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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

건방진방랑자 2022. 2. 2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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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

 

 

복음서 저작의 물리적 사실들: 종이

 

 

복음서에 관하여 우리가 얘기를 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기초적 사실들, 우리가 오늘날 우리 자신의 일상체험의 구조 때문에 매우 안일하게 무시해버릴 수 있는 사실들, 복음서가 쓰여진 당대의 초대교회의 일상적 삶의 문화적 쇄사(瑣事)와 관련된 사실들에 관하여 응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당시에는 인쇄라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의 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개념의 독서라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책방에 가서 책을 사서 본다든가, 교회에 가면 의자 앞에 신도들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성경이 꽂혀있다든가 이런 진풍경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당대 초대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당연히 문맹이었다. 마가라는 어떤 사람이 복음서를 썼다고 하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당시에는 종이(paper)라는 것이 없었다. 닥나무를 원료로 하는 종이의 발명은 오직 중국역사의 사건이었다. 후한 명제(明帝) 때의 환관 채륜(蔡倫, ?~AD 107)이 채후지(蔡侯紙)라는 종이를 만든 것은 AD 105년이다. 그것이 세계종이 역사의 기원이다. 채륜은 매우 천재적인 인물이었는데 그렇게 위대한 발명을 해놓고도 2년 후에 자살하고 만다. 종이가 중앙아시아에 온 것이 751, 바그다드에 온 것이 793, 유럽에 페이퍼밀(종이공장)이 세워진 것은 14세기였다. 그리고 그 생산공정이 최초로 기계화된 것은 1798년이었다.

 

 

 

 

양피지와 파피루스

 

 

마가시대에는 종이에 해당되는 것이 두 가지 밖에 없었다. 하나는 양피지(parchment)라는 것인데 양가죽을 무두질하여 늘려서, 쎄무가죽처럼 야들야들하게 얇게 만든 것이다. 양가죽만 쓰는 것은 아니고 염소나 소가죽도 쓸 수 있다. 소가죽은 길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새끼가죽일수록 고급품이 나오는데 그것을 벨룸(vellum)이라고 한다. 이 양피지는 우리나라 족자처럼 양쪽에 나무를 껴서 두루루 만다. 따라서 한 면에만 쓴다. 앞뒤 양면을 다 쓰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양사로써 한 두루마리 즉 권()의 의미를 지니는 볼룸(volume)이라는 말을 쓴다. 한 볼룸은 한 롤(roll)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양피지 이외로는 파피루스(papyrus)라는 소재가 있다. 이것은 나일강 델타지역에서 잘 자라는 키페루스 파피루스(Cyperus papyrus)라는, 4.6m 가량의 높이까지 자라는 풀의 줄기를 스트립으로 쪼개서 합하여 눌러 말려서 얇고 부드러운 표면을 형성시키는데, 이것은 양피지처럼 두루루 말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책모양으로 바인딩하는데 그것을 코우덱스(codex)라고 한다. 이 코우덱스는 양피지와는 달리 앞뒤 면을 다 쓸 수 있고 꼭 요즈음 성경책처럼 껍데기는 가죽으로 포장해서 싼다. 오늘날 성경의 모습이 아주 옛모습의 심층구조를 보존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에 해당되는 말로서 바이블’(Bible)이라는 말을 쓰고있는데 그것의 고어는 비블로스’(byblos)이다. 그런데 이 비블로스는 단순히 파피루스의 순화된 발음(pb)일 뿐이다. 비블로스(Byblos)는 파피루스를 수출한 페니키아의 도시 이름이기도 하다(현재 레바논의 주바일 Jubayl, 수도 베이루트의 북쪽). 이 도시 이름에서 성경 즉 바이블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우리말의 경()벼리라는 뜻이다.

 

 

 파피루스 문서를 제본하여 가죽으로 싼 코우덱스. 나그 함마디 라이브러리

 

 

그런데 이 양피지가 되었든 파피루스가 되었든 이 재료는 구하기가 힘들고 비싼 물건이라서 아무나 쉽게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자료 위에다 동ㆍ식물, 광물에서 추출한 염료와 수액을 섞어 만든 잉크를 갈대펜으로 찍어 쓴다. 영화에서 보는 깃털펜(quill pen)7세기에나 등장한 것이다. 강철펜은 19세기 중엽에나 발명되었으니 그 전에 무엇을 쓴다고 하는 것은 매우 주의를 요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유대인들은 파피루스보다는 양피지를 더 즐겨 썼다. 양피지가 원래 그들의 율법서들의 전통이었다. 양피지의 원어인 파치먼트(parchment)라는 말은 에베소 위에 있는 페르가뭄(Pergamum, 현재 터키 베르가마, Bergama)이라는 희랍 도시에서 양피지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아마도 마가는 복음서를 양피지 위에 썼을 것이다. 양피지가 고급재료이기 때문에 당연히 공간을 아껴야 한다. 그래서 매우 깨알만한 글씨로 작게 쓰는데 물론 당시에는 장ㆍ절의 구분이나 일체 띄어쓰기 같은 것이 없었다. 매우 시각적으로 불편한 것이었다. 즉 기록을 위한 것이지 일반인의 독서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북의 달인, 흑우(黑雨) 김대환이 좁쌀 하나에 반야심경을 다 새겨넣어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하는데, 유대인들도 양피지에 깨알같이 많은 글씨를 써서 그것을 말아 부적으로 사용하곤 했다.

 

 

 흑우 김대환의 유품인 쌀 한톨에 새긴 반야심경 283자

 

 

시각적 문헌과 청각적 문헌

 

 

내가 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가? 우리는 너무도 사실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성경을 운운한다면 우리는 우선 성경이라는 아주 객관적인 문헌에 관한 사실들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한 사실을 토대로 초대교회의 역사적 정황을 정확하게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복음이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의 매우 위대한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사실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것은 때때로 오늘날의 우리의 체험 속에서 왜곡된 주관적 인간의 언사에 불과할 수가 있다. 성령을 주장하는 정통파들일수록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는 오류의 폐해를 주책없이 전파하는 경향이 심하다.

 

내가 말하려는 복음서에 관한 중요한 사실은, 복음서는 시각적 문헌이 아니라 청각적 문헌이라는 것이다. 요즈음처럼 사람들의 독서를 위하여 기록된 책, 즉 비블로스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양피지 위에 특수한 목적을 위해 쓰여진 수고(手稿: 신학계에서는 ‘MSS’라는 약자를 쓴다)일 뿐이다. 내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초대교회의 정황을 말해주는 한 성서의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 5:27~28)

 

 

 

 

케릭스

 

 

바울이 데살로니카의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그냥 편지 하나를 보냈다는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편지는 보통의 교우들은 읽을 능력이 없다. 그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반드시 교회의 회중들이 모여있는 공적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읽은 것이다. 이 낭독(Public Reading)은 초대교회의 가장 보편적 문화였다. 이 편지의 경우에는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읽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읽는 사람을 구해서 읽어 들리게 하라는 부탁을 첨가한 것이다. ‘이 편지를 낭송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게 하라라는 부탁을 자기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너희들에게 명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그리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것이다.

 

편지의 낭송자를 전령이라고 하는데 이 전령은 희랍의 헤르메스(Hermes)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며, 성서시대에는 그 전령을 케릭스(keryx) 또는 히에로케릭스(hierokeryx)라고 불렀다. 케릭스는 고대헬라로부터 고상한 지위가 있었으며, 홀을 가지고 다녔으며, 현명과 지혜의 상징이었다.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아서 알 수 없는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특이한 지혜의 소유자로 인식되었다. 케릭스의 제1의 요건이 바로 멀리 퍼져나가고 낭랑한 목소리의 소유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림픽경기 때도 그 한 편에서는 이 전령들의 목소리의 발성의 정확성과 강도를 측정하는 콘테스트가 열리곤 했던 것이다. 이 케릭스들이 선포하는 내용이 바로 케리그마(kerygma, κρυγμα)가 되는 것이다. 바울의 편지들은 바로 초대 교회에서 이러한 케리그마의 잔치라는 기능을 지닌 특수한 문서였다.

