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걸 비판하다
6b-8. 노나라에서 신자(愼子)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제(齊)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魯欲使愼子爲將軍. 이에 맹자께서 신자에게 말씀하시었다: “백성들을 가르치지도 아니 하고 전쟁터에 내보내어 싸우게 한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짓이기에 앙민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앙민(殃民)이라는 것은 요순시대라면 도저히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대가 일전(一戰)을 잘 싸워 제나라에게 승리를 거두고, 그 전리품으로 노ㆍ제 간의 분쟁지역인 남양(南陽)【태산의 서남쪽의 너른 뜰이라는 의미에서 ‘남양’이라고 불리는데, 문수(汶水)의 북쪽이다. 문양(汶陽)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하남성의 남양(南陽)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하남성의 남양은 초나라의 땅이었다. 춘추시대에는 이 지역을 놓고 제나라와 노나라가 계속 싸웠다. 본래는 노나라에 속했던 땅인데 제나라에 의하여 침탈당하였다. 전조망(全祖望, 1705~1755)의 『경사문답(經史問答)』에 자세하다】을 차지할 수 있다 해도, 그러한 싸움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孟子曰: “不敎民而用之, 謂之殃民. 殃民者, 不容於堯舜之世. 一戰勝齊, 遂有南陽, 然且不可.” 이 말을 들은 신자는 발끈 화를 내면서 기분 나쁘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활리(滑釐)는 그 정도의 이야기는 상관할 바가 아니라서 마음에 두질 않습니다.” 愼子勃然不悅曰: “此則滑釐所不識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과연 그럴까? 내 그대에게 아주 명료하게 말씀드리죠. 주나라 초기의 고례(古禮)에 의하면 천자의 직할지는 사방천리의 땅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여기 ‘땅’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원문이 ‘지(地)’인데, 이 ‘지(地)’가 『예기』 「왕제」에 보면 ‘전(田)’으로 되어있다. 여기 『맹자』의 텍스트의 ‘지(地)’도 실상 ‘전(田)’을 의미한다. ‘전(田)’은 실제 소출이 있는 전답만을 말한 것이고, ‘지(地)’는 산림(山林), 천택(川澤), 성곽(城郭), 궁실(宮室), 피지(陂池) 등 다양한 성격을 포괄한다. 그러니까 실제 국가영토개념은 사방천리의 전(田)보다는 더 넓은 개념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사방천리 정도가 되지 않으면 제후를 거느리고 접대하기에는 부족합니다. 曰: “吾明告子. 天子之地方千里; 不千里, 不足以待諸侯. 그리고 제후의 전지(田地)는 사방백리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최소한 사방백리 정도가 되지 않으면 종묘에 보존되어 있는 문헌의 규정대로 의례를 집행할 수 있는 비용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공(周公)【주 나라를 창업한 사람 중의 하나. 무왕(武王)의 동생. 무왕이 혁명에 성공한 후 주공을 소호(少昊)의 옛 터인 곡부(曲阜)에 책봉하여 노공으로 삼았다. 그러나 주공은 봉지로 가지 않고 남아서 무왕을 보좌하였다. 무왕이 죽고 조카인 성왕이 아직 어려 국정을 돌볼 수 없으므로 국가행정을 섭정하고 그의 아들 백금(伯禽)을 자신의 봉지인 노나라 땅으로 가도록 하였다】이 노나라에 책봉되었을 때에도 그 영지가 사방백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땅이 결코 모자라는 형국도 아니었는데 실제로 사방 백리도 아니 되는 검약한 수준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諸侯之地方百里; 不百里, 不足以守宗廟之典籍. 周公之封於魯, 爲方百里也; 地非不足, 而儉於百里. 