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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 20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20장

건방진방랑자 2021. 9. 19.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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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공자가어와 20장의 관계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것을 했지만, 중용(中庸)의 맛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여러분들이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고 나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중용(中庸)의 맛은 20장부터이니까 잘 새겨들어서 공부하기 바랍니다.

 

내가 너무 건강이 나빠서 괴롭습니다. 내가 이렇게 지독하게 앓아본 적이 없는데, 골치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특히 혓바닥이 아파서 강의하기가 몹시 힘듭니다. 여러분 앞에서 완벽한 건강으로 강의하고 싶은데 참으로 유감입니다.

 

 

 

哀公問政.
애공이 정치에 관하여 물었다.
 
哀公, , .
애공은 노나라 임금으로 이름은 장이다.

 

여기에는 공자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인데, 애공이 정치에 관하여 공자에게 물었다는 말입니다. 주자 주()에 애공은 노군(魯君)이라고 했듯이, 애공은 노나라의 군주였습니다. 그리고 명장(名蔣)’이란 말은 이름난 장수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이란 말입니다. 애공이 노나라의 군주로 등극한 것은 역사적인 연대추정이 가능하므로 실제 이 말이 행해진 시기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애공은 BC 494년에 즉위하였고 이때 공자 나이 59세였는데, 공자의 인생을 살펴보면, 이 당시 공자는 노나라에 없었습니다. 공자는 69세 노나라로 돌아와서 이후 74세에 죽을 때까지 계속 노나라에서 살았으니까 이 대화는 69세에서 74세까지의 5년 안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그 시대를 추적할 수 있는 것이죠.

 

주자 주()공자가어(孔子家語)’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책이름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공자가어(孔子家語)라는 책은 상당히 문제가 많은 책입니다. 이 책은 지난번에 소개했던 공총자(孔叢子)라는 책과 마찬가지로 공자에 관한 상당한 내용을 싣고 있기는 하지만 위서(僞書)로 취급되는 책입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예컨대 내 딸이 나에 대해서 쓴 글을 모아 놓은 것처럼, 공자 훼밀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적어 놓은 책으로서,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면서도, 사실은 후대에 쓰여진 위서(僞書)로 취급됩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이 중용(中庸) 20장이 들어가 있는데, 양자를 비교해보면 중용(中庸)20장에 생략된 것이 있는가 하면 더 덧붙인 것이 있기도 합니다. 중용(中庸)공자가어(孔子家語)에 동일한 프라그먼트(Fragment)가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고, 앞으로 중용(中庸) 20장을 연구할 때는 공자가어(孔子家語)하고 비교해 보기 바랍니다.

 

 

 

 

202. 좋은 정치와 사람

 

 

子曰: “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과 무()의 정치는 반포되어 방책(方策)에 다 있으나, 그 사람이 있으면 정치가 일어나고, 그 사람이 없으면 정치가 멈춰버린다.
 
, 版也. , 簡也. , 猶滅也. 有是君, 有是臣, 則有是政矣.
()은 목판이다. ()은 죽간이다. ()은 멸()과 같다. 올바른 임금이 있고 올바른 신하가 있으면 올바른 정치가 있게 된다.

 

여기서 문무지정(文武之政)’이란 것은 문무(文武)’를 추상명사로 보아서 문화정치나 무력으로 다스리는 정치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비슷한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여기서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보여주었던 정치를 말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치적인 의미에서 문()과 무()로 대별해 볼 수도 있으므로, 추상적인 의미가 어느 정도 여기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추상적인 의미, 즉 문화정치와 무단정치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방책(方策)’에서 ()’이란 것은 목판, ‘()’이라는 것은 죽간을 일컫는데, 목판이란 나무를 얇게 켜서(얇은 나무도시락 통을 생각하면 된다) 거기에 글을 써 놓은 것이고, 죽간은 대죽에다가 글을 쓴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를 볼 때, ()으로 표기된 것은 죽간으로 된 것이고 권()은 두루마리도 된 것을 말합니다. 고서(古書)에서 권()이라는 것은 두루마리를 죽 늘어놓고 균분(均分)한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내용과 관계없이 분량으로 자른 겁니다. , 내용상의 분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이게 변화하여 내용상의 분리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문무지정(文武之政)이 방책에 반포되어 있다.” 이 말은 문왕ㆍ무왕의 정치가 반포되어 방책에 다 쓰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문무지정(文武之政)은 정치의 모범, 정치의 기준이 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정치의 기준·규범이 될 수 있는 좋은 말들 즉 정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이미 다 방책에 씌여져 있으므로 그걸 모를 게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정치학자가 없어서 정치가 잘 안 되는 것이 아니죠. 유명한 정치학자들 데려다가 이상적인 정치란 무엇이냐를 정리하면 그 구라는 좍 다 나옵니다. 그러나 문제는 좋은 정치란 어떤 것이냐를 규정해 두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할 사람이 있으면 정치가 흥하게 되고 그런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는 구현되지 않는다, 끝이다는 말입니다[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다시 말하면 그 방책에 씌여져 있는 이상적 정치를 구현할 능력이 있고 그런 도덕적인 성품(moral integrity)을 소유한 인간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가 정치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반성해야 할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대 정치사를 보면, 정치적 이상에 대한 구호만 난무하였지[文武之政 布在方策], 그 이상을 실천할 사람을 키우는 데는 인색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내 인생을 보면, 어떤 때는 사람들이 나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서 나를 서럽게 만들 때도 많았고 대접을 못 받을 때도 많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행복합니다. 궁극적으로 저술이라는 것이 학자에게는 중요하지요. 역시 학자는 위대한 저술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위대한 저술이 안 나오는 학자는 생명력이 없어요. 그렇지만, 내가 도올서원을 하는 이유는 글만 쓸 게 아니라 이 시대에 뭔가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된 말은 뒤에 다시 나오겠지만 가슴에 와 닿는 말들이 많습니다.

 

 

 

 

203. 각계의 전문적인 인간이 되자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 蒲盧也.
사람의 도()란 정치에 민감하게 나타나고 땅의 도()란 나무에 민감하게 드러난다. 대저 정치란 것은 포로(蒲盧)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 速也. 蒲盧, 沈括以爲蒲葦是也. 以人立政, 猶以地種樹, 其成速矣.
()은 빠르다는 것이다. 포로(蒲盧)는 심괄이 갈대[蒲葦]’라 했으니, 맞다. 사람이 정치를 수립하는 것은 땅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아 이루어짐이 빠르다는 것이다.
 
而蒲葦又易生之物, 其成尤速也. 言人存政擧, 其易如此.
갈대는 또한 쉽게 자라는 생물로 성장함은 더욱 빠르다. 사람이 있으면 정치가 거행되니, 쉽기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인도민정 지도민수(人道敏政 地道敏樹)’

()이라는 것은 센시티브하게 민감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나무를 보면 그 땅이 비옥한 땅인지 척박한 땅인지 다 알 수 있기 마련인데, 인도(人道)와 정치, 지도(地道)와 나무를 대비시킨 것은 참으로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무라고 하는 것은 천지론(天地論)’으로 말한다면 지기(地氣)의 상징이자 땅에 있는 기운이 표현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여자란 무엇인가를 보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성()의 근원을 하늘에서 받아서 성스러운 자리가 마련되지만, 동양에서는 성스러움이 땅에서 옵니다. 그곳이 성황당과 같은 성소(聖所)가 되는 것이죠. 땅의 기운이 솟구친 생명력의 장소가 성스러운 자리인 것이죠. 지기(地氣)가 나무로 표현되듯이 인간만사라는 것은 정치라는 나무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정확한 법칙이 있다는 말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 기르고 키우는 것을 수인(樹人)’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무 심듯이 사람을 심는다는 말이죠? 나무가 제 꼴을 갖추려면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하물며 인간의 교육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배운다고 하는 것, 사람을 키운다고 하는 것은 대학에 입학해서부터 계산하더라도 최소한 2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60세에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60세 이전에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3·40대에 제아무리 반짝해도 다 소용이 없는 것이고, 최소한 환갑은 되어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친구들이나 주변의 어른들을 볼 때, 3·40대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날렸던 사람들이라도 나중에 5·60대가 되어서는 전혀 쓸모없는 사람, 역사에 가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반면에 3·40대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이 5·60대가 되어서는 대단한 거인으로 그 모습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점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최종적인 사태가 결정 지워질 수 없는, ‘모르는 존재인 거예요. 따라서 인간은 최소한 60세가 되어야 겨우 윤곽이 드러나고 포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항상 가슴에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는 중학교때 나의 장형(長兄)으로부터 얼핏 들었던 말인데 나의 일생을 지배하는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60살까지는 기본적으로 공부하는 자세로 사는 사람입니다. 나의 작품은 60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칸트(Kant)의 대작들이 모두 죽기 10년 전부터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칸트는 자기가 구상하는 아이디어가 시간이 걸리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까불지 않았고, 자기규제를 위하여 규칙적인 생활을 했던 거예요. 칸트의 그 유명한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산보(philosopher's walk)’에서 보듯이 그는 규칙적인 삶을 살았고 여자도 멀리 했습니다. 칸트의 집 앞에 칸트를 사모하는 멋있는 여자가 살았었는데, 칸트가 저 여자와 결혼하면 순수이성적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를 너무 오래 계산하다보니깐 그 여자가 지쳐서 이사를 가버렸다는 일화가 보여주듯이, 칸트는 자신에게 엄격한 절제적인 자세 때문에 평생 결혼을 못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 인류사에 있어서 불후의 명작을 죽기 전 10년 사이에 쏟아 놓았어요. 60세 이전에는 그의 저술이 별로 없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치밀하고 계산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각계 최고의 전문적인 인간이 되자

 

도올서원의 학생들은 거대한 인물로 성장해 갈 것이라는 게 나의 기대요 바램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뜻이 있는 사람들이고 뭔가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자기가 노는 놀음에 놀아나는 좀팽이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것은 인간이 항상 저지르기 쉬운 자기기만인 것입니다. 내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올서원을 하는 이유는 교양을 가르치고 한문을 가르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뜻은 졸개의 자리에 연연하거나 현혹되지 말고 사계(斯界)의 최고봉(top)이 되라는 것입니다. 학자가 나와도 대학자가 나오고, 기업가가 되어도 대기업가가 되어라! 각계에서 최고의 전문적인 인간이 되란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전문적인 사람이 참으로 부족합니다. 모대학 교수님이 전화를 걸어 와서는, 자기네 학교 대학원 학생들이 150명 정도 졸업을 하는데 졸업하기 전에 모두 모여서 듣는 강의를 준비하고 있으니 이 강의를 맡아 달라고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강의는 프로페셔날(professional) 하지가 않아요. 석박사 졸업생 150명을 모아 놓겠으니 기껏 40분짜리 강의를 해달라는 것인데, 도대체 내가 40분간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작 40분간 강의 들으라고 사람들은 왜 부르며 시간은 왜 낭비하느냐 그 말이요?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프로페셔널리즘이 희박합니다. 나는 사람을 잘못 짚었다고 말하고 가볍게 교양강좌할 수 있는 사람을 모시라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내 일생에 교양강좌니 교양이니 하는 말처럼 증오하는 말이 없습니다. 매사에 교양인이 되지 말고 전문인이 되어라!

 

우리나라에 왜 인물이 없는가? 애초에 가진 포부와 야망이 잘못 잡혀져 있기 때문에 인생에 헛투자를 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야망과 포부를 지속적으로 꾸준히 펼쳐나갈 기간을 너무 짧게 잡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물이 나오질 않는 겁니다. 아까 말했듯이 사람은 60세 이후에나 인물됨의 포폄을 논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인데도 너무들 성급하게 굴거든요. 나도 이런 포부를 갖고 살았는데, 이제 머지않아 60살입니다. 여러분들 만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나도 환갑을 바라보고 있고 내 자식이 벌써 대학원을 간다고 하니 ··· “인생이란 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이구나!”하는 감회가 절실합니다.

 

 

부정야자 포로야(夫政也者 蒲盧也)’

()’는 창포(菖蒲)이고 ()’는 갈대를 말합니다. 주자 주()를 보면, “심괄(沈括)이가 로()를 갈대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 심괄(沈括)은 송대(宋代) 북송중기(北宋中期)의 유명한 학자요 정치가로서 중국과학사에 많이 나오는 사람입니다. 심괄의 이 말은 몽계필담(夢溪筆談)3에 나옵니다.

 

 

 

   

 

 

 

 

204. 갈대와 전주 하숙집

 

 

갈대라는 말이 나오니까 나의 하숙생활 중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내가 이리에서 전주로 거처를 옮겼는데, 참으로 공들여 하숙방을 구했습니다. 시골에서는 방을 구하기가 어렵거든요. 방이 없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시끌시끌 떠들어대는 분위기인 하숙집들이 대부분이어서 마음에 맞는 방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도대체 대학생 방에 오디오, 텔레비젼 없는 경우가 없거든요. 나는 그런 것이 일체 없고 전혀 소리를 안 내고 삽니다. 그리고 음식 하나라도 길이 들면 그 하숙집을 떠나기가 어려운 법인데, 먹는 것부터 제대로 된 데를 구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이리에서 전주까지 기차로 통학을 하는 게 도무지 힘들어서 거처를 옮겨야 했는데, 전주에 내가 임상수업을 받으러 다니는 병원 뒤에 아주 좋은 산동네가 있어서 결국은 그리로 옮긴 거죠. 나는 척 봐서 풍수지리를 따져보고 저기쯤 살면 좋겠다 싶은 장소가 보이면 그 근처를 뒤지고 다닙니다. 하숙을 치는 집처럼 보이든 말든 아무 집이나 가서 벨을 누르고 혹시 방 없냐?”고 물으며 빈 방 찾아서 이 집 저 집 뒤지고 다니다가 미친놈 취급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하숙 치는 동네가 아니기 때문에, 척 봐서 딱 좋은 자리를 찾기는 했지만, 하숙할 방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산동네를 내려오는데 어떤 여자가 공손히 인사를 하더라고요.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깐, 김용옥 선생님 아니냐고, 자기는 고대 78학번이라고 인사를 해요. 내가 방을 구하러 다닌다고 하니깐, 자기가 사는 집 옆에 방이 하나 났었는데 어제 나갔다고, 하루 늦으셨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 그러냐 잘됐다, 그러면 그것을 물리라고 했죠. 우선 방부터 보자고 해서 가 보았더니 저기쯤 살면 괜찮겠다고 내가 찍었던 바로 그 집인 거라. 그래서 주인에게 방세를 두 배로 줄 테니 그 방을 나에게 내어줄 수 없겠느냐고 사정을 해서 결국은 그 방을 얻었는데, 내가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뒷산에 그렇게 좋은 갈대밭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대밭이 주욱 펼쳐져 있는데 갈대가 나보다 키가 커서 갈대밭에 서있으면 마치 터널이 뚫려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갈대밭에서 조깅할 때 나는 지상 최대의 행복감을 만끽합니다. 그래서 요새 내가 전주에서 살 만하다 이겁니다.

 

이야기가 좀 샛길로 빠졌는데, 갈대라는 것은 본래 빨리 자랍니다. 여기서 갈대의 비유를 든 것은, 갈대를 통해서 땅의 기운이 급속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서양의 오페라가수들은 갈대를 여자의 마음에 비유하여 노래했지만, 우리 동양인들은 정치를 말했던 것입니다. ‘()’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치이기 때문에, 인간의 상태라는 것은 지기(地氣)가 곧바로 갈대로 표출되는 것처럼 신속하게 정치로 표현된다는 것이죠.