 

 

 

 

낭송문화 속의 교회

 

 

교회라는 곳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초대교회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러한 낭송문화였다. 예수의 말씀이라고 전승되어온 파편이나 다양한 목격담, 그리고 사도들의 편지가 케릭스에 의하여 낭송되는 것이 그들의 예배였다. 낭송문화는 반드시 운이 들어가고 인토네이션의 리듬이 들어가고 때로는 노래가 삽입되기도 한다. 그것은 거의 우리나라의 판소리라는 장르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케릭스는 우리나라 소리꾼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단지 조선조말기의 소리꾼은 신분적으로 광대신분이었기에 천시된 반면에, 초대교회의 전령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으로서 숭상되었다는 것만 다르다.

 

전령들의 낭송이 끝나면 성찬이 베풀어진다. 즉 빵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이다. 성찬이라는 것도 요즈음처럼 쬐끔쬐끔 상징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먹고 마시는 것이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다. 예수에게는 금욕주의라는 것이 없었다. 예수는 잘 먹고 잘 마신 사람이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병든 자를 고치고 일을 하고 자유롭게 행동하여 회당장의 분노를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13:10~17: 나의 요한복음강해233~7).

 

바로 이러한 음악성 있는 메시지와 음식문화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 때문에 초기교회에는 사람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매우 새로운 문화였다. 디모데라는 사람도 일차적으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령, 소리꾼의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디모데전서에는 그러한 디모데의 역할이 명시되어 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여기서 읽는 것은 영어로 ‘the public reading of scripture’이다. 경서를 대중 앞에서 읽음을 뜻한다. ‘착념(着念)하라라는 뜻은 그 일에 전념하여 종사한다는 뜻이다. 거의 그 낭송역할이 전문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경서(scripture)도 구약의 경전인지 복음서의 원형이 되는 그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판소리와 복음서

 

 

판소리사설은 그냥 사설로만 읽으면 매우 현학적이고 어렵고 지루하다. 그러나 그것을 발림이나 아니리, 그리고 북 반주를 수반하는 소리꾼의 창() 이야기로 들을 때는 무슨 이야기인지 세부적인 것까지는 다 모른다 해도 대충 재미있게 알아듣는다. 춘향전이나 심청전의 사설을 뜯어보면 매우 현학적인 한문투가 많다. 즉 그것을 쓴 사람은 조선조 문화의 아주 고도의 문헌적 지식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그 재미를 향유한 사람들은 식자층이 아닌 조선왕조의 일반서민들이었다. 소리꾼의 판이 벌어진 곳은 양반집 사랑채의 대청이었지만 그 앞마당을 가득 메운 것은 농촌의 뭇백성이었다.

 

시각적 문헌과 청각적 문헌은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시각적 문헌은 그 자체로 그것을 읽는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고, 지식과 정보의 교환을 주목적으로 하게 된다. 그러나 청각적 문헌은 시각보다는 청각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의 시간성을 중시하는 많은 장치가 생겨나게 되고, 또 논리적인 것보다는 느낌이나 상상력 그리고 재미, 그리고 의미의 청각적 유발을 보다 주안점으로 삼게 된다.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감동을 최우선시하게 된다. 그 감동이란 나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이 감동을 전하기 위한 장치로써 어떠한 논리적 혹은 비논리적, 감각적 혹은 초감각적 이야기가 동원되어도 듣는 사람들은 그 세부적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삶에 의미를 던져주는 감동일 뿐이다. 감동(感動)이란 케릭스(창자)의 발설에 감()하여 동()하는 청자의 감성(感性)의 체계이다. 별주부전에서 자라가 토끼를 꾀어서 용궁으로 데리고 내려갈 때, 뭍의 생물이 어떻게 물 속으로 들어갈까? 숨이 차서 금방 죽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청전에서도 심청이는 분명히 임당수에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용궁에 가서 엄마를 만났으며 또 연꽃을 타고 부활했을까? 그리고 아름다운 대궐에서 살게 되었을까?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심청의 십자가

 

 

우리가 기독교문명을 접하기 이전에도 이미 죽음과 부활이라는 메시지는 우리 주변에 무수히 깔려있었던 이야기 패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을 우리의 서민들은 하나의 문학적 상상이나 날조로서 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얼한 사실이다. 심청이는 정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남들이 하기 어려운 희생의 결정을 내렸고 몸을 팔았다. 죽음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효()를 나타낸다고 하는 그 여린 여인 심청의 결단처럼 심각한 문제상황은 없다. 분명 그것은 심청의 십자가였다. 그리고 임당수로 몸이 팔려 뱃전에서 떠나가는 가냘픈 심청이의 모습, 뒤늦게 달려와 임당수 해변에서 대성통곡하는 아버지 심봉사의 원성!

 

 

심청이 거동봐라 샛별같은 눈을감고 초마자락 무릅쓰고 뱃전으로 우루루루 만경창파 갈마기 격으로 떳다 물에가 풍~.

 

 

그 빠지는 순간, 어찌 그것이 드라마라, 허구의 가상이라 생각하겠는가? 실제로 우리는 그 순간 심청이와 같이 빠져 죽은 사실적 체험을 하게 된다.

 

 

빠져놓니 향화는 풍랑을 쫓고 명월은 해문에 잠겼도다. 영좌도 울고 사공도 울고 격군 화장이 모두 운다. 닷감어라 어기야 어야어야 우후청강 좋은흥을 묻노라 저백구야 홍요월색이 어느곳고 일강세우네 평생에 너는 어이 한가하느냐 범피창파 높이 떠서 도용도용 떠나간다.

 

 

김소희 선생의 청아한 진양의 소리가 너무도 구슬프게 울려퍼질 때 나 어린 도올은 매번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뻔히 아는 이야기일지라도 심청의 죽음은 나 어린 도올의 통곡을 자아내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게 믿는자에게 그만큼 감동은 크다. 그리고 그녀가 연꽃에서 부활했을 때, 그리고 가까스로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그 얼마나 기뻤던가? 이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유앙겔리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전통적으로 헬라세계에서 유앙겔리온(euangelion)이란 단어가 가장 극적으로 보편적으로 쓰인 곳은 전승(戰勝)의 소식 장면이었다.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9)의 승전보를 가지고 26마일을 달려온 아테네의 용사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의 마지막 외침이 곧 유앙겔리온이었다. 예루살렘 도성이 다 파괴되고 모든 신념과 자존이 파괴된 참담한 심령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승리를 알리는 승전보가 곧 가스펠이었다.

 

 

 

 

마가복음은 낭송된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것이 독서용의 문헌이 아니라 초대교회에 던진 판소리의 사설과도 같은 것이다. 마가복음은 케릭스에 의하여 대중들에게 낭송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로 시작되어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기록된 것과 같이로 이어지는데 아마도 구약(70인역 이사야 40:3)의 인용구는 노래 챈팅으로 낭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들이 심히놀라 떨며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말도 하지못하더라로 끝났을 때, 아마도 이 복음판소리가 준 감동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 이전의 어떠한 단편적 케리그마(kerygma, κρυγμα)도 노릴 수 없었던 장대한 케리그마의 감동이 초대교회 장막 안에 울려퍼졌을 것이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의 장엄한 마태 수난곡(St. Mattew Passion, 1729년 초연)보다 몇 천 배 더 짙은 감동으로 초대교회 사람들의 심령을 울렸을 것이다. 마가복음이 낭독된 것이라는 사실은 마가복음 자체의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마가복음 1314에 보면 괄호 속에 재미있는 구문이 하나 삽입되어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어리석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여기 읽는 자’(the reader)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현재 복음서를 읽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말인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읽는 자는 이 복음서를 대중에게 낭송하고 있는 낭독자이다. 이것은 마치 악보에 연주자들에게 템포나 분위기를 지시하기 위하여 라르고(느리고 폭넓게), 알레그로(빠르고 유쾌하게), 아모로소(사랑스럽게), 델리카토(섬세하게), 에로이코(영웅적으로), 돌체(부드럽고 아름답게)니 하고 써놓는 것과 비슷한 싸인이며 낭독되는 부분이 아니다. 아마도 이런 삽입구가 많이 있었을 것인데 이 부분에만 우연히 그 잔재가 남아있는 것이다.

