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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①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심경호 -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①

건방진방랑자 2022. 10. 24.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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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오신화?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조선 전기의 천재 문인이자, 사상가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창작한 단편소설집이다. 김시습은 현실 상황을 우울하게 응시하고 인간 존재의 문제와 결함(缺陷) 세계의 본질을 소설구조로 형상화하였다. 모두 5편이 현재 전하는데 인간과 귀신의 만남 남염부주[저승세계]와 용궁으로의 여행을 소재로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룬 전기소설(傳說小說)전기소설(傳奇小說)이란 중국 당나라 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소설의 한 양식이다. 당 나라 때 문인들은 온권(溫卷)을 만들어 문장력을 과시하고 출세의 기회를 잡으려고 하였는데, 문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기소설을 창작하는 예도 많았다. 배형(裵刑)은 기문(奇聞)을 모아 전기(傳奇)3권을 엮었다. (() 때에는 희곡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전기(傳奇)는 기이한 것을 전한다는 뜻으로, 이는 기이한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하거나 허구적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육조(六朝) 시대에 괴이한 일을 단순히 기록하고 인과(因果)를 밝혔던 지괴(志怪) 소설과는 구별된다. 이렇게 전기라는 용어는 중국문학에서 발생하였지만, 이야기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거나 창작하는 문학 전통은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 각 지역의 설화와 그것을 문헌으로 기록한 서사기록물이 존재하였고, 다시 신라 수이전(殊異傳)삼국유사의 일부 이야기처럼 허구적 창작물이 발달하였다들이다. 김시습은 자신의 이 소설들을 풍류기어(風流奇語)라고 말하였다.

 

금오(金鰲)’는 경주 남산(南山)의 금오봉, 혹은 남산을 가리킨다. 경주 남산을 금오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당나라 때 시인 고운(顧雲)이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에게 준 시에서 내가 듣자니 동해에 세 마리 금오가 있어, 금오가 머리에 산을 이어 높디 높다 하네[我聞海上三金鼇, 鼇頭戴山高高]”라고 한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여기서 오()는 오()와 같다. 본래 금오는 중국인의 신화적 상상체계에서 동해의 봉래산을 떠받치는 존재였는데, 우리나라가 중국의 동방에 있으므로 우리나라 전체를 금오와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실제로 금오라는 산은 전라도 광주나 나주(능주)에도 있다. 하지만 김시습 자신은 여러 시에서 경주 남산 일대를 금오라고 표현하였다. 즉 그는 경주 남산의 용장사(茸長寺) 부근에 은거할 때 지은 시들을 유금오록(遊金鰲錄)이라는 제목으로 엮었고, 그 후지(後誌)에서도 경주 일대를 금오라고 표현하였다. 이 후지는 금번에 발견된 조선 목판본 금오신화의 말미에도 그대로 각입(刻入)되어 있다.

 

신화는 새로운 이야기란 뜻이다. 전등신화(剪燈新話)등 당시에 읽히던 기존의 전기소설과는 다른 소재와 발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엮었다고 밝힌 것이다. 한문고전에서 ()’은 혁신을 뜻하며, 기존의 가치를 해체하고 권력화된 사상체계에 저항하는 의지를 반영한다.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김시습의 생애에 대하여는 김시습 자신이 쓴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上柳襄陽自漢陳情書]과 윤춘년(尹春年, 1514~1567)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 이자(李耔, 1480~1533)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 이산해(李山海, 1538~1609)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 이이(李珥)김시습전(金時習傳)등을 통하여 개괄할 수 있다. 윤춘년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은 조선 목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의 권두에 실려 있고, 또 활자본 매월당집의 권두에도 실려 있다. 윤춘년의 문집인 필사본 학음고(學音稿)에는 매월당서(梅月堂序)라는 제목으로 들어 있다. 이이김시습전(金時習傳)선조 15(1582) 4월에 찬수령(撰修令)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이는 평소 김시습을 동방의 백이(伯夷)’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上柳襄陽自漢陳情書]에 대하여는, 김시습이 고려 때의 시중 김태현(金台鉉, 광산김씨)을 자신의 조상이라고 한 점이 옳지 않기 때문에 이 서한 자체가 위작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김시습의 기억에 착오가 있었던 듯하지만, 그렇다고 이 서한이 위작인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매월당문집에는 김시습이 유자한에게 보낸 다른 서한들이 더 실려 있어서, 정황으로 보아 이 서한도 김시습이 쓴 것임에 틀림없다. 윤춘년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은 이 서한에 근거하여 김시습의 일생을 서술하였고, 이이의 김시습전(金時習傳)도 이 서한에 근거한 바가 많다.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김시습은 자()가 열경(悅卿)이고, 호는 청한자(淸寒子)와 매월당(梅月堂), 동봉산인(東峯山人) 등을 사용하였다. 근본은 명주(溟州) 즉 강릉의 오래된 가문이라고 한다. 그 집안은 일찍부터 많은 명공과 문장 석학을 배출하여 왔다. 증조 김구주(金久柱)는 고려 때 안주목사를 지냈다. 조부는 겸간(謙侃), 혹은 윤간(尹侃)이라고 하며, 오위부장(五衛部將)을 지냈다. 부친 일성(日省)은 음직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봉해졌으나 병약하여 취임하지는 않았다. 김시습의 가까운 시기의 직계는 무반(武班)의 직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그 집안이 무계였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충순위는 14457월에 유음자손(有蔭子孫)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된 병종(兵種)으로, 가자(加資)되는 기간이 매우 짧았다. 조선초에는 경제력 있는 사자(士子)들이 무과를 통하여 발신하려 한 예가 많았으므로, 무반 직을 받았다고 하여 가계가 무계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김시습이 무계 집안에서 태어나 장성하면서 좌절을 맛보았다고 보는 설이 있는데, 수긍하기 어렵다. 모친은 선사 장씨(仙槎張氏)이다. 김시습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고조부 한신(漢臣)의 아우 한경(漢卿)의 현손 덕량(德良)이 계자(系子)로 들어와 가계가 오늘에 이어진다.

