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시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시
① 시 속에 그림이 있다[詩中有畵]
1. 시중유화(詩中有畵): 소식(蘇軾)이 왕유(王維)의 시를 칭찬할 때 했던 말로, 그 이후로 여러 시평에서 쓰임
1)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51에서 정도전(鄭道傳)의 「방김거사(訪金居士)」에 대한 평가.
2)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62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장현촌가(長峴村家)」에 대한 평가.
古木寒雲裏 秋山白雨邊 | 흰 눈 속의 고목, 소나기 곁의 가을 산. |
暮江風浪起 漁子急回船 | 저물녘 강에서 풍랑 일어 어부가 급히 배를 돌리는 구나. |
1) 정선흥(鄭善興)이란 문신이 이 시가 적힌 부채를 자주 보자 효종이 칭찬을 하고 어탑(御榻)에 올리게 하고 다른 부채를 내려줬다함. 또 효종은 빈 병풍을 만들 때 김득신을 불러 이 시를 적어 쓰게 하고 화원에게 시의 내용을 그리도록 하기도 했다고 함.
2) 남산에 올라 실제 본 풍경을 그린 시로 아름다운 풍광을 그대로 묘사함.
3) 후대 이 시를 선발한 시선집에는 제목을 ‘제화(題畵)’라 했기에 마치 그림을 보고 시를 쓴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음. 그만큼 풍경을 잘 묘사했다는 반증이기도 함.
② 그리기엔 부족하기에 시로 썼네
1. 강극성(姜克誠)의 「호당조기(湖堂朝起) / 호정조기우음(湖亭朝起偶吟)」
江日晩未生 蒼茫十里霧 | 강의 해 늦도록 솟질 않고 아득히 십리까지 뻗힌 안개. |
但聞柔櫓聲 不見舟行處 | 다만 부드러운 노 젓는 소리 들리나, 배 가는 곳 보이질 않누나. |
1) 한강 동호의 정자에서 쓴 시로 홍만종(洪萬鍾)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94에서 처음에 이 시가 왜 좋은지 몰랐다고 직접 경험한 후에는 달라졌다고 함[余初咀嚼不識其味. 嘗寓江亭, 一日早起開窓, 大霧漫空. 朝日韜輝, 不識行舟, 但聞戞軋之聲, 始覺其說景逼眞].
2) 청(淸) 문인 심덕잠(沈德潛)은 『명시별재(明詩別裁)』에 「원포귀범(遠浦歸帆)」를 소개하며 ‘煙昏不見人, 隱隱數聲櫓’와 함께 새벽풍경을 표현한 것이 모두 그림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다고 평함.
煙昏不見人 隱隱數聲櫓 | 안개낀 저녁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은은히 여러 번의 노 젓는 소리만 들려오네. |
3) 그림으론 안개만 그리게 되나, 시는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려낼 수 있음.
2. 이숭인(李崇仁) 「신설(新雪) / 어득전송 실기편제(得於傳誦 失其篇題)」
蒼茫歲暮天 新雪遍山川 | 아득한 세모의 하늘, 새눈이 산천을 뒤덮으니, |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 새는 산 속에서 나무를 잃었고 스님은 돌 속의 샘을 찾아 헤매네. |
飢烏啼野外 凍柳臥溪邊 | 주린 까마귀는 들 밖에서 울고 언 버드나무는 시냇가에서 누워있구나. |
何處人家在 遠林生白煙 | 어느 곳에 인가가 있는지 먼 수풀에서 흰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네. |
1) 수련에서 흰색만 그려짐 ⇒ 3구에선 검은 점 하나가 찍힘(烏) ⇒ 4구와 6구에선 바로 그 아래쪽에 검은 점 두 개가 찍힘.
2) 경련에선 배고파 날아다니는 까마귀와 눈 무게로 둥치가 꺾인 버드나무가 보임으로 구체적 형상이 노출됨.
3) 미련에서 숲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두어 추운 감정에 눌린 마음을 훈훈하게 달래주며 마침.
4) 눈 밟는, 물 길러가는 스님의 발자국 소리, 돌 틈으로 샘솟는 물소리, 까마귀 울음소리, 간밤의 버드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시에는 담김.
