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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생애와 제나라에서의 행적
맹자 생애
BC 372 | 추(鄒)에서 태어남. |
BC 358 (15세) | 노(魯)에서 배움. |
BC 332 (41세) | 추목공(鄒穆公)을 만남. |
BC 331 (42세) | 노나라 평륙(平陸)에서 머묾. |
BC 330 (43세) | 추(鄒)에서 임(任)에 감. |
BC 329 (44세) | 노나라 평륙(平陸)에서 제(齊) 서울로 감. |
BC 328 (45세) | 제(齊)에서 빈사(賓師)가 됨. |
BC 326 (47세) | 제(齊)에서 송(宋)으로 감. |
BC 325 (48세) | 송(宋)에서 추(鄒)로 돌아옴. |
BC 324 (49세) | 추(鄒)에서 등(滕)으로 감. |
BC 322 (51세) | 등(滕)을 떠나 추(鄒)로 돌아옴. |
BC 320 (53세) | 양혜왕(梁惠王)의 초빙을 받아 양(梁)로 감. |
BC 319 (54세) | 양혜왕이 죽자, 제(齊)로 감. |
BC 318 (55세) | 제(齊)에서 경(卿)이 됨. |
BC 317 (56세) | 모친의 상을 당하여 제(齊)에서 노(魯)로 돌아와 장례함. |
BC 315 (58세) | 제(齊)로 감. |
BC 314 (59세) | 제(齊)가 연(燕)을 정벌하자, 제(齊)를 떠나 송(宋)으로 감. |
BC 313 (60세) | 송경(宋牼)을 석구(石丘)에서 만나 인의로 진(秦)ㆍ초(楚)의 왕을 설득할 것을 권함. |
BC 312 (61세) | 설(薛)로 감. |
BC 311 (62세) | 설(薛)에서 노(魯)로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초(鄒)로 돌아옴. |
BC 289 (84세) | 1월 15일에 세상을 떠남. |
제나라에서의 맹자 행적 정리
1 | 직하학파(稷下學派)를 열어 제나라를 부흥시키고 마릉전투로 양혜왕(梁惠王)에게 치욕을 안겨준 제위왕(齊威王)을 이어 제선왕이 즉위하였다. |
2 | 즉위 1년 차에 맹자를 초빙하여 직하학파를 더 양성할 포부를 지니고 있었고 이 때 흔종(釁鍾)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왕도정치에 대한 포부를 긴 시간 동안 얘기했다. (양혜왕 상 7) |
3 | 제나라가 연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맹자는 처음에는 연나라의 내부사정이 하도 더티하여 도덕성을 결하고 있으므로 연나라 정벌을 찬동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공손추 하 8) |
4 | 막상 연나라 정벌이 단순한 제나라의 탐욕으로 변질되자 맹자는 재빨리 연나라의 질서를 회복해주고 빨리 군대를 철수할 것을 종용한다.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였지만 제선왕(齊宣王)은 무리하게 연나라를 점령한 상태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끌었다. (양혜왕 하 10) |
5 | 결국 국제여론이 악화되고 제후국들이 합심하여 연나라를 도왔으며 무엇보다도 연나라 인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게 되자 제선왕은 맹자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면서 맹자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진가(陳賈)가 맹자를 찾아뵌다. (양혜왕 하 11) |
6 | 맹자는 자신의 과오를 근원적으로 뉘우치지 않고 변명하려는 제선왕의 태도를 비난한다. 일식ㆍ월식과도 같은 공개적인 반성을 요구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진 것은 사실이다. (공손추 하 9) |
7 | 그러던 어느 날 맹자는 제선왕(齊宣王)과 다시 화해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정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공교롭게도 제선왕으로부터 사자가 와서 맹자 보고 좀 조정으로 나와줄 수 있겠냐고 전갈이 온다. 자신이 감기가 걸려 외출이 힘들다는 것이다. 맹자는 제선왕이 핑계를 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도 병에 걸려 못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날 맹자는 외출한다. 그런데 제선왕이 정중하게 의사를 보낸다. 이 사건으로 맹자는 집으로도 못 가고 대신 경자의 집에서 묵는다. (공손추 하 2) |
8 | 사실 제선왕은 진실로 아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맹자는 제선왕이 자기를 더 이상 ‘소불소지신(所不召之臣)’으로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환갑도 넘었다. 인생을 다시 생각할 때가 되었다. 결국 큰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떠나자! |
9 | 맹자가 제선왕을 버리고 제나라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제선왕이 맹자의 집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옛 정을 다짐한다. 이에 맹자는 그 유명한 “불감청이 고소원야(不敢請耳固所願也)”라는 말을 한다. (공손추 하 10) |
10 | 제선왕은 제나라 수도 임치의 한 중앙 복판에 맹자학교를 세우고 전 국민이 맹자를 존숭케 하겠다는 야심찬 새로운 대안을 발표한다. (공손추 하 10) |
11 | 맹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단(龍斷)’의 천장부(賤丈夫) 애기를 하고 더 이상 천장부 노릇하기 싫다고 하면서 제나라를 떠날 결심을 굳힌다. (공손추 하 10) |
12 | 맹자는 제나라를 바로 떠나지 않고 주읍에 머물며 제선왕이 잘못을 고쳐 자신의 발걸음을 되돌리게 하길 바랐으나, 고치지 않자 3일째 되는 날에 완전히 제나라를 떠났다. (공손추 하 12) |
13 | 이로써 7년간의 제나라에서 체류가 끝났다. |
-『맹자 사람의 길』 상 294~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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