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금강산을 시에 담는 두 방식
① 금강산에 대한 이야기
1. 금강산에 긍부정의 평가
1) 강세황(姜世晃): “산에 다니는 것은 인간으로서 첫째가는 고상한 일이다. 그러나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은 가장 저속한 일이다.”
2) 김정희(金正喜)의 「여권이재(與權彛齋)」 21에서 “매양 금강산에서 노닐고 돌아온 사람 가운데 본 것이 들은 것만 못하다고도 하는데, 이 말도 괴이할 것이 없소. 옛날 제갈량 밑에 있던 한 늙은 군졸이 晉 나라 때까지 생존했는데, 혹자가 제갈량에 대해서 묻자, 그는 ‘제갈량이 살았을 때는 보기에 특이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제갈량이 죽은 뒤에는 다시 이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소’[每遊此山而歸者, 或以爲見不如聞, 亦無恠也. 昔武侯一老卒, 至於晉時尙存, 或有問武侯者, 對云: ‘見武侯生時, 便不異人, 武侯死後, 更未見如此人.’].”라고 함.
3) 윤봉조(尹鳳朝)의 「서응동유록발(瑞膺東遊錄跋)」에서 “우리나라에 나서 금강산을 구경하지 못하는 것은 사주(泗州)를 지나면서 대성(大聖)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우리나라 선비가 부끄러워하는 바다[生東土 不賞金剛 猶過泗州 不見大聖 此東士之所慚也].”라고 함.
2. 금강산이란 명칭에 대해
1) 계절에 따라 금강(金剛)ㆍ봉래(蓬萊)ㆍ풍악(楓嶽)ㆍ개골(皆骨)로 불려 졌고 지달산(枳怛山)으로 불려 지기도 하나, 근거는 알 수 없음.
2) 최해(崔瀣)의 「송승선지유금강산서(送僧禪智遊金剛山序)」에서 금강산은 승려들이 쓰고 세속에선 풍악이라 불렸다고 함[有山俗號楓岳 僧徒謂之金剛山].
3) 1만 2천봉이란 것은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동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보살이 1만 2천 보살과 더불어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했다.”라고 하여 ‘1만 2천 보살→1만 2천 봉’으로 불림.
3. 명성
1) 이곡(李穀)의 「금강산장안사중흥비(金剛山長安寺重興碑)」에서 장안사가 산중 도회를 이룰 정도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았다고 함.
2) 고려 후기엔 승려들이 ‘금강산을 보면 죽어 지옥에 안 간다’는 말을 퍼뜨려 찾는 사람이 많았음.
3) 불심이 강한 원(元)의 황후가 금강산에 여러 사찰을 세웠고 황제가 사신을 보내 예불을 드리게 함으로, 인근 관리들이 고통을 참지 못해 한탄했다고도 함.
4) 고려 말엔 인도 고승 지남(指南)이 찾아오기도 했고, 중국인들 사이에 ‘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이란 말까지 생김(『세종실록지리지』).
5) 조선 초엔 사신이 만폭동에 이르러 “참으로 불세계이니 원컨대 여기서 죽어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부처의 세계를 보련다[此眞佛境 願死於此 作朝鮮人 長見佛世界].”라 하고 몸을 던져 죽었음(남효온 「遊金剛山記」)
6) 중국 사신들은 산의 외양이 불상과 비슷하다고 하며 금강산을 보고자 하는 열풍이 불었고 이게 사회문제가 되어 사신이 지나는 지방 길목의 문서는 감추고 창과 벽이 종이조차 글자가 없는 벽지로 바꾸도록 함.
② 가보지 않고 금강산의 기상을 노래한 시
雪立亭亭千萬峰 | 눈 속에 우뚝 솟은 천 만 봉우리. |
海雲開出玉芙蓉 | 바다 구름 개자 나타난 옥 같이 푸르네. |
神光蕩漾滄溟近 | 신비한 빛 넘실넘실 푸른 바다에 가깝고 |
淑氣踠蜒造化鍾 | 맑은 기운 구불구불 조화가 모였네. |
突兀岡巒臨鳥道 | 우뚝 솟은 산등성은 험한 길에 닿았고 |
淸幽洞壑秘仙踪 | 맑고 그윽한 골짜기엔 신선의 자취가 담겨 있지. |
東遊便欲陵高頂 | 동쪽으로 노닐며 다시 높은 봉우리에 올라 |
俯視鴻濛一盪胸 | 천지의 원기를 굽어보니 가슴의 응어리 풀린다. |
1) 정도전이 황제에게 올린 표문이 불손하다며 저자의 입궐을 명하자 권근도 책임이 있다며 함께 따라가게 됐음. 그때 지나가며 본 풍경을 시로 지은 것 중 하나임.
