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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2장 신화와 철학 - 피타고라스와 싯달타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2장 신화와 철학 - 피타고라스와 싯달타

건방진방랑자 2022. 2. 2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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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와 싯달타

 

 

오르페우스는 전통적인 바카스축제가 지나치게 광란의 오르지(orgy)로 흐른 것에 새로운 정신적 요소를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즉 엑스타시를 광란에 의하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초기승단의 선정(禪定)과도 같은 금욕의 방법을 강조했다. 육체적 도취를 정신적 도취로 대신하려 했던 것이다. 오르페우스를 박카스신앙의 개혁자라고 한다면, 오르페우스종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매우 혁신적이고도 신비로운 사상가가 바로 피타고라스(Pythagoras, c. BC 580~500)였다.

 

그는 이태리 남부에 있던 그리스 도시 크로톤(Croton)에 매우 신비로운 종교집단, 그러니까 나중에 사해부근에서 사해문서의 발견과 함께 고고학적 발굴로 드러나게 된 쿰란 커뮤니티와도 비슷한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그 속에서 교주 노릇을 하고 살았다. 우리는 그를 인류에게 수학을 선사한 위대한 과학자처럼 이해하고 있지만 고대세계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는 분리될 수 없었다. 종교적 통찰이 과학적 사색을 낳았고, 과학적 발견이 종교적 신념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아인슈타인과 최수운(崔水雲, 1824~64)과 김일부가 한몸이 된 그러한 류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종교단체에는 강력한 금기규칙이 있었는데 그 제1계명이 콩을 먹지말라는 것이었다. 좀 이해되기 어려운 규칙이다. 떨어뜨린 물건을 줍지말라, 흰 수탉을 만지지말라, 빵을 쪼개지말라, 쇠붙이로 불을 휘젓지말라, 됫박 위에는 앉지말라, 심장을 먹지말라, 문지방을 밟고 넘지말라, 제비와 함께 지붕을 쓰지말라, 냄비를 불에서 꺼내었을 때 냄비자리가 재 속에 남지 못하도록 그 흔적을 저어서 없애라, 이부자리에서 자고 있어났을 때 반드시 이부자리를 토닥거려 몸이 눌린 자국을 없애라 등등의 규칙은 그 나름대로 원시적인 타부로서 이해 가는 측면도 있지만, 콩을 먹지말라는 계명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여튼 된장 없이 못 사는 한국사람은 그곳에서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콩을 먹지 말라는 규율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 신앙촌을 이탈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 신앙촌을 지배한 사상의 가장 중요한 세계관은 윤회였다. 그것은 싯달타(Siddhartha)를 지배한 세계관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윤회란 우리의 영혼이, 육신의 다리(교각)들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끊임없는 여행은 결코 바람직한 사태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고통의 굴레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해야 한다. 이 이탈을 해방이라 불렀고, 불교도들은 해탈(解脫)이라 불렀던 것이다. 윤회로부터의 근원적인 벗어남이 곧 열반(涅槃, nirvāṇa)인 것이다.

 

싯달타나 피타고라스나 다 같이 이 열반을 획득하는 길을 사색을 통하여 발견하려고 했다. 싯달타나 피타고라스나 모두 최초의 출발점은 금욕이나 극기였다. 싯달타는 우파니샤드(Upanisad)의 범아일여론에서부터 고행의 수행을 출발시켰고, 피타고라스도 오르페우스종교의 금욕주의 수행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싯달타는 단순히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의 한계를 자각하고 중도를 체득하기에 이른다. 중도는 깨우침이요 앎이다. ‘붓다’(Buddha)라는 것은 바르게 안 자라는 뜻이다. 무엇을 알았는가? 그가 안 것은 선정(禪定)의 주체인 나(Atman)라는 존재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한 고리일 뿐이라는 우주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연기에 대한 깨달음은 무아(無我, anātman)의 증득(證得)으로 연결된다. 무아를 통하여 싯달타는 인간의 근본무명을 타파하기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피타고라스도 사색을 통하여 해탈의 증득을 얻으려 했다. 그가 도달한 근원적 깨달음은 바로 우주의 실상이 수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수적 질서에 대한 관조를 통해 인간은 근원적 해탈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적 질서에 관한 철학적 사색은 영혼의 정화를 가져올 수 있고, 이러한 영혼의 정화는 곧 인간이 신적 경지와 합일이 되게 하며 해탈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신비적 수리는 구극적 해탈의 문의 열쇠였던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이러한 수리적 신비주의는 사유가 감각보다 우월하며, 직관이 관찰보다 탁월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실상(Reality)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허망한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사유적 세계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존재론적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사유가 감각보다 더 고귀하며, 사유의 대상이 지각의 대상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하는 모든 희랍적 사고방식의 광맥의 원류에 피타고라스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르페우스의 요소는 피타고라스를 통하여 플라톤으로 흘러들어 갔고, 또 다시 플라톤을 거쳐 그 이후의 모든 철학에 배어들어 갔다.

 

사실 모든 철학이 매우 엄밀한 논리와 무전제적인 사고를 과시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궁극에는 항상 종교적 세계관이나 신비적 통찰을 깔고 있다. 철학은 종교를 부정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종교적 가치관으로부터 배어나오는 순수한 사유의 세계라 해야할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 감관계와 예지계를 나누고,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여지없이 둘로 나누어버리는 그의 에로스적 초월적 세계관은 본질상 모두 피타고라스(Pythagoras, c. BC 580~500) 철학의 변형태에 불과하며 그 배후에는 오르페우스종교와, 그와 유사한 희랍인들의 종교적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 희랍인들에게 있어서는 신화와 종교가 구분되지 않는다. 신화는 그들의 종교의 어휘였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기하학주의적인 이원론을 생물학주의적 일원론으로 환원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불철저한 이원론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플라톤의 이원론을 현상의 질서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시켰지만, 그의 4원인설이나 형상과 질료의 변증법에는 궁극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형태로 남아있다.

 

 

 알렉산더의 세계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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