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맹자를 비판한 순우곤
6b-6. 순우곤(淳于髡)이 맹자에게 말하였다: “한 지식인이 명예와 업적을 중시한다는 것은 인민을 구제한다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며, 명예와 업적을 경시한다는 것은 자기 한 몸이라도 세속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함이올시다. 부자(夫子)는 제나라의 삼경(三卿)【삼경(三卿)에 관해서는 두 설이 있다. 하나는 상경(上卿), 아경(亞卿), 하경(下卿). 하나는 상(相), 장(將), 객경(客卿), 당시 관제는 나라마다 다르고 명료하지 않다. 맹자는 후자의 객경(客卿)이었을 것이다】의 한 사람으로서, 그 명예와 업적이 위로는 군주를 보좌하는 데 미쳐야 하고, 아래로는 인민을 구제하는 데 미쳐야만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기도 전에 제나라를 버리고 떠나가려고만 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항상 인(仁)의 사상을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인자(仁者)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까?” 6b-6. 淳于髡曰: “先名實者, 爲人也; 後名實者, 自爲也. 夫子在三卿之中, 名實未加於上下而去之, 仁者固如此乎?”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자(仁者)라 할지라도 실제적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때에 따라서 다른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민간에 낮게 몸을 숨기고 살며 현인의 몸을 지키며 불초한 군주는 결코 섬기지 않는 자가 백이(伯夷)【2a-2에 기출, 이하 백이ㆍ이윤(伊尹)ㆍ유하혜(柳下惠) 삼성(三聖)에 관한 논조는 2a-2, 2a-9, 5b-1의 논조와 연속적 관계에 있다】였습니다. 다섯 번이나 탕(湯)의 부름에 응하였고, 또 다섯 번이나 걸(桀)의 부름에 응하여 현군ㆍ폭군을 가리지 않고 백성을 구제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이윤이었습니다【2a-2에 기출, 조기는 탕이 이윤(伊尹)을 걸(桀)에게 공물로서 바쳤다고 했다. 걸이 이윤을 받아들이지 않자, 다시 탕에게 갔다. 그러나 탕은 이윤을 다시 공물로 바쳤다. 이런 왕래를 5번이나 했다는 것이다. 별로 재미없는 설이다】. 그리고 타락한 군주라도 미워하지 아니 하고 하찮은 벼슬이라도 사양하지 아니 하며 혼탁한 세상과 더불어 갈 줄 아는 현자가 유하혜(柳下惠)【2a-9에 그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였습니다. 孟子曰: “居下位, 不以賢事不肖者, 伯夷也; 五就湯, 五就桀者, 伊尹也; 不惡汙君, 不辭小官者, 柳下惠也. 이 세 현인이 모두 길을 달리하고 있습니다만 그 귀착지는 하나이올시다. 그 하나의 귀착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인(仁)이올시다. 군자는 단지 인(仁)을 지향할 뿐이옵니다. 어찌 꼭 같은 길을 걸어가야만 하겠나이까?”【沃案: 본인이 제나라를 떠나는 것도 인자(仁者)의 한 방편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三子者不同道, 其趨一也. 一者何也? 曰: ‘仁也.’ 君子亦仁而已矣, 何必同?” 이에 순우곤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말했다. “노나라 목공(繆公)【2b-11에 기출】의 시대에 박사로서 청렴결백하고 재능과 덕망이 뛰어난 공의자(公儀子)【‘공의자(公儀子)’는 ‘공의휴(公儀休)’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순리열전(循吏列傳)」에 매우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법을 숭상하고 이치를 따르며 변칙적으로 바꾸는 일이 없어 관리들의 행동이 방정해지고, 봉록을 누리는 자들이 일반서민들과 이익을 다투지 못 하게 하여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힘썼다. 그를 둘러싼 감동적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훌륭한 지도자였음에 틀림이 없다】가 재상 노릇을 하였고, 현인 자류(子柳)【노나라의 현인 설류(泄柳)를 가리킨다. 2b-11에 기출】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2b-11에 기출】가 신하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훌륭한 현인들이 정치를 보좌함에도 불구하고 노나라는 점점 더 침공을 많이 받아 국토가 오그라들은 것이 매우 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다면 인(仁)한 현자들이래야 그토록 나라에게 무익한 존재들이란 말입니까?” 