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애정전기소설의 성격과 그 의의
이상구(Lee, Sang- Gu)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에 애정을 주제로 한 일군의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주생전」 「위경천전」 「운영전」 「상사동기」 「최척전」이 바로 이들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권필이나 조위한 등 비판적 지식인들에 의해 한문 문어체로 씌어져 있으며, 『금오신화』 가운데 「이생규장전」이나 「만복사저포기」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금오신화』가 산 사람과 죽은 여귀(女鬼)와의 사랑 등 비현실적 내용을 위주로 하고 있다면, 이들 작품은 사건과 갈등을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형상화함으로써 중세적 질곡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주생전」 「위경천전」 「운영전」은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중세적 이념과 체제 하에서 애정에 따른 질곡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상사동기」와 「최척전」은 비록 행복한 결말을 맺지만 신분적 질곡에 따른 애정갈등과 전란으로 인한 서민들의 험난한 삶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이룩한 현실주의적 성취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들 작품은 사건을 현실적 토대 위에서 형상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에서 소외된 지식인들의 낭만적인 욕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1. 머리말
임진채란 직후인 17세기 초에 애정을 주제로 한 일군의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주생전」 「위경천전」 「운영전」 「상사동기」 「최척전」 바로 이들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권필이나 조위한 등 비판적 지식인들에 의해 한문 문어체로 씌어져 있으며, 『금오신화』 가운데 「이생규장전」이나 「만복사저포기」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금오신화』가 산 사람과 죽은 여귀(女鬼)와의 사랑 등 비현실적 내용을 위주로 하고 있다면, 이들 작품은 현실적인 내용을 위주로 하고 있다. 「주생전」 「위경천전」 「운영전」은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중세적 이념과 체제 하에서 애정에 따른 질곡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상사동기」와 「최척전」은 비록 행복한 결말을 맺지만 신분적 질곡에 따른 애정갈등과 전란으로 인한 서민들의 험난한 삶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간 학계에서는 이들 작품이 주제로 삼고 있는 애정의 사회적 성격과 이들 작품이 이루어낸 현실주의적 성취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애정전기소설이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당시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금오신화』와 17세기에 창작되었던 「주생전」 및 「운영전」 등에 한정되었는데, 이는 이들 작품이 비극적인 결말을 맺고 있다는 점에 크게 힘입었다. 실로 우리 고전소설사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들 작품이 연구대상으로 부각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며, 연구자들의 논의도 비극적 구성의 의미탐구에 집중되었다【관련된 주요 논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소재영(1976), 「석주 권필론」, 『승전대논문집』 6, 숭전대 인문과학언구소. / 김일렬(1977), 「주생전 소고」, 『어문논총』 11, 경북대 국문과. / 정규복(1970), 「운영전의 문제」, 『고대문화』 11, 고려대 총학생회. / 김일렬(1971), 「운영전 고(I)」, 『어문논총』 1, 경북대 국문과. / 소재영(1971), 「운영전 연구」, 『아세아연구』 41,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 성현경(1977), 「운영전의 성격」, 『국어국문학』 76, 국어국문학회.】.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임병양란과 문학적 대응이라는 면에서 「주생전」과 함께 「최척전」이 새롭게 연구대상으로 부각되었으며, 「상사동기」는 「운영전」과 비교하는 차원에서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관련된 주요 논저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소재영(1980), 『임병양란과 문학의식』, 한국연구원. / 강진옥(1986), 「최척전에 나타난 고난과 구원의 문제」, 『이화어문논집』8, 이화여대 한국어문학연소. / 민영대(1987), 「최척전에 나타난 작자의 애정관」, 『국어국문학』 98, 국어국문학회. / 민영대(1987), 「최척전 연구」, 『한남어문학』13, 한남어문학회. / 배원룡(1981), 「운영전과 영영전의 비교고찰」, 『국제어문』2, 국제대. / 박일용(1987), 「운영전과 상사동기의 비극적 성격과 그 사회적 의미」, 『국어국문학』98, 국어국문회. / 김낙효(1989), 「영영전의 구조와 의미」, 『한국학논집』16, 한양대.】.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연구는 작품론과 작가론에 한정되어 전개되었으며, 애정전기소설을 통합적으로 고찰하려는 시각은 마련되지 못하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 애정전기소설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활력을 띠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연구경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첫째, 사실주의에 대한 관심의 부각이다. 현대문학계의 경우 이미 80년대부터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고전문학계에서는 『우리나라 문학에서 사실주의의 발생, 발전 논쟁』(사계절, 1989)이라는 제목하에 북한의 연구성과가 소개되면서 사실주의적 관점에 따른 연구가 촉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가장 주목을 받게 된 것이 바로 17세기 애정전기소설이다. 17세기 애정전기소설은 전대의 소설들과는 달리 사건과 갈등의 전개가 철저하게 현실적 토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바, 이들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산출되었던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 언제 발생했느냐는 논쟁의 대두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최치원」이나 「조신」 등 나말여초(羅末麗初)에 나온 위기(偉奇)가 최초의 소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관련된 주요 논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지준모(1975), 「전기소설의 효시는 신라에 있다-조신전을 해부함」, 『어문학』 32, 한국어문학회. / 조수학(1975), 「최치원전의 소설성」, 『영남어문학』 2, 영남어문학회. / 지준모(1976), 「신라수이전 연구」, 『어문학』 35, 한국어문학회. / 임형택(1981), 「나말여초의 전기문학」, 『한국한문학연구』 5, 한국한문학연구회. / 정학성(1982), 「전기소설의 문제」, 『한국학연구입문』, 지식산업사. / 이헌홍(1982), 「최치원전의 전기소설적 구조」, 『수련어문논집』 9, 부산여대.】. 