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고구려의 역할
중국발 통신
다양한 미스터리와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2세기를 마칠 즈음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의 왕조들은 그럭저럭 나라꼴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왕위 세습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관제를 비롯한 초보적인 제도들도 생겨났으니 이제부터는 버젓한 왕국이라 해도 별 하자는 없을 듯하다(거꾸로 말하면 그 전까지는 왕국이라고 부르기에 미비한 점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이 나라들은 서로 이리저리 얽히며 올망졸망 살아가면서 아주 조금씩 발전해 갔으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한반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반도의 서쪽에는 이곳보다 훨씬 크고 일찍이 이곳에 문명의 빛을 전해주었던 중국 세계가 있다. 3세기부터 중국 대륙에 몰아친 격변의 회오리는 한반도 역사에 또 한 차례 격변의 계기를 제공한다.
사실 거함(巨艦) 한나라 호는 이미 전한 말기부터 좌초하고 있었다. 왕망(王莽)의 신나라를 타도하고 후한이 들어서면서 간신히 한나라 황실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전한 시대에 노출된 문제점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으므로 제국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게다가 전한 시대에는 외척과 환관이 중앙정치를 쥐고 휘두른 게 문제였지만 후한 시대에는 지방정치까지도 심하게 삐걱거렸다. 조정의 죄는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지방 호족들이 자기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긴, 후한의 문을 연 광무제(光武帝) 자신도 지방 호족 출신이었으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니었다【광무제는 한나라(전한)를 건국한 한 고조 유방(劉邦)의 9대손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유방은 원래 지방의 보잘것없는 하급 관리 출신으로,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朱元璋)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고속 승진을 한 인물이다(다른 건국자들은 대부분 제후의 신분이었다). 그런 처지에 전통에 빛나는 제후였던 항우의 초나라를 물리치고 새 왕조를 열었으니 초기부터 권력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군국제(郡國制)를 시행하면서 지방의 수령들과 닥치는 대로 통혼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성인 유(劉)를 마구잡이로 하사했다. 그 덕분에 유씨는 아주 흔한 성이 되었으니 설사 광무제가 유방의 후손인 게 사실이라 해도 그리 특기할 만한 일은 아니다. 후한이 멸망하고 난 뒤 『삼국지』의 시대에 촉한의 유비가 황실의 성을 주장한 것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건국 이념이 살아 있던 얼마 동안은 그런 대로 제국의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약발이 사라지자마자 후한은 곧 예정된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정치가 무너진다 해도 나라 전체가 금세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의 폐해가 일반 백성들의 삶에 전달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잠시 번영과 안정이 찾아 왔던 초기 50년 이후에도 후한이 100년이 넘도록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 크다. 그러나 외척과 환관들이 중앙정치를 망가뜨리고 호족들이 지방정치를 말아먹은 데 따르는 폐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사회적 피라미드의 맨밑에 있는 농민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일어난 게 ‘황건(黃巾)의 난’이다. 184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노란 두건을 두른 농민들의 반란이 들끓자 이미 전국을 통어할 힘을 잃은 중앙정부 대신 호족들이 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호족들이 바로 소설 『삼국지』의 주인공들이 되는 위(魏)의 조조, 오(吳)의 손권, 촉한(蜀漢)의 유비다.
위, 오, 촉은 모두 한나라의 제후국들이다. 그러나 황실이 무너지자 그들은 각기 황실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중국 대륙을 삼분한다. 다시 분열의 대륙풍이 불기 시작한다. 천 년 전 주(周)의 동천(東遷) 이후 전개되었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어 중국의 2차 분열기다. 1차 분열기에 제후국들은 주나라 왕실을 예의상으로만 섬기면서 실은 자기들끼리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2차 분열기의 제후들은 아예 한나라 황실의 문을 닫아걸고 노골적으로 패권 다툼을 벌인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에게서 제위를 빼앗으면서 한나라는 전한까지 합쳐 422년의 사직을 마쳤다. 천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제후들은 더 이상 제후의 껍데기를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 제후는 왕이 되고 제후국은 왕국이 된다. 중국은 명실상부한 분열을 맞았다.