 

 

 

 

낭송문학 요한계시록 판타지아

 

 

복음서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현 성서의 제일 끝머리의 요한계시록이라는 문헌이 붙어있는데, 이 문헌이야말로 낭송문학의 극단적 형태를 과시하고 있다. 계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은 초기기독교인들의 발명이 아니고,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배어있는 대중문학 장르였다. 이 묵시문학은 기원전 2세기초에서 기원후 2세기초까지 유대인 사회에서 매우 유행하던 문학장르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시간적ㆍ초월적 세계의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꿈이나 천사나 환상을 통하여 드러난다. 그 주제는 메시아적 대망이며 이 세계의 종말이며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종래적 예언자의 예언은 하나님의 의지를 이 현실역사의 지평 위에서 펼치지만, 계시자의 묵시는 역사를 초월한 초자연적 지평 위에 펼친다.

 

그런데 이런 묵시 문학은 매우 판타스틱하고 황홀하며, 듣는 이들을 도취시키고, 공포나 협박이나 환희를 매우 극적으로 표출시키기 때문에 대중에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서, 에녹1, 에녹2, 에스드라 2(에스라4), 바룩2, 바룩3서 등등, 수없는 묵시문학작품이 간약시대에 등장했다. 복음서의 출현도 이 묵시문학의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지역에 있는 크리스챤들이 로마관리들에 의해 박해를 받던 2세기초에 쓰여진 작품으로 황제예배냐 하나님예배냐, 제국에의 충성이냐 기독교에의 충성이냐, 그 변절과 순교의 기로에 놓여있는 절박한 크리스챤들을 향해 발한 묵시문학의 한 전형이다. 이 문헌의 저자의 의도는 매우 명백한 것이다. 순교는 영원한 보상을 받고, 황제예배 즉 배교(背敎)는 영원한 징벌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순교에 대한 매혹감을 느끼게 하고 배교에 대한 공포감을 조장시키는 것이다. 이 낭송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예배를 하여 그리스도와 전능하신 하나님께 불충한 반역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순교의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결단하도록 종용케하는 도취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공포의 판타지아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첫머리를 보라!

 

 

이 예언의 말씀을 크게 낭송하는 사람과 그 낭송을 듣는 사람들, 그리고 이 가운데 기록한 것들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3)

 

 

매우 명백하게 초대교회의 낭송문화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이다.

 

 

 

 

산조의 전승양식과 복음의 전승양식

 

 

가야금산조는 한말에 전라도 영암 사람 김창조(金昌祖, 1856~1919)라는 무속의 달인이 판소리에 내재하는 가락을 압축시켜 절대음악의 장르인 순수기악곡으로 재창조해낸 우리민족예술의 걸작 중의 걸작이다. 그 장르가 하도 새롭고 하도 충격적이라서 듣는 사람들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흐트러진 가락이라 하여 산조(散調)라 속칭(俗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순식간에 구한말 음악계에 열병처럼 번져가서 오늘의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옛날에는 악보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연주라는 개념이 꼭 악보대로’ ‘선생에게 배운 대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해석이나 장끼나 자기가 좋아하는 가락을 첨가하기도 하고 또 자기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것은 생략하기도 한다.

 

김창조는 다스름가락, 진양, 중머리, 중중머리, 자진머리의 기본틀을 만들었으나, 후대의 산조 계승자들은 엇중중머리, 휘중중머리, 엇머리, 굿거리, 휘머리, 단머리, 늦은중머리,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중머리 등 여러 가지 장단들을 첨가하였다. 그래서 김창조를 계승하는 유파들을 살펴보면 제각기 맛이 다 다르다. 김죽파의 정갈한 맛, 함동정월의 그윽한 맛, 성금연의 화려한 맛, 강태홍의 가냘픈 맛, 심상건의 단조로운 맛, 정남희의 구성진 맛이 모두 제각기 다르다. 그리고 그 구성을 잘 살펴보면 그 다양한 전승의 가닥을 잡을 수가 있다.

 

같은 판소리라도 송만갑의 소리 다르고, 이동백의 소리 다르고, 장판개의 소리 다르고, 임방울의 소리 다르다. 동편제ㆍ서편제ㆍ중고제의 전승이 다른 것이다.

 

 

 

 

유앙겔리온의 전성시대

 

 

마가복음은 빅 히트였다. 그 감동은 여기저기 교회마다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낭송자는 유랑극단처럼 여기저기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반주자도 없는 1인공연이니 간편하게 다녔을 것이고, 가는 곳마다 한번에 다 읽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연속극처럼 몇 회에 나누어 낭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대본을 카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사본을 가지고 또 새 팀들이 유랑의 길, 전도의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러한 복음을 듣는 사람마다 감동 끝에 자기가 이전에 들어왔던 이야기를 첨가해서 전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고, 또 관련된 설화들을 창작하여 덧붙이는 사람도 생겨난다. 옛날에 할머니들이 들려주던 이야기들은 누대를 거쳐 전승이 달라지기 때문에 해주는 사람마다 스토리의 길이와 구성과 분위기,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변화가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러나 원형의 딥 스트럭쳐는 항상 살아있다.

 

70년에서 100년 사이는 유앙겔리온의 전성시대였다. 그리고 복음과 동시에 기독교가 놀라웁게 팽창했다. 그래서 복음에도 서편제와 동편제가 생겨나게 된다. 이 시기에 쓰여진 복음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매우 많다. 다양한 복음서의 전승이 있었지만 초대교회의 정통주의는 마가복음이라는 최초의 복음서를 원자료로서 승계하지 않는 새로운 스타일의 복음서는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그만큼 마가는 역사적 예수의 사역에 충실했다. 마가는 예수의 사역의 중심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 두었다. 그리고 예수를 항상 갈릴리의 민중 속에서 그렸다. 그가 그린 민중은 라오스(laos)가 아닌 옥클로스(ochlos)였다. ‘라오스'는 국가주의적 함의가 있는 말이며 국민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옥클로스는 이스라엘민족을 하나의 통일체로서 표현하는 일체의 맥락과 무관한 그냥 군중이다. 예수는 항상 우호적인 민중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예수는 민중을 불쌍히 여기고 친절히 가르치며 그들 속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발견한다. 누가 과연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란 말인가?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바로 여기 앉아있는 이들이 내 모친이요 내 동생들이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3:34~35)

 

 

적의감 없이 그를 이해하고 따라주는 무명의 군중이야말로 그의 혈육이요 동포(同胞, 같은 탯줄에서 태어난 사람들)였던 것이다.

 

 

 

 

공관복음서

 

 

이러한 생생한 역사적 지평 위에서 복음서는 전개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마가복음서의 기본적 관점(觀點)을 공유(共有)하는 복음서를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the synoptic gospels)라고 부르는데 마태와 누가가 바로 이 공관복음서의 대표적 작품이다.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는 마가를 책상 앞에 놓아두고 쓴 작품이다. 책으로 말한다면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개정증보판인 것이다신약학의 거장 다드의 표현, Dodd, About the Gospels 24.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 속에는 마가가 거의 다 들어있다. 마가의 661개의 문장(verses) 중에 600개가 마태 속에 들어있고, 350개가 누가에 들어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매우 충실히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가에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서 마태와 누가에 공통된 것이 200개 정도 있다. 200개의 문장을 보통 독일어의 자료’(Quelle)라는 단어의 첫 자를 따서 ‘Q자료’(Q material)라고 부른다.