 

 

 

 

205. 취인이신(取人以身)과 공부론

 

 

故爲政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修道以仁.
따라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니, 사람을 취할 때는 몸으로써 하며, ()로써 몸을 닦고 인()으로써 그 도()를 닦아라.
 
此承上文人道敏政而言也.
이 장은 윗문장의 인도민정(人道敏政)’을 이어서 말하였다.
 
爲政在人, 家語爲政在於得人,” 語意尤備.
위정재인(爲政在人)’공자가어(孔子家語)위정재어득인(爲政在於得人)’라고 쓰여 있으니, 말의 뜻이 더욱 완비되어 있다.
 
, 謂賢臣. , 指君身. 道者, 天下之達道.
취인(取人)’에서 인()은 어진 신하를 말한다. ‘수신(修身)’에서 신()은 임금의 몸을 가리킨다. ()라는 천하의 공통된 도().
 
仁者天地生物之心, 而人得以生者, 所謂元者善之長.
()이란 천지의 살아 있는 생물의 마음으로 사람이 획득하고 태어나니, ‘()은 모든 선한 것의 으뜸이다라는 것이다.
 
言人君爲政在於得人, 而取人之則又在修身. 能仁其身, 則有君有臣, 而政無不擧矣.
임금이 정치를 함은 사람을 얻는 데에 달려 있고, 사람을 취하는 것은 또한 수신에 달려 있다. 그 몸을 인()하게 할 수 있다면 훌륭한 임금이 있게 되고, 훌륭한 신하가 있게 되니, 정치가 거행되지 않음이 없어진다.

 

고위정재인 취인이신(故爲政在人 取人以身)’

그 다음에 취인이신(取人以身)’이라는 말을 보면, 주자 주()에 이 ()‘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란 임금의 몸을 가리킨다[身指君身]사람을 취한다고 하는 것은 인재의 등용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임금의 몸(君身)을 가지고서 한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굳이 억지로 해석한다면, 사람을 등용하는 군주의 몸이 제대로 되어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자의 주()를 따르기 때문에 여기서 신()에 대한 해석을 군신(君身)으로 해버리고 말지만, 나는 이 신()이 군신(君身)일 수 없다고 봅니다. 이것은 사람을 취할 때는 신()으로써 하라, 즉 그 사람의 몸으로써 취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쓸 적에 등용의 기준을 내가 말하는 몸철학의 그 몸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통일론대강이라는 글에 나와 있는 교육론은 여러분들이 이 중용(中庸)강의와 결부시켜서 반드시 읽어 봐야 하는데, 중용(中庸)취인이신(取人以身)’이란 말은 내 교육론에서의 핵심인 공부론(工夫論)’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의 관점이 분명히 맞다고 생각해요. 동양인들이 생각한 공부(工夫, 꽁푸)란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몸이다!’라는 인간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도 그 물리적 조건에서 현현된(emerge) 것일 뿐이요, 인간 존재의 모든 가능성은 몸에 달려 있습니다. 몸을 단련시키는 게 곧 교육인 거죠. 이성이라는 것도 몸의 현상의 일부이며, 수학, 물리를 공부한다는 것도 몸의 현상의 일부로써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담배를 끊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작심(作心)을 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담배를 찾는 이유는 몸의 관성 때문인 것입니다. 동양인들은 몸과 마음을 이원론적으로 본 게 아니라, ‘()’의 문제는 몸을 콘트롤해야 제대로 잡힌다고 보았으며, 실제로 몸을 콘트롤 할 수 없는 사람은 ()’이 제대로 콘트롤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성적 쾌락을 절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런 절제의 과제도 몸의 단련의 문제인 것입니다. 섹스를 즐길 땐 완벽하게 즐기고, 단속할 땐 철저하게 단속하는 것은 몸의 단련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겁니다.

 

꽁푸는 기본적으로 위성지도(爲聖之道)’입니다. 성인(聖人)이 되어가는 길인데, 성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은 내 몸을 자유자재로 콘트롤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서원에 나오는 학생 하나가 중용(中庸)강의를 들으면서 무엇을 배우느냐는 물음에, 중용(中庸)을 공부하면서 건강이 좋아졌다고 대답하더군요. 몇 주 안 되는 기간에 건강이 좋아졌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만큼 깨달은 게 크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큰 깨달음이란 이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하다못해 밥을 먹을 때도, 속이 쓰리거나 아프다고 하면서도 더 쳐 먹는 놈들이 많아요. 못 먹어서 속이 쓰린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아프다고 하면서도 더 쳐 먹는 놈들이 있는데, 이건 크게 잘못하는 겁니다. 소화가 안 되고 속이 쓰리고 위에 헛 가스가 차거나 하면 위신경이 더 자극되고 흥분되기(irritation) 때문에 더 음식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먹지 말아야 하는데 기를 쓰고 먹어대니 악순환을 유발하게 되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발악적으로 먹게 되는 것이죠. 어떤 음식이든 몸이 받아들일 만하지 않은 음식은 입에 넣는 순간부터 콱 맥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먹을 때, 내 몸에 맞는 음식과 안 맞는 음식은 몸이 말해 주거든요.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무시한단 말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과식을 하면 안 돼요! 더 먹고 싶다고 생각될 때 숟가락을 놓으라고 하는데 어떤 놈이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느냐 그 말이야! 말이야 좋지!

 

포재방책(布在方策)’이라, 방책에는 다 쓰여져 있지만 실행하는 사람이 드물단 말이지. 음식이 좀 맛있다 싶으면, “! 내가 요새 하숙밥 먹느라고 좀 부실했는데 많이 먹어두면 좋지 않겠느냐?”하고 순간적으로 속아버린다고. “야아, 이런 진수성찬 언제 다시 만나랴, 일단 먹어두자! 소화제도 좋은 게 많은데 혹시 과식을 해서 배가 띵띵해지고 거북하게 되면 소화제로 해결하지 뭐, 먹자 먹어! 먹는 게 남는 거다!” 어떤 경우에도 과식을 한 나머지 소화제를 먹어 몸에 좋은 경우는 이 천지간에 없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과식하는 순간 몸에 마이너스가 되기 시작하며 결국에는 구체적인 피해가 몸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이런 지극히 상식적이고 단순한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니 참 피곤한 동물이죠? 나도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 같으니 말이죠! 평생을 위장이 쓰리다고 하면서도 계속 쳐 먹어 댔으니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동물인가? 안 쳐 먹었으면 간단히 바로 잡혀졌을 텐데 말입니다··· 쯧쯧쯧.

 

중용(中庸)’이란 꽁푸(Kung fu)이고, 참는 것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끊을 수 있는 용기(뒤에 ··에 대해서 나온다)인 것이죠. 이것은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이 아닙니다. 명상(meditation)이니 초월명상(trancendetal meditation)이니 라즈니쉬의 뭐니 어쩌고 하는 것들은 다 부질없는 짓들입니다. 라즈니쉬 같은 놈들은 내가 보기엔 좀 뭔가 잘못된 놈들 같아요. 핵심을 파악하는 듯하면서도 구체성이 없거든요. 공부란 마인드 콘트롤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피지칼 콘트롤(physical- control)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몸의 단련, 수신(修身)입니다. 사람을 쓸 적에는 당연히 딱 몸을 봐야합니다. 내가 만약 사장이라면 사원을 채용할 적에 몸을 보고 채용할 것입니다. 우선 걷는 폼부터 볼 것입니다. 척 몸을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취인이신(取人以身)’이라고 하는 말은 등용되는 당사자의 몸을 가지고 해석해 들어가야지 더 리얼하며, 그 뿐만 아니라 문장 구조상으로 봐도 그렇게 해야 옳습니다. 주자의 해석은 좀 억지해석이고 부분적인 미스라고 생각합니다. ‘취인이신(取人以身)’()’은 그 사람의 몸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수신이도(修身以道)’ 그렇다면 그 사람은 몸을 닦아야, 수신()을 해야 하는데, 수신은 뭘로 하느냐? 몸을 닦는 데에는 길이 있으니, 무리하게 안 되는 것입니다. 걷는 데에도 다 길이 있거든요. 걸을 때 발과 팔은 서로 엇갈려서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은 허()한 공간을 팔과 다리가 서로 채워 주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무술과 무용의 원리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여기에 관련된 내용은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를 보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무술의 심층구조(deep structure)에는 걸음(walking)의 길()이 깔려 있습니다. 상대방이 공격할 때는 반드시 나의 ()’를 공격해 오지, 손을 내뻗어 있는 ()’한 곳을 치고 들어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걷는 데도 길이 있듯이 몸을 닦는 데는 반드시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수신은 아무렇게나 되는 게 아니라 도를 따라서 터득해야 됩니다. 수신에는 반드시 그 길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도이인(修道以仁)’ 이게 중요한 말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지난번에 논어(論語)를 강의할 적에 ()이란 센시티비티(sensitivity)’라고 했습니다. ‘불인(不仁)’하다는 것을 한의학적으로 말할 때 마비되었다(以手足痿痹爲不仁)’라고 풀이하는 걸 봐도 알 수 있듯이, 동양 사람들이 인()하다고 하는 것은 센시티브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라고 하는 것이 관대하고 점잖다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천만에 말씀이예요. ()이란 민감성을 말합니다.

 

 

 

 

206. 문제는 민감성이야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를 보면 숭산스님(참으로 마음이 맑고 깨끗한 분이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스님이 화계사에 있을 때 어린애를 데려다가 키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무술에 미친 놈이었어요. 그 동자승은 맨날 무술만 생각했는데 뒷뜰에서 목검을 깎고 휘두르고 무술에만 미쳐서 살았답니다. 수행의 도를 쌓으라고 계속 권유하다 지친 숭산스님이 이놈에게 이르기를 삼각산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라고 했어요. 그러자 이놈이 산에 올라가서 나는 저 화랑의 신검(神劍)을 도사로부터 받겠다고 매일 기도를 드리며 검술에 미친 듯이 생활한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놈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황금빛으로 빛나는 칼과 손만 딱 눈앞에 나타나더니 그게 검술의 형을 보여주더라는 것입니다. 하룻밤 내내 그랬는데 이놈이 그것을 완전히 습득을 했대요. 어떻게 된 것인지 내가 알 게 뭐냐? 지가 하는 이야기지 뭐! 어쨌든 이놈이 천하의 신검이 되었다는데, 이 사람은 신검도의 창시자로 미국에서 크게 날리고 있습니다. 자기 딸의 머리 위에다가 사과를 놓고서 눈을 감은 채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려쳐도 사과만 베어지고 머리칼은 한 가닥조차도 멀쩡한 그런 검술을 그는 합니다. 그런 정도의 대단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지요. 자기는 신령한 검법을 신라의 무슨 도사로부터 받았다는데 그때의 손이 그 도사꺼래요.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그 사람이 고행을 해서 득도를 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검술의 형을 마스터해가지고, 검에 완벽한 도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서 하산을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체험이 중요합니다. 그가 하산하다가 나무꾼이 나무를 해가지고 지팡이를 탁탁 짚으면서 가는 것을 봤는데, 나뭇꾼의 그 지팡이질이 자기가 신라의 무슨 도사로부터 물려받아서 마스터했다는 바로 그 형이더라는 겁니다. 일개의 나뭇꾼이 자기는 고생고생하다가 겨우 꿈에서 받은 바로 그 형을 습관처럼 아주 쉽게 하고 있다는 게 자기 눈에 들어 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조금 더 내려오니깐 아낙네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그 방망이질을 보니깐 이게 또 완벽한 형이더라는 겁니다. 이 사람이 이런 체험의 순간에 진짜로 깨달았답니다. 거기서 이 사람이 확연하게 관통을 한 것이죠. “! 무술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은 꿈에서 본 형을 다시 완전히 잊어버렸고 자기의 깨달음을 통한 완벽한 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무학자가 미국에서 교주가 되어가지고 미국 마누라 두고 살고 있어요.

 

이 옛날 이야기같은 일화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문제는 뭐냐! 바로 ()’, 센시티비티(sensitivity)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나무꾼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지팡이를 짚는 것에서 그 신묘한 검법의 형을 볼 줄 아는 눈이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를 뭘로 닦느냐. 센시티비티가 없으면 도()가 안 닦입니다. 어떤 것을 인()하게 쳐다볼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게 없으니까 그전에는 그렇게 고생해서 터득해야만 했던 검술의 형이 바로 지게꾼이 짚는 지팡이질에 다 들어 있더라는 겁니다. 이정도면 그 자식은 제대로 도통(道通)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것을 그렇게 보는 그 감각, 그 감성이 바로 인()입니다. 수도(修道)는 반드시 인()을 가지고 해야 하며 인()이 없는 수도(修道)는 소용이 없습니다.

 

 

 

 

 

 

 

207. 언어유희로 친근하게 만들다

 

 

仁者, 人也, 親親爲大; 義者, 宜也,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니, 즉 가까운 사람들끼리 가깝게 지내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는 마땅함이니, 현인을 현으로서 존중해 주는 데서 출발한다.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할 때는 그 가까운 정()을 죽이고, 현인을 현인으로 대할 때는 차별이 없게 하는 데서 예()가 생긴 것이다.
 
人指人身而言. 具此生理, 自然便有惻怛慈愛之意, 深體味之可見.
()은 사람의 몸을 가리켜 말함이니 이 이치를 구비하여 자연히 측은해하고 슬퍼하며 사랑하는 뜻이 있어 깊이 체험해보면 볼 만한 게 있다.
 
宜者, 分別事理, 各有所宜也. , 則節文斯二者而已.
()라는 것은 사리를 분별하는 것으로 각각 마땅한 것이 있다. 인의(仁義), 이 두 가지를 품격에 맞게 하고 문채 나도록 함이 이것이다.


(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氏曰: “此句在下, 誤重在此.”
정씨가 이 구절은 아래에 있는데 잘못되어 거듭 여기에 있게 됐다.”

 

인자인야 친친위대(仁者人也 親親爲大)’

좋은 말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의 경우에는 타인(他人), 또는 인간 보편을 말하며, ()이라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센시티비티(sensitivity)라는 말입니다. 그것 중에 가장 으뜸 되는 것이 친친(親親)’인데, 이는 친한 사람,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친친위대(親親爲大)’라고 하는 것은, 센시티비티가 길러지는 것이 친()을 친하게 하는 것, 즉 가까운 인간관계로부터 출발한다는 말입니다. “()은 인()이고 의()는 의()이다.” 이것은 펀(Pun, 언어유희)인데, 같은 발음인데 내용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중국 사람들이 이런 장난을 잘 합니다. 펀이라고 하는 것은 영화에서 많이 쓰는 수사적인 트릭(rhetorical trick)이기도 합니다.

 

 

 

 

208. 현인을 무시하는 사회

 

 

의자의야 존현위대(義者宜也 尊賢爲大)’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인의(仁義)에서 인()이라는 것은 인()이고 의()라는 것은 의(), 마땅함입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종적인 것을 말하고, ()라고 하는 것은 횡적인 것을 말하는데, ()이라고 하는 것은 훼밀리 중심의 가까운 친친(親親)의 문제입니다. ()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위계질서로 엮어지는 인간관계를 말한다고 하면, ()라는 것은 사회적인 가치(social value)에 속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땅함을 가지고서 사회적인 척도를 삼는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의()의 세계로 가면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은 현자를 존중할 줄 아는 것입니다. , 존현(尊賢)의 문제가 중대하게 걸려 있는 것이지요.