이 주장은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80년대에 말에 이르러 몇몇 소장학자들이 우리나라 소설사의 구도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시도하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관련된 주요 논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김종철(1988), 「서사문학사에서 본 초기소설 성립문제-전기소설과 관련하여」, 『고소설연구논총』(다곡 이수봉선생 화갑 기념논총). / 신재홍(1989), 「초기 한문소설집의 전기성에 관한 반성적 고찰」, 『관악어문연구』 14,서울대 국문과. / 박희병(1992), 「한국고전소설의 발생 및 발전단계를 둘러싼 몇몇 문제에 대하여」, 『관악어문연구』17, 서울대 국문과. / 박일용(1992), 「명흔소설의 낭만적 경향성과 그 소설사적 의미」, 『관악어문연구』 17,서울대 국문과. / 이혜순(1933), 「전기소설의 전개」, 『고소설사의 제문제』(성오 소재영교수 환력기념논총), 집문당. / 박희병(1994), 「설화와 전기소설의 장르와 그 성격-전기소설의 문제」, 『한국한문학연구』 17, 한국한문학연구회 / 김종철(1995), 「고려 전기소설의 발생과 그 행방에 대한 재론」, 『어문연구』 26, 충남대 국문과. / 박희병(1995), 「전기적 민간의 미적 특질」, 『민족문학사연구』 7, 민족문학사연구소. / 설중환(1995), 「조선초기 전기소설의 개념과 형성」, 『경산 사재동박사 화갑기념논총』. / 장효현(1995), 「전기소설의 연구 성과와 과제」, 『민족문화연구』 28,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 김종철(1995), 「전기소설의 전개 양상과 그 특성」, 『민족문화연구』 28,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 윤재민(1995), 「전기소설의 인물 성격」, 『민족문화연구』 28,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 박일용(1995), 「전기계 소설의 양식적 특징과 그 소설사적 변모 양상」, 『민족문화연구』 28,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 윤재민(1996), 「전기소설의 성격」, 『한국한문학연구』 창럽 20주년기넘특집호, 한국한문학회】. 이 과정에서 '전기(傳奇)' 또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의 개념 및 성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 논의는 『삼국사기·열전』의 「온달」과 「설씨녀」, 『삼국유사』의 「김현감호」 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17세기에 창작된 「주생전」 「위경천전」 「운영전」 「상상동기」 「최척전」의 장르적 성격에 대한 논의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의 큰 흐름에 따라 애정전기소설에 대한 연구는 개별 작품론과 작가론에서부터 전기소설의 장르적 또는 미적 특성, 소설사의 전개과정에서 이들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의의, 현실주의적 성취와 한계 등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개진되었다. 그 결과 현재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수렴하여 17세기 애정전기소설의 성격과 의의를 정리하는 가운데, 작자 및 창작시기 등 그간 문제가 되어 왔던 몇몇 논란거리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2. 작품의 성격과 그 의의
1) 주생전(周生傳)
「주생전」은 이명선(李明善)이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 연표에서 권필(權韠)의 작품이라고 명기한 이후 지금까지 대략 권필의 작품으로 인정되어 왔다【김일렬(1984), 「주생전의 작품세계와 비극적 성격」, 『조선조소설의 구조와 의미』, 형설출판사.】. 물론 이 작품은 그의 문집인 『석주집(石州集)』에는 수록되어 있지않다. 이로 인해 「주생전」의 작자를 권필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금오신화』가 김시습의 문집인 『매월당집(梅月堂集)』에 수록되어 있지 않듯이, 이것을 문제삼아 이견을 제기하기는 어렵다. 소설을 폄하했던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주생전」과 같은 소설은 도리어 문집을 편찬할 때 제외시켰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몽집(華夢集)』에 수록되어 있었다는 북한 소재 「주생전」의 말미에는 ‘癸巳年仲夏 無言子 權汝章記.’【리철화 역(1963), 『임제 ·권필 작품선집』,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출판사, 359쪽.】이란 기록이 있는데, ‘여장(汝章)’은 권필의 자(字)이다. 또 계사년은 1593년인데, 당시 25세였던 권필은 전화(戰禍)를 피하여 유역(遊歷)하는 도중 송도(松都)에 들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문범두(1996), 『석주권필문학의 연구』, 국학자료원, 38쪽.】. 따라서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굳이 권필 창작설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권필의 생애나 사상적 경향 등을 고려해 볼 때도 「주생전」의 작자를 권필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권필의 호는 석주(石洲)이며, 자는 여장(汝章)이다. 1569년(선조 2)에 서교(西郊) 현석촌(玄石村, 지금의 마포 서강)에서 예부시랑(禮部詩郎)을 지낸 벽(擘)의 다섯 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세 때 진사초시(進士初試)에서 장원하고 복시(復試)에서도 장원을 하였으나, 글자 하나를 잘못 쓴 탓으로 급제에서 제외되는 비운을 겪었다. 24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義州) 용잠(龍潛)으로 몽도(蒙塗)하게 되자, 구용(具容)과 함께 그 책임을 물어 이산해(李山海)와 류성룡(柳成龍)을 처단하라고 상소를 을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석주는 정치현실에 불만을 품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은 채 강화(江華)에서 유생들을 가르치거나 전국을 유랑하면서 시주(詩酒)를 일삼았다.
35세 때인 1603년에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천거로 그의 생애 중 유일한 관직인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 받았으나, ‘녹을 위하여 허리를 굽히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라며 사직하고 강화에 은거하였다. 상당한 기간 동안 강화에 은거하던 석주는 다시 현석촌으로 돌아왔는데, 43세 때 친구인 임숙영(任叔英)이 대책시(對策試)에서 조정의 실정을 극언하는 내용을 썼다가 광해군의 명으로 삭과(削科)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석주는 흔히 「궁류시(宮柳詩)」로 알려진 「문임무숙삭과(聞任茂叔削科)」라는 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宮柳靑靑鴛亂亂 | 파릇파릇한 궁궐 버들에 꾀꼬리가 어지러이 날고, |
滿城冠盖端春暉 | 성에 가득한 수레 덮개는 봄볕에 아양을 떠네. |
朝家共貿昇半樂 | 조정에서는 모두들 승평악을 하례하는데, |
誰言危遣出布衣 | 누가 포의로 하여금 위언을 내게 하였는고. |
소재영(1983), 「권필과 그의 문학」 『고소설통론』 이우출판사 152쪽에서 재인용. 번역은 소재영 교수의 번역을 참조하여 필자가 일부 수정한 것임
이 시는 광해군의 외척인 유희분(柳希奮) 일파의 전횡을 풍자한 임숙영의 절행을 칭송한 시이다. 조수륜(趙守倫)의 서가에서 「궁류시」를 발견한 광해군은 석주를 국문(鞠問)한 후 관북(關北) 경원(慶源)으로 적배(謫配)시켰는데, 석주는 유배지로 향하던 도중 동대문 밖 주막에서 3일 동안 머물다가 장독(杖毒)을 이기지 못하여 절명하고 말았다. 이때가 광해군 4년(1612)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권필의 생애와 관련된 내용은 소재영(「권필과 그의 문학」, 앞 책), 문범두(「석주문학의 배경」, 할 책), 정민(「석주 권필 연보」,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 태학사, 1999)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발췌 정리한 것임】.
