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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애노희락의 심리학 - 제2부 체질에 따른 약점과 그 극복, 제9장 태행과 독행 본문

책/철학(哲學)

애노희락의 심리학 - 제2부 체질에 따른 약점과 그 극복, 제9장 태행과 독행

건방진방랑자 2021. 12. 23.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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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태행(怠行)과 독행(獨行)

 

 

태행(怠行)이란, 글자 그대로 게으른 행동이다. 독행(獨行)이란, 지조를 지키며 꿋꿋이 나아간다는 뜻이다. 사심(邪心)박통(博通)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자신이 약한 영역에 요구되는 능력을 얻고자 할 때 남을 흉내 내어 잘못 가는 경우와, 제대로 도달하여 뛰어난 능력을 얻게 되는 경우를 각각 가리키는 말이다.

 

사심(邪心)은 다른 체질의 마음 씀을 배우려 할 때 어설피 흉내 냄으로써 마음 씀이 잘못되는 것이고, 박통(博通)은 어설피 흉내 내지 않고 자신의 장점을 꾸준히 늘려감으로써 자신이 약하던 영역에서 바르게 마음을 쓰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사심(邪心)박통(博通)이 마음의 문제라면, 태행(怠行)독행(獨行)은 행동의 문제다. 타인의 행동을 잘못 흉내 내는 것이 태행(怠行)이고, 자신이 능한 행동으로 밀고 나가 약한 영역의 능력을 얻는 것이 독행(獨行)이다.

 

물론 마음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행동의 결과가 마음을 만드는 것이니까, 마음과 행동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각각 마음과 행동 쪽에 더 중심이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사심(邪心)박통(博通)이 성()으로 천기(天機)를 받아들이는 데에서의 약점을 극복하는 문제라면, 태행(怠行)독행(獨行)은 정()으로 인사(人事)를 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약점을 극복하는 일과 관련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1. 탈심(奪心)과 식견(識見) / 소음인의 태양 기운

 

 

어떻게 식()을 얻을 것인가

 

소음인은 자신의 락성(樂性)으로 소음 기운이 필요한 일을 처리한다. 희정(喜情)으로 태음 기운이 필요한 일을 처리한다. 수양을 잘해서 경륜(經綸)의 경지에 도달하면 소양 기운이 필요한 일을 잘 처리할 것이고, 사심(邪心)에 빠져 긍심(矜心)이 강해지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마지막 남은 것이 태양 기운이 필요한 일이다. 이 부분, 즉 소음인의 독행(獨行)에 해당되는 부분을 동무(東武)식견(識見)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식견(識見)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태행(怠行)으로는 탈심(奪心)을 든다. 그러니까 소음인의 머리에 탈심(奪心)이 없으면 대인(大人)식견(識見)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

 

식견(識見)이란 인식(認識)과 견해(見解)라는 뜻이다. 새로운 사실을 인식해서 자신의 견해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걸 다시 식()과 견()으로 갈라서 생각해보면 소음인이 약한 부분은 ()’ 쪽이다. 소음인이 새로운 것을 인식하는 데 유난히 어려움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몇 번 나왔다. 그러나 인식된 것을 정리해서 견해로 만드는 일은 그럭저럭 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인식 능력을 어떻게 강화시키느냐, 소음인이 약한 직관의 부분, 주관의 부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태산에 올라보면 천하가 발밑에 깔린다. 자신이 인식한 부분보다 수준이 낮은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인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방법은 간단하다. 높이 올라가면 된다. 그런데 이게 간단하지 않다. 등반 기술, 특히 길을 찾는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에게 높이 올라가봐, 그럼 어디가 길인지가 훤히 다 보여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니까. 결국 소음인이 식견(識見)을 갖는 방법은 다른 사람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항상 같다. 자신이 잘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옳다. 소음인이 따라가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니까.

 

따라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대개 사람들이 따라가는 일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따라가는 것은 쉬워도, 옳게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길을 따라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부터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 길이 따라갈 만한지 아닌지를 옳게 판단해야 한다. 소음인의 사고 능력, 논리가 맞는지를 따져보는 능력이 이 과정에 도움을 준다. 또 옳은 길이라고 판단되어도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조금 가다가 망설이고, 다시 조금 가다 망설여서 결국은 처음 길을 연 사람이 갔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음인은 확실한 모순이 발견되지 않는 한 몰두하고 파고든다. 근본의 락성(樂性)이 발동하는 것이다.

 

종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소음인이 처음 종교를 제창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창시자의 뜻을 이해하고 그 경지에 도달해서, 이를 교리로 정리하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라면 어떨까? 비로소 하나의 종교가 완성되는 것이다. ‘대인의 식견(識見)’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들 만한 경우가 종교를 완성시킨 2대종사(二代宗師)분들의 모습이다. 종교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학문에 있어 하나의 학파를 완성시키는 일도 비슷하다. 그런 부분들을 소음인의 식견(識見)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항상 소음인은 2등밖에는 못할까? 그렇지는 않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분명히 남벽 사이에 올라갈 만한 크레바스가 있었어. 마지막 앵커 잡았던 곳에서 2시 방향 약간 위쪽으로 보였는데 체력이 도저히 안 돼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이런 경우에, 그 말을 믿고 올라가면 올라가는 것이다. 즉 최초 등반자는 될 수 없어도, 최초 등정자(登頂者)는 될 수 있다.

 

 

 

 

명성에의 집착

 

식견(識見)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비교가 되어서 식견(識見)이 뭔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소음인이 식견(識見)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태행(怠行)탈심(奪心)이라고 했다. 무언가 빼앗으려는 마음이라는 건데, 이게 연결이 쉽지 않다. 빼앗으려는 마음이 있으면 왜 식견(識見)이 생기지 못할까? 이 부분을 동무(東武)가 다른 용어로도 설명하는데, 소음인의 태행(怠行)을 천심(擅心)이라는 용어로 쓴 곳도 있다. ()이란 보통 제멋대로 할 천으로 새긴다. 그리고 이걸 다시 설명하면서 천심이란 탈리(奪利)라고 설명한다. 여기까지 해놓고 생각해보도록 하자. 요점은, 소음인이 태양인의 행동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흉내 내는 모습이 천()이요, ()이라는 것이다.

 

태양인이 주장하는 바는 자기의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견해나 주장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하는 계기는 될 수 있지만,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된 것은 자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직관의 결과이며, 주위의 영향은 그 직관이 솟아나오게 만드는 자극이었을 뿐이다.

 

이는 세 가지 의미를 갖다. 첫 번째로, 처음 세상에 던지는 씨앗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지키고 퍼뜨리는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 공과가 자신에게 바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오류가 있으면 스스로 수정하고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소음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것, 얻은 것에서 출발한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키우고 정리하는 것이고, 그에 의존하여 갈 길을 가고 나면 다시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남의 생각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소음인의 최대 강점인 객관적 시각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주장을 할까? 명성에 눈이 멀기 때문이다. 남의 명성을 빼앗으려는 마음, 이것이 탈리(奪利)의 정체다.

 

필자가 여러 번 강조했던 소음인의 논리적인 능력, 객관화 능력을 동무(東武)지방(地方)을 맛보는 능력이라고 표현했다. 그 표현을 설명할 때, ()이란 서로 가르는 능력이고, 이는 따지려는 문제와 고려하지 말아야 할 부분들을 격리시키는 능력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즉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하려면 판단의 결과에 따른 파급효과 등을 지나치게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지금 판단하고 있는 내 감정이나, 판단하려는 문제와 관련된 인물에 대한 감정 등도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음인이 아니라도 살다보면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이 필요한 일이 있게 마련인데, 소음적인 능력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여러 가지 테크닉들이 있다. 글을 읽는 경우를 예로 들자면, 다른 시간, 다른 기분에서 다시 읽어본다든지, 한 번은 빠르게 읽고 한 번은 천천히 읽은 뒤 두 번의 읽기에서 받은 느낌의 차이를 비교해본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요령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요령으로도 잘 극복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객관적 판단이 정말 어렵다고 느껴지는 영역이 있다.

 

자기가 쓴 글, 자기가 주장한 내용에 대한 평가는 아무래도 남의 것에 대한 평가만큼 공정하기가 쉽지 않다. 웬만한 요령으로 잘 극복되지 않는 한계다. 그런데 소음인 중에는 자신의 글에 대해서도 남의 글처럼 분석이나 비판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물론 쉽게 되는 것은 아니고, 수양 또는 수련을 겪어야 되는 일이다. 어쨌든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 가장 유리한 것이 소음인이다. 바로 그 부분이 대인의 식견(識見)을 구성하는 한 요소다.

 

그런데 이 능력이 명성, 이익과 관련되면서 깨져 나간다. 소음인들 중에 조직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공과도 조직에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는 아주 훌륭한 정리 능력, 평가 능력을 보이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을 하면서 아집과 독선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신인 단계에서 뛰어난 논리와 예리한 상황 분석으로 각광받던 논객이, 명성을 얻고 그 명성을 지키는 것에 집착하면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식견(識見)으로 가는 과정은 자신의 의견조차 남의 의견처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과정이다. 탈리(奪利)로 가는 과정은 남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남에게 빌린 의견에 자신이 약간 끼워 넣은 것, 또는 남이 다 해놓고 정리만 못한 것을 가져다 정리만 해놓은 것을 다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급조한 자신의 의견을 반박으로부터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소음인의 모든 장점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제멋대로 기준 정하기

 

이것이 외부로 드러나기는 천(), 즉 제멋대로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출발은 분리해야 할 것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명성, 당파의 이익과 같은 것은 소음인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 명백히 판단의 기준에 넣지 않았을 부분이다. 이를 판단 기준으로 사용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그렇게 잘못 들어간 부분들은 논리적 모순을 낳고, 그 모순 때문에 공격당하게 된다. 이제는 당연히 고려해야 할 내용을 고려 대상에서 빼는 식으로 방어한다. 정보 왜곡에서 말했던 정리 과정에서의 왜곡을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논란거리가 되는 문제를 따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고려되어야 하며, 무엇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가의 기준을 그때그때 바꾼다.