 

이제마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통해서 제일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자기의 저술목적을 피력한 바,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현자(賢者)를 현자(賢者)로 알아볼 줄 아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요, 그것이 내 의학의 목적이다라고 썼습니다. 모든 사회가 인물을 알아보는 사회이면 제대로 된 사회이고, 현자(賢者)를 현자(賢者)로서 존중할 줄 모르는 사회는 타락한 사회인 것입니다.

 

존현(尊賢)의 문제와 관련된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나하고 도올 김용옥(金容沃)의 신한국기(新韓國紀)’라는 다큐멘타리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홍성완(기획 당시 MBC TV 프로듀서)이라는 사람이 최근에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나를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은 MBC에서 방영하려다가 유감스럽게도 결국은 불발되어 버리고 도올 김용옥(金容沃)의 신한국기(新韓國紀)라는 책으로만 출판되었을 뿐인데, 우리가 찍은 이 다큐멘타리가 방영되었으면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엄청난 다큐멘타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정도의 다큐멘타리가 외압으로 인하여 불발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구태의연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나라가 개혁이 안 되는 이유는 아무리 시대에 변화가 온다고 해도 개혁을 주도한다는 세력 그 자체가 개혁 이전에 가장 부패한 세력의 연속태라는 비극적 사실 때문입니다. 그들의 반동성을 어떻게 할 길이 없다는 게 환장할 노릇이죠. 우리나라의 방송국이라고 하는 데의 부패의 수준이 아주 끔찍합니다. 연예 프로그램의 부패상으로 요즘 소란스러운데 그런 수준에 불과한 정도가 아니거든요. 썩어도 그처럼 썩은 데가 없어요! 홍성완이라는 사람은 나하고 그런 책을 낼 만큼 깡다구가 있는 사람인데, 그 깡다구 때문에 어디를 가나 다툼 투성이어서 결국은 MBC를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SBS에 들어갔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계속 말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정말 실력이 있고, 거짓말을 모르는 부패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텔레비젼 광고물량이 워낙 쌓여 있어가지고 대기업들이 광고할 틈이 여의치 못하니깐, 교양프로그램 등에 협찬광고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람이 SBS 초기에 아이디어를 내서 대기업들의 협찬광고를 많이 따내 200억 이상을 끌어다 줬답니다. 그런데도 말이 많았었는데 어느 대기업에서 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고 계열사로 텔레비젼 프로그램 제작회사를 차리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가 그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회사, PD40명이나 되는 회사로 성장해버렸습니다. 홍성환 사장은 굉장히 개혁적인 조치를 단행하는 한편 거짓말을 모르고 양심껏 일을 하니깐 PD들이 모여들어서 굉장한 회사로 성장하게 된 것인데 그 분야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인물을 인물로서 제대로 대접을 하니깐 뭔가가 된 경우입니다. 존현(尊賢)이라는 게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거든요. 나는 이 사람의 경우를 보면서 한국사회가 아직은 뭔가 기대를 걸 만한 사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존현(尊賢)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교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친(親親존현(尊賢)의 문제입니다.

 

 

 

 

209. 차별과 동등

 

 

친친지쇄 존현지등(親親之殺 尊賢之等)’

 

그 다음의 말 친친지쇄 존현지등(親親之殺, 尊賢之等)’이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해석을 하지 못합니다. ()이라는 것은 감쇄(減殺)’입니다. 여기서 왜 자를 썼느냐하면(주자도 이것을 해석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친친이라는 것은 가까운 사람을 가깝게 하는 것이니까, 내 아들이라고 봐주는 식으로, 차등과 분별이 없이 친하게만 하기 십상인데, 오히려 친친에는 감쇄, 차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친친에는 감정의 감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와는 달리, 존현이라는 것은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니까 차별이 많을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존현은 평등하게 하라, ()한 사람은 모두 똑같이 현()하게 대접하라는 말입니다. , 친친은 굉장히 무차별한 것 같은데 차별을 둬야 하고, 존현은 차별성이 있을 것 같은데 무차별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친친의 세계에 있어서는 못난 자식을 꾸짖을 수 있는 감쇄가 있어야 하고, 존현의 세계에 있어서는 현명한 사람이면 동일하고 등()하게여기서 등()을 많은 사람들이 등급으로 해석하는데 오늘날 말하는 평등의 등으로 해석해야 한다. ‘의 대비를 보라, 즉 동등하게 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유교적 덕목에 있어서 친친지쇄(親親之殺)와 존현지등(尊賢之等)’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서 평등하게 존중해야 할 사람들을 다 존중하라!

 

 

재하위 불획호상 민불가득이치의(在下位 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이 부분은 뒤에 다시 나오는데, 뒤에 나온 부분이 제대로 된 것이고 여기 이 부분은 중복되게 잘못 들어간 것이 아닌가 라고 대부분 보고 있습니다. 주자 주()에도 정현(鄭玄)의 말을 빌어서 마찬가지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잘못되어 거듭 여기에 놓여 있다[誤重在此]! 그러므로 이 문장은 그 맥락이 살아 있는 뒷부분에 가서 풀이하겠습니다.

 

 

 

 

2010. 올바른 수신법

 

 

故君子不可以不修身; 思修身, 不可以不事親; 思事親, 不可以不知人; 思知人, 不可以不知天.
따라서 군자는 몸을 닦지 않을 수 없다. 몸을 닦으려고 하면, 가까운 사람을 섬기기 않을 수 없고, 가까운 사람을 섬기려고 하면, 뭇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고, 뭇사람을 알려고 하면, 하늘(대자연)을 알지 않을 수 없다.
 
爲政在人, 取人以身, 故不可以不修身.
정치를 함이 사람에게 달려 있고 사람을 취함은 몸에 달려 있기 때문에 수신(修身)하지 않을 수 없다.
 
修身以道, 修道以仁, 故思修身, 不可以不事親.
수신(修身)하기를 도()로써 하고, ()를 닦음을 인()으로써 하기 때문에 수신(修身)을 생각함에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欲盡親親之仁, 必由尊賢之義, 故又當知人.
친한 이를 친히 하는 인()을 다하려 하면 반드시 어진 이를 높이는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또한 마땅히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親親之殺, 尊賢之等, 皆天理也, 故又當知天.
친친지쇄(親親之殺)’존현지등(尊賢之等)’은 다 천리기 때문에 마땅히 하늘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고군자 불가이불수신(故君子 不可以不修身)’

내가 혓바닥의 설근 부위에 암 덩어리 같은 게 생겨서 고생을 하고 있는 데, 걱정했던 것처럼 암인 것 같지는 않지만 신경이 쓰입니다. 내가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암이라고 하니까 엄살 피운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는데, 사실 암이라는 게 별게 아닙니다. 쉽게 생각해서 인간의 질병은 염증(inflammation)과 암(cancer)으로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과 암()의 특징을 보면, 염은 기존 세포 수에 변화가 없이 세포자체의 병 됨이고, 암이라고 하는 것은 네오플라지아(Neoplasia) , 기존의 조건에서 세포수가 증가하는 것, 없었던 것이 새롭게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암은 일명 네오플라즘(neoplasm, 신생물질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며 몸에서 새로 생겨났으면서도 기존의 몸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종양(tumour)인 것입니다. 암의 가장 흔한 형태가 흔히 우리들 손등에 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사마귀이죠. 이것은 기존의 세포 수에서 증가한 것으로서 양성종양의 가장 가벼운 형태입니다. 예컨대, 위암이라고 하는 것은 내 몸 자체가 제공한 구조적 조건 속에서 출현한 것이고(外邪라기보다는 內邪) 내 몸이 공급하는 양분을 먹고 자라면서도 내 몸의 질서를 뒤흔들어 버리는(내 몸의 질서와 무관한 암 자체의 자율성을 갖고 있다), 즉 내가 만들어 낸 내 몸 안의 기생적 이물질이라는 점에서 위염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위염은 어쨌든 내 몸의 질서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염증은 정상회복이 쉽지만, 암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제거하기가 힘든 것이죠.

 

이 암이라고 하는 것은 불알만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보통 세포는 핵과 각종 세포질이 종합되어서 세포를 이루는 데, 암이라고 하는 것은 핵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놈은 까기만 해요. 계속 번식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어떤 존재가 무질서하게 증식할 때, 사회적인 암도 마찬가지로, 그것은 모두 암입니다. 내 혓바닥의 혹도 암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암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천하의 김용옥이가 쥐좆털에 앉는 먼지의 백만분지 일도 안 되는 미생물(virus)에 맥을 못 추고 무릎을 꿇고 있다니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런데 그 미세한 데서 잘못된 것이 인간을 쓰러뜨리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란 것은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제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별 수없는 존재이거든요. 여름밤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모기가 하고 달려들면 이 하찮은 곤충 몇 마리에 밤이 새도록 시달리면서 난 굴욕감을 느낍니다. “! 인간이라고 하는 거대한 동물이 모기새끼 하나 때문에 위대한 단잠을 방해 받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럴 때 나는 막 울부짖고 싶어진다! 인간이란 몸이 있는 한, 지가 스티븐 호킹이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진리를 터득한 자라고 해도 하찮은 바이러스에게 당합니다노나라의 선표라는 사람은 바위에서 살며 물을 마셨고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아 나이 70살인데도 어린아이 같았다. 불행히 주린 호랑이를 만나 주린 호랑이에게 죽게 됐고 잡혀 먹혔다[單豹, 巖居而水飮, 不與民共利, 行年七十而猶有嬰兒之色. 不幸遇餓虎, 餓虎殺而食之]. 장자(莊子)』 「달생(達生).

 

그러니 군자가 몸을 닦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수신(修身)을 해서 미리미리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방지를 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이번에 나는 너무도 처절하게 당했습니다. 혓바닥에 생긴 조그만 것 때문에(물론 내 몸 전체조건의 표출이겠지만) 고통을 당하다니!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성이 보장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말 몸이라는 건 인간 존재의 전제조건인 것입니다.

 

유교에서와는 달리, 불교나 기독교에서 뭔가 빗나간 사람들은 자기의 몸을 저주하기 일쑤입니다. 이들은 몸 때문에 자기의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중놈들이, “이쁜 여자들, 보살들이 내 주변에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내 자지가 왜 자꾸만 꼴리느냐!”고 자기 자지를 잘라버리는 미친 짓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수신(修身)의 방향이 잘못된 탓입니다. 사실 자기의 자지를 자를려고 하는 것은 보통 수도(修道)의 자세로서는 불가능한 대단한 결행(決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위대한 동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몸을 해치는 데로 향하는 것은 수신의 방향이 크게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자지를 왜 잘라?! 우리는 수신(修身)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수신(修身)은 결코 자기의 육체를 저주하거나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섹스를 하면서도 괴로운 육신의 덩어리 때문에 이 더러운 짓을 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럿셀의 첫 마누라가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성교를 수치로 알았거든요. 그 짐승 같은 짓을 밤마다 하다니! 이것은 서구문명이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수신(修身)은 자신을 경멸함으로써 자기를 가두어 놓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몸을 제대로 닦을 줄 알아야하고, 그 수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출발해야 한다는 겁니다.

 

 

 

 

2011. 대학과 중용의 스케일

 

 

사수신 불가이불사친 사사친 불가이부지인(思修身 不可以不事親 思事親 不可以不知人)’

어버이를 섬긴다, 가까운 사람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 전제로서 인간 보편을 알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사지인 불가이부지천(思知人 不可以不知天)’ 이것이 바로 중용(中庸)’의 스케일(Scale)이다! 단순히 협애한 사친(事親)에 그치는 가족이기주의가 아니라는 걸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유교는 네포티즘(Nepotism)이다, 족벌주의다, 무슨 훼밀리즘이다, 너무 편협한 도덕주의이다라고들 하는데, 유교는 결코 편협한 도덕주의가 아닙니다. ‘지천(知天)’, 하늘까지 나아간다! 여기에 유교의 특색이 있습니다. 유교의 특색이라고 하는 것은 내 문제가 반드시 지천(知天)의 문제에 닿아 있으며, 수신(修身)-사친(事親)-지인(知人)-지천(知天)의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大學)의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와 비교해볼 때, 중용(中庸)대학(大學)보다 훨씬 더 스케일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大學)은 기본적으로 평천하(平天下)’라는 사회적 규범 안에서 머무르는 책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大學)의 수신(修身)으로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는 하나의 동시적 사태의 연속(continuum)으로서, ‘자천자이지어서인 일시개이수신위본(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대학(大學) 1에서 말하는 것도 수신(修身)을 끝내고 제가(齊家)하고, 제가(齊家)를 끝내고 치국(治國)하고, 치국(治國) 끝내고 평천하(平天下)한다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들 알고 있지만 단계적 순서의 개념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기 바랍니다. “수신(修身)도 못하는 놈이 사회에 나올 수 있느냐 어쩌냐 저쩌냐고들 하는데, 이것은 대학(大學)을 잘못 이해한 소치입이다. 수신(修身)으로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가 하나의 동시적 과정이고, 또한 거기에 가장 근본은 항상 수신(修身)인 것이죠. 제아무리 평천하(平天下)한 놈이라고 해서 수신(修身)을 끝낸 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齊家)를 하면서도 수신(修身)은 계속되는 것이고, 결코 종결될 수 없는 일생의 과제인 것입니다. 평천하(平天下)하면서도 수신(修身)해야 한다!

 

그러나 평천하(平天下)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대학(大學)은 기본적으로 사회철학에서 끝나지만, 중용(中庸)은 자연철학까지 나갑니다. 그래서 중용(中庸)’의 스케일이 더 크다는 겁니다. 주자도 사서(四書)를 읽을 때 대학(大學)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읽고 마지막으로 중용(中庸)으로 끝내라고 말했습니다. 수신(修身)-사친(事親)-지인(知人)-지천(知天), 지천(知天)까지 가야 한다. ‘중용(中庸)’은 이 천지(天地)의 오묘한 근본법칙까지 느낀 사람만이 들어가는 세계이다! ‘중용(中庸)’은 스케일이 크다!

 

 

 

 

 

 

2012. 이미 주어진 도()와 이루어나가야 할 덕()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 五者天下之達道也. 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길이 다섯이 있고, 그 길을 실천하게 하는 인간의 조건은 셋이 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친구 사이의 사귐이 그 다섯이고, ((() 이 셋은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지키지 않을 수 없는 덕()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은 하나().
 
達道者, 天下古今所共由之路, 所謂五典, 孟子所謂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是也.
달도(達道)는 천하고금의 공유하는 길로 곧 서경에서 말한 五典이고, 맹자가 등문공4에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말한 게 이것이다.
 
, 所以知此也. , 所以禮此也. , 所以强此也. 謂之達德者, 天下古今所同得之理也.
()는 달도(達道)를 알게 하고, ()은 이것을 체현하게 하며, ()은 이것을 힘쓰게 한다. 달덕(達德)이라 말하는 것은 천하 고금에 공통으로 획득해야 하는 이치다.
 
