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20의 세법을 쓰겠다는 백규
6b-10. 백규(白圭))가 말하였다: “저는 국민들의 세금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소득의 20분의 1만을 취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이까?” 白圭曰: “吾欲二十而取一, 何如?”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선생께서 추구하시는 방법은 북방민족인 맥(貉)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방법입니다【이 맥(貉)은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문제가 되는 예맥(濊貊)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민족의 한 근간을 이루는 민족으로서 그 존 재성이 역사적 맹자에 의하여 확실하게 지적되고 있다. 맥은 지금 흑룡강성 부여지역으로부터 길림성, 강원도 전역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으며 퉁구스족이 근간을 이루고, 몽골족ㆍ만주족ㆍ터키족과도 혼혈을 이룬 우랄 알타이어계의 민족이었다.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쥐어짜지 않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모습이 맹자에 의하여 그려지고 있다. 다산(茶山)도 이 ‘맥(貉)’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주를 달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통 맥을 춘천 지역의 작은 나라로 아는데, 맥은 춘천이 아니라 성경 즉 심양(瀋陽)의 북쪽인 개원현(開原縣)이 그 본래의 땅이라고 하였다. 다산은 맥을 요녕성 옛 봉천부(奉天府) 지역으로 보았으나 그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세요. 일만 호의 인구가 모여 사는 나라에서 도자기를 굽는 사람이 딱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게 그래도 될 일입니까?” 孟子曰: “子之道, 貉道也. 萬室之國, 一人陶, 則可乎?” 백규가 대답하였다: “불가합니다. 그릇이 모자라 나라꼴이 말이 아니겠지요.” 曰: “不可, 器不足用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맥나라에서는 오곡이 잘 자라나지 않고 오직 찰기장【‘서(黍)’는 학명이 Panicum miliaceum이며 중국사람들은 황미(黃米)라고 한다. 메기장은 ‘직(稷)’이라고 한다. 여기서 서(黍)가 실제로 직(稷)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만 자라납니다. 게다가 성곽도, 궁실도, 종묘도 없고, 복잡한 제사의 예식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후의 폐백(幣帛)의 예물이나 연회의 오감도 없으며 각종의 관청관리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물론 20분의 1의 세금으로 족합니다. 曰: “夫貉, 五穀不生, 惟黍生之. 無城郭, 宮室, 宗廟, 祭祀之禮, 無諸侯幣帛饔飱, 無百官有司, 故二十取一而足也. 그러나 지금 우리가 문명의 중심인 중원에 살고 있으면서 인륜(人倫) 관계에서 성립하는 예의를 무시하고, 정치의 근간인 관료들을 제거해 버린다면 과연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나갈 수 있겠나이까? 도자기만 부족하여도 나라의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아신다면, 어찌 관료가 없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이까? 今居中國, 去人倫, 無君子, 如之何其可也? 陶以寡, 且不可以爲國, 況無君子乎? 요순의 법도인 10분의 1세보다 경감시키는 것은 크게든 작게든 맥(貉) 수준의 나라가 될 것이 뻔하고, 요순의 법도인 10분의 1세보다 과중하게 쥐어짜면 크게든 작게든 폭군 걸(桀)의 나라가 될 것이 뻔하오이다.” 欲輕之於堯舜之道者, 大貉小貉也; 欲重之於堯舜之道者, 大桀小桀也.” |
‘백규(白圭)’라는 이름은 전국시대의 문헌에 다양하게 등장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청언(聽言)」 「선식(先識)」 「불굴(不屈)」 「응언(應言)」 「거난(擧難)」 「지분(知分)」 등의 편에 보이고, 『한비자(韓非子)』 「내저설하(內儲說下)」 「유로(喩老)」 제편에 보이고,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 『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 「화식열전(貨殖列傳)」, 『신서(新序)』 등에 보인다. 우리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것은 『사기』 「화식열전」이다. 조기는 백규는 주나라 사람[周人, 낙양(洛陽)사람이라는 뜻이다]이며 절약으로 재화를 늘이는 재주가 있었으며 세금을 줄이여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하여 국민소득의 20분의 1만 징세할 것을 주장하였다라고 했는데 대강 「화식열전」의 기술과 일치한다. 백규는 위문후 때, 이극(李克)이 토지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데 힘을 다하는 데 반하여, 시세의 변화에 따른 물가변동을 살피기를 좋아하였다. 백규는 세상사람들이 버리고 돌보지 않을 때는 사들이고, 사람들이 취할 때는 팔아넘겼다. 풍년이 들면 곡식을 사들이고 대신 실과 옻칠자료를 팔아넘겼고 흉년이 들어 고치가 나돌면 비단과 솜을 사들이는 대신 곡식을 팔아넘겼다. 그리고 그는 천문에 밝아 풍흉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재간이 있었다. 그는 좋은 음식을 도외시하고, 기호를 억제하며, 의복을 검소히 하고, 자기가 부리는 노복과 고락을 같이 하였고, 기회를 잡을 때는 맹수나 맹금이 먹이를 낚아채듯 민첩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가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이 윤과 여상이 정책을 도모하듯, 손자와 오자가 군사를 쓰듯, 상앙(商鞅)이 법을 시행하듯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백규가 과연 맹자가 대화하는 백규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많다. 백규는 위문후(魏文侯)나 위무후(魏武侯) 시대에 활약한 사람인 듯하나 여러 문헌을 같이 비교해보면 그 인물의 성격은 대강 비슷한 면이 있으나 시대가 도무지 들쑥날쑥해진다.
『맹자』라는 텍스트는 오히려 신빙성이 있기 때문에, 맹자시대에 위나라에서 활약한 정치가로서 화식의 달인이었고, 제방을 쌓아 치수에 힘쓰고, 백성의 생산을 효율적으로 다스린 어떤 인물이었다고 상정할 수밖에 없다. 이 대화는 맹자 만년에 위나라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위나라에서 사람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위소왕(魏昭王) 때일 것이다. 은퇴 후에도 맹자가 주변국가들의 정치에 관해 자문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규는 시세변동을 활용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고 그만큼 국민의 세금을 줄이자는 정책을 편 대정치가였다.
이 장 역시 매우 위대한 맹자의 현실적 논설을 담고 있다. 맹자의 인정(仁政)의 핵심은 조세제도와 교육제도에 있다고 누차 설명하였다. 민생의 안정을 위한 여러 가지 시책은 1a-3, 1a-5, 1a-7 등 「양혜왕」상편에서부터 줄곧 이야기되었다. 그리고 10분의 1조세의 정당성의 논의는 3a-3에서 세부적인 시행규칙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졌다.
맹자는 민중의 평등사상을 존중하지만, 왕도의 실현을 위하여 문명의 번영을 동시에 주장한다. 무조건의 하향분배는 국가문명의 수준저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묵가의 사상과 대비되는 맹자의 인문주의사 상이다. 문명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되어야 하며, 그 긍정의 대전제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보편주의적 가치일 뿐이다. 따라서 세율이 과중하면 폭정이 되지만 세율이 과하게 불급해도 야만의 정치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의 ‘중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금이 문명의 번영을 이룩하여 그것이 다시 서민의 교육과 문화생활로 환원되는 피드백 시스템을 맹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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