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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철, 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3. 존당파 개별 시인에 대한 평론, 1) 존당파의 중국시인 평론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박순철, 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3. 존당파 개별 시인에 대한 평론, 1) 존당파의 중국시인 평론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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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존당파(尊唐派)와 존송파(尊宋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尊唐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여 각 파의 당ㆍ송시에 대한 평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尊唐派 尊宋派
이백, 두보 소식, 황정견

 

다시 말하면 각파(各派)에 따라서 같은 시인이라도 다르게 평론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구체적인 평가와 관점 및 시론은 무엇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존당파에서는 이백과 두보에 대한 역대의 우열 논란과 그 계보, 이백과 두보 시의 장점 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먼저 이백과 두보의 우열 논란을 살펴보도록 한다.

 

 

존당파, 이백보다 두보를 더 인정하다

 

조선중기의 학자 남용익(南龍翼, 1628~1692)호곡시화(壺谷詩評)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백과 두보의 우열은 자고로 정해지지 않았다. 원진은 처음부터 두보를 존경했지만 한유는 두 사람을 다 존경하였다. 송 이후로는 두보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오도손(敖陶孫)의 시평(詩評)에서는 두보(杜甫)는 주공(周公)이 제례(制禮)한 것과 똑같아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맞는 말이다.

…… 주자(朱子)는 시성(詩聖)으로 이태백(李太白)을 불렀으니, 그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또한 알만하다. ()나라에 이르러 왕세정(王世貞)은 다시 두 사람을 높이 보는 평을 하였으나 두보를 약간 더 높이 보았다.

杜優劣, 自古微定. 元微之始尊杜, 而韓昌黎兩尊之. 自宋以後, 無不尊杜. 敖陶孫詩評以杜爲周公制禮, 不敢定議; 此言是矣.

……紫陽以聖歸之於李, 則微意亦可知. 而至明弇州有兩尊之評, 而少有右杜意.

 

 

중국 역대로 이백두보에 대하여 우열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선호도를 정리하여 원진과 오도손, 송 이후 사람은 두보를 더 존중하고, 한유는 이백과 두보를 둘 다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왕세정은 후칠자의 한 사람으로 시필성당(詩必盛唐)’을 주장한 종당(宗唐)의 한 사람으로 두 사람을 존중하였지만 두보를 더욱 존중하였고 주자는 이백을 시성으로 불러 그를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이백보다 두보를 더 존중했다고 볼 수 있다.

 

 

존당파, 이백보다 두보가 더 원숙하다고 보다

 

남용익에 이어 조선후기의 학자인 김만중(金萬重, 1637~1692)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더욱 분명하게 두보를 선호한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백과 두보는 이름이 똑같이 났으나, 당나라 이래로 문인들이 판단한 것은 두보에 기운 사람이 70~80%나 차지한다. 백거이, 원진, 왕안석 및 강서시파들은 두보를 존중했고, 구양수, 주희, 양신은 이백을 높였으며 한유와 소동파는 이들을 다 같이 존중했다.

명대의 홍치ㆍ가정 연간의 여러분들도 둘 다 존경했지만, 그들의 본뜻을 살펴보면 대부분 두보에 편향되어 있다. 시도(詩道)가 두보에 이르러 크게 완성되어 고금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여 대가(大家)로 삼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으니 이백은 정녕 함께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사물이 극히 성하게 되면 곧 쇠미한 경향이 나타난다. 소옹은 꽃을 볼 때 피지 아니했을 때를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백이 꽃이 처음 핀 것과 같다면 두보는 완전히 핀 것 같다. 두보의 기주(夔州) 이후의 시는 시들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杜齊名, 而唐以來文人之左右袒者, 杜居七八. 白樂天元微之王介甫及江西一派幷尊杜. 歐陽永叔朱晦蓭楊用修右李, 韓退之蘇子瞻幷尊者也.

若明弘嘉諸公, 固亦幷尊, 而觀其旨意, 率皆偏向少陵耳. 詩道至少陵而大成, 古今推而爲大家無異論, 李固不得與也.

然物到盛, 便有衰意. 邵子曰:‘看花須看未開時.’ 李如花之始開, 杜如盡開, 夔後則不無離披意.

