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양주와 묵적과 자막의 권도(權道)
7a-26.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양자(楊子)【성이 양(楊)이고 명이 주(朱), 자수는 자거(子居), 양주는 실존인물로서 맹자시대에도 살아있었던 인물이다. 대개 생몰연대를 BC 395~335 정도로 추정한다. 맹자보다 한 세대 위로 본다】는 극단적 위아(爲我)의 개인주의를 주장하여, 내 몸에서 털 한 오라기를 뽑기만 해도 크게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7a-26. 孟子曰: “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묵자(墨子)【묵적(墨翟). 3a-5, 3b-9에 기출. 치엔 무(錢穆)는 묵자의 생몰연대를 BC 480~390으로 추정했다. 노(魯)나라 사람, 혹은 송(宋)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으나 보통 노나라 사람을 정설로 인정한다. 묵자는 공자의 가르침의 평등박애주의적 측면, 절검역행(節儉力行)의 측면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겸애(兼愛)의 무차별적 박애주의를 주장하여, 머리 정수리로부터 발뒤꿈치까지 한 몸이 닳아 없어지도록 몸 깎는 수고를 하여서라도 천하를 이롭게만 할 수 있다면 서슴치 않고 하겠다고 했다. 墨子兼愛, 摩頂放踵利天下, 爲之. 노나라의 현인 자막(子莫)【이 사람에 관해서는 ‘노지현인야(魯之賢人也)’라는 조기 주의 정보 이외로는 자세히 알 바가 없다. 『설원(說苑)』 「수문」편에 전손자막(顓孫子莫)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맹자가 말하는 자막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루어 껀쩌(羅根澤)의 설】은 이 두 사람의 중간입장을 취하고 있다. 중간입장을 취한다는 것이 도(道)에 더 가까울 수는 있겠으나, 실상 자막의 중간입장이 라는 것은 권(權)【상황적 변통이나 응용의 유연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편견을 고집하는 집일(執一)과도 같다. 子莫執中, 執中爲近之, 執中無權, 猶執一也. 내가 집일(執一)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도를 해치기 때문이다. 집일은 하나를 들어 백을 폐기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所惡執一者, 爲其賊道也, 擧一而廢百也.” |
양주(楊朱)에 관한 기술이 너무도 소략하므로 보충을 요한다. 묵자는 『묵자(墨子)』라는 저술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양주의 학술은 독립저술이 남아있질 않고, 단지 『열자(列子)』라는 책 속에 「양주(楊朱)」라는 편으로 그 편린이 실려 있을 뿐이다. 많은 학인들이 그 편조차도 후대의 위작이며 양주의 본래적 생각이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취해 왔으나, 나는 「양주(楊朱)」편의 내용이 어찌되었든 본래적 양주의 생각을 많이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맹자가 양주를 규정하여 ‘위아(爲我)’라고 했으나, 그 개념은 양주를 너무 편협하게 본 것이며 그 본뜻에 즉하여 이야기하면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양주를 규정한 대로 ‘귀기(貴己)’라 말하는 것이 옳다. 자기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개인주의적 이기심을 말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현재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 즉 자기의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니, 그것은 곧 ‘귀생(貴生)’이다. 그러니까 양주는 요새말로 하면 생명예찬론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귀생(貴生)’의 철학을 딴 말로 하면, 『한비자(韓非子)』 「현학(顯學)」편에서 양주류의 철학을 평하여 말한 대로, ‘경물중생(輕物重生)’의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서 내 몸 밖의 사물로 인하여 내 생명을 손상케 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털 하나’라도 그것은 내 몸에 속하며 내 생명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나밖의 사태이며 그것은 외물의 세계 에 속하는 것이다. ‘정강이의 털하나’에 관한 이야기도 「양주(楊朱)」편에는 좀 더 세련된 형태로 실려 있다.
묵자의 제자인 금활리(禽滑釐)【시대적으로는 좀 문제가 있다. 금이 양보다 훨씬 윗세대이다】가 양주에게 묻는다: “그대의 몸에서 난 털 한 오라기를 뽑아 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대는 그것을 실행하시겠습니까[去者體之一毛以濟一世, 汝爲之乎]?”
이에 양주가 대답한다: “세상이라는 것은 본시 털 한 오라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외다[世固非一毛之所濟].”
금자는 계속 묻는다: “만약 구할 수 있다면 하겠소[假濟, 爲之乎]?”