 

태양인이 주장하는 모습을 언뜻 보면 그런 면이 보인다. 그러나 태양인의 주장은 상당 부분 주관적, 직관적 내용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따지는 것이 불가능한 내용을 새롭게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따져야 할 기준도 그때 새로 정해지는 것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이 천시(天時)에 어긋나게 된 부분을 지적할 때는, 현재의 관행을 기준으로 삼아서 따질 수가 없다. 따라서 태양인의 자의적 기준 설정은, 자의적이라는 것만으로는 비난할 일이 아니다. 반면 천심(擅心), 탈심(奪心)이 발동될 때 소음인이 하는 행동은 기존의 기준으로 따져야 하는 부분에 제멋대로 새로운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종교 계율의 준수 문제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불교 쪽의 예를 보자. 고승 대덕의 일화를 소개하는 내용을 보면 기행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수련하는 일반 스님이 저질렀다면 당연히 파계 행위로 비난받고 절에서 쫓겨날 짓을, 고승, 대덕이라고 하는 큰스님들이 태연히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또 일반 대중이나 제자 스님들은 큰 스님이 하신 일이니 그럴 연유가 있을 것이라고 넘어간다. 불교는 잘못된 집착에서 다 벗어나는 것이 불교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라고 가르친다. 계율이란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지, 어느 수준에 가면 계율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서산대사께서 쓰신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는 책에 보면, 수행자의 계율 준수에 대해 굉장히 엄하게 강조한다. ‘차라리 수행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편이 안전하지, 수행자가 되어서 계율을 어길 때는 정말 끝장나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경고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이게 꼭 하급의 수행자만의 문제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고은 선생이 북한 문화유산 답사를 떠나는 유홍준 선생에게 써주어서 더 유명해진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밤에 눈길을 밟으며 갈 때)라는 시를 보면, 남의 앞에 서게 되면 행동거지를 더욱 조심하라고 강하게 강조한다.

 

결국 기준은 이렇다. 배란 물을 건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물을 건너고 나면 다시 놓아두고 가야할 것이다[捨筏登岸]. 그러나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물을 건너는 중에 배를 버리면 물에 빠진다는 것이다. 내가 규율을 버릴 수 있는 수준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나의 그런 행동이 배에서 내리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물에 뛰어드는 짓을 부추기지는 않을지를 고려해야 한다.

 

시장 점유율 1위인 조선일보가 왜곡 보도를 많이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아주 큰 문제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안티조선 운동가들이다. 그런데 안티조선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조선일보기자와 술을 마시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문제가 있을까, 없을까? 더군다나 그 기자가 사회적 물의를 크게 일으킨 왜곡 보도의 주범이었다면 어떨까? 사회운동가 대 기자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철학하는 학자로서 만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허용되어야 할까? 바로 이런 것이 문제다. 원론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과 지금 나에게 허용되는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내 수양의 정도, 내가 가지고 있는 위치 등이 고려되지 않고 원론을 쫓아가면, 물에 빠진다.

 

앞에서 법과 질서의 준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체로 법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 소음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짓을 가장 잘하는 것도 소음인이다. 천심이 발동하면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다. 게다가 그러고도 당당하다.

 

소음인의 장점은 잘 듣고 잘 정리하고, 그 정리된 것을 규율 삼아 규율을 꾸준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러나 명성을 탐내고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공격받지 않게 지켜내려고 조바심을 내기 시작하면, 모든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 부각된다. 없던 단점도 새로이 생겨난다. 자기 멋대로 이상한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이 옳다고 주장한다.

 

세상의 모든 이치란, 빌려 쓰고 돌려주면 그만인 공공재일 뿐이다. 이치 하나를 내가 밝혔느니 네가 밝혔느니 하고 다툰다든지, 자신의 의견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조금도 훼손되면 안 된다고 안달한다면, 인성만 파괴될 뿐 좋을 일이 없다.

 

 

 

 

소음인의 창조(創造)

 

소음인의 탈심(奪心)식견(識見)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잘 아는 소음인에게 보였더니, “그렇다면 소음인은 창조력이 없다는 건가? 수학이나 과학같이 논리를 따지는 분야에서는 소음인이 최초로 밝힌 부분도 상당히 많을 것 같은데라는 반론을 받았다. 그럴 것이다. 아주 새로운 영역을 소음인이 개척한 경우도 찾아보면 꽤 있을 것이다. 또 굳이 논리가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소음인이 새롭게 연 분야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어느 조각가가 한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나무 속에 형상이 숨어 있다고 느낀다. 나는 내가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 나무 속에 숨겨져 있는 형상을 정확하게 드러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인간이 창조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찾아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극단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창조라고 볼 수도 있다. 나와 똑같은 인간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내가 태어난 것부터가 창조다. 내가 하는 동작 하나하나, 내가 쓰는 글 하나하나가 다 새로운 창작이다. 뒤샹이라는 예술가는 공장에서 만든 양변기를 (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전시회에 내기도 했다.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창작이라는 것이다.

 

인간 행위의 어떤 결과를 발견이라고 볼 것인가, 정리라고 볼 것인가, 창조라고 볼 것인가는 정확하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까지를 표절이라고 볼 것인가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한 인간이 무엇을 창조했다는 것은 결과의 문제이고, 세상 사람의 평가의 문제다. 그러나 필자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행위자의 마음의 문제다.

 

소음인은 무엇을 창조한다고 생각하면 둘 중의 하나로 가는 경우가 많다. 한쪽은 기준이 없다는 것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위축되는 쪽이다. 다른 한쪽은 천심에 빠져 제멋대로 기준을 세우는 쪽이다. 둘 다 제대로 된 창조에 도달하기 힘들다. 기준은 이미 존재한다고 믿고, 나는 그것을 찾아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자세일 때 소음인의 장점이 가장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결과가 창조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의 결과라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켜나간 결과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창조한다는 생각 없이 했는데 사람들이 창조라고 부를 만한 것을 만들어냈다면, 그 사람은 가히 식견(識見)을 갖추었다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름 붙이기

 

소음인이 탈심(奪心)이 앞서서 창조에 집착하면, 함부로 이름 붙이기를 한다. 일상용어 하나를 불쑥 끌고 와서는, 그것이 상당한 뜻을 품고 있는 철학적 단어라고 주장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사람들이 가볍게 생각했던 내용에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을 환기시켜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야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고, 철학의 가장 기본이며,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바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똥 철학, 밥 철학, 숟가락 철학, 젓가락 철학, 몸 철학, 손가락 철학, 발가락 철학 등등, 하나하나가 으리으리하고 대단한 것들인데,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과장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막상 그 내용을 들어보면 굳이 새 이름이 필요했는지 의심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대부분이 기존 사상의 부분적인 변형에 불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나 무언가 창조했어요. 내게 명성을 주세요라는 아우성일 뿐이다. 그 새 이름 아래 묶인 옛 내용들의 명성을 빼앗는 짓에 불과하다.

 

이름 붙이기의 기본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름에서 골라 쓰는 것이다. 정 마땅한 이름이 없으면 약간 바꾸어 쓰는 것이다. 사람들 귀에 낯설 만한 이름은 함부로 붙이는 것이 아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원불교의 교리는 상당 부분 독창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아주 겸손하다. 근원적으로 불교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해서, 불교의 ()’ 자를 따다 이름에 넣었다. 원불교를 폄하하려는 사람은 신흥 종교가 불교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름은 사람들이 원불교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하게 만들기 위한 배려가 들어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름이란 그렇게 붙이는 것이다.

 

이름을 잘 짓고 잘 붙이기로는 태양인이 으뜸이다. 이 책의 내용만 하더라도 태양인이 본다면 그럴듯한 새 이름을 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양인의 이름 붙이기를 놓고 명리를 탐내는 탈심(奪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태양인의 이름 붙이기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즉 연구 중이고, 정리 중이고, 발전 중이며,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 중인 사상이라는 의미가 이름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소음인의 이름 붙이기는 확정된 것이며, 정리된 것이며, 보편성을 획득하여 마땅한 것이라는 단정이 들어가 있다.

 

태양인의 이름 붙이기는 시작하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나 이제부터 이런 것을 하려고 해라는 선언이다. 명성이니 표절이니를 따질 단계가 아니다. 그러나 소음인의 이름 붙이기는 정리가 된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나 이런 것을 완성했어라는 선언이다. 과연 새 이름을 붙일 만한 독창성이 있는가가 마땅히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 이름을 붙일 만한 독창성이 없었다면 탈심(奪心)의 발로라고 야단을 맞게 될 것이다.

 

익준이’ ‘지원이하는 이름은 태어나면서 붙인다. 부모의 바람을 이름에 담는다. 자라면서 자신의 지향점을 담아 자(), ()니 하는 것들을 만든다.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다.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행적을 평가하여 붙이는 이름이다. 이걸 자기가 짓는 사람은 없다. “내 호는 충무공이야.” “내 자는 충정공일세.”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마찬가지다. 철학이나 사상은 정리가 다 되었다면 그냥 세상에 내놓는 것이고, 이름은 세상이 붙이는 것이다.

 

원래 소음인의 탐구는 세상과 나누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소음인은 자기중심적(egocentric)인 면이 있다. 소음인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의 답을 얻고 싶어서, 자기가 사는 방식에 대한 확실한 기준을 세워서 안정되게 살고 싶어서 탐구하는 것이다. 자기 본성의 장점을 잘 지켜나가는 소음인은, 탐구 과정에서 이를 발표하거나 명성을 다투거나 하는 일을 아주 귀찮아한다. 그 시간을 아껴 자신의 의문을 조금이라도 더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정리가 되고 결론이 얻어지면, 그에 따라 흔들림 없이 살아간다. 그 언행이 일치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이 주변을 감복시키면, 한 입 두 입 걸러 수양이 깊은 사람이라는 명성이 퍼진다. 우리 옛 선비들이 명성을 얻게 되는 과정이 이러했다. 명성이 사람을 모으고 사람들이 깨달은 바를 나누기를 부탁하면 비로소 입을 열어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한다. 세상이 이를 일컬어 대인의 식견(識見)’이라 부른다.