曰: “魯繆公之時, 公儀子爲政, 子柳ㆍ子思爲臣, 魯之削也滋甚. 若是乎賢者之無益於國也!” 맹자께서 대답하시었다: “나라는 자기 나라의 현인이었던 백리해(百里奚)【오고대부(五羖大夫). 5a-9에 기출】를 몰라보고 기용치 않아 망하였고, 진목공(秦穆公)【5a-9에 기출, 춘추5패 중의 한 사람】은 백리해를 과감하게 기용하여 패자가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어떤 예를 들으시든간에 현자를 기용치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철칙입니다. 어찌 겨우 국토가 오그라드는 사태에 그칠 문제이겠습니까?”【沃案: 순우곤의 질문은 매우 날카롭다. 순우곤의 논점은 인의(仁義)를 표방하는 현자들이 맹자처럼 떠나가기만 한다면 그들은 결코 사회개혁의 주체세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지식인들의 현실적 무능함을 지적하여 맹자를 난처하게 만든다. 이에 맹자는 순우곤의 논리를 역으로 강화시켜 반론을 펴지만 결코 정밀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 曰: “虞不用百里奚而亡, 秦穆公用之而霸. 不用賢則亡, 削何可得與?” 순우곤은 또다시 반격을 가한다: “옛날에 위(衛)나라의 유명한 가수 왕표(王豹)【조기는 왕표를 ‘위지선구자(衛之善謳者)’라고 했다. 혹자는 『좌전』 애공 6년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제나라 사람이라는 설을 편다】가 기수(淇水)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하서(河西)의 위나라 사람들은 모두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또 제나라의 유명한 가수 면구(綿駒)가 고당(高唐)【고상(高商)이라고도 한다. 지명, 산동성 우성현(禹城縣) 서남】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제나라의 서부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제나라의 장수 화주(華周)와 기량(杞梁)의 처는 전사(戰死)한 남편의 명예를 드높이고 너무도 처절하게 곡을 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제나라의 풍속을 변화시키는 감화를 이룩하였습니다【‘화주(華周)’는 화선(華旋), 혹은 화환(華還)으로, ‘기량(杞梁)’은 기식(杞殖)으로 나온다. 제나라 군주 장공(莊公)이 거(莒)나라를 습격했을 때 전사 한 장군들이다. 이들과 부인의 이야기는 『좌전』 양공 23년, 『예기』 「단궁」하, 『설원(說苑)』 「선설(善說)」 「입절(立節)」, 그리고 『열녀전(列女傳)』 「제기량처(齊杞梁妻)」에 나온다. 조금씩 이야기들이 다르지만 기량의 부인이 장공의 조문을 당당하게 자기 집에서 받았다는 이야기와, 기량의 부인이 남편의 시신을 성(城) 앞에 놓고 열흘 이상 곡을 하니 성도 슬퍼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면적 진심은 외면적으로도 교감을 통해 드러난다는 주제가 순우곤의 기술과 상통된다】. 曰: “昔者王豹處於淇, 而河西善謳; 綿駒處於高唐, 而齊右善歌; 華周ㆍ杞梁之妻善哭其夫, 而變國俗.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진심으로 인(仁)한 현자라고 한다면 그 내면에 축적된 것이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 노래가 퍼지듯이 사회적 효용이 있다는 것이지요. 인(仁)한 현자로서 그만큼 나라일에 종사했다고 하면서 드러나는 아무런 공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나라에는 진정한 현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현자가 있다고 한다면 저 곤(髡)이 몰라볼 수가 없겠지요.”【沃案: 순우곤의 비판은 준엄하고 정당하다. 맹자가 유학의 본령을 표방하는 인자(仁者)로서 제나라에서 7년이나 재상노릇을 했다고 한다면 그 감화가 이미 대중의 문화로서 노래가 퍼지듯이 퍼져있어야 한다는 비판이다. 인정(仁政)의 궁극적 목표는 대중을 움직이는 데 있다. 이 순우곤의 비판에 대해 맹자는 결국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有諸內必形諸外. 爲其事而無其功者, 髡未嘗覩之也. 是故無賢者也, 有則髡必識之.”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예전에 공자께서는 노(魯)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시었으나, 노나라의 정공(定公)이나 계환자(季桓子) 모두 공자의 생각이나 정책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공자께서는 노나라를 떠날 생각은 하셨으나 마지막으로 노나라 군주가 교제(郊祭)를 지내는 모습을 지켜 보기로 했지요. 