석주는 당대의 문인들이 두루 인정할 만큼 호방하고 강개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등 정치적 혼란기에 야인(野人)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철세불기(徹世不羈)한 태도를 견지하는 등 부조리한 세태에 결연히 맞서기도 하고 또 좌절하기도 했던 고독한 시인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시는 자기 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풍자하는 데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조동일(1984), 『한국문학통사』3, 44~45쪽.】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생전」은 청춘남녀의 비극적인 사람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생은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태학에 다닐 때도 동료들의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태학에 다니는 동안 연이어 과거에 낙방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장사꾼이 되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배를 물에 띄우고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어릴 때 살았던 전당(錢塘)이었다. 주생은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어릴 때 함께 놀았던 배도라는 기생을 만나 서로 연정을 느끼고 동거한다. 그러나 몰락한 양반인 주생과 기생인 배도의 사람은 오래 가지 않는다. 주생은 이웃에 사는 승상의 딸인 선화를 보고 한 눈에 반해 홀로 그리워하던중, 선화의 동생인 국영을 가르치게 된다. 국영을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승상댁에 우거하게 된 주생은 밤을 틈타 선화와 관계를 맺으며, 이후 주생과 선화는 백년해로를 기약하고 매일 밤 운우지정을 나눈다. 그러나 주생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배도에게 이 사실이 탄로되면서 주생은 어쩔 수 없이 선화와 헤어져 다시 배도의 집으로 돌아온다. 주생이 배도의 집에 머무는 사이 국영이 뜻하지 않게 죽고, 배도마저 병으로 죽는다. 갈 곳이 없게 된 주생은 호주(湖州)에 사는 친척인 장노인에게 의탁하는데, 뜻하지 않게 장노인의 주선으로 선화와 혼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주생이 손을 꼽아가며 혼인날을 기다리던 중 왜적이 조선을 침범하고, 주생은 구원병으로 징발되어 부득이 조선으로 온다. 다음 해 봄에 명나라 군사는 왜적을 대파하고 경상도까지 추격을 했지만, 주생은 한시도 선화를 잊지 못해 병이 들어 군대를 따라 남하하지 못하고 송경(松京)의 객사에 머문다. 이때 작자가 송경에 갔다가 주생을 만나서 그에게 직접 이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아름다운 기약을 슬퍼한 나머지 글로 쓴다.
「주생전」은 「이생규장전」과 같은 앞 시기의 애정을 주제로 한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는 청춘 남녀의 비극적인 애정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문어체 한문으로 이루어져 있거나 삽입시를 활용한 서술방식 등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주생전」은 전대의 전기소설과 다른 면 또한 적지 않은데, 그 중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실성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과 같은 전기소설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로 흔히 인귀교환(人鬼交歡)과 같은 전기성(傳奇性) 또는 환상성(幻想性)을 들고 있다. 그런데 「주생전」에는 인귀교환이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건 및 갈등의 전개가 철저하게 현실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주생전」은 전기소설의 환상성을 일정하게 극복하고 현실세계의 질곡과 갈등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삼각관계에 의한 애정갈등의 형상화이다. 대부분의 전기소설에서 남녀 주인공의 애정은 상호 독점적이어서 그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성격을 지닌다【박회병(1997), 「전기적 인간의 미적 특질」, 『한국전기소설의 미학』, 돌베개, 39쪽.】. 이로 인해 애정상의 장애가 발생했을 경우 주인공들은 기꺼이 현실적인 삶을 포기하거나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데 「주생전」의 주생은 처음에는 기생인 배도를 사랑했다가 다시 귀족의 딸이라고 할 수 있는 선화를 사랑하며, 배도는 이러한 주생의 배신으로 인해 끝내 죽고 만다. 이런 점에서 「주생전」은 애정의 삼각관계를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삼각관계의 구도 자체를 「주생전」의 의의로 삼을 수는 없다. 「주생전」의 진정한 의의는 이러한 삼각관계의 구도를 통해 사람과 출세, 이성과 욕망의 어름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의 착찹한 관계와 미묘한 심리를 리얼하게 그려낸 점【임형택(1992), 「전기소설의 연애주제와 위경천전」, 『동양학』22,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35쪽.】이라고 할 것이다.
셋째, 등장인물이 중국인이며 소설의 주요 무대도 중국이라는 점이다. 『금오신화』는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 모두 우리나라 사람인 것은 물론 그들의 활동무대도 우리나라이다. 그런데 「주생전」은 주인공인 주생을 비롯하여 선화와 배도 등 주요 인물이 모두 중국 사람일뿐만 아니라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도 중국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주생전」은 『금오신화』가 이룩한 자주적 향토주의를 정당하게 계승하지 못했으며, 현실주의적 성격이라는 측면예서도 일정하게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서인석(1995), 「17세기 전후 민족현실과 소설의 발전」, 『민족문학사 강좌(성)』,창작과비평사, 185쪽.】. 그러나 이는 저작 동기에서 밝힌 대로, 작자인 권필이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참여했던 명나라 군사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화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위경천전(韋敬天傳)
「위경천전」은 1992년 임형택 교수가 『고담요람(古談要覽)』이라는 책에서 찾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고담요람』에는 ‘위경천전(韋敬天傳)’이라는 제목 아래 ‘권석주제(權石洲製)’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는데, 임형택 교수는 권필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위경천전」은 문장표현, 삽입시의 수준, 장면의 형상화와 사건의 구성 등에서 「주생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두 작품을 동일인의 작으로 볼 수 없는바, 「주생전」을 읽고 자극을 받은 어느 무명 문인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임형택, 「전기소설의 연애주제와 위경천전」의 「추기」, 앞 책, 38쪽.】. 그러나 근래 정민 교수는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여 권필의 작품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다음 네 가지를 들고있다.
① 필사자가 작품 제목 아래 ‘權石洲製’라고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② 「위경천전」과 「주생전」은 창작 원리나 의식면에서 한 사람의 솜씨로 이루어져 있다.
③ 삽입시도 「위경천전」은 「주생전」과 결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낮은 수준이 아니다.
④ 문장의 표현면이나 장면의 형상화나 사건 구성의 기교면에서도 「위경천전」은 결코 「주생전」에 밑돌지 않는다【정민(1994),「위경천전의 낭만적 비극성」, 『한국학논집』24,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184~287쪽.】.