분열기의 서두는 삼국시대가 장식한다. 『삼국지』로 잘 알려졌듯이 삼국은 당대의 실력자인 위나라, 적통(嫡統)의 상속자인 촉나라, 전통의 계승자인 오나라로 잘 어울렸으나 결국은 실력으로 판가름이 났다. 당대에 달성되지 못한 조조의 야망은 아들이 제위에 오름으로써 성공한 듯했으나 곧이어 265년에 사마씨에게로 권력이 넘어가서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를 닫고 진(晉)을 건국함으로써 중국의 삼국시대는 짧게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오랜 분열의 서곡에 불과하다. 이후 중국은 589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400년 가까이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를 맞게 되며, 더욱이 5세기부터는 화북과 강남에 각기 다른 왕조들이 병존하는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사라진 격변의 시기, 이 중심 부재의 시대를 맞아 한반도 역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생겨난다.
▲ 활에 능한 민족 고구려가 한나라와 위나라 등 중국의 대국들에 맞설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활에 있다. 활을 잘 쏘는 건국자를 둔 탓인지, 일찍부터 동이(東夷,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닉네임을 얻은 탓인지 모르지만 고구려인들은 활에 능했다. 그림은 무용총(舞踊塚)에서 발견된 수렵도이다.
대륙 국가의 성격
고구려는 특이한 나라다. 건국시조로 보나, 문명의 성격으로 보나 중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한반도 역사에 속한다고 해야겠지만 백제나 신라만큼 토박이 냄새는 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 지리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 랴오둥 동부에 두루 걸치고 있으므로 크게 보면 중국과 한반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런 만큼 고구려는 애초부터 중국과 한반도 양쪽의 역사를 이어주면서도 단절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해야 할 운명이었다【오늘날 우리는 고구려를 한반도 역사의 일부로 치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중국사에 포함시킨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화가 나겠지만 실상 초기의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낙랑이 아직 멸망하지 않은 이상 중국에서 볼 때 고구려는 엄연히 한나라의 강역 안에 들어 있는 국가이며, 중국의 2차 분열기에도 초기에는 중국과의 접촉이 많았다. 더구나 당시 중국은 중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민족의식이 분명히 존재한 데 반해 한반도 왕조들은 단일 민족의식이 없었으므로 사실 그때까지의 고구려는 중국사(넓게 봐서 중국 변방의 역사)에 포함되는 게 더 타당하다 할 것이다. 고구려가 명실상부한 한반도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은 한반도 진출에 주력하게 되는 5세기 이후다】. 이를테면 중국의 선진 문명을 수입하는 측면에서는 한반도의 리더이면서도 동시에 중국의 동방 진출을 방어하는 측면에서는 한반도의 방패라고 할까?
그런 이중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의 정세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앞서 보았듯이 후한 초기에 해당하는 대무신왕(大武神王) 시절에 낙랑을 공격한 것이라든가, 태조왕(太祖王) 때 랴오둥을 공략한 것은 한나라가 약화되었다는 정세분석에서 나온 시나리오였다. 이후 반도 남쪽에서 백제와 신라, 가야가 서로 아웅다웅 다툴 무렵에도 고구려는 늘 시선을 대륙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아직까지는 낙랑이 고구려와 한반도 중남부를 구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윽고 후한 말기에 접어들어 중국이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면서부터 고구려는 한층 긴장의 고삐를 쥔다. 중국의 위기는 곧 고구려의 기회다. 하지만 그 기회를 현실화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고구려는 후한이 말기적 증상을 보이는 시기를 틈타 독자적 기반을 구축한 랴오둥의 공손씨 세력과 치열한 경합을 벌여야 했다. 산상왕이 형 발기의 공격에 동생 계수를 보내 가까스로 막아낸 것도 그 과정의 하나다. 아직도 고구려는 영토 확장이 아니라 생존 확보의 차원에서 랴오둥과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마침내 후한마저 멸망하고 중국에 삼국시대가 시작되자 고구려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기회에 오랜 숙적인 랴오둥을 정벌하지 못하면 앞으로 영원히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중국의 어지러운 정세를 관망하던 고구려에게 드디어 행동 노선을 정할 계기가 찾아온다. 새로 정착된 부자 계승의 첫 수혜자인 동천왕(東川王)에게 234년 위나라에서 화친을 맺지는 뜻으로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 했던가? 