 

Q자료는 82개 정도의 단편(로기온)으로 구성된 예수의 어록(sayings collection)이며, 예수의 말씀의 구전을 최초로 성문화시킨 것이다. 그것은 AD 50년경의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는 마가와 Q자료를 보고서 개정증보판을 낸 것이다. 분량으로 말하자면 누가가 마태보다 좀 더 많다. 그리고 마가와 Q자료를 빼고난, 마태에게만 특유한 자료를 M, 누가에게만 특유한 자료를 L이라고 부른다. 이 이상의 더 복잡한 이야기들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여튼 상기의 이유로 마가, 마태, 누가 3복음을 공관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가복음   Q자료    
M자료     L자료
  마태복음   누가복음  

공관복음서의 자료 연관구조>

 

 

나는 오리지날 복음판소리인 마가복음을 제일 좋아한다. 마가복음이야말로 복음서의 원형이며 예수의 모습을 가장 진실하게 전하는 자료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일반대중에게는 상대적으로 마가복음은 별 인기가 없었다. 아마 한국에서도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마가복음보다는 마태나 누가에서 기억하는 이야기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 유명한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도 마태에 나오는 것이다. 그 유명한 탕자의 이야기(The Prodigal Son),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The Good Samaritan)는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있는 주기도문(The Lord's Prayer)도 마태에서 온 것이다.

 

 

 

 

마태ㆍ누가가 마가보다 더 인기

 

 

마태나 누가가 마가보다 인기가 더 많은 것은 매우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마태ㆍ누가가 마가보다 더 자상하고 더 뿌듯하고 더 섬세하고 더 완결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체를 보더라도 훨씬 더 세련되어 있다. 희랍어의 문체로 말한다면 누가의 문장이 가장 세련되었고 유려하다. 역시 개정판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판ㆍ원판의 묘미는 개정판이 따라갈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숭고한 가치가 있다.

 

마가는 복음서를 곧바로 복음의 선포로써 시작한다. 기쁜 소식의 선포는 곧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의 공생애로부터 출발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의 말씀이야말로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는지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마가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마가의 일차적 관심은 예수의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지 40년이나 지난 후 마가에게 예수의 출생이나 가문에 관한 정보는 수집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가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정직한 정보의 울타리 안에 머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단 복음서라는 문학적 장르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자,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아쉬움을 느끼게 되고 한두 마디 훈수 두는 이야기를 첨가하게 마련이다. “예수는 아무개 아들이었어. 거 있잖아. 거 목수집

 

그 집 애들이 7남매가 있었는데 예수가 맏이었대나 봐.”

 

아니야! 5형제 중 야곱이 만이었어!”

 

그 집안 족보는 내가 잘 아는데우리 집안하고는 할아버지 때 갈라졌어.”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예수 어릴 때 예루살렘의 어느 회당에서 봤다나 봐……… 아주 영악했다지.”

 

불과 40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면 아직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살아 움직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은 그러한 항간의 사실에 관한 보도가 아니었다. 이왕 복음서라는 것이 한 인간의 바이오그라피적인 일대기형식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출생으로부터 출발해야 제대로 갖추어진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출생이나 유년기에 관한 이야기가 수집되거나 만들어지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세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마가복음서에서부터, 아니 그 이전의 바울의 비젼으로부터 이미 수난과 부활의 신적인 권세를 과시했던 사람으로서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출생부터 범용한 인간과 똑같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좀 문제가 있다. 그는 출생부터 범용한 인간과는 달라야했다. 뭔가 그의 신적인 계보를 과시해야만 했던 것이다. 항간의 객관적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

 

 

예수는 나사렛이라는 갈릴리 시골마을에서 성장한 목수였거나(6:3) 목수의 아들(13:55)이었거나이다.’

 

 

 

 

공적인 사실과 전승담론의 조화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예수의 공생애의 사역과 관련하여 드러난, 공적인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인 사실을 하느님적 경지와 조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전통사회는 사()ㆍ농()ㆍ공()ㆍ상()이라는 계급적 분별이 있었다. 크게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있었다. 어느 사회든 전통사회에서는 이러한 구분은 매우 보편적ㆍ심층적 문명의 경향성이었다. 모든 문명(=인간세)은 선을 긋기를 좋아한다. 이스라엘 사회는 당시 사ㆍ농ㆍ공ㆍ상 대신에 다른 계층적 구조가 있었다.

 

최상층에는 극소수의 정치적 지배자들이 있었다. 왕과 총독, 그리고 그 주변의 고급행정관료들이 있었다. 이들은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지만 당시 이스라엘 땅의 과반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음이 제사장들(the Priests)이다. 이들도 국토의 15% 이상을 소유하는 부유한 지주들이었다. 다음이 특권향당들(the Retainers)인데 고위군인들과 실무관료들이다. 그 다음 상인들(the Merchants)이다. 상인들은 하층에서 상향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당대에 상당한 부와 권력을 향유하고 있었다. 이들까지는 이스라엘 사회의 지배계층에 속한다.

그 아래로 인구의 2/3이상을 차지하는 농민(the Peasants)이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종교나 정치에 관련없이 하루하루 땅을 갈고 생산하여 상층민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피착취계급이었다. 한발ㆍ수해ㆍ질병ㆍ빚에 쉽게 노출되며 이러한 재난에 희생당하면 그냥 공동경작민이나 소작인이나 부랑민으로 전락해버린다. 예수의 비유에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이 인구의 5% 정도를 차지하는 공인들(the Artisans)이다. 이들은 농민보다도 하층의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재산이 없는 최하층에서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인들 밑으로 인도의 불가촉천민(the Untouchables)과도 같은 천민들(the Degraded and Expendable classes)이 있었다. 이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는 부랑민들, 거지들, 법외자들, 불량민, 매춘부, 하루 품상 노동자들, 노예들이었는데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이 방치된 천민들이야말로 이스라엘과 같은 농경사회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외인(方外人)들이었다. 예수를 둘러싼 대부분의 군중들이란 바로 이 천민들이었다. 이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우루루 몰려다닐 수 있다.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우루루 같이 몰려다니는 이 군중이야말로 홈레스(homeless) 천민들이었다.

 

예수가 작은 생선 두어 마리와 떡 일곱 조각으로라도 먹일 수밖에 없었던 군중, 그들은 사흘씩이나 굶으면서도 예수를 따라왔고 이제 기진하여 길거리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15:32, 8:2~3) 그런 사 오천 명의 군중이었다.

 

 

이스라엘 사회 계층구조 인구비례 토지소유비례
() the Ruler and the Governors 15% 75%
() the Priests
() the Retainers
() the Merchants
() the Peasants 70% 25%
() the Artisans 5%
() the Degraded and Expendable classes 10%

 

 

역사적 예수가 만약 목수였다고 한다면, 그는 농민과 천민의 중간에 끼어있는 공인(工人)계급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목수는 결코 사회적 지위가 높은 기술자가 아니었다. 요즈음처럼 월급을 많이 수령하는 대접받는 공장기술자가 아니라, 농촌의 읍락 한구석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왕조시대의 장인(匠人)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이 하층의 예수를 고귀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기 위해서는 좀 특수한 드라마적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와 그릇된 인용

 

 

재미난 것은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에 관하여 사도 바울의 서한문에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그리고 복음서 안에 있는 최고층대의 자료인 Q자료 속에도 일체 언급이 없다. 다시 말해서 AD 60년대까지만 해도 예수가 순결한 동정녀로부터 잉태되었다는 담론은 전혀 초대교회 내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조설화들을 보면 대부분 알에서 태어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도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 큰 알에서 깨어 나왔다. 박이란 박 같이 큰 알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석탈해(昔脫解)도 큰 알에서 나왔고, 김씨시조 김알지(金閼智)는 계림 금궤짝[金櫃]에서 나왔다. 고구려시조 주몽(朱蒙)도 하나님[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지만 닷되들이 만한 큰 알 속에서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는 주몽의 셋째 아들로 입적되어 졸본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난생설화가 없다.