강태공(姜太公)【여상(呂尙), 사상보(師尙父), 문왕ㆍ무왕의 스승이 되어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혁명을 성공시켰다. 은 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제품의 영구(營丘, 나중에 임치가 됨)에 봉착되었다. 제나라의 개조(開祖). 4a-13에 기출】이 제나라에 책봉될 때에도 그 영지가 역시 사방백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땅이 결코 모자라는 형국도 아니었는데 실제로 사방백리도 아니 되는 검약한 수준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땅을 불필요하게 크게 차지하지 않는 것이 고례의 지혜였습니다. 太公之封於齊也, 亦爲方百里也; 地非不足也, 而儉於百里. 노나라는 춘추시대를 통하여 꾸준히 주변의 소국들, 극(極)나라ㆍ방 (防)나라 항(項)나라ㆍ근모(根牟)나라ㆍ전(鄟)나라. 시(邿)나라 등등을 침탈ㆍ겸병하여 지금은 사방백리의 다섯 배나 되는 큰 땅덩어리를 보유하고 있으니 이것은 주공시절의 영토에 비해 이미 다섯 배가 늘어난 것입니다. 今魯方百里者五, 지금 문왕ㆍ무왕과 같은 왕자(王者)가 일어나 천하를 평정하고 고례를 회복한다고 선언하게 되면, 노나라의 영토는 줄어들 것입니까? 혹은 더 늘어나게 될 것입니까?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쟁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한 나라의 땅을 빼앗아 다른 나라에 줄 수 있는 역량이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다 해도 그가 진실로 인자(仁者)라고 한다면 그러한 짓은 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을 죽여서 토지의 확대를 꾀한다는 것이 과연 사람이 할 짓입니까? 군자가 군주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 군주로 하여금 정당한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는 것을 힘쓰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군주가 인(仁)을 향하여 전력투구하도록 만드는 것밖에 딴 길이 없습니다.” 子以爲有王者作, 則魯在所損乎? 在所益乎? 徒取諸彼以與此, 然且仁者不爲, 況於殺人以求之乎? 君子之事君也, 務引其君以當道, 志於仁而已.” |
‘신자(愼子)’를 우리가 아는 어떤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조기는 ‘신자(愼子), 선용병자(善用兵者)’라고만 주를 달아놓았다. 초순(焦循)은 이 ‘신자(愼子)’가 맹자와 동시대의 인물이며 직하의 학사였던 ‘신도(愼到)’일 수도 있다는 설을 주장한다. 신도는 조(趙)나라 사람이었으며 그 학설은 『장자(莊子)』 「천하」편, 『순자(荀子)』 「해폐(解蔽)」 「천론(天論)」 「비십이자(非十二子)」 제편(諸篇)에 나와 있는데, 아주 도가적인 초세간적 무차별의 지혜를 말하고 있어 황로(黃老)사상에 가깝고, 또 한편으로는 법치(法治)를 주장하지만 성문법적인 법치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심오한 사상가일 수는 있으나 용병술의 실전의 장군이 될 인물은 아니다. 본문에 신자(愼子)가 스스로를 가리켜 활리(滑釐)라는 명(名)으로 부르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신활리(愼滑釐) 곧 금활리(禽滑釐)【‘활(滑)’은 ‘골(gŭ)’로도 ‘활(huá)’로도 발음되며, ‘리(釐)’는 ‘리(li)’로도 ‘희(xī)’로도 발음된다. 그래서 ‘금골리’ ‘금활희’ 등의 발음방식이 있다】일 것이라고 말한다.
금활리는 자하(子夏)의 제자로서 위문후 시대의 사람이며 묵자(墨子)에게 수성(守城)의 전법을 배운 탁월한 묵가의 전략가로서, 공수반(公輸盤)이 초나라를 위하여 운제(雲梯)를 만들어 송(宋)나라를 치려할 때 송의 수비를 단단하게 함으로써 공수반의 전략을 무산시켰다. 『묵자』 「공수(公輸)」편 이후의 편들은 금활희와 묵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금활희 또한 철저한 평화론자이며 시대로 보면 맹자가 태어나기도 전 사람이라서(BC 470~400년간) 가당치 않다. 여기 신자는 이들의 이름을 빌린 당시의 어떤 장군이었을 것이다.
