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작은 나라일수록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
3b-5. 맹자의 고제(高弟) 만장(萬章)이 물어 아뢰었다: “송(宋)나라는 소국(小國)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왕정(王政)을 실천하고 싶어하는 의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옆의 제나라와 초나라와 같은 대국이 그 꼴을 보고 싶어하지 않아 정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사기(史記)』 「송세가(宋世家)」에 의하면 언(偃)이 군주인 형 척성(剔成)을 방축하고(BC 331), 자립하여 송의 군주(BC 330)가 되었다. 십년 후에는(BC 320) 칭왕(稱王)하고 제ㆍ초ㆍ위를 깨뜨리고 한때 세를 과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사마천은 그를 걸과 같은 포악한 임금으로 그리고 있고, 그의 폭정 때문에 제ㆍ위ㆍ초가 연합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BC 248). 그러나 만장의 증언이 훨씬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사마천은 송을 멸망시킨 제ㆍ초ㆍ위의 입장에서 기술하였을 뿐이다. 송나라는 마지막으로 현군의 정치를 맞이했으나 대국이 그것을 파멸시킨 것이다. 언이 칭왕했을 때가 바로 맹자가 양혜왕을 만난 해였다】. 3b-5. 萬章問曰: “宋, 小國也. 今將行王政, 齊ㆍ楚惡而伐之, 則如之何?”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옛날에 은나라의 탕왕(湯王)이 아직 소국의 제후노릇을 하고 있던 시절에 그는 박(亳)【탕의 도읍지,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동남】에 도읍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와 이웃하고 있었다【갈나라의 문제는 1b-11에서 이미 다루었다. 같은 주제가 반복되고 있다. 갈은 영성(嬴姓)이며, 그 고성이 지금 하남성 영릉현(寧陵縣) 북 15리에 있다. 진(秦)나라도 영성(嬴姓)이다】. 그런데 갈백(葛伯, 갈의 군주)이 방탕하기 그지없어 조상과 제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탕왕은 심부름꾼을 보내 물어 말하였다: ‘왜 제사를 지내지 않는가?’ 그러자 답변하기를, ‘공물로서 바칠 희생 소나 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탕은 사람을 시켜 희생에 쓸 소와 양을 보 내주었는데, 갈백이 그만 그것을 자기가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또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孟子曰: “湯居亳, 與葛爲鄰, 葛伯放而不祀. 湯使人問之曰: ‘何爲不祀?’曰: ‘無以供犠牲也.’湯使遺之牛羊. 葛伯食之, 又不以祀. 탕이 또 사람을 보내어 물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뇨?’ 그러자 갈백은 말하기를, ‘공물로 드릴 곡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탕은 박 땅의 대중을 동원하여 갈 땅의 밭을 갈게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곡물은 반드시 그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 땅의 노약자들은 갈 땅에서 밭을 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매일 도시락을 날랐다. 湯又使人問之曰: ‘何爲不祀?’曰: ‘無以供粢盛也.’湯使亳衆往爲之耕, 老弱饋食. 그런데 갈백은 자국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길목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지게로 나르는 술과 밥과 곡식을 강탈하였다. 그리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항하는 자는 다 죽여버렸다. 한 어린이가 찰기장밥과 고기를 이고 가는데 그 어린애를 죽이고 그것을 빼앗았다. 『서경』【조기는 『상서(尙書)』의 일편(逸篇)의 글이라 했는데, 현재 고문 「중훼지고」 6장에 실려있다】에, ‘갈백이 밥 나르는 사람을 원수로 삼았다[葛伯仇餉]’ 쓰여져 있는데 이 글은 바로 이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사실 ‘갈백구향(葛伯仇餉)’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맹자가 이미 『상서(尙書)』의 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었던 한 예를 보여준다. 