멀리 있는 적과 화친하고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한다는 방책은 진시황제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위나라와 랴오둥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고구려로서는 위나라가 내미는 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실 당시 위나라는 오와 촉이 서로 동맹을 맺고 거세게 도전해 오고 있는 상황을 맞고 있었으므로 후방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 판에 랴오둥 태수 공손연(公孫淵)이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며 외교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으니 분통이 터질 따름이다(랴오둥은 후한 말부터 3대째 걸쳐 공손씨 가문이 독립 왕조처럼 지배하고 있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따라서 위나라로서는 랴오둥과 해묵은 숙제를 풀어야 하는 고구려와 어떻게든 친해둘 필요가 있었다. 물론 고구려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므로 두 나라는 자연히 이해관계가 통한다. 과연 위나라의 기대에 걸맞게, 교활하게 저울질만 일삼는 공손연과는 달리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은 2년 뒤에 파견된 오나라의 사신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위나라에 보내 돈독한 신용을 과시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공통의 이해관계를 토대로 하는 동맹은 그 이해관계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제갈량이 병사하고 촉나라의 힘이 현저히 떨어지자 대륙의 상황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게 된 위나라는 차츰 시선을 후방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곧 현실화될 삼국통일에 대한 사전 준비다. 그러던 차에 위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연나라 왕을 자칭한 공손연의 돌출 행동은 결국 자신의 명을 앞당기는 만용이 되고 말았다. 238년에 위나라는 4만의 대군으로 랴오둥을 공략하여 3대 40여 년에 걸쳐 랴오둥의 패자로 군림했던 공손씨 세력을 소탕했다.
이제 고구려는 새로운 상황을 맞았으니 한시바삐 시나리오를 바꿔야만 한다. 그런데 웬일일까? 동천왕(東川王)은 아직도 위나라와의 동맹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랴오둥 정복 전쟁에 1천 명의 병력으로 지원군을 보내 체면치레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판단미스였다. 고구려는 랴오둥의 주인이 바뀐 것을 환영해 마지 않았으나 그것은 늑대가 물러간 숲에 호랑이가 나타난 격이었다. 공동의 골칫거리였던 공손씨가 몰락했다는 똑같은 사건을 두고 고구려와 위나라 양측의 견해는 정반대였다. 고구려는 애초부터 맺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꺼이 위나라의 핵우산 밑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위 나라는 고구려를 우산 밑에 잡아두기보다 아예 제거할 심산이었다. 위나라에게 고구려는 처음부터 랴오둥과 같은 골칫거리일 뿐이었으니까.
오랜만에 적법한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탓일까? 동천왕(東川王)은 늘 중국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민감하게 반응했던 선배들에 비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242년 랴오둥의 일부라도 손에 넣기 위해 먼저 군사를 움직인 것도 그런 태도에서 나온 전략이다. 그러나 그는 곧 전략적 판단미스의 대가를 호되게 치른다.
정복지 랴오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위나라는 드디어 마지막 우환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선봉장은 랴오둥 정벌 때에도 큰 전공을 세웠던 유주(지금의 베이징) 자사(刺史, 태수보다 한 급 아래의 직책) 관구검(毌丘儉), 244년에 중앙정부의 명을 받아 그는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그제야 동천왕(東川王)은 사태를 알아차리고 2만의 군사를 모아 대응하는데, 여기서도 그의 낙관적 자세는 화를 빚는다.
일단 오프닝은 좋았다. 위나라가 본군 대신 유주군을 파견한 것이나 랴오둥 정벌군의 1/4밖에 안 되는 병력을 파견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위나라는 아마도 랴오둥에 비해 고구려의 실력을 낮게 평가한 듯하다. 병력에서 우위에 있었던 고구려는 두 차례 맞붙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당시 동천왕은 ‘위의 대군이 우리의 소군만 못하다. 관구검은 명장이지만 지금 그의 목숨은 우리 손 안에 있다’며 호기를 부렸는데, 그로서는 거기에 만족하는 편이 나았다. 자신감에 찬 동천왕은 직접 기병대를 거느리고 적의 명맥을 끊으러 갔다가 사각형의 방진으로 만반의 대비를 갖춘 관구검의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바둑에서나 전쟁에서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이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 급기야 동천왕(東川王)은 수도인 환도성마저 적에게 내주고 지금의 강원도까지 달아나기에 이르렀다.