2) 운무(雲霧)가 걷힌 금강산은 벽옥으로 깎아 만든 흰 연꽃 같다 했고 조물주가 온 정성으로 만들어 맑은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함.
3) 클로즈업하여 그 모습을 형상한 후 정상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길러지고 공자가 동산(東山)에 오른 포부가 느껴진다고 함.
4) 권근은 시를 잘 지어 노여움을 풀게 했고 환대를 받고 돌아오자 삼봉이 의구심을 제기했으나 태조는 높이 평가함.
5)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안히 살다가 죽었고 그의 응제시(應製詩) 역시 역대 한시 중 가장 영예로운 대접을 받음.
2. 성석린(成石璘)의 「송승지풍악(送僧之楓岳)」
一萬二千峰 高低自不同 | 일만 이천 봉의 높낮이가 절로 다르니, |
君看初日出 何處最先紅 | 그대 처음 해가 솟는 곳을 보시게, 어느 곳에 가장 먼저 붉어지나? |
1) 김종직이 이 시는 도를 터득함에 선후(先後)와 심천(深淺)이 있는 것을 비유한 작품이라 해석하여 권근의 시와 함께 원대한 기상을 투영한 것으로 봄.
2) 권근의 작품이 금강산의 외양을 잘 묘사한 것처럼, 성석린의 작품도 금강산의 일출 장면을 회화적으로 선명하게 전달하면서 금강산의 면모를 압축적으로 제시함.
3) 권근(權近)의 「금강산(金剛山)」과 마찬가지로 가보지 않은 금강산을 묘사함.
曳杖陟嵬崔 長風四面來 | 지팡이 끌고 높은 곳에 오르니, 긴 바람 여기저기서 불어오네. |
靑天頭上帽 碧海掌中盃 | 푸른 산의 정상은 머리 위의 모자요, 푸른 바다는 손바닥의 잔이로세. |
1) 성석린(成石璘)의 「송승지풍악(送僧之楓岳)」과 마찬가지로 산의 아름다움이 아닌 기상을 노래한 것임.
4. 금강산을 담아낸 시가 없다는 탄식들.
1) 『지봉유설(芝峯類說)』 『문장부(文章部)』에서 이수광은 금상산의 진면목을 그려 내어 회자될 만한 시가 없음을 탄식함.
2) 김창흡(金昌翕)의 「제유명악이몽상금강록발(題兪命岳李夢相金剛錄跋)」에서 “금강산은 보기도 어렵고 시로 쓰기도 어렵다고 한 말의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하여 자신은 두 번 찾아갔으나 시로 한 편도 쓰지 못했다고 밝힘.
3) 대부분의 시인들은 금강산의 외형 묘사보다는 그 속에 노니는 흥취를 과시하는 것이 더 용이했을 것임.
③ 금강산의 흥취를 표현한 시
落日毗盧頂 東溟杳遠天 | 비로봉 정상에 해지니, 동쪽 바다는 먼 하늘에 아득하네. |
碧巖敲火宿 連袂下蒼煙 | 푸른 바위에서 불 지펴 자고, 함께 푸른 이내에 하산했지. |
1) 1516년 금강산에 갔을 때 지은 작품.
2) 윤휴(尹鑴)의 『풍악록(楓岳錄)』에서 “이 시야말로 고금의 시인들 작품 중에 빼어나다. 이 시는 우리나라에 전무후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 가는 작품인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함.
3) 3, 4구에서 시인이 풍경의 일부가 되어 흥감을 드러내는 배경으로 표현함.