자기가 구전으로 들은 이야기를 『상서』의 문장과 결부시켜 확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 없는 이 어린아이를 죽이는 처참한 사건에 이르게 되자 탕은 드디어 발심하여 갈을 정벌하였다. 그래서 사해 안의 모든 사람들이 ‘천하의 부를 노리고 한 일이 결코 아니다. 죄 없는 필부필 부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신 것이다’라고 칭송하였다. 葛伯率其民, 要其有酒食黍稻者奪之, 不授者殺之. 有童子以黍肉餉, 殺而奪之. 『書』曰: ‘葛伯仇餉.’ 此之謂也. 爲其殺是童子而征之, 四海之內皆曰: ‘非富天下也, 爲匹夫匹婦復讎也.’ 탕왕의 정벌은 갈로부터 시작하였다[載=始]. 11개국을 정벌하였는데,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탕이 동쪽을 향하여 정벌을 나가면 서쪽의 이(夷)는 왜 우리 쪽으로는 빨리 안 오시나 원망하고, 남쪽을 향하여 정벌을 나가면 북쪽의 적(狄)은 왜 우리 쪽으로는 빨리 안 오시나 원망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어이하여 우리를 뒷 순번으로 하시나이까? 빨리 오소서!’ 하였다. 湯始征, 自葛載, 十一征而無敵於天下. 東面而征, 西夷怨; 南面而征, 北狄怨, 曰: ‘奚爲後我?’ 백성들이 탕의 군대를 기다리는 것이 마치 큰 가뭄에 단비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았다. 탕임금의 작전지역에서도 시장에는 사람들이 여전히 바글거리며 거래가 이루어졌고, 농부는 여전히 김매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탕왕이 가는 곳마다 그 나라의 폭군을 주벌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니, 때맞춰 은혜의 단비가 내리는 듯하니, 인민들이 쌍수 들고 환영하였던 것이다. 『서(書)』에 이른다: ‘우리의 진정한 임금님 탕왕을 기다렸다! 탕임금이 오시면 우리는 이제 다시 가혹한 형벌에 시달리지 아니 하리라!’ 民之望之, 若大旱之望雨也. 歸市者弗止, 芸者不變, 誅其君, 弔其民, 如時雨降. 民大悅. 『書』曰: ‘徯我后, 后來其無罰.’ 또 주왕조의 초기, 동방의 유국(攸國)을 정벌한 사건과 관련하여 다 음과 같은 역사기록이 있다: ‘유국【이것을 고유명사로 보지 않고 일반명사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그것은 오류이다. 갑골문이나 만상(晩商)의 금문에 유국(攸國)이 등장한다】이 신하 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주왕(周王)은 동정(東征)을 감행하여, 학정(虐政)에 시달리던 그곳의 남녀를 평화롭게 만들었다. 그들은 현황(玄黃)의 비단【검은색과 황색의 비단으로서 화폐 대신 쓰였던 것】을 대광주리에 가득 담아 예물로 바치면서, 우리 주왕(周王=무왕武王)을 알현하는 영광을 얻어 그 광채 나는 아름다운 인품을 두 눈으로 보고, 대국인 우리 주나라의 신하로서 귀복(歸復)하기를 원하였다.’ ‘有攸不惟臣, 東征, 綏厥士女, 匪厥玄黃, 紹我周王見休, 惟臣附于大邑周.’ 이 기록은 과연 무엇을 하기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은나라의 지위있는 군자들이 현황의 비단을 대광주리에 가득 담아 주나라의 군자들을 환영하였고, 또 은나라의 일반백성들은 소쿠리에 밥을 담고 호로병에 술을 담아 주 나라의 일반백성들을 환영하였다는 뜻이다. 왜 이토록 자기를 정벌하는데 환영한 것일까? 그것은 무왕이 물난리. 불난리와도 같은 도 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고, 잔악한 폭정을 제거하기 위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야심도 없는 성전(聖戰)을 감행한 것뿐이라는 것을 그들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其君子實玄黃于匪以迎其君子, 其小人簞食壺漿以迎其小人, 救民於水火之中, 取其殘而已矣. 『서경』 「태서(太誓)」편【현재 「태서」중에 있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 주나라의 무위(武威)를 드높여, 은나라의 국경을 침공하였다. 저 흉악하고 잔악한 폭군을 주살하여 우리 정벌의 공적이 드넓게 펼쳐지니, 이것은 오히려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에게 광휘를 안겨주는 것이다(마지막 구절의 해석은 일반해석과 다르다).’ 「太誓」曰: ‘我武惟揚, 侵于之疆, 則取于殘, 殺伐用張, 于湯有光.’ 지금 자네가 언급하고 있는 송나라의 군주는 왕정을 과감히 실천에 옮기고 있지도 않으면서 걱정부터 하고 있다. 그러나 과감히 왕정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사해 안의 모든 사람이 학수고대하면서 우리의 임금님이 되어주십사 하고 갈망할 것이다. 제나라 초나라가 대국이라 한들 어찌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不行王政云爾, 苟行王政, 四海之內皆擧首而望之, 欲以爲君. 齊ㆍ楚雖大, 何畏焉?” |