 

김시습은 1435년 반궁(성균관) 북쪽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는 외조부의 훈도를 입었다. 천품이 뛰어나, 족조(族祖)인 최치운(崔致雲)시습이라 명명하고 설()을 지어 장래를 기대하였다. 세 살 때부터 한문을 지을 수 있었으며, 다섯 살 때는 크게 문리에 통하여 오세(五歲)’라고 불렸다. ‘오세오세(悟歲)’와 발음이 같으니, 다섯 살이 곧 문리를 깨달은 해라는 의미이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439, 그는 수찬 벼슬로 있던 이계전(李季甸, 1404~1459)의 문하에서 대학(大學)중용(中庸)을 공부하였다. 이계전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이자,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자이다. 김시습은 이계전의 큰아들 이우(李堣)와 함께 수학하였는데, 이우는 한산 이씨의 재자(才子)로서 세조성종조에 활약한 이파(李坡)ㆍ이봉(李封)의 형이었다.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조수(趙須)는 그에게 열경(悅卿)이라는 자를 붙여주고 자설(字說)을 지어 주었다. 조수의 본관은 평양, 자는 향보(享父), 호는 송월(松月) 또는 만취(晩翠), 당시 집현전 학사들에게 한유(韓愈)의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1401년의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으나, 1409년에 민무구(閔無咎) 형제가 제거되고 그의 서형(希敏)과 아버지()가 사사될 때 연좌되어 30년간 금고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438년에 최만리(崔萬理)ㆍ김빈(金鑌)ㆍ이영서(李永瑞)와 함께 왕명에 따라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을 새로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자는 본래 성인식인 관례(冠禮) 때에 지어 받는 것이지만 김시습은 조숙하여 일찌감치 자를 받은 듯하다. 바로 이 다섯 살 때 김시습은 세종의 장려를 받았다. 7,8세에는 경전에 통달하였고 아홉 살에는 시문을 즉석에서 지었다.

 

그 뒤 김시습은 당시의 석학 김반(金泮)에게서 논어맹자시경서경춘추등을 수업받았다. 김반은 권근의 문인이며, 세종조의 집현전원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김구(金鉤김말(金末)과 함께 경학 삼김(經學三金)’으로 일컬어졌다.

 

또 김시습은 1447년 무렵, 윤상(尹祥, 1373~1455)의 밑에서 주역예기를 공부하였다. 윤상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까지 지낸 인물이다. 당시 윤상은 이미 75세의 고령이었다.

 

그런데 김시습은 열다섯 살에 모친을 잃고 말았다. 그는 낙향하여 외조모의 보양을 받다가, 탈상한 뒤 18세 되던 1452년에 서울에 올라왔다. 김시습은 이때 조계사(曹溪寺)에 머물면서, 준상인(峻上人)에게서 불교를 배웠다. 준상인은 곧 고승 함허당(涵虛堂) 기화선사(己和禪師, 1376~1433)의 제자인 홍준(弘峻)이다.

 

김시습은 아마도 1452년 경에,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을 지낸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듯하다.

 

 

 

 

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145311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을 죽이고 안평대군 () 부자를 강화도에 압송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당시 김시습은 안신(安信)ㆍ지달가(池達河)ㆍ정유의(鄭有義)ㆍ장강(張綱)ㆍ정사주(鄭師周) 등과 함께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1450(세종 32), 17세 때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였던 듯하다. 그뒤 유음자손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김시습은 그러나 회시에 합격하지 못한 듯하다. 그뒤 1453(단종 원년) 봄의 증광시에 응시하였지만 낙방한 듯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시습은 현실정치의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년 뒤 1455년 윤611일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이 발생하였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던 김시습은 그 소식을 듣고 거짓 미친 체하여 도망해서 그 길로 승려가 되었다. 처음에는 강원도 금화(金化) 남쪽 사곡촌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14566월에는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형되었고, 이듬해 6월에는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유배되고, 1024일에는 노산군이 죽음을 맞았다. 그 무렵 김시습은 송도 지방을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였다. 그는 당시에 지은 시를 모아 24세인 1458년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엮었다. 이어 금강산ㆍ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1460년에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다. 그 뒤 다시 삼남지방을 유랑하고 1463년에는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을 엮었다.

 

1458년 가을에 엮은 탕유관서록후지(後志)에서 김시습은, 불의의 세간을 차마 보지 못하는 까닭에 현실계를 벗어나 산수간에 은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느 날 갑자기 개탄스러운 일을 당하고는,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를 행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결신난륜(潔身亂倫)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도를 행할 수 없는 세상일진대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물외(物外)에 떠다니면서 도남(圖南, 陳搏)과 사막(思邈, 黃彦遠)의 풍모를 사모하고자 했으나, 나라에 이러한 풍속이 없어 머뭇머뭇하였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에, 만약 장삼을 걸치고 산인이 된다면 소원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문득 깨달았다.

