 이성에 기초한 민본적 정치 체제를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사실 김시습은 생사와 번뇌의 현실을 초탈할 필요가 있지만 생사와 번뇌의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현실주의 정신으로 불교사상을 받아들였고, 그렇기에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불교로써 불교를 부정하는 역설적 수법을 동원하였다.

 

 

(4)

김명호 님은 김시습이 성리학에 입각하여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는 관점에서 금오신화(金鰲新話)를 해석하였다. 예컨대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에서 다루어진 애정 갈등의 주제는 불교의 금욕주의에 맞서 인륜의 틀 내에서 인간의 정욕을 긍정한 성리학적 인성론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려말 이후 불교가 타락하여 그 극단적인 금욕주의의 이면에 성 풍속이 문란하게 되었는데, 김시습은 이 같은 풍속상의 갈등을 문제시하고 남녀의 애정 실현을 통해 인간성과 인륜에 대한 신뢰를 보여줌으로써 시대적 추세를 반영하였다는 설이다.

 

 

(5)

박희병 님은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주인공들은 작자의 고독과 그에 따른 심리감정을 형식화한 것이고, 비극적 결말 구조는 현존하는 세계를 부정하면서 초월하기를 희망하는 작자의 심리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 현존하는 인간 세계는 대단히 부정적인 것이며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은 고독과 우수로 점철된 비극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작자는 이계(異界)를 설정함으로써 현존하는 세계의 부정적 면모를 비판하는 한 편, 있어야 할 세계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리고 세계와 운명의 횡포 앞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묘사하여 횡포한 세계도 인간의 자기결단과 주체적 의지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6)

역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이승이든 저승이든, 속세든 용궁이든, 실재하는 현실 공간이든 상상 속에서 그려낼 수 있는 상징의 공간이든, 그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원만구족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자기 자신에게, 또 분별지에 휘둘리고 있는 독자에게, 이 소설은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결함계(缺陷界)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결함계 속에 살아가는 등장 인물들은 모두가, 완전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슬픔을 느끼는 존재들이며,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하여 그 슬픔을 공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각은 결코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유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살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자기 혁신의 고투를 개개인에게 요구한다.

 

김시습은 매월당집23에 수록된 잡설()의 한 논문에서, 천당ㆍ지옥의 설을 허설(虛設)’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불교에서 교()는 방편이니 권도와 진실을 병행한 것이고, ()은 곧바로 가리키는 것[直指]이니 순전히 참된 말이다.” 이것은 선의 직지를 일정하게 평가한 말이다. 그렇다고 김시습은 선종에 몰입한 불교도는 아니었다. 매월당집에 실린 시문을 보면 그는 유가적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더 강하다. 그는 현실 속에 살면서 현실을 부정하려고 고뇌하였다. 그는 “12부의 불경에서 인연으로 비유하는 따위의 일은 모두 부처가 진실된 마음에서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러한 그에게 어떠한 종교나 철학적 사상도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으며, 기의(機宜)에 곡순(曲順)하는 언설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는 선사이면서도 부처를 좋아하지 않았다김시습보다 20세 연하로서, 그를 추종한 남효온이 수락산 은둔 시절의 김시습에게 준시(贈東峯) 2수 가운데 첫수에서 한 말이다. “시문으로 이름 떨친 지 삼십년 되었건만, 서울로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으셨네. 수락산 앞바위는 때 만나 빼어나고, 뜨락의 나무들도 봄 맞아 아름답다. 선사께선 불법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은 모두 시짓기 능하도다. 스스로 한스러운 건 몸이 묶여 있어서, 스승 찾아 뵈올 뜻 이루지 못하기에[文名三十載 足不履京師 水落前巖得 春來庭樹宜 禪師不喜佛 弟子摠能詩 自恨身纏縛 尋師意未施].” 남효온은 이 시에서 김시습을 시인이라 불렀다. 물론 그 시인은 현실을 우울하게 응시하여 고통과 슬픔을 담아내는 그런 시인이었다. 남효온이 김시습과 주고받은 시에 대해서는 김성언(金性彦)남효온의 삶과 시(태학사, 1997)를 참조하시오.

 

김시습은 모든 상대적인 가치의 부정을 통해서 본래적 자아를 찾고자 시도하였다. 그가 보기에, 자기의 본래성을 직지(直指)’하는 일이야말로 결국 불완전한 현실성을 극복하고 본래성을 찾는 유력한 작략(作略)이었던 것이다.

 

 

 

 

8.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일본의 소설 오토기보코(伽婢子)에 영향을 주었다. 오코기보코는 아사이 료오이(淺井了意, ?~1691)1666년에 지은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은 일본 괴담소설을 대표하며, 68화의 번안물로 이루어져 있다. 아사이 료오이는 번안을 할 때에 오조소설(五朝小說)로부터 44,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로부터 18화를 이용하였고, 금오신화(金鰲新話)로부터 2화를 이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 직접 번안한 것은 그리 많은 양이 아니다. 다만 금오신화(金鰲新話)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소설의 세계가 이 작품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금오신화(金鰲新話)는 국내에서는 운영전과 같은 전기소설로 계승되었다. 직접적인 영향관계는 고증할 수 없으나, 구성과 문제, 삽입시의 활용 등 여러 면에서 운영전금오신화를 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9. 김시습의 저술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6에 보면, “매월당은 금오산에 들어가 책을 써서 석실(石室)에 넣어두고 이르길,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入金鰲山 著書藏石室 曰後世必有知岑者]”라는 기록이 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는 매월당이 쓴 시는 수만여 편에 이르지만, 널리 퍼져 나가는 동안에 거의 흩어져 사라져 버렸고,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몰래 자기의 작품으로 삼았다라는 기록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21 ‘경주부 용장사조항에서는 김시습의 저술로 매월당시집금오신화(金鰲新話)이외에 역대연기(歷代年記)를 열거하였다.