 

 

 

 

2. 절심(竊心)과 방략(方略) / 태양인의 소음 기운

 

 

태양인의 도둑질

 

이제까지 해오던 순서대로 한다면 소양 기운을 이야기할 차례다. 그러니까 태음인의 소양 기운을 이야기할 차례인데, 순서를 조금 바꿔보자. 소음인 이야기를 하면서 태양인의 경우와 계속 비교했으니, 이해가 쉽도록 태양인이 소음 기운이 필요한 영역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태양인의 태행(怠行)은 욕심(慾心), 혹은 절심(竊心)이라 부른다. 동무(東武)는 이를 절물(竊物)이라고 설명한다. 소음인의 탈심(奪心), 천심(擅心)을 탈리(奪利)라고 표현한 것과 아주 대조된다. ()은 드러나게 빼앗는 것이고, ()은 몰래 훔치는 것이다. ()를 빼앗는다는 것이 명성을 쫓는 것이라면 물()을 훔치는 것은 구체적 성과를 훔친다는 것이다.

 

태양인에게는 남을 이끌려는 속성이 있다. 영어로 말하자면 리더가 되려 한다는 것이고, 한자로 표현하자면 ()이 되려고만 하고 자()가 되려하지 않는다라고 표현된다. 어쨌든 이미 지도자의 위치에서 출발하기에 명성에는 탐냄이 적다. 그러나 성과물에 대해서는 좀 다르다. ()이라는 표현은, 그 성과물이 태양인에게로 가는 것이 당연해 보이게 만든다는 의미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전혀 모르고, 심지어 도둑맞은 사람도 자신이 도둑맞은 것을 잘 모르기에 절()이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집단 성과물의 소유가 지도자에게로 집중되는 상황을 동무(東武)는 지도자의 도둑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태양인이 성과물을 도둑질하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급박지심(急迫之心)이다. 일을 빨리 서두르는 마음에 참여자를 선동하게 된다. 채근(採根)이나 독려(督勵)면 차라리 눈에 드러난다. 채근이나 독려로 과도한 노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탈()이다. 그런데 선동으로 이끌어내니까, 과도한 노동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눈에 쉽게 안 보인다. 그러니까 도둑질이 되는 것이다.

 

모든 체질의 사심(邪心)태행(怠行)은 숨어 있는 잠재의식의 장난이다. 소음인의 경우에는 근거가 확실치 않을 때 느끼는 불안정지심(不安定之心)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한다. 자신이 근거로 삼는 것이 공격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긍심(矜心)의 형태로 나타나고, 자신이 근거를 확실히 세우지 못한 영역에 도전할 때 느끼는 불안감이 천심(擅心), 탈심(奪心)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무의식 수준에서의 작용이기에 본인은 자기가 긍심(矜心)이나 천심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태양인은 자신에게서 절심(竊心)이 발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마음속에서 급박지심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기 때문에, 자신이 참여자의 과도한 노동을 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일이 완성되었을 때 참여자들의 공은 평상적인 참여를 기준으로 생각하게 된다. 다른 참여자들이 태양인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상당히 애썼다는 사실을 모른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초과근무 수당을 떼먹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직관력이 문제가 되는 경우다.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에 능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결과에 대한 표현에 능한 사람이 있다. 표현에 서툰 사람들은 오래 생각하고, 공들여 정리한 것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들의 서툰 표현을 듣고 직관력이 강한 태양인이 그 핵심을 알아냈을 때, 세상에 알리고 설명하는 공은 태양인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태양인은 이것이 상대의 것을 훔쳤다는 사실을 모른다. 상대가 도달한 영역이 10인데 그 중 3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듣고 자신이 10을 말했다면, 애당초 상대는 3밖에 도달하지 못했고 나머지 7은 자신이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태양인이 일하는 방식

 

태양인의 절심(竊心)은 소음인을 잘못 흉내 내서 생기는 것이니, 소음인이 일하는 방식을 간단히 검토해보자. 소음인은 본래 혼자 기준을 세우고 혼자 일하는 것에 익숙하다. 팀 작업이라 할지라도 할 일이 정확히 나눠지고 기준이 확실할 때는 대단한 집중력을 보이며 효율적으로 일한다. 이런 소음인의 모습을 태양인이 흉내 내려 한다. 깔끔하고 확실하게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모습을 가져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소음인처럼 몰두한다. 그럼 잘 될까? 잘 될 리가 없다. 소음인이 몰두하기 전에 하는 사전 정지 작업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음인은 영역을 나누는 일에 능하다. 지방(地方)을 맛보는 일에 강하다고 할 때의 방()이 나누는 기운이라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소음인이 복잡한 일을 여러 개의 영역으로 나누는 일에 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기준으로 이것이 내일과 관련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나누는 것에 능하다는 것이다. 소음인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관련 없는 일들을 다 배제하고, 일의 조건과 기준을 확실하게 정하고 나서야 일을 시작한다. 주변 정리가 끝나야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인은 주변 정리 없이 일을 시작한다. 정확한 기준을 정한 뒤에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하면서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려면 첫 번째도 여유, 두 번째도 여유, 가장 중요한 것이 여유다. 그런데 일을 빨리 마무리하려는 급박지심이 이를 방해한다. 하나에 몰두하다가, 정리 안 하고 벌려놓은 다른 일이 문제되면 또 쫓아가 그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 보면 다시 다른 일이 꼬인다. 그러면 또 그쪽으로 달려간다. 그런 식으로 동분서주한다.

 

결국 어디선가 일손이 달리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가까운 사람, 일을 같이 하는 참여자들을 선동해서 과도한 노동을 이끌어내려는 마음을 절심(竊心)이라 부르는 것이다. 물론 같이 일하는 순간에는 태양인 역시 열심히 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열심히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태양인이 또 다른 일을 할 동안에도 다른 사람은 그 일에 몰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성과를 같이 나눈다면 태양인은 다른 사람의 노력의 결과를 훔친 것이 된다.

 

게다가 태양인이 지휘했다는 이유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큰 도둑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앞에서 직관력과 관련하여 설명한 내용대로, 다른 사람이 정리한 내용조차 자신이 창안한 것이라고 믿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일의 성과를 남에게 설명하고 전파하는 일까지 맡아 대표성까지 띠게 되면, 점점 성과는 태양인 한 사람에게 쏠리게 된다. 즉 일에 대한 욕심이 성과를 훔치는 절심(竊心)이 되어버린다.

 

동무(東武)가 성(), (), 천기(天機), 인사(人事), 사심(邪心), 박통(博通), 태행(怠行), 독행(獨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의 체질에 해당되는 것은 용어를 각각 하나씩만 썼는데, 유독 소음인과 태양인의 태행(怠行)을 설명할 때만 용어를 두 개 사용했다. 태양인의 태행(怠行)이 근본은 일의 완성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과 결과적으로 남의 노력을 훔치는 것이라는 점 가운데 어느 쪽을 강조해야 할지 애매해서 두 가지 용어를 섞어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절심(竊心)이 두드러지는 경우

 

사심(邪心)태행(怠行)을 설명하면서, 사심(邪心)이 강해지거나 태행(怠行)을 하게 되면 주변에 피해를 줄 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는 식으로 설명해왔다. 그런데 태양인의 절심(竊心)이 다른 사람의 성과물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우만을 낳는다면 이건 좀 불공평하다. 행하는 태양인에게 이득만 주게 되니까. 그런데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공적인 일에 있어서는 절심(竊心)을 발동시킨 태양인이 자신의 태행(怠行)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경우가 좀 드물다. 뭐 쓸데없이 골목대장 노릇을 하려 한다는 오해는 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문제 없이 이해되기도 한다. 결과가 나빠서 피해를 보는 것은 절심(竊心) 때문은 아니니까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일을 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남편 노릇, 아내 노릇, 자식 노릇, 아빠 노릇 등등, 이런 부분에서 절심(竊心)이 발동되면 그 피해가 한두 사람에게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건 잘 되어도 문제다. 주변 사람이 태양인의 보조에 맞추는 것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좁은 집단 내에서 이런 일이 터지면 결국은 일을 주도한 태양인에게로 원망이 쏠린다. 즉 집단의 규모가 작아지면 계산이 뻔해지니까, 도둑질 당한 사람이 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그 피해가 태양인의 절심(竊心)에 의한 것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공간적 구분, 시간적 구분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먼저 극복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자. 태양인의 독행(獨行)방략(方略)이라고 부른다. 태양인이 절심(竊心)을 극복하면 대인의 방략(方略)이 나온다고 되어 있다. 방략(方略)에 쓰인 방이라는 글자는 역시 나누어진 작은 부분이라는 뜻이다. 즉 나누어진 작은 부분에 적용할 책략이라는 것이다.

 

소음인의 독행(獨行)식견(識見)을 이야기하면서 소음인은 굳이 따지자면 견()을 세우는 쪽이 아니라 식()을 얻는 쪽에 약점이 있다고 했다. 같은 방식으로 태양인의 방략(方略)을 따지자면 문제는 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에 있다. 나눌 것을 나누고, 관계없는 것을 배제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좁혀진 영역에 집중하는 등의 과정에 태양인의 약점이 있다. 방이 되면 그 방에 따라 략을 세우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다.