, 則誠而已矣. 達道雖人所共由, 然無是三德, 則無以行之.
()이란 것은 성()일 뿐이다. 달도(達道)가 비록 사람들이 공유해야 하는 것이지만 삼덕(三德)이 없으면 행하여지지 않는다.
 
達德雖人所同得, 然一有不誠, 則人欲間之, 而德非其德矣.
달덕(達德)이 비록 사람이 함께 획득해야 하는 것이지만 하나라도 성()이 없으면 인욕(人欲)이 끼어들어 덕이 덕이 아닌 게 된다.
 
程子: “所謂誠者, 止是誠實此三者. 三者之外, 更別無誠.”
정자가 이른바 성()이란 오직 이 세 가지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세 가지 외엔 다시 별도의 성()은 없다.”라고 말했다.

 

1장에서 말한 달()이란 말이 다시 나오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달()과 도(), ()과 덕()이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노자 도덕경(道德經)의 도덕(道德)과 같은 것이죠. 달도(達道), 달덕(達德)을 말하는 中庸도덕경(道德經)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내가 도덕경(道德經)을 한글로 푼 책의 제목으로 도덕(道德)을 일컬어서 길과 얻음이라고 했듯이, ()의 세계는 길이요, 어떤 의미에서 사실(fact)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덕()이라는 것은 득야(得也)’, ‘축지(畜之, accumulation)’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길[]로부터 얻어서 쌓아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꽁푸(工夫)라고 하는 것이 바로 몸의 덕()의 문제인데, 온갖 형태의 꽁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도()라고 하는 것은,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형제(兄弟) 붕우(朋友)’라고 하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임의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바로 주어져 있는 사실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뜻으로 부모를 골라서 택한 것도 아니요, 이미 그렇게 태어난 마당에 내가 싫다고 나의 부모를 부정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관계에 있어서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타고나는 부모의 조건이 일단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 자식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집에 3만권의 장서가 이미 구비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고서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재수일 뿐입니다. ()인 것이죠. “나에게는 왜 3만권의 장서가 없느냐고 아무리 탓해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게 태어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져 있는 그 도()를 가지고서 내 몸에 쌓아가면서 실천하며 이루어가는 것은 덕()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인 덕성(moral virtue)인 것이죠.

 

 

 

 

2013. 지인용(知仁勇)

 

 

이 도덕적 덕성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이라는 겁니다. ((()의 문제에서 주자는 지((() 각각을 다른 어떤 것에다가 대입시키고 있는데, 중용(中庸)의 저자는 대입관계에서 이 말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 앎, ()

 

()라고 하는 것은 지식(knowledgy)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에 차별성을 두지 않아도 좋겠으나, 굳이 분별을 한다면, 지혜와 지식이 서로 대적적인 관계는 아니면서도 반비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식이 증가하면 지혜가 줄어들고, 지혜가 늘어나면 지식이 불필요해지게 되는 것이죠. 점점 지식에 대한 갈망이 적어진다는 겁니다. 지식과 지혜의 가장 큰 차이는, 지식은 부분적인 앎이지만 지혜는 전체적인 앎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말은 항상 전체를 파악하는 사람을 이를 때 쓰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13장을 보면, “온전한 앎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앎이 폐하리라”, “내가 어리숙하고 미숙할 때는 거울을 보는 듯이 희미했으나, 장성하여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과 같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사랑은 성내지 아니 하며,.”은 사실 이 사랑장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라요. 여기서 말하는 거울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유리거울이 아니라, 청동거울[銅鏡]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뜻을 새겨야 합니다. 옛날에 아무리 청동거울을 빤질빤질하게 잘 만들었어도 거기에 비친 모습은 부옇고 희미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어렸을 적에는 (청동)거울로 보는 것 같이 모든 것이 부옇게 흐릿했으나, 장성하여 지혜가 들고 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막바로 보는 것처럼 명백해졌다는 말입니다. 고린도는 희랍의 도시 이름으로서(코린트식. 이오니아식. 도리아식 할 때의 그 코린트를 말한다), 그곳은 유명한 거울생산지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코린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다가 그곳 사람들이 잘 알아들 수 있도록 거울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죠.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보게 하는 힘이요, 부분적인 앎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왜 온유하고 참느냐, 전체를 보기 위해서 온유하고 참고 시기하지 말고 그러라는 겁니다.

 

고린도 전서13장을 제대로 해석하는 목사를 여태 본 적이 없어요. 고전을 모르니까 그렇지요. 그저 한다는 소리가 사랑은 온유하다, 남편이 화낼 때 참고 어쩌고, 서로 싸우지 말아라 그게 사랑이다맨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해석을 하고 있으니 성경이 제대로 눈에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고전학을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사랑이죠. 사도 바울이 쓴 사랑이라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항상 전체를 보는 눈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식이 없어도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사실은 많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부분적인 지식은 없을지라도 삶의 본질을 터득하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혜롭습니다!

 

 

 

 

 

민감성의 인()

 

()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센시티비티(sensitivity)이고, ()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용기입니다. 뒤에 나오는 ··용에 대한 설명문장을 보면, ‘호학근호지 력행근호인 지치근호용(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이라고 했는데, ()와 인()을 풀어 설명하면,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전체적 앎으로의 나아감이고, 힘들여 행하는 것이 인()이다는 말입니다. 실행하는 것, 실천하는 것은 센시티비티가 없으면 못합니다. 걷는 것조차도 걷는 것에 대한 지적인 앎이 있어서가 아니라, 막상 걸을 때는 걸음걸음에 대해 인()해야 걸을 수 있습니다. 력행(力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감성적인 것이고 센시티비티의 문제인 것입니다. 무엇을 힘들여 행한다는 것, 행동이라는 것은 막상 해볼려고 하면 감성의 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표한 것에 도달하는 용()

 

그런데, “용기라는 것은 지치야(知恥也)”라고 했습니다. 용기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수치를 알 적에 생긴다는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수치를 알 적에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갈망, 실천의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앞으로 달려 나가게 하는 힘(Driving power), 즉 지속성을 말하는 것이죠. 도올서원에 등록했다가 중간에 그만 두는 사람들은 용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간에 불가피한 일이나 그럴 만한 핑계도 많을 수 있으나 용기 있는 자, 드라이빙 파워를 지닌 자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이행지자 일야(所以行之者 一也)’ 여기의 이 ()’은 뒤에서 성()으로 나타납니다. 중용(中庸)성론(誠論)’이 도입되는 지점인 것이지요.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5가지, 지인용(知仁勇) 3가지에서 성() 하나로 나가는 것입니다. ! 중용(中庸)의 진짜 맛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2014. 앎과 행동의 세 가지 스타일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혹은 태어날 때부터 이것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어렵사리 이것을 아는데, 그 아는 데 이르러서는 하나다. 혹은 쉽게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득을 따져서 이것을 행하고, 혹은 싫은 데도 어거지로 이것을 행하는데, 그 공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하나다.
 
知之者之所知, 行之者之所行, 謂達道也. 以其分而言, 則所以知者知也, 所以行者仁也.
지지(知之)’라는 것의 아는 것과 행지(行之)’라는 것의 행하는 것은 달도(達道)를 말한다. 그것을 나누어 말하면 알도록 하는 것은 지()이고 행하게 하는 건 인()이다.
 
所以至於知之成功而一者, 勇也. 以其等而言, 則生知安行者知也, 學知利行者仁也, 困知勉行者勇也.
그것을 알거나 공을 이룸에 이르러선 하나라고 하는 건 이다. 그걸 등급으로 말하면 생지(生知)와 안행(安行)은 지()이고, 학지(學知)와 리행(利行)은 인()이며, 곤지(困知)와 면행(勉行)은 용()이다.
 
蓋人性雖無不善, 而氣稟有不同者, 故聞道有蚤莫, 行道有難易.
대저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 기품(氣稟)이 같지 않기 때문에 도를 들음에 빠름과 느름이 있고 도를 행함에 어렵고 쉬운 게 있다.
 
然能自强不息, 則其至一也.
그러나 스스로 힘써 멈추질 않을 수 있다면 이르게 되는 곳은 하나인 것이다.
 
氏曰: “所入之塗雖異, 而所至之域則同, 此所以爲中庸.
여씨가 말했다. “들어가는 길은 비록 다르지만 도착하게 되는 영역은 같다. 이것이 중용이 된 까닭이다.
 
若乃企生知安行之資爲不可幾及, 輕困知勉行謂不能有成此道之所以不明不行也,”
만약 생지(生知)와 안행(安行)의 자질을 바라면서도 거의 미칠 수 없다고 여기고 곤지(困知)와 면행(勉行)을 가벼이 여겨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도()는 밝아지지 않고 행하여지지 않는 이유다.

 

이 문장은 지()와 행()의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왕양명의 지행(知行)’의 문제가 여기에 들어 있어요. 중용(中庸)의 위대한 점은 인간에 차등을 둔다는 점입니다. 지행(知行)에 있어서 인간은 동일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인간은 퀄리티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앎의 차등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하질 못해서 평생을 골탕 먹은 놈인데, 나는 머리가 참 나빠요! 그래서 호()도 도올(檮杌), 돌대가리가고 한 거 아닙니까.

 

학이지지(學而知之)’라는 것은 힘써 배워서 아는 것이고,

 

곤이지지(困而知之)’라는 것은 꽉 막힌 상태[]이라는 글자는 좌우상하로 꽉 막혀 있는 답답한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에서 곤혹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생고생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같은 것을 알아도 이렇게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는 거예요. “생지(生知), 학지(學知), 곤지(困知)한다. 그런데 급기지지 일야(及其知之 一也), 앎에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으나, 그러나 알았다고 하는 데는 하나다!” 유교의 평등주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영재교육을 인정하지 않아요. 무엇을 다섯 살 때 안들 어떻고, 또 열 살 때 안들 스무 살 때 안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안다고 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인 거예요. 언제 어떻게 알았든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생지(生知)했다고 으시대지 말고, 학지(學知)했다고 뽐내지 말고, 곤지(困知)했다고 서러워 말 것입니다. 여기에 중용(中庸)의 인간평등관이 있는 것이죠.

 

 

 

행동의 차등

 

혹안이행지(或安而行之)’ 행할 적에도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혹리이행지(或利而行之)’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면 좋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경우가 있고,

 

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 어떤 사람은 하기 싫은 데도, 예를 들면 도올서원에 가기 싫은 데도 선배가 너는 거기에 가서 공부해야 사람된다고 억지로 끌어다 앉혀 놓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우리말 공부하다의 일본말인 벤교(勉强, べんきょう)’가 여기서 나왔다).

 

안행(安行리행(利行면강행(勉强行)’ 이러한 삼단계가 있는데, 그러나 급기성공일야(及其成功一也)’ 어떻게 행하였든지 간에 그 공()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하나다! 여기서 성공(成功)’이라는 말은 석세스(Success)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말의 성공은 사회적 출세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공부[]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바둑에 달인(達人)이 되면, 그것은 성공(成功)’, 즉 공()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출세는 입신양명이지 성공이 아닙니다. ‘지행(知行)’에서 행()은 공()이다, ()은 공()을 이루는 것이다!

 

성론(誠論)’으로 들어가기 위한 뜸을 지독하게 들이고 있죠?.

 

 

 

 

2015. 문명화된 인간이 문명국가를 유지한다

 

 

(子曰) “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배움을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에 가깝고, ()를 아는 것은 용()에 가깝다
 
子曰二字, 衍文.
자왈(子曰)’ 이 두 글자는 연문이다.
 
此言未及乎達德而求以入德之事. 通上文三知爲知, 三行爲仁, 則此三近者, 勇之次也.
이 말은 달덕(達德)엔 미치지 못하나 덕에 들어가는 일은 구할 수 있다. 윗 문장은 생지(生知)와 학지(學知)와 곤지(困知)의 세 가지 지()를지()로 여기고, 안행(安行)과 리행(利行)과 면행(勉行)의 세 가지 인()을 인()으로 여기는 것을 통한다면 여기에 세 가지 가까운 것은 용()의 다음 단계인 것이다.
 
氏曰: ”愚者自是而不求, 自私者徇人欲而忘返, 懦者甘爲人下而不辭. 故好學非知, 然足以破愚; 力行非仁, 然足以忘私; 知恥非勇, 然足以起懦.“
여씨가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옳다고 여겨 구하지 않고, 절로 이기적인 사람은 인욕(人欲)을 따라 돌아올 줄 모르며, 나약한 사람은 사람 아래 있는 것을 달게 여겨 사양하질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을 좋아하는 게 지()는 아니나 어리석음을 깨우칠 순 있고, 힘써 행함이 인()은 아니나 이기심을 잊을 수 있으며, 부끄럼을 아는 게 용()은 아니나 나약함을 일으킬 수 있다.
 
○ 『近思錄: “以其好學之心, 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後人不達, 以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為學之道遂失.”
근사록에서 말했다. “호학하는 마음으로 수명을 빌려주어 늘려준다면 머지않아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 변화할 수 있다. 후대 사람들은 도달하려 노력도 안 하며 성인은 본래 생지(生知)의 자질로 배워도 이를 수 없다.’라 말해버리니, 배우려 하는 도()가 마침내 상실되었다.”
 
知斯三者, 則知所以修身; 知所以修身, 則知所以治人; 知所以治人,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
이 지인용(知仁勇) 셋을 알면, 몸을 닦는 바를 알 것이요, 몸을 닦는 바를 알면, 사람을 다스리는 바를 알 것이요, 사람을 다스리는 바를 알면,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바를 알 것이다.
 
斯三者, 指三近而言. 人者, 對己之稱. 天下國家, 則盡乎人矣. 言此以結上文修身之意, 其下文九經之端也.
사삼(斯三)이란 삼근(三近)을 가리켜 말한다. ()이란 자기에 대응하여 말한 것이다. 천하국가(天下國家)는 타인이 모인 곳이다. 말한 수신의 뜻을 결론지어 아래 문장의 구경(九經)의 단서를 일으킨 것이다.

 

여기서 사람을 다스린다는 말은 군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 세상에 있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적에,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차적인 것입니다. , 사회에서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모든 툴, 꽁푸를 습득하게 하는 거예요. ‘치인(治人)’에서의 그 인간은 보통 인간이 아니라 문명화된 인간이며, 그런 인간은 반드시 교육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환경에 적응할 수 있지 않겠어요? 문명화된 사람들이 모여서 그 문명과 국가를 만들고 유지시키는 것이니까.

 

여기서 천하국가(天下國家)’도 현대 언어에서 잘못 생각하기 쉬운 말인데, 천하(天下)-()-()하이어라키(Hierachical, 계층별)한 개념으로서, ‘[天下]’[]’보다 더 큰 개념이고 ()’()’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 ‘천하(天下)’라고 하는 것은 현재의 지구촌, 인류, 세계 등에 해당하는 말이고, ‘()‘은 지금의 국가형태와 유사한 것을 말하며(근대민족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것), ()는 훼밀리를 말하는 것이죠. 이것은, 유교문화권에서는 천하국가(天下國家)’를 하나의 시공태로서, 즉 세계질서로부터 가정의 질서에 이르기까지를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로 본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2016. 구경론(九經論)

 

 

凡爲天下國家有九經: 曰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候也.
천하(天下)와 국(), ()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가지의 기본원칙이 있으니,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래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侯) 등이 그것이다.
 