임형택 교수의 주장대로 현존 「위경천전」은 오자(誤字)가 많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문장은 물론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산만하고 거친 편이다. 이로 인해 걸출한 시인이었던 권필이 이렇듯 문장을 거칠게 쓸리 없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 가지고 「위경천전」의 원작자가 권필일 수 없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한문 문장의 경우 한두 글자의 오자만 발생해도 문장 전체가 거칠고 산만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위경천전」에 나타나는 많은 오자는 필사자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장면의 형상화나 사건의 구성 문제도 전체적으로 「주생전」에 비해 뒤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치밀하게 이루어진 곳도 없지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위경천전」의 작자 문제는 앞으로 좀더 치밀하게 검토하고, 또 방증 자료를 갖추어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담요람』 외에 다른 자료가 없는 현재 상황에서는 권필의 창작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리라 생각한다
「위경천전」의 줄거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위경천은 타고 난 자질이 총명하고 재주가 빼어났으며, 15세에 문장을 이루어 당대에는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다. 임진년 봄에 위생은 친구인 장생과 함께 배를 타고 강남 지역을 유람하면서 시주(詩酒)를 즐기는데, 하루는 장생이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 강둑을 배회하다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노래 소리를 따라 한 집에 다다르게 된다. 화려하게 꾸며진 그 집에서는 많은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10여 명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춤을 추며 놀고 있었다. 위생이 몰래 그 집에 들어가 이를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어떤 사내가 방에서 나와 대문을 잠그고 아가씨들에게 그만 들어가 자라고 이른다. 이로 인해 위생은 조롱에 갇힌 새처럼 그 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날이 새어 대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경천은 한 침실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끝내 욕정을 참지 못하고 침실로 뛰어든다. 처음에 심하게 거부하던 처녀(소숙방)는 위생의 온화한 말투를 보고는 마침내 기꺼이 운우지정을 나눈 뒤, 다음 날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진다. 위생은 날이 밝아 대문이 열리자 급히 도망쳐 배로 돌아와 이 사실을 장생에게 이야기한다. 장생은 위생의 행동을 꾸짖고, 위생이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사이에 배를 몰아 고향인 전당(錢塘)으로 돌아와 버린다. 이후 위생과 소낭자는 각각 서로를 잊지 못해 병이 들어 눕게 되나, 둘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 양쪽 부모의 주선으로 마침내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 해 8월 왜적이 조선을 침략하자, 정통제군사로 임명된 위생의 부친은 서기를 맡길 만한 사람이 없어 위생을 부른다. 위생은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전쟁에 참여했으나 소낭자를 그리다가 예전의 병의 도져 죽으며, 소낭자 역시 위생의 상여를 보고 목메어 자결한다.
「위경천전」은 「주생전」과 매우 유사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두 작품은 모두 중국의 강남 지역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남녀의 만남과 이별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두 작품은 주인공이 배를 타고 강호를 노닐다가 연인을 만나 인연을 맺으며,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조선에 왔다가 연인을 못 잊어 병이 든다는 상황설정까지도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사한 상황설정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의 서술 초점은 사뭇 다르다. 「위경천전」은 위생과 소숙방의 지고지순하면서도 비극적인 사람에 서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위경천전」에서는 청춘 남녀의 사랑과 이들의 사랑을 비극으로 이끄는 현실적 제약만이 문제 거리로 설정되고, 또 그만큼 사건의 전개과정이 단순하다. 그러나 「주생전」은 주생의 삶의 역정에 주로 서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로 인해 「주생전」은 주생과 배도의 사랑 및 갈등, 주생과 선화의 사랑 및 갈등이 주생의 현실적 처지 및 지향과 뒤얽혀 사건이 한결 복잡하게 전개된다. 「위경천전」은 위생과 소숙방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끝을 맺은 데 반해, 「주생전」은 주생이 종군해서 병이 든 상태로 끝을 맺고 있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서술 초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경천전」과 「주생전」의 차이는 주인공의 성향에서도 발견된다. 위경천은 기본적으로 감상적이며 격정적인 인물이다. 위생은 침실에 잠들어 있는 소숙방을 보고 강렬한 욕정에 휩싸이는데, 그 순간 자신의 위험한 불장난이 불러올 재앙을 깨닫고 내적 갈등을 심하게 겪는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욕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죽음을 각오한 채 소숙방의 침실로 뛰어든다. 이런 점에서 위생은 애정추구에 목숨을 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주생전」의 주생도 격정적이라는 점에서는 위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도 선화를 처음 본 순간 욕정에 휩싸여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뛰어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생은 선화와 인연을 맺기 위해 동거하던 배도에게 거짓말을 하며, 선화의 남동생인 국영을 가르치게 된 것을 빌미로 노승상 댁에 우거하면서 틈을 엿보는 치밀함을 보인다. 또 노승상 댁에서도 선화와 만날 기회를 잡지 못하자, 마침내 ‘일이 이루어지면 귀하게 될 것이요, 이루어지지 않으면 벌을 받아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으로 선화의 방에 뛰어든다. 이런 점에서 주생이 선화에게 접근했던 것은 순수한 애정만으로 보기 어렵다. 즉 주생은 선화와 결연을 통해 일정하게 신분상승을 꾀했으며, 그러한 만큼 주생은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주생과 위경천의 인물 성향에 대해서는 정병호(1998)의 「주생전과 위경천전의 비교 고찰」(『고소설연구』 6, 고소설학회)을 참조하기 바람.】.
이렇듯 「위경천전」은 「주생전」과 유사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일정하게 변별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은 모두 「이생규장전」과 같은 애정주제의 전기소설을 이어받되, 환상성을 극복하고 모든 사건을 현실적 토대 위에서 형상화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3) 운영전(雲英傳)
「운영전」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창작연대는 1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먼저 작품 내용에 ‘萬曆辛丑’【국립도서관본 「운영전」, 2쪽.】이라는 년도와 ‘갓 전란을 겪은 뒤인지라 장안의 궁궐과 성안에 가득했던 집들이 텅 빈 채 남아 있지 않았다[新經兵燹之餘, 長安宮闕, 滿城華屋, 蕩然無有].’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운영전」의 서두에는 임진왜란 직후 황패화된 서울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그 중 일부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만력 신축년인 1601년 이후 임진왜란의 상흔이 분명하게 남아 있던 시점에서 창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국립도서관본에는 ‘柳泳傍 卽雲英偉’이라는 제목 아래 ‘大明天啓二十一年’이라는 간기(1641년)가 필사되어 있는데, 이는 국립도서관본이 저본으로 삼았던 책에 본래 적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신경숙(1990), 「운영전의 반성적 검토」, 『한성어문학』, 한성대, 59쪽.】. 이렇게 볼 때, 「운영전」은 1601년에서 1641년 사이에 창작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하겠다.