 

개념적인 설명이 되는데, 소음인의 방은 공간적인 영역 나누기다. ()이라는 글자 자체가 공간을 설명할 때 쓰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건 태양인이 죽었다 깨어나도 소음인처럼 잘하기는 힘들다. 어설프게 영역을 나눠봐야, “왜 영역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느냐?” “일관성이 없다” “언행일치가 안 된다라는 식의 비난이나 받게 된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장점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시간적 영역 나누기로 극복하는 것이다. 천시(天時)를 듣는 귀를 이용해 극복하라는 것이다.

 

소음인은 매사에 전력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런 만큼 일과 휴식을 철저히 구분하고 휴식도 계획을 세워서 계획적으로 쉰다. 하지만 어쨌든 일을 할 때는 무조건 전력을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1백 년을 쓸 건물, 5년만 쓸 건물, 한 달쯤만 쓸 임시 막사는 각각 그 용도에 맞춰서 짓는 법이다. 모든 건물을 1백 년 동안 버티도록 짓는다면, 용도 폐기할 때 부수는 비용만 늘어난다. 태양인은 이런 부분에 대한 감각이 강하다. 즉 대충 해도 될 일은 대충 할 줄을 아는 것이 태양인의 장점이라는 것이다.

 

소음인이 일의 영역 사이에 구분을 확실히 한다면, 태양인은 하나의 영역 내에서 중점을 둘 부분과 부차적인 부분의 구분을 할 줄 안다. 어디에 힘을 쏟아야 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특히 안정된 상황이 아니라 계속 주변 상황이 변화될 때, 주력할 부분을 빨리 파악하는 태양인의 능력은 큰 힘을 발휘한다. 이런 능력을 자신이 일하는 것에도 반영하고, 주변 사람이 일하는 것에도 조언을 주어서 전체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 노동이 투입되는 것을 줄이면, 남의 노력을 훔칠 일이 줄어든다.

 

그런데 이것이 말만큼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다보면 중간 성과물은 계속 나오지만, 최종 결과는 계속 안 나오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네가 해놓은 것이 뭐야?”라는 질문에 소음인처럼 나는 이런 것을 했소라고 떡 내놓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하고 있는 일이 늘 진행 중, 미완성이니까.

 

욕망, 결과물을 버젓이 내놓고 싶은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 어차피 세상은 늘 변하는 것이고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과정의 중간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태양인이다. 확고한 기준이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소음인과 달리, 변하는 상황일수록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태양인이다. 자신의 천성을 살리는 곳에 늘 해결책이 있다.

 

야구나 테니스, 탁구는 전부 후속 동작을 강조한다. 즉 공을 치려는 지점에 맞추어 딱 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공에 힘을 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을 치고 나서 배트나 라켓이 앞쪽으로 자연스럽게 나가야 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무도도 마찬가지다. 겉을 친다는 기분이 아니라 주먹이 뚫고 지나간다는 기분으로 쳐야 제대로 타격이 된다고 한다.

 

태양인의 장점이 시각의 연속성이다. 각각의 상황을 계속 변화하는 과정의 하나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태양인의 장점이다. 천시(天時)를 잘 듣는다는 것은 시간적 흐름을 안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완성은 다음 단계를 위한 출발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가지면 지나친 조급함이 다스려진다. 어차피 평생 할 일이고, 내가 하다가 못 끝낸 자리에서 다음 사람이 이어서 할 일이다.

 

동무(東武)동의수세보원도 여러 차례 씌어졌다. 초판본과 최종본 사이에는 상당한 관점의 변화가 있으며, 각 장들도 순서에 따라 차분히 씌어진 것이 아니라 정리되는 순서대로 씌어진 것이다. 그러고도, 내가 죽은 뒤 1백 년 뒤쯤 되면 사상의학이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완성에 대한 욕심을 버린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태양인의 직관이 최종적으로 어떤 완성된 형태를 띠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직관을 가치 있게 느낀 태음인이 그것을 뒷받침해줄 사례를 모아야 한다. 그 다음에 그 사례를 소음인이 정리해서 하나의 안정된 체계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소양인이 이를 퍼뜨리고 보편화시켜야 완성되는 것이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일을 완성시키는 것은 하늘이 하는 것이다)이라 한다. 성패(成敗)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면서 그 단계에서 필요한 일을 정확히 지적해내고, 힘을 모아야 할 부분에 힘을 모으는 모습을 우리는 태양인이 가지는 대인의 방략(方略)’이라 부른다.

 

 

 

 

3. 치심(侈心)과 위의 태음인의 소양 기운

 

 

어깨에 힘주기

 

다음은 태음인이 소양 기운을 얻는 이야기다. 역시 태행(怠行)으로 가는 길과 독행(獨行)으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이중 태행(怠行)으로 가는 길을 동무(東武)치심(侈心)이라고 했다. 사치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고 가자면, 쓸데없이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이 치심(侈心)이다. 남에게 무언가 드러내 보이려는 마음이다.

 

소양인의 당당함은 대중의 정서에 대한 빠른 파악에서 나온다. 그런 말이 있다. 똥개도 자기 바닥에 가면 50점은 접어준다고, 자기 바닥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다. 돌아가는 켯속을 잘 알고 있는 곳이 자기 바닥이다. 소양인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에 대한 파악이 빠르다. 자존심이상해서 억지를 필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의견을 주장하게 된다. 즉 돌아가는 흐름을 빨리 읽는 소양인은 대부분의 공간을 쉽게 자기 바닥처럼 활용할 수 있기에 당당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음인(陰人)들이 이를 잘 모르고 겉에 보이는 당당함만을 흉내 내면 이상한 길로 빠지게 된다. 남들에게 공감받기 어려운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 소음인의 긍심(矜心)이다. 남에게 공감받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것이 태음인의 치심(侈心)이다. 소양인의 마음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긍심(矜心)이 우기기로 나타난다면,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을 흉내 내는 치심(侈心)은 쓸데없는 힘주기로 나타난다. 즉 필요 이상으로 당당한 척하는 것이 사치의 정체라는 것이다.

 

치심(侈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치심(侈心)이다. 아이들이 괜히 우쭐하고 싶은 마음에 사고 치고 돌아다니는 것을 치기(稚氣) 어린 행동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항상 서로 우쭐대려는 마음이 있다. 여럿이 모이면, “너 이거 할 수 있어?” “넌 이거 할 수 있어?”라며 말이 오간다. 평소에는 말도 적고 겁도 많은 친구가 불쑥 난 할 수 있어하면서 무모한 짓을 한다. 예를 들면 광화문 앞 16차선 도로 무단횡단하기, 3m쯤 되는 벼랑에서 뛰어내리기 따위의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을 보여주는 아이들 가운데 의외로 태음인이 가장 많다. 치심(稚心)이란 억눌렸다가 폭발하는 치심(侈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통제받기 때문에, 좋은 기운이든 나쁜 기운이든 어느 정도는 억눌렸다가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수가 많다. 요즘은 좀 덜해졌지만 2,30년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도, 학생들의 통제 방식이 모두 군국주의적 사고를 기준으로 했다. 게다가 모든 역사가 영웅 사관위주로 만들어져 어릴 때부터 영웅전을 읽으며 자라고, 남자 역할, 여자 역할에 대한 주입식 세뇌도 상당했다. 전체적으로도 문제지만, 특히 남자아이들이 건전한 사고를 가지기에는 아주 불리한 환경이었다.

 

나쁜 기운이나 나쁜 행동, 사심(邪心)이나 태행(怠行)은 지적되고 고쳐져야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본인이 극복할 일이지 옆에서 강제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노출시키면서 고쳐나가야지, 억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쪽으로는 영웅사관을 주입시키면서 한쪽으로는 군국주의적 통제를 하면, 치심(侈心)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숨어든다. 그러다가 그 통제에서 벗어나는 순간 치기의 형태로 드러난다. 예전에는 대학 신입생들의 치기 어린 행동이 아주 심했다. 사발로 고량주 마시기, 남대문에 올라가기, 무교동 네거리에서 방뇨하기 등등, 치심(侈心)에서 나온 치기 어린 짓이다.

 

어른들의 치심(侈心)은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것보다는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다. 퇴역 군인 중에 어디 나갈 때마다 주렁주렁 훈장 달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중년의 아주머니가 표범무늬 에어로빅 옷을 평소 나들이 때 입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것들이 다 치심(侈心)이다. 꼭 눈에 보이게 돈을 쓰는 것만이 치심(侈心)이 아니라는 것이다.

 

 

 

 

멋 부리기

 

돈을 쓰는 문제로만 따지자면 아무래도 소양인이 가장 사치스럽다. 일단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충동구매 같은 것도 잘하고, 예쁜 것, 고급스러운 것에 대한 집착도 강하기가 쉽다. 멀쩡하게 아직 쓸 수 있는 물건을 유행이 지났다며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소양인은 사치스럽다는 느낌보다 고상하다’ ‘안목이 있다라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훨씬 많다. 소양인은 멋을 알고, 제대로 멋을 부린다는 것이다. 멋이라는 것도 결국은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맞추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소양인은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최대치까지 멋을 부리고, 최대치에 맞춰서 소비한다. 그걸로 만족하지 못할 때는 무리를 해서라도 수입을 늘리려고 애쓴다. 하지만 수입의 한도를 넘어서는 사치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 들이는 돈에 비해 효율적으로 멋 부리는 방법을 잘 안다. 태음인이 이를 따라 흉내 내려면 돈으로 메우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껏 돈은 돈대로 쓰고 촌스럽다’ ‘튀다는 등의 소리나 듣기 일쑤다. 그런 평에 발끈해서 점점 씀씀이를 늘리다보면 결국은 사고 치는 길로 가게 된다.

 

치심(侈心)이 발동할 위험성이 커지는 경우가 보통 두 가지다. 갑자기 가난해졌을 때와 갑자기 부자가 되었을 때, 교심(驕心)과 비슷한 면이 있다. 환경 변화에 적응이 느리다는 태음인의 약점이 노출되는 것이다. 가난해졌을 때는 똑같이 가난한데도 당당한 소양인을 흉내 내려 드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고, 갑자기 부자가 되면 신분 상승에 걸맞은 소비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이다.