 

또한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14에 의하면, 김시습의 작품으로 금오신화(金鰲新話)이외에 임천가화(林泉佳話)가 있어, ‘본집에 들어있다고 하였다. 현전하는 활자본 매월당집에는 임천가화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허목(許穆, 1595~1682)미수기언(眉叟記言)에서는 매월당의 저작에 사방지(四方志)1,600편과 기산(紀山), 기지(紀志)200편이 있으며 따로 시권(詩卷)이 있다라고 하였다. 사방지사유록(四遊錄)이 별행(別行)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기산기지는 별행된 시권을 말하는지 확실치 않다.

 

1669년에 민주면(閔周冕)동경지(東京誌)를 개수하여 편한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사유록태극도설(太極圖說)두 책의 판목이 경주 정혜사(淨惠社)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동경지의 기록을 계승한 듯하다. 태극도설매월당집의 잡저에 수록되어 있는 태극설과 같은 내용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동경잡기에는 매월당은 성리(性理)ㆍ음양(陰陽)ㆍ의복(醫卜) 등 백가(百家)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문장이 호한(浩汗)하고 거리낌 없다. 그의 저서 중 매월당시집역대연기금오신화(金鰲新話)등이 세상에 널리 행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도 동경지의 기록을 계승한 것이다.

 

이상의 문헌 기록으로 볼 때 김시습의 매월당시집·매월당시사유록(사방지)기산기지태극도설역대연기금오신화(金鰲新話)임천가화(林泉佳話)등이 각기 단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시습 문집의 간행을 처음 주청한 인물은 이세인(李世仁, 1452~1516)이었다. 그는 김시습이 죽은 지 18년 뒤인 1511315일에 김시습 문집의 간행을 주청하였는데, 중종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김시습의 문집이 간행된 것 같지는 않다. 10년 뒤인 1521년에 이자는 매월당집서문을 쓰면서, 자신이 10년간에 걸쳐 김시습의 문집 3권을 수습하였다고 적었다.

 

그리고 1582년 가을에 이르러 선조가 당시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에게 김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16에는 선조 154~5월 기사에 그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계절에 차이가 있다. 어쨌든 선조는 1582년에, 이자ㆍ윤춘년이 수집하였던 김시습의 유고를 운각(芸閣), 즉 교서관에서 인쇄해 내게 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이산해가 서문을 쓴 재주갑인자본 매월당집2311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활자본에 대하여는 갑인자가 아니라 경진자라는 설이 있다. 이 책은 국내에 낙질로 전하고, 일본 호사분코(蓬左文庫)에 완질이 전한다. 그리고 이 활자본에 보유편을 붙인 신활자본이 1927년에 김시습의 후손 김봉기(金鳳起)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그밖에 매월당시사유록이 따로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이 전한다. 또한 송석하(宋錫夏) 님이 소장하였던 필사본 매월당고가 있다. 이 사본에는 문집에 실려 있지 않았던 시편들이 실려 있다.

 

그리고 김시습의 불교 관계 저술로 대화엄일승법계도주십현담요해의 두 책이 목판으로 출간되어 있다. 조명기(趙明基) 님의 소장본이 전한다. 이 두 책은 김시습이 수락산에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묘법연화경별찬이 명원산고(溟源散稿)에 전한다. 이것은 김시습이 내불당에서 연화경을 번역하던 무렵에 저술된 것 같다. 이밖에 천자여구(千字儷句)명원산고(溟源散稿)에 전한다.

 

김시습의 유고는 윤춘년에 의하여 일단 편찬되었으나, 현전하는 시문집은 선조의 어명으로 교서관에서 재편ㆍ간행한 것이다. 윤춘년은 김시습에 관한 속설을 취하였다고 전하므로, 그가 편찬했던 김시습의 선집에는 유가의 저술과는 다른 시문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었을 법하다. 이에 비해 1582년 교서관에서 문집이 재편ㆍ간행되었을 때는 의리충절의 이념을 제시한다는 명목 하에 원래의 시문들이 취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서관 간행의 문집에는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수록되지 않았다.

 

 

 

 

인용

목차 / 지도

1. 금오신화?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7)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8) 에필로그

3. 판본의 문제

1) 조선시대 초기 목판본 금오신화가 발견되었다

2) 금오신화는 언제, 몇 편이 지어졌는가

3) 금오신화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4. 금오신화의 텍스트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5.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6. 금오신화가 창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7. 금오신화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8. 금오신화는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9. 김시습의 저술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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