매국노가 있으면 애국자도 있는 게 이치다. 아버지 산상왕(山上王)은 최초의 매국노인 발기에게 호되게 시달렸지만 아들 동천왕은 최초의 애국자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추격대가 다가오자 병사들마저 왕을 버리고 떠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밀우(密友)라는 병사가 결사대를 모아 항전하는 동안 동천왕은 간신히 몸을 피해 달아났다. 비록 한때의 만용으로 일을 그르쳤지만 동천왕은 역시 작지 않은 그릇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미처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유옥구(劉屋句)를 시켜 밀우를 구해오게 한다. 전황은 여전히 열세지만 이 사건으로 사기는 상당히 회복되었다. 또 한 명의 애국자가 나와준다면 재역전의 계기도 잡을 수 있을 터, 이때 유유(紐由)가 세 번째 구국의 영웅으로 나섰다. 그는 위나라 추격대의 진영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하다가 적장을 찔러 죽이고 함께 죽으니 조선시대의 열혈 기생 논개의 한참 선배다. 우두머리를 잃고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고구려군은 마지막 총공세를 전개한다. 결국 위나라 군은 서쪽의 낙랑으로 도피했다가 북쪽의 랴오둥으로 물러갔다. 동천왕(東川王)은 세 애국자 밀우, 유유, 유옥구에게 식읍을 내리고 벼슬을 주어 포상했다.
▲ 만용의 대가 역시 위나라는 강했다. 동천왕은 위나라 본군이 오지 않은 것에 적을 얕잡아봤으나 그 대가는 도성마저 적의 손에 빼앗길 만큼 호된 것이었다. 사진은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제압한 뒤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기공비의 일부인데, 지금은 사방 한 뼘 정도의 조각만 전해진다. 오른쪽 하단에 토구려(討句麗, 고구려를 토벌함)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 전란으로 이제 중국과 고구려가 장차 어떤 관계에 놓이게 될지는 분명해졌다. 고구려는 건국 이래 내내 랴오둥 세력에 시달렸지만 사실 정작으로 큰 대적은 그 서쪽 너머 중국의 본체였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름은 달라도 중국의 한족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잠재적 동맹 세력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게 확실해졌으므로 고구려로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저항해야 할 입장이었다. 한편 중국은 중국대로 고구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정립해야 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아예 멸망시켜 영토화하고 싶지만 한 차례의 접전에서 확인되었듯이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고구려는 랴오둥보다 멀고 랴오둥보다 강하다. 일찍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이 무주공산이었을 때 한나라는 4군을 설치해서 지배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지배 방식이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최소한 고구려가 중국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상황만은 피해야 한다. 고구려는 중국을 이길 수 없고 중국은 고구려를 먹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는 사자와 고슴도치 같은 기묘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동북쪽 변방을 대하는 중국 역대 제국의 전통적인 태도는 이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중국은 세 나라가 정립하면서 앞다투어 영토 확장에 나선 덕분에 강역이 크게 팽창했다. 오나라는 월남에 이르는 지역을, 촉나라는 윈난과 쓰촨 일대를 손에 넣었으며, 화북을 장악한 위나라는 북방과 동북방을 개척했다. 랴오둥 정벌과 고구려 침략은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그러나 만주까지 손에 넣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만주를 복속과 제어의 대상으로 볼 뿐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게 된다. 따라서 만주에 관해서는 늘 모호한 태도일 수밖에 없다. 이 ‘만주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만주 출신의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하는 17세기의 일이다】.