 

 

이는 남용익의 시론을 부연ㆍ설명한 느낌이다. 김만중에 의하면 크게는 당나라 이래로 문인들의 70~80%두보를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백거이ㆍ원진ㆍ왕안석 및 강서시파는 두보를 존중하고, 구양수ㆍ주희ㆍ양신은 이백를 존중하고 한유소동파는 둘 다 존중하였고 명대의 홍치와 가정 연간의 문인들은 둘 다 존중한 것 같지만 두보를 더욱 존중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중국 사람들의 이백과 두보에 대한 선호도를 적은 것이지만 김만중도 은연중에 이러한 입장에 동조한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중국의 풍조는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왕세정의 견해를 이어받아 두보를 더 높게 평가한 이식

 

조선 중기의 학자 이식(李植, 1584~1647)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백(李白)의 고시(古詩)는 표일(飄逸)해서 모방하기가 어렵다. 두보 시의 변체는 성정(性情)과 사의(詞意)에 있어 고금을 통틀어 최고이다. 그의 기행이나 삼리(三離), 삼별(三別)등 작품은 아낄만한 점이 분명히 있으니 숙독하고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를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팔애(八哀)와 같은 장편은 학식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으며 또 시의 정통도 아니니 우선은 그냥 놔두어도 된다.

李白古詩飄逸難學. 杜詩變體, 性情詞意, 古今爲最. 記行及等作, 分明可愛者, 不可不熟讀摹襲, 以爲準的.

其大篇如八哀等作, 非學富才博不可學, 亦非詩之正宗, 姑舍之.

 

 

표일(飄逸)은 시 풍격의 특성을 지적한 말로 사공동(司空圖)가 시품(詩品)에서 표일(飄逸)을 하나의 풍격으로 배치하였다. ‘표일(飄逸)’은 체기(體氣)가 경양(輕揚)하고 형영(形影)이 표홀(飄忽)하고 신정(神情)이 한일(閑逸)하다는 뜻으로 시 전체의 풍격이 날듯 가볍고 편안하고 한가롭다는 것이다.

 

사의(詞意)는 문사(文詞)의 함의(含意)라는 뜻이다. 두보는 성정의 표현과 함축적 표현에 있어서 고금을 통틀어 최고라고 하면서 그의 작품 중에서 삼리(三離)삼별(三別)을 준칙으로 삼아 모방하여 그의 시를 배워야한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 삼리(三離)삼별(三別)팔애(八哀)등은 숙독하거나 학식이 풍부하지 않으면 배워 모방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식의 이러한 견해는 명대 후기의 문인인 왕세정(王世貞)의 견해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왕세정은 이백두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언고시와 칠언가행에서 이백은 기()를 위주로 하고 자연스러움을 으뜸으로 한 뒤에 준일(俊逸), 고창(高暢)함을 귀하게 여겼다. 두보는 의()를 위주로 하고 독특하게 나아감을 으뜸으로 삼으며 기일(奇逸), 침웅(沈雄)함을 귀하게 여겼다.

맛이 사람을 날아갈듯 신선 같게 하는 것은 이백이고 사람을 비분강개하게 하고 격렬하게 만들어 흐느끼게 하는 것은 두보이다.

弇州評李杜曰: ‘五言古七言歌行, 太白以氣爲主, 以自然爲宗, 以俊逸高暢爲貴; 子美以意爲主, 以獨造爲宗, 以奇逸沈雄爲貴.

味之使人飄揚欲仙者, 太白也; 使人慷慨激烈歔欷欲絶者, 子美也.……

 

 

()는 시인의 정신 기질이 작품에 관통되어 형성된 함축, 생기, 기세를 가리키고 준일(俊逸), 고창(高暢)은 그의 풍격을 지적한 말이다. ()는 시의(詩意)두보의 시는 함축적으로 뜻을 표현하는데 독자적 경지를 열었다는 것이다. 기일(奇逸), 침웅(沈雄)은 그의 풍격을 지적한 말이다. 이상(以上)의 말은 이식이 왕세정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왕세정(1526-1590)은 명대의 당시를 추종한 사람으로 이식이 태어나기 7년 전에 죽었다. 그리고 이식의 학시준적(學詩準的)인조 251647년에 완성되었는데 이는 바로 왕세정이 죽은 해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인용한 내용을 볼 때, 이식은 왕세정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식의 이백두보에 대한 평론은 왕세정의 평론을 간결화시키고 두보를 더욱 높이 평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리