一日 忽遇感慨之事 以謂男兒生斯世 道可行則潔身亂倫 恥也 如不可行 獨善其身 可也 欲泛泛於物外 仰慕圖南思邈之風 而國俗且無此事 猶豫未決 一夕 忽悟若染緇爲山人 則可以塞願

 

 

김시습은 당시 정치현실의 혼란, 유가적 이념의 붕괴 등을 개탄스러운 일이라는 통분의 말로 뭉뚱그려 표현하였다. 그는 북송 때 도가 사상가였던 진단(陳搏)의 풍모를 사모하였다. 하지만 도인이 되는 것은 나라의 풍속과 맞지 않다고 여겨 승려의 행색을 취하기로 하였다. 사실 그에게는 유ㆍ불ㆍ도의 어떠한 종교도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본래성을 추구하는 고독한 방랑길에 나선 것이다. 산수에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는 대로 시를 읊고 구경도 하고자 하였던 것은, 그것이 곧 현실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홍진의 명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결심한 직후 마음의 평화를 얻는 듯하였다. 그로서는 도학을 공부하는[問道] 유교 공부와 마음을 들여다 보는[觀心] 불교 공부가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보현사에 붙어살면서 가슴속 생각을 적어 어떤 사람에게 주다[寓普賢寺 書懷贈人]라는 제목의 시에서 나는야 방외의 사람으로서 방외의 선사를 따라 노니나니, 도를 물으면 도가 더욱 억세지고 마음 보면 마음 더욱 닦이누나[以我方外人 從遊方外禪 問道道愈梗 觀心心更硏]”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심(觀心)도 이미 마음을 대상화하므로 그것은 절대경지에 이르는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김시습은 마음의 대상화가 절대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점을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로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더욱 문제였다. 그렇기에 잠정적으로 그는 현실 공간을 평화스런 세계로 인정하고 질끈 눈을 감으려고 하였다.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 後志)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상(聖上)의 교화가 흡족하고 어진 은택이 흘러 바닷가 창생이 번성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잘 살게 되어야 착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마다 학문에 나아가 억세고 뻗대는 습속을 바꾸어 효제(孝弟)와 염치(廉恥)의 지역으로 되었다. 대대로 훌륭한 인재가 나서 왕실을 보필하니 변경에는 근심이 없어지고 난리를 알리는 봉홧불도 멎었다. 이것은 성스런 왕조의 상서(祥瑞)라 하겠다.

但聖化融洽 仁澤滂沱 海隅倉生 罔不繁庶 旣富方穀 人人進學 變強剛之俗 爲孝弟廉恥之域 代出良材 世輔王室 邊境無虞 狼煙頓息 此聖朝至治之一瑞也

 

 

눈여겨 볼 만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인간의 온전한 가치 실현이 불가능한 결함계(缺陷界). 현실의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는 이미 원만구족한 본래성의 추구를 방해하였다. 그렇기에 김시습은 그 속에 몸을 담글 수는 없었다.

 

김시습은 외모가 볼품없었으나 매몰찬 데가 있었으며, 예절을 잘 따지지 않아서 위엄이 적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소탕해서 구속되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였고, 충의의 분노가 수시로 일어나, 하루라도 그저 되는 대로 살지를 못하였다. 김시습은 승려의 신분과 평민의 차림으로 명산을 편력하면서 가슴속에 쌓인 불평을 발산하였다.

 

 

 

 

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김시습은 29세에 호남 지방을 두루 보고 나서, 서울로 책을 사러 갔다. 이때 세조연화경(蓮花經)을 언해(諺解)하려 하였다. 김시습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추천으로 열흘 동안 내불당(內佛堂)에서 역경(譯經) 사업을 돕게 된다. 1463년 가을의 일이다.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김시습은 경주로 내려가 남산의 용장사(茸長寺) 부근에 산실(山室)을 짓고 칩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3월 그믐에 효령대군이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김시습은 잠시 망설였으나, “좋은 모임은 늘 있는 것이 아니고 번창하는 세대는 만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달려가 치하하고 곧 돌아와 여생을 마치리라하고서, 날짜를 다투어 상경하였다. 원각사 모임의 찬시(讚詩)도 지으면서, 그는 당대의 현실을 성대(聖代)로서 인정하고자 마음먹었다송석하(宋錫夏)의 구장본인 필사본 매월당고(梅月堂藁)에 보면 이렇게 읊고 있다. “급원(祈園精舍)이 시기에 버려져 있었거늘, 임금님 큰 계획으로 몇만 년을 가게 되었네, 취복(法服)에 까까머리로 부처님 만나는 날이지만, 치건에 단령(團領) 입고 요순시대를 송축하네, 피어오르는 향 연기는 임금님 수레 따라가고, 연속되는 서기는 불상을 감싸네, 은둔하는 자가 여기에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오색 구름 꽃 속에 기꺼이 예법을 차리노라[給園初敝市街前 聖曆鴻圖萬萬年 毳服圓顱逢竺日 緇巾曲領頌堯天 香煙 裊裊隨龍駕 瑞氣緜緜繞佛邊 誰信逸民參盛會 五雲朵裏喜周旋.