어쨌든 고구려로서는 대무신왕(大武神王) 시절부터 은근히 품어왔던 랴오둥 진출의 꿈을 일단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느 방면으로 향해야 할까? 그 답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고구려의 세 애국자인 밀우, 유옥구, 유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활약보다 그들의 출신지다. 『삼국사기』에는 그들이 동부와 하부 사람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 동부와 하부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지만 압록강 중류에 도읍을 정하고 있는 고구려의 관점에서 동부와 하부라면 어딘지 알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동천왕(東川王)이 강원도까지 피신해 왔을 시점에 그들이 나섰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 확실해진다. 그들은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옥저 사람들, 즉 오늘날 함경남도와 강원도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인 게 분명하다. 평안남도가 낙랑의 지역이었던 탓에 동천왕은 곧장 남하하지 못하고 남동쪽으로 도망친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 애국자들을 얻은 것이다. 측근 장수와 병사들이 왕을 버리고 떠난 뒤에도 왕의 곁에서 끝까지 지켜준 그들이었으니 동천왕이 생각하고 있는 향후 진출 방향이 어디일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바로 남쪽의 한반도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고, 대내적으로는 남부에 새로운 지지 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환도성마저 불타 수도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부터 고구려는 당연히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 남쪽이라면 바로 낙랑이 있는 곳, 동천왕(東川王)은 평양성을 새로 쌓고 도읍을 옮긴 뒤 낙랑을 바라본다【이 평양은 오늘날의 평양이 아니라 압록강에서 약간 남하한 곳으로 추측된다. 당시 평양이라는 말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벌판’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였다. 평양은 유경(柳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여기서 柳는 곧 버드나무, 그러니까 벌판을 뜻하는 ‘벌들’에서 ‘ㄹ’이 탈락한 이름이다】.
▲ 황성 옛터? 관구검(毌丘儉)의 침략으로 고구려는 또 다시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야 했다. 당시에는 지금의 지리 구분과 달랐겠지만,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수도는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다. 그 덕분에 사진에 보이는 옛 도성의 연못은 폐허로 변한 채 덩그라니 터만 남게 되었다. 환도성 안에 있던 이 연못은 말에게 물을 먹이는 용도였다.
남으로 기수를 돌려라
일단 방침은 정해졌지만 고구려의 남행은 즉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건국 이후 내내 험난한 생존과 팽창의 과정을 거쳐왔음에도 고구려는 아직 지리적 여건에 따른 태생적인 불안정을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고구려는 중천왕(中川王, 재위 248~270) 때인 259년에 아직까지도 정복의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위나라의 테스트를 한 번 더 치러내야 했다. 게다가 권력의 불안도 여전히 고구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부자 세습이 정착된 지가 꽤 되었지만 아직도 고구려의 왕위계승은 매끄럽지가 못했던 것이다.
이럴 때 맏아들 계승이 몇 대쯤 계속해서 착실히 진행된다면 아마 그 불안은 제거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운도 따라주지 않아 맏아들 승계는 동천왕(東川王)과 중천왕의 겨우 2대만 이어졌을 뿐 다음 서천왕(西川王, 재위 270~292)은 중천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는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여기에도 아마 모종의 진통이 있었음직하다. 그 탓인지 서천왕은 만주의 한 부족인 숙신(肅愼)이 침입해 온 것을 계기로 오히려 그들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평천하(平天下)의 치적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치국(治國)과 제가(齊家)에서는 실패한다. 두 동생이 왕권에 도전하여 역모를 꾸민 것이다. 다시 골육상잔인가? 서천왕은 급히 두 동생을 잡아죽이는 극약 처방으로 사태를 진정시키긴 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왕위가 형제간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결국 안으로 곪던 문제는 다음 왕인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300) 대에 이르러 쿠데타로 터진다.
봉상왕은 즉위하자마자 숙신 정벌의 전공으로 전국민적 인기를 모으고 있던 삼촌(서천왕의 동생) 달가를 살해해서 일찍부터 권력불안증후군을 보인다. 비록 그는 불과 8년간 재위했으면서도 나중에 고구려 역사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지게 되지만, 형제 계승의 가능성이 없었다면 어찌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게다가 곧이어 자기 동생 돌고마저 음모를 꾸며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을까? 그러나 대외의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격변기에 여전히 내부 불안정에 시달린다면 고구려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급기야 북서쪽에서는 신흥 강호로 등장한 선비(鮮卑)가 고구려를 침공해 온다【여기서 대륙의 정세를 한 번 훑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사마씨의 진나라가 삼국시대를 끝내고 잠시 통일 왕조로 군림했으나 이미 시대의 화두는 통일이 아니라 분열이었다. 특히 3세기 후반부터 화북 일대는 이른바 5호(‘다섯 오랑캐’라는 뜻인데, 물론 후대의 한족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다)로 불리는 북방 민족들이 주름 잡게 되는데, 이들 중 하나가 선비족이다. 선비족의 근거지는 오늘날 몽골과 만주의 접경 지대였으므로 5호 중의 어느 부족보다도 고구려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봉상왕 시절에 선비족은 특히 발언권이 셀 만도 했다. 진나라에서 벌어진 팔왕의 난(291 ~306)에 끼여들면서 진나라 황실의 권력 투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장이었으니 그들이 동방의 소국인 고구려를 얕보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고구려를 침공한 선비 군대가 주력군이었다면 고구려가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중국의 화북은 그 다섯 오랑캐가 열여섯 개의 나라를 세우고 각축을 벌이는 5호16국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명장 고노자(高奴子)의 선방으로 간신히 물리쳤으나 봉상왕은 힘이 부치는 것을 깨닫고 창조리(倉助利)를 국상으로 임명하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국에 기여한 공로가 되었다(고노자를 왕에게 천거한 사람도 창조리였다).