, 常也. , 謂設以身處其地而察其心也. , 如父母之愛其子也. 柔遠人, 所謂無忘賓旅者也. 此列九經之目也.
()은 항상스러움이다. ()는 몸이 그땅에 처한다고 가정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다. 유원인(柔遠人)은 이른바 빈려(賓旅)를 잊지 말라는 것이니, 이것이 구경(九經)을 차례짓는 조목이다.
 
氏曰: “天下家之本在身, 故修身爲九經之本. 然必親師取友, 然後修身之道進, 故尊賢次之. 道之所進, 莫先其家, 故親親次之. 由家以及朝廷, 故敬大臣體君臣次之. 由朝廷以及其國, 故子庶民來百工次之. 由其國以及天下, 故柔遠人懷諸侯次之. 此九經之序也. 視君臣猶吾四體, 視百姓猶吾子. 此視臣視民之別也.”
여씨가 말했다. “천하와 국과 가의 근본은 몸에 있으니 수신(修身)으로 구경(九經)의 근본을 삼는다. 그러나 반드시 스승을 친하게 하고 벗을 취한 후에 수신(修身)의 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이 그 다음이다. ()가 나아가는 것은 가족보다 먼저 할 게 없으니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로부터 조정에 이르기 때문에 대신을 공경하고 군신을 내 몸처럼 여기는 것이 그 다음이다. 조정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기 때문에 서민을 자식처럼 대하고 장인들을 오게 함이 그 다음이다. 나라로부터 천하에 이르기 때문에 먼 나라 사람을 회유(懷柔)하고 제후를 품어주는 것이 그 다음이다. 이것이 구경(九經)의 차례다. 여러 신하 보기를 나의 사지(四肢) 보듯하고 백성 보기를 내 자식과 같이 하니, 이것은 신하를 보는 것과 백성을 보는 것의 차별이다.

 

여기서 유명한 구경론(九經論)’이 나오는데, ‘구경(九經)’이라는 것은 아홉 개의 경전(經典)’을 뜻하는 게 아니라 아홉 가지의 벼리가 되는 원칙을 말합니다.

 

 

범위천하국가 유구경(凡爲天下國家 有九經)’

이 말은 중용(中庸)시대에 세계질서를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수신(修身)으로 시작합니다.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래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은 가()의 문제이고, 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은 국()의 문제이고, 래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는 천하(天下)의 문제라고 방편적인 구분을 해볼 수 있습니다.

 

 

天下
修身, 尊賢, 親親 敬大臣, 體群臣, 子庶民 來百工, 柔遠人, 懷諸侯

 

 

경대신(敬大臣)’이란 큰 신하를 공경하라는 말인데, 그래야 밑에 질서가 잡힙니다.

 

체군신(體群臣)’ 여기서 체찰(體察)은 내 몸처럼 안다, 내 몸처럼 살핀다는 뜻입니다.

 

 

 

 

래백공(來百工), 유원인(遊遠人), 회제후(懷諸侯)’의 의미를 알려면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구경론(九經論)’ 문장을 꼼꼼히 따져 봐도 중용(中庸)은 전국(戰國) 말기나 제국(帝國) 초기에 성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국(戰國) 말기에 부국강병이라는 과제를 놓고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토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이라는 데는 워낙 땅덩어리가 큰데다가 인구가 지금처럼 많지 않고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영토싸움이 중요한 문제일 수 없었어요. 맹자(孟子)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간·경작의 문제였죠. 거기서 곡식이 산출되어야 내 땅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내 땅이라고 선언하고 주장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거든요. 미간지를 농지로 개간하고 그 밭에서 경작하는 데에는 절대적으로 인구가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문제는 영토의 넓이가 아니라 인구의 크기였던 것이죠. 지금처럼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그 당시에 전개되었다면 참 행복한 일이었을 겁니다. 동양고전의 세계에서 산아제한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무조건 많이 낳으면 좋은 일이었어요.

 

다첩제도(多妾制度)란 것이 옛날에는 당연한 겁니다. 여자는 한평생 난자가 400-500개 정도밖에 생기지 않지만, 남자는 하루에도 수억의 정자가 생기기 때문에 신체구조상으로 볼 때 한 남자가 많은 여자를 거느려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여자는 그 생산의 가능성을 놓치지 말고 유감없이 발휘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여자에게 멘시스(Menses, 달거리)가 없어야 했어요. 멘스할 찬스도 없이 계속 아이를 배고 낳고 하면서 한 스무명 쯤 애를 낳으면, 평생 멘스 없이 사는 것이죠. 생리대 자체가 현대문명의 소산입니다. 여자는 멘스가 없는 동물이 되어야 했었는데,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애를 한 둘만 낳게 되면서 여성에게 멘스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항상 생리대를 휴대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큰어머니만 해도 13명의 자녀를 생산하셨는데 그래도 끄덕 없어요. 옛날에는 보통 10명씩은 쑥쑥 낳고도 건강하게 잘만 살았거든요. 쌩쌩하다고! 이런 면에서 요새 여자는 너무 허약해요.

 

그러나 옛날에는 제아무리 생식능력이 왕성하고 부지런하다고 해도 자연적인 생식만으로도 부족하기 때문에 인구확보를 위한 전쟁을 벌여야 했던 것입니다. 옛날에 전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파괴와 정복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구확보에 있었던 것이예요. 그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부국강병의 실제적인 의미를 캐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을 확보하는 문제에 있어서 산아장려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사람이란 병아리처럼 단시일에 대량으로 부화되고 또 빨리빨리 자라는 동물이 아니고, 쓸모 있을 만큼 성장하려면 2·30년씩 걸리기 때문에 왕의 재임기간 동안에 이런 자연생식만으로는 인구확보의 문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고, 따라서 인구확보를 위한 전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노동력에 대신하는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전쟁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인구확보를 하여 노동력을 갖추는 것 이외에 달리 부국강병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필요한데 사람이 없으니까 전쟁을 해서 사람을 뺏어오는 것이죠.

 

맹자(孟子)의 말은, 우리가 확보하려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무력으로 땅을 뺐고 그러지 말고 정치를 잘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몰려들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맹자(孟子)의 논리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민논리다! ‘패도(覇道)’왕도(王道)’라는 맹자(孟子)의 동양정치사상이 나오게 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빈 땅들을 놓고서 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토 확장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니까 인정(仁政)을 베풀어서 사람들이 탐내는 나라, 가서 살고 싶은 나라가 되면 이웃 나라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올 것이고, 그러면 전쟁을 하지 않아도 부국강병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맹자(孟子)의 논리였던 겁니다.

 

 

래백공(來百工)’ 서민들을 자식같이 여긴다는 것은 인정(仁政)을 베푼다는 말인데, 그러면 백가지의 공인들, 기술자들이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부국강병의 실제적인 사업을 하려면 일꾼들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백공은 이런 개간·경작 등에 몸소 힘쓸 일꾼, 즉 문명을 건설하는 실제적인 일꾼들인 셈입니다.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면, 목수, 토목공사 하는 사람들 등 여러 분야의 전문 인력들이 딴 나라에서 온다는 중용(中庸)시대의 사회적 요청은 지금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미국은 히틀러가 유럽의 위대한 과학자란 과학자는 전부 내쫓아서 미국으로 몰아다준 덕분에 이룩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故爲淵敺魚者, 獺也; 爲叢敺爵者, 鸇也; 爲湯武敺民者, 桀與紂也. -孟子』 「離婁]. 미국문명이 지금처럼 대단해지고 미국의 대학이 그렇게 위대한 대학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부 히틀러 시대에 유럽의 지성들이 대거 미국으로 쫓겨 와서 정착했기 때문이라 그 말이요. 유럽 사람들이 얼마나 콧대가 쎈 사람들인데 2차 세계대전이란 전화(戰禍) 속에서 빚어진 핍박과 추방이 아니었던들 뭐가 아쉬워서 그 엄청난 지식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건너가서 교편을 잡았겠어요? 그런데 히틀러 덕분에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미국은 히틀러의 광분에 따른 래백공(來百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미국으로서는 앉아서 거저로 먹은 것이나 다름이 없죠.

 

우리나라가 인력을 빼앗기는 것도 같은 문제예요. 미국은 아직도 땅이 넓기 때문에 이민 정책을 쓰고 있고, 우수한 인력들을 확보하려는 데 큰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미국사회가 워낙 꽉 짜여져 있기 때문에 동양인들이 뚫기가 어렵긴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동남아시아 각국 출신의 근로자들을 대하는 요즘의 행태는 참으로 안 될 일이고 나쁜 짓입니다.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유원인(柔遠人)’ 예를 들어서, 저 멀리 네팔사람일지라도 부드럽게 대해 줘라, 멀리 있는 사람일지라도 회유하라, 부드럽게 대해 줘라! 그렇게 되면 회제후(懷諸侯)’ 제후를 다 거느릴 수 있다 이겁니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이 회제후(懷諸侯)’하고 있습니다. 나쁜 짓도 많이 하지만 미국은 그래도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요. 이것은 ()’의 문제가 아니라 천하(天下)’의 문제입니다. 스케일이 커요. 따라서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2017. 구경(九經) 해설

 

 

修身則道立, 尊賢則不惑, 親親則諸父昆弟不怨, 敬大臣則不眩, 體群臣則士之報禮重, 子庶民則百姓勸, 來百工則財用足, 柔遠人則四方歸之, 懷諸侯則天下畏之.
수신하면 도()가 확립되고, 존현하면 불혹(不惑)하고, 친친하면 제부(諸父)ㆍ곤제(昆弟)들이 원망치 않고, 대신을 공경하면 혼란되지 않고, 뭇신하들을 체찰하면 그 체()가 중해지고, 서민들을 자식처럼 보살피면 백성이 권면하며, 백공(百工)들이 오면 쓸 재화가 풍족해지고, 멀리 있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면 사방에서 몰려오고, 제후들을 은혜롭게 하면 천하가 두려워한다.
 
此言九經之效也. 道立, 謂道成於己而可爲民表, 所謂皇建其有極,” 是也. 不惑, 謂不疑於理. 不眩, 謂不迷於事. 敬大臣, 則信任專而小臣不得以間之, 故臨事而不眩也. 來百工, 通功易事, 農末相資, 故財用足. 柔遠人, 則天下之旅皆悅, 願出於其塗, 故四方歸. 懷諸侯, 則德之所施者博, 而威之所制者廣矣. 故曰天下畏之.
이것은 구경(九經)의 공효를 말한 것이다. 도립(道立)은 도가 자기에거서 이루어져 백성의 사표(師表)가 될 만함을 말한 것이다. 소위 황제는 법칙을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불혹(不惑)은 이치에 의심스러움이 없는 것이다. 불현(不眩)은 일에 헛갈리지 않는 것이다. 대신을 공경하면 신임이 전일하여져서 소신(小臣)이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기 때문에 일에 임하여 어지럽지 않다. 온갖 장인을 오게 하면 을 통하게 하고 일을 교역하게 하여 농업과 상업이 서로 돕기 때문에 재물의 씀이 풍족해진다. 이웃나라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면 천하의 나그네들이 다 즐거워하여 그 나라의 길에 나오길 즐거워하기 때문에 사방에서 귀순한다는 것이다. 제후를 품어주면 덕이 베풀어지는 영역이 넓고 위의를 제어하는 영역이 넓기 때문에 천하가 두려워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앞의 아홉 가지에 대한 해설입니다.

 

수신즉도립 존현즉불혹(修身則道立 尊賢則不惑)’

여기서 불혹하다는 말은 어지럽혀지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賢人을 정확하게 존중하는 사회는 무질서한 사회(disordery society)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도 존현(尊賢)을 할 줄 모르는 사회라는 게 안타깝습니다. 우리 사회 무질서의 문제는 존현(尊賢)의 결핍현상이 뿌리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친친즉제부곤제불원(親親則諸父昆弟不怨)’

제부(諸父)라는 것은 부()ㆍ숙부(叔父)ㆍ백부(伯父) 등을 말하는데, 아버지와 큰아버지 사이의 분별과 영어에서 말하는 파더(Father)와 엉클(Uncle) 사이의 차별성은 다릅니다. 우리말에서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말은 매우 중요한 것이죠. 왜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라고 부르느냐 하면, 내 아버지만 아버지가 아니라 이들도 그 훼밀리 시스템에서 동일한 아버지의 자격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가족제도의 가족명칭은 그렇게 결정되는 거예요. 백부라 할지라도 역시 아버지인 겁니다. 큰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미국인들이 아버지의 형제를 부를 때 엉클이라고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라고 늘상 부르는 말이 주는 효과는 미국인들이 엉클과 파더를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르지 않겠습니까? 또 이런 것은,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훼밀리 개념이 크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한 어머니, 한 아버지가 아니라 백부, 숙부, 백모, 숙모 등 어머니, 아버지 호칭이 들어간 사람이 많다는 것은 한 훼밀리 안에서 이들이 생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의 제부(諸父)란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다 같은 아버지들입니다.

 

이처럼 언어분석이 매우 중요해요. 언어를 가지고 훼밀리 구조를 알 수 있거든요. 인간 친척관계를 구성하는 말로써 훼밀리 구조를 알아내는 것은 인류학의 매우 중요한 방법론입니다. , 오지 등에 필드웤(Field work)을 가서 훼밀리 조사를 할 때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인척을 구성하는 말부터 조사하는 겁니다. 그것을 보면은 판도가 나타나니깐요.

 

 

경대신즉불현(敬大臣則不眩)’

대신을 대신답게 공경할 줄 알아야 하겠죠. 그러나 무조건 공경하라는 게 아니라 실제로 공경하는 현상이 일어나면, 즉 대신이 공경 받을 만하고 또 그 공경할 만한 대신을 무시하지 않고 우러르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조건(social condition)이라면 혼란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체군신즉사지보예중(體群臣則士之報禮重)’

여러 신하들을 다 체찰하면 그 밑의 졸개들이 까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서민즉백성권(子庶民則百姓勸)’

여기서 백성(百姓)이란 계급적인 말이 아니라 중립적인 말로서, 문자 그대로 백가지 성()을 뜻합니다. 성씨 백가지이면 거의 모든 성씨가 포괄되는데, 한 성()만 권면(勸勉)하는 게 아니라, 백성이 권면한다는 것입니다. 백성, 백공 이런 말들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고 유의하기 바랍니다.

