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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노희락의 심리학, 프롤로그 - 4. 출발점에 대한 이해: 꿈과 현실조차 차별하지 말라 본문

책/철학(哲學)

애노희락의 심리학, 프롤로그 - 4. 출발점에 대한 이해: 꿈과 현실조차 차별하지 말라

건방진방랑자 2021. 12. 23.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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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발점에 대한 이해

 

 

꿈과 현실조차 차별하지 말라

 

다른 것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라고 해도 당장에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생각을 늘 꾸준히 하고 있으면 점점 그쪽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어느 정도가 되면 다른 것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한의사가 한의학의 한 갈래인 사상의학을 토대로 쓰는 글인데 서양적인 이야기만 나오면 좀 운치가 없어 보인다. 이번에는 동양의 고전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편에 좋은 말이 나온다.

 

 

나는 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다. 나는 지금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장주인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지 모르겠다.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필자는 이 말에 세 번 감격했다. 처음은 고등학생 때였다. “, 세상을 저렇게 뒤집어 볼 수도 있구나라는 감격이었다. 물론 그때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장주라는 쪽이 사실이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세상이 뭔가 불만스럽다고 느낄 나이에, 뒤집어보기, 비틀어보기에 대한 통쾌함을 느꼈을 뿐이다.

 

두 번째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라고 해도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구나라는 것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상당한 충격이었다. 장자(莊子)의 주장은 어느 쪽이 옳은지를 증명할 방법이 없고, 어느 쪽의 해석을 택해도 모든 현상이 전부 다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편적 진리라는 토대가 무너지는 느낌이 확 밀려왔다. 그러나 그때도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장주라는 해석이 더 실용적이고 우수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다.

 

세 번째는 나이 서른이 좀 넘어서였다.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장주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나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 쪽의 해석을 취하느냐에 따라 처음의 행동은 달라진다. 그러나 내가 장주인가 나비인가가 내 행동, 내 선택에서 차이가 나지 않게 되는 경지가 있으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영역이 그곳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 순간 흔히 패러다임이라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가 선명해졌다. 그 당시가 처음 사상의학을 접하던 때였는데, 사상체질론이 단순한 인간 유형학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그때 처음 들었다. 그 순간이 필자에게는 다른 것에 우열을 매기는 악습을 벗어나게 해준 순간이었다. 물론 아직도 과거의 악습이 많이 남아 있다. 한참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버려야 할 악습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장주의 입장에서 출발하는가 나비의 입장에서 출발하는가를 명확히 알고, 각각의 입장에서 출발할 때는 각각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옳은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장주이든 나비이든 상관없는 경지에 갈 것이고, 그 경지에 가면 비로소 나비인가 장주인가라는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막상 이 글을 쓰는 필자로서도 설명하기 벅찬 부분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느낌 위주로 적은 것이다. 또 필자의 느낌이나 이해의 배경에는 인간에게 있어 꿈이란 무엇이고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등등의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가 깔려 있는지라,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상당 부분은 우리의 시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내가 본 것, 느낀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의 전체가 아니라 사실의 일부이다. 언뜻 보기에는 내가 본 것과 완전히 모순되어 동시에 성립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내용들과 내가 확실히 본 내용이 함께 사실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도저히 같은 사실의 다른 측면일 수는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내가 내 시각만을 고집하면서 관찰 시점을 전혀 옮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상심학을 이야기해 나갈 때도 마찬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표현하는 방식이 인간의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고집하는 한, 절대로 내가 못 가진 다른 기운에 대한 이해가 얻어질 수 없다. 또 반대로 내가 아주 특이한 변종이라는 생각도 도움이 안 된다. 사람은 어느 정도 경향성도 있고 또 개인에 따른 특성도 포함된,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특수하기도 하고, 유형에 따라 분류되기도 하고 전혀 분류 불가능한 개인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는, 뭐 그런 존재인 것이다.

 

호랑나비 꿈의 이야기가 너무 상징적이라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들을 위해 시각의 상대성에 대한 좀 구체적인 예를 하나만 더 다루도록 하자. 사상심학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 준비 과정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인용

목차

사상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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