 

하지만 끝내 세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시 경주 남산으로 향하였다14654월에 김시습은 서거정을 방문하여 금오정사제시(金鰲精舍題詩)를 청하였다. 얼마 뒤 서거정은 시를 지어 주었는데, 사가집(四佳集)』 「시집12에 실려 있다.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진작에 설잠 승려를 알고 있었는데, 만나보지 못한 지 24년이나 되었다. 하루는 나를 방문하고는 이야기 끝에 말하길, ‘내가 계림 남산에 땅을 가려 서너 칸 되는 정사를 짓고 도서를 좌우에 벌여두고는 그 사이에서 소요하고 음영하고 있소이다. 산중 사계절의 맛을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라오. 나는 이곳에서 장차 늙을 예정이고, 또 이곳에서 입적할 생각이오. 근자에 천리 멀리 여행길을 떠났다가 서울에 당도하였는데, 내일이면 지팡이를 돌릴 것이오. 부디 선생께서 한 말씀을 해 주셔서 내 정사를 빛내주시길 바라오라고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던 뒤끝이라 붓을 내던지고 시 읊기도 정지한 지 여러날이 되었으나, 스님의 부탁을 어기기 어려워, 붓을 달려 근체시 여섯 수를 적어서 스님에게 올리는 바이다.”. 일민(逸民)을 자처하였다. 심지어, 그가 법회에 왔다가 절 뒷간에 스스로 빠지자 승려들이 미쳤다고 여겨 그를 내쫓았다고도 한다.

 

경주 남산에 머물면서 김시습은 원효(元曉)가 속인의 삶과 승려의 삶을 절충하였다고 보고 그 삶에 동조하였다. 무쟁비(無諍碑)는 바로 무쟁대사 원효의 비를 보고 지은 시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김시습은 우리도 환어(幻語)를 잘하는 무리라서, 환어에 대하여는 대략 아는 편이지만, 나는 옛 도를 좋아해 뒷짐지고 읽을 뿐, 서쪽서 오는 분(부처)을 보지는 못하누나[我曹亦是善幻徒 其於幻語商略矣 但我好古負手讀 吁嗟不見西來士]라고 하였다. 불법의 이치를 글로 읽어 터득할 수는 있지만 진리를 진정으로 체득하지는 못하였다고 한탄한 것이다.

 

김시습은 어떤 특정한 종파가 절대 진리를 구현한다거나 지시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에게 유교불교는 모두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다. 김시습은 이렇게 말하였다.

 

 

()의 이치는 아주 깊어서 다섯 해나 생각해서야 투명하게 깨우쳤다. 이에 비하여 우리 유학의 도는 본래 등급이 있어서, 건강한 사람이 사다리를 오를 때 한 발을 들면 곧바로 한 층을 올라가게 되는 것과 같다. 불교처럼 돈오해서 상쾌한 즐거움은 없지만, 여유롭게 차츰 젖어드는 맛이 있다.

 

 

이것은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를 포섭한 논리이다. 그로서는 사실 종파적 분별의식이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전기소설까지도 인간 삶의 진리를 담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또 그렇기 때문에 민간의 설화를 수집하고 허구를 가미하여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렇다고 그는 비분강개의 뜻을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그것조차 망념(妄念)이라고 인식하면서도 그 망념에 자주 휘둘렸다.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경주 남산의 산실에서 여섯 해가 지날 무렵, 어린 성종이 등극하였다. 김시습은 새 왕이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래서 벼슬을 살 생각으로 유교 경전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던 서거정(徐居正)은 달성군에 봉해져 예문 관대 제학을 하고 있었다. 김시습은 서거정에게 차나 부채를 예물로 보낸다든가, 시를 보내어 옛 정분을 다시 확인하였다. 하지만 서거정은 그를 기이한 승려로 보았을 뿐이다. 사실 현실은 결코 이상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세조의 찬탈을 도왔던 훈구파는 그들의 세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김시습은 서울 동쪽 수락산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그가 거처하던 곳에는 1669년에 이르러 박세당이 석림암을 두었다석림암(石林庵)은 반남 박씨의 재궁(齋宮) 사찰로 있다가, 1698년에 홍수로 사우(寺宇)가 유실되었고, 그 뒤 복원되었으나 또다시 1745년에 홍수로 유실되었다. 이 때문에 석림사가 그 아래 위치에 건립되었는데, 6·25 때 전소된 것을 1965년에 신축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는 안동준의 김시습 문학사상 연구(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1994)를 참조하시오. 박세당의 석림암기에 따르면, 그 위치는 채운봉(彩雲峰) 서남쪽 기슭, 소향로(小香爐)의 북쪽이라고 하며, 본래 매월당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수락산 시절에 불교와 도교의 도를 더욱 깊이 연찬하였다. 불교의 교리를 논한 십현담요해서(十玄談要解序)대화엄경계도서(大華嚴經界圖序)가 이 시기에 나왔다. 그러면서 그는 세속과 관계를 끊겠다고 다짐하여 도연명(陶淵明)의 삶을 흠모하였다. 세모에 성 동쪽 폭포 머리맡에 거처하였는데, 청송과 백석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는 도연명의 귀전원 시의 뜻을 흠모하여 그 시에 화운한다[歲晚 居城東瀑布之頂 靑松白石 甚愜余意 和靖節歸園田詩]라는 제목으로 다섯 수를 지었는데, 그 제1수는 다음과 같다.