 

 

 

 

2018. 히로시마의 비극

 

 

히틀러 때문에 쫓겨 간 과학자들이 미국에다 원자탄을 안겨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경건한 마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그 원자탄을 히로시마에 터트릴 때에 그들은 또다시 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히틀러를 피해 가지고 미국으로 자유를 찾아 온 것인데, 내가 여기서 원자탄을 개발해 가지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가담하다니!”하면서 탄식을 토해 내었던 인류지성의 양심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최근까지만 해도 히로시마 원폭을 이슈로 삼아 시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 도대체 이해를 못했었습니다. “일본놈들이 그 악랄한 짓들을 했는데,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터뜨려서 그놈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결국은 전쟁을 끝낸 게 얼마나 잘한 일이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로서는 박수를 쳐야할 일이 아닌가? 일본놈들은 자업자득이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는 역사적인 귀결이었고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만 생각했던 거지요.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과학자들의 눈물이라는 것은 결코 사치스런 감정의 유희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최소한 그들에게 있어서 미국은 프랑스혁명 이후 서구라파에서 부르짖었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 인류가 희망을 걸었던 나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미국은 구라파 역사가 지녔던 어두운 수렁에서 벗어나서 어떤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의미를 인류에게 던지는 그야말로 신천지였던 것이죠.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었고, 누구나 거기에 가면 잘 살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그런 곳이었다고. 거기서 희망을 가지고 살았었는데, 그 미국이 원자탄을 개발할 때만 해도 순수한 과학자적인 입장을 고수 했었는데, 그 순수한 과학적 소산을 양민살상에 서슴없이 사용해 버림으로써 그 투명한 기대감들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 미국이 가지고 있던 힘으로는 일본놈들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끝내는 방법을 얼마든지 달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에다가 원폭을 투하했다는 것은 사용가능한 방법 중에 굉장히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일 뿐이죠. 그 쉬운 방법을 무자비하게 써버렸다는 것, 일본놈들이 어떻게 된 놈들이었든지 간에 양민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 가공할 원폭을 투하해버렸다는 것 자체가 그 당시 세계지성인들의 양심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일본놈들이 무슨 짓을 어떻게 한 놈들이었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것은 세계평화를 암담하게 하는, 인간이 만든 20세기 기계문명이 자기들의 동종(同種)을 그렇듯 대량으로 학살할 수 있다고 하는 그 선례를 남겼다는 데에 문제의 촛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놈들, 저 잔학한 악의 무리들에게 유황과 같은 불을 떨어뜨려 주었으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만만세!”하고 광복의 감격을 누렸지만, 우리는 이제 그 당시에 인류의 암담한 미래를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닐스 보어라든가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등의 그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그런 시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뒤늦은 역사를 산 것이지요. 우리는 보편주의, 보편적 양식(良識)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해요. ‘비록 나는 당한다고 할지라도 인류의 보편적 양식을 위해서는 나는 끝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그런 가치관! 이것은 일순간에 거저로 얻어지는 쉬운 게 아닙니다. 이러한 가치관들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결여되어 있어요. 이런 문제들을 나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미국에 가서 공부하면서, 인류에 대한 어떤 비젼을 획득하면서 히로시마가 갖는 의미도 겨우 깨닫게 되었습니다. 히로시마는 비극이었다! 그렇게 끝났어야 할 2차 대전이 아니었다!

 

 

 

 

 

 

20장 19. 구경(九經)의 일

 

 

齊明盛服, 非禮不動, 所以修身也;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所以勸賢也; 尊其位, 重其祿, 同其好惡, 所以勸親親也; 官盛任使, 所以勸大臣也; 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목욕재계하여 깨끗이 하고 잘 차려 입어, ()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수신이요, 남을 나쁘게 말 하는 사람과 사귐을 끊고 여색를 멀리하여 재화를 하찮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현자를 권면하는 일이요. 그 위()를 존중해 주고 그 녹(祿)을 중시하고 그 좋아함과 싫어함을 같이 해주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을 권면하는 일이요, ()을 성대히 하고 믿고 맡기는 것은 대신을 권면하는 일이요, 마음속을 믿고 그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사()를 권면하는 일이요, 때에 맞게 부리고 거두어 들이는 것을 박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권면하는 일이요,
此言九經之事也. 官盛任使, 謂官屬衆盛, 足任使令也, 蓋大臣不當親細事, 故所以優之者如此. 忠信重祿, 謂待之誠而養之厚, 蓋以身體之, 而知其所賴乎上者如此也.
여기서는 구경(九經)의 일을 말했다. 관성임사(官盛任使)는 아전과 하인이 많아지고 대우가 성대해져 넉넉히 부리며 하여금 명령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대체로 대신(大臣)이 친히 자잘한 일을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우대하길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충신중록(忠信重祿)은 대우하길 성실히 하고 봉양하길 두텁게 한다. 대체로 자신의 몸으로 그를 체찰(體察)하면 그들이 윗사람에게 의지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이와 같다.

 

다시 구경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 용법이 앞과는 반대의 형식을 쓰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주어를 먼저 내놓고 서술부를 나중에 두었는데, 여기서는 서술부를 먼저 내놓고 주어를 맨 뒤에 두고 있어요. 이 두 가지 형식은 한문고전의 전형적인 레토릭(Rhetoric)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십시오.

 

 

제명성복 비례부동(齊明盛服 非禮不動)’

여기서 제명성복(齊明盛服)’이라는 말은 제사를 지낼 때일 수도 있고, 평소일 때일 수도 있고, 이 양자를 다 포괄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고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 합니다(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論語』 「顔淵).

 

매사에 행동을 할 때는 재계(齋戒)하여 단정히 차려입고서 정확한 명분을 가지고, 정확한 예()를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이든 확실한 자리가 아니면 나가지 말 것이다, 움직이지 말라! 내가 요즘에는 신문 같은 데에 일체 글을 쓰지 않아요. 매스컴이란 게 하찮은 것이거든요. 여러분들은 앞으로 매스컴에 희생되는 인물이 되지 말고, 매스컴의 파워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물들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매스컴이 나를 죽이고 또 죽일려고 해도 나는 살아남았어요. ‘소이수신(所以修身)’

 

 

거참원색(去讒遠色)’

여기서 참()이라는 것은 참언(讒言)’인데, 남을 헐뜯어 나쁘게 말하는 것이요 남을 억울하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색()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역시 이성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 할 면이 여기에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색 때문에 망하고 있습니다.

 

남의 말을 빌어 충고하는 자를 멀리하라. 살아가면서 속기 쉬운 것이 있어요. 누가 나한테 충고를 해준다고 할 때, 귀에 거슬리는 고언을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말을 남의 말을 빌어서 할 때는 그 사람의 말을 절대로 귀담아 듣지 마세요. ‘자기 말로써 나에게 나의 나쁨을 지적해 줄 때는 그 말을 존중해서 들어야 하겠지만, ‘남의 말을 빌어서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을 사귐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리십시오. 굉장히 소중한 충고를 해주는 척하면서 떠들어대는 말을 귀담아 듣다가는 속습니다. ‘남의 말을 빌어서 나를 비난한다는 것은, 이놈이 나를 욕하고 있다는 그 사람들과 한패가 되어 가지고 뒤에서 나를 비방하고 있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바로 그 놈이 죽일 놈요! 다 그 새끼가 장난질한 것이니, 절대로 그런 말은 듣지 말고, 또 그런 사람은 두 번 다시 자신의 인생의 장에 들여 놓지 마세요. 그런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 따위 말을 듣고 앉아 있다간 병신 되기 딱 알맞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적인 사람들은 삶의 여러 장면에서 이래저래 부딪치게 되어 있고, 남이 안 하는 짓 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마당에 그런 식으로 충고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간 자기를 죽이는 짓을 스스로 저질러버리게 됩니다. 젊음의 패기를 다 뺏어가는 그런 말에 현혹되어 자꾸만 듣다가는 그저 그런 놈이 되고 만다 이겁니다.

 

철들었다는 것이 뭐냐? 우리말에 점잖다는 말이 참 재미있어요. 이 말은 젊지 않다(not young)는 말이거든요. 젊지 않으면 점잖다는 겁니다. 도올서원의 학생들은 인생을 통해서 절대로 점잖아지지 말아라, 점잖으면 젊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천화이귀덕(賤貨而貴德)’

이 말은 상당히 비판이 많이 되었던 말인데, 여기서 ()’라는 말은 대부분의 동양언어에서는 ()’과 대비되는 말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서 해석해야 합니다. 한문이란 한 글자 한 글자 파고들어가야 그 뜻이 제대로 풀리거든요. ()라는 것은 도시의 산물이요, 문명의 써큘레이션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이라는 것은 땅의 서큘레이션(Circulation, 순환)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농경사회의 산물이요, 생필품입니다. 안 먹으면 죽으니까. 예를 들면, ‘곡소화다(穀小貨多)이 말은 시골에 곡식이 날로 줄어들고, 도시의 재화가 날로 늘어난다[穀不足而貨有餘]’는 반고(班固)한서(漢書)권구십일(卷九十一)화식전(貨殖傳)에 있는 말을 축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요즘 곡()이 줄어들고 화()가 많아져서 사람들이 어쩌고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과거에 도시화의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 ‘천화(賤貨)‘라는 말은 재화를 천시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삶에 기본적인 생필품이 아닌 화(), 공업적·도시적 산물(good)에 긴한 마음을 두지 말라는 뜻이지요.

 

우리 집에는 텔레비젼이 없어요. 나는 과거에 신문칼럼을 쓸 때도, 텔레비젼이나 신문을 전혀 안 보고 썼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게 없으면 큰일 나는 줄로만 아는데, 왜 텔레비젼이 없다고 못삽니까? 왜 학생들 방에 스테레오가 있고 텔레비젼, 전화가 있어야 하냐 그 말이요? 전화 없이 살아 보세요.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재화를 천시한다는 말은 절대로 반자본주의적인 순진성이라고 비판받을 나쁜 말이 아닙니다. 왜 쓸데없이 텔레비젼을 보고 앉아 있어요?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것들을 안 봐도 그냥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 몇 몇 만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신문칼럼을 쓸 때도 신문사 편집장과 한 10분 정도 대화해 보면, 필요한 서베이(Survey, 조사하다)가 다 끝납니다. 한 달 동안 신문, 텔레비젼에서 쏟아내는 내용이라는 게 뭐 대단한 게 아니거든요.

 

물론 증권시세 변화 같은 데에 민감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어쩔 수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뭘 꼭 알아야만 한다는 이런 협박에서 헤어날 줄을 모릅니다. 이런 데서 좀 벗어나서 살 줄 알아야 해요. ‘천화이귀덕(賤貨而貴德)’이라는 게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여기서 화()와 덕()이 대비되고 있는데, ()이란 꽁푸로 내 몸에 쌓이는 것이고, ()란 내 몸 밖에 있는 문명의 부산물이니, ()는 천시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기라는 겁니다. ‘()’()’은 함부로 들어가 있는 글자가 아니라는 걸 주의해서 새기십시오. 이렇게 하면 소이권현야(所以勸賢也)’ 됩니다.

 

 

 

 

 

 

존기위 중기록 동기호오 소이권친친야(尊其位 重其祿 同其好惡 所以勸親親也)’

여기서 동기호오(同其好惡)’라는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그 좋아함과 싫어함[好惡]을 같이 한다는 말이죠. 인생을 살다 보면 멀리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내가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는 호오(好惡)가 같아야 합니다.

 

길을 같이 가다가 국화빵 파는 데를 지나는데, “, 저 국화빵 사먹자!”고 했을 때, “에이, 뭐 그런 것을 사먹으려 하냐?”는 식으로 대꾸해버리면 김이 새지 않습니까? 매사에 이거 안 된다, 저거 해라. 뭐 그런 시시한 영화를 보려고 하느냐 다른 일 하자등등 가까운 사람끼리 이러면 뭔가 일이 안 됩니다. ‘동기호오(同其好惡)’가 안 되면 친친이 안 되는 겁니다. 호오(好惡)를 같이 해주는 일, 비록 기호가 다르다고 해도 같이 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수와 제자의 경우를 볼 때, 교수들이 교수 노릇 할 줄을 몰라요. 교수들이 덕이 없다고! 논문을 쓰라고 할 때, 그 논문이 어떻게 다 내 마음같이 쓰여 질 수가 있겠습니까? 흔히 부실한 논문이 올라오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하나 다 비판하고 좍좍 그어 제껴 버리면 사람이 못 큽니다.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을 가깝게 키우는 방법은 동기호오(同其好惡)’하는 데 있어요. 좀 마음에 차지 않게 써 왔더라도 잘 썼다 괜찮다고 하면서 좀 더 다듬으라고 해야지 사람이 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용기가 나고 자기의 최선을 발휘할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인간이란 아무리 내가 동기호오(同其好惡)’를 해줘도 자기 잘못은 언제인가 깨닫습니다. 옆에서 말리는 사람의 말이 옳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고집을 고수한 경우에 이 고집쟁이는 언제인가 자기의 잘못을 분명히 깨닫게 되어 있는데, ‘동기호오(同其好惡)’를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굴면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들입니다. ‘동기호오(同其好惡)’는 결코 아첨하는 게 아니예요. 특히 결혼생활을 할 때,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한다고 하면 나도 같이 좋아한다고 하고, 싫어한다고 할 때 나도 역시 싫어한다고 해 주는 것, 하는 일에 대해서 잘한다고 맞장구 쳐주는 것, 동기호오(同其好惡)’가 친친의 기본인 것입니다. 이것은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참 중요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걸 잘 못해! 이것은 근본적인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호오(好惡)의 문제일 뿐인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이런 호오(好惡)의 문제에 대해서 지독하게 인색하고 고집이 세거든요. 국화빵 먹는다고 해서 무슨 천지가 무너지냐, 도덕이 땅에 떨어지냐?(웃음) 그런데 이런 사소한 데서 어긋나기 시작하면 모든 게 틀어져 버리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성임사 소이권대신야(官盛任使 所以勸大臣也)’

임사(任使)’라는 것은 한번 맡기면 잔소리 안 하는 것입니다. 대신(大臣)은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믿고 맡겨야지 여기에 자질구레한 참견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시사박렴 소이권백성야(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요새말로 하면 세금을 낮추라는 말입니다. 백성에게는 시사(時使)가 중요합니다. 시사라는 말은 때에 맞춰서 시의적절하게occasionally가 아니라 timely,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부린다는 말인데, 예를 들면, 농번기에 군대를 일으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옛날에 농번기에는 전쟁을 절대로 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전쟁에 이겼던들 곡량이 떨어지면 전승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일으켜도 농번기를 피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언제 싸우지? 늦가을에 싸우나? 겨울에 싸우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 말도 좀 문제가 있네요. 암튼, 백성을 때로 부린다는 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때가 아닐 때 백성을 괴롭히면 안 되요. 명절 때는 명절 연휴을 주고 또 조일 때는 조이고 그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 많이 논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공휴일이 너무 많아요.

 

 

 

 

日省月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送往迎來, 嘉善而矜不能, 所以柔遠人也; 繼絶世, 擧廢國, 治亂持危, 朝聘以時, 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
날마다 살피고 달마다 능력을 테스트하여 그 업적에 합당한 보수를 주는 것은 백공(百工)을 권면하는 일이요, 가는 사람을 잘 가라 하고 오는 사람을 반가이 맞이하며 잘하는 사람을 가상히 여기고 못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먼 지방에 사는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요, 끊기 대를 이어주고 쓰러진 나라를 일으켜 주며 혼란함을 바로 잡고 위태로움을 바로 세우며 조회(朝會)와 빙문(聘問)을 때에 따라 하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은 후하게 주지만 내 나라로 오는 것은 박하게 받으면 제후를 은혜롭게 하는 것이다.
 