 

남용익은 종당파(從唐派)로 앞에서 고찰한 대로 이백과 두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호곡시평(壺谷詩評)에서 소식과 황정견에 대하여 소동파는 홍대하면서 풍족하고 황산곡은 기이하지만 편협하다.(송대)에서 대가라고 한다면 소식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蘇東坡大而飫, 黃山谷奇而狹.……然大家則無出坡翁之右]위의 책, 3권의 壺谷詩評, 343.”라고 하여 소동파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는 당대와 송대를 통틀어 소식을 대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송대에서는 소식을 대가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식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는 하지만 당시가 더 훌륭하다는 전제 하에 소식을 높이 평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수광, 두보 시를 낮추어 평가하다

 

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당시(唐詩), 오대시(五代詩), 원시(元詩), 명시(明時) 등 각 조대의 시인의 시에 대하여 비평을 하였다. 그가 평한 당대와 송대의 시인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 시인 중에서는 우세남(虞世南)ㆍ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ㆍ송지문(宋之問)ㆍ이백(李白)ㆍ교지지(喬知之)ㆍ이교(李嶠)ㆍ진자앙(陳子昻)ㆍ맹호연(孟浩然)ㆍ왕유(王維)ㆍ두보(杜甫)ㆍ김운경(金雲卿)ㆍ위응물(韋應物)ㆍ한유(韓愈)ㆍ유가(劉駕)ㆍ원진(元稹)ㆍ이하(李賀)ㆍ왕건(王建)ㆍ두목(杜牧)ㆍ두공(竇鞏)ㆍ이상은(李商隱)ㆍ허혼(許渾)ㆍ육구몽(陸龜蒙)ㆍ두상(杜常) 등을 거론하여 그들의 시와 자구에 대하여 비평하였고, 시인 중에서는 구준(寇準)ㆍ안수(晏殊)ㆍ양휘지(楊徽之)ㆍ왕안석(王安石)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ㆍ악비(岳飛)ㆍ양만리(楊萬里) 등을 거론하고 그 시와 자구를 비평하였다.

 

 

이백을 극찬하다

 

이 중에서 본 논문과 관련이 있는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이백두보,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두보의 시에 붉은 빛이 드니 복숭아꽃이 곱고, 푸른빛이 돌아오니 버들잎이 새롭다.’라고 하였고 이백의 시에 차가운 눈은 매화 속에서 다하였고, 봄바람은 버들 위에 돌아왔다.’라고 하였으며, 왕안석의 시에는 푸른빛은 차갑고 거친 잡초 사이를 어지럽히며, 붉은 것은 다투어 따뜻한 나무에 돌아온다.’라고 하였다.

杜詩紅入桃花嫩, 靑歸柳葉新.’ 李白寒雪梅中盡, 春風柳上歸.’ 王荊公詩綠攪寒蕪出, 紅爭煖樹歸.’

 

이 세 사람의 시에 모두 돌아가다[]”는 글자를 쓰고 있는데 옛사람들은 왕안석의 시가 매우 뛰어나다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두보의 시는 교묘하나 힘을 써서 지은 것이고 왕안석의 시는 교묘하게 짓고자 하여 더욱 자세히 조사하였고 이백의 시는 자연에 가깝다.

此三詩皆用, 而古人以荊公詩爲妙甚, 余謂不然, 老杜巧而費力, 荊公欲巧而尤穿鑿, 李白爲近自然.

 

 

위의 인용문에서는 각 시인의 시구를 들어서 그 우열과 차이를 논하고 있다. 이는 이수광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즐겨 쓴 비평방법의 하나이다. 본문에서는 ()’자 한 글자를 가지고 시의 우열을 논하고 각 시인의 장점을 들어 두보는 힘을 다한 교묘한 표현, 즉 조탁미가 뛰어나다고 하였고, 이백은 자연에 가깝다고 하였다.

 

 

맹호연보다 두보를 낮추다

 

이수광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에서 이백두보의 장점을 여러 곳에서 밝히고 그들의 단점도 지적하고 있다.