 

晚居城東陲 水石勝廬山 세모에 도성의 동쪽 끝에 거처하니 수석이 여산보다 낫도다.
卜築依寒巖 窮居逾數年 찬 바위에 의지하여 터잡아 집짓고 궁하게 산 지 서너 해.
玄豹隱南山 神龍襲九淵 검은 표범은 남산에 숨고 신룡은 구룡연에 잠겼다.
修我玄牝門 鋤我絳宮田 내 현빈(玄牝)의 문을 닦고 내 강궁(絳宮, 마음)을 김매어
足以保殘生 豈戀浮沈間 남은 목숨 보전하리니 어찌 세상의 영욕에 연연하랴.
野鹿馴階除 山鳥鳴簷前 들 사슴은 섬돌에서 순하고 산 새는 처마 머리에 지저귀누나.
讀罷蕊珠經 古篆消香煙 예주경(도가서) 읽고나 향 연기는 전자(篆字)를 그리며 사라진다.
尋芳東澗涯 採藥南山巓 동쪽 시냇가로 방초를 찾고 남산 머리에서 약을 캐나니
一拋利名場 萬事多閑閑 명리 세상을 버리매 만사가 한가롭기만 하다.
笑傲北窓下 自喜陶陶然 북창 아래 거들먹대며 홀로 기뻐 희희거리노라.

 

남산의 표범은 안개비가 내릴 때는 털빛이 상할까봐 산을 나와 가축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열녀전(列女傳)도답자처전(陶答子妻傳)에 나온다. 표은(豹隱)이라는 숙어가 있게 된 이 고사를 끌어와, 김시습은 당대의 세상에서 벼슬을 사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현빈의 문를 닦겠다고 하였는데, 현빈의 문은 곧 진여(眞如)의 마음이다.

 

김시습은 탈속한 삶을 살았으되, 적정주의(寂靜主義)에 빠지지 않았다. 진여는 현실 공간을 벗어난 다른 곳에 일층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농사를 감독하면서 농민들의 삶에 공감하고, 배불리 먹는 무리들에 대한 증오로 치를 떨었다. 그는 하궤장인(荷簣丈人)과 달랐다. 세상일을 과감하게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김시습은 너무 일찍 신동으로 알려졌고, 성격도 거칠어서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웠다. 그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광기를 발하고 농담과 익살로 세속을 조롱하였으며, 사람들이 자기의 그런 몰골을 보고 손가락질하면 더 좋아하였다. 그의 광기는 세상일에 분개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고위 관리의 임명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기에 그 사람이 그 직책을 맡게 되었는가라고 하면서 여러 날씩 통곡하였다. 좋은 절기를 만나면 명수(明水)와 향불을 갖추어 현인들을 예배하든지, 혹은 높은 바위벽에 올라가 눈물을 흩뿌리고는 하였다. 어떤 때는 밭 갈고 김매는 농사꾼의 형상을 백여 개쯤 나무로 깎아 책상 곁에 벌여 놓고 종일토록 응시하다가는 문득 통곡하고 태워버렸다. 또 중들에게 화전을 갈도록 하고 나무통을 여러 개 만들어 그 속에 술을 담가두고는, 바가지로 권하여 마시게 하고 자기도 두어 달씩 마셔댔다.

 

현실 공간을 벗어난 다른 곳에 절대 가치의 세계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김시습은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세상의 결함을 목도하고 애처로움을 느꼈고, 그만큼 광기를 수시로 발하였다.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1481년에 김시습은 제문을 지어 조부와 부친을 제사지내고, 안씨(安氏)를 새 아내로 맞았다. 이때 수천부정(秀川副正) 이정은(李貞恩)남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과 깊이 교유하였다.

 

그 무렵, 노사신(盧思愼)에게서 장자를 배운 일이 있고 뒤에 송광사 주지가 된 조우(祖雨), 즉 우송광(雨松廣)이 수락산으로 김시습을 찾아왔다. 김시습은 그에게 밥을 짓게 해놓고는 먼지를 일으켜 한 숟갈도 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월정만필(月汀漫筆)39에 전하는 일화다. 조우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박지화(朴枝華)동봉은 주공과 공자를 대단찮게 여기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을 그르다고 여긴 적이 있다. 그런데 노사신이 그때 총애받는 정승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東峰嘗有薄周孔非湯武之意 盧其時幸相 故必如此云爾]”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김시습이었지만 남효온이 과거에 응하지 않자, “나는 영묘(英廟, 세종) 조의 사람으로 노산(魯山, 단종)의 일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지금 조정에서 벼슬하기 어렵네만, 그 뒤에 태어난 자네가 벼슬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쳐!”라고 하면서 과거 응시를 권하였다. 남효온은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꼽힌 인물이다. 25세 때 단종 모[昭陵]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홍유손 등과 죽림칠현을 자처하였다. 세상일에 비분강개하여 가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고는 하였다고 한다. 그도 방랑을 일삼다가 39세로 죽었다. 의분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김시습을 스승으로 섬겨 세상 밖에 놀았던 것이다.

 

이 시기에 김시습은 북명(北銘)이라는 좌우명을 지어 선비로서의 풍모와 염치를 지켜야 한다는 뜻을 다잡았다.