, 讀曰餼. 餼稟, 稍食也. 稱事, 周禮』「藁人職: “考其弓弩, 以上下其食,” 是也. 往則爲之授節以送之, 來則豊其委積以迎之. , 謂諸侯見於天子. , 謂諸侯使大夫來獻. 王制: “比年一小聘, 三年一大聘, 五年一朝.” 厚往薄來, 謂燕賜厚而納貢薄.
()()’로 읽어야 하니, 희름(餼稟)은 녹봉이다. 칭사(稱事)주례』「고인직그 일을 따지고 쇠와 쇠뇌를 시험하여 봉록을 높이거나 낮춤으로 벌주거나 상준다[乘其事, 試其弓弩, 以上下其食而誅賞].”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이다. 떠나면 그를 위해 여권을 주어 그를 보내고, 오면 생활안정을 위한 계책으로 그를 환영한다. ()는 제후가 천자를 뵙는 것이다. ()은 제후가 대부를 시켜 헌납하러 오는 것이다. 왕제매년 한 번 소빙(小聘)을 하고, 3년에 한 번 대빙(大聘)을 하며, 5년에 한 번 조회를 한다.”고 했다. 후왕박래(厚往薄來)는 잔치에서 하사품을 후하게 하고 공납은 적게 하는 것이다.

 

 

일성월시 희름칭사 소이권백공야(日省月試 旣稟稱事 所以勸百工也)’

일성(日省)’은 날로 살펴본다는 말인데, 기술자라는 사람은 날로 살펴봐야 합니다. 옛날에도 기술자들에게 자격시험이 있었습니다. “자격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주라. 그래서 보수를 이루어 놓은 일에 합당하게 하라(旣稟稱事: 여기서 , 녹봉희이다).” 이것은 인센티브정책, 장려제도입니다. 일을 잘하고 많이 한 사람에게는 많이 주고 못하고 적게 한 사람에게는 적게 주고 억울하지 않게 이룬 바에 맞게 댓가를 지불하라는 것이죠. 달인(達人)은 달인(達人) 대접해 주라!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생산성을 높이지 않고 월급만 높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특히 대기업에서 심각한데, 하청 받아서 꾸려가는 중소업체들에 속해 있는 노동자들이 본다면, 대기업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왕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울산 같은 데의 대기업 사원들을 보더라도 그 지역에서 참으로 특권계층 노릇을 하거든요.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모랄(Moral, 도덕성)이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봉급 받고 살아봐야 의미가 없는 것이예요. 나는 우리나라에서 노동윤리가 커다란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노동윤리는 하루아침에, 그것도 작업장에서 직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만으로 길러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수신과 제가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기업조직의 일원으로서 원만한 업무처리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성실한 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 특별나지도 않고 굴곡도 별로 없는 듯한 지리한 일상사의 연속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스릴 줄 아는 습성을 몸에 익히지 못한 청년이 어떻게 현대의 기업에서 요구하는 능력 있고 성실하고 관계된 타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는 그 복합적인 과업을 제대로 수용하고 처리할 수 있겠는가? 대학교 4년의 기간 동안에 전에 없던 습성이 갑자기 학습될 수 있다고 믿는가? 일상사를 통한 몸의 훈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수신과 신독의 체험을 결여한 경우에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자는 수신과 신독, 그리고 제가(齊家)에 힘쓸 것이며, 기업주는 이 수신(修身신독(愼獨제가(齊家)가 가능한 기업조직운영의 원리는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 생산성과 경쟁력은 그 다음에 그냥 따라 나오게 된다. 여태까지 우리나라 기업주들이 잘못해 온 것은 더 말할 것 없는 일이지만, 거기에 못지않게 노동자들이 반동적으로 극단적으로 가고 있어요. “희름칭사(旣稟稱事)”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름은 칭사가 아닙니다. 획일적인 조직을 가지고 생산성에 부합되지 않는 과도한 월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송왕영래 가선이긍불능 소이유원인야(送往迎來 嘉善而矜不能 所以柔遠人也)’

송옹(送往)” 이것은 모택동의 유명한 전술입니다. 모택동이 국민당 병사를 잡았을 때는, 그 사람을 억지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애써봐야 소용없는 일이니까, 항상 잔치를 열어서 이 병사들을 잘 대접해서 돌려보냈습니다. 당시 국민당은 부패해 있었기 때문에 이 복귀한 국민당 졸개들은 스파이처럼 취급당했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게 되지요. 그러자 이 사람들이 전부 사선을 뚫고 탈출해서 팔로군 진영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 때야 비로소 모택동은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모택동은 이런 식으로 팔로군의 수를 늘려 간 것입니다. 모택동 전집에 다 나와 있어요. 송왕(送往), 간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환송해 주는 겁니다. 잘 가시오! 그러면 이놈은 잊지 못해서 다시 옵니다. 올적에는 환영한다, 영래(迎來)!

 

 

가선이긍불능(嘉善而矜不能)’

여기서 ()’은 잘할 선인데, 매사에 잘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능(不能)’이 대칭적인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봐서, 여기서의 선()은 능()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聖經)이나 중용(中庸)이나 다를 바 없죠? 이것은 멀리 있는 사람까지 유화정책을 쓰는 것입니다.

 

 

 

 

유원인(柔遠人)’이라는 것은 이민정책으로서 중요한 것이고, 또한 관광정책으로서 중요한 것입니다. 관광이라는 것은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사업입니다. 관광산업이 잘 될려면, 우선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오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와서 보면, 우선 김포공항에서부터 마치 목숨을 걸고서 청룡열차를 타고 있는 듯한 모험적이고 위협적인 승차대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들 아는 바와 같이 차들이 총알처럼 질주하기 일쑤이거든요. 또한 한국처럼 음식문화, 외식문화가 타락한 나라가 없어요. 이렇게 형편없는 외식문화의 나라에서 무슨 관광입니까?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한 끼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요. 이게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관광이라는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저 구경 다니는 것이 아닌 관광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국에 와서 뭔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고 한국에 있으면 참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면 외국 사람들이 오게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문화라든가 예술이라는 것을 우리들끼리만 즐길 게 아니라, 한국에 가면 기막힌 쇼를 볼 수 있고, 특히 동숭동에 가면 문화와 예술의 향취에 흠뻑 젖고자 찾아드는 세계의 사람들이 득실거린다는 식으로 되어야 합니다.

 

억지 포스터나 덕지덕지 붙여 대고, 도대체 지금의 이 꼴이 뭡니까? 병원을 해도 머리만 잘 쓰면 기막힌 국제적 사업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아이디어를 말한다면, 세계의 암환자들이 한국으로 몰려오도록 하는 겁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돈이 됩니다. 병원에다가 쏟아놓고 가는 돈은 호텔숙박비나 상품 구매비용에 비할 정도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잘 사는 길은 유원인! 중용(中庸)의 이런 말들은 국가정책으로서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세계의 모든 인민들이 한 번 가서 살아봤으면 좋겠다 싶은 곳으로 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에 와서 기분이 좋고, 한국 사람과, 한국의 문화에 대해 존경과 감탄의 마음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이런 고부가가치 사업들을 내팽게쳐 놓다시피 하고서 맨 전자산업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만 가지고는 일본의 발꿈치도 못 따라 가요. 우리나라는 어차피 코메디 세트라고 내가 말했는데, 이왕에 코메디 세트인 바에야 세계의 인민들이 여기에 와서 코믹하게 놀고 갈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겁니다. 어때요? 내 아이디어가!

 

 

계절세 거폐국 치란지위 조빙이시 후왕이박래 소이회제후야(繼絶世 擧廢國 治亂持危 朝聘以時 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

여기서 절세(絶世)’를 잇는다는 말은 아마도 대가 끊어진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뜻이 아니라, 퇴락한 지방을 제대로 되게 해 준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스케일이 큰 문제에 대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조빙(朝聘)’이란 ()’()’을 함께 말한 것인데, 주자 주()에 나오고 있듯이 조()란 제후가 천자(天子)를 만나는 것이고, ()이란 제후가 대부(大夫)로 하여금 천자국(天子國)에 와서 예물을 올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기(禮記)왕제(王制)편을 보면, 매년 한 번 소빙(小聘), 삼년에 한 번 대빙(大聘), 오년에 한 번 조()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빙이시 후왕이박래(朝聘以時 厚往而薄來)” 예를 들면, 미국에서 한국에 오는 것은 후하게 하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것은 박하게 하라, 대국(大國)은 소국(小國)에 대해서 많이 주고 적게 받아라는 것이죠. 근래에 세계적으로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장개방이 여기에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凡爲天下國家有九經, 所以行之者一也.
대저 천하국가에 이런 아홉 가지 경이 있으니 그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一者, 誠也. 一有不誠, 則是九者皆爲虛文矣. 此九經之實也.
()은 성()이다. 하나라도 성()이 없으면 아홉 가지는 모두 헛된 문장이 된다. 이것이 구경(九經)의 실제다.

 

 

 

 

 

2020. 중용의 상하편이 나뉜다

 

 

凡事豫則立, 不豫則廢. 言前定則不跲,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道前定則不窮.
그 하나는 곧 ()’을 말합니다. 모든 일이라는 게 미리 준비해 두면 서고, 미리 준비하지 못하면 어그러진다. 미리 정하면 차질이 없고, 일을 미리 정하면 곤경에 처하는 일이 없고, 행동을 미리 정하면 결함이 없고, ()를 미리 정하면 막히는 일이 없다.
 
凡事, 達道達德九經之屬. , 素定也. , 躓也. , 病也. 此承上文, 言凡事皆欲先立乎誠, 如下文所推是也.
모든 일이란 달도(達道)와 달덕(達德), 그리고 구경(九經)의 종류를 가리킨다. ()는 평소에 정하는 것이다. ()은 넘어진다는 것이다. ()는 병이다. 이 장은 윗 문장을 이어 모든 일이 모두 성()을 세워야 함을 말했다. 아랫 문장은 성()을 미루어 가는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주자 주()예 소정야(豫 素定也)”라고 했는데, ‘()’는 평소에 미리미리 정해두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미리미리 평소에 준비해 두면 제대로 서고,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폐()하게 된다.”

 

언전정즉불겁 사전정즉불곤 행전정즉불구(言前定則不跲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 그다음에 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전정즉불궁(道前定則不窮)’ ‘((()’()!

 

 

 

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獲乎上有道, 不信乎朋友, 不獲乎上矣; 信乎朋友有道, 不順乎親, 不信乎朋友矣; 順乎親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방법이 있으니, 우선 가까운 붕우에게서 신임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에게서 신임을 얻지 못한다. 붕우에게서 신임을 얻는 길이 있으니, 자기 부모에게 불순하면 친구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다. 부모에게 순()하는 길이 있으니,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아서 성실함이 없으면 어버이를 따를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성()하게 하는 데에는 길이 있으니, ()에 밝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성()하게 할 수 없다.
 
此又以在下位者, 推言素定之意. 反諸身不誠, 謂反求諸身而所存所發, 未能眞實而無妄也. 不明乎善, 謂不能察於人心天命之本然, 而眞知至善之所在也.
여기서는 또한 아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소정(素定)’의 뜻을 미루어 말한 것이다. ‘반저신불성(反諸身不誠)’은 몸에서 돌이켜 구하였지만 보존되고 발설한 것이 진실무망(眞實無妄)하지 않은 것이다. ‘불명호선(不明乎善)’은 인심(人心)과 천명(天命)의 본연을 살펴 참으로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재하위 불획호상 민불가득이치의(在下位 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여기서 불가득(不可得)’ 전체가 무엇을 할 수 없다(can not)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랫자리(윗사람과 평민 사이의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를 미리 미리 정하여 위로부터는 신임을 얻고 아래로 서민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獲乎上 有道 不信乎朋友 不獲乎上矣 信乎朋友 有道 不順乎親 不信乎朋友矣 順乎親 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誠身 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

여기에 최초로 ()’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중용(中庸)의 상편과 하편을 잇는 고리가 생긴 것입니다. 중용(中庸)을 상·하로 나눈다면 재하위(在下位)’ 이전은 상편이고 이후부터가 하편에 해당됩니다. 이제 성론(誠論)’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자기 몸에 돌이켜서 성()하지 못하면 부모에게 불순(不順)하다.

 

성신 유도 불명호선 불성호신의(誠身 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 몸 성히 잘 지내거라!”라고 할 때의 그 성이 한자에서 온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의미상으로 볼 때,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바로 이 ()’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뒤에 나오는 천지론(天地論)’적인 의미로 풀이해 보면, 천지운행의 질서가 늘 꾸준이 그러하듯이 네 몸의 질서도 제대로 흐르다 말다 그러지 말고 항상 제 상태를 유지하거라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는 것이다. , “몸을 잘 닦아서[修身], ()한 몸을 유지하거라!”는 뜻이다. 천지의 질서와 내몸의 질서를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느끼는 이런 삶의 태도가 조선인의 현대 언어에도 면면히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소홀히 놓쳐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우리의 둔해져 버린 감수성을 회복시키는 첫 걸음은 우리들이 늘 사용하고 있는 일상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 말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자산을 되찾는 다는 것은 없는 것, 현실적으로 부재하는 것을 재생시키는 게(물론 이런 과제도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일은 아니겠으나 너무도 막막하고 단계적으로 볼 때 훨씬 뒷 단계의 과제이다)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그 수많은 것들을 인()하게 센시티브하게 다시금 보는 것이다근본적으로 명호선(明乎善)’이라는 데로 가고 있는데, 대학(大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지도 재명명덕(大學之道 在明明德)’이라고 했지요.

 

 

 

 

2021. ()과 성지(誠之)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 그 자체는 하늘의 도(), ()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은 애쓰지 않아도 도()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깨달아지며 유유자적하게 도()에 착 들어맞는 경지이니, 이것은 곧 성인(聖人)의 경지이다. ‘()하려고 하는 것즉 뭇사람의 도()는 선()을 택하여 이것을 꿋꿋이 지키는 것이다.
 
此承上文誠身而言. 誠者, 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 誠之者, 未能眞實無妄, 而欲其眞實無妄之謂, 人事之當然也. 聖人之德, 渾然天理, 眞實無妄, 不待思勉而從容中道, 則亦天之道也. 未至於聖, 則不能無人欲之私, 而其爲德 不能皆實. 故未能不思而得, 則必擇善, 然後可以明善; 未能不勉而中, 則必固執, 然後可以誠身, 此則所謂人之道也. 不思而得, 生知. 不勉而中, 安行也. 擇善, 學知以下之事. 固執, 利行以下之事也.
여기선 윗 문장의 몸을 성실히 한다는 것을 이어 말했다. ()은 진실무망(眞實無妄)하는 것을 말하니, 천리(天理)의 본연이다. 성지(誠之)란 진실무망(眞實無妄)하지 않고 진실무망(眞實無妄)하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인사(人事)의 당연함이다. 성인의 덕은 천지와 어우러져 진실무망(眞實無妄)하여 생각하고 힘쓰길 기다리지 않아도 유유자적하게 도에 합치되니 또한 하늘의 도(). 성인에 이르지 못하면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없지 않아, 덕 됨이 모두 진실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선을 택한 후에 선을 밝힐 수 있다.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굳게 잡은 후에 몸을 성실히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사람의 도라 한다. 생각하지 않고도 얻는 것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이고,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는 것은 안이행지(安而行之). 선을 택하는 것은 학이지지(學而知之) 이하의 일이다. 굳게 잡는 것은 리이행지(利而行之) 이하의 일이다.