「운영전」은 몰락한 선비인 유영이 안평대군의 사처(私處)였던 수성궁을 구경하러 갔다가 안평대군의 궁녀였던 운영과 김진사의 혼령을 만나 그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장헌대왕의 아들 8대군 가운데 안평대군이 가장 영리하고 뛰어났다. 대군은 당대의 문사들과 어울려 지내지만 그들의 문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궁녀 10명을 뽑아 시문 등을 가르친다. 이 과정에서 대군은 궁녀들에게 궁 밖의 사람들과 일체 접촉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 유생인 김진사가 안평대군을 찾아오는데, 대군은 김진사가 어리다고 생각하여 궁녀들로 하여금 곁에서 거문고를 타거나 묵을 갈게 한다. 이 자리에서 운영과 김진사는 서로 연정을 느끼지만 마음을 토로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며칠 뒤 안평대군의 부름으로 김진사가 다시 수성궁에 오게 되는데, 운영은 남 몰래 자신의 마음을 적은 편지를 김진사에게 전달한다. 편지를 통해 운영의 마음을 알게 된 김진사는 수성궁에 출입하는 무녀를 통해 답서를 전한다. 이후 운영과 김진사는 동료 궁녀인 자란과 김진사의 노비인 특의 도움으로 밤마다 수성궁에서 밀회를 즐긴다. 그러나 이들의 밀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대군이 운영의 시와 김진사의 상량문을 통해 이들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운영과 김진사는 달아날 계획을 세우고 특을통해 운영의 모든 재물을 궁궐 밖으로 내보낸다. 그러나 노비 특이 중간에서 이 재물을 가로채기 위해 운영과 김진사의 관계를 폭로하여 대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한다. 화가 난 대군은 궁녀들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운영과 함께 거처했던 5명의 궁녀들을 붙잡아 직접 문초하는데, 궁녀들은 한결같이 남녀의 정욕은 민간의 자연스런 마음이라며 항변한다. 이에 대군은 운영을 별당에 가두고 나머지 궁녀들은 모두 풀어주나, 이날 밤 운영은 자결을 하고 만다. 운영이 죽은 뒤 김진사는 운영의 명복을 빌어주려고 쌀 40석을 준비했으나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노비 특을 불러 지난 잘못을 용서해 주고 절에 올라가 운영의 명복을 빌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특은 절에 올라가 명복을 빌기는커녕 패악한 짓만을 일삼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진사는 몸소 절에 올라가 운영의 명복을 빌고, 또 특을 죽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이후 7일만에 특은 김진사의 소원대로 함정에 빠져 죽으며, 김진사 역시 4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다가 죽고 만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유영은 그 뒤에 침식을 전폐하고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그가 어디에서 생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운영전」은 궁녀인 운영과 젊은 유생인 김진사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해 중세적 이념과 사회질서의 반인륜적인 측면을 문제삼은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운영전」은 「주생전」이나 「위경천전」처럼 「이생규장전」과 같은 애정전기소설의 주제를 이어받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운영전」이 「주생전」이나 「위경천전」과 다른 점은 애정의 파탄을 전란과 연계시키지 않고 사회 내부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장벽을 구체적으로 문제삼고 있다는 점【김종철(1995), 「전기소설의 전개 양상과 그 특성」, 앞 책, 47쪽.】이다. 「주생전」이나 「위경천전」은 남녀의 정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는데, 이는 예교의 속박으로부터 삶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저항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궁극적으로 신분의 차이와 같은 사회적 장벽을 직접적으로 문제삼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 두 작품에서 남녀 주인공은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단 결연을 성취하며, 애정의 파탄은 예기치 않은 전란에서 기인한 것으로 형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영전」은 궁녀인 운영과 젊은 유생인 김진사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해 중세적 사회질서와 윤리관을 정면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운명전」의 소설사적 의의는 여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운영전」은 고전소설에서는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현실주의적 성취를 이루었다. 특히 안평대군과 궁녀들의 갈등을 서술자의 주관적인 시각이나 관념적 재단을 배제하고 서사세계의 갈등과 귀결을 통해 현실세계의 갈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는데, 이는 중세적 이념과 사회질서의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했던 작가 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운영전」에서 안평대군의 성시(盛時)는 몽유자 유영처럼 철저하게 소외된 지식인이 중세적 이념과 틀 내에서 현실적으로 희구해 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시절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운영과 김진사는 바로 그 안평대군 시절에 서로의 사랑을 실현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운영전」은 현실세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지식인이 중세적 이념과 틀 내에서 현실적으로 희구해 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시절로서 안평대군의 성시를 상정해 놓고, 운영과 김진사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그러한 시절 역시 인간의 진정한 삶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운영전」은 중세적 이념과 체제에 입각해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진정한 삶은 실현될 수 없다는 작가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안평대군과 궁녀들의 갈등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실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영전」은 객관적인 서술시각이 전일하게 관철되지 못한 한계 또한 아울러 지니고 있다. 김진사는 자신의 노비인 특에게 속아 운영의 재물를 모두 탈취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어 처단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러한 특에게 쌀 40석을 주어 운영의 명복을 빌어달라고 부탁한다. 또 특이 절에서 운영의 명복을 빌기는커녕 패악한 짓만을 저지르자 김진사는 부처에게 특을 처단해 달라고 기원하며, 김진사의 기원대로 특은 함정에 빠져 죽는다. 여기에서 노비 특의 형상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점차 성장해 가는 노비계층의 현실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노비계층이 아무리 성장했다고 할지라도 주인인 김진사가 부처의 영험을 빌어 노비 특을 처단한다는 해결방식은 비현실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즉 「운영전」에서 김진사와 노비 특의 대립은 노비 특의 악행을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관념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대목은 서술자가 관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사건의 해결에 초점을 맞춘 결과 서사세계의 갈등이 지니는 현실성은 극히 축소되고 비현실적인 해결과정이 서사세계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운영전」의 현실주의직 성취와 한계에 대해서는 필자(1998)의 「운영전의 갈등양상과 작가의식」(『고소설 연구』 5, 고소설학회)을 참조하기 바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운영전」은 중세적 이념과 질서의 반인륜적인 측면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또 사랑의 시말(始末)이 이전의 전기소설처럼 주인공 개인사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확장된 공간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주며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정출헌(1996), 「운영전의 애정갈등과 그 지극적 성격」, 『한국고소설사의 시각』, 국학자료원, 597쪽.】도 「운영전」이 개척한 새로운 경지로 평가할 만하다.