 

水一瓢食一簞 切勿素餐 쪽박 물과 찬 밥을 먹을지언정 거저먹지 말며,
受一飯使一力 須知義適 한그릇 밥 받으면 걸맞는 힘을 써서 의리를 지켜야 하리라.
無一朝之患而憂終身之憂 하루 닥칠 근심보다는 종신토록 근심할 일 근심하고
有不病之癯而樂不改之樂 파리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고 뜻 바꾸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리.
敦尙士風廉恥 선비의 풍모와 염치를 지키도록 하고
輕厭俗態詐慝 세속의 간특한 짓을 미워하라.
勿喜矜譽 勿嗔毀辱 뭇사람 칭찬에 기뻐하지 말고 뭇사람 깔봄에 노여워 말라.
怡然順理 悠然有得 기꺼이 천리(天理)를 따라 넉넉히 얻음이 있으리라.
無心出岫之雲影 무심히 봉우리 위로 피어나는 구름 그림자같이
不阿懸空之月色 사심 없이 허공에 달려 있는 달빛과도 같이
動靜語默忘形骸 일상의 동작 언어와 침묵에서 겉껍데기 육신을 잊어버려
羲皇上世之淳朴 상고시대의 순박함을 보존하고
容止軌則存想像 몸가짐과 행동에서 옛 성인의 전형을 지켜서
唐虞三代之典則 요순과 삼대의 전형을 따르라.
冀子觀省 感於北壁 부디 그대는 반성할 때마다 북벽에서 느끼시라.

 

김시습은 세간의 영욕을 벗어나 인()과 예()를 완성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가 추구한 예는 개인의 삶을 외적으로 구속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면의 참된 가치를 발현하는 일 그 자체를 뜻한다. 인과 예를 추구하는 삶이란, ()와 이()를 엄격히 구분해서 의를 최고 가치로 삼아 인간 본연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삶에 다름 아니었다.

 

 

 

 

7)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그러나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부인 안씨가 죽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김시습은 1483년 나이 49세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방랑의 길에 나섰다. 1482년에 일어난 폐비윤씨(廢妃尹氏) 사건이, 현실세계의 결함상을 다시금 환기시킨 까닭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ㆍ양양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했다. 유학의 경전과 다른 고전들을 지방 청년들에게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1486년에 양양 부사로 부임한 유자한(柳自漢)은 그에게 가업을 일으키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은 사양하였다. “선비는 세상과 모순되면 은퇴하여 스스로 즐기는 것이 그 본분이거늘, 어찌 남의 비웃음과 비방을 받아가며 억지로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이유였다. 유자한은 생년을 알 수 없으나, 1504년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배소(配所)에서 죽은 문인이다.

 

김시습은 그 뒤 관동 지방을 떠나 방랑 끝에 1493년에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병을 얻어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김시습은 늙어서의 초상과 젊어서의 초상을 손수 그려두고 스스로 찬()을 지었다. 활자본 매월당집19초상화 찬[自寫眞贊]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俯視李賀 優於海東 이하(李賀)를 내리깔아 보아, 해동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
騰名謾譽 於爾孰逢 격에 벗어난 이름과 허랑한 명예 네게 어이 해당하랴?
爾形至眇 爾言大侗 네 형용은 아주 적고 네 말은 너무도 지각 없다.
宜爾置之丘壑之中 너는 의당 네 몸을 구학 속에 두어야 하리.

 

당시 사람들은 김시습의 재능을 중당(中唐) 때의 시인 이하(李賀, 790~816)에 견주었던 것 같다. 이하는 27세의 짧은 생애 동안 주로 귀()를 중심으로 한 환상적인 시들을 남겨서 귀재(鬼才)라고 불리운다. 귀계(鬼界)의 시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비애감과 염세관을 시로 담아냈으며, 일상생활의 보편적 경험보다도 개인적 정감을 토로하는 데 주력하였다. 김시습은 일상생활의 보편적 경험을 노래하기보다도 현실의 결함상을 음울하게 응시하였다는 점에서 이하와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더구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귀계를 들여다보는 자의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하의 음산하고 기괴한 환상과 견주어질 만한 요소를 지닌다. 물론 그 함의는 전혀 다르지만.

 

 

 

 

8) 에필로그

 

 

김시습은 숙종 25(1699) 210일에 최석정(崔錫鼎)의 발의로 증직이 되고 사제(賜祭)가 이루어졌다. 최석정은 사인(士人) 김시습은 광묘(光廟, 세조) 때부터 입선(入禪)하여 머리 깎고 세상을 피하였다가, 중간에 환속하여 아내를 얻었으나 자손이 없습니다. 그의 문장과 절행이 우뚝하여 숭상할 만하니, 증직(贈職)시키고 사제(賜祭)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김시습은 지절관 때문에 사대부의 전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하지만 김시습은 온 세상을 흘겨보면서 산수 좋은 곳에서 휘파람 불며 거만떨고 형체 밖에서 방랑한 그런 인물이다. 이산해(李山海)가 말하였듯이, 그의 행동은 여유롭고 유쾌하여 외로운 구름이나 홀로 나는 새와 같았고, 마음속은 환하고 맑아서 얼음 든 옥병과 가을밤의 달에 뒤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결코 현실 세상을 벗어난 다른 곳에서 별도의 광경(光景)을 보고자 한 것은 아니다. 현실공간 속에 남아 있으면서 현실을 부정하였다. 연산군 때 세상을 경멸하면서[傲物輕世]’ 깨끗한 삶을 살았던 홍유손은 제문[祭金悅卿時習文]을 지어, “그 분의 말씀이 보통 사람과 같았지, 결코 괴상한 행동을 하고 홀로 해괴한 짓을 한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비록 마음속에 쌓인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해도 그 깊은 속을 누가 모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시습은 결코 색은행괴(索隱行怪, 은미하고 편벽된 이치를 찾고 괴이한 행동을 함)의 무리가 아니며, 세상을 등졌으나 그 마음이 신묘하여 깊은 이치를 온축하였다고 말하였다. 김시습은 가치가 전도되고 아무 전망도 지닐 수 없는 혼돈된 세계를 음울하게 응시하였던 것이다.