 

너무 눌렸을 때 사고 치는 것이나, 규제가 풀렸을 때 사고 치는 것이나 비슷하다. 자율권을 돈과 바꾸어 생각하면 간단하다. 즉 결정권의 소유라는 측면에서 너무 가난하거나 갑자기 부자가 된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치심(稚心)치심(侈心)이 통한다는 것도 이 이치다. 동네 건달처럼 지내던 지방 토호가 어찌어찌 해서 국회의원이 되는 수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쓸데없이 목소리만 크다. 그것도 애들이 치기 부리는 것이나 똑같은 짓이다. 아직 철이 덜 난 것이다.

 

 

노룩패스

 

 

적응에 대한 강박관념

 

결국 태음인이 치심(侈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빠른 적응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 나는 원래 느려라고 인정하고, 차분히 천천히 적응해나가라는 것이다. 치심(侈心)이 극복되었을 때 나타나는 독행(獨行)위의(威義)라 부른다. 보통 쓰는 말로는 위엄(威嚴)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뜻이다. 태음인의 위의의 모습을 검토하고 나서, 치심(侈心)을 극복하고 위의에 도달하는 과정을 검토해보자.

 

거지왕 김춘삼이라는 사람이 있다. 거지에서 출발해서 나중에는 재산도 꽤 모으고, 사회적 영향력도 큰 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거지로 동냥 다닐 때 들고 다니던 깡통을 꼭 승용차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거지였을 때의 마음을 잃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떤가? 사회적 명사가 타고 다니는 고급 승용차에 실려 있는 찌그러진 깡통을 보았을 때, 그 깡통의 사연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너무 거칠게 난관을 헤쳐 나온 사람을 예로 드니까 좀 거리감이 느껴질 텐데, 평범하고 온화하게 사는 사람 중에도 위의(威義)가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옷 선전이 있었다. ‘처음 입어도 1년 된 듯한 옷, 10년을 입어도 1년 된 듯한 옷.’ 언뜻 평범해 보이면서도 왠지 위엄이 느껴지는 태음인의 느낌이 바로 그런 옷의 느낌이다.

 

위의(威義)란 항상성, 침착성, 진지함 같은 것들이 쌓여서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을 때 생겨난다. 소양인은 대중의 호오(好惡)를 빨리 파악해서 한순간에 대중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태음인의 위의(威義)가 그런 식으로 얻어지는 법은 절대 없다. 위의(威義)는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신뢰를 받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나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하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난다. 이미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 내가 판단하고 대처하는 것이 조금 느리더라도 이를 기다려준다. 느린 것을 탓하지 않고, 침착하고 신중한 것을 평가해준다.

 

이런 것들이 점점 쌓이면 내가 생각하고 교류하는 범위가 넓어진다. 태음인은 경험적 접근에 익숙하다. 그렇게 넓어지는 범위에서 꾸준히 무언가를 새로 배워가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출발점을 쉽게 버리지 않아야 한다. 새로 배운 것을 비추어보고 비교해보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새로 배운 것이 많이 쌓여 새로운 토대가 될 만하면, 그때는 판단의 기준이 옮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너무 개념적인 이야기만 이어지고 있으니, 시선을 지하철로 옮겨보자.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노인 한 분이 탔다. 경로석은 다 차 있고, 아무래도 일어나서 자리를 비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리를 양보는 하는데, 양보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어떻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렇다. 노인분이 두리번거리며 빈 자리를 찾다가 나와 눈이 마주칠 때 일어난다.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쪽으로 다가오시기 시작하면 내리는 척하고 문 앞으로 간다. 혹시 옆에서 젊은 사람이 잽싸게 달려들면, 그때는 노인 분 앉으시라고 양보한 건데요라고 조용히 말하고, 그런 불상사가 안 생기면 그냥 문 앞으로 가서 서면 된다.

 

만일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자리를 양보하면 어떨까? 혹시라도 자리를 양보받았다는 것에 많이 미안해할지도 모른다. 자리를 양보받을 나이가 되었다는 것에 우울해할지도 모른다. 자리를 양보했는데 고맙다는 말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앉으면, 양보해준 쪽이 기분 나빠질지도 모른다. 또는 고맙다는 말을 너무 강조하거나 요즘 젊은 것들 운운하며 장광설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침 내리는 사람이 있어 빈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서로 아무 부담이 없을 것이다.

 

태음인은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느리다. 위의 상황만 해도 소양인이라면 순간순간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상대도 기분 좋고 자신도 기분 좋은 상황을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음인이 감정 파악에 느린 단점을 보완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험적 접근에 익숙하고, 경험들을 쉽게 버리지 않고 모아둔다는 장점으로 보완이 가능하다.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기분이 어땠는가?’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행동을 했었나?’ 등등에서 출발해서,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기분이 어떨까?’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위에서 말한 방식의 자리 양보하기와 같은 행동이 가능해진다.

 

태음인이 교류를 넓히는 과정을 이야기하다가 지하철 이야기로 갔는데, 위의(威義)에 도달하고 싶으면 교류의 범위를 넓힐 때마다 그런 식으로 하라는 것이다. 새로운 교류가 시작될 때마다 상대의 입장에 서는 연습을 해보면 된다. 방법은 자신의 경험 창고에서 상대의 현재 상황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경험을 끄집어내어 비교해보는 것이다. 태음인에게는 익숙하고 잘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다만 늘 그런 자세를 유지하여 이를 버릇으로 만드는 일이 어려울 뿐이다. 이것을 버릇으로 만들 수 있으면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이 느려서 생기는 대부분의 어려움이 줄어든다. 위의(威義)에 도달하는 첫걸음이다.

 

 

 

 

지나친 수비 성향

 

위의(威義)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고 치심(侈心)에 빠지게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태음인의 지나친 수비 성향이다. 아이들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하는 것을 봐도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확실히 태음인은 수비에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스타크래프트를 잘 아는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게임 하나를 할 때도 체질의 영향이 많이 드러난다. 특히 하수 시절일수록 그렇고, 고수가 되면 그 특성이 점차 엷어진다.

 

원래 태음인은 매사에 수비적이다. 함부로 남을 공격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수비에 자신이 없어지면, 즉 겁을 먹게 되면 과잉 수비가 나타난다. 남이 나를 건드릴까 두려워 필요 이상으로 어깨에 힘을 주면서 나 건들지 말란 말야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게 된다. 이게 치심(侈心)의 정체다. 그래서 환경 변화에 적응이 안 될 때 치심(侈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치심(侈心)이 지나치면 선제공격을 하기도 한다. 원래 공격적인 소양인은 공격의 요령을 안다. 어느 정도로 공격해야 상대의 기를 꺾으면서도 사고가 안 나는지를 안다. 치심(侈心)이 뜬 태음인은 적절한 정도를 모른다. 대뜸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을 퍼붓는다. 결국 사고를 치게 된다. 평소에 조용하던 아이들이 오히려 큰 사고를 많이 친다. 상황에 겁을 먹게 될 때 사고를 치는 법이다.

 

태음인의 치심(侈心)에 대한 설명을 똥개도 제 바닥에서는 50점은 접어준다는 말로 시작한 김에 개에 관한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개가 짖는 것은 겁을 먹었을 때다. 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조용히 틈을 노린다. 치심(侈心)이 뜬 태음인의 모습은 마구 짖어대는 똥개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런데 가끔 짖는 개가 무는 수도 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대든다고, 겁이 지나치게 나서 공황 상태에 들어가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든다.

 

사상심학도 한의학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그동안 한의학적 이야기는 전혀 안 했으니, 한 번쯤 의학적인 내용을 말해보자. 태음인은 간()의 흡취지기(吸聚之氣)가 강해서 간에 기운을 많이 모아둔다. 그래서 평소에는 기운이 밖으로 펼쳐 나오는 것이 약하다. 그런데 간에 모여 있던 기운이 폭발하면 일시에 터져 나오며 조절이 안 된다. 그럴 때는 특징이 눈에 푸른 기운이 돈다. 간의 목기가 푸른색으로 나타나고, 간의 경락이 끝나는 곳이 눈 쪽이라서 눈에 퍼런 기운이 감돈다. 태음인이 안색이 변하며 눈에 푸른 기운이 돌면, 그건 사고를 친다는 조짐이다. 이성의 통제가 무너진 상황이다.

 

결국 모든 것을 지키려 하면 위의(威義)에 도달하기 어렵다. 꼭 지켜야 할 것을 최소로 줄이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리면, 정말로 지켜야 할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내 목은 벨 수 있어도, 내 뜻은 바꿀 수 없다.” 이런 것이 위의(威義)가 가장 강한 모습으로 표출되는 형태다. 좀더 정확하게는, 그런 말을 비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담담히 웃으며 할 수 있으면, 그것이 대인의 위의(威義)라 할 수 있는 경지다.

 

 

 

 

자신감

 

모든 것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과, 타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익힌다는 두 가지 관점이 동시에 제시되어서 위의(威義)라는 것이 무엇인지 오히려 헷갈릴지도 모르겠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결과를 중심으로 보면 남을 배려하는 방식을 익혔을 때 나타나는 세심함이 위의(威義)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근본적으로 위의(威義)란 소양인의 모습을 태음적인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이니까. 소양인의 남에 대한 배려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들쭉날쭉한 것에 비해, 태음인의 위의(威義)는 일관성이 있고 지속성이 있다. 게다가 자신을 드러내려는 경박함이 없다. 그러니 대인의 위의(威義)라 부를 만하다. 또 소양인의 배려는 사회 통념에 맞추는 경향이 있는 것에 비해, 태음인의 위의(威義)는 상대가 처한 특수성을 고려해주니까 배려 받는 입장에서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감이 떨어진 태음인에게서 남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기가 상당히 힘들다는 것이다. 태음인의 섬세함이 우선 적용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다음에 가족이며, 다음에 타인에게로 향한다. 자기에게 닥쳐올 수 있는 여러 가능한 상황 중에 자신이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고 느껴지면 그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기 때문이다.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도 지레 겁을 먹고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에 생각이 미치기 어려워진다.