4) 상사동기(想思洞記)
「상사동기」는 「영영전(英英傳)」라고도 불리었는데, 젊은 유생인 김생이 회산대군의 궁녀인 영영을 사랑하게 되어 우여곡절 끝에 결연을 맺는다는 이야기이다. 「상사동기」도 「운영전」처럼 작자나 창작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이 17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것은 다른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권전(權佺)의 『석노유고(釋老遺稿)』에 ‘余罹病久矣, 病中無聊莫甚, 使兒輩讀想思洞記’【박노춘의 「고전문학관계기록 3편」(『숭전어문학』 5, 숭전대 국어국문학회, 1976)에서 재인용.】라는 기록이 있는데, 권전은 권필의 조카로 1583년에 태어나 1651년에 죽었다【차용주(1989), 『한국한문소설사』, 아세아문화사, 270쪽.】. ‘권전이 병중에 무료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상사동기」를 읽게 하여 들었다’는 점으로 보아, 이 작품은 권전이 죽은 1651년 이전에 이미 창작되어 널리 읽혔을 가능성이 높다.
「상사동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성균관 진사인 김생은 어느 날 성균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우연히 미인(영영)을 보고 반하여 뒤를 좇는다. 영영이 상사동의 한 민가로 들어가자, 김생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이후 김생은 영영을 생각하며 근심에 쌓여 있는데, 하인 막동이 그 까닭을 알고 영영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김생은 막동이 알려준 방법대로 손님을 전송하는 사람으로 가장하여 영영이 들어간 집을 빌려 며칠을 머물면서 동정을 살핀다. 그 집 주인은 칠순 노파였는데, 뒤늦게 김생이 자기 집에 온 까닭을 알고 영영의 처지를 이야기한다. 영영은 자신의 조카이지만 회산대군의 시녀이기 때문에 다시 만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생이 한번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간곡하게 사정하자, 노파는 이미 죽은 영영의 모친 제사를 핑계로 영영을 상사동으로 오게 한다. 노파의 집에 이른 영영은 김생을 사모하지만 회산군이 항상 자신을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기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뒤, 김생에게 회산대군이 외출하는 보름날 저녁에 궁중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보름날 저녁에 김생은 영영이 가르쳐 준대로 무너진 궁벽 틈을 이용해 궁중 안으로 들어가 영영과 운우지정을 나눈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김생은 편지라도 전하고자 했지만 상사동 노파마저 죽었기 때문에 전할 길도 없는지라, 모든 희망을 잃고 몽상에 젖어 지낸다. 3년 뒤 영영에 대한 그리움이 점차 줄어들자, 김생은 다시 학업에 전념하여 과거에 급제한다. 3일 동안 유가(遊街)를 벌이는 사이에 김생은 회산군댁 앞을 지나다가 옛 일이 생각나서 일부러 취한 척하고 말에서 떨어진다. 이를 본 회산군 부인이 김생을 부축해서 집안으로 모시게 하며, 여기에서 김생은 영영과 재회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눈길만 주고받는다. 김생은 영영이 몰래 전해준 편지만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영영의 편지를 읽고는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마침내 병들어 눕는다. 동창생인 이정자가 문병을 왔다가 김생의 사연을 듣고는, 회산군댁 부인이 자기의 고모이며 회산군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이후 김생과 영영은 이정자의 도움으로 다시 만나게 되며, 김생은 공명을 버리고 끝까지 장가들지 않은 채 영영과 함께 생애를 마친다.
「상사동기」는 「운영전」과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두 작품의 남주인공인 김진사와 김생 모두 진사과에 합격한 젊은 유생이며, 여주인공인 운영과 영영은 실존했던 인물인 안평대군과 회산대군의 궁녀라는 점이다. 즉 두 작품은 모두 궁녀와 젊은 유생의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또 남주인공이 사랑을 실현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각각 노비인 특과 막동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도 일치하고 있으며, 「운영전」의 무녀와 「상사동기」의 노파가 두 연인의 만남을 중개하는 상황설정도 유사하다. 따라서 「운영전」과 「상사동기」는 서로 실질적인 영향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상사동기」는 「운영전」과 마찬가지로 궁녀와 젊은 유생의 사랑을 통해 자연스런 감정의 발현인 남녀의 애정을 억압하는 중세적 이념과 틀을 문제삼고 있다. 그러나 「상사동기」는 「운영전」만큼 이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했다고 보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이, 「운영전」은 비록 몽유록이라는 형식적 장치를 빌기는 했지만 운영과 김진사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중세적 이념과 틀의 반인륜적 측면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상사통기」는 궁녀인 영영과 젊은 유생인 김생이 행복한 결말을 맺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즉 「상사동기」는 영영과 김생의 사랑을 낭만적인 결연담의 형식으로 호도함으로써 중세적 이념과 틀의 반인륜적 측면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박일용(1993), 「운영전의 비극적 성격과 그 사회적 의미」, 『조선시대의 애정소설』, 집문당, 187쪽.】. 다만, 소설의 발전과정으로 볼 때, 「상사동기」의 행복한 결말은 전기소설의 환상성을 극복하면서 통속적인 국문소설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진전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5) 최척전(崔陟傳)
「최척전」은 「기달록(奇達錄)」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1567~1649)이 광해군 30년인 1621년에 지은 작품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최척전」의 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남원의 주포에 머물고 있었는데, 때마침 최척이 방문해서 자기가 겪었던 일을 이처림 이야기하고이어서 그 전말을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경개를 대략기술하였다. 천계 원년 신유년 윤이월 소옹이 짓다.
余流寓南原之周浦, 陟時來訪余, 道其事如此, 請乃記其顚末, 無使湮沒. 不獲已略擧其槪. 天啓元年, 辛酉潤二月日, 素翁題. 「최척전」, 『필사본 고전소설전집』 3, 아세아문화사, 198쪽.
위의 기록은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최척전」의 말미에 씌어 있는 것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최척전」의 말미에도 똑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다만 ‘소옹제(素翁題)’ 대신에 ‘소옹(素翁) 조위한(趙緯韓)’이라고 되어 있는 것만이 다르다. 천계원년(天啓元年)은 청태조(淸太祖) 6년이며, 소옹(素翁)은 조위한의 자(字)이다. 이들 기록으로 보아 「최척전」은 조위한이 1621년에 지은 것임을 알 수있다. 또 이덕무(李德懋)의 『아정유고(雅亭遺稿)』에 “나는 일찍이 소옹의 최척전을 읽어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余嘗讀素翁崔涉傳 而詳知也.].”【이덕무, 「雅亭遺稿」 7, 『靑莊館全書』제15권.】라는 기록이 있는바, 「최척전」의 작자는 조위한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조위한의 호는 현곡(玄谷)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1567년 서울 서부의 반석방(盤石坊)에서 아버지 양정(楊庭)과 어머니 한씨(韓氏)의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세 때 이미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으며, 15세 때는 『사서삼경』을 외웠고, 16세 때는 선소(先素)의 고문(古文)을 널리 섭렵했다고 한다. 26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 연천과 토산 등지로 피난하였으며, 그 해 겨울에 다시 어머니의 친정인 남원으로 내려와 피난살이를 하였다. 남원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잠시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전란의 와중에서 딸·모친·아내 등을 잃은 나머지 실의에 차서 중국의 명승지를 유람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는 35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43세 때에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비로소 관계에 진출하였다. 관계에 진출한 이후 예조정랑·지제교 등을 역임하였으나 45세 때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면서 너무 사치스럽게 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으며, 47세 때는 정협의 무고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이후 그는 문란한 정치현실에 실망하여 가족을 이끌고 남원의 주포(周浦)로 이사를 하였으며, 권필· 이안눌·허균 등 뜻맞는 벗들과 어울려 시주와 여행을 즐기면서 생활하였다. 그가 「최척전」을 지은 것도 이 시기였다.