교제를 지낸 후에 고관들과 대부들에게 나누어주는 희생의 번육(燔肉)이 오면 남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번육이 오지 않자, 공자는 제사 예복의 관을 벗을 틈도 없이 떠나가셨습니다. 曰: “孔子爲魯司寇, 不用, 從而祭, 燔肉不至, 不稅冕而行. 공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자가 제사고깃덩어리 때문에 떠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자를 아는 사람조차도 노나라의 군주가 예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떠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자의 본심은 노나라의 군주가 번육(燔肉)을 보내지 않는 무례한 행동을 하게 된 데에도 그 교제에 참여한 자신에게도 약간의 잘못이 있다는 구실을 만들어 떠나가려 한 것입니다. 그 죄를 군주에게 다 씌우고 구차스럽게 떠나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지요【沃沃: 주희는 공자 자신의 미묘한 잘못으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군주의 잘못으로 해석한다. 단지 군주의 중대한 과오가 아니라, 번육을 안 보내는 정도의 가벼운 과실을 핑계로 하여 떠나갔다는 것이다. 나의 해석은 조기를 따른 것이다】. 군자의 속깊은 행위라는 것은 보통의 중인(衆人)들이 본시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외다.” 不知者以爲爲肉也, 其知者以爲爲無禮也. 乃孔子則欲以微罪行, 不欲爲苟去. 君子之所爲, 衆人固不識也.” |
순우곤(淳于髡)은 4a-17에 기출했다. 앞에서 순우곤에 관하여 충분히 기술하였다. 이 기사의 중요성은 맹자가 제선왕과의 불화로 제나라를 떠날 때까지도, 즉 BC 312년 당시에도 순우곤은 직하학사의 총장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순우곤은 직하(稷下)의 수장으로서 맹자의 거제를 비난하고 있다. 순우곤은 맹자보다 윗세대의 인물이며 직하의 수장다웁게 맹자를 타이르고 있다. 맹자 당대의 거장들 사이에 오간 대화의 격조를 리얼하게 나타내주는 훌륭한 프라그먼트이다. 물론 맹자의 입장에서 기술되었지만, 순우곤의 지식과 지혜의 높은 수준이 잘 드러나 있다
마지막의 맹자의 답변은 매우 미묘하고 정교하다. 맹자와 순우곤 같은 당대의 석학들이 어떠한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는가 하는 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그 오묘한 출전의 경쟁과 그 배면에 숨은 칼날의 교전은 참으로 요즈음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섬세한 감각이 깃들어 있다. 애초의 대화의 실마리가 제나라를 떠나가는 맹자의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에 맹자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가는 장면의 미묘한 사정과 심리전으로써 순우곤의 날카로운 비판을 방어하려고 했던 것은 매우 현명한 정책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앰비밸런스(ambivalence)이다. 맹자는 제나라를 떠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그 애ㆍ증의 갈등이 순우곤에게 다 설명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랑하는 노나라를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공자의 슬픈 사연을 들어 자신의 미묘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라는 것은 결국 내가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일거에 전달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군자지소위(君子之所爲)를 중인(衆人)이 고불식(固不識)이라고 말한 것은 결국 순우곤을 된통 엿먹인 것이다. 결국 순우곤이 군자의 미묘한 심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중인의 수준으로 전락된 것이다.
▲ 중국에 가는 조선 사신들의 행렬도의 한 장면인데 산동성 제나라 지역인 등주(登州)를 지나면서 순우곤의 고리(故里)라고 크게 써놓았다. 이것만 보아도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순우곤의 이미지가 강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24년의 사행을 묘사한 「연행도폭」을 조선후기에 다시 그린 것.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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