3. 그림에 비해 시가 나은 점
1) 그림은 많은 말을 할 수 없지만 시는 그림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함.
2) 그림이 만들어낼 수 없는 음향효과를 함께 느낄 수 있음.
③ 제화시, 시와 그림이 서로를 상보하다
1. 제화시(題畵詩)에 논의
1) 청(淸) 방훈(方薰)의 「산정거화론(山靜居畵論)」에서 “높고 심원한 뜻과 생각은 그림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므로 시로 써서 이를 편다.”고 했음.
2) 발달: 당(唐) 때 두보ㆍ이백에 의해 성행함 ⇒ 원ㆍ명대에 성숙의 경지에 이름 ⇒ 당 후기 왕유(王維)에 이르러 시와 그림의 내면 관계가 밀접해지기 시작함 ⇒ 북송 시기 문인화가 발달하면서 제화시는 더욱 발전함 ⇒ 원(元)ㆍ명(明)대에 성숙한 경지에 이르게 됨.
一帶蒼波兩岸秋 | 한 줄기 푸른 물결, 양 옆 언덕엔 가을 |
風吹細雨灑歸舟 | 바람이 가랑비 불어 돌아가는 배를 씻기네. |
夜來泊近江邊竹 | 밤에 와서 근처 강변 대나무숲에 정박하니, |
葉葉寒聲摠是愁 | 잎사귀마다 스산한 소리, 모두 이것이 근심이로다. |
1)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라는 그림에 붙인 여덟 편 연작시 중 하나임. 중국 상강 일대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풍광을 이르는 말로, 고려나 조선에 ~팔경(八景)[ex. 권필(權韠)의 「호정팔경(湖亭八景)」]이란 제목은 여기에서 유래했음.
2) 1~3구까진 그저 그림을 묘사한 부분으로 별 특색이 없음.
3) 핵심인 4구를 통해 밤비에 흔들리는 댓잎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시가 더 아름다워짐.
4) 소상강은 요(堯)의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舜)이 죽자 소상강에 빠져 죽어 수신(水神)이 되었다고 하는 곳으로 대나무에 紅斑이 있음. 그렇기에 댓잎소리는 여인의 한숨소리가 됨. (김득신(金得臣)의 「소상야우(瀟湘夜雨)」)
蘆洲風颭雪漫空 | 갈대가 있는 물가에 바람 불고 눈 허공에 가득한데 |
沽酒歸來繫短篷 | 술을 사서 돌아와 쪼각배 맸네. |
橫笛數聲江月白 | 달 밝은 강가에서 생황을 비껴 잡고 여러 번 소리내니 |
宿禽飛起渚烟中 | 잠자던 새 이내 낀 강 속으로 일어나 나는구나. |
1) 원경은 하얀 눈 덮여 있고 근경엔 바람에 꺾인 갈대가 늘어져 있으며 한 귀퉁이엔 달이, 그 곁엔 배 한척이 있음. 그리고 그 중간 부분의 안개엔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감.
2) 시에선 금방 전까지 눈보라가 쳤다는 걸, 그림의 묶인 배를 시에 드러내며 의미를 말하고 있는 걸 통해 시인에게 ‘흥’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음.
3)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王徽之)의 일화: 왕휘지가 산음(山陰)에 은거할 때 한밤에 눈이 내리다 막 그치자 달빛이 고았음 → 홀로 술을 마시다 벗 대규(戴逵)가 그리워져 늦은 밤 배를 타고 찾아감 → 다음 날에야 도착했지만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옴 →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흥이 일어 갔고 흥이 다하여 돌아왔을 뿐이다. 굳이 대안도(戴安道)를 보아야 하겠는가[吾本乘興而行, 興盡而返, 何必見戴]?”라고 답함.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4) 고기잡이배를 몰고 술을 산 이유도 위의 왕휘지의 흥과 같은 것으로, 눈 온 밤 술을 사러 갔다는 것만으로도 그 흥은 모두 전달됨.
5) 여기에 그림엔 그릴 수 없는 피리소리를 넣어 흥을 더욱 고조시킴.
6) 새가 안개 속에서 날아오르는 것은 눈과 달빛의 흰색이 대낮처럼 밝기 때문에 그 빛에 놀라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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