 

 

 

 

3. 판본의 문제

 

 

1) 조선시대 초기 목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가 발견되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는 그동안 주로 일본 목판본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1999년 여름에 고려대학교 중문학과 최용철(崔容澈) 교수가 중국 따렌(大連) 도서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목판본을 발견하는 쾌거를 올렸다최용철 교수는 논문 금오신화 조선간본의 발굴과 그 의미(중국소설연구회보39, 1999)금오신화 조선간본의 발굴과 판본에 관한 고찰(동아시아 전기소설의 전파와 수용, 동방비교문학연구회 제92차 학술발표회 논문초록집, 2000)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따렌 도서관의 이 책은 총 54엽에서 앞장과 뒷쪽이 떨어져 나가 52엽이 남아 있다. 판심[大黑口, 上下內向黑魚尾]의 특징과 을해자 활자의 자양(字樣)과 유사한 글자체로 볼 때, 이 책은 선조 연간에 재주 갑인자(학자에 따라서는 경진자라고도 함)매월당집이 간행되기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의 권수제(卷首題)매월당 금오신화(梅月堂金鰲新話)’이고, 판심제(板心題)금오집(金鰲集)’이다. 그 다음 줄에는 파평후학 윤춘년 편집[坡平後學尹春年編輯]’이라고 되어 있다. 이 책은 윤춘년이 명종 연간(1546~1567)의 말기에 교서관제학을 겸하고 있을 때 간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렌 도서관의 이 조선 목판본은 일본의 문록(文祿경장(慶長) 연간에 의사 곡직뢰정림(曲直瀨正琳, 1565~1611)의 양안원(養安院)에 들어갔다가, 율전만차랑(栗田萬次郞)이라는 사람의 손을 거쳐 따렌도서관에 수장()된 것으로 보인다일본 소장자에 대해서는 순천향대학교 중문학과 박현규(朴現圭) 교수의 견해에 의한다.

 

이 초기 목판본은 다음과 같이 배열되어 있다.

 

윤춘년,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 , 1쪽이 떨어져 나갔다.

목차

③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④ 「갑집의 뒤에 적다[書甲集後]2

⑤ 「유금오록(遊金鰲錄)의 후지(後志), , 1쪽이 떨어져 나갔다.

 

이 조선 목판본은 그간 통용되던 일본 목판본과는 글자의 차이가 꽤 있다. 다만 일본 목판본에 원래 작품의 모습이 변형된 예는 없다. 일본 목판본들은 그 초기 판본에서부터 조선 목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원 모습을 비교적 충실하게 전하였다.

 

 

 

 

2)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언제, 몇 편이 지어졌는가

 

 

김시습은 경주 남산의 용장사 부근에 은둔하던 1465(31)부터 1470(36)까지 사이에 이 소설집을 엮었다. 그는 당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인간 삶의 조건을 깊이 숙고하고 있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었다. 하지만 따렌 도서관 소장의 조선 목판본에 유금오록(遊金鰲錄)의 후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시습이 30대에 경주 남산에서 저술하였다는 설이 더욱 유력해졌다.

 

이미 권문해(權文海, 1534~1591)1589년에 편찬을 끝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금오산은 동도(경주)에 있으니, 김동봉이 일찍이 이 산에 거주하면서 전등신화를 본받아 금오신화(金鰲新話)수 권을 저술하였다[金鰲山在東都, 金東峯嘗住此山, 効剪燈新話, 著金鰲新話數卷]라고 하여, 금오신화(金鰲新話)가 경주의 금오산에서 이루어졌다는 전승을 문헌으로 기록하여 둔 바 있다.

 

종래에 통용되던 일본 목판본의 뒤에 갑집(甲集)’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그 저본(底本)이 되었을 이 조선 판본에도 마지막에 갑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목판본은 달리 더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저본인 필사본이나 원래의 고본()5편 이외에 더 많은 작품을 수록하였던 것일까?

 

어쩌면 김시습은 전등신화(剪燈新話)와 유사하게 20편을 창작하고 각 5편마다 갑집ㆍ을집의 순으로 명명했지만, 윤춘년이 목판본을 간행할 때에는 갑집만 남아 있었거나, 윤춘년이 갑집을 간행하고 나서 실각한 탓에 후속권이 간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갑집이라는 표시는 동일 저술의 일부임을 알려주는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경연(經筵)에서 주요한 텍스트로 사용된 진덕수(眞德秀)대학연의(大學衍義)진서산독서기(眞西山讀書記)가운데 을집(乙集)ㆍ상()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동일 저자의 저술을 단행본으로 나눌 때에 갑ㆍ을을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윤춘년 이 간행한 조선 목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판심(板心)의 서명이 금오집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금오신화(金鰲新話)금오집의 일부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윤춘년은 김시습이 금오에서 저술한 시문을 망라하여 간행하고자 하여 금오신화를 갑집으로 삼고, 이를테면 시집 유금오록(遊金鰲錄)을 을집으로 분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매월당집12유금오록(遊金鰲錄)뒤에 있는 후지는 윤춘년의 간행본에서는 금오신화뒤에 있었던 것인데, 선조의 왕명으로 매월당집이 재편집될 때 금오신화는 수록하지 않으면서, 그 뒤에 있던 후지를 유금오록(遊金鰲錄)뒤로 옮겼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 답할 확증은 없다. 요컨대 김시습의 원고는 5편 이외에 더 있었을지 모르지만, 조선 목판본에서부터 금오신화(金鰲新話)는 다섯 편만 전하는 것이다.