남원에 은거하던 조위한은 57세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다시 벼슬생활을 시작하는데, 사헌부 편수관·동부승지·예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76세 때 인조의 특명으로 공조참판에 제수되고, 80세에는 정2품 벼슬 이상을 한 사람에게 경노와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다가 83세 되던 해인 1649년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문집으로는 14권 3책으로 된 『현곡집(玄谷集)』이 남아 있으며, 광해군 시절 백성들의 처참한 생활을 보고 우리말로 「류민탄(流民嘆)」이라는 가사를 지었다고 하나 현재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조위한의 생애와 관련된 내용은 민영대의 『조위한과 최척전』(아세아문화사, 1993)의 연구성과를 발췌·정리한 것임.】.
「최척전」은 동아시아를 휩쓴 정유재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무대로 남녀의 애정 문제와 함께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친구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던 최척은 부친의 병에 따라 정상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최척이 글을 읽을 때마다 어떤 아가씨가 창 밑에 숨어 몰래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던 어느 날 창 틈으로 구혼의 내용이 담긴 종이 쪽지 하나가 들어온다. 쪽지를 보낸 사람은 서울의 사족 출신인 옥영이었으며, 그녀는 모친인 과부 심색를 따라 친척인 정상사 집으로 피난을 온 터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은 아버지를 통해 정상사에게 구혼을 하지만, 심씨가 최척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구혼을 거절한다. 옥영은 심씨를 설득하여 최척과 약흔을 하나, 최척이 의병으로 뽑혀 가는 바람에 둘은 혼례를 치르지 못한다. 혼례 일이 되어도 최척이 돌아오지 않자, 부유한 양생이 정상사 부부를 통해 옥영에게 구혼하여 심씨의 허락을 받는다. 이에 옥영은 자결을 기도함으로써 양생과의 혼인을 파기시키며, 이러한 내막을 전해들은 최척은 의병장에게 호소하여 집으로 돌아와 옥영과 혼례를 치른다. 결혼한 최척과 옥영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오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여 매월 초하루만 되면 만복사에 올라가 기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육금불이 옥영의 꿈에 나타나 아들을 점지해 주며, 옥영은 아들 몽석을 남는다. 이후 최척과 옥영은 애정이 더욱 돈독해져 하루도 떨어지지 않고 생활한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한 생활은 오래 가지 않는다. 정유년 8월에 왜구가 남원을 함락함에 최척은 가족을 이끌고 연곡사로 피난을 갔는데, 최척이 구례로 식량을 구하러 가는 사이에 왜적이 연곡사에 쳐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붙잡아 가버린다 왜적이 물러간 뒤 연곡사로 돌아온 최척은 가족을 찾아 섬진강 등을 헤매지만 찾지 못하고 남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명나라 장수인 여유문을 만나 그와 함께 중국으로 간다. 최척의 부친 최숙과 장모 최씨는 포로로 붙들려 가는 도중 왜적이 방심한 들을 타 연곡사로 달아나 오는데,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손자인 몽석을 찾아 함께 남윈으로 돌아가 옛집을 수리하고 산다. 한편, 남장을 하고 있던 옥영은 외병인 돈우에게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간다. 돈우는 본래 배를 타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옥영을 남자로 알고 배에 태워 함께 장사를 다닌다. 중국으로 간 최척은 여유문이 죽자, 주우라는 사람을 따라 배를 타고 차를 팔면서 떠돌다가 안남에 이른다. 이때 일본인 상선 10여 척도 안남에 정박해 있었는데, 밤에 문득 일본인 상선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린다. 최척이 쓸쓸한 마음에 피리를 꺼내 불자, 일본인 배에서 자신이 지어서 옥영에게 들려주었던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려온다. 최척과 옥영은 이렇듯 머나먼 이국에서 기적적으로 만나 중국에서 살게 되며, 그 사이 장육금불의 현몽과 함께 둘째 아들 몽선을 낳는다. 몽선이 장성하여 장가를 보내려고 할 즈음에 이웃에 홍도라는 처녀가 이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홍도는 아버지가 조선에 출군했다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가서 마음속에 맺힌 원한을 풀고자 했는데, 몽선이 혼처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모에게 중매를 부탁한다. 최척은 홍도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며느리로 맞이하여 함께 산다.