 

유대사회나 한민족사회나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권력구조사회(patriarchal society)에서 누구를 시조로 만든다는 것은 반드시 부계를 단절시킬 필요가 있다. 난생도 한 방법일 것이고 처녀임신도 한 방법일 것이다. ()나라의 시조 후직(后稷) ()도 그 어미 강원(姜嫄)이 하나님[上帝]의 엄지발가락 자국을 밟고서 잉태한 아이다. 동정녀탄생의 한 예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생민(生民)

 

마태복음의 기자는 이 동정녀마리아의 잉태를 구약의 예언의 성취라 하여 매우 자랑스럽게 이사야서 714을 인용하고 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23)

 

 

그런데 이것은 완벽하게 단장취의(斷章取義)의 그릇된 인용이다. 우선 이것은 예수의 동정녀탄생설화와는 일말의 관련도 짓기 어려운, 남북왕조의 곤궁한 역사적 정황에서 태어난 예언이다. 아하즈(Ahaz, BC 736~716 재위)는 유다왕국의 12대 왕인데 북조인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앗수르)에게 정복당하자 매우 비굴하게 앗시리아와 타협하면서 생존을 모색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방인컬트에 탐닉하여 자기 아들을 태워 죽이는 끔찍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온 마을 곳곳의 이교도적 서낭당에 분향을 하기도 했고 앗시리아의 상왕에게 참배하러 다메섹에 가있는 동안 자기가 본 앗시리아의 이교 제단에 너무 반해서 솔로몬이 만든 성전의 청동 제단을 그것의 복제품으로 대치시킨 그런 비굴한 인물이었다. 아하즈는 이렇게 제단까지 앗시리아식으로 바꾸어 과잉충성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처녀는 젊은 부인

 

 

이사야는 유다왕국의 네 임금, 웃시야, 요담, 아하즈, 히스기야를 섬긴 유대민족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상기의 예언은 이사야가 아하즈왕의 이러한 앗시리아 충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아하즈왕에게 하나님의 징표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는 장면이다. 이때 처녀는 성교를 경험하지 않은 처녀가 아니고, 바로 아하즈왕이 새로 맞이한 젊은 부인을 가리킨다. 아하즈왕의 새 부인이 곧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라 하리라고 한 것은 딴 뜻이 아니라 네 아들은 너와 같이 앗시리아 이교숭배를 하는 그런 못된 짓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항상 하나님을 공경하는 절대신앙의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그것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이 구절을 히브리성경을 읽고 인용한 것이 아니라 셉츄아진트(구약의 알렉산드리아 희랍어역)를 읽고 인용했기 때문이다. 셉츄아진트가 그것을 처녀로 오역했던 것이다.

 

그 히브리원어는 알마아’(almâ)인데 그것은 젊은 여자(a young woman)를 뜻한다. 히브리말로 처녀는 베툴라아이다. 희랍어에 있어서도 알마아네아니스, ‘베툴라아파르테노스’(parthenos)에 해당되므로 양자는 혼동될 수가 없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셉츄아진트알마아’(젊은 여자)파르테노스’(처녀)로 번역해버린 것이다. 이 단순한 오역이 마태복음 기자의 엉뚱한 오판을 자아냈으나 그것은 오늘까지 신약성서에서 동정녀마리아 탄생 설화를 입증하는, 700여 년 앞을 내다 본 구약의 예언으로서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모든 교회에서 뇌까리는 주술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어릴 때 이러한 구약의 예언을 암송하면서 매우 신비롭게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신약의 구약인용은 그 대부분이 맥락을 떠난 단장취의(斷章取義)이다. 그래서 신약이라는 문헌을 유대교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경멸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콘텍스트에서 텍스트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비록 신학계의 상식적 담론을 반복함에 불과할지라도, 거룩한 독자들은 마치 내가 성서의 권위를 깎아내리려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오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서 저자의 전달방식을 믿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라는 케리그마(kerygma, κρυγμα)는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이지 그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나 내러티브적 콘텍스트(context, 문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콘텍스트가 아닌 텍스트 그 자체로 진입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의 자기이해에 있어서, 예수님 스스로 나는 순결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선포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동정녀탄생은 의미있는 케리그마가 된다. 그러나 예수는 단 한마디도 그러한 자기 이해를 내비친 적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동정녀 탄생설화와 같은 하찮은 복음서 기사의 진실성에 매달리게 되면 진정한 복음의 내용을 망각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는 모두 자신을 그의 가정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의 가까운 친속들은 모두 예수를 미친 놈이라고 생각했다.(3:21), 예수는 모친 마리아를 엄마라고 부르기를 꺼려한다. 엄마와 아주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잔치집 같은 이무러운 자리에서도, ‘여자여! 당신이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2:4)라고 아주 가혹하게 잘라 말한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도 애처롭게 쳐다보는 엄마에게 엄마라는 다정한 말을 건네지 않는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19:26), 단지 여자여라는 거리 있는 호칭을 썼을 뿐이다.

 

사실 순결한 처녀로서의 마리아의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넌센스다. 마가복음 6에는 예수가 자기 고향 나사렛으로 갔을 때, 안식일에 회당에서 지혜로운 언사와 막강한 권능을 그의 손으로 베푸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그때 그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동네사람들이 이와 같이 말한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세(마태는 요셉으로 표기)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서 살고있지 아니 하냐?’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6:3, 13:55~56)

 

 

분명 예수에게는 4형제가 있었다. 야고보(James), 요세(Joses), 유다(Judas), 시몬(Simon), 그리고 누이들이라는 복수로 보아 최소한 두 명의 자매가 있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최소한 예수를 포함하여 7명의 자식을 낳았다.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은 것처럼, 남은 6명의 자식도 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6명의 자식은 분명 남편 요셉과 동침하여 낳았을 것이다.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성서의 기사 그 자체에 의하여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왜곡된 순결한 처녀 이미지

 

 

그리고 야고보는 예수의 사후 예루살렘교회의 리더가 되었던 사람이다. 얼굴이나 인상착의가 예수와 매우 흡사했고 인격적으로도 매우 원만하고 통솔력이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를 말하는 어떤 학자들은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에게 다시 모습을 보인 그 부활한 예수는, 예수와 똑같이 생긴 야고보가 예수의 사후 교단을 수습하기 위하여 위로방문하러 다닌 스토리들이 와전된 것이라고 말한다. 예루살렘교단은 그렇게 해서 야고보에 의해서 성립했던 것이다. 헤롯왕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믿고 호들갑을 떨었다(6:16, 19:7~9, 14:1~2), 예수를 사모하던 사람들이, 그에 대한 애정이 사무치던 사람들이, 야고보를 보았을 때 예수가 살아 돌아온 느낌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정할 수 있다. 초기 교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금욕주의자였으며 주색을 철저히 금하였으며, 자기 몸에 일체 작위적 행위를 가하지 않았기에 면도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비적이지 않고 매우 합리적인, 그러면서 내공이 강했던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성서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사실에 접근하기는커녕 점점 그 본질로부터 멀어져만 간다는 것이다. 예수의 동정녀탄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누가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물론 예수는 마리아가 낳은 첫 아기가 되어야 한다(2:7). 그러나 야고보의 의젓한 리더십을 상고해보면, 야고보가 예수의 동생이 아니라 형이었을 수도 있다. 예수라는 동생의 사역과 수난의 삶을 이해하고 소리없이 후원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동정녀탄생을 고집하는 한에 있어서는 예수는 필경 사생아(bastard)가 되어버리고 만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공자(孔子)세가(世家)속에 존엄하게 그리면서도 그가 숙량흘(叔梁紇)의 사생아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안씨녀(顔氏女)와 야합(野合)해서 낳았다고 했으니[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정식 결혼절차를 밟지 않고 들판에서 그냥 교합하여 낳은 자식이라는 뜻이다.