거듭되는 외침에다 흉년과 기근,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여러 차례 궁궐을 수리하고 증축하는 데 여념이 없다. 좋은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의 의도는 어떻게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이므로 무엇보다 궁궐이 화려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가 직접 한 말이니까. 그런 점에서 그가 취한 입장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된 경복궁을 300년이나 지나서, 게다가 심각한 인플레까지 감수하면서도 굳이 중건하려 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의도와 맥이 통한다. 사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무엇보다 국왕을 중심으로 국력을 결집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으며, 궁궐의 증축은 그것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측근들의 동의마저 얻지 못하는 정책이라면 설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실패하기 십상이다.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한 사람이 최익현이라면 봉상왕에게 반대한 사람은 창조리였다. 그러나 줄기차게 상소만을 거듭한 최익현과 달리 창조리는 왕을 갈아치우는 쿠데타를 획책한다.
그가 낙점한 새 왕은 바로 봉상왕에게 죽은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었다. 비정한 큰아버지의 눈을 피해 머슴과 소금장수로 은신해 온 을불은 창조리의 비밀 공작으로 팔자에도 없었던 고구려의 왕위에 오른다(최소한 아버지나 형이 왕이어야만 왕위를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바람직스런 현상은 아니겠지만 150년 전 명림답부(明臨答夫)의 경우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귀족들의 쿠데타가 있을 때마다 도약의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과연 귀족의 쿠데타로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이 된 소금장수 을불은 나라의 대내외적 우환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우선 조카의 즉위를 본 봉상왕이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장차 권력 분쟁이 재연될 소지가 사라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외 정책이다.
중국의 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했던 고구려 역대 왕들의 특징은 한동안 대가 끊겼다가 미천왕에 이르러 다시 부활한다. 그가 바라보는 중국은 물론 혼돈의 도가니다. 팔왕의 난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그러니까 진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할 통일 제국이 못 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무렵 미천왕은 고구려에 기회가 왔음을 감지한다. 예전처럼 랴오둥에 미련을 두지는 않는다. 이제 전선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형성되어야 한다. 특히 모국인 한나라가 멸망한 지 80년이 넘었는데도 한군의 하나가, 더구나 중국과 접경하지도 않은 중국의 군현이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은 큰 모순이다. 미천왕의 눈앞에는 일찍이 동천왕(東川王)이 품었던 따뜻한 남쪽 나라의 꿈이 어른거린다.
목표인 낙랑을 치기 전에 미천왕(美川王)은 몸을 풀 겸해서 랴오둥의 현도(지금의 푸순)를 공략하고 서안평을 손에 넣는다. 예상대로 손쉬운 승리다. 곧이어 313년에 드디어 그는 대망의 낙랑 정벌에 성공한다. 자명고가 찢어진 지 무려 3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으니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로써 고구려와 한반도의 역사는 외세를 완전히 물리침으로써 신기원을 맞았다. 이듬해 미천왕은 낙랑 남쪽에 남아 있던 대방(帶方)마저 정복해서 백제와 접경하게 되니, 바야흐로 삼국시대의 시작이다.
▲ 중국의 지방문화재 우리는 고구려를 한반도의 한 왕조로 간주하지만,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고구려의 옛 유적은 그저 하나의 지방문화재 일 뿐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지안에 사는 중국인들은 문화재 관리 시설조차 없는 환도성의 고분들 사이를 누비며 자전거를 타고 있다. 과거의 역사와 오늘의 관점을 어떻게 연관지어야 통시대적인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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