 

 

()은 천지자연의 끊임없는 운행을 체득하는 것

 

()’이라는 것은 보통 성실하다(sinceritive)고들 하는데, 중용(中庸)성론(誠論)’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런 의미에서 그치는 게 아니고, ‘천지론(天地論)’적인 코스믹(Cosmic)한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지천(知天)’의 세계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또한,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이라는 것은 사도(邪道)가 아니고 정도(正道)이다(authentic하다)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이란 천지도(天之道)’라고 했습니다. 중용(中庸)의 저자는 성론(誠論)’으로 가기 위해서 지금까지 인간세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해왔는데, 인간의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간()에서 결정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성을 따지는 데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도덕성의 궁극적 기준을 결정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 사이에서 결정되어 버리면 도덕이 임의적인 게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서양의 종교는 갓(God)을 말하게 되는 것이며, 이 초월적 입법자가 제시하는 계명에 도덕성의 기준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니 우리가 그것을 지키자! 이겁니다. 동양에서는 그런 십계명과 같은 것이 없고, 인간의 도덕성을 ()’에서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자연의 운행인데, 그러니까 천지도(天之道)’라는 것, 하늘의 움직임은 늘 부단하게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낮이 왔다가는 밤이 오고, 달이 기울었다가는 다시 차고 또다시 기울고 등등 변화에 어김이 없다, 성실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저녁에 잠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낮이 되버린다면 참으로 곤란해지겠죠? 모든 게 교란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인간 도덕성의 근원을 자연운행의 부단히 늘 그러함에서 찾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는 자연 변화의 기본적인 질서가 성실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성실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도덕성이 만약에 인위적이 되어버린다고 하면 곤란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동양사상에는 의인화된 신을 설정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질투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았다가, 핏대난다고 밤을 낮으로 돌려라!” 신이 그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구약성경에 실제로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 할지어다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아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 하였다고 기록 하지 아니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여호수아 1012~14). 여호수아가 적들과 싸우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도우려고 태양이고 달이고 멈춰라! 그래서 잘 싸우고 어쩌고··· 일식 월식이 있었으니까 이런 내용이 만들어졌겠지만, 하여튼 동양사상에는 이런 인격적 존재로서의 창조주 초월신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천()의 질서, 하늘이 성실하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성실이 가능해진다는 생각이 동양사상에서는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죠. 가끔 지진도 생기도 태풍도 불고 하지만, 기본적인 질서는 틀림이 없다는 겁니다. 김장 담으려고 다 준비해 놓고 있는데 갑자기 여름이 와버리면 뒤죽박죽되어 버려요. 단순하고 유치한 것 같이 보일런지 모르지만, 동양사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데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존중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에콜로지의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볼 적에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환경생태 문제와 인간생존의 문제를 나의 구체적인 생활과 관련시켜 하나의 질문으로 제시한다면, 아주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과연 나는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내 자신과 내 가족의 건강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가?” 내 몸과 내 가정 그리고 이 사회의 건강(健康)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아니 지금의 상태로라면 거의 불가능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세상은 내가 마음만 먹는다고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 아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추구를 교란시키거나 봉쇄해 버리기 딱 좋은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건강을 추구하려는 나의 역량을 박탈해 버리고, 심지어는 건강하고 싶은 욕구마저도 왜곡시켜버리기 쉬운 그런 세태(世態)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자 천지도야 성지자 인지도야(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는 것입니다.

 

 

 

자연에 합치(合致)되려는 노력의 성지(誠之)

 

여기서 성지자(誠之者)’()’()’을 동사화시키는 지()입니다. 그러니까 ()‘은 궁극적인 도달점(goal)이고 성지(誠之)’는 그 도달점에 이르는 과정(process)을 말합니다. ‘성지(誠之)’의 프로세스가 ()’을 향해서 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모습, 인류문명의 모습도 궁극적으로 하늘에 합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동양사상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늘에 합치되지 않는 인간문명의 질서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서양인들에게는 동양사상이 낙후된 듯이 보였을 런지 모르지만 오늘날 이것은 틀림이 없는 분명한 말씀입니다. 나는 오늘날 에콜로지가 제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여기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데 이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성자 불면이중 불사이득 종용중도 성인야(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이거 멋있는 말입니다. ‘종용(從容)’이라는 것은 유유자적함을 말하는데, “()이라고 하는 것은, 유유자적하면서도 도()에 짝 들어맞는다. 이러한 경지에 달한 게 성인(聖人)이다.”

 

 

성지자 택선이고집지자야선(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善)”

성인의 도()는 종용중도(從容中道)이고, 그러나 성()하려고 하는 평범한 인간의 도()는 택선이고집지자야(擇善而固執之者也).” ()을 택해서 그것을 딱 굳세게 잡고 가야만 성()하려고 하는 인간의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작 시기 1단계 2단계 3단계
본문 공자가어 중용 맹자』「이루12

 

 

 

 

 

 

 

 

 

 

2022. 될 때까지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그러기 위해선 박학(博學), 넓게 배워라; 그리고 심문(審問), 살피며 자세히 물어라; 아주 신중하게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돈독하게 그것을 실천하라.
 
此誠之之目也. , 所以擇善而爲知, 學而知也. 篤行, 所以固執而爲仁, 利而行也. 程子: “五者廢其一, 非學也.”
이것은 성지(誠之)의 조목이다. ()ㆍ문()ㆍ사()ㆍ변()은 택선(擇善)하는 것으로 지고(知固)가 되니, ‘학이지지(學而知之)’. 독행(篤行)은 고집(固執)으로 인집(仁執)이 되니 리이행지(利而行之)’. 정자가 다섯 가지(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중에 그 하나라도 없다면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有弗學, 學之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弗得弗措也; 有弗辨, 辨之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弗篤弗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배우지 않을 수는 있으나, 일단 배우자고 했다면 능하지 못하는 데도 그것을 놓지 말아라. 묻지 안을 수도 있으나, 일단 물었다 하면 그걸 잘 알지 못하는 데도 놓지 말아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막상 생각했다 하면 그것을 얻지 못하는 데도 놓지 말아라. 분변하지 않을 수 있으나, 분변하자고 했으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놓지 말아라. 행하지 않을 수 있으나, 한 번 행하자고 작정했으면 독실하게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것을 놓지 말아라. 이런 일에 있어서 남들이 한 번에 능한다고 하면, 백 번을 하고, 열 번에 능한다고 하면, 천 번을 하라.
 
君子之學, 不爲則已. 爲則必要其成, 故常百倍其功. 此困而知勉而行者也. 勇之事也.
군자의 학문은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다면 반드시 이루길 요구하기 때문에 항상 그 공부를 백배로 해야 한다. 이것은 곤이지지(困而知之)’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로 용()의 일이다.

 

 

유불학 학지 불능 부조야(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이거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중용(中庸)을 읽을 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인생을 결정했습니다. “배우지 않는 것은 좋다. 배우지 않는 것은 허물이 아니다. 배우지 않는 것이 있을지언정, 일단 배웠다 하면 능하지 아니 하면 그것을 손에서 놓지 말아라.” 인간이라는 게 일생 동안 굳이 학문에만 힘쓰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게 되는데, 그러나 일단 배우자고 작정을 했다면 능하지 않으면 그것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것은 원칙이어야 합니다. 나는 젊었을 때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내 인생의 원칙을 정했고, 또 그 원칙대로 실천했습니다. 내가 지금 한의대를 다니면서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이 중용(中庸)의 말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이예요. 어렸을 때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게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유불문 문지 부지 부조야(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하고 대화를 할 때, 흔히 선생님을 머리가 나쁜 것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엉뚱한 질문을 잘하기 때문이예요. 나는 이해가 안 되면 계속 묻거든요. 그러니 나하고 대화하는 사람들이 답답하다고 하는 겁니다. 나는 곤이지지(困而知之)’하는 놈이어서 무슨 말인지 모를 때는 계속 묻습니다. 그렇게 쉬운 것도 못 알아듣느냐고 핀잔을 듣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계속 묻는 데 대해서 창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집요하게 계속 묻다가 보면 착 깨달을 때가 있어요. 나는 누구하고든 대화를 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가 좍 빼내어 나오게 합니다. 근원적인 것을 철저하게 계속 묻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는 비록 대답을 잘 안 해줘도 착 감을 잡을 수 있어요. 그래서 확 잡아내야, 나는 대화를 끝냅니다.

 

 

유불사 사지 부득 부조야(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유불변 변지 불명 부조야(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

명백하게 그것이 분변(分辨)이 될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중용(中庸)’이란 악착같습니다. 악착같아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동양사상은 두루뭉실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무슨 고상한 덕이나 있고어쩌고.” 웃기네! 어디 그런 덕이 있냐?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모든 덕()은 곧 꽁푸입니다. 동양사상에는 부드럽고 어쩌고 하는 애매한 덕성 따위는 없어요. “덕성을 함양하는 교육을 해야 하고 어쩌고, 전통적 인성교육과 세계화의 교육이 마찰을 일으켜서 복잡하다.”는 식의 이런 미친놈들의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데, 교육의 근본을 모르는 짓거리입니다. 동양사상은 명료합니다. 명료할 때까지 분변(分辨)하라!

 

 

유불행 행지 부독 부조야(有弗行 行之 弗篤 弗措也)’

여기까지가, 바로 앞 문장의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의 문제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죠?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인일능지 기백지 인십능지 기천지(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딴 사람들이 한 번에 이것을 능하면 나는 백번 하라. 다른 사람들이 열 번에 그것을 능하면 나는 천 번 하라.” 그래야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것은 반복이다! 꽁푸는 반복이요, 반복 없는 꽁푸는 없다! 이 세상에 단 한 번에 얻어지는 꽁푸는 없다!

 

 

 

 

2023. 근본을 깨달으면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
과연 이러한 도()에 능하게 되면,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밝아지고, 아무리 부드러운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외유내강(外柔內剛)! 근본을 깨달아야 양면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큰 지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大智若愚). 어리석은 것 같지만 근본을 깨달으면 명()한 것이고, 아주 부드러운 것 같지만 근본을 깨달으면 강한 것입니다.

 

 

20장에 대한 주자 주()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겠습니다.

 

明者, 擇善之功. 强者, 固執之效. 氏曰: “君子所以學者, 爲能變化氣質而已. 德勝氣質, 則愚者可進於明, 柔者可進於强. 不能勝之, 則雖有志於學, 亦愚不能明, 柔不能立而已矣. 蓋均善而無惡者, 性也, 人所同也; 昏明强弱之稟不齊者, 才也, 人所異也. 誠之者, 所以反其同而變其異也. 夫以不美之質, 求變而美, 非百倍其功, 不足以致之. 今以鹵莽滅裂之學, 或作或輟, 以變其不美之質, 及不能變, 則曰天質不美, 非學所能變. 是果於自棄, 其爲不仁甚矣!”
()은 택선(擇善)의 공효다. ()은 고집(固執)의 공효다. 여씨가 말했다. “군자가 배우는 이유는 기질을 변화시키고자 할 뿐이다. 덕이 기질을 이기면 이리석은 사람도 분명함으로 나가고 유약한 사람도 강함으로 나간다. 그러나 기질을 이기지 못하면 비록 배움에 뜻을 두더라도 또한 어리석음이 분명해지지 않고 유약함이 서질 못할 뿐이다. 대체로 선을 고르게 하여 악이 없는 것이 성()이니 사람의 공통된 것이다. 어둡고 밝고 강하고 약함의 기품이 가지런하지 않은 것은 재()이니 사람의 다른 것이다. 성지(誠之)란 공통된 것을 돌아봐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자질을 구하여 변화시켜 아름답게 만들려 하는데 공부를 백배로 하지 않는다면 이르기엔 부족하다. 지금의 거칠고 엉성하여 지리멸렬(支離滅裂)한 학문이 혹 했다가 혹 그쳤다가 하며 아름답지 못한 자질을 변화시키려 하나 변화되지 않음에 이르면 천부적인 자질이 좋지 않아 배워도 변하질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자포자기에 과감한 것으로 불인함이 심함이로다!“”
 
右第二十章. 此引孔子之言, 以繼大舜周公之緖, 明其所傳之一致, 擧而措之, 亦猶是爾. 蓋包費隱, 兼小大, 以終十二章之意. 章內語誠始詳, 而所謂誠者, 實此篇之樞紐也. 又按孔子家語亦載此章, 而其文尤詳. 成功一也之下, 公曰: 子之言美矣!至矣! 寡人實固不足以成之也.” 故其下復以子曰起答辭. 今無此問辭, 而猶有子曰二字, 子思刪其繁文以附于篇, 而所刪有不盡者, 今當爲衍文也. 博學之以下, 家語無之, 意彼有闕文, 抑此或子思所補也歟?
여기까지 20장이다. 여기선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순임금과 문왕, 무왕, 주공의 실마리를 이어 전한 내용이 일치함을 밝혔고, 내용을 들어 거기에 두더라도 오히려 이와 같을 뿐임을 밝혔다. 대개 비은(費隱)을 포함하고 대소(大小)를 겸하여 20장의 뜻을 마쳤다. 이 장 안에서 성()을 말함이 처음으로 자세했으니, 이른바 성()이란 실로 이편의 중추다. 또 생각건대 공자가어또한 이 장이 실려 있지만, 문장은 더욱 자세하다. 성공일야(成功一也) 이하에 애공이 공자의 말씀이 아름답고도 지극합니다. 과인은 실로 그것을 이루기엔 부족합니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그 아래에 자왈(子曰)’로 답을 일으킨 말이 있다. 이제 이 물은 말이 없으나, 오히려 자왈(子曰)’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대개 자사가 그 번거로운 문장을 깎아 이편에 붙일 적에 다하지 못한 게 있었을 것이니, 이제 마땅히 연문이 된다. ‘박학(博學)’ 이하는 공자가어에 없는 것이니, 공자가어에 빠진 글이 있거나, 그게 아니면 여기에 혹 자사가 보충한 것이리라.

 

20장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순()임금과 문왕(文王), 무왕(武王) 그리고 주공(周公)의 전통을 이었고, 그 전하는 바가 일치함을 밝혔는바, 그 말을 들어다 놓으면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그 효용이 광대함을 두루 포괄하는 한편 세세한 점과 굵직굵직한 점을 함께 섭렵함으로써 열두 개 장(9~20)의 뜻을 매듭지운 것이다. 이 장 속에 ()’을 처음으로 상세하게 말하고 있으니, ()’이라고 하는 것은 중용(中庸)의 앞과 뒤를 잇는 이음매이다. 또한 공자가어(孔子家語)에도 역시 이 20장이 실려 있는데, 그 글이 더욱 상세하다. 가어(家語)에 보면, ‘성공일야(成功一也)’라는 말 그 다음에 애공이 이르기를, “그대(공자)의 말이 지극하고 아름답기는 하나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내가 부족하다말이 들어가 있다는 글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다시 공자가 거기에 대하여 답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왈(子曰)’이라고 공자가 대답하는 말을 시작했을 터인데, 지금 이 글에는 공자의 말을 실천하기엔 내가 부족하다 어쩐다하는 애공의 말이 나와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자왈(子曰)’이라는 두 글자가 있으니[好學近乎知] 자사(子思)가 원래의 그 번잡한 글을 정리하면서 삭제할 때에 미처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이것은 불필요한 말로서 당연히 제외시켜야 할 것이다. ‘박학지(博學之)’ 이하의 글은 가어(家語)에는 없으니, 짐작건대 가어(家語)에 빠진 글이 있거나 아니면 자사(子思)가 보탠 것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중용(中庸)의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중용(中庸)의 진짜 맛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21장부터 위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한마디 한마디가 33장까지 계속 되요. 그러니 요번 금요일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강의에 임해주기 바랍니다. 오늘은 중재하고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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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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