 

물론 복음서의 기자들에게 그런 사실의 기록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헬라세계에 퍼지자 이미 2세기 중엽이면 동정녀마리아탄생설에 관한 신랄한 공격이 들어온다. 이방인 철학자 켈수스(Celsus)는 동정녀탄생설은 단지 예수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만든 조작기사라고 주장하면서, 그 당시 갈릴리에 와있던 로마 병정 판테라(Panthera)라는 사람에게 마리아가 강간 당하여 낳은 아기라는 역사적 사실을 설득력있게 논파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교부들은 마리아의 순결한 처녀 이미지를 계속 고집하기 위하여 예수의 다른 형제ㆍ자매들은 요셉의 전처소생이라고 둘러댔고, 4세기의 위대한 성서학자 제롬(Jerome)도 이 형제ㆍ자매들은 예수의 사촌(cousins)일 것이라고 둘러댔다. 참으로 구차스러운 변명이다. 성서신학자들이 성서를 있는 그대로 읽지를 아니 하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컬트

 

 

마리아는 성서에 즉해서 말한다면 가톨릭성당 입구에 서있는 성모 마리아상이나 중세기 성화에 그려져 있는 순결한 처녀의 모습이 될 수는 없다. 최근 KBS 드라마 서울 1945속에 나오는 고두심분()엄마상정도의 모습이야말로 마리아의 참모습이었을 것이다.

 

여러 남매들을 거느리고 참혹한 고난의 세월을 견디어 가면서도 소리없이 끈질기게, 그리고 한없는 사랑과 인자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평범하고 주름진 노경의 여자였을 것이다. AD 23세기에만 해도 초대교회에 마리아 컬트(Maria Cult)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의 모습의 담지자(테오토코스, Theotokos)로서의 처녀 마리아의 숭배는 기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공인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기독교도가 되면 갑자기 많은 이권과 특혜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이교도들이 갑자기 기독교로 개종하여 입교하였고, 이들은 소아시아와 근동의 토착적 이교문화를 기독교로 가지고 들어왔다.

 

이들은 엄격하게 위계질서적인 가부장제의 수장격인 남성유일신 사상에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서낭당에서 여자 무당들과 뒹굴면서 서왕모(西王母)와 같은 대지의 여신(Mother Goddess)을 숭배하던 사람들은 순결한 처녀 예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이 신의 어머니(Mother of God)처럼 비쳐졌고, 이것이 토착적인 미스테리 컬트와 결합하면서 점점 독자적인 마리아 컬트로 발전해간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절간에 칠성각이 자리잡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현상이다. 마리아 컬트가 소피아(지혜의 여성 의인화)사상과 결합하면서 동방교회중심으로 발전하였고 그 극치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 그 유명한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즉 현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이다. 그것은 천상의 지혜를 과시하는 소피아니즘(Sophianism)의 대표적 걸작품이다. 즉 찬란한 칠성각이라 해야할 것이다.

 

 

 

 

예수의 부계족보와 부계가 부정된 동정녀탄생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는 태초로부터 존재했던 말씀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처녀 마리아의 자궁에서 비로소 태어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시간의 생성과 더불어 이 세계로 진입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의 어느 시점에서 탄생될 수 있는 그런 존재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에는 처녀마리아 탄생 설화나 유년설화와 같은 일체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다 빠져버린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도 없고, 또 받아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신적 권위는 세례 요한의 세례로써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로고스라는 존재성의 권위로써 확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처녀 마리아의 성령잉태를 보다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세례 요한의 잉태과정을 병렬시켰고, 그러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엄마 엘리사벳(Elizabeth)과 예수의 엄마 마리아를 사촌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예수는 세례 요한과 6촌간이 되는 셈이다.

 

과연 이런 식의 복음서의 팽창과정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누가와 마태의 방식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라는 단 한마디의 말로 예수의 출생과 성장, 그 모든 것을 한 큐에 이야기해버리는 요한복음의 두 방식 중에서 과연 어떠한 이해방식의 진실성을 선택해야 할른지는 성서축자무오류설(聖書逐字無誤謬說)을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독자님들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나 도올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오직 성서 속에서 성서의 입장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를 얘기하면서도 마태와 누가는 다같이 예수의 족보를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을 열면 이와 같이 시작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 (1:1-2)

 

 

그런데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태와 달리 예수로부터 거꾸로 올라간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以上)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 (3:23-24)

 

 

 

 

할아버지부터 모조리 다른 두 개의 족보

 

 

우리 한국인들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족보학에 관심이 많은 민족이다. 민간 레벨에서 우리나라처럼 모든 집안마다 장구한 족보를 간직하고 있는 문명은 이 지구상에서 유례가 별로 없다. 그런데 족보는 본시 부계혈통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 처녀잉태 사실은 바로 부계의 혈통을 단절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 요셉의 아들이 아니다. 그런데 족보는 요셉의 족보다. 참으로 이런 넌센스가 어디 있는가? 한국인들처럼 족보에 민감한 사람들이 성서를 읽을 때는 이러한 명백한 불일치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여기에 바로 마태ㆍ누가의 고민이 있다. 예수의 출생을 범용한 인간의 출생과는 다른 것으로 그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예수를 그렇게 황당무계하게 성령의 잉태로서만 제시하기에는 너무도 설득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예수에게 유대민족의 구체적 역사지평을 부여해야만 했다. 그 역사지평이란 메시아 대망사상이었고, 메시아는 반드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도 족보를 읊어대려면 한국인들처럼 비슷하게는 읊어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개의 족보를 비교해보면 달라도 이건 너무 황당무계하게 다르다. 아버지인 요셉까지는 일치하지만 요셉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부터 그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 했고 누가는 헬리라 했다. 그 이상부터도 서로 들어 맞는 이름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다윗까지 28대인데,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다윗까지 43대이다. 누가의 족보에 의하면 29대 할아버지의 이름이 또 다시 예수라는 이름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각기 다른 전승에 의거했다기보다는 각기 다른 상상력이 발동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는 그래도 족보가 아브라함에서 끝나지만, 누가의 경우는 족보가 아브라함(57)에서 다시 노아, 므두셀라를 거쳐 아담에 이르기까지 20대를 더 거슬러올라가 결국 하나님에 이르게 된다. 결국 예수의 78대조 할아버지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아니한가? 예수와 하나님을 인간의 혈통족보로 연결시키다니! 하여튼 누가는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동정녀 탄생설화를 만들었고, 또다시 요셉의 혈통을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켰다.

 

 

내가 우리말 개역한글판을 읽으면서 발견한 탈문이 누가복음 3:33에 있다.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이 두 대 사이에 한 대가 누락되어 있다. ‘이 이상은 아미나답(Amminadab)이요, 그 이상은 아드민(Admin)이요, 그 이상은 아니(Arni).’가 되어야 한다. 우리말성경의 국제적 공신력과 관계되는 중대사안이다. 대한성서공회에 이 부분의 개정을 요청한다. 뿐만 아니라 관주성경전서본 우리말 성서에 오식이나 오자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6:3의 예수 형제 중의 하나인 요셉은 요세’(Joses)로 표기되어야 한다.