 

위의(威義)를 갖추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태음인의 장점, 즉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침착함을 최대한 키우는 것이다. 똥개 이야기를 한 번만 더 꺼내자면, 50점은 접어주는 자기 바닥을 조금씩 조금씩 넓히는 것이다. 자기 바닥도 다 이해가 안 된 상태에서 함부로 남의 영역에 가서 어슬렁거리지 않는 것이다.

 

저 바닥이 더 물이 좋다고 여럿이 떠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솔깃해한다. 그러나 태음인은 같은 바닥에서 더 많이 건질 수 있는 사람이다. 남들이 10을 건지는 바닥에서 20을 건지고, 남들이 20을 건지는 바닥에서 30을 건지는 능력이 있다. 남들은 이제 물 다 갔다고 떠나는 바닥에서도 태음인은 계속해서 건질 것을 찾아낸다. 예를 들자면, 태음인은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기도 한다. 볼 때마다 조금씩 더 건져낸다. 한 영화를 대여섯 번씩 보고 나서, 어떤 느낌이 있어서 표현은 했지만 감독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워했던 부분을, 관객입장에서 건져낸다.

 

그렇게 확실한 자기 영역이 있으면 모든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누그러진다. 탈심(奪心)을 탈리(奪利), 절심(竊心)을 절물(竊物)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치심(侈心)도 다른 설명이 붙는데, 이를 치심(侈心)은 자존(自尊)’이라고 설명한다. 치심(侈心)이란 자신을 높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결과다. 확실한 자기 영역이 있다는 안도감이 있으면 함부로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반대로 불안감이 생기면, 어떻게든 자신을 높이려 들게 된다. 결국 자신의 영역에 익숙해지는 것, 원래 태음인이 가장 잘 하는 것, 그 부분에 치심(侈心)을 극복하는 열쇠가 있다.

 

확실한 자기 영역이 있어서 이것만 지키면 다른 것들은 잃어도 다시 복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 타인에 대해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남이 뭐라 하든 자신이 있으니까 굳이 강하게 강조할 이유도 없다. 여유 있고 웃는 모습이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십팔기 유단자인 후배를 안 적이 있다. 그 후배가 음악다방에 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밤에 일이 다 끝난 뒤에 다방의 의자를 한 쪽으로 밀어놓고 십팔기 기본 동작을 펼치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동작을 가만히 보다보니, 마치 무용 같았다. 그래서 가만히 안에 들어가 필자가 좋아하던 죤 바예츠(Joan Baes)River of pine>이라는 노래를 틀어 놓았다. 음악과 무도(武道)가 너무 아름답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다가 흥이 돋아 몇 가지 동작을 따라 해보려는 순간,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근육이 충분히 단련되지 않으면 흉내조차 불가능한 동작들이었던 것이다. 힘이 뒷받침되었을 때 유연함이 나온다는 것을 아주 감명 깊게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이를 마음에 적용시켜보자. 자신감이 뒷받침되어야 마음의 유연함이 나오는 것 역시 같은 이치다. 마음에 힘이 있어야 비로소 유연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천성의 섬세함을 타인에게까지 적용시킬 수 있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태음인의 유연하면서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대인의 위의(威義)라 부른다.

 

 

 

 

치심(侈心)위의(威義)의 예

 

치심(侈心)에 대해서도 유명인의 예를 좀 들면 이해가 쉬울 텐데, 뭐 너무 흔해서 굳이 예로 들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군사 문화에서 갓 벗어난 상황이나 천민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는 태음인의 치심이 발동하기 아주 좋은 상황이다.

 

태음인인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의 90% 이상이 치심(侈心)을 강하게 내보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교수, 의사 같은 직업에도 치심(侈心)이 강한 사람이 어느 정도 절제되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고 느껴진다. 심지어는 종교인 중에도 치심(侈心)이 강하게 읽히는 사람이 많으니까. 기술자 집단이 비교적 치심(侈心)이 덜 드러나는 집단인 듯하다. 치심(侈心)은 굳이 특정인을 예로 들지 않겠다. 주변에 찾아보면 무지하게 흔하니까.

 

위의(威義) 쪽의 예로는 황희 정승이 적절할 듯하다. 검정 소와 누렁 소의 유명한 일화나 소개하고 넘어가자.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일까?

 

황희 정승이 젊었을 때 길을 가다가 검정소 한 마리와 누렁소 한 마리를 데리고 논을 가는 농부를 보았단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여보 농부, 그 두 마리 소 중에 어느 놈이 일을 잘하오[二牛何者爲勝]?”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농부가 논갈이를 중단하고 길로 나오더니 젊은 황희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검정소가 일을 더 잘한다[此牛勝]”고 하더란다. “아니, 뭐 그만 말을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귓속말로 하오[何以附耳相語]?”라고 되물으니, 농부가 답하기를 누렁소가 들으면 기분 나쁠 것 아닙니까[此勝則彼劣, 使牛聞之, 寧無不平之心乎]?” 하더란다.

 

순간 젊은 황희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 깨달음을 평생 지키고자 했다고 한다. 정승이 되고 명재상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다 이 깨달음 덕분이라 하던데, 물론 야사니까 전적으로 믿을 바는 못 되지만 그런 야사가 내려온 것도 황희 정승의 처신이 그런 야사에 어울릴 만하니까 내려오게 되었을 것이다. 말한 농부도 대단하지만, 순간 깨달은 황희 정승도 보통이 아니다. 그 깨달음이 결국은 위의(威義)로 이어지는 것이다.

 

막상 황희 정승의 위의(威義)가 표현되는 모습은 이야기를 안 했는데, 황희 정승의 일화는 이 책 저 책에 많이 나오니까 독자들께서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4. 나심(懶心)과 재간(才幹)/ 소양인의 태음 기운

 

 

나심(懶心)

 

이제 소양인의 태행(怠行), 독행(獨行)만 설명하면 이론적인 부분은 마무리가 된다. 각 체질별로 사상의 기운을 고루 갖추는 방법과 그 과정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에 대한 설명이 마무리되는 셈이다. , 시작하자.

 

소양인의 태행(怠行)나심(懶心)이라고 한다. ()란 게으르다는 뜻이다. 그런데 태행(怠行)이라고 할 때의 태()도 게으르다는 뜻이다. ()와 합치면 나태(懶怠)’가 되어 게으르다에 딱 대응되는 한자어가 된다. 각 체질의 사람들이 다른 체질의 인사(人事)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흉내 내는 것을 태행(怠行)이라 부른다. 즉 어설피 알고 대충 흉내 내는 것 자체가 좀 쉽게 해보려는 게으른 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소양인의 태행(怠行)을 역시 게으름을 뜻하는 ()’를 써서 나심(懶心)이라고 한 것은 나와 태가 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에는 업신여긴다는 뜻이 들어 있다. 가볍게 보고 게으름을 부린다는 뜻이다. ()는 피곤하거나 늙거나 해서 졸리고 나른한 것, 기운이 없어서 늘어진 것을 의미한다. ()가 적극적 게으름이라면 나()는 게으름을 부릴 상황에 몰려서 나오는 수동적 게으름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나심(懶心)이 왜 태행(怠行)이 될까?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었는데, 건방을 떨거나 게으름을 피워서 그런 상황에 몰렸다는 의미다. 즉 소양인이 앞뒤 안 가리고 마구 일을 벌이다가 감당을 못해서 뒤로 나자빠질 때 나오는 것을 나심(懶心)이라 한 것이다. 소양인이 일을 벌이기 전에 미리 헤아려보기를 게을리 하는 태()를 행한 결과가 나()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나심(懶心)은 소양인이 태음인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흉내 낼 때 나오는 행동이다. 소양인이 보기에 태음인은 확실히 게으르다. 뻔한 일도 바로바로 하지를 못하고 마냥 시간을 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생각 중이라고 말하는데, 소양인이 보기에는 그렇게 뻔한 것이 뭐 생각할 것이 있나 싶은 게 그저 게으름을 피우며 핑계를 대고 있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태음인은 시작할 때 주저한다는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나 없나를 가늠해 보느라고 시간을 들인다. 대신에 막상 시작하고 나면 그 뒤는 주저하는 것이 없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어떻게든 끝을 낸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헛심을 쓰는 일은 적다는 것이다. 반면에 소양인은 능력이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일을 벌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 놓고는 중간에 포기한다. 소양인이 벌여놓은 상태에서 난 능력이 안 돼를 외치는 것과 태음인이 시작하기 전에 나한테 벅차를 말하는 것이 비슷한 행동일까? 겉보기에는 비슷한 행동이지만 한쪽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되고, 한쪽은 그것이 없다.

 

태음인도 하다가 힘이 들면 쉬기도 한다. 다른 급한 일이 생기면 하던 일을 뒤로 미루기도 한다. 하지만 태음인이 쉴 때는 머릿속으로 방법을 찾고 연구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 미뤄두었던 일은 언젠가 마무리한다. 그러나 소양인이 미룬다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 그냥 끝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소양인의 나심(懶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 자체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자신이 하는 것에 대한 포기라는 것이다. 즉 자신은 포기했지만 일 자체는 이뤄져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남을 다그치거나 탓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가정에 일반론을 적용하는 문제

 

소양인의 나심(懶心)이 문제되는 것도 태양인의 절심(竊心)의 경우와 비슷하다. 태양인의 절심(竊心)을 설명할 때, 가정이나 소집단과 같이 노동력 투입의 불균형이 바로 드러날 수 있는 규모 이하가 될 때 문제가 된다고 했다. 소양인의 나심(懶心)이 문제되는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집안일에서, 친구 사이에서, 친한 동료 사이에서 나심(懶心)은 늘 이런 곳에서 발동하고, 이런 부분에서 발동되었을 때 주로 문제를 일으킨다.

