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하였던 윤춘년은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자는 언구(彦久), 호는 학음(學音)ㆍ창주(滄洲)이다. 그는 참판 윤안인(尹安仁)의 아들로, 1534년(중종 29년) 생원이 되고, 1543년(중종 3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명종 즉위년(1545)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인 소윤 윤원형(尹元衡)과 합세하여 대윤 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1546년에 병조좌랑이 되어 윤원로(尹元老)를 제거하였으며, 윤원형의 총애를 받아 이조정랑, 장령, 교리 등을 거쳐 1553년 대사간에 발탁되었다. 2년 뒤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윤원형의 서얼허통론(庶孼許通論)을 반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1558년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으며, 그 해에 동지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윤춘년의 문집 『학음고(學音稿)』에는 무오년(戊午年, 1558)으로 계년(繫年)된 「부경동행축기(赴京同行軸記)가 실려 있는데, 중국 북경을 오고 간 행적을 그림으로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역관(譯官)은 장한걸(張漢傑)이었고, 화사(畫師)는 함윤덕(咸潤德)이었다】.
1565년 예조판서로 재직 중 윤원형이 제거되자 파직당하였고, 향리에서 병을 얻어 1567년에 죽었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그의 집에 요사스러운 일이 생겨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서 밤이면 밀실에서 혼자 북 치고 춤추며 귀신에게 제사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윤춘년의 문집으로는 일본 텐리(天理) 도서관에 필사본 『학음고』가 전한다【『학음고』는 이마니시 류우(今西龍)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 『학음고』의 표지 안쪽에는 정조 3년(1779)에 강산연초(彊山硯樵), 즉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평문이 있다. 텐리 도서관 소장의 『학음고』에 대하여는 최용철, 「『금오신화』 조선목판본의 간행과 전파」에 설명되어 있다】.
윤춘년은 음률에 밝았고, 시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1552년에는 명판본 『시법원류(詩法原流)』【원나라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양중홍(陽仲弘)이 사천(四川)에 가서 두보(杜甫)의 후손 두거(杜擧)로부터 시의 작법을 전수받아 기록하였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권말에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1465~1487)에 회열(懷悅)이 쓴 후서(「詩法原流 後序」)가 있으므로 명판본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를 복간(覆刊)하고 시론을 첨부하면서 발문을 썼다(당시 통정대부 대사간의 직함이었다)【이 책은 현재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간본(刊本)이 소장되어 있고, 고려대학교에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또 수호자(垂胡子) 임기(林芑)와 함께 1547년부터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를 집해(集解)하다가, 자신이 외직으로 나간 뒤 1559년(명종 14년)에 임기가 단독으로 집해를 완성하자, 그것을 정정하여 1564년(명종 19년)에 간행할 때 발문을 썼다(당시 정헌대부 형조판서 예문관제학의 직함이었다).
윤춘년은 윤원형에게 아부하여 을사사화 때 많은 선비를 추방하였기 때문에 경망하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또 ‘불교와 도교의 찌꺼기’들을 주워 모아 자칭 도(道)를 얻었다고 자랑하였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한 그가 김시습을 ‘동방의 공자’라고 하였고 ”공자를 못 보면 열경(悅卿)을 보면 된다”고까지 하였다. 즉 1551년에 쓴 서한(『학음고』, 「答鍾城叔玉書ㆍ辛亥」)에서, 김시습의 기괴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성인(공자)에 비유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는 비난에 대해 “제가 김시습을 성인에 가깝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할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의 행적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가짐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年之以金悅卿爲近於聖人者 抑有說焉 非以其迹 以其心耳]”라고 밝혔다. 김시습을 지극히 존경하여 한 말이다.
윤춘년은 1551년(명종 6년) 가을에 「유관서관동록서(遊關西關東錄序)」를 적었다. 아마도 그 무렵에 김시습의 『관서록』과 『관동록』을 간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매월당집』과 『금오신화(金鰲新話)』의 권두에 실려있는 그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이 『학음고』에 「매월당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금오신화를 간행하는 해에 지은 듯한데, 어느 해에 이 글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선조수정실록』의 선조 원년(1568) 10월 5일 기록에 윤춘년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다. 윤춘년은 사람됨이 가볍고 허황되어 스스로 학도들을 모아 놓고 시문(詩文)을 강설하기 좋아하였으나, 담론하는 것은 모두 불로(佛老)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는 성인이란 천심과 부합되는 자를 말할 따름이라고 하여, 의리는 따지지 않고 무엇인가 일을 이루기만 하면 그것으로 천심과 부합된 것이라고 하였다. 요승 보우(普雨)가 학업에 대해 질문하자, “보우는 선(禪)으로 마음을 깨치고 그칠 곳을 알았다. 다만 정성(定性)의 경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사상적으로 허탄하였다고 비판받았지만, 윤춘년은 결코 주색과 뇌물은 좋아하지 않아 칭송을 받았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는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였고, 판서직에 있을 때 개혁한 것도 많았다. 스스로 도를 실천하는 사람이고자 하였다고 한다.
인용
1. 『금오신화』란?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8) 에필로그
3. 판본의 문제
3) 『금오신화』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5.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7. 『금오신화』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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