역대상 3:1압논암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명백한 오식일 뿐이다(cf. 사무엘하 3:2). 로마서 5:4鍊鍜’(연하)鍊鍛’(연단)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요한복음 10:33, 36僣濫’(철람)僭濫’(참람)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오류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천하의 호적조사

 

 

누가복음 제2장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이러한 언급은 매우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 집안의 불가피했던 행보를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가이사 아우구스도’(Caesar Augustus, BC 63~AD 14)는 바로 줄리어스 시이저(가이사)가 죽은 후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년경~기원전 30)와 로마를 양분해가졌던 옥타비아누스를 말한다. 안토니우스는 세기의 여인, 28세의 만개한 미모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 BC 69~30)를 바로 바울의 고향 다소(Tarsus)에서 만났고 그 순간부터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사로잡혀 결국 옥타비아누스에게 무릎을 꿇게 되는 끊임없는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덤으로 보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전체를 장악했고 그의 치세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옥타비아누스의 젊고(클레오파트라보다도 6살 연하) 강력하고도 유능한 리더십 아래서 점점 공화정체제에서 황제의 제국으로 변모해간다. BC 27116일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만인을 초월한 존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BC 23호민관(tribunus) 특권을 장악하면서 그는 명실공히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태어난 시대가 가이사 아구스도 즉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전성시대였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로마 역사기록은 매우 자세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제국 전체에 호구조사(worldwide census)를 명한 사례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로마는 공화정의 전통을 가진 나라였기 때문에 그러한 발상이나 유례가 있을 수가 없었다. 단지 과세(taxation)를 목적으로 지방총독 명으로 해당 관할구에서 호구조사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탄생한 BC 4년경에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러한 호구조사가 행하여진 사례가 없다. 뿐만 아니라, BC 4년경에는 시리아(수리아)의 총독으로 구레뇨(퀴리니우스, Quirinius)라는 인물은 있지도 않았다. 사가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Jewish Antiquities)속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최초의 로마식 호구조사가 이루어진 사례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AD 6년의 사건이다.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라우스(Archelaus)를 골(Gaul) 지방으로 축출해버리면서 그가 지배하고 있던 영역인 유대(Judea), 사마리아(Samaria), 이두매(Idumea)를 시리아로 병합시켰을 때 과세를 목적으로 호구조사를 행하였던 것이다.

 

이때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퀴리니우스(Publius Sulpicius Quirinius)가 재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의 머리에선 이런 사건들을 혼동했다하기보다는 상상력 속에서 적당히 짜맞춘 것이다. 누가는 호구조사를 아주 평화스럽게 진행된 당연한 역사적 사건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실제로 호구조사는 유대인들에게는 엄청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사건이었으며 이 호구조사로 인해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5:37에 언급되고 있는 유다가 그 리더였는데 갈릴리 사람이 아니라 가말라(Judas of Gamala) 사람이었다. 그의 반란은 아주 강력한 대규모의 반란이었는데 로마 당국은 아주 가혹하게 철저히 진압했다.

 

 

 

 

원적지 호구조사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이 아주 비상식적이라는 것은 모든 호구조사는 원적(原籍)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사대상의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고 생활하고 있는 현주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원칙에 비추어서도 알 수 있다. 호구조사의 목적이 과세인 이상, 원적으로 사람을 다 이동시켜서 그 원적에서 모든 식구가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관료제도적으로도 불가능한 사태일뿐 아니라 의미없는 짓이다. 현주소의 삶의 터전에서 호구조사를 해야 과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그의 아버지 요셉은 분명히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에게 다윗혈통의 정통적 후계라는 메시아적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예수는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에서 출생해야만 했다. ‘아닌 밤에 홍두깨식으로 예수를 갑자기 베들레헴에서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복음서의 저자는 원적 호구조사라는 기발한 명분의 픽션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헬까지는 중간에 사마리아의 험난한 지역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더 남부로 가야하는 700리길이다. 옛날에 자동차가 있지도 않았고, 목수 신분의 요셉은 만삭에 가깝도록 배부른 마리아를 데리고 터덜터덜 700리 길을 걸어갔을 텐데, 그것도 단지 원적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하여…… 좀 상상하기가 어렵다. 만약 AD 6년의 호구조사를 기준으로 예수의 탄생연대를 잡는다면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은 누가 자신의 진술로 볼 때 티베리우스 황제 15년이므로(3:1), 예수의 나이는 불과 22세밖에 되지 않는다. 22세의 청년이 제자를 거느리고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였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성서 자체 내에 있는 명백한 증거들이다. 요한복음 741을 한번 펴보자!

 

 

혹은, “이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7:41~43; 요한복음강해277~80)……

 

 

이것은 예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 중에서 예수가 메시아냐 아니냐 하고 쟁론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최소한 이 군중의 쟁론 속에서든지 이 쟁론을 기록하고 있는 저자 요한의 의식 속에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전혀 그러한 사실을 군중도 저자 요한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헤롯의 유아살해의 허구성과 마태의 문제의식

 

 

또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후 헤롯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地境)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라 명하였고(2:16), 그래서 요셉은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야, 그것도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의 부모가 원래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살던 사람으로 그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는 원적 호구조사라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윗의 고장 베들레헴 사람으로 그렸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복음서 앞머리를 족보로써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식구를 나사렛에 가서 살게 하기 위하여 동방박사와 헤롯의 유아살해의 드라마를 삽입했다.

 

그러나 헤롯왕이 아무리 무지막지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근거없이 떠돌아 다니는 현자박사라는 표현은 박사학위의 소지자처럼 일정한 제도를 거쳐 자격을 얻은 존자라는 뜻이 생겨나는데 이러한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크게 있다. 원어는 마고이(magoi)인데 원래 마술사라는 뜻이다. 바빌론 지역의 점성술에 달통한 현자(wise man) 정도의 의미가 된다의 말 몇마디를 듣고 자국의 국민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고 실제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마태가 노리고 있는 것은 예수의 탄생을 모세의 이미지와 오버랩시키는 것이다. 헤롯의 유아 살해는 바로 파라오의 유아 살해를 전이시킨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강물에서 건져진 모세와 구사일생으로 현몽 덕에 피신한 예수의 이미지가 또다시 애굽땅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마태복음의 저자의 독특한 인식구조가 있다. 그는 신약의 케리그마(kerygma, κρυγμα)를 철저히 구약의 맥락 속에서 규정지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케리그마의 본질적 성격

 

 

성서를 이렇게 한 줄 한 줄 분석해 들어가면 사실(史實)과 부합하는 것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사가 별로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분석방법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복음서의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려고 이 복음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쁜 소식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선포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정보의 역사적 근거(historical security)를 말하기 전에 구성적 창조성(compositional creativity)을 말해야 한다. 그것은 기억된 역사(history remembered)가 아니라 역사화된 예언(prophecy historicized)이다. 여기서 예언이란 사전(事前)의 예언이 아니라, 사후(事後)에 그 예언적 전거를 모색해낸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수난(the historical passion)이 예언적 수난(the prophetic passion)으로 발전하고, 그 예언적 수난이 또 다시 내러티브적 수난(the narrative passion)으로 구체화 되어 복음서에 등장한 것이다(Crossan, Jesus 21, 145).

 

물론 춘향전숙종대왕 즉위초년 서울 삼청동 사시는 이씨양반 한분이 계시는데 세대 잠영지족(簪纓之族)이요…….’하고 시작하고, 심청전송나라 원풍팔년 황주 동화동에 봉사 한사람 사는디 성은 심이요 이름은 학규라……하고 시작한다. 모두 이 사건이 정확한 역사적 정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숙종 초년은 1674년이고, 원풍 팔년은 1085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춘향과 심청의 이야기를 정확한 연대기 속에서 뒤져야 할까?