다음 해인 무오년에 오랑캐 추장이 요양을 침범하자, 최척은 부득이 부총인 오세영을 따라 전쟁에 참여했다가 오랑캐의 포로가 된다. 이때 강홍립을 따라 전쟁에 참여했던 몽석도 강홍립이 항복하는 바람에 포로가 되어 최척과 함께 어떤 오람캐의 뜰에 감금된다. 최척과 몽석은 뒤늦게 서로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말고 통곡하는데, 늙은 오랑캐 병사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그 오랑캐는 자신도 조선 사람이었는데 벼슬아치들의 학정을 견디지 못해 오랑캐 땅에 살게 되었다며 최척과 몽석을 풀어준다. 최척과 몽석은 고국으로 돌아오던 도중 홍도의 부친인 진위경을 만나 함께 남원에 이르러서 부친과 장모를 모시고 산다. 한편 중국에 남아 있던 옥영은 최척이 살아 남았다면 조선으로 갔으리라 생각하여 몽선과 홍도를 데리고 조선행을 감행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온갖 고난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남원에 이르러 마침내 온 가족과 상봉하게 된다. 이후로 최척과 옥영은 위로는 아버님과 장모님을 잘 받들고, 아래로는 자식과 며느리들을 잘 보살피며 서문 밖 옛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이상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최척전」은 남녀 주인공의 애정을 바탕으로 하면서 전란으로 인해 야기된 한 가족의 이산과 기적적인 재회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최척전」에서 최척과 옥영이 결연하는 과정은 「주생전」이나 「위경천전」 등과 마찬가지로 전기소설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정 갈등 및 그 전개 양상은 다소 차이가 있다. 「주생전」이나 「위경천전」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우연히 연인을 만나 가문의 멸망과 자신의 파멸을 부르는 ‘위험한 불장난’을 저지르긴 하지만, 자신들의 애정을 성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애로운 부모들의 헤아림으로 일단 애정을 성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해 「주생전」이나 「위정천전」에서는 남녀의 애정에 따른 현실적 제약이 구체화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달리 「최척전」에서 최척과 옥영, 특히 옥영은 자신의 애정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그녀는 최척에게 먼저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대담할 뿐만 아니라, 최척의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현명함을 보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척전」은 남녀 애정에 따른 갈등과 현실적제약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최척전」은 전쟁의 형상화 및 내적 성격의 측면에서도 「주생전」이나 「위경천전」 등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전쟁 모티프는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에도 나타나는 바, 「주생전」이나 「위경천전」은 물론 「최척전」의 전쟁 모티프도 이들 전기소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들 작품 모두에서 전쟁은 주인공들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척전」에서의 전쟁은 여타의 전기소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최척전」을 제의한 여타의 작품에서는 전쟁이 홍건적의 침입이나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구체성을 띠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전쟁을 사회적 측면이나 민중적 삶과 연계시키지 않고 개인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이들 작품에서 전쟁은 그저 남녀 주인공의 애정을 파탄시키는 운명적 불행 그 자체이거나 우연한 불행의 학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최척전」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한 가족이 붙들려 가거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 상황과 민중들이 겪는 고통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는 작품의 후기에 씌어 있는 대로 「최척전」이 사실에 기초하여 창작된 것과 무관하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최척전」에 여실하게 그려진 전쟁의 참상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전쟁이 민중의 삶에 어떠한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우는가에 대한 작가의 탐구정신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최척전」에서의 전쟁은 남녀 주인공의 애정을 파탄시키는 계기로서만이 아니라 민중들의 고통과 생존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는 비극적이며 극한적인 상황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렇듯 「최척전」은 애정 갈등은 물론 전쟁의 참상을 한 가족의 이합집산을 중심으로 사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초기소설의 리얼리즘이 갖는 한계를 크게 극복하면서 17세기 소설로 하여금 리얼리즘의 진경(眞境)을 이룩하게 하는 데 선도적으로 기여 했다는 평가【박희병(1990), 「최척전」, 『한국고전소설작품론』, 집문당, 91쪽.】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최척전」 또한 일정하게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즉 「최척전」은 최척 일가의 기적적인 재회를 부처님의 가호라는 초현실적인 힘의 작용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분명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단순히 한계나 문제점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척전」은 실로 「기우록」이라 일컬을 만큼 최척 일가의 이산과 기적적인 재회를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머나먼 이국에서 최척과 옥영의 재회, 오랑캐 감옥에서 최척과 몽석의 만남, 홍도와 진위경의 만남 등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큼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다. 때로 현실은 소설보다도 더 소설적인 경우도 없지 않기에, 이것은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적인 만남이 아무리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우연한 기적 그 자체로 형상화한다면, 소설 내적 필연성이나 통일성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최척전」의 불교적 요소는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기적같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데 대해 작가가 나름대로 필연성과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도입한 측면이 없지 않다【박희병(1990), 「최척전」, 앞 책 96쪽.】. 요컨대 최척 일가의 기적적인 재회를 부처님의 가호라는 초현실적인 힘의 작용으로 그린 것은 소설 내적 필연성과 통일성을 갖추는데 기여하고 있는 바, 그 내용이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주의적 정신에 배치된다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편,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홍도(紅桃) 이야기」가 있는데, 줄거리가「최척전」과 거의 같아 주목된다. 줄거리가 같은 점으로 인해 「홍도 이야기」가 먼저 설화형태로 성립되고, 「최척전」은 이를 토대로 소설화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우야담』이 완성된 시기(1621년)와 「최척전」이 창작된 시기가 거의 동일한바, 「홍도 이야기」가 「최척전」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두 작품이 서로 영향관계가 없다는 것은 등장인물의 명칭이 심하게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최척전」에서 최척과 옥영이 부부간으로 나오며, 홍도는 중국 사람으로 최척의 며느리이다. 그런데 「홍도 이야기」에서는 정생(鄭生)과 홍도가 부부간으로 되어 있으며, 옥영이라는 이름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따라서 「홍도 이야기」는 최척의 이야기가 유포되는 과정에서 사건의 줄거리를 중심으로 기록·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3. 맺음말
이상에서 17세기 애정전기소설인 「주생전」 「위경천전」 「운영전」 「상사동기」 「최척전」의 작품 성격과 그 의의를 기존의 연구성과를 수렴하는 가운데 살펴보았다. 이들 작품들은 15세기에 창작된 『금오신화』 중 「이생규장전」과 「만복사저포기」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한문문어체, 삽입시, 애정주제 등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애정전기소설은 「이생규장전」이나 「만복사저포기」와 다른 점 또한 없지 않다. 두 계열간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낭만성과 현실성의 문제이다. 「이생규장전」과 「만복사저포기」에는 산 사람이 여귀와 사랑을 나누는 비현실적인 장면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17세기 애정전기소설에서는 사건 및 갈등의 전개가 철저하게 현실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17세기 애정전기소설은 전기소설의 본래적 자질로 거론되어 왔던 환상성을 일정하게 극복하는 진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이룩한 현실주의적 성취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들 작품은 사건을 현실적 토대 위에서 형상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에서 소외된 지식인들의 낭만적 욕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주생전」에서 주생과 선화의 사랑을 들 수 있다. 귀족집안의 딸인 선화는 주생의 얼굴도 모른 상태에서 주생이 자기방에 들어오자 기꺼이 맞아들여 동침을 한다. 이러한 일은 17세기적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더구나 주생은 몰락한 양반에 불과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들의 사랑은 그만큼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산 사람과 죽은 혼령의 사랑을 형상화한 『금오신화』에 비하면, 이것은 사건이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현실적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주생과 선화의 사랑은 비현실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작가의 낭만적인 지향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위경천전」에서 위경천이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죽은 시신으로 돌아오자 소숙방도 자결하고 마는데, 소숙방의 죽음은 현실적 필연성보다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옥죄인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7세기 애정전기소설에 대한 온당한 자리매김은 이러한 점을 아울러 고려했을 때 가능할 것인바, 이에 대한 연구는 추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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