 

 

맹호연의 시에 말하기를 강이 맑으니 달이 사람에게 가깝다.” 하였다. 두보는 강물 속 달이 사람에게서 겨우 두어 자 떨어진 곳에 있다.”라고 하였다. 나대경(羅大經)이 말하기를 맹호연의 시는 원만하고 함축이 있으며 두보의 시는 정교하다고 하였다. 나는 두보의 이 글귀는 맹호연보다 매우 떨어진다.”라고 하였다.

孟浩然詩曰: ‘江淸月近人.’ 杜子美云: ‘江月去人只數尺.’ 羅大經以爲浩然渾涵, 子美精工. 余謂子美此句大不及浩然.

 

 

나대경이 두보의 시는 정교하다.”라고 평을 하였지만, 이수광은 두보의 시가 맹호연보다 못하다고 평을 하고 자세한 근거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대경의 평을 통하여 두보의 시가 원만함과 함축성 측면에서 맹호연의 시보다 못하다고 보고 있음을 추리해볼 수 있다.

 

 

강서시보단 두보시

 

다음은 강서시파의 한 사람인 진여의(陳與義)의 시와 두보 시를 비교하여 그 우열을 논한 부분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에 나온다.

 

 

진여의(陳與義)의 시에 만 리를 와서 노닐면서 도리어 먼 곳을 바라보려고, 삼년 동안 어려움도 많았거니, 다시 위태한 곳에 기대어 섰네.”라고 한 것이 있다. 나는 이 시구를 매우 좋아한다.

두시에 말하기를 만 리에 가을이 슬프다. 이 몸은 항상 나그네 되어, 백년에 병 많은 몸 홀로 누대에 오른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여의의 이 글귀가 오로지 두보 시에서 나온 것을 알겠다. 그러나 두보시가 더 좋다.

簡齋詩萬里來游還望遠, 三年多難更憑危.’ 余常喜之.

杜詩云: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乃知簡齋此句專出於杜, 而杜尤佳矣.

 

 

이수광은 두 시를 모두 좋아하면서도 두보의 시가 더 좋다고 하였는데 이는 두보의 시가 대구적(對句的) 측면에서 더 조화롭고 시의적(詩意的) 측면에서 만리타향의 객수(客愁)를 보다 함축으로 표현하여 긴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광은 두보시의 음률미와 함축미를 높이 평가하여 송시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두보 악양루시가 부족한 점

 

이수광은 두보 시의 뛰어난 점만 논하지 않고 부족한 점에 대하여서도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에서 논하였다.

 

 

두보(杜甫)악양루시는 고금에 뛰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친한 벗에게선 한 글자의 서신도 없고, 늙고 병든 몸은 외로운 배를 타고 있네.”라고 한 글귀는 윗글귀와 서로 연속이 되지 않고 또 악양루와는 글이 서로 걸맞지 않는다.

진여의(陳與義)악양루시 또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다만 주렴과 깃발은 움직이지 않는데 석양은 더디다.”라고 한 것은 어구가 빈약한 것 같고, 등림(登臨, 올라 굽어보니)”이니, “사의(徙倚, 배회하다)”빙위(憑危, 난간에 기댄다)”니 한 말들과 석양(夕陽)”이니 욕모(欲暮, 저물려 한다)”느니 한 말들을 쓴 것은 중첩인 것 같다.

杜子美岳陽樓, 古今絶唱,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與上句不屬, 且於岳陽樓不相稱.

陳簡齋岳陽樓, 人亦膾炙, 簾旌不動夕陽遲’, 語句似餒. 登臨徙倚憑危夕陽欲暮等語似疊.

 

 

위의 문장에서는 두보시의 장법에 대하여 악양루시를 예로 들어서 의미상 상하구(上下句)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시제(詩題)하고도 맞지 않다는 점을 비평하였다.

 

이상에서 이수광은 두보시의 표현의 정확성, 음률미와 함축미를 높이 평가하고 표현의 중첩성에 대하여는 비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수광, 이백와 황정견의 시를 비교하다

 

 

이수광이백 시에 대하여서도 많은 평을 하였는데 주로 표현의 자연스러움, 시법, 시구의 원류위의 책, 2권의 芝峯類說, 191, “喬知之詩曰: ‘草綠鴛鴦殿, 花紅翡翠樓.’ 按李白詩水綠南薰殿, 花紅北闕樓.’; 玉樓巢翡翠, 金殿鎖鴛鴦.’ 蓋出於喬矣.”, 시구의 주석, 인품과 시품의 관계, 습작문제, 정확성 문제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백의 악부에 말하기를 홀로 물속의 진흙을 거르려하나 물은 깊은데 달을 볼 수 없네. 보지 않아도 달은 그냥 있겠지만, 물이 깊어서 행인이 빠지겠네.”라고 하였다. 이 사의 구법은 희롱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있어서 기뻐할 만하다.

