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풍요(豊饒) 속의 음지(陰地)
사대부(士大夫) 계층에서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리고 있을 때 이들과 다른 처지에서 외롭게 시를 쓴 시인(詩人)들도 있다. 천예(賤隸) 출신인 유희경(劉希慶)ㆍ백대붕(白大鵬)과, 사대부(士大夫) 계층의 유희적 애정의 대상으로 일세에 풍류를 과시한 황진이(黃眞伊)ㆍ이옥봉(李玉峰)ㆍ계생(桂生)과 같은 기녀(妓女)들이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위항인(委巷人)의 신분으로 『육가잡영(六家雜詠)』과 같은 위항시집(委巷詩集)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최기남(崔奇男)ㆍ김효일(金孝一)ㆍ최대립(崔大立) 등도 모두 음지(陰地)에서 시를 쓴 이 시대의 시인들이다.
유희경(劉希慶, 1545 인종1~1636 인조14, 자 應吉, 호 市隱ㆍ村隱)은 조선중기의 천예(賤隸) 출신 시인이다. 그러나 노역에는 종사하지 않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인 남언경(南彦經)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喪禮)에 밝았으며 또한 박순(朴淳)에게 당시(唐詩)를 배워 시재(詩才)가 크게 이루어졌다. 그는 또다른 천예출신인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를 조직하여 이를 주도하였으므로 세간에서 이들을 유백(劉白)이라 불렀다. 풍월향도는 서류(庶流) 중심으로 조직된 시사(詩社)이지만 박계강(朴繼姜)ㆍ정치(鄭致)ㆍ최기남(崔奇男) 등 중인층도 이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이 모임은 조선후기 위항문학을 발흥케 한 초기의 움직임으로 의미를 가진다. 촌은은 그의 신분 때문에 나이 70이 되어서도 남의 집 상역(喪役)에 불려다니는 등 불우한 삶을 살기도 하였으나 한시에 능하여 사대부들의 지우(知遇)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창덕궁 서쪽의 정업원동(淨業院洞)에 침류대(枕流臺)를 짓고 이 속에서 산수지락(山水之樂)을 즐겼다. 『촌은집』 권3은 「침류대록(枕流臺錄)」으로 이는 그가 여러 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와 여러 학사가 쓴 서(序)ㆍ기(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숙영(任叔英)ㆍ차천로(車天輅)ㆍ이수광(李睟光)ㆍ신흠(申欽)ㆍ이달(李達)ㆍ이안눌(李安訥)ㆍ권필(權韠)ㆍ이정구(李廷龜)ㆍ이민구(李敏求) 등 여러 문인 학사의 수창시(酬唱詩)와 차운시(次韻詩)가 수록되어 있어 촌은의 교유와 시적 성취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의 시는 청절(淸絶)하고 충담(沖淡)하여 당풍(唐風)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거니와 김창협은 문집서(文集序)에서 초초(楚楚)한 것으로, 이경전(李慶全)은 문집인(文集引)에서 청고소창(淸高疏暢)하여 당인(唐人)의 격조를 잃지 않았다 하였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 방류 12에서 촌은에게 준 시에 대해 “오직 당나라 이백(李白)ㆍ두보(杜甫)를 추숭하고 송나라 진사도ㆍ황정견을 배우지 않았다네[惟追唐李杜, 不學宋陳黃]”라 하여 그의 시가 당풍에 기울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음은 유희경(劉希慶)의 「월계도중(月溪途中)」【『大東詩選』에는 詩題가 「月溪」로 되어있다】은 청절(淸絶)한 그의 시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山含雨氣水生煙 | 산에는 우기(雨氣) 서리고 물에는 안개 피어 나는데 |
靑草湖邊白鷺眠 | 푸른 풀 호수가에 백로가 졸고 있네. |
路入海棠花下轉 | 길 따라 해당화 아래로 구부러져 들어가니 |
滿枝香雪落揮鞭 | 왼 가지의 흰 꽃 향기 채찍 끝에 떨어지네. |
이 시는 촌은이 여러 유사(儒士)들과 함께 용문산(龍門山)에 놀러 갔을 때 유사(儒士)들이 마상(馬上)에서 촌은에게 시를 짓도록 하자 그 자리에서 지은 것이다.
봄날 호수가의 아침 물경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감정은 절제되고 있지만 물경에 대한 섬세하고 유려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신분의 소유자이지만, 이 시편에는 도무지 불평음(不平音)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한가롭고 여유에 차 있을 뿐이다.
『촌은집(村隱集)』 권1에 실려있는 일련(逸聯)의 시구도 촌은의 청절(淸絶)한 시풍을 그대로 보여준다. “죽엽조경로 송초야괘성(竹葉朝傾露, 松梢夜掛星)”, “석대태흔고 삼한우기청(石帶苔痕古, 山含雨氣靑)” 등은 시상(詩想)의 청절(淸絶)함과 함께 대우(對偶) 등 표현 기교도 매우 뛰어나다.
다음은 유희경(劉希慶)의 「구일배유문학등북록(九日陪柳文學登北麓)」이다.
松間開小酌 兩岸石苔斑 | 소나무 사이에서 작은 술자리 벌렸는데 양쪽 언덕엔 돌에 이끼가 아롱졌네. |
亂壑泉聲細 層城夕照寒 | 어지러운 골짜기에는 샘물 소리 가늘고 층층 성곽에는 저녁 노을 차가와라. |
秋陰生古木 雲影度空壇 | 가을 기운은 고목에서 생기고 구름 그림자는 빈 단을 지나간다. |
巖下崎嶇路 扶筇獨自還 | 바위 밑에 구불구불한 산길, 지팡이에 의지하여 홀로 돌아오네.. |
이 시는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선발되어 전한다. 구일(九日)날 유문학(柳文學)을 모시고 북록에 올라가서 읊조린 것이다. 한가롭고 충담(沖淡)한 시세계가 전편에 펼쳐져 있다.
이 시는 아마도 촌은이 삼각산(三角山) 아래의 침류대 부근에 은거할 때 유문학과 함께 중양절(重陽節)에 북록에 올라 안광(眼光)에 들어오는 가을 물경(物景)을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도 없이 있는 그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文學) 벼슬을 한 유씨(柳氏)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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