 

 

 

 

케리그마의 양식

 

 

물론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진지한 독자들은 금방 대꾸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기록을 우리는 춘향전과 같은 노래가사의 수준으로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이 이상의 픽션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복음서의 저자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픽션으로서 날조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복음서는 분명히 역사의 지평을 깔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의 저자들도 예수라는 역사적 지평에서 발생한 많은 구술이나 성문화된 전승들을 충실하게 수집하고 종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어디까지나 복음서의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양식에 대하여 진위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것을 하나의 양식으로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0061210일 대통령 아무개는 중앙청 앞에서 돌연히 사망하였다라는 기사가 분명히 신문에 났다고 하자! 물론 그 기사가 사회면 기사로 났다고 하면 우리는 사실적 변화에 대한 충격을 느끼면서 그것의 진위를 가리려 할 것이다. ‘그게 정말 사실인가?’ 그러나 그것이 신문 속의 소설의 한 줄로 났다고 하면, 아무도 그것의 진위를 가리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언어, 동일한 정보라 하더라도 그것이 표현된 양식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면의 기사는 사회부기자의 육하(六何)원칙에 따른 정확한 기술양식이 있다. 그러나 소설면의 기사는 살아있는 인물을 패러디한 어떤 문학적 양식에 따라 기술되었을 것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양자의 표현양식은 매우 다르다. 복음서는 일차적으로 케리그마(kerygma, κρυγμα)라는 양식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성서의 디컨스트럭션

 

 

가톨릭신학계만 하더라도, 확고한 전통교설이었던 교황의 무오류성(Infallibility)을 인정하지 않는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이나 그보다는 보다 온건한 칼 라너(Karl Rahner, 1904~84)와 같은 신학자를 무조건 이단자로 휘몰지는 않는다. 교황의 무오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복음에 대한 복음서 저자의 무오류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교회의 전승과 하나님의 말씀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퀑은 복음의 우선권이 인간문화의 소산인 성서의 우선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복음과 성서는 구별되어야 한다. 복음의 절대적 규범은 성서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일뿐이며, 성서 자체와 복음이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위하여 성서는 항상 해체될 수 있고 또 해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복음을 컨스트럭트하기 위해서는 성서를 디컨스트럭트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과 성서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나 도올은 말한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로 우리의 실존 그 알몸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해후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드러내기 위하여 동원한 모든 언어적 표현에 우리는 기만당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서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그 말씀을 맥락지운 내러티브적 콘텍스트나 드라마적 구성에 있지 아니 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언어를 계속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성서는 인간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끊임없이 언어를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성령과 해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복음서의 언어의 대강은 케리그마(kerygma, κρυγμα)라는 양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 양식을 우리는 양식으로서 이해하는 동시에 그 양식을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그 양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양식을 초월할 수가 없다. 버리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한다.

 

성서는 모든 건전한 텍스트비평의 지평 위에서 합리적으로 토론되어야 하며, 그러한 토론 속에서만 복음의 핵심은 드러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축적된 교회의 도그마 속에서는 발견될 수가 없다. 오로지 인간의 경험과 그 경험의 심연에서 나오는 질문 속에서 직접 해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복음서의 저작연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의 발전단계를 마가 누가 마태 요한의 순서로 비정(比定)하지만 나는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의 순서로 비정한다.

 

기존 견해 마가 누가 마태 요한
도올 견해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12부작으로 한 사람에 의하여 세트로 저술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요즈음의 연구성과는 양자가 꼭 동일한 저자의 작품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생각보다는 후대의 작품으로 비정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누가복음 또한 시대가 그렇게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다드의 말대로 어차피 누가와 마태의 저술연대는 거칠게 잡아도 AD 75년부터 AD 95년 사이의 사건이 확실하며, 그 사이에서의 선후관계라든가 정확한 저술시기의 확정은 거의 불가능하다. 고대사의 기술은 정확할수록 부정확할 때가 많다. 따라서 마태와 누가의 저술연대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상대적 비교연대(relative chronology)가 가능할 뿐이다.

 

 

 

 

마가의 자료수집 태도

 

 

나는 마가복음이 로마에서 성립되었다는 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갈릴리 사람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갈릴리 지역의 초대교회전승을 충실히 수집하여 예수를 철저히 갈릴리의 지평 위에서 선포하고 있다. 아마 성립시기는 70년 예루살렘 멸망 직후였을 것이다. 로마저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가가 팔레스타인 지리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제5에 예수가 거라사인의 지방(the country of the Gerasenes)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 악령을 추방하는데, 그 악령이 돼지 속으로 들어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는 장면(5:13)이 나온다. 그런데 말하기를 거라사와 갈릴리 바다와의 거리는 60km나 떨어져 있어서 그렇게 돼지떼가 우루루 내려가 죽을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 때문에 마가가 갈릴리 지역 지리를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가는 타지역에서 거라사인의 이야기를 듣고 추정했을 것이다. 따라서 거라사인의 지방이라는 표현을 썼어도, 그것은 실제로 데가볼리 지역에 속하는 갈릴리 호수의 남동쪽 연안의 작은 촌락을 무대로 한 것이다. 무덤 사이에서 예수와 신들린 사람이 만나는 음산한 장면, 돼지 속으로 신들린 사람의 악령을 집어넣는 장면, 그리고 돼지 축산을 망친 시골사람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없고 그저 빨리 떠나만 달라고 간구하는 장면, 그 모두가 갈릴리 지역의 토착적 풍속과 분위기를 모르는 사람이면 묘사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마가가 신앙이 없는 유대인을 지독하게 비판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마가는 유대 일반, 특히 유대 민중을 비판한 적이 없다. 그가 비판한 것은 그 중의 특정집단인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람들일 뿐이다.

 

하여튼 마가가 갈릴리 사람이며 갈릴리의 토착적 분위기에 젖어있는 사람이며 갈릴리를 맨발로 걸어다니며 갈릴리에서 자료수집을 행하였으며, 팔레스타인 교회의 정통적 전승과 함께 팔레스타인 북방의 민간설화로서 전해지고 있던 예수에 관한 담론들을 채집하여 결합시켰다고 하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타가와 켄조오(田川建三)씨의 논증이 매우 깊이있고 치밀하고 설득력이 있다(田川建三 著, 서남동 監修, 김명식 , 原始그리스도교硏究: 제목과는 달리 마가복음서의 성격규정에 모든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동양인이 성서에 관해 쓴 보기드문 명저이다.)

 

 

 

 

부록: 바알과 야훼

 

 

이것이 바로 바알(Baal) 신이다. 라스샴라(Ras-Shamra)에 있는 바알 신전의 BC 14세기 스텔레 부조이다. 왼손에 잡고있는 나무는 비옥한 초생달 지대의 주목인 삼나무인데 성서에는 백향목으로 나온다. 예루살렘 성전도 이 나무로 지었다. 그 끝은 창모양으로 되어 있어 전투적 성격도 있다. 오른손에 치켜든 것은 인도의 인드라신이 들고 있는 금강저와 같은 벼락방망이이다. 바알이나 제우스나 인드라나 모두 벼락의 신이며, 구름을 타고 다니며 풍우기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다산성 (fertility)의 상징이며, 사랑과 풍요의 신이다. 바알은 가나안의 토착 신이며 셈족어로 주인’ ‘남편’ ‘주님의 뜻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로는 야훼보다는 이 바알을 섬기기를 좋아했다. 바알은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바알은 농경문화와 더 밀접히 관련있고 인간적이었고 질투심이 없었으며 너그러운 사랑의 신이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구약의 집요한 테마는 이 바알신앙의 어필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바알이 있었기에 야훼가 의미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스라엘 농민들에게 야훼신앙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바알의 기상콘트롤 능력을 야훼 자신이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알은 자연의 신이었고 야훼는 초자연의 신이었다. 그러나 야훼신앙 속에도 바알신앙적 요소가 깊게 침투해 들어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야훼 유일신앙은 이러한 다이내믹한 신들과의 투쟁구조 속에만 의미를 갖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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