이에 양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양주는 근본적으로 유치한 질문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楊子弗應]. 금자는 나와서 양주의 제자인 사람과 이라는 대화를 계속한다. 맹손양은 금활희에게 만약 누가 그대의 피부를 약간 긁는 것으로 일만 금을 주겠다고 한다면 허락하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금활희는 허락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맹손양은, 팔뚝 하나를 자르면 한 나라를 얻어 제후가 될 수 있다는 제안에는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다. 금활희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이에 맹손양은 말한다: “털 한 오라기는 피부보다 경미하고, 피부는 팔뚝 하나보다 경미하다는 것은 명료하다. 그러나 털 한 오라기가 쌓여 피부를 이루고, 피부가 쌓여 팔뚝을 이루는 것이다. 털 한 오라기라도 그것이 비록 한 몸의 만분의 일일지 언정 고귀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찌 경솔히 다룰 수 있겠는가[一毛微於肌膚, 肌膚微於一節, 省矣. 然則積一毛以成肌膚, 積肌膚以成一節. 一毛固一體之萬分中之一物, 奈何輕之乎]?” 양주는 결국 이와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털 하나라도 세상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천하를 받들어 나를 위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때, 즉 모든 사람이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그러한 상태야말로 천하가 바르게 다스려지는 상태라는 것이다.
또 그는 만물이 다양한 가치를 과시하는 것은 생(生)이지만, 결국 동일한 것은 죽음[死]이라고 말한다. 생산에는 현우귀천의 차이가 있지만 사(死)에는 오직 취부소멸(臭腐消滅) 동일한 결과가 있을 뿐이다. 현우 의 귀천도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취부소멸 또한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만물은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萬物齊生齊死]. 삶이 있는가 하면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살아있는 때는 요순이지만 죽으면 부골(腐骨)이요, 살아있는 걸주도 죽으면 똑같은 부골이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그 순간만이 중요한 것이요, 죽은 후에 내가 어떤 명예를 남길까 그러한 염려 때문에 삶을 속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기껏 살아봐야 백년인데, 어릴 때 시절을 빼고 노령의 괴로운 시절을 빼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 대낮에도 허송세월한 시간을 빼고, 또 통질애고(痛疾哀苦) 시간을 빼고, 또 망실우구(亡失憂懼)의 시간을 빼고나면, 진정으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란 한 계절 3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인간들은 온갖 명분을 만들어 그 아름다운 삶의 시절을 모두 속박하고 있으니, 결국 모든 인간이 중죄인이 목에 큰 칼 차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 결국 양주의 주장은 생명의 고귀한 가치를 직시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주의 사상은 극단적 쾌락주의가 아니라 절욕(節慾)의 생명사상이다. 욕심을 절제하는 것이 대단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온전하게 만든다는 ‘전생(全生)’을 지향하는 것이다. 비육후주(肥肉厚酒)는 난장지식(爛腸之食, 내장을 썩게 만드는 음식)일 뿐이요, 미만호치(靡曼皓齒, 고운 살결과 하이얀 이빨의 아리따운 여인)는 벌성지부(伐性之斧, 나의 본성을 찍는 도끼)일 뿐이다【『여씨춘추(呂氏春秋)』 「본생(本生)」편의 표현인데, 양주의 영향이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고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썩은 쥐고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술을 좋아하는 것도 부패한 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생명을 존중한다고 하는 것은 다 썩어빠진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 때, 즉 그 전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양주는 도가계열의 사상가들과 내면적으로 왕래가 깊다고 말할 수 있다. 무위자연 입장에 서서 기성의 가치관과 사회의 체제에 구애되지 않는 개인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자기의 본래적 성명을 충실히 보전하는 양생론을 전개하였다. 평등자립의 개인주의사회를 목표로 하는 불간섭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묵자(墨子)의 겸애설(兼愛說)과 대척점에 있게 된다. 그리고 맹자가 양주를 ‘무군(無君)’이라고 깐 것은 양주의 사상이 근원적으로 통속적인 사회적 가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자가 본 장에서 자막에 관하여 평론한 것은 역시 『중용(中庸)』의 사상(제6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집중(執中)’은 이미 4b-20에도 언급된 바 있다. 그리고 양ㆍ묵의 설에 관해서는 3a-5, 3b-9에, 그리고 ‘권(權)’에 관해서는 4a-17, 6b-12, 1a-7에서 논술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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