만장은 맹자의 제자 그룹 중에서 가장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맹자를 잘 보필했던 인물인 것 같다. 공자에게 자로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인물인 것 같으나, 자로와는 달리 상당히 지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맹자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만장은 역사와 당대에 전승된 설화에 능통하였으며 맹자의 역사담론의 허점을 폭로할 수 있는 포괄적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관점을 과도하게 밀고 나가지는 않는다. 만장은 중후한 대학자였다. 『사기(史記)』에 보면 ‘맹자가 은퇴하여 만장지도(萬章之道)와 더불어 『시』 『서』를 질서 잡아 편집하고, 중니의 의도를 논술하였으며, 『맹자』편을 지었다[退而與萬章之徒, 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라고 했는데 은퇴 후 맹자를 도와 『맹자』를 편찬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만장지도(萬章之徒)’ 만장을 비롯한 여타 제자들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만장의 제자 그룹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후자의 뜻을 취하면 만장도 제자를 거느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자(萬子)’라는 표현은 단 한번 『맹자』의 제일 끝부분에 나온다【7b-37: ‘일향(一鄕)’앞의 ‘만자왈(萬子曰)’을 ‘만장왈(萬章曰)’로 고친 판본은 후대의 왜곡】. 만자라 하지 않고 다 만장이라 한 것은 그만큼 생생한 현장기록이라는 뜻이다. 만장과의 대화는 「만장」편에 집중되어 있으나, 여기 「등문공」편에 수록된 것은 이 대화가 등나라에서 있었던 것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왕도론 주제의 특수성 때문이었든가, 필록자의 문제 때문이든가 할 것이나, 확정지을 길은 없다
출전의 복합성 때문에 실로 정확히 해석하는 것이 어려웠던 장이다. 『서경』의 일문(逸文)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문서적 가치가 있는 귀한 장이다. 아마도 이 장은 「만장」 상 어디엔가 있었을 것인데 여기로 편입된 것 같다. 만장이 워낙 역사에 밝은 사람이기 때문에 맹자의 논의도 역사적 사례를 세밀하게 들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벌연(伐燕)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사용되었던 논리가(1b-11) 여기서는 송나라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격려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애초에 탕(湯)이 갈백(葛伯)을 정벌한 이야기도, 실상은 ‘공연한 간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사를 안 지낸다고 자국민을 남의 땅에 보내어 경작케 하는 것은 이미 ‘제사’를 빙자한 점령일 수도 있다. 그러한 점령사태에 대한 갈백의 반격을 탕의 입장에서 비도덕적인 어린 생명의 유린으로 포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은나라도 또 다시 주나라에 의해 정벌당한다. 그리고 주나라는 자기들의 정벌이 오히려 은나라의 광영(光榮)이 되었다고 찬양한다.
그러나 맹자는 이러한 역사적 실상의 맥락을 무시한 채, 자신의 왕도론의 논리만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한 왕도론의 논리가 맹자라는 캐릭터의 위대성을 부각시키고는 있지만, 맹자가 당면한 실제적 문제를 토론하는 파편보다는 역시 그 논리의 파워가 좀 관념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논어(論語)』에도 자공이 ‘과연 주임금이라고 해서 역사에 기술되고 있는 것처럼 그토록 나쁜 인간일 리가 있겠느냐?’(19-20)라고 평한 것을 상기하면서 쓴웃음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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