산곡 황정견이 이것을 본받아짓기를 돌은 내가 너무 좋아하니, 소로 하여금 거기에 뿔을 갈지 말게 하라. 소가 뿔을 가니 뿔은 오히려 좋겠지만, 소가 싸우면 나의 대나무를 상하겠구나.”하니 사람들이 잘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사랑한 것은 돌과 대나무뿐이다. 비록 시격(시의 형식)은 같으나 마음 쓰는 것이 서로 멀기가 이와 같다. 그들의 높고 낮음을 구분할 수 있다.

李白樂府曰: ‘獨漉水中泥, 水深不見月. 不見月尚可, 水深行人沒.’ 此詞句法出於戲語, 而自愛人之意, 爲可喜耳.

山谷效之曰: ‘石吾甚愛之, 勿使牛礪角. 牛礪角尚可, 牛鬪傷我竹.’ 人以爲佳.

然所愛者, 石與竹耳. 詩格雖同, 而用意相遠如此, 此可辨其高下矣.

 

 

이백과 황산곡의 시를 비교하였는데 두 시인이 시격(詩格, 시의 형식)은 비슷하지만 시의(詩意)는 이백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는 황산곡의 환골탈태법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01, 344, “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規模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의 한계를 비판한 것으로 황산곡이 이전의 형식은 잘 습득하였으나 시의(詩意)를 체득하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당시의 뛰어남과 송시의 한계를 시구분석을 통하여 전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송풍의 모방을 비판하다

 

이수광은 또한 소식과 황정견의 시에 대해서도 시의 자구선택, 시구의 정확성, 구법과 대구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하여 평하고 있다. 우선 소식의 시의 자구 선택문제에 대한 평을 보도록 하자.

 

 

당나라 유가(劉駕)조행(早行)시에 이르기를 말 위에서 남은 꿈을 계속 꾸다가, 말이 울 때마다 다시 놀란다.”라고 하였다.

소식이 이것을 모방하여 말하기를 말 위에 서 우뚝 남은 꿈을 꾸다, 아침 해가 올라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 자세히 음미하여 보면 잘됨과 졸렬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리고 동파의 올잔몽(兀殘夢)”이라고 한 ()”자를 후인이 나무라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唐劉駕早行詩云: ‘馬上續殘夢, 馬嘶時復驚.’

東坡效之曰: ‘馬上兀殘夢, 不知朝日昇.……

細味之, 工拙自見. 兀殘夢, 後人有譏之者, 是矣.

 

 

유가(劉駕)의 시와 소식이 모방하여 지은 시를 들어 비교함으로써 시의 우열을 평가하고 송시에 나타나는 모방하여 시를 짓는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소식 시의 자구 선택이 정확하지 못함을 비평하였다.

 

 

송풍의 산문화를 비판하다

 

소동파의 시에 이르기를 그대들은 유독 그 맛을 알지 못하니, 내가 이제 다시 맞춰 보겠네.’라고 하였다. 예전부터 기묘한 대구로 여긴다. 이것을 사륙문의 짝수 대구로 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시에 쓰는 것은 구법이 속된 것 같고 자연스러운 성정 표현도 또한 얕다. 당나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글귀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東坡詩曰: ‘公獨未知其趣耳, 臣今時復一中之.’ 古今以爲奇對.

然此爲四六偶對則好矣, 用之於詩, 則句法似俗, 而天機亦淺; 唐詩則必亦不如是作句矣.