 

소양인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준에 맞춰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집단에서는 일을 벌이는 소양인의 방식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집단 구성원이 소양인의 방식으로 설치다가 일시에 나가떨어지면 문제가 되겠지만, 집단이 커질수록 자체 내에서 균형이 잡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소양인의 방식은 집단에 추진력을 불어넣고 활력을 주는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기 쉽다. 또 그러다가 그 소양인이 나가떨어져도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일을 넘겨받아 처리할 수 있어서 그럭저럭 넘어간다.

 

그러나 집단이 작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양인이 애초에 일을 벌이면서 소양적인 방식으로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이 이를 이어받아서 마무리할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일을 물려받은 사람으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방법이니까. 예를 들어서 관청을 상대로 열심히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싸우는 와중에서 싸움을 주도하던 소양인이 갑자기 뒤로 물러섰다고 하자. 큰 집단이라면 다른 소양인이 이를 이어받아 싸울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싸우던 중이라면 다른 가족이 이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가족들이 조분조분 토론하는 방식이나 적당히 구슬리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데는 익숙한데 나가서 따지는 방식에는 익숙하지 않다면, 그때는 정말 대책이 안 선다.

 

나심(懶心)이 발동할 경우를 줄이려면 일단 일을 벌이는 것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그 기본은, 일반론을 지나치게 적용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편과 특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도 소양인의 일반론 중시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를 몇 가지 이야기했지만, 작은 집단 내의 일에 일반론을 너무 적용하면 늘 쓸데없는 일을 벌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예를 들어보자. 집들이를 한다고 직장 동료를 여럿 초청했을 때는, 집을 쓸고 닦고 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러나 가족처럼 지내는 친구가 차 한 잔 마시자고 왔을 때도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아주 지저분한 정도만 아니게 정리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손님을 문 밖에 세워둔 채, “잠깐만, 잠깐만을 연발하며 청소한다고 난리를 친다면 어떨까? 진짜 친한 친구라면 오히려 부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손님을 초대할 때는 집 정리부터 하고 초대하는 것이 예의라는 일반론을 지나치게 적용한 결과다.

 

또 자주 보이는 경우가, 옆집, 뒷집 흉내 내는 것이다. 옆집, 뒷집이 이렇게 해서 잘 되었건 저렇게 해서 잘 되었건, 그건 옆집, 뒷집 이야기다. 온 동네가 다 잘 되었어도 우리 집은 그 방식이 안 맞을 수 있다. 특수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소양인이 작은 일을 할 때, 일반론에 집착이 크면 불필요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일을 벌였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소양인의 자기 비하

 

나심(懶心)의 극복을 위해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 자기 긍정감이다. 소양인은 모든 감정이 기복이 좀 심한 편이지만, 자신에 대한 평가 역시 기복이 심하다. 일을 벌일 때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높은 상태에서 벌인다. 힘이 벅차면 그 평가가 갑자기 낮아진다. 그 상황이 되면 그냥 뒤로 나자빠져서 남들보고 알아서 해결하라고 버틴다. 그래서 나심(懶心)을 동무(東武)자비(自卑)’라고 설명한다. 태음인의 치심(侈心)자존(自尊)이라고 설명한 것과 대를 이룬다. 자기 비하의 마음이 나심(懶心)이라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엄마가 파출부인 줄 아니?” 어떤 상황일까? 저녁 설거지 다 끝날 즈음에 아이들이 도시락을 꺼내놓을 때 하는 말이다. 이게 약한 나심(懶心)의 표현이면서 과심(誇心)도 약간 섞인 재미있는 경우다.

 

아이들은 쉽게 무언가에 몰두하고, 그러면 쉽게 잊어버리는 법이다. 빈 도시락은 저녁 설거지 시간 이전에 싱크대에 놓아야 한다는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이 엄마를 무시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은 아니다. 그것을 엄마에 대한 무시로 확대해석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심(懶心)이 발동된다. 물론 엄마가 다른 일들을 벌여놓은 것이 많을수록 그런 상황에서 나심(懶心)이 생겨날 가능성은 높아진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데 감히 무시하느냐는 마음이 드니까.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몰두할 때 배우는 속도는 지시에 의해 강제될 때 배우는 속도보다 월등히 높다. 아이들은 배울 것이 많기에 몰두할 기회를 많이 주고자 지나친 규율이나 약속으로 강제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아이들이 정해진 약속을 하나도 잊지 않고 다 지킨다면 이미 사회에 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고, 더 이상의 급속한 학습은 기대하기 어렵다. 매사에 진심으로 몰두하지 않고, 적당히 몰두하는 버릇이 배었다는 것이다.

 

물론 더 훈련이 되면 몰두할 때는 몰두하면서도 약속이나 규칙은 지키는 요령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준은 사회인이 되었어도 자기 발전 욕구를 강하게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의 숙련 끝에나 얻을 수 있는 경지다. 아이들에게 요구할 내용이 아니다.

 

결국 사회적인 기준, 사회적인 약속을 가정 내에서 요구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약속한 것 지키라는 건 사회적으로는 당연한 요구고 약속을 어기는 것은 요구한 사람에 대한 모욕이고, 무시다. 그러나 가정이나 작은 집단에서도 이를 무시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렇게 무시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왜 일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울컥 일어나면서 파업 분위기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 나심(懶心)이다. 위의 파출부 발언은 나심(懶心)이 본격 발동된 것은 아니고, 파업 모드로 들어간다고 경고한 수준인데, 과심(誇心)이 섞이면서 표현이 좀 과격해진 것이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나심(懶心)이 심해졌을 때는 이를 비난하면 안 된다. 대부분의 경우 상황은 더 악화된다. 자기 비하의 감정 상태에 들어 있는 것이라서 정당한 비판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심지어 비판을 넘어서 비난이 되면 바로 신경질적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냥 힘들지? 좀 쉬어라고 말하고 대신 해결해주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는 대충 마무리된 다음에 다음에는 일을 벌이기 전에 의논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그럴 때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니까 너무 무리하는 것은 싫다라는 말을 덧붙이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YS의 당무 거부와 IMF 대처

 

이런 식으로 나심(懶心)은 주로 작은 집단에서 발생하기에 독자들과 공유할 만한 사례가 좀 드문데, 마음 읽는 공부 하라고 다행이 사회적인 일에서 나심(懶心)을 보인 사례가 있다. YS가 당무(黨務)를 거부하고 고향에 내려가 칩거했던 일을 기억하는지? 3당 합당된 민자당에서 YS가 당대표가 되었는데도 박철언이 끊임없이 견제를 하자 벌어졌던 일이다. 그걸 벼랑 끝 전술이니, 노태우, 박철언이 결국은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확신한 정치 9단다운 고단수 술수니 하지만, 꼭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한 가지 동기나 계산만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법은 절대 없다. 젊은 시절에는 간혹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자세히 알고 보면 꼭 겉으로 드러난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자신의 행동을 유발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다른 부분들이 끼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억제해서 무의식 속에 숨기고 있는 경우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 이런저런 요인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굳이 억제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하며, 본인도 이를 아는 경우가 더 많다.

 

YS의 행동이 계산에 의한 측면이 훨씬 많기는 하나 100% 확신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다. 즉 만일 자신이 파업으로도 노태우나 박철언을 굴복시키지 못했을 때에 대한 대비가 있었냐는 것이다. 그럼 그런 큰일을 확실한 대비책 없이 어떻게 했을까? 안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허수아비 당대표 하느니 그냥 벌판에 다시 서겠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허수아비 취급당하고 있다라는 마음이 바닥에 깔려 있었기에 그런 행동이 나온 것이고, 이 마음이 나심(懶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나심이 주가 된 경우는 아니다. 하지만 계산이나 확신이 동기의 90%였다 하더라도 일부는 나심이 발동해서 메워진 것이다.

 

당무 거부 때의 나심(懶心), 권력YS에게 집중된 상황이 아니었고, 전체적인 동기에서 나심(懶心)이 작용한 부분도 적었기에 국가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다. 즉 소양인의 나심(懶心)은 공적인 일에서는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 쪽에 해당된다. 그러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그 사람이 나심(懶心)을 보이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IMF 신탁통치 상황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나서 정권을 넘길 때까지의 YS의 행동을 검토해보자끔찍해서 별로 회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YS 특유의 순발력이 전혀 발휘되지 않았다는 점이 보이는가? 그때는 김현철 문제에 대해 억울하다는 감정을 느끼면서 이미 나심(懶心)이 조금씩 쌓여가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관료들이 자신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심(懶心)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그 순간 소양인의 최대 장점인 순발력이 정지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나심(懶心)이란 소양인 특유의 순발력을 잃는 것이다. 반대로 나심(懶心)의 극복이란 순발력을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일을 벌여놓고 마무리가 힘든 상황에서도 순발력을 유지하는 것, 그것을 재간(才幹)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통 재주가 많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재간(才幹)이라는 단어다. 물론 소양인의 독행(獨行)을 일컫는 단어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인의 재간(才幹)이라고 표현한다.

 

태음인이 일단 벌여놓은 일은 마무리한다는 것은, 처음에 생각했던 방법대로, 익숙한 방법대로 밀고 나가서 완성시키는 것이다. 소양인의 마무리는 구체성이나 특수성에 얽매이지 않는 마무리다. 앞에서 피서 가는 이야기에 좋은 예가 나왔었다. 행선지 가는 길이 너무 심하게 막히면 행선지 자체를 바꾸어버린다. 애초의 목적지에는 가지 못했지만 즐거운 피서라는 근본 목적은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런 능력은 소양인에게 본래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짜증 때문이다. 벌여놓은 일이 꼬이면 일을 벌인 소양인에게 비난이 집중된다. 본인은 억울하다. 자신은 열심히 일했는데 비난까지 받아야 한다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소양인은 그 순간에 감성적 대응이 먼저 올라온다. 짜증 때문에 사태 해결 쪽으로 집중을 못하는 것이다. 슬슬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는 자기 비하감도 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 옆에서 당신이 제일 나아” “당신 밖에 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이 없으니 한번 좋은 방법을 생각해봐라고 다독여주면, 그 순간 나심(懶心)이 극복되고 재간(才幹)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마 YS도 김현철 문제로 비난이 집중되는 상황이 아니었으면 IMF 문제에 대해 더 현명하게 대처했을지도 모른다.

