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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맹자가 제후를 찾아보지 않는 이유
3b-7.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주동하여 자발적 으로 제후들을 찾아가 만나시지 아니 함에는 어떤 뜻이 숨어있나이 까?” 3b-7. 公孫丑問曰: “不見諸侯何義?”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옛날부터 제후의 신하가 아닌 이상, 제후 를 자발적으로 만나지 않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단간목(段干木)【성이 단(段)이고 이름이 간목(干木)이다. 단간(段干)이라는 복성을 가진 자도 있으나 그것은 다른 사람이다. 『사기(史記)』 「위세가(魏世家)」에 여기저기 나온다. 복자하(卜子夏)와 전자방(田子方)을 스승으로 모시었다. 이극(李克)ㆍ적황(翟璜)ㆍ오기(吳起)와 함께 위나라에 머물렀으나 간목은 끝내 벼슬을 하지 않았다. 위문후가 존숭한 현자였다】의 경우, 위문후가 그를 만나러 그의 집으로 왔을 때 담을 넘어 피해버렸다. 노나라의 현자 설류(泄柳)【「공손추」 하11에 기출】의 경우도, 목공이 그를 만나러 그의 집으로 왔을 때 대문을 잠그고 끝내 열어주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좀 심하다고 생각된다. 군주가 대문 앞까지 와서 면회를 요청하는 그러한 성의를 보인 경우에는 알현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孟子曰: “古者不爲臣不見. 段干木踰垣而辟之, 泄柳閉門而不內, 是皆已甚. 迫, 斯可以見矣. 공자와 동시대의 사람, 계씨의 가재(家宰)였던 양화(陽貨, 3a-3)가 공자를 만나고 싶어했으나 공자를 오라가라 하는 결례를 범하고 싶진 않았다. 당시 대부였던 양화가 일개 평범한사였던 공자 집으로 예물을 보냈을 경우, 만약 그 사(士)가 부재중이어서 그 예물을 직접 받고 예를 표시하지 못했으면 반드시 대부의 집 문전까지 친히 가서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당시 예에 합당한 일이었다. 그래서 양화는 공자가 집에 있지 않은 틈을 엿보아 공자에게 맛있는 찐 돼지 한 마리를 보냈다. 그래서 공자 또한 양화가 집에 없는 틈을 엿보아 양화 집을 방문하여 예를 표하였다【이 비슷한 이야기가 『논어(論語)』 「양화(陽貨)」 1에 나오고 있다. 「양화」에서는 양화가 집에 있지 않은 틈을 타서 예방하려고 가는 도중에 양화와 맞부딪히고 만다. 그러나 이야기 골격은 같다. 설화자료가 전승되는 방식에 관한 다양한 문헌비평이 가능할 것이다. 하여튼 『맹자』라는 자료의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 입증된다. 『논어(論語)』 17-1이나 본 장의 설화는 같은 전승이 다른 방식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때에도 만약 양화가 예물만을 보내지 않고 직접 공자 집으로 왔다고 한다면 공자인들 양화를 아니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沃案: ‘이것은 양화가 선수를 친 것이므로 공자가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陽貨欲見孔子而惡無禮, 大夫有賜於士, 不得受於其家, 則往拜其門. 陽貨矙孔子之亡也, 而饋孔子蒸豚; 孔子亦矙其亡也, 而往拜之. 當是時, 陽貨先, 豈得不見? 증자가 말하였다: ‘목을 움츠리고 어깨를 올리면서 아첨하는 말만 하고 살살 웃어야 하는 것은 여름 땡볕 아래 드넓은 채소밭에 물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피곤하다.’ 曾子曰: ‘脅肩諂笑, 病于夏畦.’ 자로는 또 말하였다: ‘내심으로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동의해야만 하는 척 말하고 있는 놈의 얼굴에는 겸연쩍은 듯한 붉은 기운이 감 돈다. 나 유(由, 자로의 이름)는 평생 이런 놈들과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군자가 마음에 길러야 하는 호연지기가 무엇인지, 권력 앞에 굴하지 않는 인품절조를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子路曰: ‘未同而言, 觀其色赧赧然, 非由之所知也.’ 由是觀之, 則君子之所養可知已矣.” |
아주 간단한 대화이지만 깊게 씹어보면 맹자의 인생태도, 그리고 선비가 지켜야 할 절조를 잘 나타낸 명파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벼슬을 해야하느냐 마느냐의 논의에 앞서 한 지식인이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철학에 관한 것이다. 즉 어떠한 경우에 도 선비는 권력의 환심을 사기 위해 끼웃거리는 비굴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증자의 ‘협견첨소(脅肩諂笑), 병우하휴(病于夏畦)’라는 말과 자로의 ‘미동이언(未同而言), 관기색난난연(觀其色赧赧然), 비유지소지야(非由之所知也)’라는 말은 『논어(論語)』에 수록되지 않은 공문제자들의 로기온자료인데 참으로 절실한 그들의 삶의 자세와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고개를 움츠리고 알랑방귀 뀌고[협견첨소(脅肩諂笑)]’하고 ‘동의하지 않으면서 동의하는 체[미동이언(未同而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에 이 대장부(大丈夫) 맹자의 육성은 우리의 양심의 폐부를 찌른다. 아유영합(阿諛迎合)을 거부하는 조선 선비의 기개가 이 『맹자』라는 서물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상기시킨다.
출처진퇴에 관해서는 「등문공」 하1ㆍ3, 「만장」 하4ㆍ5ㆍ7 등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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