 

 

 

 

3)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하였던 윤춘년은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자는 언구(彦久), 호는 학음(學音)ㆍ창주(滄洲)이다. 그는 참판 윤안인(尹安仁)의 아들로, 1534(중종 29) 생원이 되고, 1543(중종 38)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명종 즉위년(1545)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인 소윤 윤원형(尹元衡)과 합세하여 대윤 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1546년에 병조좌랑이 되어 윤원로(尹元老)를 제거하였으며, 윤원형의 총애를 받아 이조정랑, 장령, 교리 등을 거쳐 1553년 대사간에 발탁되었다. 2년 뒤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윤원형의 서얼허통론(庶孼許通論)을 반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1558년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으며, 그 해에 동지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윤춘년의 문집 학음고(學音稿)에는 무오년(戊午年, 1558)으로 계년(繫年)부경동행축기(赴京同行軸記)가 실려 있는데, 중국 북경을 오고 간 행적을 그림으로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역관(譯官)은 장한걸(張漢傑)이었고, 화사(畫師)는 함윤덕(咸潤德)이었다.

 

1565년 예조판서로 재직 중 윤원형이 제거되자 파직당하였고, 향리에서 병을 얻어 1567년에 죽었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그의 집에 요사스러운 일이 생겨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서 밤이면 밀실에서 혼자 북 치고 춤추며 귀신에게 제사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윤춘년의 문집으로는 일본 텐리(天理) 도서관에 필사본 학음고가 전한다【『학음고는 이마니시 류우(今西龍)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 학음고의 표지 안쪽에는 정조 3(1779)에 강산연초(彊山硯樵), 즉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평문이 있다. 텐리 도서관 소장의 학음고에 대하여는 최용철, 「『금오신화조선목판본의 간행과 전파에 설명되어 있다.

 

윤춘년은 음률에 밝았고, 시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1552년에는 명판본 시법원류(詩法原流)원나라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양중홍(陽仲弘)이 사천(四川)에 가서 두보(杜甫)의 후손 두거(杜擧)로부터 시의 작법을 전수받아 기록하였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권말에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1465~1487)에 회열(懷悅)이 쓴 후서(詩法原流 後序)가 있으므로 명판본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를 복간(覆刊)하고 시론을 첨부하면서 발문을 썼다(당시 통정대부 대사간의 직함이었다)이 책은 현재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간본(刊本)이 소장되어 있고, 고려대학교에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또 수호자(垂胡子) 임기(林芑)와 함께 1547년부터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를 집해(集解)하다가, 자신이 외직으로 나간 뒤 1559(명종 14)에 임기가 단독으로 집해를 완성하자, 그것을 정정하여 1564(명종 19)에 간행할 때 발문을 썼다(당시 정헌대부 형조판서 예문관제학의 직함이었다).

 

윤춘년은 윤원형에게 아부하여 을사사화 때 많은 선비를 추방하였기 때문에 경망하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불교와 도교의 찌꺼기들을 주워 모아 자칭 도()를 얻었다고 자랑하였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한 그가 김시습을 동방의 공자라고 하였고 공자를 못 보면 열경(悅卿)을 보면 된다고까지 하였다. 1551년에 쓴 서한(학음고, 答鍾城叔玉書辛亥)에서, 김시습의 기괴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성인(공자)에 비유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는 비난에 대해 제가 김시습을 성인에 가깝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할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의 행적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가짐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年之以金悅卿爲近於聖人者 抑有說焉 非以其迹 以其心耳]”라고 밝혔다. 김시습을 지극히 존경하여 한 말이다.

 

윤춘년은 1551(명종 6) 가을에 유관서관동록서(遊關西關東錄序)를 적었다. 아마도 그 무렵에 김시습의 관서록관동록을 간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매월당집금오신화(金鰲新話)의 권두에 실려있는 그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학음고매월당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금오신화를 간행하는 해에 지은 듯한데, 어느 해에 이 글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선조수정실록선조 원년(1568) 105일 기록에 윤춘년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다. 윤춘년은 사람됨이 가볍고 허황되어 스스로 학도들을 모아 놓고 시문(詩文)을 강설하기 좋아하였으나, 담론하는 것은 모두 불로(佛老)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는 성인이란 천심과 부합되는 자를 말할 따름이라고 하여, 의리는 따지지 않고 무엇인가 일을 이루기만 하면 그것으로 천심과 부합된 것이라고 하였다. 요승 보우(普雨)가 학업에 대해 질문하자, “보우는 선()으로 마음을 깨치고 그칠 곳을 알았다. 다만 정성(定性)의 경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사상적으로 허탄하였다고 비판받았지만, 윤춘년은 결코 주색과 뇌물은 좋아하지 않아 칭송을 받았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는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였고, 판서직에 있을 때 개혁한 것도 많았다. 스스로 도를 실천하는 사람이고자 하였다고 한다.

 

 

 

 

인용

목차 / 지도

1. 금오신화?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7)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8) 에필로그

3. 판본의 문제

1) 조선시대 초기 목판본 금오신화가 발견되었다

2) 금오신화는 언제, 몇 편이 지어졌는가

3) 금오신화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4. 금오신화의 텍스트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5.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6. 금오신화가 창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7. 금오신화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8. 금오신화는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9. 김시습의 저술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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