2. 정두경(鄭斗卿)의 조부인 정지승(鄭之升)에 대한 『어우야담』의 기록
내가 어릴 때 외가인 신씨 집안에서 정지승을 만났을 때 물어보았다. “정사룡이 금상산을 유람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 없고, 오직 짧은 절구 한 작품만이 절창이라 하는데 믿을 만합니까?” 정지승이 말하였다. “예전 사람이 금강산 시를 지을 때 금강산의 진면목을 본뜬 것은 있지 않았다. ‘만 이천 봉 금강산을 설렁설렁 보고 오니, 어지럽게 누런 잎이 나그네 옷을 치는구나. 정양사 찬 비, 향을 태우는 밤에 거백옥처럼 마흔에야 잘못 산 것 알겠네.’가 비록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다만 이 시는 향림사나 정토사에서 지어도 된다. 향림사와 정토사 두 절은 서울에 있는 사찰이다. 다만 권근의 시 두 구 ‘눈 속에 우뚝 솟은 천만 봉우리, 바다에 구름 걷히자 옥부용처럼 솟아 있네’라 한 것이 금강산의 면목을 잘 형용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시를 더불어 논할 만한 사람이다.
余少時, 遇詩人鄭之升於外舅申家, 問曰: “鄭士龍遊金剛山無佳作, 獨一小詩絶句爲絶唱, 信乎?”
之升曰: “古人賦楓嶽, 無有放象楓嶽之面目者, 至於湖陰詩, ‘萬二千峰領畧歸, 蕭蕭黃葉打秋衣. 正陽風雨燒香夜, 蘧瑗方知四十非.’ 信是佳作.
但此詩, 雖於香林․淨土賦之亦佳. 香林․淨土兩寺, 京山俗刹也.
獨權近詩二句, ‘削立亭亭千萬峯, 碧雲開出玉芙蓉.’ 此則善形容金剛面目者.
今而思之, 眞所謂可與論詩者也.
1) 당시엔 정사룡(鄭士龍)의 시가 금강산 시의 절창으로 유행했지만, 정지승은 풍광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고 비판함.
2) 이런 시들은 서울 근교산을 보고 지어도 된다고 혹평함.
3) 묘하게도 직접 가본 김정(金淨)이나 정사룡(鄭士龍)보다 정석린(鄭錫麟)이나 권근(權近)이 금강산을 더 잘 묘사했음.
3. 신광한(申光漢)의 「증별당질원량잠지임영동군(贈別堂姪元亮潛之任嶺東郡)」
一萬峯巒又二千 | 일만 봉우리에 또 이천 봉우리. |
海雲開盡玉嬋姸 | 바다구름 개자 옥 같은 봉우리들 선연해. |
少時多病今傷老 | 어려선 병이 많았고 지금은 늙음에 속상하여 |
終負名山此百年 | 마침내 명산을 저버린 나의 삶 백년. |
1) 이 작품은 관동으로 벼슬살이를 가는 종질 申潛을 전송하면서 쓴 것임.
2) 권근(權近)의 「금강산(金剛山)」에서 표현한 것을 가져와 금강산의 외형을 묘사하고 있음.
3) 젊은 시절에는 병으로 금강산을 찾지 못하다가 늙게 되어 끝내 금강산을 찾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함.
4. 양사언(楊士彦): 동래(蓬萊)ㆍ해객(海客: 해금강의 나그네)라는 호는 금강산에 대한 사랑을 보여줌 -「제발연반석상(題鉢淵磐石上)」
白玉京 蓬萊島 | 백옥경, 봉래도. |
浩浩烟波古 | 넘실넘실 안개 속 파도는 예스럽고 |
熙熙風日好 | 따뜻한 바람은 날로 좋아. |
碧桃花下閑來往 | 벽도화 아래에 한가로이 오가니, |
笙鶴一聲天地老 | 신선이 학 타고 생활 불자 천지가 늙었다네. |
1) 외양을 거의 묘사하지 않고 천상의 공간으로 그려 신선처럼 사는 자신을 던져 넣음.
2) 금강산에서 떠난 후에도 자주 찾아 ’유산객들이 남녀(藍輿)를 타던 것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 생겼고 금강산의 승려들이 양사언을 매우 원망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음.
3) 그러나 유산(遊山)의 도구로 남여(藍輿)가 쓰인 것은 고려 때부터이니 그런 말에 대해선 의심해볼 만함.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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