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1453년 11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을 죽이고 안평대군 용(瑢) 부자를 강화도에 압송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당시 김시습은 안신(安信)ㆍ지달가(池達河)ㆍ정유의(鄭有義)ㆍ장강(張綱)ㆍ정사주(鄭師周) 등과 함께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1450년(세종 32년), 17세 때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였던 듯하다. 그뒤 유음자손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김시습은 그러나 회시에 합격하지 못한 듯하다. 그뒤 1453년(단종 원년) 봄의 증광시에 응시하였지만 낙방한 듯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시습은 현실정치의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년 뒤 1455년 윤6월 11일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이 발생하였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던 김시습은 그 소식을 듣고 거짓 미친 체하여 도망해서 그 길로 승려가 되었다. 처음에는 강원도 금화(金化) 남쪽 사곡촌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1456년 6월에는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형되었고, 이듬해 6월에는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유배되고, 10월 24일에는 노산군이 죽음을 맞았다. 그 무렵 김시습은 송도 지방을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였다. 그는 당시에 지은 시를 모아 24세인 1458년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엮었다. 이어 금강산ㆍ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1460년에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다. 그 뒤 다시 삼남지방을 유랑하고 1463년에는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을 엮었다.
1458년 가을에 엮은 『탕유관서록」의 「후지(後志)」에서 김시습은, 불의의 세간을 차마 보지 못하는 까닭에 현실계를 벗어나 산수간에 은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느 날 갑자기 개탄스러운 일을 당하고는,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를 행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결신난륜(潔身亂倫)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도를 행할 수 없는 세상일진대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물외(物外)에 떠다니면서 도남(圖南, 陳搏)과 사막(思邈, 黃彦遠)의 풍모를 사모하고자 했으나, 나라에 이러한 풍속이 없어 머뭇머뭇하였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에, 만약 장삼을 걸치고 산인이 된다면 소원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문득 깨달았다.
一日 忽遇感慨之事 以謂男兒生斯世 道可行則潔身亂倫 恥也 如不可行 獨善其身 可也 欲泛泛於物外 仰慕圖南思邈之風 而國俗且無此事 猶豫未決 一夕 忽悟若染緇爲山人 則可以塞願
김시습은 당시 정치현실의 혼란, 유가적 이념의 붕괴 등을 ‘개탄스러운 일’이라는 통분의 말로 뭉뚱그려 표현하였다. 그는 북송 때 도가 사상가였던 진단(陳搏)의 풍모를 사모하였다. 하지만 도인이 되는 것은 나라의 풍속과 맞지 않다고 여겨 승려의 행색을 취하기로 하였다. 사실 그에게는 유ㆍ불ㆍ도의 어떠한 종교도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본래성을 추구하는 고독한 방랑길에 나선 것이다. 산수에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는 대로 시를 읊고 구경도 하고자 하였던 것은, 그것이 곧 현실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홍진의 명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결심한 직후 마음의 평화를 얻는 듯하였다. 그로서는 도학을 공부하는[問道] 유교 공부와 마음을 들여다 보는[觀心] 불교 공부가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보현사에 붙어살면서 가슴속 생각을 적어 어떤 사람에게 주다[寓普賢寺 書懷贈人]」라는 제목의 시에서 “나는야 방외의 사람으로서 방외의 선사를 따라 노니나니, 도를 물으면 도가 더욱 억세지고 마음 보면 마음 더욱 닦이누나[以我方外人 從遊方外禪 問道道愈梗 觀心心更硏]”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심(觀心)도 이미 마음을 대상화하므로 그것은 절대경지에 이르는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김시습은 마음의 대상화가 절대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점을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로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더욱 문제였다. 그렇기에 잠정적으로 그는 현실 공간을 평화스런 세계로 인정하고 질끈 눈을 감으려고 하였다.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 後志)」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상(聖上)의 교화가 흡족하고 어진 은택이 흘러 바닷가 창생이 번성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잘 살게 되어야 착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마다 학문에 나아가 억세고 뻗대는 습속을 바꾸어 효제(孝弟)와 염치(廉恥)의 지역으로 되었다. 대대로 훌륭한 인재가 나서 왕실을 보필하니 변경에는 근심이 없어지고 난리를 알리는 봉홧불도 멎었다. 이것은 성스런 왕조의 상서(祥瑞)라 하겠다.
但聖化融洽 仁澤滂沱 海隅倉生 罔不繁庶 旣富方穀 人人進學 變強剛之俗 爲孝弟廉恥之域 代出良材 世輔王室 邊境無虞 狼煙頓息 此聖朝至治之一瑞也
눈여겨 볼 만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인간의 온전한 가치 실현이 불가능한 결함계(缺陷界)다. 현실의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는 이미 원만구족한 본래성의 추구를 방해하였다. 그렇기에 김시습은 그 속에 몸을 담글 수는 없었다.
김시습은 외모가 볼품없었으나 매몰찬 데가 있었으며, 예절을 잘 따지지 않아서 위엄이 적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소탕해서 구속되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였고, 충의의 분노가 수시로 일어나, 하루라도 그저 되는 대로 살지를 못하였다. 김시습은 승려의 신분과 평민의 차림으로 명산을 편력하면서 가슴속에 쌓인 불평을 발산하였다.
인용
1. 『금오신화』란?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8) 에필로그
3. 판본의 문제
3) 『금오신화』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5.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7. 『금오신화』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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