 

 

 

 

강박관념에서의 탈피와 기분 전환

 

다른 체질의 독행(獨行)에 대해서는 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경지라고 하면서, 유독 소양인에 대해서만 주위에서 격려해주면 재간(才幹)이 발휘될 여지가 높다고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필자는 왜 소양인만 편애하느냐고 독자들의 야단을 맞을 것도 같고, 결국 재간(才幹)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근본은 소양인 자신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 노력을 발휘하는 방향은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쪽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소양인의 나심(懶心)이 발동되기 쉬운 순간, 즉 일을 벌여놓고 마무리를 못하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주변 사람들 중에 꼴좋다, 벌여놓고 마무리도 못하고…….”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더 많을까? 그렇지 않다. 나심(懶心)의 문제는 주로 가까운 사람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짜 가까운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 다행이다. 이제 좀 한숨 돌리자라고, 즉 그렇게 마구 일을 벌여도 잘 마무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막상 소양인 본인뿐이다. 주변에서는 이미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중간에 멈춘다고 해서 크게 실망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그 일 때문에 휘둘릴 일이 줄어들었다는 안도감이 앞선다.

 

주변 사람이 안도감을 더 느끼느냐 실망감을 더 느끼느냐를 누가 가장 잘 파악할까? 감성이 예민한 소양인이다.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 마무리를 고집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마무리를 생각하면 방법은 여러 가지가 찾아진다. 문제는 마무리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런 감성 능력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완벽한 마무리는 원래 태음적인 영역이다. 원래 시작한 방식으로 꾸준히 밀고 나갔을 때나 가능한 방식이기도 하고, 소양인에게 어울리는 것은 재치 있는 마무리이고 그것을 재간(才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학생 동아리에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요즘처럼 배낭여행도 많이 다니는 시절 말고, 70년대 중반쯤을 생각해보자. 신입생 대원의 반 이상이 태어나서 부모와 떨어져 여행하는 것이 처음이다(그때는 정말 그랬다). 2,3학년들이 선배랍시고 이들을 이끌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리더가 소양인이어서 일정을 좀 욕심스럽게 잡았다. 너무 여러 곳을 들르다보니 산에서 해가 슬슬 지는데,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요즘이야 팻말도 많고 길도 좋지만, 그 당시는 리본 매어 있고 다른 곳보다 풀 높이가 조금 낮으면 이쪽이 길이구나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산에 다니려면 지도와 나침반 없이는 길 잃기 십상인 시절이었다. 산장? 대피소? 그런 것은 아주 유명한 산에만 있었다.

 

슬슬 신입생들의 동요가 느껴지는 상황이다. 리더인 소양인이 평소에 순발력 있다고 생각했던 2학년을 하나 불러서 귓속말을 좀 하더니, 주변의 2,3학년들에게 눈을 찡긋한다. 그러고는 전체를 불러 모은다.

여행의 진짜 맛을 느끼려면 노숙을 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 일정을 발표하면 겁먹고 안 따라올 회원이 있을 것 같아서 선배진에서만 의논하고 비밀로 했습니다. 지금부터 오늘밤 노숙 일정을 발표하고 해가 떨어져도 그냥 하산할 것인지 노숙을 할 것인지 투표로 결정하겠습니다.” 미리 준비시킨 2학년이 즉석에서 급조한 일정을 발표한다. “일단 노숙의 요령에 대한 선배의 강의가 있고, 배낭에 비상식량 준비한 정도를 평가해서 시상과 약간의 벌칙을 하고, 천문학과 선배의 별자리에 대한 강의가 이어질 것이며…….”

 

산에서의 사고는 항상 당황하고 겁먹었을 때 일어난다. 산에서 사고를 안 당하는 요령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철저한 준비, 두 번째는 겁먹거나 당황하지 말 것, 소양인이 첫 번째는 좀 서툴다. 그러나 두 번째는 가능하다. 자기 혼자뿐만이 아니라, 전체를 대상으로도 가능하다. 결국은 대중의 정서적 반응을 파악하는 능력이 기본이니까.

 

위의 기막힌 재간(才幹)이 발휘된 순간이 이해가 되는가? 최초의 일정에 따른 마무리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렸다. 그 일정을 못 지키면 대원들이 자신을 비난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도 벗어났다. 무엇보다 자신의 기분을 먼저 바꿨다. 그리고 대원들의 기분을 돌릴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소양 기운으로 도저히 안 되는 것을 시도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 결과는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멋진 마무리로 나타났다. “자신의 능력을 키워서 자신이 약한 영역에 도달하도록 하라.”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 주제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모나 선생님이 아이를 바로 키워서 사심(邪心)이나 태행(怠行)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요령도 마찬가지다. 소양인 아이에게 마무리에 대한 지나친 강박관념을 불러일으키면, 확실히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 나심(懶心)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마무리하는 버릇은 길러주어야 한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은, 마무리를 못하는 것이 아이의 능력 부족임을 알아야 한다. 이를 도덕성의 부족이라고 몰아붙여서는 절대 안 된다. 아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일 뿐이다. 부족한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능력의 부족임을 지적하고, 능력을 키우기 위한 계획을 아이와 어른이 같이 짜나가고 실행할 때, 아이에게 부족한 부분을 해결할 능력이 생겨난다.

 

모든 사심(邪心)태행(怠行)은 그 뿌리가 잘못된 교육에 있다. 아이의 한계를 아이의 오류라고 잘못 지적하면 왜곡된 도덕관을 가지게 되고, 자기 긍정감이 부족하게 된다. 이렇게 키워진 아이는 사심(邪心)태행(怠行)으로 도망간다. 자신을 믿고 자신을 긍정하는 아이는 박통(博通)독행(獨行)으로 나아간다. 물론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훌륭하게 박통(博通)독행(獨行)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주위의 한 명쯤은 의지하고 배울 사람이 있었던 경우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당신 주변의 어느 아이가 바르게 크고 싶어서 간절히 의지하는 바로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5. 독행(獨行), 태행(怠行)에 관한 약간의 사족

 

 

독행(獨行)태행(怠行)의 문제에 있어 까다로운 점은, 다른 기운을 배우는 것은 맞는데 그것이 무엇에 능해지기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심(邪心)박통(博通)에 있어서는 이 문제가 간단하다. 예를 들어 태양인이 태음 기운을 배우려고 한다는 것과, 태음인의 사고방식을 배우려 한다는 것은 같은 문제가 된다. 태음 기운에 해당되는 천기(天機)인륜(人倫)이고, 태음인이 잘 느끼는 천기(天機)인륜(人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사(人事)에 있어서는 태양과 소양, 태음과 소음이 바뀌고 있어서 까다로워진다.

 

즉 태양인이 정()으로 인사(人事)를 하는 것에 있어 약점을 극복하려고 소음기운을 배우려 한다면, 소음 기운에 해당되는 인사인 거처(居處)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소음인의 행동 방식을 배우려 한다면 소음인이 능한 당여(黨與)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 동의수세보원에는 명확한 결론이 없다. 굳이 관련되는 문구를 찾아보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게 된다.

 

(한의사나 한의학과 학생인 독자를 위해 원문의 내용을 간략히 언급하자. 태양인이 당여(黨與)에 약하다는 표현은 분명히 나온다. 반면 태양인과 거처(居處)의 문제는 아예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인사(人事)에 있어 약점의 극복이라면 당여(黨與)에 익숙해지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태양인의 태행(怠行), 독행(獨行)에 대한 설명은 태양인의 엉덩이에 절심(竊心)이 없으면 대인의 방략(方略)이 나온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귀와 신장과 배와 엉덩이는 같은 기운으로 강해지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거처(居處)는 신장의 기운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쪽을 따르면 태양인의 독행(獨行)방략(方略)거처(居處)의 약점을 극복하는 능력이라 볼 수 있다.)

 

동의수세보원에서 마음을 설명하는 부분은 네 체질에 대해서 대칭적인 구조로 씌어졌기 때문에 이런 애매함은 다른 체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본이 가지는 이러한 한계 때문에 태행(怠行)독행(獨行)의 문제는 인사(人事)의 어느 영역의 문제인지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양인(陽人)에 있어서는 당여(黨與)거처(居處)에서 두루 문제가 되는 행동을 중심으로, 음인(陰人)에 있어서는 사무(事務)교우(交遇)에서 두루 문제가 되는 행동을 중심으로 사례를 들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절충한 것이다.

 

책을 쓰는 입장에서는, 이 부분을 명확히 밝힐 수 있었다면 전체적인 이론 구조가 훨씬 더 명확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무리한 해석은 피하고자 한다. 이 책에는 동무(東武)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부분적으로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해석은 아예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견해를 첨가한 것이거나, 좀더 현대적인 새로운 용어를 도입해서 설명하는 부분들로 국한된다.

 

언급은 되어 있으면서,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부분에 대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를 일방적으로 단정 짓는 것은 단순한 새로운 해석의 범위를 넘는 일이다. 더군다나 그 부분이 전체적인 구조와 관련되는 부분이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은 사상의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자들의 토론에 의해 학술적으로 정립되어야 할 내용이지, 한두 명이 자기 마음대로 떠들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부족한 능력으로 견해를 피력하기보다는 한의학계의 공통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인용

목차

사상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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