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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5. 경세가의 시편(정약용)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5. 경세가의 시편(정약용)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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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경세가(經世家)의 시편(詩篇)

 

 

실천적인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학자들은 물론, 사장(詞章)으로 이름을 얻은 문장가(文章家)들도 마땅히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하며 문장(文章)으로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정약용(丁若鏞)은 그가 제작한 탐진농가(耽津農歌)등을 통하여 농촌 백성들의 소박한 삶과 고난의 현실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으며, 홍석주(洪奭周)김매순(金邁淳)고문(古文) 문장가(文章家)의 체질에 걸맞게 화평전실(和平典實)한 시작(詩作)으로 경세(經世)의 일념(一念)을 잃지 않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38~1836 헌종2, 初字 歸農, 美鏞頌甫, 茶山三眉與猶堂俟菴)은 진주목사였던 재원(載遠)42녀 중 제 4남으로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은 그의 처남이며, 이러한 주변 환경은 그의 삶의 향방을 결정함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의지를 다지다 천주교도인 이벽(李檗)을 만나 서학(西學)을 배우게 된 것도 이승훈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경기도(京畿道) 암행어사(暗行御史)ㆍ병조참의(兵曹參議)ㆍ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 등을 역임하였으나, 정조(正祖)가 붕어(崩御)한 후, 신유교옥사건(辛酉敎獄事件)을 계기로 포항의 장기(長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 帛書事件)으로 전남의 강진(康津)에 각각 유배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19년여의 유배기간 동안 그는 학문에 전념하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머물던 때에도 저술생활로 삶을 마감하였다.

 

다산(茶山)은 문학가이기 전에 학자였다. 경세가로서의 명망이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일표이서(一表二書)로 알려진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등의 문제작을 비롯한 수많은 경적(經典) 석의(釋義)와 의학서(醫學書)ㆍ악학서(樂學書) 등의 저술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그의 학구적 관심은 정치, 경제, 역사, 지리, 철학, 문학, 의학, 교육, 군사,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다산(茶山)은 그의 문학세계에서 있어서도 전통적인 소인묵객(騷人墨客)과는 스스로 구별되는 특징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2,500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시편(詩篇)들을 제작하고 있지만, 시세계의 장처(長處)를 확인케 하는 것은, 그의 관풍(觀風) 의지가 무겁게 실려 있는 고조장편(古調長篇)이며 산문(散文)의 세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문장가들이 즐겨 제작한 서발(序跋)ㆍ기()ㆍ비지(碑誌) 형식의 문장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정조(正祖)의 문체순정(文體醇正)에 대하여 일찍이 패관소품(稗官小品)를 부정했던 다산(茶山)은 허구적인 산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지원(朴趾源)처럼 오늘날의 기준에 걸맞는 문학적 산문을 양산할 수 없었던 반면 실증성과 실용성을 겨냥한 수많은 산문들을 저술해내었다 할 것이다.

 

다산(茶山)은 일찍이 문장을 풀이나 나무의 꽃에 비유하였는데, 그의 논지에 따르면, “성의(誠意)과 정심(正心)으로 뿌리를 북돋우고, 독행(篤行)과 수신(修身)으로 줄기를 안정시키고, 경전(經典)과 예()를 연구함으로써 진액(津液)을 빨아 올리고, 널리 얻어 들어 예()에 노닒으로써 잎과 가지를 펴게 한다. 이에 깨달은 바를 쌓아 그것을 표현하면 문장[人之有文章 猶草木之有榮華耳 種樹之人 方其種之也 培其根安其幹已矣 旣而行其津液 旉其條葉 而榮華於是乎發焉 榮華不可以襲取之也 誠意正心以培其根 篤行修身以安其幹 窮經研禮以行其津液 博聞游藝以旉其條葉 於是類其所覺 以之爲蓄 宣其所蓄 以之爲文 則人之見之者 見以爲文章 斯之謂文章 文章不可以襲取之也 爲陽德人邊知意贈言)]”이라 천명하고 있으며

 

시는 힘써 할 일이 아니다[詩非要務. 示兩兒]”,

 

나는 본성이 시율(詩律)을 좋아하지 않는다[余性不喜詩律. 寄二兒]”라 하여 시 자체를 중요한 일거리로 삼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산(茶山)에게 인식되는 문학이란 불가(佛家)의 치심법(治心法)은 치심(治心)을 사업(事業)으로 삼지만 우리 유가(儒家)의 치심법(治心法)은 사업(事業)을 치심(治心)으로 삼는다[佛氏治心之法, 以治心爲事業, 而吾家治心之法, 以事業爲治心. 大學公議].”라 하여 실천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을 띤다. 인성도야(人性陶冶)는 말할 나위도 없이 대사회적(對社會的)인 효용까지 갖추어야 참다운 문학이 된다고 생각한 다산(茶山)의 신념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시속(時俗)에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 非詩也, 不傷時憤俗, 非詩也. 示兩兒]”라하여 공리적인 처지를 견지하고 있다.

 

다산시(茶山詩)의 실상은 그가 일찍이 나는 조선인이므로 조선시를 즐겨 짓는다[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老人一快事]”라 읊었던 그대로 제재면에서는 시인의 주관보다는 대상을 존중하여 조선시대의 시속을 자주 다루었고, 표현면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전고 및 토속적인 방언을 사용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는 곧 시경시(詩經詩)에 내포된 채시관풍(採詩觀風)과 풍교(風敎)의 정신을 본받고 있는 것에서 그 소유래(所由來)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풍교의지(風敎意志)가 그의 사회비판시(社會批判詩) 전반(全般)과 우언시(寓言詩)의 세계에 그대로 잇닿아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시인으로서의 다산(茶山)은 그 평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대동시선에 선발된 그의 작품으로는 적중송죽리김학사리교귀경(謫中送竹里金學士履喬歸京), 능허대(凌虛臺), 우중양기(雨中兩妓)(이상 七律), 강천반청도(江天半晴圖), 적성촌사(積城村舍)(이상 七古)가 있지만, 여기서는 경세가(經世家)와 시인(詩人)의 면모를 함께 찾아볼 수 있는 탐진농가(耽津農歌)넷째 수를 보인다.

 

穮蔉從來不用鋤 김매고 북돋우기 호미를 쓰지 않고
手搴稂莠亦須除 잡초도 두 손으로 잠깐동안 뽑아내네.
那將赤脚蜞鍼血 어떻게 맨다리에 거머리가 빨아낸 피로
添繪銀臺遞奏書 그림을 그려서 은대에 보낼까.

 

탐진농가(耽津農歌)정약용(丁若鏞)1801신유교난(辛酉敎難)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작품으로,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탐진농가(耽津農歌)탐진촌요(耽津村謠), 탐진농가(耽津農歌), 탐진어가(耽津漁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탐진농가(耽津農歌)10원래 12수였는데 10수만 남아 전함1804년에 지었다고 한다. 농촌 백성의 소박한 생활상이나 고난에 찬 삶을 진솔하게 그리기 위하여 제명(題名)악부(樂府)’라 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시에서 맨 다리로 논에서 일을 하다가 거머리에게 물어 뜯긴 피로 그림을 그려 은대(銀臺)에 상주문(上奏文)을 보낸다고 한 바깥짝의 제조 솜씨는 어려운 농촌 사정을 핍진(逼眞)하게 드러내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43 또는 223의 조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칠언시(七言詩)의 구성원리에서 보면 다듬어진 것이 되지 못한다. 물론 이는 풍인주(諷人主)를 위하여 당대 조선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조선시(朝鮮詩)의 변모 양상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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