 

 

이 부분은 소식 시의 산문적 성격을 비평한 것으로 송시 특징 중의 하나인 시의 산문화 문제를 비평한 것으로 이수광이 송시(宋詩)가 당시(唐詩)만 못한 이유로 본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황정견에 대해서는 시의 자구선택, 습작문제에 대하여 비평을 가하였다. 시의 자구문제에서는 악양종괴파서(樂羊終愧巴西)’라는 시구 중에서 진서파(秦西巴)’는 사람이름인데 이것을 거꾸로 파서(巴西)’라고 쓴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비평하였다위의 책, 2권의 芝峯類說, 102, “山谷詩: ‘樂羊終愧巴西.’ 按秦西, 巴人, 姓名倒作巴西, 則未穩.”. 습작문제에 있어서는 황정견이 왕유의 연지행(燕支行)을 모방하여 지은 것에 대하여 비평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유의 시에 칼을 뽑아서 천교의 팔을 베고, 돌아오는 안장 위에서는 함께 월지의 두개골로 술을 마셨네.”라고 하였다.

산곡이 이것을 습용하여, “장막 속에서 흉노의 팔을 베고, 군대의 앞에서 다시 월지의 두개골로 술을 마신다.”라고 하였다. 악중(幄中)과 군전(軍前)이라는 네 글자만을 바꿨으나 우열이 스스로 판이하다.

산곡의 시에 또, “돌아오는 안장에 월지를 거꾸로 달았네.”라고 한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王維詩: ‘拔劍已斷天驕臂, 歸鞍共飮月支頭.’

山谷用之曰: ‘幄中已斷匈奴臂, 軍前更飮月支頭.’ 只換幄中’‘軍前四字, 而優劣判矣.

山谷詩又曰: ‘歸鞍懸月支.’ 則尤不成語矣.

 

 

이는 황산곡의 환골탈태법의 한계를 비판한 것으로 시의(詩意)는 그대로 취하고 자구(字句)만을 바꾸어 자신의 뜻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시가 지어진 전체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자구만 바꿀 때의 시의의 졸렬함을 지적한 것이다.

 

 

존당파는 당시엔 소소한 비평을 가했지만 송시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다

 

지금까지 존당파(尊唐派) 문인(文人)들의 이백두보,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평론을 살펴보았다. 그 논의를 종합해 보면, 대부분의 문인들은 이백과 두보에 대하여서는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잘못된 점에 대하여서는 과감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비평을 가하였다. 그 중 이백시의 뛰어난 점은 내용적 측면에서는 시의(詩意)의 풍부함, 표현적 측면에서는 자연(自然)스러움, 풍격의 측면에서는 표일(飄逸), 준일(俊逸), 고창(高暢) 등이다. 두보시의 뛰어난 점은 내용적 측면에서는 성정(性情)의 표현, 표현적 측면에서는 사의(詞意, 함축적 표현), 정확성, 조탁미, 풍격의 측면에서는 기일(奇逸), 침웅(沈雄) 등이라고 하였다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두보는 이백의 표일(飄逸)함을 할 수가 없고, 이백은 두보의 침울(沈鬱)함을 할 수가 없다[子美不能爲太白之飄逸, 太白不能爲子美之沈鬱].”라고 하였는데, 이를 본문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이백에 대한 풍격으로 표일(飄逸)은 동일하고 두보 시의 풍격에 대하여는 침웅(沈雄)과 침울(沈鬱)이라고 하여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은 한국시화에서는 두보 시의 웅장한 풍격을 추가한 점이다..

 

반면에 존당파 문인들의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평은 소식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당시(唐詩)가 우위에 있음을 전제로 하여 소식시의 훌륭함을 논하였고 황정견에 대한 평에 있어서는 강서시파의 병폐로 알려진 환골탈태법에 대하여 비평을 가하였으며, 송시의 폐단으로 의론으로 시를 지었다는 비평은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지적되었다. 따라서 이백과 두보에 대한 비평은 존당의 관점에서의 비평이기 때문에 옥의 티를 찾아내는 소소한 것에 대한 비평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비평은 존당의 관점에서 송시의 특징이자 당시에 비교되는 상대적 약점을 비평한 것으로 근본적인 큰 문제에 대한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한국시화(韓國詩話)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評論硏究)두보, 소식과 황정견에 대한 비평을 살펴보도록 한다.

 

당시는 아무 생각 없이 베끼는 게 문제가 된다. 

 

 

인용

목차 / 지도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2. 한국시화(韓國詩話)의 당송시(唐宋詩)에 대한 총론(總論)

3.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의 이백, 두보, 소식, 황정견 평론(評論)

2) 존송파의 이백, 두보, 소식, 황정견 평론(評論)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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