맹자의 말씀 중 가장 중요한 테마는 ‘불교민이용지(不敎民而用之)’라는 한마디에 집중되어 있다. 『논어(論語)』에는 공자의 말로서 ‘이불교민전(以不敎民戰), 시위기지(是謂棄之)’[13-30]라는 동일한 취지의 로기온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맹자의 ‘앙민(殃民)’과 공자의 ‘기민(棄民)’은 결국 같은 취지의 말이다. 그런데 백성을 교육시킨다는 의미가 단지 군사교육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농병일치시대에 군사교육 없이 농민을 그대로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은 쓰레기더미를 버리듯 백성을 내다버리는 짓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을 인의(仁義)의 도덕으로 무장시켜, 근본적으로 왜 싸우는지를 자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념이 없는 군대는 아무리 군사훈련이 잘 되어 있어도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문(文)의 교육이 없이는 무(武)의 승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공자와 맹자의 신념이다. 공자는 사람들을 전쟁에 내보내려면 최소한 7년은 잘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13-29]. 7년 동안 교육되어야 하는 것은 자국을 방위해야만 하는 이유를 자각하는 것이며 삶의 도덕적 기강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 장도 생각했던 것보다 복선이 심하여 명료하게 번역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우리는 이 장을 읽으면서 왜 사마천이, 당대의 군주들이 맹자의 말들이 너무 우원하여 당시의 사정에 너무 어두운, 맞지 않는[闊於事情]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고 기록하였는지를 보다 실감나게 이해할 수가 있다. 맹자는 이상주의자이며, 철저한 평화주의자(Pacifist)였다. 그는 침략전쟁의 부당성과 폐해, 그리고 그 역사적 정당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강렬하게 웅변하고 있다. 노나라는 당시 결코 대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래의 고례에 의한 규정성의 5배나 되는 거대영토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더 이상 영토확대를 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노나라에게 당하는 더 작은 나라인 추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나라의 침략전쟁은 공연히 불필 요한 전운만 감돌게 할 뿐이다. 그의 논지는 한 국가의 위대함이 토지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仁政)의 실천 여부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한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나라에 속한 대우라는 한 작은 기업의 예를 들어보아도, 그 기업을 이끌어간 사람들이 칭기즈 칸이 세계를 제패한 진취적 기상의 꿈을 꿀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무르 익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도덕성, 그 건전한 기상의 토대가 한국사회에 깔려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우의 꿈은 영토적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지금도 건전한 국민적 컨센서스(consensus)만 확보된다면, 우리의 활동영역은 영토적 제약성을 뛰어넘는 자유롭고 끊임없이 창조적인 세계사의 주역 노릇을 할 수가 있다. 남ㆍ북을 통일하고 중원대륙과 시베리아와의 자유로운 왕래를 확보하고 유럽대륙과의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맹자가 구상 한인의 정치는 무력으로 영토를 확대하는 저차원의 물리적 병합이 아닌, 고차원의 정신적 통합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여기 맹자가 ‘불교민이용지(不敎民而用之), 위지앙민(謂之殃民)’이라 했는데, 강항의 『간양록(看羊錄)』에 보면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신이 엎드려 삼가 살펴 보건대 우리나라는 평소에 병사를 양성하지도 않았고, 백성을 전쟁에 대비하여 가르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는데, 임진왜란이 닥치자 농민들 휘몰아 그냥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그 중에 좀 세력이 있거나 재산이 있는 자들은 뇌물을 먹여 면제를 얻고, 빈민 중에 기댈 곳이 없는 자들만이 홀로 전쟁의 수고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장수는 휘하에 상비군의 병력이 없었고, 또 병졸은 항상된 지휘관이 없었습니다.
臣伏見我國, 不素養士, 不素敎民. 任辰以來, 驅驟農民, 以赴戰陳. 梢有材力有恒産者, 以賄賂得免, 貧民之無所聊賴者, 獨賢於征戍. 加以將無常卒, 卒無常帥.
참으로 적확한 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앙민(殃民)’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그 최고 책임자인 선조는 임란 후에 공훈(功勳)을 조작하는 데만 머리를 굴렸고, 그 대비는 아무 것도 없어 병자호란 때는 더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뿐이다. 내 가 보기에는 오늘의 대한민국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국방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방을 하고자 하는 국민적 의지를 인정으로써 확보하는 것이다. 오늘의 관료부패상은 선조 때의 부패상과 대차가 없다. 국민적 컨센서스와 무관한 전혀 무의미한 곳에 국고를 탕진하고 있을 뿐이다.
맹자의 요점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백성을 전쟁에 사용할 생각을 하는 그 노력의 에너지를 그들을 교육시켜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고양 시키는 데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21세기적 발상이다. 전자기장의 세계는 시ㆍ공간의 제약이 없다. 전 세계ㆍ전 인류가 공간의 거리가 무시되는 동시성을 확보하고 있는 오늘날에 그것을 ‘이(利)’를 위한 방편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인(仁)’의 도덕성을 실현하는 방편으로 사용할 줄 안다면 바로 맹자가 말하는 왕도를 지금 여기서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참으로 애통할 뿐이다!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맹자의 절규에 여러분들의 양심에 손을 얹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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